순수문학 단체 九人會[편집]
구인회는 1933년 8월, 당시 문단의 중견작가라 할 수 있는 사람 아홉명이 모여서 만들어진 문학 친목단체였다.
창립멤버로는 김기림·이효석·이종명·김유영·유치진·조용만·이태준·정지용·이무영이 있었으며 이후 이종명·김유영·이효석이 탈퇴하고 대신 박태원·이상·박팔양이 새로 들어왔으며, 그뒤 유치진·조용만 대신에 김유정·김환태로 바뀌었으나 회원수는 항상 9명이었다.
사실 구인회는 문학 친목단체를 내세우면서 활동하고 있었으나 1930년대 초반, 경향문학(카프)에 대한 일제의 탄압[1]을 목도하고 민족주의 문학의 퇴조를 지켜보던 과정에서 문학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을 요구하던 것이 구인회 전체의 목적이 된 듯하다. 구인회의 멤버들은 그 방향성을 모더니즘에서 찾은 듯하며 이는 당시 시대의 흐름상 근대 문명의 유입을 직접 목도하고 이를 영위할 수 있었던 때문이라 하겠다.
당시 구인회 멤버들의 활동 결과를 지켜보자면 예술의 독자성을 옹호하며 기법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고, 실용성을 중심에 놓는 중산층의 물신숭배적 가치척도를 혐오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보편적 측면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화의 결과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대 사회의 해체현상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서구의 모더니즘과는 달리 문명화 - 물질화에 대한 지향, 예술적 세련됨을 부린 문학을 통하여 근대성을 추구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는 서양의 그것과는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2] 이들의 모더니즘 문학 활동은 위에서 상기한 것처럼 당시 서양의 모더니즘의 흐름과는 차이가 났으며 서양의 모더니즘과 유사한 활동이 일어난 것은 후기 모더니즘, 즉 1950년대 후반이었다.
...라고 어렵게 써놨는데 1920년대 서양의 모더니즘 운동이 근대적 감수성을 추구하면서도 자본주의를 비판하였다면 1930년대의 식민지 조선의 모더니즘 운동은 근대화에 대한 환상과 (특히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 등을 주로 드러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들의 활동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고[3] 3~4년만의 활동을 보여주었기에 안타깝다고 말할만하나, 1937년부터 무슨 일이 생겼고, 이로 인해 촉발된 일들을 생각해보면 더 활동하려 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구인회의 창립멤버였던 김기림이 구인회가 해체되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 발표한 시 <바다와 나비>에서 30년대 초반, 모더니즘 지식인들이 가졌던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과 좌절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창립멤버로는 김기림·이효석·이종명·김유영·유치진·조용만·이태준·정지용·이무영이 있었으며 이후 이종명·김유영·이효석이 탈퇴하고 대신 박태원·이상·박팔양이 새로 들어왔으며, 그뒤 유치진·조용만 대신에 김유정·김환태로 바뀌었으나 회원수는 항상 9명이었다.
사실 구인회는 문학 친목단체를 내세우면서 활동하고 있었으나 1930년대 초반, 경향문학(카프)에 대한 일제의 탄압[1]을 목도하고 민족주의 문학의 퇴조를 지켜보던 과정에서 문학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을 요구하던 것이 구인회 전체의 목적이 된 듯하다. 구인회의 멤버들은 그 방향성을 모더니즘에서 찾은 듯하며 이는 당시 시대의 흐름상 근대 문명의 유입을 직접 목도하고 이를 영위할 수 있었던 때문이라 하겠다.
당시 구인회 멤버들의 활동 결과를 지켜보자면 예술의 독자성을 옹호하며 기법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고, 실용성을 중심에 놓는 중산층의 물신숭배적 가치척도를 혐오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보편적 측면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화의 결과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대 사회의 해체현상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서구의 모더니즘과는 달리 문명화 - 물질화에 대한 지향, 예술적 세련됨을 부린 문학을 통하여 근대성을 추구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는 서양의 그것과는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2] 이들의 모더니즘 문학 활동은 위에서 상기한 것처럼 당시 서양의 모더니즘의 흐름과는 차이가 났으며 서양의 모더니즘과 유사한 활동이 일어난 것은 후기 모더니즘, 즉 1950년대 후반이었다.
...라고 어렵게 써놨는데 1920년대 서양의 모더니즘 운동이 근대적 감수성을 추구하면서도 자본주의를 비판하였다면 1930년대의 식민지 조선의 모더니즘 운동은 근대화에 대한 환상과 (특히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 등을 주로 드러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들의 활동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고[3] 3~4년만의 활동을 보여주었기에 안타깝다고 말할만하나, 1937년부터 무슨 일이 생겼고, 이로 인해 촉발된 일들을 생각해보면 더 활동하려 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구인회의 창립멤버였던 김기림이 구인회가 해체되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 발표한 시 <바다와 나비>에서 30년대 초반, 모더니즘 지식인들이 가졌던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과 좌절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진기행의 환상적 공간구조/명형대 (0) | 2020.02.13 |
---|---|
미당 시학의 변천고/ 박철석 (0) | 2020.02.13 |
동양주의 담론에 대응하는 이효석의 ‘서구’표상과 댄디로서의 조선문학/김건형.육사 (0) | 2020.01.31 |
李奎報와 陶淵明 詩의 比較文學的 考察/김주순.대구카대 (0) | 2020.01.26 |
전후 여성 지식인의 표상과 존재방식- 박경리의 『표류도』론/김양선.한림대 (0) | 2020.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