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영렬>
요문원은 1976년 10월 6일 체포되었다. 1981년, 그는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유기징역20년형을 받는다. 그러므로 형기만료일은 1996년 10월 6일이다.
관련기관의 동의를 받아 필자는 일찌기 상하이의 요문원의 집을 찾아가서 김영을 만난 적이 있다. 요문원이 체포된 후, 그의 처인 김영은 상하이로 돌아간다. 그녀는 더 이상 캉핑로(康平路) 중공상하이시위 기관숙사에서 살지 못하고, 상하이시 동남쪽 구석진 곳에 살고 있었다. 나는 주소를 가지고 아주 평범한 민가를 찾아냈는데, 그녀는 2층의 한칸에 살고 있었다.
여름의 한낮. 두시 반. 나는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준 것은 요문원의 셋째딸이었다. 그녀는 고등학생이었고, 등교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모친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나를 데리고 자그마한 주방을 지나 침실로 걸어들어갔다. 주방에는 잘 익힌 게가 한 그릇 놓여 있었다.
김영은 낮참을 자고 막 일어난 참이었다. 뺨에는 침석(枕席)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는 둘째딸, 셋째딸과 같이 살고 있었으며, 큰 딸은 이미 출가했었다. 그녀는 단발머리에, 얼굴색을 하얐고, 오른쪽 눈썹에 점이 하나 있었다. 소매가 짧의 커피색의 상의를 입고 있었다.
집은 두칸자리 였는데, 서재에는 책이 가득 쌓여 있었고, 침대위에는 죽석(竹席)이 깔려 있었으며 가구는 아주 간단했다. 나는 김영과 작은 바탁(方卓) 옆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방탁위에는 그날자 상해 <문회보>가 놓여 있었다.
김영은 계속하여 탄식을 하면서 몇번 통곡할 뻔한다. 그녀의 손은 계속하여 방탁에 깔려 있는 유리판의 변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일찌감치 원래의 직장에서 일을 하지 않고, 별볼일 없는 직장으로 옮겨야 했다. 그것도 이름만 걸어놓은 것이고, 출근은 하지 않고, 장기간 병가를 내고 집에 있었다.
그녀는 거의 외출하지 않았으며, 요문원의 판결이 내려진 후, 일찌기 허가를 받고 북경 진성감옥(秦城監獄)으로 면회를 가서 요문원을 면회하기도 했다. 김영의 기억으로, 1976년 10월 6일 저녁, 요문원이 북경에서 집을 떠날 때, 모자도 쓰지 못했었다. 김영이 모자를 들고 쫓아갔을 때 요문원은 이미 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김영은 1933년 4월 28일생이고 향년 63세였다. 그녀의 묘는 요문원이 감옥에서 나온 후인 1997년 7월에 만들어졌다. 위에는 "자모김영지묘(慈母金英之墓)"라고 쓰여 있고 아래에는 번체자로 "녀금홍여군계홍서호기은위규장손영정목춘빙초금성(女金虹麗群繼紅婿浩岐殷偉圭章孫潁婷沐春氷聰金星)"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의 눈을 가리기 위해, 딸들은 이름만 쓰고 성인 "요(姚)"는 표시하지 않았다.
묘비는 검은색 대리석인데, 정면에는 네개의 금으로 글자를 새겼다: "진리진정(眞理眞情)" 뒤에는 <접련화(蝶戀花)> 사(詞)를 새겨 놓았다. 비록 작자의 이름을 써놓지는 않았지만, 사의 내용으로 보아 요문원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송충혼회대지(遙送忠魂回大地)
진리진정(眞理眞情)
파아심도기(把我心濤寄)
비영유유일월리(碑影悠悠日月裏)
차생영계장상억(此生永繫長相憶)
벽초침침수적적(碧草沉沉水寂寂)
만만신산(漫漫辛酸)
수해기중의(誰解其中意)
불개초충상(不改初衷常)
역력년년(歷歷年年)
화작동심제(化作同心祭)
사의 내용을 보면, 요문원이 처의 묘비에 새기기 위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묘비의 정면에 새긴 '진리진정'은 바로 이 사에 나오는 글이다.
요문원은 과거에 유사한 순구류(順口溜)식의 시를 쓴 적이 있다. 이 <접련화>는 그가 만년에 정성을 들여서 쓴 작품이다. 사에서연 '유유' '침침' '적적' '만만' '역력' '년년"이라는 여섯개의 첩어를 연이어 썼다. 사의 의미는 은회(隱晦)하다. '만만신산, 수해기중의'(끝없는 신산, 누가 그 의미를 알 것인가?) 그리고 화룡점정은 바로 '불개초충' '진리진정'이다. 이것은 그가 생명의 끝까지, 그가 스스로 인정하는 '진리'를 끝까지 지키고 '불개초충' (원래의 뜻을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닌가?
묘지의 책임자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그들은 당시 이것이 요문원의 처의 묘라는 것을 몰랐다. 더더구나 요문원이 병사한 후, 이 묘에 합장되었을 줄은 몰랐다. 그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요문원이 생전에 여러번 이 곳에 와서 처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1931년, 요문원은 작가의 집안에서 태어난다. 부친 요봉자(姚蓬子)는 시인이다. 소설도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외국문학작품도 번역했다. 요봉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다.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이 상하이에서 성립될 때, 요봉자는 잡행위원이었다. 그는 일찌기 정령(丁玲)과 함께 좌련의 정기간행물 <북두(北斗)>를 창간한 바 있다.
1932년, 요봉자는 1살짜리 요문원을 안고 노신(魯迅)의 집을 방문한다. 노신은 <증봉자(贈蓬子)라는 시를 써서 준다. 이는 요문원이 나중에 자우 얘기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 노신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요문원을 가슴아프게 하는 일이 발생한다. 부친 요봉자가 1933년 9월 천진에서 체포된 것이다. 그리고, 1934년 5월 14일 국민당중앙기관지 <중앙일보>에 <요봉자의 공산당탈당선언>을 발표한다. "과거의 잘못을 참회한 나머지, 나는 완전히 과거의 정치적 입장을 포기하고, 중국공산당을 탈당한다. 이후 삼민주의의 기치하에 서기로 결심했다...." 이후 요봉자는 작가서옥을 열어 생활한다.
상해 호신중학(滬新中學) 지하당지부서기 손지상(孫志尙), 모금룡(冒金龍)이 필자에게 얘기해준 바에 따르면, 1948년 10월 요문원은 호신중학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당시 요문원은 부친 요봉자가 "진보작가"이며 "노신전우"라고 밝혔다.
해방후, 요문원은 먼저 공청단 상해시 노만구공위 선전부 부부장을 맡고, 나중에 중국 상해시 노만구당위 선전부 이론교육과 과장이 된다.
요문원에 있어서, 1957년 6월 14일은 역사적이 날이다. 이 날, <인민일보>는 제1면에 편집부의 글 <문회보 1시간내의 자산계급방향>에서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언급한다: "아래에 전재한 문장은 6월 10일 분회보에 실렸고, 제목은 '녹이비고(錄以備考)'이다..." <인민일보>는 동시에 <녹이비고-독보우감(讀報偶感)>이라는 글을 전재한다.
<녹이비고-독보우감>을 누가 썼을까? 바로 요문원이다. <인민일보> 편집부의 글 <문회보 1시간내의 자산계급방향>은 모택동의 글이다. 모택동은 요문원이 상해 <문회보>에 발표한 잡분을 주목했을 뿐아니라, 그 글을 바탕으로 문회보의 '자산계급방향'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이렇게 되자 청년작가 요문원의 명성은 전국에 떨쳐진다. 일약 상해작가협회 당조구성원이 되고, '반우파'영도소조'의 성원이 된다.
1957년 6월 14일부터 연말까지. 짧은 반년만에, 요문원은 50여편의 '반우파' 문장을 발표하는데 거의 3일에 1편꼴이다. 요문원은 '우파분자' 시칩존(施蟄存), 서무용(徐懋庸), 허걸(許傑), 유사하(流沙河), 왕몽(王蒙), 등우매(鄧友梅), 유소당(劉紹棠), 육문부(陸文夫), 서중옥(徐中玉)...등을 비판한다. 일시에 요문원은 '몽둥이(棍子)'라는 별명을 얻는다.
1958년이 되어 요문워는 '몽둥이'에서 '악곤(惡棍)'으로 변신한다. 이 27살짜리 '문단의 신인'은 비판의 날을 문단의 노장들에게 향한다. 파금(巴金)을 반박하고, 풍설봉(馮雪峰)을 비판하고, 애청(艾靑)과 싸우고, 정령(丁玲)을 욕한다....
요문원의 '몽둥이질'은 중공 상해시위 제1서기 가경시(柯慶施), 시위상위 장춘교(張春橋)의 주목을 받는다.
1963년초, 북경에서 온 '여자손님' 강청(江靑)이 조용히 남하한다. 강청은 상해를 기지로 하여, '현대경극'(나중의 양판희(樣板戱))을 만든다. 그리고 당시 가경시는 '대사십삼년(大寫十三年)'을 제기하여, 강청과 의기투합한다. 강청은 명확하게 가경시, 장춘교에게 '나는 '대사십삼년'을 지지한다. 내가 상해로 오니, 아주 친절하게 느껴진다. 상해의 분위기는 북경보다 훨씬 좋다. 나는 상해를 '기지'로 삼겠다" 장춘교는 가경시에 의해 파견되어 강청을 도와 '기지'를 만들고, <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을 잡고, <해항(海港)>을 잡는다.
요문원은 '대사십삼년'의 열열한 고취수(鼓吹手)가 된다. 1964년 3월, 그는 각각 <수확>과 <홍기>잡지에 두 편의 장문을 발표하여, 가경시, 장춘교의 의도를 관철한다: <최신의 가장 아름다운 생활을 반영하여, 최신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창조하자 - 현대극의 약간문제에 관한 연구>, <혁명의 청년세대가 성장한다 - 화극 '젊은 세대'를 평하다>
'여자손님'은 상해의 이 '기지'에 아주 만족한다. 1965년 설날이 지나자마자 상해로 다시 온다. 이번에, 요문원은 장춘교를 찾아가서 중요한 '대비판' 문장을 완성한다. 그리고 장춘교는 그녀에게 요문원을 추천한다. 요문원은 자전거를 타고 상해 금강(錦江)호텔로 간다. 그리하여, 강청, 장춘교, 요문원은 이곳에서 여러번 비밀리에 토론하며 그 '중량급'의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를 쓴다. 강청이 나중에 자랑한 것처럼, "장춘교동지, 요문원동지는 이 큰 리스크를 안고 비밀을 유지하며...."
1965년 11월 10일,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하다>는 상해 문회보에 발표되어, 전국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이 글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게 된다. 이때부터 요문원은 '무산계급의 황금몽둥이(金棍子)'가 된다. 강청이 끌어주어 '중앙문혁소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요문원은 연이어 장문을 발표한다. <'삼가촌'을 평한다 - 연산야화, 삼가촌찰기의 반도본질>에서 북경시위서기 등탁(鄧拓)을 비판한다; <반혁명양면파 주양(周揚)을 평하다>에서 중공중앙 선전부 부부장 주양을 비판한다; <도주(陶鑄)의 두권의 책을 평하다>에서 중공중앙 정치국 상임위원 도주를 비판한다;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하다>와 합쳐서 이 "4평(四評)'은 요문원이 고위층에 진입하는 반석이 되는 작품들이다. 요문원은 상해혁명위원회 부주임이 된다. 주임은 장춘교이다. 1969년 4월, 중국공산당제9기 1중전회에서 요문원은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 된다.
1970년 8월, 진백달(陳伯達)이 여산회의에서 쫓겨난 후, 요문원은 그의 자리를 맡아 전국의 '여론총관'이 된다.
1973년, 왕홍문(王洪文)이 중공중앙 부주석에 당선되면서,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은 중공중앙정치국내에서 '사인방'을 결성하게 된다. '사인방'은 '사결합(四結合)'을 실행한다; 강청의 '기자(旗子)', 왕홍문의 '위자(位子)', 장춘교의 '점자(點子)', 요문원의 '필간자(筆杆子)'. 그들은 정치국내에서 주은래에 반대하고, 등소평에 반대하며, 일찌기 대권을 잡으면, 다음과 같이 업무를 나누기로 기획한다; 강청은 중공중앙주석, 장춘교는 국무원총리, 왕홍문은 전인대위원장, 요문원은 전국정협주석.
1976년 10월 6일, '십월혁명'이 발발하여 '사인방'은 감옥에 들어간다.
사인방중 처음 세상을 떠난 사람은 강청이다. 그녀는 1991년 5월 14일 새벽 자살한다. 향년 77세이다. 이어서 왕홍문이 1992년 8월 3일 간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향년 58세이다. 장춘교는 2005년 4월 21일 암으로 병사한다. 향년 88세이다. 그는 사인방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다.
요문원은 사인방 중에서 가장 늦게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장춘교가 병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05년 12월 23일, 요문원도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향년 74세였다.
요문원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은 그가 병사한 후 반달이 지나서 신화사에 의해 공개된다. 2006년 1월 6일, 신화사는 간단하게 요문원의 죽음을 보도한다.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사건의 주범 요문원이 당뇨병을 알아서, 2005년 12월 23일 병사해다. 요문원, 남, 74세. 1981년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유기징역20년, 정치권리박탈5년형을 선고받음. 1996년 10월 형기만료로 석방됨"
홍콩매체는 이렇게 보도한다:
"신화사의 이 소식은 요문원의 유일한 공식 부고이다. 그러나 홍콩 대만의 신문잡지와 외국매체에서는 여러번 보도했다. 일찌기 '사인방'의 구성원에 관한 전기를 하나하나 쓰고 있던 모 상해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신화사의 소식이 나온 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타임즈>등 7,8개 매체에서 모두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국내매체로부터의 인터뷰전화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그는 공식 부고의 발표는 특별히 금요일 오후시간을 선택해서 내보냈다. 왜냐하면 그후로 이틀간 휴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국내외매체의 주목을 끌지 않으려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글에서 '일찌기 '사인방의 구성원에 관한 전기를 하나하나 쓰고 있던 모 상해작가'는 바로 본인을 가리킨다.
요문원의 죽음은 '사인방'의 흥망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인방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사인방'이 중국인민에게 초래한 심중한 재난은 영원히 반성해야 한ㄴ다. '문혁'의 심각한 교훈은 영원히 기록되어야 한다.
<나무위키>
1931년 절강성 소흥시에서 좌익작가 야오펑쯔의 아들로 태어났다. 야오원위안의 아버지인 야오펑쯔는 시인으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1930년에 상하이에서 좌익작가연맹을 설립하고 집행위원을 맡은 거물 인사였다. 1931년에 야오원위안이 태어나자 야오펑쯔는 한살이 된 야오원위안을 데리고 루쉰을 찾아가 문안을 드린 적이 있는데 야오원위안은 이를 두고 자신이 루쉰을 만난 적이 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1933년 12월, 야오펑쯔가 톈진에서 체포되었다. 야오펑쯔는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중앙일보에 <야오펑쯔, 공산당 탈당 선언>이라는 전향서를 쓰고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며 지난날의 정치적 입장을 버리고 공산당을 탈당해 삼민주의 기치 아래 서기로 결정했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8년 10월, 후신고등학교에 다니던 야오원위안은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공청단 상하이시 루완구 노조위원회 선전부 부부장, 루완구 당위원회 선전부 교육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공산당원의 길을 걸었고 이 시기부터 여러 집필활동을 하였으며 1955년에는 후펑 타도 운동에 참가했다. 야오원위안이 유명해진 것은 1957년 2월 6일, 문회보에 <교조와 원칙 -야오쉐인 선생과의 토론>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야오쉐인은 마오쩌둥의 총애를 받던 문단 원로 작가였는데 겨우 26세의 야오원위안은 야오쉐인에게 문예창작 방법에 대해 도전을 한 것이었다. 또한 야오원위안은 6월 10일 문회보에 <녹이비고도복우감>이란 글을 발표, 문회보의 편집방법이 잘못됐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야오원위안의 글을 보고 감탄하여 그 글을 인민일보에 전재할 것을 지시, 6월 14일 야오원위안의 글이 인민일보에 실리게 되었다. 덕분에 야오원위안은 반우파 투쟁의 영웅으로 등극하여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후 해방일보 편집위원, 잡지 맹아의 편집위원 등을 하며 상하이의 대표적인 문예 평론가이자 언론인이 되었다.
이후 야오원위안은 극좌적 입장에서 문단의 원로들을 닥치는대로 공격하는 사냥견과도 같은 인물이 되어 류사허, 쉬마오궁, 펑쉐펑, 아이칭, 바진, 딩링 등 문단의 원로 작가들에게 닥치는대로 공격을 퍼부었고 이 때문에 몽둥이란 뜻의 곤자라는 별명이 붙었고 베이징에 리시판이 있다면 상하이에는 야오원위안이 있다는 뜻인 북이남요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65년 5월, 루완구 공위 선전부부장이자 해방일보 편집위원 겸 문예부주임을 맡고 있던 야오원위안은 장칭의 호출을 받게 된다. 장칭은 베이징 부시장이자 역사학자인 우한이 쓴 <해서파관>이라는 경극이 개인경작을 선호하는 <단간풍>의 배후에 있다고 지목하면서 비판하기 위한 문장가를 찾고 있었다. 장칭은 원래 베이징의 문장가인 리시판을 찾아갔으나 리시판이 장칭의 주장을 억지로 여겨 들어주지 않자 상하이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상하이 시장이자 극좌파인 커칭스는 자신의 정치비서 출신이며 상하이 문교서기인 장춘차오에게 야오원위안을 장칭에게 소개시켜주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만나게 된 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3인은 <암탉 한마디와 병아리 두마리>로 불리는 조직을 결성, 펑전 공격을 위한 포문을 준비하게 되었다. 장칭은 1965년 마오쩌둥이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야오원위안을 마오쩌둥에게 소개하는 등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965년 여름, 야오원위안은 해방일보에 논문을 써야 한다면서 부편집장에 말한 후 병을 핑계로 휴가를 요청하여 요양원에 칩거, 해서파관을 공격하는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의 집필에 들어갔다. 11월에 집필과 마오쩌둥의 검수까지 완료한 야오원위안은 11월 10일자 문회보와 11월 12일자 해방일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를 발표했다. 야오원위안은 대약진 운동 실패 이후 중국 곳곳에서 몰아닥치는 '우익적 풍조', 즉 개인경작을 선호하는 '단간풍'과 루산회의에서 실각한 펑더화이를 복권시켜야 한다는 '번안풍'이 우한이 지주 계급 국가를 미화하고 혁명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계급 조화론을 설파했기 때문이라면서 해서파관을 독초로 맹비난했다
1961년은 바로 우리나라가 잇따라 3년 자연재해로 잠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제국주의, 가국의 반동파와 현대 수정주의가 반중국 분위기를 고조시킨 상황에서 우귀사신들이 '단간풍'과 '번안풍'을 불어댔다. 그들은 단간의 우월성의 바람을 불어대며 경제회복과 퇴전을 요구했다. 이것은 바로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지주와 부농의 죄악통치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무슨 말도 안되는 '평원옥'을 내세워 그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려 무산계급 전정에 대항하기를 바란다. 그들을 위해 불평을 감싸 안고, 그들을 위해 번안을 해 다시 집정하게 하려고 한다. 단간풍, 번안풍, 퇴전, 평원옥은 바로 당시 자산계급이 무산계급의 독재와 사회주의 혁명투쟁의 초점을 반대한 것이다. <해서파관>은 이런 계급투쟁 형식의 반영이다. <해서파관>은 향기를 풍기는 향화가 아니라 하나의 독초다. |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하다>의 일부 |
베이징 시장 펑전은 이를 학술논쟁이며 지방지에 실린 한 의견일 뿐이라며 축소하려 했지만 야오원위안의 배후에 있던 마오쩌둥이 야오원위안을 지원사격함에 따라 인민일보에도 게재되었으며 화동국 서기 웨이원보의 조력으로 산동성과 강소성의 신화일보, 복건일보, 안휘일보, 강서일보 등에도 속속 게재되었다.
해서파관이 일으킨 돌풍은 급기야 1966년 5.16 사건을 통해 베이징 시장 펑전, 정치국 후보위원 루딩이, 부총리 겸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뤄루이칭, 중공중앙 판공청 주임 양상쿤 등이 반당집단으로 몰려 참혹하게 숙청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은 기존의 문화혁명 오인소조를 해체하고 새롭게 중앙문화혁명소조를 결성하라고 지시했고 정치국의 결의에 따라 천보다를 소조장으로 하는 중앙문혁소조가 성립되었다. 부소조장은 장칭이 맡았고 장춘차오의 천거로 문혁소조에 합류하게 된 야오원위안은 캉성, 장춘차오와 함께 소조 고문이 됨에 따라 문화대혁명의 최고 지도부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후 상하이시 위원회 제2서기로 임명되었으며 장칭을 원조하여 장칭의 적을 광대들이라고 부르며 맹렬하게 비난했다.
1966년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이 몰아닥치면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비참하게 실각했고 전국각지에서 홍위병이 결성되었다. 야오원위안은 경제위기 해결을 위해 비정규적 도입을 실시한 노동부장 리리싼을 난타하여 자살하게 만들었으며 1966년 11월 상하이 방직공장의 젊은 노동자인 왕훙원이 상하이 노동자 혁명 조반 총사령부, 약칭 공총사를 설립하여 과격한 대자보를 붙이고 안팅역을 점령하여 철로 운행을 30시간이나 중지시키는 만행을 저지르자 이를 크게 혁명적 행동이라 크게 칭찬했다.
1967년 1월에 야오원위안은 장춘차오와 함께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을 일으켜 상하이 코뮌을 수립하는 등 1967년부터 본격화된 탈권현상의 시초가 되었다. 하지만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은 마오쩌둥의 재가를 받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마오쩌둥으로부터 그렇게 되면 나라 이름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화코뮌으로 바꿔야 하나?란 비아냥을 듣는 등 결과가 좋지 않았다. 이 일로 천보다, 장칭이 마오쩌둥의 큰 질책을 듣게 되자 군원로들이 2월 역류를 일으켜 문혁소조를 무력화하려 했으나 야오원위안은 장춘차오, 왕리 등과 함께 군 원로들의 저항에 대해 장칭에게 보고했고 장칭은 가장 과격했던 천이의 주장을 지목하며 군 원로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마오쩌둥을 부추겼다. 이에 마오쩌둥이 문혁소조가 잘한 것이 97%라고 옹호하면서 거꾸로 군원로들이 실각했다. 2월 역류 이후 1967년 가을,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고 장춘차오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9차 당대회 소집준비사업과 소집 기간 등의 문제를 조사하였다.
그러다가 1967년 7월, 7.20 사건이 터져 쉬샹첸 등에게도 책임이 추궁되고 주더까지 난타를 당하는 등 군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문혁소조는 홍위병들에게 인민해방군으로부터 무기를 탈취하라면서 전면적 내전을 선동하는 등 권력의 절정을 달렸으나 1967년 8월, 탈권현상의 폭주가 심해져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이 일어나 중국의 외교적 지위가 추락하면서 중국은 혁명외교를 중단, 군부에 다시 힘을 실어주면서 안정화에 들어갔다. 1967년 11월, 야오원위안은 천보다와 함께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전진하자>를 집필하여 계속혁명론을 주장했지만 1968년 여름에 터진 광서성 유혈사태로 마오쩌둥이 격노하게 되면서 인민해방군이 나서서 홍위병들을 진압하게 되었다. 1968년 5월 야오원위안은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문서에서 계급대오 정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1968년 10월 중공중앙 8기 12중전회에서 공식용어로 채택되었고 문화대혁명은 공식적으론 종결되었다. 야오원위안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1968년 홍기 2호에 혁명은 학생들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논설을 발표하면서 홍위병들의 활동을 중단시켰고 상산하향 운동을 실시하여 홍위병들을 우루루 시골로 쫓아내버렸다.
1969년 4월 1일부터 4월 24일까지 열린 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 출석, 중앙위원회 위원 겸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린뱌오가 부주석이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자 장춘차오와 함께 린뱌오가 발표할 정치현안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중앙문혁소조의 주요 구성원들이 전부 정치국원이 되었으나 정치국에서 실무를 맡은 것은 캉성, 장칭 정도였으므로 중앙문혁소조의 발언권은 오히려 약해졌으며 1969년 9월에는 중앙문혁소조가 활동을 전면중단하였다. 1970년대부턴 린뱌오와 천보다의 연합이 내세우는 <천재론>에 맞서 경쟁했으며 1970년 8월 24일부터 9월 6일까지 강서성 루산에서 당중앙위원회 제9기 2차 전원회의가 열리자 국가주석직 부활을 주장하는 천보다 숙청에 가담했다. 1970년 11월 6일 중앙조직선전조가 조직되어 기존의 문혁소조를 대체하여 중앙조직부, 중앙당교, 인민일보사, 홍기사, 신화사 본사, 중앙라디오사업국, 광명일보사, 중앙편역국 등 중앙기관의 사업과 공회조직, 청년단조직, 부녀연합회조직 및 5.7간부학교를 관할하게 되자 캉성, 장춘차오, 장칭과 함께 조원이 되어 천보다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1971년 4월 15일부터 7월 31일까지 국무원 주최로 열린 전국교육사업회의에 출두, 8월 13일에 장춘차오와 함께 중공 건국 이후 17년 동안 마오쩌둥의 무산계급 교육 노선이 제대로 관철집행되지 않았으며 자산계급이 무산계급을 독재하고 신중국 건국 이후 양성된 대학생들의 세계관이 대체로 자산계급적이라고 평가한 <전국교육사업회의 요지>를 제출하여 중공중앙의 비준을 받았다.
그러다가 1971년, 마오쩌둥의 신임을 잃어가던 린뱌오와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가 571 공정이라 불리는 발악적인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후 외국으로 도주하다가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하는 9.13 사건이 일어났다. 대단한 충격을 받은 마오쩌둥은 총리인 저우언라이에게 실권을 주어 상황을 정돈하게 했으나 1972년 12월에 이르러 문화대혁명의 권위가 너무 약화되었다고 여겨 사실 린뱌오는 극좌주의자가 아니라 극우주의자라고 입장을 선회했다. 야오원위안은 이에 영합하여 1973년 인민일보, 해방군보, 홍기의 극좌주의 비판을 중단시키고 홍기에서 린뱌오의 표면적인 극좌현상만 가지고 본다면 급소를 명중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비판의 화살을 극좌주의에서 극우주의로 돌렸다.
1973년에 접어들면서 저우언라이가 실권하자 마오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던 장칭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또 잘생겨서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왕훙원을 중앙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함으로 공식적인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공인받으려고 했다. 야오원위안은 캉성, 장춘차오와 함께 이 작업을 원조하였다. 이에 마오쩌둥은 1972년 12월 28일 왕훙원을 후계자로 지목했고 1973년 8월 24일부터 8월 28일까지 열린 1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왕훙원에게 자신의 표를 대신 투표하게 하는 등 다시 문혁소조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야오원위안은 다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8월 28일의 2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73년 11월, 장칭은 저우언라이가 인민대회당과 베이징의 호텔 및 공공장소들을 불건전한 예술품과 가구로 장식하게 허용했다고 마구 비난했다. 이는 데탕트 분위기에 따라 구미의 외교관과 정치인들이 베이징을 방문하게 되자 저우언라이가 외교 수단의 일환으로 그들이 방문할만한 곳을 국제적인 감각에 따라 치장한 것이는데 장칭은 이를 두고 저우언라이가 반동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이때 야오원위안은 장칭의 명령에 따라 공작조를 조직하여 베이징 시내 곳곳의 '불건전한 예술품'을 조사했고 700여 점의 예술품과 장식품을 압수한 다음에 '혁명적' 예술품으로 대체했으며 압수한 물품 중 200여점으로 흑화 전시회를 열었다. 그외에도 1973년 여름 뮤지컬 영화 <정원사의 노래>를 보고 공산당원이 아닌 정원사가 학교 선생이 되었다는 점, 노래 가사에 '문화가 없이 어떻게 우리가 혁명의 큰 책임을 더맡을 수 있나요?'란 대목을 두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난했다.
1974년 1월,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를 현대판 공자라고 공격하면서 비림비공운동이 시작되었다. 홍기, 인민일보, 해방군보 등이 일제히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야오원위안은 1974년 4월에 1973년 10월에 있었던 헨리 키신저와의 회담에 있어서 저우언라이와 예젠잉이 우경적 오류를 범하여 주권을 상실하고 나라를 욕되게 한 회담을 벌이고 투항주의적 자세를 보였다고 맹비난하며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을 대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풍경호 선박 사건>을 일으켜 외국 선박을 구입하여 운송력을 증강시키려 하던 국무원의 결정을 비판하며 양노사상, 추종주의, 매판자산계급사상자들의 독재라고 비난했다. 여기에 마오쩌둥이 노쇠하자 그 뒤를 잇고자 했던 장칭의 난동으로 중국의 상황은 더욱 개판 오분전이 되었다. 장칭은 당과 군을 장악하려 했으며 방광암으로 죽어가던 저우언라이를 내쫓고 장춘차오를 총리로 삼으려 했다. 또한 덩샤오핑의 복권도 막으려 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부인의 행태에 불만을 가지고 더 이상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장칭은 듣지 않았다. 결국 마오쩌둥은 정치국 회의에서 분노를 터트리며 장칭, 왕훙원, 야오원위안, 장춘차오를 묶어 사인방이라 불렀으며 그들이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고 비난했다.
덴마크 총리 폴 하틀링과 접견한 후 마오쩌둥으로부터 레닌이 왜 자산계급에 대해 독재를 시행해야 한다고 했는지에 관한 글을 쓰라고 주문받자 1975년 3월 1일 <홍기> 3호에 <린뱌오 반당 집단의 사회적 토대>를 게재하여 린뱌오 집단의 출현은 우연이 아니며 심각한 사회계급적 토대가 있다고 지적, 전면적인 독재와 계속된 혁명을 주장했다. 1975년 9월에는 덩샤오핑의 정돈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수호지 필화사건을 일으켜 마오쩌둥이 수호지의 108호걸이 탐관오리만 반대하고 황제는 반대하지 않았으니 송강은 투항주의자이며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한 것을 들먹이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대대적인 추모 열풍이 중국을 휩쓸었는데 저우언라이를 싫어하던 사인방은 장례식을 간소화한다는 구실로 추모활동을 탄압했으며 추모활동의 언론보도를 금지했다. 또한 저우언라이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덩샤오핑을 타도하기 위해 '우경번안풍 반격'을 호소하며 당내 자산계급을 색출하자는 구실로 덩샤오핑을 맹렬히 공격하여 전국적인 반발을 샀다.
1976년 3월 28일, 난징에서 난징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저우언라이 추모식을 열었는데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호응하면서 "누군가 저우언라이를 반대하면 그를 타도할 것이다.", "대야심가, "대음모가 장춘차오를 타도하자."라고 표어를 붙히는 난징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에 놀란 야오원위안은 베이징에 난징 사건이 파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베이징의 정황에 주의를 돌리게 하는 한편 난징의 군중을 강제로 진압하게 했다. 1976년 4월 5일, 천안문에서 베이징의 시민들이 저우언라이 추모 집회를 열고 사인방의 추모 탄압에 대해 항의시위를 벌이자 인민일보사를 시켜 이를 불순분자들의 반혁명 폭동으로 왜곡보도하게 했으며 거짓자료를 수집하여 마오위안신을 통해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여 덩샤오핑의 2차 숙청을 일으켰다. 병석에 누워있던 마오쩌둥은 마오위안신에게 인민일보 기자들의 현장보도를 공개발표하는데 허용했는데 야오원위안의 조작으로 현장보도는 천안문 사태를 "현 시기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우경번안풍을 반격하는 큰 방향을 돌려세우려고 망령되게 시도했다고."고 비난했다.
마오의 죽음이 다가오면서 장칭의 행동이 너무 극단으로 치닫게 되자 야오원위안조차 장칭의 일부 행동에 대해서는 발을 빼기도 했지만 탕산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탕산 하나쯤 없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망언을 하는 등 덩샤오핑 비판에 열을 올렸으며 마오쩌둥 사망 직전인 1976년 8월 11일자 인민일보에도 '덩샤오핑을 깊이 있게 비판하며 지진에 대처하고 재해를 구조하자'라는 괴이한 사설이나 올리고 있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4인방과 국무원 총리 대리인 화궈펑, 예젠잉, 샤오징광을 비롯한 군부가 마오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9월 9일 마오쩌둥의 장례절차를 정하기 위해 소집된 정치국 회의에서 장칭은 덩샤오핑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고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이 동조했다. 하지만 당 부주석인 예젠잉이 가장 필요한 것은 화궈펑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선을 제압당했고 4인방도 화국봉을 중심으로 단결하자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후 4인방은 주요 안건에 대해 자신들에게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등 화궈펑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9월 16일, 인민일보에 마오쩌둥의 유언인 <천천히 하라, 서두를 것 없다, 과거의 방침에 비추어서 하라>가 발표되었고 야오원위안은 즉각 국영통신사인 신화사에 전화하여 국경절 보도에서 과거의 방침에서 비추어서 하라를 '기정 방침대로 하라'로 왜곡보도할 것을 지시했다.
9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마오쩌둥 추모대회에 참석한 야오원위안은 9월 19일 신화사에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각 성과 시에서 개최되는 추도회에 대해 언급할 때, 중요하게 강조할 것이 있다면 중복되어도 상관없다. 예를 들면 '기정 방침대로 하라'이다. 이 말이 강조되어 있다면 모두 보고하고 없다면 그와 비슷한 말이라도 집어넣도록 하라."
야오원위안은 9월 20일, 23일, 30일에도 잇달아 전화해 신화사의 다짐을 받아냈다. 이로 인하여 9월 말까지 인민일보 등 6개지에서 기정 방침대로 하라란 마오쩌둥의 유언을 선전한 기사가 236개 게재되어 마오쩌둥 추도회 관련 기사의 60%를 차지했다.
하지만 예젠잉, 샤오징광 등 군장성들이 화궈펑에게 4인방 체포를 강력히 제안하면서 화궈펑은 4인방 체포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1976년 10월 6일 오후 3시, 화궈펑과 얘기가 된 정치국원 왕둥싱이 중앙경위대 부주임 장요사에게 지시하여 8시 반에 장칭을 체포할 것을 지시했고 사인방의 나머지 인물들도 8시를 기해서 체포하도록 하였다. 장춘차오와 왕훙원이 먼저 체포되었고 야오원위안은 나타나지 않아 체포조가 자택을 급습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8시 15분, 야오원위안의 전용차가 회인당에 도착하였고 왕둥싱은 즉각 체포 명령을 내렸다. 야오원위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행동조에게 포위되었다. 야오원위안은 당황하여 측근들을 불렀지만 회인당 바깥에서 대기하던 측근들이 오지 못하여 체포되었다.[1] 야오원위안은 대기실로 연행되어 중앙 경호대 경호국 부국장으로부터[2] 격리심사를 통보받고 중난하이의 지하실에 수감되었으며 곧 베이징 친청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10월 12일, 정치국은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울 상하이에서 맡았던 당내외 직무로부터 해임했다. 상하이에선 4인방 지지자들이 무장봉기를 준비했으나 베이징은 상하이 출신 유력인사들을 현지에 보내 해산을 설득했고, 이들은 결국 해산했다. 이때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주목을 받은 인물들이 바로 나중에 주석을 지내는 장쩌민, 주룽지이다.
1976년 12월 10일, 인민일보는 야오원위안 천안문 사태에 관해 거짓 보도를 지시한 것에 대한 증거를 중앙에 제출하였으며 중공중앙은 이를 바탕으로 <왕훙원, 장춘차오, 장칭, 야오원위안 반당집단의 죄증>을 공산당 전체에 전달했다. 1977년 1월 야오원위안이 작성한 <린뱌오 반당집단의 사회적 토대를 논함>에 대해서도 비판이 행해졌다. 1977년 7월 16일부터 21일까지 소집된 당 중앙위원회 제10기 제3차 전원회의는 화궈펑을 중공중앙 주석, 중공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보궐 선거하고 왕훙원, 장춘차오, 장칭, 야오원위안을 반당 집단으로 결정하여 당에서 제명하고 당 내외 모든 직무를 취소시켰다.
체포 4년 후인 1980년 11월 2일, 야오원위안은 최고 인민 감찰원에 의해 최고인민특별법정에 기소되었다. 재판정에 끌려나온 야오원위안은 재판정에서 기죽은 모습으로 아프다고 동정을 구하며 죄목을 대부분 인정했다. 1981년 1월 25일, 법정은 야오원위안에게 징역 20년과 정치권리 박탈 5년을 선고했으며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94년부터 신병 치료를 위해 상하이의 자택과 교도소를 오갔으며 1996년 10월 6일, 형기 20년을 모두 채우고 만기출소한 후 두 딸이 살고 있는 상하이에서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야오원위안은 석방후 당에 반성문을 제출하고 복당을 청원했으나, 공산당은 복당을 거부했다. 또한 문화대혁명 시절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하고 출판하려고 했으나, 당은 검열 후, 당의 권위를 해칠 수 있다고 판단, 출판이 금지되고 원고는 압수되었다. 그리하여, 할일이 없어서 석방 1개월 전에 사망한 아내의 묘소를 자주 참배했고 서예, 역사공부를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2005년 4월 장춘차오가 암으로 사망한 이후 유일하게 생존한 사인방의 일원이었으나 장춘차오가 죽은지 8개월 만인 2005년 12월 23일, 상하이에서 지병이었던 당뇨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신화통신은 2006년 1월 6일이 되어서야 “린뱌오, 장칭 반혁명집단 사건의 주범인 야오원위안이 2005년 12월 23일 병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으며 장례식이나 매장 장소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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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칭이 어느날 덩샤오핑과 대판 싸운 후 야오원위안에게 유고슬라비아 영화 <사라예보에서>를 같이 보자고 했는데 야오원위안은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는지 그 영화를 이미 봤다고 거짓말을 하고 보지 않았다. 다음날 그 사실을 알게 된 장칭은 야오원위안의 비서를 반혁명죄로 기소하겠다고 날뛰며 실행 직전까지 갔었지만 막판에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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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2월 25일에는 야오원위안이 장칭에게 편지를 써서 다칭 유전의 왕철인이란 노동자를 칭송한 <개척자>에서 나온 대사인 "관료들은 마치 말 많은 늙은 아줌마 같아서, 당신 귀에 대고 하루 종일 깨갱거린다."란 대사가 장칭을 풍자한 것이라 주장해 상영 중단시키기도 했다. 이에 분노한 각본가 장톈민은 마오쩌둥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영화에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고 마오쩌둥은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완벽을 요구하는 것은 좋지 않다."며 영화를 배포할 것을 지시하며 장칭을 질책했다. 이에 야오원위안 장칭, 장춘차오, 문화부장 위후이융 등과 함께 마오쩌둥 사상이 잘못 해석된 부분이 있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용어들이 너무 많다는 식으로 <개척자>를 비방했으나 마오쩌둥이 상대하지 않으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장칭은 자신은 개척자를 비판한 적이 없다고 발뺌하게 되었다.(...)
강청의 말로
1976년 9월 9일 새벽 0시 10분 마침내 모택동이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모택동이 세상을 떠나자 중국 정국은 엄청난 회오리에 휘말렸다. 원래 당내 서열은 강청 앞에 모택동, 주은래, 강생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1년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 순리대로 말한다면 그녀가 당연히 중국공산당 서열 1위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모택동이 생전에 그녀의 주석직 승계를 단호히 반대했기 때문에 9월 9일 중공 중앙에서 발표한 ‘모택동 장례 위원회’" 명단은 화국봉, 왕홍문, 섭검영, 장춘교 순이었고 강청은 다섯 번째였다. 그러나 사인방 인물인 왕홍문과 장춘교가 각각 2위와 4위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녀는 '모택동 부인'이라는 자격으로 당당하게 화국봉을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녀는 야심을 드러내고 화국봉과의 마지막 일전을 준비했다.
1976년 10월 6일, 화국봉은 중공 중앙판공청에서 섭검영, 왕동흥에게 전화를 하여 그날 저녁 8시에 중남해 회인당에서 중공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안건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모택동선집] 제5권 심의였고, 또 하나는 모주석 기념당 설립 방안과 중남해 모주석 고택 안치 토의였다. 화국봉, 섭검영, 왕홍문, 장춘교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당연히 참석해야 했지만, 요문원은 정치국 상무위원이 아닌 그냥 위원이었는데도 그에게 회의 참석을 통보하였다.
저녁 7시 화국봉과 섭검영은 거의 동시에 중남해 회인당에 도착하였고, 왕동흥은 일찌감치 경호요원들을 데리고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7시 55분 장춘교가 도착하여 회인당에 들어서는 즉시 체포되었다. 이어서 왕홍문과 요문원도 회인당에 들어섰을 때 장춘교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때 강청은 자기 숙소에서 화국봉의 명을 받은 중앙경호대 책임자 장요사에 의해 체포되었다. 화국봉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간단히 ‘사인방’을 모두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을 사람들은 중국의 ‘시월혁명’이라 한다.
1977년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 강청의 당적을 영원히 박탈하고 당 내외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81년 1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강청에게 반혁명집단 주범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2년 후에 형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1983년 1월, 최고인민법원 형사 법정은 판결문에서 그녀의 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하고 모든 정치적 권리를 종신토록 박탈한다고 선고하였다. 1991년 5월 14일 강청은 자살을 하였다.
Topic
교육의 입장에서 본 문화혁명
문화혁명, 특히 홍위병의 활동은 극단적 평등을 주장하는 운동이었다. 영화 [해자왕]에서도 보듯이 이런 극단은 사상적 획일화를 가져오고 오히려 비판을 없애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한편으로는 이에 반발하는 주인공을 볼 때 교육에 관한 한, 이른바 주입식과 성장으로서의 교육이라는 두 관점이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두 관점을 알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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