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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何謂真人(하위진인)/莊子內篇

무엇을 진인(眞人)이라 하는가?

 

何謂真人(하위진인)?

古之真人(고지진인),不逆寡(불역과),

不雄成(불웅성),不謨士(불모사)。

若然者(약연자),過而弗悔(과이불회),當而不自得也(당이부자득야)。

若然者(약연자),登高不慄(등고불률),

入水不濡(입수불유),入火不熱(입화불열)。

是知之能登假於道也若此(시지지능등어도야약차)。

 

 

무엇을 일러 진인(眞人)이라 하는가?

옛날의 진인은 적다고 해서 거절하지 않으며,

공(功)을 이루어도 뽐내지 아니하며, 인위적으로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

그 같은 사람은 실패하여도 후회하지 아니하며, 일이 합당하게 이루어져도 우쭐거리지 않는다.

그 같은 사람은 높은 데 올라가도 두려워 떨지 아니하고,

물 속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며, 불 속에 들어가도 뜨거워 하지 않았다.

이것은 지식이 도(道)의 경지에 오름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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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逆寡(불역과) : 적은 것을 거절하지 않음. 곧 적다고 해서 거절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역경(逆境)이나 실패에 처해서도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주어진 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굴복(屈復)은 “적다고 해서 거절하지 않음이니 이른바 선(善)이 작다고 해서 아니하지 말라[不以少而拒之 所謂勿以善小而不爲也].”고 풀이했다. 逆(역)은 거절(拒絶)하다는 뜻.

不雄成(불웅성) : 공을 이루어도 뽐내지 않음. 林希逸은 “공이 비록 이루어져도 자랑하지 않는다[功雖成亦不以爲夸].”고 풀이했다. 雄(웅)은 자랑하다, 뽐내다의 뜻.

不謨士(불모사) : 인위적으로 일을 도모하지 않음. 모든 일을 자연에 맡긴다는 뜻이다. 謨(모)는 謀와 같고, 士는 事와 같다(林希逸).

過而弗悔(과이불회) 當而不自得也(당이부자득야) : 일이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으며 일이 합당하게 이루어져도 우쭐대지 않음. 곧 일의 성패 때문에 후회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의 성패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得은 득계(得計) 또는 득의(得意)의 뜻.

登高不慄(등고불률) 入水不濡(입수불유) 入火不熱(입화불열) : 높은 데 올라가도 두려워 떨지 아니하고, 물 속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며, 불 속에 들어가도 뜨겁지 아니함. 〈逍遙遊〉편의 ‘之人也 物莫之傷 大浸稽天而不溺 大旱金石流 土山焦而不熱’과 〈達生〉편의 ‘至人潛行不窒 蹈火不熱 行乎萬物之上而不慄’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知之能登假於道者也(지지능등격어도자야) 若此(약차) : 지식이 도(道)의 경지에 오름이 이와 같음. 登假의 假은 ‘격’으로 읽으며 도달하다[至]는 뜻이다(陸德明). 郭象은 오르다[登至]로 풀이했고, 成玄英도 같은 견해이다. 登假(등격)의 경우는 〈德充符〉편 ‘擇日而登假(택일이등하)’에 이미 나왔지만 ‘擇日而登假(하)’의 登假(등하)는 昇遐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하’로 읽고, 여기의 登假(등격)은 道의 경지에 오르다는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격’으로 읽어야 한다. 王叔岷의 경우에도 〈德充符〉편에서는 ‘하’로 읽었고 여기의 경우는 ‘격’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견해가 타당하다. ‘하’로 읽는 경우는 〈德充符〉편 ‘擇日而登假(하)’의 역주 참조. 若此의 此는 앞의 ‘登高不慄 入水不濡 入火不熱’을 받는 대명사.

 

 

古之真人(고지진인),其寢不夢(기침불몽),

其覺無憂(기무우),其食不甘(기식불감),其息深深(기식심심)。

真人之息以踵(진인지식이종),衆人之息以喉(중인지식이후)。

屈服者(굴복자),其嗌言若哇(기익언약)。

其耆欲深者(기기욕심자),其天機淺(기천기천)。

 

 

옛날의 진인은 잠잘 때에는 꿈을 꾸지 않았고,

깨어 있을 때에는 근심이 없었으며, 먹을 때에는 달게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숨은 길고 길었다.

진인의 숨은 발뒤꿈치까지 미치는데, 보통 사람의 숨은 목구멍까지 미칠 뿐이다.

남에게 굴복(屈服)하는 사람은 목메인 듯 아첨하는 말소리가 마치 토하는 것 같고,

욕망이 깊은 사람은 자연의 기틀이 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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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寢不夢(기침불몽) : 잠잘 때에는 꿈을 꾸지 않음. 마음과 몸이 외계 사물에 끌려다니지 않기 때문에 잠잘 때 꿈을 꾸지 않는다는 뜻이다. 郭象은 상념[意想]이 없기 때문이라고 풀이했고, 林希逸은 “꿈꾸지 않는 것은 정신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不夢 神定也].”라고 풀이했고, 釋德淸은 “꿈은 망상에서 생기는데 망상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잠잘 때 꿈을 꾸지 않는다[夢發於妄想 妄想不生 故寢無夢].”고 풀이했다.

其覺無憂(기교무우) : 깨어 있을 때에는 근심이 없음. 郭象은 “만난 바를 합당하게 여겨서 편안하다[當所遇而安也].”고 풀이했다.

其食不甘(기식불감) : 먹을 때에는 달게 여기지 않음. 스스로 도를 즐기기 때문에 세속적인 맛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 成玄英은 “인간 세상에 뒤섞여 티끌과 함께 하면서 먹으니 맛있는 음식을 耽溺하지 않기 때문에 그 좋은 맛을 알지 못한다[混迹人間 同塵而食 不耽滋味 故不知其美].”고 풀이했다.

其息深深(기식심심) : 숨이 길고 긺. 마음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숨이 조급하지 않다는 뜻. 釋德淸은 “깊다는 것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뜻이다. 숨이 거칠고 얕으면 마음이 동요하게 된다. 진인(眞人)은 마음이 태연하고 안정되어 외물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 숨이 깊고 깊다[深者 綿綿之意 息粗而淺 則心浮動 眞人心泰定而不爲物動 故其息深深].”고 풀이했다.

眞人之息以踵(진인지식이종) : 진인(眞人)은 발뒤꿈치로 숨쉼. 곧 숨이 발뒤꿈치까지 미친다는 뜻. 숨이 길고 편안함을 뜻한다. 宣穎은 “호흡이 발바닥의 涌泉穴까지 통함이니 깊음을 말한 것이다[呼吸通於涌泉 言深也].”라고 풀이했다.

衆人之息以喉(중인지식이후) : 보통 사람은 목구멍으로 숨쉼. 곧 숨이 가쁘고 조급하여 목구멍까지만 미친다는 뜻. 向秀는 “헐떡이는 숨은 목구멍을 마디로 삼는다[喘悸之息 以喉爲節].”고 풀이했다.

屈服者(굴복자) 其嗌言若哇(기익언약와) : 남에게 굴복하는 사람은 목메인 듯 아첨하는 말소리가 마치 토하는 것 같음. 《孟子》 〈滕文公 下〉의 “어깨를 움츠리고 아첨하며 웃는 것은 여름날 밭두둑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고생스럽다[脅肩諂笑 病于夏畦].”고 한 것처럼 비굴하게 아첨하는 사람의 모습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여기서는 羅勉道가 ‘다른 사람에게 굴복하여 아첨하고 잘 보이려 하는 자[屈服諂媚於人者]’로 풀이한 것을 따랐다.

嗌言(익언)은 목메인 말소리. 嗌은 익(益)으로 읽는다(陸德明). 林希逸은 嗌을 목이 메다[咽]는 뜻으로 풀이했고, 朱桂曜와 馬敍倫은 풀이는 같지만 噎(일)의 假借字로 보았는데 이 두 견해를 따랐다.

哇(와)는 吐(林希逸), 嘔(簡文帝)의 뜻으로 토하다는 의미. 한편 成玄英은 “嗌은 목구멍이고 哇는 막힘이다.

耆欲深者(기욕심자) 其天機淺(기천기천) : 욕망이 깊은 사람은 자연의 기틀이 얕음. 耆는 嗜의 假借字(朱桂曜)로 탐욕(耽欲)의 뜻. 天機(천기)는 자연의 기틀로 생명을 지속시키는 근본을 뜻한다. 곧 기욕(嗜欲)과 천기(天機)는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으므로 기욕을 줄이는 것이 천기를 지속시키는 방법이라는 맥락이다.

 

 

古之真人(고지진인),不知說生(부지열생),不知惡死(부지오사);

其出不訢(기출불),其入不距(기입불거);

翛然而往(연이왕),翛然而來而已矣(연이래이이의)。

不忘其所始(불망기소시),不求其所終(불구기소종);

受而喜之(수이희지),忘而復之(망이복지)。

是之謂不以心捐道(시지위불이심연도),不以人助天(불이인조천)。

是之謂真人(시지위진인)。

 

 

옛날의 진인(眞人)은 생(生)을 기뻐할 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몰라서,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아니하며 죽음을 거부하지도 아니하여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나며, 홀가분하게 〈세상에〉 태어날 따름이다.

자신의 생이 시작된 곳을 잊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나는 곳을 알려고 하지 않아서,

생명을 받아서는 그대로 기뻐하고, 생명을 잃게 되어서는 대자연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컬어 심지(心知)로 도(道)를 손상시키지 아니하고,

인위적인 행위로 무리하게 자연의 운행을 조장(助長)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런 사람을 일러 진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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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知說生(부지열생) 不知惡死(부지오사) : 生을 기뻐(좋아)할 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 모름. 장자는 상식 세계의 속인들이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을 《장자》 전편의 여러 곳에서 비판하고 있다. 〈至樂〉편의 해골[髑髏]과의 대화에서는 오히려 죽음의 세계가 찬양되고 있으며 〈齊物論〉편에서는 悅生惡死가 미혹[惑]된 태도임을 지적하고 있다. “내 어찌 生을 좋아하는 것이 미혹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내 어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마치 젊어서 고향을 잃고 고향으로 되돌아갈 줄 모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겠는가.……내 어찌 죽은 사람이 처음에 살기를 바란 것을 뉘우치지 않는다고 알 수 있겠는가[予惡乎知說生之非惑邪 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予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蘄生乎].”라고 하였다(제4장).

 

其出不訢(기출불흔) 其入不距(기입불거) :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아니하며 죽음을 거부하지도 아니함. 訢은 흔(欣)으로 읽으며 기쁘다[喜]는 뜻이고 距(거)는 거역(拒逆)하다는 뜻으로 拒와 같다(陸德明). 出은 出生, 入은 入死의 뜻.

翛然而往(소연이왕) 翛然而來而已矣(소연이래이의의) : 홀가분하게 떠나며, 홀가분하게 태어날 따름임. 곧 삶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뜻.

翛然(소연)은 홀가분한 모습. 翛는 소(蕭)로 읽으며 儵(숙)然으로 된 판본도 있다(陸德明).

不忘其所始(불망기소시) 不求其所終(불구기소종) : 자신의 생이 시작된 곳을 잊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나는 곳을 알려고 하지 않음. 생명의 근원, 곧 도(道)를 삼가 지키고 죽을 때를 미리 알려고 억지로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 전체의 뜻은 成玄英이 “始는 삶이고 終은 죽음이다. 生死를 모두 떠나 보내서 일찍이 집착함이 없으니 어찌 다만 삶의 시작만 잊어버리고 죽는 때만을 알려고 하겠는가. 마침과 시작을 똑같이 대해서 만난 바에 꼭 맞게 한다[始生也 終死也 生死都遣 曾無滯著 豈直獨忘其生而偏求於死邪 終始均平 所遇斯適也].”고 풀이한 것을 따랐다.

受而喜之(수이희지) 忘而復之(망이복지) : 받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돌아감. 곧 생명을 받으면 기뻐하고 생명을 잃게 되면 대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뜻. 陸西星은 “이미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또 생명을 받으면 기뻐한다고 말한 것은 모순된 것이 아니다.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위의 不說生(古之眞人 不知說生)을 이어서 말한 것이고, 여기서 생명을 받으면 기뻐한다고 말한 것은 생명을 받은 뒤에 항상 스스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서 애초부터 슬퍼하거나 불만스러워하는 뜻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旣曰 其出不訢 又曰 受而喜之 却不相反 蓋不訢 卽承上不說生而言 曰受而喜之 是言有生之後 常自歡喜快樂 初無戚戚不滿之意].”라고 풀이했는데 적절한 견해이다.

忘(망)은 亡의 가차자(假借字)라는 견해(馬敍倫, 赤塚忠)가 있다. 그러나 池田知久의 지적처럼 亡의 誤字는 아니다. 而는 則과 같다.

不以心捐道(불이심연도) 不以人助天(불이인조천) : 심지(心知)로 도(道)를 손상시키지 아니하고, 인위적인 행위로 무리하게 자연의 운행을 조장(助長)하지 않음. 捐에 대해서는 揖(郭象, 吳汝綸, 章太炎), 楫(崔譔), 偝‧背(兪樾), 損(朱桂曜, 武延緖, 王叔岷) 등 諸說이 분분하고, 그 중에서도 損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본래의 捐자 그대로 풀이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에 굳이 본문을 損자로 바꿀 것까지는 없다. 여기서는 成玄英이 ‘捐은 棄[捐 棄也]’라고 풀이한 것을 따라 捐자를 그대로 두고, 損傷시키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助는 《孟子》 〈公孫丑 上〉의 ‘勿助長’의 助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王敔).

 

 

若然者(약연자),其心志(기심지),其容寂(기용적),

其顙頯(기상규),淒然似秋(처연사추),煖然似春(연사춘),

喜怒通四時(희노통사시),與物有宜(여물유의),而莫知其極(이막지기극)。

 

 

그 같은 사람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며, 모습은 고요하며,

이마는 넓고 평평하니, 서늘함은 가을과 같고 따스함은 봄과 같아서,

희노(喜怒)의 감정이 사계절과 통하여 사물과 적절하게 어울려서 그 끝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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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心志(기심지) : 그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있음. 마음 씀씀이가 한결같다는 뜻으로 오로지 道에 집중함을 의미한다. 志는 한결같다[專一]는 뜻(王敔, 方勇‧陸永品). 여기의 志字는 《論語》 〈里仁〉편에서 “참으로 仁에 뜻을 둔다면 악이 없을 것이다[苟志於仁矣 無惡也].”, 《孟子》 〈告子 上〉의 “배우는 사람 또한 반드시 활을 당기는데 집중한다[學者 亦必志於彀].”고 했을 때의 志와 같이 專一의 뜻으로 보는 것이 옳다.

其容寂(기용적) : 모습이 고요함. 움직임이 고요하다는 뜻. 釋德淸은 “용모가 고요함이니 바로 내면은 담담하고 외모는 안정되어 있음이다[容貌寂然 乃內湛而外定也].”라고 풀이했다.

其顙頯(기상규) : 이마가 넓고 평평함. 頯(규)는 넓고 평평한 모양. 郭象은 ‘아주 소박한 모양[大朴之貌]’이라고 했지만 추상적인 의미로 풀이했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는 羅勉道가 ‘넓고 평평하여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음[廣平不蹙也]’이라고 풀이한 견해를 따라 眞人은 소박한 상태를 지키기 때문에 이마조차도 꾸밈(주름)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凄然似秋(처연사추) 煖然似春(훤연사춘) : 서늘함은 가을과 같고 따스함은 봄과 같음. 煖은 훤(暄)으로 읽는다(陸德明). 煖은 따뜻할 ‘훤’. 郭象은 “만물을 죽이지만 위세를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며 만물을 살리지만 仁을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다[殺物非爲威也 生物非爲仁也].”라고 풀이했다.

凄然(처연)은 서늘한 모양, 煖然(훤연)은 따스한 모양. 煖然似春은 〈德充符〉편의 ‘與物爲春’과 유사한 맥락이다.

喜怒通四時(희노통사시) : 희로의 감정이 사계절과 통함. 희로의 감정이 春夏秋冬 사계절의 推移와 같이 자연스러움을 뜻한다.

與物有宜(여물유의) : 사물과 적절하게 어울림. 곧 온갖 사물을 차별없이 대하여 사물과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郭象은 “무심하게 사물을 대하기 때문에 사물의 마땅함을 빼앗지 않는다[無心於物 故不奪物宜].”고 풀이했다.

莫知其極(막지기극) : 그 끝을 알지 못함.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뜻. ‘極’은 窮極, 곧 끝이다. 한편 宣穎은 極을 痕迹으로 보고 “일에 따라 마땅함에 부합되기 때문에 자취를 찾을 수 없다[隨事合宜 而無迹可尋].”고 풀이하였고, 方勇‧陸永品 등이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極은 眞人의 감정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사계절과 통한다는 본문의 맥락을 따져 볼 때, 공간적인 의미의 자취라기보다는 시간의 끝, 단절, 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유사한 〈德充符〉편의 ‘日夜無郤 而與物爲春’에서도 郤이 틈의 뜻으로 쓰인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眞人이 만물과 어울리는 과정 속에서 인위적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한 의미는 취할 만하다.

진인(眞人)이란 이처럼 자유자재(自由自在)한 무심(無心)의 경지(境地)를 스스로의 심경(心境)으로 삼는 인간이다.

<진인의 참모습은 자연을 따르는 것이다>

 

古之真人(고지진인),其狀義而不朋(기상의이불붕),

若不足而不承(약부족이불승),

與乎其觚而不堅也(여호기고이불견야),

張乎其虛而不華也(장호기허이불화야),

邴邴乎其似喜乎(병병호기사희호)! 崔乎其不得已乎(최호기부득이호)!

滀乎進我色也(축호진아색야),與乎止我德也(여호지아덕야),

厲乎其似世乎(여호기사세호)!

謷乎其未可制也(오호기미가제야),連乎其似好閉也(연호기사호폐야),

悗乎忘其言也(호망기언야)。

옛날의 진인(眞人)은, 그 모습이 높이 솟은 산처럼 당당하면서도 무너지지 아니하며,

부족한 것 같지만 남에게서 받지 않으며,

몸가짐이 법도에 꼭 맞아 태도가 단정하면서도 고집하지 않으며,

넓고 크게 마음을 비운듯하면서도 꾸미지 않았다.

환하게 밝은 모습으로 마치 기쁜 일이 있는 듯하구나!

임박(臨迫)해서 움직여 마지못한 듯하구나!

가득하게 자기 안색을 나타내는 일도 있지만 몸가짐이 법도에 맞아 자신의 참다운 덕에 머물며, 넓은 도량으로 세속과 함께하는 듯하도다!

담담하게 제약받지 않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감추는 것을 좋아하는듯하지만

무심히 모든 말을 다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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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峨)而不朋(崩)(의이불붕) : 높이 솟은 산처럼 당당하면서도 무너지지 아니함. 郭象은 “外物과 더불어 마땅한 관계를 유지하되 붕당을 만들지 않는다[與物同宜而非朋黨].”고 풀이했다. 여기서는 兪樾과 馬敍倫의 고증을 따라 義를 峨, 朋은 崩으로 고쳐서 높이 솟은 모양[峨]과 무너지다[崩]는 뜻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若不足而不承(약부족이불승) : 부족한 것 같지만 남에게서 받지 않음. 외물(外物)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한 모습을 형용한 표현이다. 王敔는 “承은 받는다는 뜻이다. 부족하면 반드시 남에게서 물건을 받게 되는데, 부족한 듯하지만 실제로 부족한 것이 아니니 어찌 다시 자잘한 물건을 받겠는가[承受也 不足者必受物 若不足 非不足也 寧更受小物耶].”라고 풀이했다.

與乎其觚而不堅也(여호기고이불견야) : 몸가짐이 법도에 꼭 맞아 태도가 단정하면서도 고집하지 않음. 이 구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林雲銘이 “지키는 것은 方正하지만 고집하지 않음이다[所守方而不固執也].”라고 풀이한 것이 적절하다.

與乎(여호)는 몸가짐이 법도에 꼭 맞는 모양. 觚(고)는 모난 그릇으로 여기서는 모난 그릇처럼 태도가 단정함을 뜻한다. 不堅(불견)은 고집하지 않음.

張乎其虛而不華也(장호기허이불화야) : 넓고 크게 마음을 비운듯하면서도 꾸미지 않음.

張(장)은 넓고 큰 모양. 成玄英은 ‘넓고 큰 모양[廣大貌也]’으로 풀이했다.

不華(불화)는 화려하게 꾸미지 않는다는 뜻. 成玄英은 ‘쓸데없이 꾸미지 않음[不浮華]’으로 풀이했다.

邴邴乎其似喜乎(병병호기사희호) : 환하게 밝은 모습으로 마치 기쁜 일이 있는 듯함.

邴邴(병병)은 환하게 밝은 모양, 곧 기뻐하는 모양. 向秀와 成玄英은 ‘기뻐하는 모양[喜貌]’으로 풀이했고 簡文帝는 ‘밝은 모양[明貌]’으로 풀이했는데 大意에 큰 차이는 없다.

崔乎其不得已乎(최호기부득이호) : 임박해서 움직여 마지못한 듯함.

崔(최)는 임박한 모양으로 부득이(不得已)한 모습을 표현. 陳啓天은 催의 가차로 보고 재촉하다[促], 임박하다[迫]의 뜻으로 풀이했는데 이 견해가 적절하다.

滀乎進我色也(축호진아색야) : 가득하게 자기의 안색을 나타냄. 곧 자신의 기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낸다는 뜻. 滀(축)은 가득한 모양으로 자기 얼굴색을 드러내는 모습[進我色]을 형용한 표현. 進(진)은 안색을 가득하게 드러낸다는 뜻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止我德’의 止와 상반되는 표현이다.

與乎止我德也(여호지아덕야) : 몸가짐이 법도에 꼭 맞아 자신의 참다운 덕에 머무름. 與乎(여호)는 위의 ‘與乎其觚’와 같이 몸가짐이 법도에 꼭 맞아 태도가 단정한 모습을 의미한다. 止는 위의 進과 상반되는 표현으로 자신의 덕을 안으로 간직하고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厲(廣)乎其似世乎(여호기사세호) : 넓은 도량으로 세속 사람들과 함께하는 듯함. 厲乎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崔譔본에는 厲乎(여호)가 廣乎(광호)로 되어 있고 “포용함이 넓다[苞羅者廣也].”고 풀이했는데(陸德明), 여기서는 崔譔본을 따라 廣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謷乎其未可制也(오호기미가제야) : 오연히 제약받지 않음. 謷乎(오호)는 오연(傲然)히 초월한 모양. 謷(오)는 傲와 통하는 글자(方勇‧陸永品). 司馬彪는 ‘뜻이 먼 모양[志遠貌]’이라고 풀이했다. 未可制(미가제)는 세속적인 규범으로 제약할 수 없다는 뜻. 傲然(오연)은 태도(態度)가 거만하거나 그렇게 보일 정도(程度)로 담담(淡淡)하다는 뜻.

連乎其似好閉也(연호기사호폐야) :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감추기를 좋아하는 듯함. 마치 일부러 말을 하지 않고 감추는 듯하다는 뜻이다. 連乎(연호)는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모습으로 번역하였다. 閉는 閉藏으로 감춘다는 뜻. 羅勉道는 “연면히 닫히고 막혀서 엿볼 수 없다[連綿閉塞 無可窺焉].”고 하였다.

悗乎忘其言也(문호망기언야) : 무심히 모든 말을 다 잊어버림. 일부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悗乎(문호)는 무심(無心)한 모양. 王敔는 “悗은 心자와 免자로 구성된 글자로 마음속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悗從心從免 不系於心也].”라고 했는데 적절한 풀이이다.

故其好之也一(고기호지야일),其弗好之也一(기불호지야일)。

其一也一(기일야일),其不一也一(기불일야일)。

其一(기일),與天為徒(여천위도);

其不一(기불일),與人為徒(여인위도)。

天與人不相勝也(천여인불상승야),是之謂真人(시지위진인)。

 

 

그 때문에 〈眞人은〉 좋아하는 것도 한가지로 여기며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한가지로 여기며,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일치(一致)되는 것도 한가지로 여기며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일치(一致)되지 않는 것도 한가지로 여긴다.

한가지로 여기는 것은 하늘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이고,

한가지로 여기지 않는 것은 사람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이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이기지 않을 때 이런 사람을 일러 진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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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好之也一(기호지야일) 其弗好之也一(기불호지야일) : 좋아하는 것도 한가지로 여기며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한가지로 여김. 林希逸은 이 문단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一은 자연이며 조화이다. 好와 不好는 바로 好惡이다. 其一은 好惡가 같음을 말한 것이고 其不一은 好惡가 다름을 말한 것이다. 好惡에 異同이 있는 것은 모두 조화의 밖에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일치되는 것도 한가지로 여기며 일치되지 않는 것도 한가지로 여긴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 중에 好惡를 같은 것으로 여길 줄 아는 이는 하늘을 아는 자이다. 그 때문에 한가지로 여기는 것은 하늘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好惡를 다른 것으로 여기면 사람만 알고 하늘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 때문에 한가지로 여기지 않는 것은 사람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이 하늘을 이겨도 옳지 않으며 하늘이 사람을 이겨도 또한 옳지 않다. 眞人은 好도 없고 惡도 없으며 異도 없고 同도 없어서 天과 人을 구분함이 없이 단지 자연을 따를 뿐이다[一自然也 造化也 好與不好 卽好惡也 其一 同也 其不一 異也 好惡之有異同 皆不出乎造化之外 故曰 其一也一 其不一也一 人能以好惡爲同 則知天者也 故曰 其一與天爲徒 若以好惡爲異 則知人而不知天者 故曰 其不一與人爲徒 以人勝天 不可也 以天勝人 亦不可也 眞人則無好無惡 無異無同 無分於天人 但循自然而已].” 여기서 ‘한 가지로 여긴다’는 것은 모든 차별과 대립을 초월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므로 자연의 道와 一體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자연을 따를 뿐[循自然而已]이라는 뜻이다.

其一(기일) 與天爲徒(여천위도) : 한가지로 여기는 것은 하늘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임. 天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好, 不好도 같은 것이며, 好不好의 일치와 好不好의 불일치도 같은 것이라는 의미.

其不一(기불일) 與人爲徒(여인위도) : 한가지로 여기지 않는 것은 사람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임.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好와 不好는 다른 것이며, 일치와 불일치도 다른 것이라는 의미.

天與人(천여인) 不相勝也(불상승야) :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이기지 않음. 天과 人이 조화를 이룸을 표현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