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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왜 이 시기에 동성애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는가?/박은정.제3세대그리스도연구소

1. 들어가는 말: 성서와 텍스트 분석

 

일상적으로 ‘한 문장 이상의 발화연속체’를 텍스트라고 하며, 텍스트 분석은 텍스트를 언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텍스트 분석은 텍스트를 구성하는 언어적 요소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생산과 소비에 관여하는 담화적 차원, 그리고 사회제도 같은 사회문화적 차원에 대한 이해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성서를 읽을 때도 성서에 쓰인 문장들의 축어적 의미뿐만 아니라 성서의 집필자, 장르, 그리고 집필 당시의 정치문화적 배경, 제도 등에 대해 알아야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개신교 목회자 및 신도들은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담화적 차원 및 사회문화적 차원의 적극적 분석을 꺼린다. 그런데 문제는 텍스트를 생산할 때와 마찬가지로 텍스트를 수용할 때도 순수하게 언어적 차원만으로 의미의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다. 즉 수용자 본인의 정체성, 해석자가 몸담고 있는 사회문화적 배경 등이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작용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해석의 오류를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1)

 

역사비평학적 방법론을 적용해서 성경을 읽는 것은 평신도에게는 물론이고 역사비평학을 전공하지 않은 목회자에게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적용해서 성경을 읽는 것은 오늘날 ‘보수(라고 쓰고 극우라고 읽고 싶은) 우파’가 개신교를 과대표하는 현 상황에서 보수우파의 정체성이 곧 개신교 전체의 정체성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은 개인적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나에게는 성경 읽기에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적용할 수 있는 역량이 없다. 이 글을 읽으실 김진호 선생님께서 최선을 다해 주시리라 믿는다.

 

오히려 이 글에서는 보수우파 개신교에서 사사기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노먼 페어클럽(Noman Fairclough)는 언어로 매개되는 사회적 지배관계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밝히는 작업을 주로 하는 언어학자인데, 그는 담화를 사회적 실천관행(Social Practice)으로 보며 담화적 사건은 사회에 의해 형성되지만, 사회를 구성하기도 한다며 담화와 사회의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하였다. 또한 담화적 실천이 사회 계급 사이의 불공평한 권력 관계를 (재)생산하고 기여할 수 있는데, 이러한 기여는 담화가 사물의 현상이나 사람의 입장을 나타내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수우파의 동성애에 관한 담화2)를 살펴보는 것은 보수우파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과정이 되는 한편, 교계와 한국 사회에 (정치색이 짙은) 개신교 목회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법에 대한 탐구도 될 것이다.

 

물론 단시간에 이러한 연구들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글에서는 기초 작업의 성격 으로 코퍼스(말뭉치) 분석을 통해서 시대별로 동성애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사사기 19~20장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거칠게나마 살펴볼 것이다.

 

 

2. 신문기사를 통해 본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정도와 인식의 변화

 

한국 사회는 언제부터 동성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교회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언제부터 적극적으로 발언을 하게 되었는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전자인문학센터에서 구축한 〈동아일보 코퍼스〉를 이용하여 1946~2014년 동안 신문기사에 동성애가 등장하는 횟수를 알아보았다.

 

 

위의 표에 따르면 ‘동성애’라는 단어가 기사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5년 이후의 일이다. 그나마도 용례를 살펴보면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해외 소식을 전하면서 동성애를 언급(예: 불(佛) '동거' 법적 지위 인정 동성애 부부도 합법화. <1999. 10. 15> 헤드라인)하거나 동성애 소재의 영화나 연극을 소개하는 경우(예: 미국의 패션모델 중에서 가장 잊지 못할 여인이 된 천재적인 한 모델이 마약과 동성애에 빠져 AIDS로 죽기까지의 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 <1990. 2. 7> 기사 본문)가 대부분이며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협의회」 발족식(1995. 6. 27)과 같은 한국 내 동성애 소식은 정식 기사가 아니라 단신으로만 다뤄지는 등 국내 동성애에 대한 기사는 1990년대까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정적 자료만으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영화 소개나 외신 외에 기사에서 한국 사회의 동성애에 대해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2000년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시대별 동성애와 관련된 공기어3)를 분석하여 t-score를 계산한 것이다. t-score의 값이 높을수록 두 단어가 높은 상관관계를 이룬다. 1970년대 이전 시기에는 동성애 빈도수가 적어서 유의미한 공기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1970년부터 2014년을 대상으로 하였다.

 

 

위의 표를 보면 시기별로 ‘동성애’와 같이 쓰이는 단어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년대에는 ‘환자, 문제, 차별’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가 동성애와 같이 쓰였다. 전체 시기에서는 30위를 차지한 ‘환자’가 이 시기에는 ‘3위’를 한 것으로 당시 동성애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교회’에 대한 용례는 전부 6개였는데, 모두 미국 사례로 미국 등 해외에서는 1970년대에 벌써 동성애와 동성애자 수용에 대한 교회 내 갈등이 있었음을 용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예: 「폐리」 목사는 기존 교회들이 동성애 교인들을 융화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난, 『목사나 신부들을 찾는 많은 동성애 교인들이 목사들의 히스테리나 당하기 일쑤』라고 말했다. <1975. 8. 1> 기사 본문). 1980년대에도 동성애는 ‘반대, 금지, 문제’와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과 같이 쓰였다. ‘환자’가 동성애와 공기어를 이루지 못하는 것도 이전 시기와는 달라진 점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1980년대에는 동성애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는 늘었으나 교회와 동성애가 공기어로 쓰이지는 않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70, 80년대에는 공기어를 이루지 못했던 ‘영화, 사랑’이 동성애와 공기어를 이룬다. 또한 ‘차별, 반대, 금지’와 같은 부정적 단어들은 이전 시기에 비해 순위가 내려갔다. 2000년대에서 들어서도 ‘영화’가 동성애와 가장 많이 결합되는 단어였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가 내려가던 ‘문제’가 순위가 다시 올라갔다는 것인데 용례를 찾아보면 이전 시기의 ‘문제’가 잘못된 일이라는 뜻으로 쓰인데 반해 2000년대에는 ‘동성애의 권리 문제(<2000. 5. 30>)’에서와 같이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의미로도 쓰이기 시작했다.4) 이 시기에 카톨릭과 동성애가 공기하는 용례는 모두 8개, 교회와 동성애가 공기하는 용례는 모두 5개였는데, 모두 해외 사례였으며 동성애 거부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는 오히려 70년대보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쓰인 기사로, 이것이 동아일보의 특징인지, 당시 한국 언론의 전반적 특징인지 검증이 필요하다.

 

2010~2014년의 특징으로는 동성애 공기어로 ‘카톨릭, 교회’의 순위가 올라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카톨릭이 공기어로 쓰인 용례는 4개이고, 교회는 7개였다. 동성애에 대한 종교계의 입장 표명을 기사화한 것(예: 미국 보수주의 교회협의체인 복음주의협회는 최근 동성결혼이나 시민적 결합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혔고, 침례교는 "동성애는 성경적인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2010. 10. 8>기사 본문)과 동성애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종교를 근거로 드러내는 기사(예: 그는 당의 중도좌파적인 복지정책을 옹호하면서도 가톨릭 신자로서 동성애와 낙태에는 반대하는 보수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다<2010. 2. 29>기사 본문)에서 용례들을 찾을 수 있었다.

 

2015년 이후의 자료들은 아직 코퍼스가 구축되지 않은 관계로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지난 1년간 동아일보에서 동성애를 키워드로 기사 검색을 했을 때 총 128건의 기사가 검색되었다. 이는 2014년에 동성애 단어 빈도수가 134개, 가장 빈도수가 높은 2000년에 164개였음을 고려할 때, 빈도수가 아닌 기사 수가 128건에 해당한다는 것은 동성애 관련 기사가 훨씬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개신교 계열 신문에서는 동성애 관련 기사가 훨씬 더 많이 검색되었다. <기독신문>에서는 지난 1년 동안 총 1,777건의 기사가 검색되었고, 1,000건의 기사까지 검색이 되는 <크리스천투데이>의 경우, 2020년 5월 19일부터 2021년 4월 20일이라는 1년이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1,000건의 기사가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와 비교하였을 때 압도적으로 많은 기사를 보수개신교 계열 신문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는 교회가 차별금지법과 관련하여 동성애 이슈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극히 한정된 자료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위의 자료들을 참고하였을 때 아래와 같은 결과를 잠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

 

(1) 동성애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이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다. 1940, 50년대에는 신문에서 동성애 관련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1980년대까지도 동성애 관련 기사는 해외 소식에 국한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국 내에서 동성애가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고 언론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2) 시대별 동성애 공기어를 통해 볼 때, 1980년대까지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압도적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공기어가 ‘환자’이다. 90년대 이후에는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부정적 인식이 혼재되어 있는 양상을 보여준다.

(3) 2010년 이후 ‘카톨릭, 교회’ 등 종교 관련어가 동성애와 강하게 결합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코퍼스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2020.4 ~2011년 4월까지의 기사 건수를 보았을 때 2020년에는 종교 관련어가 동성애와 더 강하게 공기할 것으로 예측된다.

(4) 일반 신문보다는 보수 개신교 계열 신문에서 동성애 관련 기사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이는 일반 사회보다 개신교계에서 동성애 이슈에 민감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의 결론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사실들을 코퍼스를 통해서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소위 기독교 우파들은 왜 동성애 이슈에 민감할까? 그것도 2010년대 이후에 말이다. 동성애 이슈를 통해서 기독교 우파들이 지키려고 하는, 혹은 설파하려고 하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 사사기 19장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살펴보면서 우파의 정체성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3. 개신교 내 동성애 반대 진영의 사사기 19장 해석

 

사사기 19장을 동성애 반대론의 근거로 삼는 설교와 기사, 블로그 글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들은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논조는 대체로 일치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는 비교적 짧고 최신의 아래의 글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개신교 내 동성애 반대 진영에서 사사기 19장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아래의 글이 동성애 반대 진영의 대표성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저자가 총신대 출신의 조직신학 전공자라는 점, 국민일보 계열의 기독교 신문사에 기고된 글이라는 점에서 주요 분석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자세한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상원, <섬뜩하고 기괴한 레위 사람의 첩 사건… 경고 잊지 말아야>,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2020. 1. 16.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18188&code=23111413

 

이상원(2020)은 ‘이상원 교수의 성경이 경고하는 동성애’라는 시리즈 기고문의 두 번째 글이다. 이상원(2020)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이상원(2020)은 ‘화제 제시 – 사건 요약 – 시사점 제시’라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글쓴이는 사사기 19~20장만을 대상으로 글을 썼다는 것이다. 사사기 19장이 레위 사람의 첩 사건, 20장이 레위 사람의 첩 사건 때문에 발발한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 사이의 전쟁을 다룬다면 21장은 전후 베냐민 지파 재건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레위 사람의 첩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벌어진 기브아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하면서도 기브아 전투의 전후 처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글쓴이의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글의 각 부분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화제 제시 단계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세속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레위 사람의 첩 사건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며 소돔과 고모라 사건과 레위 사람의 첩 사건을 등치하고 있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글에서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 때문에 예수 재림 때에(나) 예정된 불의 심판을 받고 멸망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레위 사람의 첩 사건도 심판을 받고 멸망할 만한 사건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경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기브아 전투 이후에 대해 서술한 21장을 글쓴이가 자신의 글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멸망 후 재건 과정에 대한 언급을 배제하여 동성애의 결과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처럼 완전한 멸망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배제 외에도 포함(추가)과 초점화를 통해서 글쓴이는 사사기 19장의 레위 사람의 첩 사건을 재구조화한다. 이는 글의 두 번째 부분인 사건 요약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②-3은 글쓴이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글쓴이는 ②-2에서 히브리어 ‘야다’가 ‘성관계’를 의미하는 용법이 있음을 근거로 불량배들이 동성 간 성관계를 원했다고 서술하였는데 이에 대해 ②-3에서 글쓴이는 노인이 동성 간 성관계를 이성 사이의 불법적인 성관계보다 훨씬 더 악한 행위로 생각하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하지만 그 근거는 사사기 19장에서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글쓴이 역시 근거를 따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를 통해 동성 간 성관계를 이성 사이의 불법적 성관계보다 악한 행위로 인식하는 것은 노인이 아니라 글쓴이의 생각임을 추측할 수 있다. ②-3에서 레위 사람이 애꿎은 노인의 처녀 딸까지 망가뜨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 역시 글쓴이가 추가한 부분으로 사사기 본문에서는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서술은 동성애가 윤리 문제에 기반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서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②-4에서는 사사기 본문을 직접 인용한 이유가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인용된 ‘이런 일’의 앞뒤 문맥을 밝히지 않아 ‘이런 일’이 곧 동성 성관계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하지만 사사기 본문을 살펴보면 레위 사람이 ‘그 날 밤에 기브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해치려고, 내가 묵고 있던 집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나 대신에 내 첩을 폭행하여, 그가 죽었습니다.(삿 20:5)’라고 증언하다. 레위인의 증언을 고하면 ‘이런 일’은 동성 성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레위인에 대한 모욕과 폭력을 의미하는 것인데 글쓴이는 의도적으로 이를 배제하고 동성 성관계를 초점화하였다.

 

글의 세 번째 부분은 시사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동성애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을 보다 뚜렷하게 알 수 있다. 글쓴이는 영적•도덕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 내의 동성애를 축출해야 하며, 동성애를 인정하는 교단과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쓴이가 사사기 21장을 제외한 20장까지만을 인용한 이유를 ③-1에서 알 수 있다. 글쓴이는 기브아 전투의 목적을 ‘동성 간 성행위에 대한 징계와 제거’라고 보고, 전투 사망자를 ‘희생’이라고 지칭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21장에서 이스라엘이 전쟁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야베스 부족을 응징하고 베냐민 지파의 재건을 결정한 것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③-1의 ‘희생’ ③-5에서 ‘교단 분열’로 구체화되었다.

 

글쓴이는 ‘영적•도덕적 순결’을 ③-1, 2, 4에서 반복하고 있다. 영적이고 도덕적 순결을 지킴으로써 도덕적 우위에 서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 글쓴이의 목적이 아닐까 의심이 들지만 이 글만으로 그런 결론을 내릴 수는 없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하도록 하겠다.

 

 

4. 글을 나오며: 나의 고민

 

3장에서 간략하게 글의 구조를 분석하고 배제와 포함, 초점화를 통해서 글쓴이가 레위 사람 첩 사건을 어떻게 재구조화하였는지를 살펴보고 글쓴이의 의도를 추측해 보았다. 이 작업에서 얻은 것은 사사기 19장의 사건은 결코 동성애 반대 진영의 논리로 쓰일 수 없다는 것이다. ‘야다’가 언급되었다고 해서 실제로 기브아 불량배들이 동성 성관계를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흔히 일상생활에서 ‘죽을 것 같아’를 쓴다고 해서 그것이 축자적 의미 그대로 죽음의 상태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듯이 말이다. 설령 모욕을 주는 방법의 일종으로 동성 성관계를 의도했다고 하더라도 이것 역시 성적 지향으로서의 동성애와는 상관이 없다. 성적 지향으로서의 동성애는 사사기 19장 본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으며, 사사기의 등장인물들도 이들의 성적 지향이 동성애가 아님을 알고 있다. 노인이 자신의 딸과 레위 사람의 둘째 부인을 내주겠다고 협상을 한 것, 불량배들이 둘째 부인을 윤간한 것, 그리고 레위 사람이 미스바 회의에서 증언한 내용이 전부 이를 뒷받침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성적 지향으로서의 동성애와 상관없이 동성 성행위나 동성 간의 추행 사건은 일어난다. 교도소에서의 동성 강간, 학교 폭력에서의 동성 추행 등이 그 예이다. 이는 어디까지 위계에 의해 일어난 폭력 사건의 일종이지, 결코 성적 지향과 상관이 없다. 하지만 교계에서는 이를 위계에 의한 성폭력 문제를 성적 지향성의 문제로 해석한다. 3장의 글에서도 ‘탈동성애’, ‘동성애자’ 등의 단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적절한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오역이 의도된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적은 자료로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겠지만 2장의 코퍼스 분석과 3장의 담화 분석을 통해서 동성애 이슈를 선점하려는 개신교의 의도가 읽힌다. 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리고 신뢰를 잃어버린 종교계가 도덕적 우위를 재확인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의 행동들이 동성애 이슈 등에서 드러나는 것일 것이다.

 

보수우파의 동성애 관련 담화가 의도된 오역이라면 의도된 오역을 바로잡는 것은 신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리고 교계 차원에서 혐오와 차별, 배제가 아니라 선한 방식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목회자의 몫일 것이다. 그러면 일반평신도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고 좋은 목회자를 찾아서 사역에 동참하는 것으로 민주시민 사회의 일원이자 독실한 크리스천인 나의 역할을 다하는 것일까? 나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1) 문학의 내재적 비평이나 반영론적 비평, 표현론적 비평과 같이 특정한 목표를 갖고 의도적으로 한 가지 차원에 집중하는 해석까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2) Discourse는 흔히 담화 혹은 담론으로 번역되는데, 여기에서는 담화라고 쓰겠다. 언어학에서는 담론과 담화를 구별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익숙한 용어를 사용하겠다.

3) 공기어란 대상어와 같은 문맥에서 함께 사용된 단어를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한 문장 내에서 같이 쓰인 단어를 공기어로 보았다.

4) 80개의 용례를 일일이 검토하지는 않았지만 대략 2:1의 비율로 가치중립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가 쓰였다.

5) 히브리어 ‘필레게쉬’를 무엇으로 번역할 것인지는 강의에서 생각할 문제로 주어진 문제였다. 그런데 이상원은 자신의 기고문에서 ‘필레게쉬’를 첩으로 번역하였다. 여기에서는 논의 중 용어의 혼선을 줄이기 위해서 글쓴이의 번역을 그대로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