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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시대의 철학적 인간학 - 니체의 “인류애”를 중심으로/이상범.원광대

 

한글 요약

본 논문은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숙고해보기 위한 시도이다. 오늘날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 론적 토대가 과학기술(NBIC(Nano-Bio-Information-Cognitive/나노, 바이오, 정보통 신, 인지)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의 미래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생명공학과 유전공학에 의해 생의 인문학적 토대의 상실에 대한 문제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인간의 자연적 조건을 극복하고자 했던 과학적 시도 와 기대가 오늘날 시작된 것이 아니듯이, 철학 역시 이 문제를 2500여 년 동안 사유해 왔다. 철학적 인간학은 수많은 논쟁과 성찰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묻고, 다시 그 지위 를 숙고할 수 있게 해주는 철학적 방법론으로서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서 본 논문은 "인류애"를 보편적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하는 니체의 철학적 시도를 그의 철학적 인간학의 토대로 규정하고, 이로부터 인간의 본질 적인 인간다움의 조건에 대하여 알아볼 것이다.

주제어: 철학적 인간학, 트랜스 휴먼, 포스트 휴먼, 인류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1. 들어가는 글 : 신의 죽음과 철학적 인간학

인간은 자연으로서의 생에 대한 해석을 마쳤고, 기계로서의 삶에 대한 번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미래 역사의 시작점에서 인류가 처음 물었던 인간의 존재론적 본성에 대한 물음이 다시 제기 되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이 다시 시작되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시도가 생기는 시점은 언제나 삶의 물음이 시대적으로 문제시될 때, 즉 곧 도래할 거대한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화 앞에서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트랜스 휴 먼과 포스트 휴먼 시대를 향한 예고는―특이점에 대한 커즈와일(R. Kurzweil) 의 예상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오늘도 현실로 나아가고 있다.1)

 

       1) 카인즈(Howard P. Kains)는 자신의 책 철학적 인간학(1989)에서 생물학적 진화 의 정지 이후 유일한 과제를 사회의 진화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과거와 현재에 관여할 뿐, 미래에 관여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30여년이 지난 지금과 비교 해보면, 포스트 휴먼과 인간 향상 기술이 얼마나 발전된 양식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하워드 P, 카인즈, 철학적 인간학, 정연교 옮김, 철학과현실사, 1996, 105-108쪽 참조).

 

인간 향상기술(Human Enhancement Technology)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그 기술이 인간 능력의 향상이 아니라, 생명의 구조를 변형시키고 인간의 존재론적 본성과 인간 다움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자연으로서의 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을 넘어서는 과 학을 활용하고 기계를 이해하며 자신의 생에 적용하는 특별한 존재이다. 하지만 삶의 자연적 공간을 넘어 인간 본연의 자연성마저 초월하고자 하는 과학적 시도 앞에 인간의 존재론적 본성과 인간다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다시 중요해지고 있다. 물론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의 이성적 능력에 따라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 해 노력해왔으며, 자신의 불완전한 자연성을 극복하기 위해 마치 본능처럼 더 높은 과학을 발전시켜왔다. 인간의 본질은 역사와 시대 안에서 규명된다. 즉 역 사적으로 볼 때 인간은 과학과 동행하며 삶을 변화시켜왔다. 지금까지 인류는 다양한 과학적 신기술이 담긴 제품들을 통해 삶의 변화를 실 현해왔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고유한 본성과 인간다움은 지켜져 왔다. 포스트 휴먼의 미래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은 과학과 동행해 온 지난 역사를 긍정적으 로 보지 못하거나 미래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묻는 다양한 인간학적 논의들은 현재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이라는 개념 안에 담긴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조금 더 명확 하게 규명하기 위한 철학적 성찰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과 동행해 온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은 많은 부분에서 풍요로워졌으며 그 역할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포스트 휴먼의 미래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역사적 변화보다 혁명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토대가 과 학기술(NBIC : Nano-Bio-Information-Cognitive/나노, 바이오, 정보통신, 인 지)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2)

 

    2) 포스트 휴먼은 더 이상 전통적인 덕의 방식으로 인간의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NBIC 기술이다. 이 기술이 비록 트랜스 휴머니스트들에 인간의 생물학적 능력을 제한하는 조건들을 극복할 수 있는 “형태학적 자유(morphological freedom)”를 약속할 수 있지만, 이 자유는 분명히 인간의 존재론적 본성 너머의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David Roden, The Ethics of Becoming Posthuman(David Roden, The Ethics of Becoming Posthuman), 2010, 1-2쪽 참조).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규정해주는 전통적인 조건으로부터 자 유로워진다면, 그는 포스트 휴먼적인 자유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이 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새로운 휴머니즘 안에서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 다. 그리고 뒤이어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이 다시 제기될 것이다.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의 미래에 대 한 철학적 성찰은 생명공학과 유전공학에 의해 생(生)의 인문학적 토대의 상실 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인간의 자연적 조건을 극복하고자 했던 과학적 시도와 기대가 오늘날 시작된 것이 아니듯이, 철학 역시 이 문제를 2500여 년 동안 사유해왔다. 철학적 인간학은 수많은 논쟁과 성찰 속에서 인간 의 본질을 묻고, 그 지위를 다시 숙고할 수 있게 해주는 철학적 방법론으로서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시대는 새로운 인간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 역시 인간의 존재가 육체 와 영혼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로부터, 니체의 개념에 의하면 “몸 (der Leib)”의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유전공학과 생명공학, 나노 공학과 인공지능 역시 근본적으로 인간이 몸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 만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머니즘의 과학적 이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 럼,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을 구성하는 전통적인 두 영역을 다시 분리시킬 수 있 거나, 다른 한 영역을 과학기술로 대체하거나 혹은 영속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 과 이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자연성을 초월하고자 한다. 2500여 년 전 인간에 대한 철학의 물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이 유는 육체와 영혼에 대한 전통 형이상학의 해석이 여전히 이 두 영역의 이원론 적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듯이, 포스트 휴먼시대의 과학은 이 두 영역의 트랜스 휴먼적 결합과 더불어 프로그래밍된 단절까지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에 대한 형이상학적-종교적 이원론이 세계에 대한 분리된 해석으로부터 시작 되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통해서 보증되듯이, 트랜스휴머니트스들이 기 대하는 미래의 혁명은 과학의 신적 창조성 아래 인간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니체의 “신의 죽음”은 절대적인 형이상학적 진리와 존재 그 리고 과학기술과 같은 거대담론 안에 인간의 존재론적 본성과 인간다움이 은폐 될 수 있는 위험성을 부각시킴으로서 오늘날에도 시의성 있는 문제의식을 발생 시킨다. 니체의 이 선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존재론적인 본성, 즉 그의 인간성과 인간다움은 변함없이 그 가치를 인간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지키 고자 할 때에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니체의 “신의 죽음”은 철학이 인간 안에 내재된 고유한 인간성을 재사유하는 자기인식의 학문으로, 다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실존적 지혜의 학문으로, 그렇게 인간의 삶에 기여하는 치유의 학문으로서의 역할을 하 기 위한 철학적 실험의 전제이다. 결과적으로 니체의 이 선언은 그의 철학적 인 간학이 전통 형이상학과 종교의 이원론과의 고리를 다시 점검하고 인간이 중심 이 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근본조건으로서의 역할을 한다.3)

 

     3) 니체의 “신의 죽음”과 더불어 푸코의 “인간의 죽음”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하는 견해 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오류이다. 그 이유는 니체와 푸코가 제시하는 죽음 의 개념적 의미는 신적 개념으로부터 발생하는 절대적 이원론의 현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 즉 인간적인 삶을 다시 새롭게 시작함과 동시에 죽음을 통해 고유한 인 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론적 토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푸코는 니체 의 신의 죽음이 (기존의) “인간의 죽음” 안에서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페르난 도의 이러한 견해는 니체와 푸코의 죽음이 삶과의 이원론적 관계 위에서 이미 전통 이원론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개념은 오히려 전통 이원론이 해체된 자리에서 인간의 고유한 인간다움을 드러내는 철학적 인간학의 근본토대이다 (Francesca, Ferrando, Humans Have Always Been Posthuman: A Spiritual Genealogy of the Posthuman, in: Banerji, D., Paranjape, M.R. (eds.) Critical Posthumanism and Planetary Futures, Springer, October 2016, 249-250쪽 참조 / 미셸 푸코,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 김광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148-149쪽 참조).

 

그리고 신의  죽음을 바탕으로 하는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은 병, 고통, 죽음을 극복한 트랜스 -포스트 휴먼의 인간다움에 대해서도 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해준다. 그리고 “신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 그 자체를, 다시 말해 인간 의 존재론적 ‘유한성’과 ‘사멸성’을 드러내는 니체의 철학적 시도는 그의 철학적 인간학을 통해서 보다 구체화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전통 형이상학적-종교 적 해석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을 탐구하고 해명하고자 하는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의 시도 이면에는 “인류애(Menschenliebe)”에 대한 그의 고유한 사고가 자리한다. 신의 죽음이 절대적 가치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실존적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라면, 철학적 인간학은 구체적인 삶의 양식을 탐구하는 철학적 방법론이다. 니체의 “인류애”는 신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의 인류애는 신의 보편 적 사랑과는 다른 방식의 것이기 때문에 신의 죽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니 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했던 이유는 절대적 진리와 존재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본 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해체되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장애였기 때문이다. 나아 가 니체의 “신의 죽음”은 신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로서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이성을 실마리로 하는 근대의 계몽까지 해체하는 시도이다. 그의 이러한 철학적 시도는 앞으로 도래할 미래의 포스트 휴머니즘을 진단함에 있어 인류가 지켜야 할 인간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해주는 기회를 부여해준다.4)

 

    4) 짐머만에 의하면 니체의 선언 “신의 죽음”으로 인해서 인류는 신학적 세계관으로부 터 해방되었다. 자연과학 역시도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켰다. 하지만 자연과학은 그 과정에서 인간을 이성적 지위로 축소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인간의 존엄성마저 약화시키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짐머만은 트랜스 휴머니즘과 포스트 휴머니즘이 인간해석에 대한 과학적 극단화로 진행될 경우, 과학기술의 정점에서 기존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다움이 사라지고 인간적인 가치가 자멸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Michael E. Zimmerman, Last Man or Overman. Transhuman Appropriations of a Nietzschean Theme, in: The Hedgehog Review: Critical Reflections on Contemporary Culture, Volume 13, No. 2 (Summer, 2011), 34-36쪽 참조). 짐머만의 이러한 우려는 바비히의 견해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트랜스 휴먼은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Babette Babich, O, Superman! Or being towards transhumanism: Martin Heidegger, Günther Anders, and media aesthetics, in: Divinatio, Maison des Sciences de l’Homme et de la Société (Sofia), 2013, 75쪽 참조). 

 

신이 부재하는 시대에 남는 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존재에 대한 사랑을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하는 인간에게 있다는 니체의 철학적 의도는 그의 철학적 인간학을 통해 구체화된다.

 

2. 포스트 휴먼 시대의 철학적 인간학

니체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인간뿐만 아니라, 이 원 인으로서의 낡은 가치들의 근원과 더불어 이 가치들의 현대적 의미와 가치를 다 시 한 번 점검한다. 그리고 이때 “신의 죽음”은 현대인의 실존적 증상과 원인 나 아가 그 배경과 환경까지 모두 치유의 대상으로 포괄하는 철학적 치유의 시도로 작용한다. 인간의 존재론적 본성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과학기술문명 속에서 “신의 죽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다시 대답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시의성 있는 철학적 사유의 기회로 다가온다.

 

나는 너희가 […]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믿는 것을 금지한다. 이런 것 들을 불신하는 것이 당연하며 이런 물음에 대한 가치 평가가 일찍이 어 디에서 유래했는지를 통찰하는 것이 적절한 일이다. 우리의 사유방식은 철저히 인간적menschlich이어야만 한다.5)

 

형이상학과 종교가 추구하는 절대적 진리와 존재의 관점은 인간의 존재성을 보편적으로 규정해주지만, 이원론적으로 해석함으로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신이 부재하는 포스트 휴먼시대에 진화론적 변화의 산물로서 의 인간이 아닌, 생명공학 및 유전공학을 통해 인간이 창조한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6)

 

    5) 니체, 유고(1882년 7월~1883/84년 겨울), 4[117], 박찬국 옮김, 책세상, 2005, 193쪽.

    6) 인간을 바라보는 생물학적 특징과 그의 정신적 측면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적 인간 에 대한 내용으로는, 장 디디에 뱅상 ∙ 뤼크 페리, 생물학적 인간, 철학적 인간, 이 자경 옮김, 푸른숲, 2002 참조. 이 책의 내용은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의 과학 적 토대로서의 생명, 유전, 인지공학을 생물학적이고 철학적(실존적) 관점에서 포 괄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학적 자료로서의 역할을 해준다. 

 

그리고 그의 인간다움의 존재론적 근거는 어떻게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인간적인 가치’ 들을 추구하겠지만, 본연의 자연성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적인 것’은 분명히 지 금의 것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사실은 인간적인 가치는 인간을 인간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존재하도록 만들어주는 본질적인 조건으로부터 비로소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생물학적 육체를 가진 존재이지만 “정신적인 성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7)

인간이 인간으로 명명된다 면, 그의 존재물음은 언제나 철학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적 인 간학은 인간의 존재 근거를 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묻는 실존적 방법론으로서 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의 철학은 이러한 정신적 성취가 실존적 자기 인식,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음을 보증해준다. 니체가 자신의 철학에서 제기하는 인간학적 물음들은 광의의 관점에서는 그 의 휴머니즘의 특징 안에 속한다. 그리고 “보편적 인류애”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하는 시도는 그의 휴머니즘의 색채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니 체가 자신의 초기 저서에서 수행한 학문과 교육, 교양에 대한 비판은 그의 휴머 니즘이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 그의 안에 내재한 조건들을 발견하고 철학적으 로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였음을 잘 보여준다.8)

 

      7) 에머리히 코레트, 철학적 인간학, 진교훈 옮김, 종로서적, 1988, 183쪽. 철학적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정신적 성취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설 명하는 글로는, 심상태, 인간.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2001, 293-301쪽 참 조. 플레스너(Helmut Plessner)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과 달리 스스로를 중심으로 사유하지만, 자신의 존재론적 결여―겔렌(Arnold Gehlen)에 의하면 “결여존재 (Mängelwesen)―를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탈중심적”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니 체에게 있어 탈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자연을 탈신화화함으로서 보다 높은 문명과 문 화를 창조하는 조건이기는 하지만, 실존적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조건은 될 수 없다(에머리히 코레트, 철학적 인간학, 50-52쪽 참조 /Arnold Gehlen, Der Mensch. Seine Natur und seine Stellung in der Welt, Wiebelsheim, 2004, 20쪽 참조).          8) 이에 대한 내용으로는, 니체,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 이진우 옮김, 책세 상, 2005, 165-291쪽 참조. 

 

이후 니체의 휴머니즘에 대한 의도와 목적은 그의 철학의 후기에 이르러 신의 죽음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이 때 그의 철학적 인간학은 다양한 철학적 개념을 통해 이 시도의 의도와 의미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준다.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을 논의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인간학적 테제 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어준다. “인간은 아직 확정  되지 않은 동물이다”9)와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10)는 인간은 본질 적으로 ‘미완성’의 존재이며, ‘완성’을 향한 그의 삶은 끊임없는 자기긍정과 극복 을 통해 실재에 가까워진다는 내용을 함의하고 있다.11) 니체는 이러한 자기긍 정과 극복의 인간유형을 위버멘쉬로 명명한다. 그리고 그의 철학적 인간학은 모 든 인간들에게 위버멘쉬로의 실존적 변화를 요구한다. 하지만 위버멘쉬를 향한 매순간의 시도는―영원회귀에 담긴 의미처럼―영원히 실현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시도는 미래를 향해 시도하는 현재, 지금, 이곳에 국한된다. 니체의 사상적 개념 중 그 어느 것도 포스트 휴먼을 위한 사상적 토대가 될 수 없는 이러한 이 유는 그의 모든 개념에 적용될 수 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위버멘쉬를 “대지의 의미”12)로 규정하며, 인간 실존의 의미를 이편의 세계로 국한시킨다. 생성하는 대지의 의미가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인 한,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이 지 향하는 인간유형으로서의 위버멘쉬는 결코 자신의 자연성과 인간성을 초월한 인간, 즉 과학기술을 통해 존재론적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향상된 포스트 휴먼일 수 없다. 그리고 위의 두 테제가 지향하는 근본적인 인간학의 목표는 “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이다.13)

 

     9) 니체, 선악의 저편, 62,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5, 101쪽.

    10)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4,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5, 16-17쪽.

    11) 미카엘 란드만, 철학적 인간학. 역사와 현대에 있어서 인간의 자기해명, 허재윤 옮김, 형설출판사, 1996, 13쪽 참조(Michael Landmann, Philosophische Anthropologie: menschliche Selbstdeutung in Geschichte und Gegenwart, Berlin/New York 1976, 8-9쪽 참조.

    12)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3, 18쪽.

    13) 니체, 즐거운 학문, 270, 책세상, 안성찬·홍사현 옮김, 2005, 250쪽. 철학의 역할 은 형이상학적 물음으로 제기되지만, 이 물음들은 결국 인간으로서 나는 누구인 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인간적인 조건들을 탐구하는 인간학의 물음으로 전 개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투겐트하트는 인간학을 “제1철학(die erste Philosophie)” 으로 표현한다(Ernst Tugendhat, Anthropologie statt Metaphysik, München 2010, 34-53쪽 참조). 

 

니체가 제시한 철학적 인간학의 물음으로부터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이를 위해 ‘나는 나의 어 떠한 가치를 지켜야만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물음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포스트 휴먼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인간적인’ 가치는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니체의 철학에서 인간적인 가치의 창조는 “신의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 해진다. 하지만 니체의 관점에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내려놓아야 할 신의 창 조적 권능을 다시 집어 들었다. 니체의 철학에서 ‘극복’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세 계와 삶을 초월하는 의미에서의 ‘향상’일 수 없다. 신의 죽음은 자신의 존재성을 초월하는 향상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으로 인식하는 기회로 작용한다. 이렇듯 니체의 오래된 이 선언은 마치 도래할 미래를 예견하는 것처럼, 미래 휴머니즘 의 본질을 밝혀내는 철학적 시도의 중요한 전제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만약 포 스트 휴먼시대와 미래의 인간다움에 대한 논의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있다면, 신 의 죽음으로 기존의 가치를 모두 상실한 후, 다시 새로운 가치를 찾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허무주의” 역시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의미가 크다. 그 이유 는 니체의 철학에서 허무주의는 신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인간의 고유한 인간다 움이 드러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니체가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해 극단적인 방식으로 요 청한 치유의 방법이 바로 영원회귀와 운명애, 즉 영원히 반복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은 위버멘쉬를 바탕으 로 기존 인간해석에 대한 비판과 해체를 넘어14),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을 인간 다움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니체의 철학에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인 간유형으로서의 위버멘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무엇이 인간적인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즉 인간의 고유한 인간다움에 대 한 물음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한다.15)

 

     14) 위버멘쉬에 대한 의미분석을 바탕으로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을 논의하는 글로는, Andrea Bertino und Werner Stegmaier, Nietzsches Anthropologiekritik, in: Marc Rölli(Hrsg.), Fines Hominis?: Zur Geschichte der Philosophischen Anthropologiekritik, Transcript Verlag 2015, 65-80쪽 참조.

     15) 미셸 푸코,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 149쪽 참조.

 

니체가 제시하는 이 사랑은 4차 산업혁 명의 과학적 인간해석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시대에 대한 윤리적 성찰의 토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의 특징 :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내 인간성(Humanität)은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는 데 있지 않다. […] 끊임없는 자기 극복이다.”16)

 

니체의 이 말처럼, 그는 자신의 철학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가치를 제시하지 않는다. 형이상학과 종교 및 도덕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진정한 “인간성”은 스스로 자기 삶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기극 복”에 의한 실존적 향상―그의 표현에 의하면 상승과 성장―을 통해 규정되는 것일 뿐이다. 니체에게 있어 모든 인간 안에 내재한 본질적인 인간성은 자기극 복에 의한 결과이다. 다시 말해 자기극복에 의해 인간 안에 내재한 인간성은 보 다 분명해지며, 동시에 실존적 변화의 실현을 통해 표출된다. 니체는 이러한 과 정을 통해 인간의 진정한 인간다움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선언 “신의 죽음”으로 보증되듯이, 인간의 진정한 인간다움은 그 어떤 절대적 진리와 존재에 은폐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실존적 산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을 마지막 인간과 위버멘쉬 사 이에 세운 니체의 철학적 사고실험은 근본적으로 경계에 선 인간의 선택조차 문 제시한다.17) 매순간 경계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오히려 인간이 “사랑받 아 마땅한”18) 이유로 제시하며 위버멘쉬적 삶을 향한 선택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 선택이 가장 인간적인 것임과 동시에 그의 존재론적 본성으로서의 인간성과 인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16)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8,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2, 346쪽.

     17)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4, 21쪽 참조.

     18)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4, 21쪽.

 

인간다움이 “보편적인 인류 애”로부터 도출되는 평균적인 가치일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적 사고실험이 발생하는 이 경계는 ‘인간적’이다. 그 이유는 동물 과 인간, 마지막 인간과 위버멘쉬의 경계는 양 극단의 한계를 ‘인간’으로 제한하 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계에서의 사유는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에 대한 사유를 초월하지 않는다. 이 경계에서 인간이 내리는 선택은 영혼과 육체 중 그 어느 것에도 치우쳐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이 둘을 모두 포괄하는 몸의 존 재로서의 선택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 도래할 포스트 휴먼의 관 점에서 이러한 인간실존의 경계는 유전공학, 생명공학, 생체공학, 나노기술 등 의 과학기술로 인해 초월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울 수 있는 경계는 어떻게 재설정되는 것일까? 오히려 포스트 휴먼시대에는 이러한 인간적인 경계가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동물과 인간’의 경계가 ‘인간과 기계’로 변화되는 것일까?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동물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는 기계에 반해 불완전한 것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성적 사고를 통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서 근대의 시작을 열었 지만, 이성과 비이성의 이원론을 유발한 데카르트의 사상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이 경계를 다시 이원화하는 트랜스 휴머니스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스스로를 “미래의 철학자(Philosoph der Zukunft)”19)로 규정한 니체의 철학적 시도가 단순히 현재를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된 현재로부터 보다 건강한 미 래를 희망하는 것이듯이, 그의 철학적 사고실험과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을 다시 사유하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19) 니체, 선악의 저편, 210, 185쪽.

 

니체의 철학적 사고실험은 인간의 변화가능성을 그 안에 내재한 실존적 조건 안에서 사유하는 그의 ‘철학적 인간학’의 특징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해준다. 즉 그의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을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미완성의 존재, 즉 끊임없 이 ‘되어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약 인간이 ‘되어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면, 그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사랑하 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며, 이는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의 중심을 이루 는 주제이다. 형이상학적 진리와 종교적 존재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이 문제시하는 것은 바로 사랑의 방식을―자기 자 신에 대한 사랑으로―전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의 새로운 미래 인간유형 역시 ‘되어가는 존재’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불편한 신체의 일부를 또 다른 물질로 대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을 소프트웨어화 하는 시도 속에서도 인간의 생동하는 경험 은 더 이상 세상을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 지식과 지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 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측면에서 니체가 자신의 철학에서 시도하는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인간성이 그 무엇에도 은폐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 러내주고,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모습을 대변해줄 때 가장 인간적일 수 있 음을 보여준다.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인간성과 인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자유정신, 신의 죽음, 허무주의,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 영원회귀와 운명 애 등 다양한 철학적 개념들을 제시하지만, 이를 통한 그의 근본적인 시도는 자 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철학적 치유의 개념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이 중 보다 많은 힘을 추구하며 그 힘으로 스스로 삶의 변화를 실현하는 내재적 원리로서의 “힘에의 의지”는 인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 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 사랑의 방식이 본질적인 인간성과 인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존재의 양식임을 보증해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힘에의 의지 의 인간학적 원리로서의 자기극복은 자기 존재에 대한 사랑, 다시 말해 자기긍 정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자기 자신의 인간성과 인간다움 역시 이 사 랑을 통해서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영원회귀와 운명애는 이와 같은 자 신의 삶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가르침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렇듯 니체의 철학에서 “인류애(Menschenliebe)”는 그의 철학적 인간학의 근본전제이다. 하지만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은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인류애”를 자기긍정과 극복을 통한 개인의 문제로, 즉 ‘자기 자신 에 대한 사랑’으로 환원한다. 그렇다면 각 개인들은 어떻게 자신만의 고유한 삶 의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니체에 의하면 고통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디오니소스의 비극적 고통을 철학적 토대로 하는 그의 예술 철학은 고통이 종교적 내세 및 구원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게도 만들지만, 이와 반대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니 체는 자신의 초기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고통을 통한 철학적-예술적 자기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후 중기의 마지막 저서 즐거운 학문에서는 이 문제를 사랑의 문제로 구체화한다. “커다란 고통(der grosse Schmerz)”이라는 개념을 통해 니체는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사랑의 방식을 전환한다.

커다란 고통, 시간을 끄는 길고 오랜 고통, 생나무 장작에 불태워지는 고통만이 비로소 우리들 철학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지닌 궁극적인 깊이 에까지 이르게 하고, 모든 신뢰와 선의, 부드러운 가식, 온순, 중용 등 아마도 우리가 이전에는 우리의 인간성(Menschlichkeit)을 쏟았던 것들과 결별하도록 만든다. 나는 그러한 고통이 우리는 더 낫게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더 심오하게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다. […] 우리는 이 길고 위험한 극기 훈련을 거쳐 다른 사 람이 된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몇 개의 더 많은 의문부호를 갖게 되고, 특히 이제까지 물어왔던 것보다 앞으로는 더 많이, 더 심오하게, 더 엄격 하게, 더 강인하게, 더 악의적으로, 더 조용하게 질문을 던지겠다는 의지 를 지니게 된다. 삶에 대한 신뢰는 사라져버리고 삶 자체가 문제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을 필연적으로 우울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지 4차 산업혁명시대의 철학적 인간학 369 는 말라! 삶에 대한 사랑(die Liebe zum Leben)은 여전히 가능하다. 다 만 사랑의 방식이 바뀌는 것일 뿐이다(nur liebt man anders.).20)

니체는 이 글에서 고통의 철학적 역할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1) 고통은 자 기 존재의 깊이에 이르게 한다. 즉 자신이 추구해온 기존 삶의 모든 가치들을 의 심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결별하게 만든다.

2) 니체는 고통의 이러한 특징을 인 간을 더 심오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렇듯 고통은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스러운 인식으로 시작해서 삶 자체를 문제시하는 실존적 자극으로 작용한 다.

3) 하지만 니체는 고통이 인간과 그의 삶을 우울하게 만드는 조건으로 보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형이상학적 진리나 종교적 존재에 의존하게 만들지 않는다.

4) 그 이유는 니체에 의하면 고통은 자신을 사랑하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에서 고통은 삶을 사랑하는 증거이자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 리고 위버멘쉬를 향한 실존적 변화의 경계에 선 인간과 더불어 신의 죽음 이후 에 겪게 되는 “허무주의” 역시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니체는 결코 이 고통을 삶의 무의미로 인한 실존적 공허를 유발하는 부정적인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실존적 위기를 통해 자기 자신 에 대한 사랑의 방식을 전환함으로써 삶의 새로운 변화를 도출하고자 한다. 새로운 사랑의 방식을 제시하는 그의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 안에 내재한 인간 성과 인간다움의 본질을 드러냄으로서 4차 산업혁명시대 속 철학의 역할을 다 시 한 번 숙고하게 해준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으로 특징지어지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 사랑은 과학 기술에 의해 향상된 인간의 본질과 더불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들을 성찰 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줄 것이다. 또한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의 토대로서 인간이 사랑받아 마땅한 그 이유는 과학기술에 의한 혁명적 과정에서 문제시될 수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인간성과 인간다움을 해명해주는 역할을 해줄 것이다. 만약 이 사랑이 포스트 휴먼시대의 또 다른 자기보존의 방법이 된다면, 이는 니 체가 자신의 철학에서 비판한 “마지막 인간(der letzte Mensch)”의 이상이 될지 도 모른다.21)

 

    20) 니체, 즐거운 학문, 「제2판 서문」, 3, 28-29쪽.

    21) 박찬국, 「트랜스휴머니즘, 이상인가 신화인가 : ‘능력증강 기술이 나아가야 할 바람 직한 방향에 대해서’」, 현대유럽철학연구, 제53집, 한국하이데거학회/한국해석학 통합 학회지, 2019, 329쪽 참조

 

4.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의 전제로서의 “인류애”

새로운 문화의 특성 : 앎은 문화의 토대이고 유용성은 문화의 영혼이 다. 이제 도대체 어디에서 고귀한 인간성의 희망을 갖겠는가? 인간에 대 한 사랑이 어디에서 오겠는가? 개개인을 고귀하게 만드는 일에 있어서 종교가 더 이상 유용하지 못하고, 진리에 대한 개개인의 감각도 격분하 고 있다. “신에 대한 사랑”은 단지 관용구로 그친다.22) 인간의 실존적 상승과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를 점검하고 보다 새롭고 건강한 미래 문화를 창조하고자 했던 니체의 시도는 인간 안에 내재된 “고귀한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인간학의 문제의식을 통해 구체화 된다. “이제 도대체 어디에서 고귀한 인간성의 희망을 갖겠는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어디에서 오겠는가?”라는 물음에 니체는 이 사랑이 더 이상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일 수도, 신을 향한 것일 수도 없음을 분명하게 말한다. 니체가 새로운 미래문명을 희망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인류애를 비판하 는 이유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신과 인간 사이에 형성되는 일종의 위계질서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자신 안에 내재된 가능성에 관심을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러한 실존적 자기상실의 증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 것은 마치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면 크고 작은 것이 개미처럼 비슷해지는 것과 같다. ―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인간애의 감정 속에 있는 이러한 인간의 경시 (Geringschätzung des Menschen)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23) 보편적 인류애와 그 감정 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역시 보편화되며, 결과적으로 인간은 평준 화될 수밖에 없다.

 

니체는 “보편적 인류애”24)의 감정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경시, 다시 말해 인간의 소인화(Verkleinerung) 증상의 원인을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3) 니체, 유고(1885년 가을~1887년 가을), 1[66], 책세상, 이진우 옮김, 2005, 31-32쪽.

       24) 니체, 아침놀, 147, 박찬국 옮김, 책세상, 2004, 170쪽.

    

1) 육체와 영혼, 이성과 비이성 등과 같이 서로 반대되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성향임에 반해, 형이상학과 종교가 이원화했으며,

2) 이로부터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초월한 것들을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3) 니체 는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인간이 자신의 자기(Selbst)를 다른 자기에게 맡겨버리는 때에 이렇게 된다!”25)

 

니체의 이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정당화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임에도 불구하고, 그 특권을 신에게 위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니체가 “그리스도교의 위험”을 “개인의 불멸에 대한 신앙”으 로 규정할 때, 인간의 생물학적 노화의 시간을 초월하는 포스트 휴먼에 대한 희 망 역시 그것이 절대적일 때에는 모두가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불평등한 신앙 이 될지도 모른다.26) 포스트 휴먼의 미래를 인간이 신을 대체함으로써 사피엔 스 자체를 변화시키는 시대로 규정하는 하라리(Yuval Harari)의 견해는 이 사 실을 보증해준다.27)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남는다. 신을 향한 종교적 구원은 신의 죽음을 통해 실효성을 잃게 된다. 하지만 도래할 포스트 휴먼의 미래에 신 의 역할을 대신하는 과학이 또 다른 의미에서 구원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즉 인간의 영혼과 정신이 소프트웨어화 되는 것 역시 유한한 삶에 대한 구원이자 불멸을 향한 소망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때의 인간다움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니체의 이러한 비판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인류애를 문화적 토대로 구축하 는 도덕적 역할을 수행해 온 학문을 향해서도 진행된다. 그는 이제 형이상학과 종교의 사상적 동질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문화의 관점에서 학문의 과제를 다시 설정하고자 한다. 보편적인 인류애를 개인의 자기극복으로 전환하는 니체에게 있어 새로운 미래 문화에 기여하는 학문의 과제는 오히려 인간을 절대적 선에 반하여 악하게 만들고, 이타주의에 반하여 이기주의적으로 만드는 것이다.28)

 

      25) 니체, 유고(1887년 가을~1888년 3월), 10[28],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5, 232쪽. 이러한 현상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논의하고 있는 것처럼, 더 이상 자기 자신일 수 없는 자기 상실의 증상 과 동일하다.

       26) 니체, 유고(1888년 초~1889년 1월 초), 14[5],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4, 16-17쪽 참조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9. 580쪽 참조.

      27)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587-588쪽 참조.

      28) 니체, 유고(1880년 초~1881년 봄), 8[103], 최성환 옮김, 책세상, 2004, 530쪽 참조. 자칫 민감하게 보이는 니체의 이러한 시도는 도덕의 계보의 「제1논문」에서 논의하는 선과 악을 좋음과 나쁨으로 전환함으로써, 보편적 양심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의 삶에 책임을 다하는 주인적인 양심으로의 변화를 도출하기 위함이다. 즉 인 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조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중요한 것은 니체 역시 학문의 본질적인 역할과 영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학문이 구체적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저편 세계 의 진리와 존재를 탐구할 때, 그 가치는 더 이상 인간적일 수 없다는 것이 니체 의 주장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드는 문화는 결코 인간적일 수 없다. 미래에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과학기술로 대변되는 학문이 인간의 존 재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그의 존재론적 본질을 극복하는 문화적 토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기 자 신에 대한 본질적인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 필요 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으로부터 인간 안에 내재된 고유한 인간성과 인간다움이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한 사랑도 필요 하지만, 사랑 속에서 그 가치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래의 글에서 니체는 인간의 삶에 학문적 역할도 중요하지만, 이에 앞서 무 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그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라는 자신의 견 해를 밝힌다. 니체가 희망한 새로운 미래문화는 바로 학문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학문을 보증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인간적인 것’은 학문이 아니라, 인간과 삶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학문은 명령할 수도, 길을 가리킬 수도 없다 : 오히려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때에야 비로소 학문은 유용할 수 있다.29)

 

     29) 니체, 유고(1880년 초~1881년 봄), 8[98], 529쪽.

 

5. 뿔이 달린 학문의 문제

니체에게 있어 인간은 그 어떤 보편적인 의미로 규정되고, 절대적인 가치로 확정될 수 없는 존재이다. “이제 도대체 어디에서 고귀한 인간성의 희망을 갖겠 는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어디에서 오겠는가?”30)라는 니체의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 30) 니체, 유고(1875년 초~1876년 봄), 11[3], 332쪽. 

 

‘인간의 고귀한 인간성은 그 안에 내재되어 있으며, 인간에 대 한 사랑 역시 그 안에서 발생하며 정당화된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적인 인간성과 인간다움은 드러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신을 포기 하면, 우리에겐 인간보다 더 높은 존재의 유형이 없을 것이다.”31)

 

  라는 니체의 말은, 4차 산업혁명을 대하는 철학의 관점에서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휴먼 등 미 래의 삶을 규정하는 최고의 가치의 중심에는 항상 인간이 서있어야 한다는 의미 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중심에서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을까? 불멸의 인간을 탄생시키는 시도는 인간이 신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형상을 가진 또 다른 신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짐머만(M. E. Zimmerman)은 신과 같은 포스트 휴먼을 창조하고자 하는 그들의 소망을 “우주 의 얼굴(the face of the universe)”을 바꾸는 시도라고 표현한다.32)

삶의 불멸 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고민하는 인간성의 본질적인 특징과 이로부터 표 출되는 인간다움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스러운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의 막을 수 없는 큰 걸음 속에서 “인간적인”이라는 용어 자체가 의심스러워질 것이라는 하라리의 우려33)에 대하여 니체의 철학적 인간 학이 시도하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의 시도는 하나의 대답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학문의 유용성을 인간 삶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 하는 니체의 물음은 아래와 같은 하라리의 물음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문제의식 을 공유한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 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34)

 

    31) 니체, 유고(1885년 가을~1887년 가을), 1[66], 32쪽.

   32) Michael E. Zimmerman, Last Man or Overman. Transhuman Appropriations of a Nietzschean Theme, 42쪽.

   33)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586쪽.

   34)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586쪽. 

 

과학기술혁명에 의한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변형 속에서 위와 같은 고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진보”는 단지 인간의 존재성을 온전히 사유하지 않 은 “현대적 이념”에 불과한 것이 될 뿐이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의 실존적 상승과 성장에 기여하지 못하는 현대의 진보는 하강의 가치이다. 그 이유는 니체에 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을 넘어서는 향상(Enhancement)이 아니 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는 실존적 상승과 성장, 구체적으로는 “위버멘 쉬”로의 변화이기 때문이다.35) 그래서 니체는 인간의 실존을 포괄하지 못하는 진보를 “르네상스”보다 가치론적으로 아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36) 이러한 의미에서 니체가 “인류애의 제일 원리(erster Satz)”를 “만족이 아니 라 더 많은 힘”이라고 표현하며, 이에 대한 예로 “르네상스 양식의 덕”을 제시하 는 이유는 바로 그가 자기 자신의 실존적 조건을 바탕으로 스스로 상승하고 성 장할 수 있는 인간의 변화가능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37) 중요한 것은 니체 가 이 변화의 조건을 힘으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힘에의 의지”로 규명하고 있다 는 것이다.38)

 

       35) 니체의 위버멘쉬에 대한 조르그너(Stefan Lorenz Sorgner)의 트랜스 휴머니즘적 해석에 대한 비판으로는, (Joshua Merlo, Zarathustra and Transhumanism: Man is Something to Be Overcome, in : Scientia et Fides(edited by Leandro M. Gaitán), 7(2)/2019, 41-61쪽 참조). 조르그너에 대한 메를로의 비판은 포스트 휴 먼의 사상적 유사성을 찾기 위해서 니체의 위버멘쉬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즉 역사 적인 발전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전개된다. 그에게 있어 위버멘 쉬를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인간을 개선해야 하고 또한 개선할 수 있다는 인 간 향상(Human Enhancement)의 사상적 근거와 가능성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 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고통과 죽음이 없는 삶을 희망하는 트랜스 휴머니스트들에 반 해 니체는 오히려 고통과 죽음을 인간의 실존적 조건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차라투 스트라는 위버멘쉬를 대지의 의미(병, 고통, 삶, 죽음)라고 표현하며, 대지를 초월 하는 모든 가치(진리, 내세, 구원)들을 부정한다. 대지의 존재로서 대지의 의미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위버멘쉬로부터 이 대지를 초월한 또 다른 삶을 초월한다는 것으로부터 이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오류가 시작된다(Joshua Merlo, Zarathustra and Transhumanism: Man is Something to Be Overcome, 48-54쪽 참조).        36) 니체, 안티크리스트, 4,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2, 217쪽.

      37) 니체, 안티크리스트, 2, 216쪽 참조.

      38) 니체, 안티크리스트, 2, 216쪽 참조. 

 

즉 르네상스는 단순한 문화적-학문적 진보가 아니라, 인간의 힘 에의 의지가 자유롭게 표출된 시대의 이념인 것이다. 학문의 본질이 과학을 통해 증명되는 이성의 역사에서 니체는 학문의 문제를 비극의 종말을 불러 온 원인으로 규정한다. 더 이상 고통을 신화적-비극적-디 오니소스적으로 긍정할 수 없는 아폴론적 사고의 중심에서 니체는 학문의 본질 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비극의 죽음과 학문의 관계에서 니체가 인식한 염세 주의의 문제, 즉 당시 시대적으로 만연한 데카당스의 문제는 학문 자체가 아니라, 마치 뿔이 달린 듯, 삶을 이론적이고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학문의 위험한 유 용성에 대한 진단이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그리고 그의 삶에 유용하다는 이유 로 과학기술의 정당성은 확보되는 것일까? 뿔이 달린 학문의 문제는 결국 뿔이 난 삶의 문제로 직결된다. 학문 자체와 우리의 학문은 ― 그렇다. 삶의 증상으로 간주한다면 모 든 학문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조금 더 가혹하게 말하자면, 무엇으로부터 ― 모든 학문은 존립하는 것인가? 어떤가? 학문 은 어쩌면 염세주의에 대한 공포와 도피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진리에 대한 하나의 멋진 정당방위가 아닌가?39) 내가 당시 깨닫게 된 것은 두렵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은 황소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뿔이 달린 문제였으며, 아무튼 하나의 새로운 문제 였다. 오늘이라면 나는 그것이 학문의 문제 자체였다고 말할 것이다 ― 처음으로 문제점 많고 의심스럽다고 파악된 학문의 문제라고 말이다.40) 4차 산업혁명시대의 도래를 예측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시대를 대변하고 또 한 문제시하는 과학은 뿔이 달린 학문일까? 정말 과학은 뿔이 달린 상황을 유발 하고 있는 것일까? 고통을 실마리로 학문의 유용성을 진단하는 니체의 비판은 노화, 병, 죽음 등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다양한 인간 조건을 극복하고자 하 는 현재의 과학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아닐까? 니체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두 가지 충동으로 제시했던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 미래의 삶에도 여전히 필요 한 것이라면, 학문의 역할은 어떠해야만 하는 것일까?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으로 대변되는 낙관적 진보주의는 니체의 관점에 서 소크라테스의 합리적 이성주의처럼 세계와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니체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우리가 “이론적 낙천주의 자”41)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그의 철학이 그 근거가 되기를 희망할 것이다.

 

     39) 니체, 비극의 탄생, 「자기비판의 시도」1,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11쪽.

    40) 니체, 비극의 탄생, 「자기비판의 시도」, 2, 11쪽.

    41) 니체, 비극의 탄생, 15, 118쪽.

 

이렇듯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은 4차 산업혁명시대의 이념에 대한 점검과 더불어 철학이 지켜야 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숙고하게 해준다.

 

6.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 그리고 그의 인간다움에 대한 의문

“인간은 언제나 동물 이상이거나 동물 이하일 수 있을 뿐이지, 결코 동물일 수 없다.”42)

이 말은 셸러(Max Scheler)가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라는 그의 저 서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특징을 설명하는 중요한 명제이다. 4차 산업혁명을 바 라보는 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이 말은 다시 다음과 같이 변환될 수 있을 것 이다. ‘인간은 기계 이상이거나 기계 이하일 수 있을 뿐이지, 결코 기계일 수 없 다.’ 셸러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연의 일부로서의 생명체이면서 동시에 자 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고 나아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대 상들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정신적 존재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자 그 생명의 법칙을 따르는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은 정신적 활동을 통해서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고 그 세계 안에서 자유롭 게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시대의 트랜스 휴먼의 경우에 우려가 되는 것은―인간이 정신적 존재라는 사실을 바탕으로―기계와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향상, 즉 자신의 존재론적 생명성과 육체성을 초월한다는 데 에 있다. 그렇다면 오코넬(Mark O'Connell)의 말처럼, 트랜스 휴먼은 “동물로서 의 생명이 끝나고 기계로서의 생명이 시작”되는 존재유형을 대변하는 명칭으로 불릴 수 있을까?43) 4차 산업혁명시대의 다양한 과학기술은 인간과 기계의 결 합이 아니라, 기계에 인간의 정신을 프로그램화함으로써 새로운 하나의 자아를 창조할 수 있는 포스트 휴먼의 미래를 희망하고 있다. 만약 기계에 자아를 부여하는 마인드 업로딩(Mind Uploading Project)/전뇌 에뮬레이션(Whole brain emulation)을 통해서 인간의 뇌를 컴퓨터에 업로드 함 으로써 삶의 영생을 실현하는 경우에 인간의 몸은 더 이상 존재론적 본성과 인 간다움을 유지하는 조건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은 삶의 근거 가 아니라, 장식물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44)

 

      42) 막스 셸러,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 진교훈 옮김, 아카넷, 2001, 51쪽.

      43) 마크 오코널, 트랜스 휴머니즘, 노승영 옮김, 문학동네, 2018, 70쪽 참조. “전뇌 에뮬레이션(Whole Brain Emulation)”에 대한 설명과 인간의 생물학적 자연성에 대 한 의미와 가치를 논의하는 내용으로는, 같은 책, 69-101쪽 참조.        44) 이종관, 「포스트휴먼을 향한 인간의 미래?」, Future Horizon, 제26집, 과학기술 정책연구원, 2015, 5쪽. 

 

“유전자의 진화”를 모방하여 컴 퓨터로 프로그래밍 함으로써 생명의 법칙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도는 정신적 존재이지만, 결국 육체적 존재일 수 없는 “무생물적 존재”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인간의 인간다움과 삶의 의미는 어떻게 규정되어야만 하 는 것일까?45)

그리고 육체가 없는 정신의 사고형식은 컴퓨터의 디지털 회로 속 에서 온전히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사피엔스에서 트랜스-포스트 휴먼으로의 과학적 진화와 시대적 진보는 결국 인간의 사이보그화와 사이보그의 인간화를 가능하게 할까? 하라리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미래의 인간다움의 조건에 의문을 제기한다. 세월이 가면 사이버 공간은 새 바이러스들로 가득 찰 것이다. 아무도 일부러 설계하지 않았으며 무기물로서 진화를 거친 개체들로 이것들은 살아 있는 피조물일까? 그 답은 ‘살아 있는 피조물’을 어떻게 정의하느 냐에 달렸다. 이 바이러스가 유기체 진화의 법칙과 한계와는 전혀 무관 한 새로운 진화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다른 가 능성을 상상해보자. 당신이 뇌를 휴대용 하드드라이브에 백업해서 노트 북 컴퓨터에서 실행한다고 가장하자. 당신의 노트북은 사피엔스처럼 생 각하고 느낄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일까? 아니면 다른 누구일까?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완전히 새로운 디지털 마음을 창조한다 면 어떨까? 컴퓨터 코드로만 구성된 그 마음이 자아의식, 의식, 기억을 다 갖추고 있다면? 이 프로그램을 컴퓨터에서 실행하면 그것은 인격체 일까? 그것은 지우면 살인죄로 기소될까?46)

 

       45)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576-577쪽 참조.

       46)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577-578쪽.

 

삶을 삶으로서 인식하고 감각하지 못하는 프로그램화된 정신을 우리는 과연 살아있는 생명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로, 함께 감정을 나누는 정신적 존재로 여길 수 있을까?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과학기술이 언제 실현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알파고를 통해서 4차 산업혁명의 성격이 대중화되었 고, 우리의 삶으로 성큼 들어온 과학기술의 큰 걸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 었다. 하지만 알파고의 활동(딥러닝)만으로 우리는 아직 컴퓨터를 육체로 인식 하는 인간의 정신, 즉 인간 아닌 인간의 자아를 상상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 다. 니체의 중기 저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첨부된 「자유정신을 위한 책」이라는 부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적인 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영 역, 즉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한 자유로운 인식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그의 인간다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니체의 관점에서 ‘인간적인 것’은 초월된 인간적인 것, 즉 과학기술을 통해 향상되고 강화된 것일 수 없다. 니체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 에서의 인간적인 것은 오직 내가 나를 나로서 인식하고 또한 이를 바탕으로 나 를 변화시키는 내-외적 인식과 행위에 대한 가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위버멘쉬를 향한 자기극복을 인간향상의 사상적 토대로 여 기며, 과학기술을 통해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인간이해는 니체의 관점에서 자기극복이 아니라, 자기보존일 뿐이다.47) 그 이 유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커다란 이성”48)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과 학과 같이 인간의 존재론적 본성과 인간다움을 지배하는 거대한 이성이 아니라, 내가 진정한 나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몸의 이성’이기 때문이다.

  

     47) Babette Babich, Nietzsche’s Posthuman Imperative: On the Human, All too Human Dream of Transhumanism, in: Yunus Tuncel, ed., Nietzsche and Transhumanism: Precursor or Enemy?, Cambridge : Cambridge Scholars, 2017, 116쪽 참조.

     48)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52-55쪽 참조.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인간이 끊임없이 향상되고 강화되어야만 하고, 또한 지금까지 인류가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향상의 역사를 만들어왔다는 긍정 적인 평가49)에도 불구하고 육체와 정신이 합일된 몸의 존재로서의 위버멘쉬는 포스트휴먼의 인간적인 토대가 될 수 없다.

 

     49) 라메즈 남(Ramez Naam)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생명공학에 의한 인간강화의 미 래를 예측하고, 이 기술을 현실적으로 논의했다. 물론 인간강화와 생물학적 향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그를 여전히 트랜스휴머니즘의 최전선에 위치하게 만든다. 아래의 글은 생명공학에 의한 인간강화에 대한 그의 견해를 잘 드러내준다.

 

우리 인간은 그 다음 단계의 위상 변화를 상징하는 존재다. 인류의 출현은 생물학적 측면 에서 본다면 다세포 생물의 출현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침팬지와 박테리아는 한참 다른 생물이다. 인류는 그와 비슷하게 과거 지구상에 출현한 모든 생명체와는 확실 히 다른 존재다. 자기 자신과 아이들의 정신이나 육체를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닌 것 은 인류뿐이다. 또 스스로 발전을 관리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도 인류밖에 없다. 그 힘을 구사하면 인류는 그저 맹목적으로 번식하기 쉬운 유전자가 선택되도록 자연에 맡겨 두는 대신 스스로 발전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진화의 종착점에 서 있 는 게 아니다. 원래 진화에는 종착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앞에는 새로운 생명 의 가지가 뻗어 나갈 것이다. 우리는 그저 중간 단계에 불과하다. 다만 우리 인류는 앞으로 어떤 방향을 목표로 성장하고 변화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유전자에 좌 우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아이들에게 득이 되는 새로운 상활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다. […] 우리는 하려고만 하면 새로운 종류의 생명을 자라게 할 씨앗이 될 수 있다. 상상도 못할 만큼 새로운 생물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 생각해 보건대, 역사 상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명과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은 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메즈 남, 인간의 미래(More than Human), 남윤호 옮김, 동아시아, 2007, 307-309쪽 참조).

 

물론 그의 이러한 평가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인 간강화는 도래할 미래 삶의 양식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 역시 옳지 만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목적인 긍정 또한 옳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 향상과 강화가 인간의 본성과 인간다움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철학적으로 성찰하 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위버멘쉬로의 실존적 변 화는 과학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을 실존적 변화의 도구로 삼아 정신적으로 강화되고 향상되어가는 인간유형이기 때문이다. 포스트 휴먼 시대에는 나 아닌 것으로부터 나를 찾고, 나 아닌 것을 나로서 생각하고 느껴야하는 새로운 인식 과 윤리의 문제가 중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결국 다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의 답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7. 근대문명의 인간다움에 대한 니체의 문제의식

근대인의 문명화된 삶의 양식 속에서 인간다움의 상실증상을 발견한 니체는 자신의 철학적 인간학을 통해 이 문제를 해명하고자 한다. 과학기술을 통해 새 로운 문명을 창조하고자 했던 근대 유럽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기대조차 하지 못 했던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도출했고 또한 실현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의 이면에서 경직되어가는 인간 실존의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위험성을 철학적으로 진단하며 치유를 시도한 철학자는 니체였다. 니체의 이러한 철학적 관점은 과학기술문명이 인간의 외적인 삶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이때 그의 내면세계는 변화의 힘―니체에 의하면 “힘에의 의지”― 을 잃어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내보인다. 다시 말해 니체는 바쁜 일상을 살아가 며 자신의 내면을 돌보지 못하는 자기 상실의 증상이 만연한 시대 속에서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되는 인간의 자기 인식, 즉 진정한 인간다움에 대한 의문을 제기 하는 것이다.

 

숨가쁘게 서두르는 그들의 노동은 […] 늙은 유럽에도 이미 감염되어 이곳을 야만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기이한 정신 결여증을 퍼뜨리기 시작 했다. 이제 사람들은 휴식을 부끄러워하며, 오랜 사색에 대해서는 거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까지 한다. 생각하면서 시계를 손에 들고 있고, 점 심을 먹으면서 주식 신문을 본다.―언제나 무언가를 “놓치는 것”은 아닌 가 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 무엇보다도 모든 여유를 위한 시간과 능력을 사람들은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왜 냐하면 이득을 좇는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꾸며내고, 계략을 짜내고, 남 을 앞지르는 일에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신을 모두 소모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기쁨을 찾는 일은 이미 “피로 회복의 필요”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스스로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기 시작했다.50)

 

위의 글에서 니체가 “기이한 정신결여증”으로 진단하는 근대인의 증상은 바 로 근대문명에 폄하된 인간의 인간다움, 즉 그의 ‘정체성의 망각’을 향하고 있 다. 인간을 “힘에의 의지”의 존재로 이해하는 니체에게 있어 내적 변화의 정지는 “힘에의 의지”의 정지, 즉 인간 본연의 인간성과 보다 인간다워질 수 있는 가능 성의 정지에 불과할 뿐이다. 니체가 인간의 존재론적 원리를 “힘에의 의지”로 규 정하며, 한 순간도 자신의 변화를 멈추지 않는 존재로 제시하는 이유는 과학기 술문명의 그림자로 살아가며 자기 안에 내재된 변화가능성을, 다시 말해 인간 본연의 인간다움의 상실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니체가 진단한 현대문명의 위험성의 근원은 그리스도교적 동정, 즉 “인류애” 에 의한 현대적 사랑의 실현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이 지점에서 경계한 점은, 만약 보편적인 사랑이 강요된다면 마땅히 모든 인간들이 그 사랑의 가치를 추구 해야만 한다는 절대적 믿음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 믿음을 경계로 선과 악, 옮음 과 그름의 가치가 이원화되며, 현대에도 유지된다는 것이었다. 니체가 후기 저 서 선악의 저편에서 문제시하는 현대의 이념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제 기된다.51)

 

    50) 니체, 즐거운 학문, 329, 556-557쪽.

    51) 니체, 선악의 저편, 212, 190쪽 참조.

 

하지만 니체에게 있어 철학자는 새로운 인류애를, 즉 보편적 진리의 추구가 아니라, 개인이 자유롭게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이 문화적으로 보편화되어 시 대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다. 철학적 인간학의 일환으로 수행되는 니체의 이러 한 철학적 시도는 인간의 인간성과 인간다움이 절대적 가치의 해방으로부터 비 로소 표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니체의 철학적 견해를 따라가면, 포 스트 휴먼의 미래가 보편적 인류애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을지라도, 철학은 그 이면에 담긴 인간학적 문제들을 진단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래 의 글에서 니체는 자신이 제시하는 사랑이 보편적인 사랑, 즉 “인류애”일 수 없 음을 분명히 말한다. 우리의 병든 현대성의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교적 동정보다 더 병들 어 있는 것은 없다. 여기서 의사이고 여기서 가차 없게 되며 여기서 칼을 들이대는 것 ― 이것이 우리의 일이며, 이것이 우리 방식의 인류애 (Menschenliebe)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철학자인 것이다.52) 채워질 수 없는 근대인의 욕망과 포스트 휴먼 시대의 욕망은 동일한 것일까? 불완전한 존재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고 또한 초월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의 본성 일까? 인류는 이러한 역사의 과정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게 인간은 한정된 시간 동안 역사의 변화를 목격하고, 그로부터 도출된 가치를 따르는 자일뿐일까? 과 연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인간적인 가치는 무엇이고, 그 가치는 어떻게 지켜질 수 있을까?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문」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인간들에게 “위버멘쉬”를 제시하며 한 말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 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의미 있는 자극으로 주어진다.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Übermensch)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 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 가?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것들은 그들 자신을 뛰어넘어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자신을 극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돌아가려 하는 가?53)

 

       52) 니체, 안티크리스트, 7,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2, 221쪽.

       53)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3, 16-17쪽.

 

물론 니체의 이 말은 실존철학적 관점에서 읽히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의 이 말에 담긴 의미를 보다 확장시키면 거대한 문명의 발전 속에서 인간은 여전 히 자기 자신을 극복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존재를 해명해야만 하는 과제, 다시 말해 인간 본연의 인간다움을 성찰해야만 하는 실존의 과제를 가질 수밖에 없 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과학기술의 혁명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는 인류 의 미래, 보다 구체적으로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이라는 “거대한 밀물”에 맞서 능동적으로 이 과제의 답을 찾아야만 한다는 철학자 니체의 요구를 만나게 된다. 니체에게 있어 이 거대한 삶의 과제 앞에서 “썰물”이 된다는 것은 자기극복이 아니라, 삶의 하강과 퇴화와 같은 수동적인 자기보존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니체가 자신의 철학에서 인간의 실존적 건강을 위해 수행하는 다양한 개념 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을 썰물로 이해하는 것은 철학의 직무 유기이다. 철학은 세계와 인간, 인간과 삶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관계 론적으로 사유해야만 한다. 니체의 철학과 철학에 대한 그의 이해는 인류 앞에 놓인 거대한 밀물에 대해 철학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우리는 철학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나아가 우리가 철학에 대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대답해줄 것이다.

 

8. 나가는 글 : 포스트 휴먼 시대의 허무주의

니체의 철학에서 “허무주의”는 신이 부재한 시대의 현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 는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의 「제3논문」에서 논의하는 것 처럼 단 하나의 이상―그에 의하면 “금욕주의적 이상”54)―을 추구하는 과정에 서 발생하는 자기상실의 증상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의욕 하는 존재 이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의 망각으로부터 발생하는 실존의 병이다.

 

    54)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5, 458쪽.

 

만약 포스트 휴먼의 미래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인간성과 고유 한 인간다움을 사유하지 않는다면, 그 미래는 또 다른 허무주의를 유발하게 될 지도 모른다. 포스트 휴먼 시대의 허무주의는 인간적인 가치의 상실을 원인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다.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논 의하는 오늘날 우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특이점(Singularity)을 예측하고 있 다. 니체가 예측한 허무주의의 위험성도 언젠가 도래할 미래를 오늘의 관점에서 철학적으로 사유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마치 니체가 시도했던 것처럼, 허무주의의 가능성을 인간과 삶의 관점에서 숙고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 여기서 말하는 자는 지금까지 숙고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자신의 이득을 먼 곳에서, 외부에서, 인내에서, 지체에서, 뒤처 짐에서 발견하는 본능에서 출발하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그리고 은둔 자로서 ; 이미 모든 미래의 라비린스에서 한 번 길을 잃었었던 감행하는 정신으로서 ― 그리고 유혹자-정신으로서 ; 무엇이 올 것인지를 말할 때에는, 빙 둘러보는 예언하는 새의 정신ein Wahrsagevogel-Geist로서 ; 유럽 최초의 완전한 허무주의자der erste vollkommene Nihilist로서, 그러나 허무주의를 이미 자신의 내부에서 끝까지 체험해본 자로서 ― 허 무주의를 자신의 뒤에, 자신의 밑에, 자신의 밖에 두는 자로서……55)

 

허무주의에 대한 니체의 철학적 진단이 포스트 휴먼의 미래에도 사상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이유는, 기나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형이상학적으로든 종교적으 로든 고통을 지배하고 싶어 했고, 또한 불멸의 삶을 꿈꾸었던 존재론적인 바람 이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을 대변하는 다양한 과학기술을 통해서 실현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허무주의는 그 끝에 이르기까지 생각된 우리의 중요한 가치들과 이상들의 논리”56)라는 니체의 말은, 현재 제기되고 있 는 포스트 휴먼시대에 대한 다양한 인간학적 우려들이 그 언젠가 허무주의의 원 인으로 작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측해볼 수 있게 해준다.

 

      55) 니체, 유고(1887년 가을~1888년 3월), 11[411], 4, 518쪽 참조.

      56) 니체, 유고(1887년 가을~1888년 3월), 11[411], 4, 518쪽 참조. 

 

또한 “나는 다가오고 있으며, 더 이상 다르게 올 수 없는 것을 기술한다 : 허무 주의의 도래. 이 역사는 지금 이미 말할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허무주의 에 대한 니체의 시대적 진단은 곧 도래할 미래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인식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허무주의의 위험성을 “종말로 가기를 원하며, 더 이상 숙 고하지 않고, 숙고하기를 무서워하는 폭풍”과 같다는 그의 표현은 포스트 휴먼 의 미래를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인간성과 인간다움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는 강한 요청으로 들린다.

 

나는 다가오고 있으며, 더 이상 다르게 올 수 없는 것을 기술한다 : 허 무주의의 도래. 이 역사는 지금 이미 말할 수 있다 : 왜냐하면 필연성 자 체가 이미 여기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미래는 이미 백여 가지 징 후 안에서 말해지고 있으며, 이 운명은 도처에서 자신을 고지한다 ; 미래 의 이런 음악에 대해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우리의 유럽 문화 전체는 이미 오래 전 한 세기 한 세기 자라났던 긴장의 고문을 받으며 마치 대혼 란으로 내닫듯 움직이고 있다 : 동요하고 난폭하게 허둥대고 있다 : 종말 로 가기를 원하며,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숙고하기를 무서워하는 폭풍 과도 같이.57)

 

허무주의가 신의 죽음으로 인해 기존의 모든 인간적인 가치의 상실을 유발하 는 사건이라면, 포스트 휴먼의 미래는 우리에게 인간적인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 한 숙고하는 기회로 작용한다. 포스트 휴먼의 미래 역시 마치 허무주의처럼, 이 미 수많은 징후 안에서 말해지고 있다. 우리가 직면할 포스트 휴먼의 미래는 분 명히 인간적인 가치의 종말을 향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성과 인간다 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근본 토대로서 작용할 것 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인간이해의 시도는 니체의 철학에서 “보편적 인류애”의 전환,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의미와 가치의 해명으로 진행된다. 지금 이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부터 포스트 휴먼 시대가 지향하는 목표를 근본적으로 숙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은 생명보수주의자들(bioconservatives)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 라58),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 본연의 사유가 앞으로 도래할 포스트 휴먼의 미래 를 윤리적인 물음에 앞서 수행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증해준다. 인간성과 인 간다움은 니체의 관점에서 신이 부재한 시대에 인간적인 조건이 되어야만 하며, 포스트 휴먼시대 역시 이 조건을 필요로 한다. 니체가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한 “미래의 복음서”를 “힘에 의 의지. 모든 가치의 전도에 대한 시도”59)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허무주의는 스스로를 힘에의 의지의 존재로서 인식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인간적인 가치들을 창조하는 삶을 통해 극복된다.

 

    57) 니체, 유고(1887년 가을~1888년 3월), 11[411], 2, 518쪽 참조.

    58) 포스트 휴먼의 다양한 입장들 중, 생명보수주의자들에 대한 내용으로는, 이재승, 「포 스트휴먼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가?」, 철학논총, 제94집, 새한철학회, 2018, 26-31쪽 참조.

    59) 니체, 유고(1887년 가을~1888년 3월), 11[411], 4, 518쪽 참조.

 

다시 말해 이러한 삶으로부터 인간성과 인간 다움은 그 가치를 잃지 않게 된다. 힘에의 의지가 인간의 존재론적 본성을 대변 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니체의 이 생각은 포스트 휴먼 시대의 인 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니체의 철학에서 힘에의 의지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주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 다움의 존재론적인 원리로서 작용한다. 니체에게 있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삶 이란 바로 힘에의 의지의 존재로서 자신 안에 내재된 인간적인 가치들을 인식하 고 자신만의 고유한 인간다움을 창조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다움의 근본조건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규정한다. 이 사랑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된다. 즉 자기 존 재에 대한 사랑 속에서 인간향상은 ‘위버멘쉬적(übermenschlich)’일 수는 있어 도, 자신의 존재론적 본성을 초월하는 것일 수는 없다. 이 사랑이 인간의 고유한 인간다움을 창조하는 전제가 될 수는 있지만, “보편적인 인류애”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 그렇게 열광적으로 열망하며 이야기했던 사 람들은 사랑을 적게 받은 사람들이다. 보편적인 인간애라는 것은 거의 배겨낼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60)

 

니체의 이 말처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본 적 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 다른 존재로부터의 사랑을 갈망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 여」에서 이 사랑을

“더 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 커다란 사랑”61)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60) 니체, 유고(1880년 초~1881년 봄), 4[210], 197쪽.

     61)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331쪽.

 

니체가 요청하는 이 “커다란 사랑”은 바로 위버멘쉬를 향한 사랑, 즉 내가 나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을 의미한다.

위버멘쉬가 포스트휴먼의 진화론적-인간학적 조건이 된다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의미 역시 변할 수밖에 없다.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을 대변해주는 개념으로서의 위버멘쉬 안에 내재된 의미를 통해서 ‘자기 존재에 대한 사랑’이 인간다움의 본질적인 조 건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위버멘쉬로의 변화를 보증해주는 자유 정신, 신의 죽음, 힘에의 의지, 허무주의, 영원회귀와 운명애 등은 이 사랑을 실 현하는 과정을 보증해주는 개념이다.

과학으로 열어가는 새로운 미래의 권력은 과학인 것일까? 아니면 인간일까? 철학은 그 답에 ‘인간’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과학과 인간이 공유하는 존재론적 조건이고, 이 조건을 존재론적으로 성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철학의 역할이다.

니체에게 있어 ‘사랑’은 인간과 삶의 방식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존재론적 척도이다.

인간다움의 조건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삶을 ‘인간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시대의 과학적 혁명으로 대변되는 트랜스 휴먼과 포스트 휴먼의 인간향상은 이 척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물론 포스트 휴먼 시대에서도 삶의 인간적인 의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의미에 대한 가치 론적 의문이다.

니체의 철학적 인간학의 전제로서의 자기 존재에 대한 사랑은 포스트 휴먼시대의 인간과 인간다움의 존재론적 조건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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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hilosophical anthropology in the era of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Focusing on Nietzsche's Humanity

Lee, Sang-Bum(Wonkwang Univ.)

This paper is an attempt to contemplate ontologically humans in the era of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represented by transhumans and posthumans. What we are concerned about today is that the human ontological foundation can be replaced by science and technology (Nano-Bio-Information-Cognitive/Nano, Bio,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Cognition). The philosophical reflection on the future of transhumans and posthumans begins with a consciousness problem about the loss of the humanities foundation in life due to biotechnology and genetic engineering. And just as scientific attempts and expectations to overcome human natural conditions did not begin today, philosophy has contemplated this problem for over 2,500 years. Philosophical anthropology will serve as a philosophical methodology that allows us to question the essence of Human and recontemplate its position amid numerous debates and reflections. In this sense, this thesis defines Nietzsche's philosophical attempt to convert humanity into love for oneself, not universal love, as the basis of his philosophical anthropology, and from this, we will examine the conditions of humanity essential to humanity. Keywords: Philosophical anthropology, Transhuman, Posthuman, Humanity(love for mankind), Love for oneself ▫

 

2020년 11월 09일 접수   2020년 12월 14일 심사완료    2020년 12월 23일 게재확정

한 국 동 서 철 학 회 동서철학연구 제98호, 2020. 12.

 

4차 산업혁명시대의 철학적 인간학 - 니체의 “인류애”를 중심으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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