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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과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어디서부터 갈라지는가? - 불교의 4대 학파와 화이트헤드 과정철학 간의 범주적 차이 문제/정강길.서강대

 한글 요약

이 글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불교철학 간의 범주적 차이 문제를 논한 글이다.

화이트헤드는 불교에 대해 “사람들은 내면으로 칩거하고 외계는 흘러가는대로 내맡긴 다”고 봤을 만큼 도피의 종교로서 매우 각박한 평가를 내린 바가 있다.

화이트헤드는 불교에 대해선 무지했던 것일까? 양자 간의 비교 연구들은 지금까지 대부분은 대승불교와의 비교 고찰에 집중된 점이 있어왔지만, 이 글에선 대승불교의 형성 이전인 아비 달마불교 시절, 소위 불교 4대 학파로도 알려진 ①설일체유부와 ②경량부 그리고 대승 불교의 두 핵심 기둥인 ③유가행파와 ④중관학파와의 철학적인 범주의 비교에 주목한 다.

여기서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실재론은 <외계 실재성>을 인정하는 원자론에 속한다는 점에서 대승불교보다 오히려 소승으로도 폄하됐던 ①설일체유부와 ②경량부 불교사상의 틀에 좀 더 가깝다고 본다.

우선 대승불교에선 실재로서의 극미론, 즉 불교의 원자론을 버렸었지만 적어도 ①설일체유부와 ②경량부 불교는 실재로서의 원자론을 폈다는 점에서 범주적 틀로서는 화이트헤드의 원자적 실재론에 좀 더 근접된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범주는 분명한 실재론에 속하며 관념론에 대해선 적극 비판하는 위치에 있다.

또한 화이트헤드의 원자적 생성 개념은 관계와 과정으로서의 실재이면서, 그것은 저마다 <환원불가능한 고유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③중관학파가 비판하는 실체론적 자성(自性) 개념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또한 ④유가행파의 세친은 극미설에 서 유방분(有方分)은 무한히 분할되는 문제가 있다고 봤었지만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선 오히려 무한분할의 가능성을 반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식불교의 틀과도 들어 맞질 않는다.

반면에 실재로서의 극미설을 주장하는 ①설일체유부와 ②경량부와의 비교에 있어선 외부 대상에 대한 직접적 지각이 아닌 표상(表象)을 주장하는 경량부의 입장이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좀 더 가까운 것으로 본다.

따라서 적어도 철학적 범주로서의 비교에 있어선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경량부와는 더 가깝고 오히려 대승불교 와의 간격 차이는 더 큰 것이어서 바로 그 지점에선 양자 간에 범주적 틀로서의 괴리 가 발생된 것으로 여긴다.

특히 대승불교에 속하는 유식사상의 골격은 <마음 중심 불 교>로의 전환에 매우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이 글에선 오히려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을 통해 외계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비실체론적인 생멸하는 자성 개념의 모색과 최소 실재 단위로서 원자설을 다시금 새롭게 갖추어야 함을, 그리고 불교철학사 에서 보면 이것은 경량부 불교 또는 적어도 그 당시 아비달마불교 시절의 치열했던 쟁론들을 다시금 적극 검토해야 할 것임을 요청한다고 볼 수 있다.

 

주제어: 화이트헤드, 과정철학, 대승불교, 아비달마불교,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가 행파, 중관학파, 극미, 원자론

 

만족스러운 형이상학적 체계에서 나오는, 존재들에 관한 잘 정의된 범주의 도식이 없을 경우에, 철학적 논의의 전제는 모두 의심을 받게 된다.” - A. N. 화이트헤드

 

 

1. 머리말

1) 화이트헤드는 왜 불교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을까?

현대철학사에서 <과정>과 <관계>로서의 <유기(체)적 실재론>organic realism을 추구했던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자신의 성장배경과도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서구 문화권의 기 독교에 대해선 상당한 독설을 표했을 만큼 주류 기독교 전통에선 벗어나 있다. 반면에 불교에 대한 언급은 기독교에 비하면 매우 극소한 편이다. 하지만 불교 에 대해서도 그리 좋은 평가를 내린다고 보긴 힘들다. 화이트헤드가 만들어가 는 종교(Religion in the Making, 1926)에서 밝힌 바는, 기독교와 불교를 합리 불교철학과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어디서부터 갈라지는가 627 적 종교의 대표 사례들로 손꼽으면서도 두 종교 모두 초기의 생명력을 잃고 쇠 퇴하는 중에 있다1)는 점을 지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념의 모험 (Adventure of Ideas, 1934)에서 밝힌 불교 이해를 보면, 현세에서의 환영은 지나갈 것이기에 수행을 통해 <신비스런 평정심>mystic tranquillity을 찾게 되면 이를 완전히 벗어나거나 끝낼 수 있는, 즉 이 세상에 대한 절망을 <폐기를 위한 프로그램>a program for abolition을 통해서 극복하는 신비적 종교로 보고 있었다.2) 특히 불교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그의 생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크게 바뀌진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남긴 프라이스(L. Price)와의 대화록 (Dialogue, 1939)에서 좀 더 분명하게 밝힌 바가 있다(*1941년 12월10일 대 화 기록).

 

P : “불교는 어떻습니까?”

W : “불교는 도피(escapism)의 종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으 로 칩거하고(retire) 외계(externals)는 흘러가는 대로 내맡겨버 립니다. 악(evil)에 대한 확고한 저항이 없습니다. 불교는 진보하는 문명과 연합되어 있지 않습니다.”3)

 

적어도 이런 언급들은 화이트헤드가 보는 불교에 대한 인식이 대체로 어떠했 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내용들에 해당할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드문드문 언 급한 점들은 있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 신학은 대단히 잘못된 방향으로 갔다고 평가한 것에 비해선, 불교 이론은 매우 정교하지만, 사실 자기한테는 지나치게 정교하다면서 그럼에도 지적으로는 경의를 표할만한 것이라고 했다.4) 하지만 정작 불교가 만족스러운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만족스러운 적은 없었다 며 <결실 없는 수동적 명상>an unfruitful passive meditation이 되는 점마저 언급하면서 아마도 그렇게 된 이유들 중에는 기력을 떨어트리는 기후 풍토와도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답변까지 내놓기도 했었다.5)

 

       1) A. N. Whitehead 1996[1926], 44.

       2) A. N. Whitehead 1967[1933], 33.

       3) A. N. Whitehead 1939, 189. 인용된 본문의 밑줄은 필자의 강조 표시.

       4) Ibid., 277.

       5) Ibid., 301. 인도의 기후 풍토로 요가와 사유의 문화가 만들어진 것으로도 보는 불교 학자도 있다(정성본, 2020, 31 참조). 

    

결국 정리해보면, 화이트헤드 자신한테는 불교가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던 어떤 부정성을 안고 있다고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정교한 이론 체계로 봤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불교는 결코 단일한 체계로서의 종교가 아니다. 바로 그 점에서 화이트 헤드의 위와 같은 평가는 불교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내포한 부당한 진술일 수 있다. 솔직히 말해 필자 역시 처음엔 화이트헤드가 불교를 깊이 있게 공부하질 않은 탓으로 돌렸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의 전체 저작에서 봤을 때 불교 관련 언급이 극히 적을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불교에 대한 공부를 전혀 안했다 고 볼 수 없는 것이, 당시 그와 친한 동료인 하버드대의 제임스 우즈(James H. Woods) 교수로부터 불교에 대한 전문가적 지식을 가질 만큼 불교사상을 공부 했었다는 사실이 현재로선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바다.6) 물론 화이트헤드가 불 교철학을 공부했든 안했든 상관없이, 그리고 팔리어(Pali)와 산스크리트어 (Sanskrit)의 인도철학과 불교 경전들을 서구 영어권에 소개했던 제임스 우즈 교수로부터 접한 불교가 온전한 것인지 아닌지 의문을 표하든 상관없이, 적어도 실제적인 화이트헤드의 불교 평가가 상당히 박하다는 점만은 분명한 사실로 보 인다. 왜 화이트헤드는 불교에 대해 그 같은 비판적 견해를 표명한 것인가? 아 니면 정말로 불교사상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낸 것인가? 필자의 이 글은, 어쩌면 화이트헤드가 그와 같이 느껴졌을 법한, 즉 자기 내면 으로 칩거하고 외계는 흘러가는대로 내맡기는 <도피의 종교>로 느꼈을 법한 어떤 한 연유를 불교철학사에서 표명된 대표적인 불교 진영 내의 교설들을 통해 추적해보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불교 안에도 도피나 은둔 칩거의 불교 가 아닌 사회정의를 위한 <참여불교>의 모습도 있었고, 또한 오늘날에도 평화 와 생태 문제에도 적극 관여하는 활동적 모습도 있기에 화이트헤드가 불교의 모 든 면모들을 온전히 파악하고서 내린 평가는 분명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어느 종교든 종교의 선한 모습과 그렇지 않은 모습들도 함께 있다. 종교라고 해 서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7)

 

    6) Victor Lowe, [edited by J. B. Schneewind], 2019, 195.

    7) A. N. Whitehead 1996[1926], 17. 

 

그렇기에 필자의 이 글은 화이트헤드가 설령 불교에 대해 무지했다고 보더라 도 일단은 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단지 이 글에서는 화이트헤드가 불교사상의 체계들에서 왜 그와 같이 느꼈을까에 대한 어떤 하나의 짐작해볼 만한 이유를 제시해보이고자 함에 있을 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전체 불교 진영 안에서도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점들에 대한 문제와도 연관된 것이다. 

 

2) 실체론을 거부한 붓다와 화이트헤드

그렇지만 우선적으로 필자의 기본 입장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무상(無相)과 무아(無我) 가르침을 큰 틀에서 볼 경우 얼마든지 이를 과정철학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당시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인도 힌두이즘과 관련해서 보더 라도 고타마 싯다르타의 통찰은 분명한 혁명적 깨달음의 사건이었다. 즉, 싯다 르타의 통찰이 필자에게도 “모든 것은 과정이며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는 가르 침으로 그리고 영원불변한 것에 마음을 두는 집착을 끊어내는 가르침으로서 받 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어떤 <덧없음>을 설파한 것도 아니라고 보기에 이런 점들은 필자에게도 그리고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견지에서 보더 라도 얼마든지 서로 부합되는 긍정적 요소들로 수용되는 것들이었다. 영원불변한 실체(substance)에 대한 철저한 거부에 있어서만큼은, 화이트헤 드 철학의 연구자들한테도 그와 같은 불교 가르침이 매우 친근하고 유사하게 다 가온다는 점도 분명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화이트헤드 철학과 불교철학 간의 비교 논의들은 이미 여럿 나와 있지만 대부분은 대승불교와의 비교 작업에 집중되어 있다면 이 글에선 오히려 대승불교의 태동 그 이전인 아비달마불교의 불교철학사 시기로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가 좀 더 의문시하는 지점은, 결 국 현재의 대승불교는 과연 이전의 아비달마불교를 제대로 딛고 일어선 것인가 하는 점과도 관련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2500년 역사의 불교는 결코 단일한 체계로서의 종교로 볼 수 없다. 따라서 불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단순 평가를 내리기가 힘든 것도 주지 의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 글에선 붓다의 교설을 체계화한 아비달마불교 시절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경량부(經量部)에서 중관과 유식의 <대승불교>로 건너가는 바로 그 지점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들 설일체유부, 경량부, 중관학파(中觀學派), 유식의 유가행파(瑜伽行派)는 불교의 4대 학파로도 알려져 있 다.8)

 

       8) 히라카와 아키라 지음, 이호근 옮김, 1989, 145-146. 

 

물론 여기서도 이 모두를 세부적으로 비교 고찰하긴 힘들고 주로 이들 4 대 학파들이 주요 입장으로 채택한 존재론적 실재에 대한 이해와 그와 관련된 범주적 차이의 비교 문제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철학적 논의에서 범주의 차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양자 간에 일정 부분에선 유사점이 얼마든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상위의 더 큰 틀에서의 범주적 차이가 있게 되면 이것은 매우 근본적인 간격 차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Ⅱ. 몸말

1) 대승불교 이전의 불교 4대 학파 간의 쟁론 속으로

이미 대승불교 안에서는 흔히 목격되듯이,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 불교도나 불 교 연구자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아비달마불교에서의 주장들을 “소승”으로도 폄 하시켜 이미 대승불교의 두 기둥인 중관학파나 유가행파의 주장들에 의해 아주 오래전에 논파된 것으로 보는 점이 많다. 하지만 이 글이 시도하는 화이트헤드 철학과의 비교 고찰은 그러한 전제나 인식에도 커다란 의문을 던지는 것에 속한 다. 지면상 간명한 논의를 위해 일단 필자는 불교 진영 내에서도 이미 통용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분류인 불교 4대 학파를 중심으로 논해보고자 할 것이다.

 

【마드하와(Madhava)의 Sarvadaržanasamgraha(全哲學綱要) 등 에는 불교의 모든 학파를 크게 비바사사[毘婆沙師, ‘설일체유부’를 말 함]ㆍ경량부ㆍ유가행파ㆍ중관학파의 네 학파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그 들 교설의 차이점이 소개되는데, 외계는 실재하는가, 외계는 어떻게 인 식되는가 라는 문제에 관한 네 학파의 견해 차이는 다음과 같다.

① 설일체유부 : 외계 사물의 인식은 직접지각(現量, pratyaksa)에 의 해 성립한다.

② 경량부 : 외계 사물은 식의 형상(akara)에 의해 추론된다.(anumeya)

③ 유가행파 : 식만이 존재하고 외계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④ 중관학파 : 식도 외계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9)

이것은 당시 불교의 4대 학파가 취하고 있던 <외부 세계의 실재성 여부> 문 제와도 연관된 것이며 불교 내에서도 이 분류가 오늘날까지도 종종 거론될 만큼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흔히 말하는 소승불교에는 <설일체유 부>와 <경량부>가 대표적인 학파로 거론된다.10)

 

      9) 요코야마 고우이츠(묘주 역), 2004, 73-74. 이들 네 학파를 크게 도식적으로 정리 해볼 수 있다는 점은 인도불교의 역사를 정리한 히리카와 아키라의 저작에도 언급 되어 있을 만큼 불교 안에서도 곧잘 통용되는 편이다. 히라카와 아키라(이호근 역), 1989, 145-146. 참조.

    10) 히라카와 아키라(이호근 역), 1989, 146. 

 

그런데 대승불교에 속하지 못한 이들 두 학파에는 <불교의 원자론>이라고 할 만한 실재론적인 <극미설>  極微說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아공(我空)ㆍ법공(法空) 또는 인무아(人無我)ㆍ 법무아(法無我)로 넘어간 대승불교에선 그와 같은 <실재적인 원자론>은 거부 된다.

오히려 유식불교에서는 이것이 정교한 식(識)의 전변설(轉變說)로 대체 되었다.

사실상 이 차이도 <실재적인 원자론>을 표방하는 화이트헤드 과정철 학의 견지에서 보면 매우 중대한 범주적 간격을 낳는 차이점에 속한다.

 

2) <외계 실재성>에 대한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입장

불교의 4대 학파의 주된 입장을 화이트헤드 과정철학과 관련해서 비교해볼 경우, 적어도 <외계 실재성>을 부정하는 유가행파와 중관학파의 대승불교보다도 외계[外界: 외부 세계] 실재성을 인정하는 설일체유부와 경량부 불교에 좀 더 손을 들어주고자 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의 과정철은 말할 것도 없이 외계 실재성을 인정하는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은 그의 대표작인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 1929) 곳곳 에서도 숱하게 볼 수 있는데, 이미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핵심 개념에 속하는 <포착>prehension이나 <객체화>가 그러하고, <인과적 효과성>causal efficacy 역시 외계 실재성을 인정하고 있는 개념들에 속한다.

 

“포착은 그 자체가 현실 존재의 일반적 성격들을 재생한다. 즉 그것은 외계[外界: external world]와 관계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벡터 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11)

“이러한 설명에 따른다면, 그 시원적 형상에서의 지각은 외계 (external world)의 인과적 효과성에 대한 의식이며, 이 효과성에 근거 하여 지각자는 명확한 구조를 갖는 여건으로부터 합생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인과적 효과성이 그 여건의 벡터 성격이다.”12)

“신체로부터 온 인과적 영향은, 외계(external world)로부터 유입된 영향이 지니고 있는 극단적인 모호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신체에서 조차도 인과적 효과는, 표상적 직접성에 비해서 얼마간의 모호성을 항상 수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결론은 하등 유기체로 내려가면 확인된다.”13)

 

       11) A. N.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2003, 79.

       12) Ibid., 264.

       13) Ibid., 363. 

 

“객체화(objectifications)란 어떤 현실 계기(M)가 그것으로부터 느 낌의 연속적 위상을 창시하게 되는 그런 객체적 조건을 구성하는 것 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가장 일반적 의미에서 이러한 객체화는 외 계(external world)가 그것에 의해서 문제의 현실 계기를 형성하게 되는 그런 인과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14)

 

실은 그의 저작 곳곳에 외계 실재성을 언급하는 구절들이 너무도 많아 여기에 다 인용하기가 벅찰 정도인데, 오히려 화이트헤드의 입장은 외계 실재성을 부정 하는 관념론에 대해선 더더욱 비판적이었다.

즉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인식활동 만을 전적으로 수행하는 정신성 속에서 실재에 대한 궁극적 의미를 찾아내려는 그런 철학사상을 <관념론>idealism으로 보면서 그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표 명했던 것이다.15)

당시 19세기 서구 근대 관념론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그러한 관념론의 입장에서 과학적 도식을 자연의 사실에 대한 유일한 표현으로 간 주하여 이를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을 <궁극적인 정신성>ultimate mentality에 포함된 하나의 관념(an idea)으로 설명되어진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보면 이 들 입장은 그때까지의 과학적 견해와도 동떨어진 것으로 평가했었다.16)

과학적 도식에서의 자연에 대한 사실조차도 결국 <궁극적인 정신성> 속에 포함된 하 나의 관념―또는 인식론적 범주에서만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해버린다면 이는 화이트헤드의 실재적인 원자적 존재론의 입장과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혹자에게는, <외계 실재성>을 인정하는 화이트헤드의 입장이야말로 오히려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따를지도 모르겠다. 하지 만 화이트헤드가 보는 주관과 객관의 분리 문제는 인식론적 사태로서 일어나는 것일 뿐, 인식 이전의 존재론적 사태를 더 근본적인 자연의 상태로 보는 점이 고 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기에 분석의 그 출발점을 달리한다. 화이트헤드의 경우 주관과 객관의 분리 문제는 그가 이미 중기 시절에도 고민했던 <자연의 이분 화>bifurcation of nature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는 기존의 인식론적 난점 들도 자신의 존재론적 도식을 통해 이를 풀어내고자 했었다.17)

 

     14) Ibid., 613.

     15) A. N. Whitehead 1948[1925], 64.

     16) Ibid., 64.

     17) A. N.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2003, 388.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원자론에서 보는 궁극적 사실은 <현실 존재의 생성ㆍ소멸>이야말로 근본적인 존재론적 사태로 보고 있다.

 

3) 인식보다 우선하는 존재론적 사태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보는 인식 작용도 존재의 자기구성 활동으로서 결국 존재론적 활동의 범주에 포섭된다. 간단히 말하면 화이트헤드에게 <인식론>은 <존재론>에 부차적인 것이며 그 역은 아니라는 얘기다. <유기(체)적 실재론> 을 표방한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에서의 <인식>은 <과정>의 중간 단계에 속하 기 때문에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그것은 필연적 요소가 아니다.

 

“유기체 철학에서 인식(knowledge)은 과정의 중간 단계로 분류된다. 인지(認知, cognizance)는, 객체적 내용을 만족의 주체성 속으로 흡수하 는 기능 가운데 들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주체적 형식 의 유(類, genus)에 속한다. 그러므로 인지의 <중요성>은 구체적인 현실 존재에 있어서의 필연적인 요소가 아니다.”18)

 

여기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입장이 관념론과 다르게 어떻게 실재론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인가를 들여다본다면, 이것은 그의 철학적 방법 자체의 출발이 달랐던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이트헤드가 말한 그 방법이란, <시간과 공간의 상태에 대한 분석>analysis of the status of space and of time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19)

 

      18) Ibid., 336.

     19) A. N. Whitehead 1948[1925], 65. 

 

화이트헤드는 주관과 객관의 문제를 다루기 이전에 <시간과 공간의 상태>를 훨씬 더 기본적인 존재론적 사태로 봤었다. 과정철학에서 보는 사물 및 존재자들은 시공간의 연장(extension)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주관과 객관의 분리 느낌들은 이들 존재자들의 진화 과정에서 이분화[bifurcation, 분기 화]가 일어난 중간 단계의 사태로 간주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주관과 객관 의 분리 문제를 극복할 인식론상의 난제들도 보다 근본적인 존재론적 고찰을 통 해서 풀어가는 방법을 취했었고, 이는 그 자신의 철학적 방향에서는 지극히 당 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행보였던 것이다. 인식론상의 주관과 객관의 분리 느낌 이 전에 훨씬 더 근본적인 존재론적 활동들이 기본적으로 먼저 있어왔다는 얘기다. 그에게는 <시공간의 상태>status of space-time가 인식보다 선행되는 실재적 인 존재론적 사태로 자리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시공간의 상태>의 특성 을 언급하면서 하나는 <분리적>separative이라는 점과 다른 하나는 <포착 적>prehensive이라는 점, 크게 두 가지 특성을 갖는 것으로 봤던 것이다.20) <공간의 기하학> 문제에 대한 관심은 이미 화이트헤드가 케임브리지대 수학 시절에도 일찍부터 갖고 있었고 그와 관련해 중기 런던대학의 과학철학 시절에 도 <공간은 어떻게 우리의 경험 속에 뿌리내렸는지>에 대한 숙고를 거듭해왔 으며,21) 결국 하버드대 시절에 이룩한 <형이상학적 원자론>metaphysical atomism에 있어서도 관련된 행보들은 그의 전체 학문적 여정에서 보면 거의 일 관된 흐름이기도 했다.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대표작인 과정과 실재는 실재 론적인 <철학적 원자론>이라는 그 기본 구도를 매우 정교한 체계로서 구축해 놓은 저술에 다름 아니다. 화이트헤드에게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진리는 원자론(atomism)”으로 간주된 다.22) 그의 원자론적인 <과정형이상학>은 관계적이고 과정적인 생성ㆍ소멸의 실재론 구축을 선보인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철학 체계에서 매 우 중대한 개념인 <포착>prehension은 “관계성의 구체적 사실”로 언급되며 이 것은 인식 이전의 존재론적 사태에 속한 것이어서 오히려 파악, 이해를 뜻하는 apprehension에서 접두어 ‘ap-’을 아예 빼버린다.23) 적어도 화이트헤드의 <포 착> 개념은 기본적으로 존재론적 활동에 속한 것이지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 다.24)

 

     20) Ibid., 65.

     21) A. N. Whitehead, 1919, ⅴ.

     22) A. N.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2003, 111.

     23) A. N. Whitehead 1948[1925], 70.

     24) 이와 관련해 국내에서 주로 다르마키르티와 화이트헤드를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왔 던 권서용은 화이트헤드의 prehension[포착] 개념을 인식론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었다. “현실적 존재인 화이트헤드의 현실 적 존재(actual entity)와 다르마키르티의 바스투(vastu)의 존재론적 활동은 파악 (prehension)이자 인식(pramāṇa)이다. 파악과 인식은 현실적 존재의 활동인 한, 하나의 획기적 전체이다.”[권서용, “화이트헤드의 파악(prehension)과 다르마키르 티의 인식(prama)에 관한 비교연구”, 2017, 170 참조] ; “이것(관계성의 구체적 사 실)은 서양의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제시한 현존의 범주 가운데 파악(인식, 앎) 을 정의한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파악’은 법칭의 대상에 의해 생성되는 ‘인식’에 상 당하는 개념이다. 전자는 파악되는 대상과 파악하는 주체와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작용이며, 후자도 인식되는 것과 인식하는 것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작용이라는 의미에서 ‘관계성의 구체적 사실’이다.”[권서용, “앎[識]의 구조에 관한 논쟁-법칭 과 원효를 중심으로”, 2018, 113. 각주1번 글 참조] 이처럼 권서용의 글에선 은연중에라도 화이트헤드의 포착[파악]과 인식을 같은 범주의 것으로 보려는 점이 발견 된다. 또한 다르마키르티의 경우 경량부와 유식불교에 걸쳐 있으면서도 결국 승의 유(勝義有)에 있어선 관계(sambandha)를 실재로선 부정하는 입장이다.

적어도 다르마키르티가 보는 승의차원에는 <자기인식>만이 있고 <대상인식>은 세속차원 의 논의에 한정시킨 것이라면[이에 대해선, 곽미미, “다르마끼르띠의 외계대상의 인식에 대한 고찰”, 2019, 139~163 참조], 이는 화이트헤드의 실재론 철학과 유사한 도식으로 보긴 힘들지 않은가 생각한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포착>은 인식 이전의 사태든 혹은 인식을 갖는 이후의 존재론적 사태든 할 것 없이 자연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기본적인 존재론적 활동이며, 화이트헤드가 상정한 하나의 원자, 곧 <현실 존재>actual entity―또는 <현실 계기>actual occasion― 역시 이러 한 <포착들>prehensions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현실 존재[계기]가 바로 더이상 분할될 수 없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원자>로 상정된다는 점에서 우리 는 비로소 대승불교 이전의 아비달마불교에서 논의된 <불교의 극미론>과도 비 교해 볼 수 있게 된다.

불교가 말하는 이 <극미>(極微, paramāṇu)는 더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 색 법(法, Dharma)의 최소 단위인 실재로서 일종의 불교 형이상학의 <원자론>에 해당한다.25)

물론 불교의 <극미> 개념이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구상한 <원 자> 개념과 완전히 똑같진 않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실재론>으로 표방될만 한 <원자론>이 적어도 ①설일체유부와 ②경량부 불교에선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화이트헤드 연구자로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그의 철학적 원자론에 서, 연장성(extensiveness)은 생성하지만 <생성>becoming 자체는 비연장적 인 것이어서 결국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진리에는 <원자론>atomism이 자리한 다.26)

물론 그 최소 단위로서의 기본 실재를 과연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저마다 의 세계 이해가 달라질 수도 있겠으나 불교철학사에도 이에 상응될만한 불교식 의 <원자론>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유사한 범주적 틀로 묶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불교의 부파들은 존재의 모든 요소(dharma, 法)를 포함하는 새로운 분 류법을 추가했었다.27)

 

     25) 윤영호, 2015, 3. ; 요코야마 고우이츠(묘주 역), 2004, 78.

    26) A. N.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2003, 111.

    27) 에띠엔 라모뜨(호진 역), 2006, 317-318.

 

 

물론 이것은 뒷날 대승 논사들에 의해 논박을 당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 많은 설명이 가능한 것이었다.28) 즉, 경험 해석에 대한 최종 설명항으로 자리하는 원자론적 설명29)에 대해선 당시의 부파들 역시 상당한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는데, 적어도 색(色) 곧 물질 일반에 대한 질적ㆍ양 적 구극을 추구하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자연스 런 행보였었다.30)

 

         28) Ibid., 328. 

         29) 화이트헤드의 <현실 존재>는 설명의 기본 단위와 같은 것으로 <설명의 양 자>quantum of explanation로도 불리워진다. Randall E. Auxier and Gary L. Herstein, 2017, 8.

        30) 권오민, “불교철학에 있어 학파적 복합성과 독단성”, 2010, 145

 

이처럼 아비달마불교에는 <원자론>이 있었다. 화이트헤드 의 과정철학은 <실체론>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지만 모든 현실태(actuality)는 곧 <과정>이기에 과정으로서 실유하는 <원자론>의 철학을 표방했다. 그렇다 면 생성 과정으로서 실유하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원자는 <자성>自性이 있는 가를 물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에 속하는 중관학파는 실유로서의 <자 성> 개념을 철저히 거부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4) 중관학파의 자성 비판과 화이트헤드의 실유 자성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적 원리>ontological principle는 경험론의 원칙을 천 한 것으로 이에 따르면 절대 무(無) 또는 <무(無)로부터의 창조> 역시 거부 된다.

무(無) 속에 떠다니는 자기존립적인self-sustained 사실 같은 것도 없으 며,31) 접근해 들어갈 무(無)도 없다는 것이다.32)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로서 제 시된 화이트헤드의 <현실 존재들>actual entities은 <경험>으로서 <과정>으 로서 존재하며, 그 실유 하나하나는 저마다 다른 <환원불가능한 고유성>을 갖 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자성(自性)을 부정하는 중관학파의 논리에선 적어도 <환원불가능한 고유성>으로서 생성ㆍ소멸하는 그러한 자성 이해마저 부정한 다면 이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도 분명하게 충돌한다고 생각된다. <자성> 에 대한 중관학파의 비판 논리는 용수의 대표작인 중론에서도 엿볼 수 있 다.33)

 

    31) A. N.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2003, 66.

    32) Ibid., 214.

    33) 중론 텍스트의 발췌 인용은 서정형, “나가르주나 중론”, 서울대학교철학사상연 구소, 철학사상 별책 제3권 제3호 (2004) 내용에서 뽑은 것인데 여기에 사용된 표준 원전은 핑갈라가 주석한 한역본 중론이며, 원문 인용 말미의 MS는 Mādhyamika-Sastra(中論)의 약어이다.

 

“모든 사물의 자성[自性, svabhava]은 [그 사물을 연기적으로 형성시킨] 조건[緣, pratyaya]들 속에는 없다. 자성이 없으므로 그 외 다른 성 품[他性, parabhava]도 존재하지 않는다.(MS 1.3)” “인연에 의해서 자성이 생기한다는 주장은 불합리하다. 만약 자성이 인연으로부터 생기하는 것이라면 만들어진 것[所作, krtaka]이 된 다.(MS 15.1)”

“어떻게 자성이 만들어진 것일 수 있겠는가. 자성은 지어진 것이 아니 고[無作, akrtrima],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不待異法成, nirapeksa parata]이다.(MS 15.2)”

 

용수에 따르면 만들어진 것은 자성이 아니라고 보는데, 만약에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처럼 <타자원인성>과 <자기원인성>을 함께 갖는 기본 실재인 <현 실 존재>의 자성의 경우는 그 같은 범주에도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인(因)과 연(緣)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연기(緣起)라는 <조건 발생>으로만 읽는다면 이는 마치 타자원인적인 것에만 따른 것으로 이해될 소지도 없잖아 있다. 화이 트헤드의 실재론 입장에서 보면 이는 절반의 이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즉, 화이트헤드는 모든 원자적 생성의 계기들은 매순간 <타자의존성>과 <자기창 조성>이라는 두 측면이 같이 <일거에>all at once 하나의 <현실 존재>로서 생성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원자적 생성의 계기들은 과거 여건에서 비롯 된 것이면서도 그와 함께 <자기창조>self-creation의 산물이기도 하다. 화이 트헤드 철학에서 특히 <목적인>(目的因, final causation)의 경우 이것은 현실 존재가 그 자신이 되어가는 내적 과정을 표현한 것이며 그 점에서 현실 존재는 작용하는 과거의 산물이면서도 “자기원인(causa sui)”으로도 언급된다.34)

 

     34) A. N.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2003, 316-317. 

 

물론 우리는 용수의 자성 이해 배경에는 실체론에 대한 강한 비판과 거부가 자리한다 는 점도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용수의 자성 이해는 곧 실 체론적 자성 이해에 소급된 채로 이해되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자성을 주장할 경우 <상주론>과 <단멸론>에 빠지는 선택지 외에는 다른 선택 지가 없다고 봤던 용수 자신의 제한적 이해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다음 과 같이 언급한다.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항상 있는 것'이라는 견해(常見= 常住論)와 끊어지는 것' 이라는 견해(斷見-斷滅論)가 따라붙는다. 왜냐 하면 존재하는 것은 항상 있는 것이든 무상한 것이든 어느 한 쪽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제14게송)”35)

 

여기서도 보듯 용수가 이해하는 실유론은 철저히 <상견>과 <단견>의 두 가 능성 외에 다른 새로운 선택지는 없다면서 스스로를 제한시키고 있다. 물론 필 자는 중관학파의 자성 이해가 무조건 틀렸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중론에서의 자성 이해가 제약된 용법으로서만 쓰인 점도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고 볼 따름이다. 중론에서의 자성 이해가 상당히 협소하다는 점은 이미 기존 불 교학자의 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36)

예컨대 적어도 매순간마다 차이로서 생멸하는 자성, 또는 관계와 과정으로서 실재하는 자성은 여전히 <비실체론 적>이라는 점에서 고려되어야 할 바가 있음에도 중론의 논의에선 이에 대한 가능성은 아예 빠져 있다. 실유로서의 자성 개념은 모두 실체론 범주에만 속하 는가 했을 때 그렇지 않은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불교의 언어관을 저술한 윤희조는 찰나 생멸론의 자성은 여전히 우리가 찾 아야 할 자성 개념이라고 했었다.37)

알고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진공묘유(眞空 妙有)의 묘(妙) 역시 여전히 분석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묘(妙)일 뿐이다. 적어 도 우리는 생멸로서의 자성 개념과 불변ㆍ독자 실체로서의 자성 개념과는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찰나 생멸의 자성은 단 한순간일 뿐인 <환원불가능한 고유성>으로서의 자성이다.38)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어떤 주체도 결코 두 번 다시 경험하지 않는다.”39)

 

       35) 용수 원저자, 가츠라 쇼류ㆍ고시마 기요타카(배경아 역), 2018, 110.

      36) 윤희조, “자성(自性)의 의미변화에 관한 일고찰-구사론, 중론, 단경을 중심 으로”, 2016, 159. 이에 따르면, 중론의 자성 이해는 실체론적인 의미의 단독성의 용법으로만 이해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37) 윤희조, 2012, ⅶ.

      38) 흥미롭게도 이것은 일본 선사 도겐(道元, 1200-1253)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떠올 리게도 해준다.

“하나의 시간 속에 있는 하나의 유(有: 존재)는 다른 어떤 것과도 바 꿀 수 없는 그만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법위法位에 머문다’라고 표현한다. “알아야 한다. 땔감은 땔감의 법위에 머물고 재는 재의 법위가 있다. 여기에 전후제단前後際斷이 있다.” 최현민, 불성론 연구–도겐의 정법안장을 중심으로(서울: 운주사, 2011), p.277.

       39) A. N.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2003, 98. 

 

그가 말한 <유기(체)적 실재론>으로서의 생성의 원자들은 온갖 차이들의 생성이기에 저마다 <환원불가능한 고유성>으로 생멸할 뿐인 그러한 자성 이해에 속한다. 그러나 자성을 비판한 중관학파의 논리에선 <관계와 과정으로서의 실재>, 매순간 차이로서 생멸하는 자성이라는 <비실체론적 자성>의 가능성들은 배제되어 있다. 중론의 제16게송에도 볼 수 있듯이, 소멸하는 것은 아예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본 점도 그의 입장에선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40)

 

     40) 용수 원저자, 가츠라 쇼류ㆍ고시마 기요타카(배경아 역), 2018, 110.

 

중론의 용수는, 차이들의 생멸 과정에는 과거 여건과 관련해서 잇따르는 재생 순응의 성격을 갖는 현재적 결단도 있을 수 있음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소멸에 대해서도 현실태로는 소멸하지만 가능태로는 소멸되지 않고 여건으로 남게 된다는 점도 고려치 않았었다. 이 역시 불변 실체의 상주도 아니면서 그저 단멸로만 끝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이를 통해 찰나멸론에서의 상속 문제도 새롭게 모색해볼 수 있음에도 이 가능성은 제대로 고려되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이 점에서만큼은 용수의 <자성> 이해도 매우 협소한 점이 있다. 만일 매순간 생멸하는 자성 이해으로서의 실재론을 추구한다면, 법유(法有)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이론보다는 법유(法有)를 인정했던 아비 달마불교의 풍부한 논의들 역시 다시금 새롭게 볼 여지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 이다.

 

5) 유식의 세친 주장에 대한 반론: 유방분은 무한히 분할하는가?

다른 한 가지는, 최종적 입장에선 유식학파의 입장을 채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세친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유가행파의 세친은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에서 외계 실재론을 논박하는데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된 핵심 이유 중의 하나로서 극미설의 방분(方分) 문제와 관련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문제시되는 부분의 핵심만을 언급해보고자 한다. “극미가 유방분(有方分)이라면 논리적으로 하나의 극미라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무방분(無方分)이라면 마땅히 그림자도 [다른 사물을] 장애 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며, 색취色聚도 [이와] 다르지 않다면 둘로서 갖지 않아야 한다.”41)

 

    41) 세친(世親), 唯識二十論, “極微有方分 理不應成一 無應影障無 聚不異無二”. 

 

본문의 내용은 세친이 방분 논의와 관련하여 유부와 경부의 입장을 모두 비판 한 것인데, 이 지점에서 세친이 취하고 있는 입장은 극미가 유방분이어도 문제가 되고 무방분이어도 문제가 된다고 본 것이다.

이때 세친의 입장에서는, 극미를 유방분으로 보게 되면 그것은 여전히 극미가 아닌 것으로 간주해버린다.

왜냐하면 방분을 갖는 한 그것은 여전히 계속 분할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알고 보면 세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상정한 형이상학적 가정 (assumption)에 불과한 것이다. 즉, 세친의 인식에는 사물이 크기와 부피를 갖는 한 계속해서 쪼개어질 수 있다고 보는 <무한분할성>을 암암리에 상정하고 있다는 얘기다. 과연 존재하는 사물은 무한히 쪼개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더이 상 쪼갤 수 없는 최소 극미[원자]가 있는 것인가? 했을 때 세친의 인식에는 전 를 마치 당연한 것처럼 가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것은 서구사상사에선 <제논의 역설>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고 보는 가정을 고대 엘레아 학파의 제논 역시 자기 논리의 기본 전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고 보는 (실제 경험상의 사례로선 찾을 수 없 는) 황당스런 역설적 주장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마치 무모순적인 논리 정연한 주장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무한분할이 가능하다고 볼 만한 근거 는 없을뿐더러 이 문제는 수학적 오류로도 판명난 것이면서 동시에 현대 자연과학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 경험론적 오류에도 해당된다. 안타깝게도 불교안에서도 이 점에 대해선 간과해버리는 경우들도 있는 것 같다.42) 이것이 수 학적 오류라는 점은 오늘날 중고등학교 수학 시간에도 나오는 <무한등비급수> 에서 이미 밝혀져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43)

 

    42) 윤영호, 2015, 267-268. ‘원자설의 아포리아’ 이하 내용 참조.

    43) 정강길, 2019, 221-222.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그것은 제논이 상정한 부당한 가정일 뿐이었다.

“제논은 부당하게도 이 생성 활동의 무한 계열이 끝맺음될 수 없다고 상정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활동을 수반한 생성 활동의 무한 계열이, 또 직접 뒤따르는 것을 수반한 각 활동이 생성의 과정에서 완전히 끝맺음될 수 없다고 상정할 필요는 없다. 간단한 산술은 지금 지적한 계열이 1초 동안에 완전히 끝맺음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그 계열 전체의 바깥에 있는 새로운 생성 활동이 개입해 올 수 있는 통로가 열린다. 따라서 이 제논의 역설은 수학적 오류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44) 이처럼 제논은 무한히 쪼개어질 것이라는 가정을 마치 당연시하듯 무비판적 인 기본 전제로 삼았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물리학에서도 보면, 에너지의 불연속적인 최소 단위를 가정하고 있다. 이미 <양자>quantum 개념이 그것이다. 전자와 양성자와 광자는, 단위 전하(unit charges of electricity)이며 또한 에너지 흐름(fluxy)의 양자(量子, quanta)에 해당한다.45) 그렇기에 <원자적 양 자>atomic quanta로도 표현된다.46)

이런 점에서 만일 1)무한분할이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과 2)무한분할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입장, 이렇게 두 가지 가능성 의 형이상학적 입장이 있다고 했을 때, 결국 지금까지의 인류가 구축해놓은 지적 성과들에 있어 논리성과 정합성 그리고 여러 경험에 대한 적용가능성과 충분성을 통해 이를 비교해본다면 필자는 2)의 입장을 좀 더 타당한 해석적입장으로 보는 것이다. 화이트헤드 철학이 말하는 차이 생성의 원자―곧 현실 존재[계기]―도 더이상 분할될 수 없다는 점에서 전체가 한꺼번에 생성되는 <획기적 인>epochal 것으로 본다. 즉, 원자의 생성 과정은 전체가 <일거에> 생성되는 것이지, 생성의 전반부가 먼저 생겨나고 그 후반부가 다음에 생겨난다고 보질 않는다는 얘기다. 이것은 “하나의 전체로서 생기든가 아니면 전혀 생기지 않든 가 그 어느 한쪽이다”47)라고 말한 윌리엄 제임스(W. James)의 앞선 통찰을 계승 발전시킨 의미의 생성을 말한 것이다.

 

      44) A. N.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2003, 173-174.

     45) A. N. Whitehead 1967[1933], 185.

     46) A. N.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2003, 258.

     47) Ibid., 72.

 

그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실재론적인 원자설은 <제논의 역설>의 공격을 피해간다. 필자로선 만약에 세친이 그 자신 이후에도 계속된 인류지성사가 지금까지 구축해왔던 성과들까지 알았다면 과연 지금도 유가행파의 입장을 채택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6) 원자론에서 유부와 경부의 입장 차이

더 나아가 원자론적인 <찰나>를 다루는 <설일체유부>와 <경량부> 간의 주된 입장 차이도 살펴볼 경우, 여기서도 이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었다.

유부의 찰나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삼세실유(三世實有)ㆍ법체항유(法體恒有)의 입장이었지만, 경부는 그와 달리 현재실유(現在實有)ㆍ과미무체(過未無體)의 입장에 있다. 따라서 유부의 찰나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변화 과정을 갖지만, 경부의 찰나는 오직 생멸(生滅)만 할 뿐이다.48)

물론 유부의 원자설도 기본적으로는 다원론적인 것이다. 그런데 양자 간의 이 차이점은 분명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보면

경부의 찰나 원자설 입장과 좀 더 가깝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 철학에서의 실재론적 원자도 생성ㆍ소멸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탄생은 곧 종결”49)로 언급되며, 생성의 원자는 소멸하지만 변화하는 것으로는 보질 않는다.50) 그렇기에 생주이멸의 원자가 아닌 <생멸의 원자>로 볼 수 있다. 즉 실재로서의 원자는 찰나생ㆍ찰나멸만 할 뿐이다. 이 점에서 화이트헤드는 <생성>becoming과 <변화>change를 구분해서 보는데 둘 중에서도 근본적인 것은 <생성>이다. 즉, 생성이 1차적이며, <변화>는 그로부터 연유된 2차적인 것이다. 변화는 생성ㆍ소멸의 일련의 차이들을 통해 경험되는 것으로 본다. 또한 대상에 대한 지각에 있어서도 유부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각한다고 보기에 무형상지식론(無形象知識論)의 입장을 폈었지만, 경부는 그와 달리 지각 대상은 인식 내의 표상(表象)을 통해서 추론적으로만 접근될 수 있다고 본 유형 상지식론(有形象知識論)의 입장을 폈었다. 유부에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 한다고 보기 때문에 거의 <소박한 실재론>에 가깝다.51)

 

    48) 아비달마구사론1(권오민 역주), 2002, 240-248.

    49) A. N.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2003, 193.

    50) Ibid., 110.

    51) 三枝充悳 편(심봉섭 역), 1995, 145.

 

그러나 경부의 지각설 에선 인식주관의 <표상>이 강조되기에 결국 <외계 추리론>外界 抽利論의 입 장을 취한다. 주지하다시피 화이트헤드는, 유기체의 지각 방식(mode)에 있어 <인과적 효과성>causal efficacy과 <표상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이라는 두 지각 방식을 논했었는데, 인류 이전의 자연 전체의 근원적인 지각 방식으로선 <인과적 효과성>이 있다고 봤으며,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고등 유기체에 이르러선 <표상적 직접성>의 지각 방식이 그 진화 과정에서 함 께 결부되어 나타난 것으로 본다. 이때 인간을 비롯한 고등 유기체의 지각 방식 에선 <표상적 직접성>으로 인해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사실적인 원자적 분할로서는 지각할 수 없다고 봤었다. 여기에는 고등 유기체의 지각을 설명함에 있어 <변환의 범주>category of transmutation가 도입되는데, 이것 은 자연의 진화 과정에서 고등 유기체로 갈수록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요소들을 제거한 채 <단순화>simplification로 변환시켜 지각한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52) 예컨대 우리가 <빨간 사과>를 지각할 때 원자 적 분할로서 지각할 수 없다. 오히려 대상에 대한 많은 요소들을 제거한 채 가장 지배적인 주요 특징들만 골라서 이를 사과에 관한 대상의 특질로 간주해버린다. 하지만 해당 사과는 훨씬 더 복잡한 요소들의 복합체일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 는 <폐기>를 통해서만 <이해>를 해볼 수 있다(We can only understand by discarding).”53) 고등 유기체로 갈수록 사과를 지각할 때는 이 같은 <단순화>로서의 변환이 작동하며 이를 떠올리는 <사과 이미지>는 외적 대상에 대한 직접적 지각이라 기보다 <표상>된 것에 속한다. 이는 앞서 말한 경부의 입장에 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54)

 

    52) <변환의 범주>에 대해선 지면상 많은 설명이 필요한데 좀 더 요약된 소개로선, 정 강길, 2019, 506-512. 참조.

    53) A. N. 화이트헤드(오영환 역), 2003, 495.

    54) 다만 인식에서의 주관과 객관의 분리 문제는 불교 안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해법은 <기하학>에 대한 고찰과 관련한 다. Ibid., 624. 참조. 

 

그럼에도 경량부 불교에서는 대상에 대한 직접적 지각이 아닌 표상을 거론하지만 분명 <실재론>의 범주 자체를 이탈하진 않았었다. 반면에 유가행파는 이 범주마저 이탈했었다.

이들에게 식(識)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실재>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대체하고 있는 기본 핵심 개념이며 그렇기에 대승불 교에서는 삼계유심(三界唯心)ㆍ만법유식(萬法唯識) 주장도 지극히 당연한 명제처럼 여겨져 왔던 것이다.

 

Ⅲ. 나오는 말

1) 불교는 어떻게 해서 <마음 불교>가 되었는가?

필자가 생각하기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아시아를 점유한 대승불교의 주된 특징 중 하나를 꼽는다면 그것은 <마음 중심 불교>로의 전환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불교에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연기법>이라면서 이를 <마음 작용 관계>로 소개하는가 하면,55) 불교가 말하는 모든 존재의 본질 또는 팔만대장 경의 법문을 한 마디로 <마음>이라고도 한다.56) 불교는 과연 <마음>이 가장 55) 목경찬, 2014, 21-25. 56) 출처 https://youtu.be/_7ZxNwsi9BM [지운 스님의 대승기신론 유튜브 강연 내용] 644 정 강 길 1차적 중심인 종교였는가? 그렇다면 불교의 성격이 처음부터 그러했었는가? 아 니면 그 중간 과정에서 어떤 전환이 있었는가? 불교학자인 권오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어놓은 바가 있다. “초기불교 이래 물질(색법)은 인간의 인식과 활동의 근거이자 조건으 로, 또 다른 세계를 초래하는 힘으로 이해되었다. 즉 어떠한 경우에도 눈 [眼根]과 눈에 의해 보이는 대상[色境] 없이 시의식[眼識]은 생겨나지 않으며, 나아가 몸[身根]과 몸에 의해 접촉되는 대상[觸境] 없이 촉의식 [身識]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전(前) 5식에 근거하여 의식 (意識)이 생겨나며, 이에 따라 입(말소리)으로 몸(신체적 형태)으로 업 을 짓고(행위하고), 이러한 업력(즉 무표색)에 의해 또 다른 세계를 향 수(享受)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물질은 인간의 현실 삶 에 바탕이 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물질은 불교에 반(反)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것은 높은 정신활동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해서 성자는 그것에 초연한 이로 간주되어 왔다. 이러한 사유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 까? 우리는 흔히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 造)-일체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 해 지어진 것이다.” 이러한 유심(唯心)의 불교는 또한 어디서 비롯된 것 일까? 단초는 화엄경이지만 이론적으로 모색된 것은 유식학파(唯識 學派)에서였다.”57) 이것은 불교철학사의 중간 과정에서 일어났던 커다란 범주적 전환이기도 하 다. 불교가 <유심론>의 틀 내에선 외부 세계의 일보다는 내면의 <마음>을 살 피는 일에 훨씬 더 중점적으로 쏟게 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보일 것이 다. <유식불교>가 관념론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은 필자의 단독 주장이 아니 며, 이미 <유식불교>를 연구해놓은 불교학자 스스로도 유가행파의 식(識)일원 론이 <주관적 관념론>subjective idealism임을 소개하고 있다.58)

 

    57) 권오민, 2009, 239-240.

   58) 요코야마 고우이츠(묘주 역), 2004, 87.

 

<유식불교> 가 관념론의 범주 틀에 자리하고 있다면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관념론을 비 판하는 실재론 범주에 속하기에 필자로선, 불교의 세계를 열었던 초기 고타마 참조.  붓다의 통찰 역시 본래부터 그러했는가에 대해서도 그 같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불교의 세계는 넓고 다양하며, 우리가 속한 대승불교만이 불교 세계의 전부일 수 없다. 흥미롭게도 구미나 남방불교권에서 출판된 불교개론서는 일본 과 그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불교개론서와 차이가 있다는 사실 도 엿볼 수 있는데59) 전체 불교 진영 안에서도 그 입장들 간의 충돌이 있는 만 큼 그에 따른 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더 나은 정합적인 불교 체계화의 길 찾기 도 여전히 필요해 보인다.

 

       59) 권오민, 2009, 285-286. 예컨대 불타 자내증(自內證)을 구미나 남방불교권에선 4 성제로 본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연기법으로 본다. 같은 불교여도 우선적 이해가 상충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둘 다 불교의 세계에 속한다.

 

불교의 세계란 고타마 싯다르타가 첫 길을 열었던 그 길[道]을 놓고서도 여전히 이를 다투는 <佛道의 경쟁자들>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2) 다시 경량부 불교로!

지금까지 불교 4대 학파를 중심으로 화이트헤드 과정철학과의 비교를 살펴봤 을 때 적어도 범주적으로는 가장 유사하다고 볼 만한 불교학파는 대승불교 진영 이 아닌 소승불교 그것도 경량부 불교였다고 생각된다. 정리하자면, 불교와 화이트헤드 양자 간의 주된 범주적 차이 또는 그 결정적 간격은 설일체유부와 경량부 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넘어가는 그 지점, 즉 아비달마불교에서 중관과 유식의 대승불교로 건너가는 바로 그 과정에서 발생된 것으로 본다. 그 결정적 간격 차이란 <실재>reality로서의 원자적 존재론과 오히려 극미설을 부정하는 인식론 간의 범주적인 간격 차이가 될 것이다.

그 점에서 화이트헤드가 봤을 때, “사람들이 자신 속으로 칩거하고 외계는 흘러가는대로 내맡기는” 그러한 불교에 대 해선―설령 그 세부내용에선 얼마간의 정교함을 추구하더라도― 그 자신이 추 구하는 철학과는 매우 어긋난다고 봤을 가능성이 크다. 즉 서두에 소개한 화이트헤드의 부정적인 불교 평가 이유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 배경을 이해해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당시 화이트헤드가 살펴본 불교가 모든 불교들을 포함한 전체일 수 없 다는 점에서 <외계 실재성>을 인정하는 아비달마불교―특히 경량부―의 입장 에 대해서도 깊이 들어가서 이를 상세하게 비교 검토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생각도 들었다.

필자의 경우 각별히 전율적으로 주목했던 지점은 설일체유부의 그 마지막 분파인 <경량부 불교>였다. 만약에 현대의 화이트헤드 철학의 입장에서 다시 불교철학사를 써내려간다면 필자는 주저없이 <경량부>를 그 핵심으로 손꼽을 것 같다. 물론 경량부 불교에 도 여전히 미완의 문제들이 있긴 하지만(그와 동시에 아직 그 전모가 파악되지 못한 현실도 있다),60)

 

      60) 경량부 불교 연구에 대해선, 카토 쥰쇼(김재현 역), 2019 ; 권오민, 2012 ; 권오민, 2019 참조.

 

사실 <경량부 불교>는 불교 안에서도 인도불교 4대 학 파에 속하면서도 현존하는 논서가 부재하여 세친의 구사론이나 중현의 순정리론을 비롯해 간접적으로만 접근되고 있어 현대의 불교 연구 안에서도 여전히 미답(未踏)의 세계로 남아 있다. 어쩌면 용수의 중관이나 유가행파의 유식불교 입장과 또 다르게 경량부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과 보강으로 나아갔었더라면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대승불교>로의 불교사의 진화를 꽃피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소승이든 대승이든 화이트헤드든 불교철학이든 또는 그 어떤 종교나 철학이든, 모든 사상이나 자연의 법칙들조차도 <형성과정>에 있다고 볼 뿐 결코 <완결>에 있다고 보질 않는다.

따라서 본 글의 제안도 어차피 그러 한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불교철학 간의 대론(對論)이라는 일말의 긴장적 시도를 감행해본 것에 불과하다.

다만 화이트헤드의 실재론 입장에서 보면 <유심론적 불교>에서 <실재론적 불교>로의 전환 (turn)을 요청하는 점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당시 뛰어난 불교 논사들인 세친이나 중현 그리고 무착과 용수마저 놓치고 넘어간 것들은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공정한 비교 검토가 21세기 현시점에서도 계속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불교도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의 인류가 그동안 동서고금 다양한 분야들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축적 해온 세계 지성의 성과들을 새롭게 반영하는 업데이트가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일찌감치 완전무결한 정식화를 마련해놓은 것이어서 적어도 그런 큰 수정적인 업데이트까지는 불필요한 것인지 다시금 여러 입장들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교 역시 <고정불변한 실체로서의 불교>가 아니라면 그 또한 <함께 만들 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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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Where does Whitehead's philosophy and Buddhism diverge? - The differences of philosophical categorization between Whitehead's philosophy and Buddhism

Jeong, Kang-gil

This paper discusses the differences of philosophical categorization between Whitehead's process philosophy and Buddhist philosophy. This article focuses on the four major Buddhist schools―①Sarvāstivāda(說一切有部), ②Sautrāntika(經量 部), ③Yogācāra(瑜伽行派), ④Mādhyamika(中觀學派)― during Abhidharma Buddhism period, which was before the birth of the Mahāyāna Buddhism. Here, Yogācāra and Mādhyamika are the two core pillars of Mahāyāna Buddhism. However, they do not accept the reality of the external world. On the other hand, Whitehead's process philosophy is metaphysical atomism that accepts the reality of the external world, like Sarvāstivāda and Sautrāntika. Whitehead argued that “the ultimate metaphysical truth is atomism,” and there is a theory of paramāṇu(極微) in Sarvāstivāda and Sautrāntika, but not in Mahāyāna Buddhism. In this regard, Whitehead's process philosophy is categorically far from Mahāyāna Buddhism and closer to Sarvāstivāda and Sautrāntika. Also, the atomistic reality in whitehead philosophy has irreducible uniqueness, and it is non-substantial and relational. He called it “actual entity” or “actual occasion.” In whitehead philosophy, actual entities are merely becoming and perishing, and do not change. Therefore, this does not belong to the concept of substantialistic self-nature(自性) that Mādhyamika criticizes. And Vasubandhu(世親) of Yogācāra assumed that the paramāṇu(極微) would be infinitely divided. This is similar to Zeno's paradox, who assumes time and space can be divided indefinitely. According to Whitehead's claim, Zeno illegitimately assumes this infinite series of acts of becoming can never be exhausted. But Whitehead said, there is no need to assume that an infinite series of acts of becoming, and saw it as nothing but a mathematical error. Nāgārjuna(龍樹) 650 정 강 길 of the Mādhyamika never considered self-nature(自性) as only becoming and perishing, and Vasubandhu had no doubt about his own assumptions that paramāṇu(極微) would be infinitely divided. Among Sarvāstivāda and Sautrāntika that accepted the reality of the external world, I think, Whitehead's process philosophy is closer to Sautrāntika, because paramāṇu(極微) of Sautrāntika, like Whitehead, only becoming and perishing. But Sautrāntika is still an untrodden area. In conclusion, Sautrāntika is categorically the most similar to Whitehead's process philosophy. However, Buddhism is still in the making.

 

Keywords : Whitehead, Mahāyāna Buddhism, Abhidharma Buddhism, Sarvāstivāda, Sautrāntika, Yogācāra, Mādhyamika, paramāṇu, atomism ▫

 

 2021년 02월 20일 접수   2021년 03월 18일 심사완료    2021년 03월 22일 게재확정

동서철학연구 제99호, 2021. 3.

불교철학과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어디서부터 갈라지는가 - 불교의 4대 학파와 화이트헤드 과정철학 간의 범주적 차이 문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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