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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의 이중성과 민주주의의 민주화/한상원.충북대

 요약문 

이 글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와 맺는 관계를 포퓰리즘의 이중성이라 는 관점에서 도출하고자 한다. 즉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현실 속 에서 상실된 인민주권의 목소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정당한 민주주의적 에너지를 갖는다. 반면 포퓰리즘은 또한 반지성주의와 권위주의에 함몰될 위험 역시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포퓰리 즘의 민주주의적 에너지가 권위주의로 빠질 위험을 경계하면서도, 그 에너 지를 통해 현재의 민주주의의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민주주의 의 급진화’를 위한 흐름들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 이 글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사고하는 다양한 논의들을 참고하며, 오늘날 포퓰리즘의 에너지들이 어떻게 민주주의 자체의 민주화를 위한 방향으로 승화될 수 있는가를 검토한다.

 

주 제 : 현대정치철학, 사회철학, 민주주의론

검색어 : 포퓰리즘, 민주주의, 신자유주의, 인민주권 177 포퓰리즘의 이중성과 민주주의의 민주화

 

1. 들어가며

우리의 일상에서 포퓰리즘은 경멸적 의미를 갖는다. 정치 세력들 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경쟁분파들을 비난하기 위해, 또는 상대가 수준 미달의 정치를 행하고 있다고 지적하기 위해 포퓰리즘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에 따르면, 무분별한 복지정책을 남발하거나 표 를 얻기 위해 대중영합적 정책을 펴거나 대중의 분노를 동원하는 모 든 정치적 행위들이 포퓰리즘이라고 비난받는다. 이러한 모든 포퓰 리즘에 대한 비난은 그것이 민주주의를 흉내내지만 결국은 민주주의 를 잠식하는 (마치 ‘적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적이 라는 전제를 공유한다.

그러한 비난은 포퓰리즘적이지 않은 순수한 민주주의의 존재를 가정하며, 특히 전통적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최 상의 또는 대체 불가능한 상태라는 주장을 함축한다. 그러나 이러한 포퓰리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근거가 있는 것일까?

과연 포퓰리 즘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왜 두려워하는가. 그것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무엇인가.

먼저 우리는 포퓰리즘 정치의 커다란 확산을 겪었 던 유럽의 정치상황과 그에 뒤따르는 논의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알게 되는 사실은, 포퓰리즘이 결코 단일한 실체를 갖지 않으며 여러 형태들이 경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리스를 살펴보자.

급진좌파 정당 시리자(Syriza)는 전임 정 부들이 맺은 부채 협상과 이로 인한 긴축재정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토대로 2015년 1월 집권했으나, 강경한 유럽연합 각료들과 경제 관 료들은 신생 그리스 좌파 정부가 긴축을 받아들여 항복하기를 강요 했다. 이때 시리자 정부는 소위 트로이카, 즉 유럽 위원회(EC), 국제 통화 기금(IMF), 유럽 중앙은행(ECB)이 지시한 구제금융안을 수용할 지 여부를 국민총투표에 부쳤다. 매우 과감한 포퓰리스트 전략이었 다. 이에 호응하여 그리스뿐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시위가 일어나 178 한상원 그리스 국민들이 ‘아니오(oxi)’에 투표할 것을 호소하였다. 2015년 7월 5일 실시된 그리스의 국민투표에서는 62퍼센트가 ‘아니오(oxi)’ 에 투표함으로써, 유럽연합과 트로이카의 경제 지배에 맞선 그리스 의 ‘인민주권’을 선언하였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형태의 국민투표가 이듬해인 2016년 6월 23 일 영국에서 발생한다.

이번에도 이 국민투표에서는 유럽연합을 거 부할 것인가라는 유사한 쟁점이 다루어졌으나, 그것은 그리스와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제기되었다.

유럽연합으로부터의 탈퇴를 촉구한 이번 국민투표는 우파 포퓰리스트 세력이 주도했으며, 따라서 긴축정책 반대와 같은 의제들은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혐오선동과 뒤 섞여 영국의 배타적 주권에 대한 강화 요구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투표 이후 무슬림을 비롯한 외국인에 대한 증오범죄가 급증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등장한 그리스와 영국의 국민투표 사례는 포퓰리즘 정치의 요구가 갖는 정반대의 성격을 보여준다. 즉 그것은 기성정치 와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하여 인민주권의 원리를 천명하지 만, 그러한 분노는 민족적-인종적 동질성에 대한 요구와 외국인 혐 오 등의 정서로 쉽게 전환되기도 한다. 이점에서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인민(국민)주 권 원리를 가장 강력한 정서적 모멘텀으로 삼았던 2016년 촛불시위 이후, 한국 사회에서 ‘국민이 우선이다!’ ‘국민이 주권자다!’와 같은 형태의 유사-포퓰리즘적 구호들은 국경통제와 타자에 대한 배제 요구로 이어지기도 했다.

2018년 예멘 난민들의 집단적 입국 이후 난민 반대 시위, 그리고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의 초기 유행 시기에 중국인 입국 금지 시위 당시에 사용된 것이 바로 이러 한 구호들이었다.

또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공정’이라는 구호 역 시 반기득권 정서를 노출하면서 배제된 세대의 절망감을 응축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적인 현상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절망감이 여성이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정서와 쉽게 결합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서구의 우익 포퓰리즘과 일정부분 공명한다는 특 징을 갖는다.

이러한 현상들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중대한 질문 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관점을 취하든 간에, 양자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양자는 모두 인민 내지 데모스의 구성적 역량을 중요시하는 정치이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 양자의 희미한 경 계선 사이에서 포퓰리즘의 ‘민주주의적’ 요구는 그것이 ‘반민주주의’ 로 전화될 위험성에 대한 의구심을 낳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포퓰리 즘의 이중성을 개념화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민주주의 의 현주소에 어떤 과제를 제기하는가?

이 글은 이러한 물음을 해결 하는 과정에서,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이중적, 역설적 관계를 추적 하며 그것이 ‘민주주의의 급진화’라는 기획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 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2. 포퓰리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 논쟁들

포퓰리즘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대체적으로 포퓰리즘이 엘리트 와 인민 사이의 대립을 전제하는 정치운동이라는 정의에서는 일치하 지만,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관해서는 상이한 관점들을 제 시하고 있다. 포퓰리즘에 대한 논의는 캐노번의 기념비적인 연구에서 출발한다 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녀는 좁은 의미의 포퓰리즘과 넓은 의미의 포퓰리즘을 구분하는데, 좁은 의미에서 그것은 농촌을 중심으로 한 급진주의 운동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엘리트와 풀뿌리 사이의 긴장”이 존재하는 곳에서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들을 활용해 대중적 정념을 동원하고, 거리에서의 운동을 이상화하며 ‘인민’의 이름으로 연합을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운동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1)

이 처럼 포퓰리즘에 내포된 민주주의적 요소에 대한 인식은 캐노번의 연구가 갖는 성과라 할 수 있다.

라클라우는 이러한 인식을 더욱 심화하여, 매우 과감하게 포퓰리 즘 정치의 대의를 옹호하면서, 그것을 모든 정치의 필연적 형식으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서구 근현대 정치철학에서 나타나는 포퓰리 즘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모두 ‘대중’에 대한 편견과 모욕에서 비롯 한 것이다. 반면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은 정치적인 것 자체의 존재 론적 구성에 관한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주장한 다.2)

왜냐하면 모든 민주주의 정치는 인민의 구성이라는 포퓰리즘적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클라우의 논의에서 포퓰리 즘은 민주주의 정치와 사실상 동의어로 받아들여진다.

이에 반해 아르디티는 이러한 라클라우의 견해를 과대평가로 규정한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나타나는 소음이자 징후일 뿐, 그 자체로서는 민주주의와 동일시되지 않으며 전체주의의 위험마저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마치 민주주의라는 파티에 나타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손님”과 같다.3)

 

         1) Canovan, Margaret: Populism,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81, p.9.

         2) Laclau, Ernesto: On Populist Reason, London/New York: Verso, 2005, p.69.

         3) Arditi, Benjamin: Politics on the Edges of Liberalism. Difference, Populism, Revolution, Agita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7, p.78.

 

그는 무 례하고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들지만, 다른 손님들을 긴장하고 깨어 있게 한다. 포퓰리즘은 유의미한 현상이지만 딱 그 정도의 가치 가 있을 뿐이다.

아르디티의 영향을 받은 미즈시마 지로는 포퓰리즘 이 ‘해방과 억압’이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중 해방의 논리는 페론주의를 포함한 중남미 포퓰리즘에서 드러나며, 억압의 논리는 유럽의 포퓰리즘이 갖는 배외주의에서 나타난다.

그는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와 많은 부분이 중복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보면,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부정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하나의 중요한 측면, 즉 민중의 직 접 참가를 통한 ‘보다 좋은 정치’를 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4)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민 주주의의 개선을 향한 포퓰리즘의 노력이 때로는 제어가 되지 않는 경우도 나타날 수 있으며, 따라서 ‘포퓰리즘이라는 취객’을 경계할 필요 역시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포퓰리즘이 자유민주주의와 대의제를 파괴하가 보완하는가에 관해서도 논쟁이 제기된다.

여기서 논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포퓰리즘은 자유민주주의를 위축시키는 자유주의 없는 단순화된 민주주의(혹은 유사-민주주의)인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편향성을 교정할 수 있는 민주적 추진력을 지니는가?

야스차 뭉크는 “포퓰리스트들은 ‘더욱 민주주의적’이다”5)라고 보면서도 이러한 포퓰리즘적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이 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해악적 운동이라는 인식을 표명한다.

 

    4) 미즈시마 지로,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적인가, 개혁의 희망 인가』, 이종국 옮김, 연암서가, 2019, 45쪽.

    5) 야스차 뭉크, 『위험한 민주주의: 새로운 위기,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 는가』,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18, 17쪽.

 

즉 그것은 “권리의 보장 없는 민주주의라고 할 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6)일 뿐이다.

뭉크만큼 포퓰리즘에 대해 적대적 이지는 않지만, 무데와 칼트바서 역시 포퓰리즘이 자유민주주의와 양립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이들에 따르면,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 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얕은 이데올로기다.”7)

 

루소의 일반의지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은 권위주의로 빠질 위험을 항상 내포하며, 따라서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이면서도 현 대 세계에서 지배적 모델인 자유민주주의와 충돌한다.”8)

 

      6) 같은 책, 40쪽.

      7) 카스 무데,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 『포퓰리즘』, 이재만 옮김, 고유서 가, 2019, 15-16쪽.

      8) 같은 책, 133쪽.

 

한발 더 나아가 얀-베르너 뮐러는 세 가지 점에서 무데와 칼트바 서의 테제를 비판하면서, 포퓰리즘의 해악을 더욱 명확히 지적한다.

 

   첫째로 루소의 ‘일반의지’와 포퓰리스트들이 내세우는 ‘인민의 의지’ 는 상이한 개념이다.

일반의지는 시민의 실제 참여를 전제하며 다수성을 강조하는 개념인데 반해, 인민의 의지는 민족정신(Volksgeist) 이라는 상징적 실체(symbolic substance)를 내세우면서 인민의 동질적 성격을 강조한다.

   둘째로 뮐러가 보기에, 포퓰리즘이 ‘비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라는 가정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수식어들은 포퓰리즘을 여전히 민주적이라고 치장해주는 효과를 내며, 포퓰리즘 운동의 지지자들이 바라는 것 역시 바로 이런 효과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의 대립이라는 도식은 포퓰리즘을 설명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포퓰리즘 은 ‘도덕적으로 순수하고 완벽하게 동질적인 인민의 의지’를 가정하므로, 반대자를 정당한 인민의 범주에서 배제하고 적으로 설정한다. 

 

포퓰리즘이 가진 이러한 “정치에 관한 특정한 도덕적 상상”9)으로 인해 포퓰리즘은 ‘동질적 인민’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이질적인 그룹을 적으로 설정하는 반다원주의라는 특징을 갖는다.

즉 포퓰 리즘은 ‘배제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라는 특징을 가지며,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 최고의 이상(‘국민이 직접 통치하게 하자!’)을 실현해주겠다고 약속하는 타락한 형태의 민주주의”10)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한스 포어랜더는 유사한 맥락에서 포퓰리즘의 반다원주의적 성격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포퓰리즘이 반엘리트주의적 성격을 갖는다는, 캐노번의 연구 이래 오랫동안 유지된 관점에 대해서도 의심한다.

그에 따르면, 포퓰리즘의 반엘리트주의는 피상적 성격에 불과할 뿐이며, 오히려 “자유주의적이고 입헌적인 민주주의 제도들에 대한 포퓰 리즘적 불신”은 필연적으로 “합헌적으로 보장된 민족적, 문화적, 종 교적 소수자들의 권리의 부인”으로 이어진다.

이는 좌파 포퓰리즘을 포함해, 포퓰리즘이 언제나 ‘우리’와 ‘그들’에 대한 분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배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1)

 

       9) 얀 베르너 뮐러,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그가 말하는 ‘국민’ 안에 내가 들 어갈까』, 노시대 옮김, 마티, 2017, 33쪽.            10) 같은 책, 15-16쪽.

       11) Vorländer, Hans: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Über das Verhältnis von Populismus und Demokratie – Eine Skizze, Totalitarismus und Demokratie Jg. 8 Heft 2, 2011, p.192.

 

이와 달리 디르크 외르케와 파이트 젤크는 포퓰리즘에 대한 도덕화하는 관점을 거부하며, 특히 이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식으로 도덕화된 규정을 내리는 것은, 정치적 상대를 탈도덕화함으로써 정 치적 의지형성을 해방시킨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전제를 무시함으로써 수행적 모순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외르케와 젤크에 따르면 이렇게 포퓰리즘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시도들은 포퓰리즘의 사회적 원인에 대해서 침묵하며, 포퓰리즘을 단지 인종주의, 민족주의, 성차별주의, 원한감정으로 환원할 뿐이다.

이에 반해 포퓰 리즘은 “민주주의의 이행되지 않은 약속에 대한 반응”12)으로 정의될 수 있다.

즉 민주주의에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이 모순이 포퓰리즘의 자양분이라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오늘날 포퓰리즘은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탈민주적 자유주의 (postdemokratischer Liberalismus)’에 대한 대응으로 읽힐 수 있 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낸시 프레이저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포 퓰리즘의 사회적 원인에 대해 분석하는 가운데 프레이저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블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진보적 신자유주의 블록은 약탈적이고 금권정치적인 경제 프로그램을 자유주의 적·능력주의적 인정 정치와 결합했다. 이 혼합체의 분배 요소는 신자유주의적이었다.”13)

 

      12) Jörke, Dirk / Selk, Veith: Theorien des Populismus. Zur Einführung, Hamburg: Junius, 2017, p.13.

     13) 낸시 프레이저,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김성준 옮김, 책세상, 2021, 18쪽. 

 

이 헤게모니 블록은 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축 중 인정 부분은 진보적이지만 분배 부분은 신자유주의적, 약탈적이 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진보적 신자유주의가 낳은 폐해에 대한 대중적 불만 속에서, 신자유주의와 함께 자유주의적 인정 정치 까지 부정하는 반동적 포퓰리즘이 등장하여 확산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트럼프의 집권을 뜻하는 것이었다. 프레이저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평등주의적 분배 정치와 계급 문제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인 정 정치를 추구하는 진보적 포퓰리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지금까지의 논의 속에서 우리는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 한 논쟁의 짜임관계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들로 귀결된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에 저항하는 인민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정치의 정당한 전략으로 인정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러한 갈등 속에서 새로운 권위주의로 귀결되는가?

포퓰리즘의 민주적 에너지가 권위주의로 귀결되지 않고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혁신의 가능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가?

결국 포퓰리즘과 민주주의가 맺는 관계는 그 복합적 이중성 속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규명할 것이다.

포퓰리즘 운동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혁신과 급진화를 위한 조건이 될 수 있는 잠재력과 동시에, 민주주의를 파 괴할 부정적 잠재력 역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적도 아니며, 민주주의와 동일한 것도 아니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전자가 후자를 역으로 파괴할 역설적 잠재력 역시 존재한다.

따라서 포퓰리즘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것도, 일방적으로 예찬하는 것도 모두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퓰리즘의 에너지를 민주주의의 급진화(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해 ‘승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필자는 정치적 합리성 또는 시민권을 통한 인민주권의 제도화와 관련된 물음이 제기되지 않으면 포퓰리즘 운동은 권위주의를 강화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하여 포퓰리즘적인 에너지가 ‘탈민주주의화된 시대’를 넘어서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낳기 위해, 그러한 에너지의 승화를 가능케 할 전략들을 발명하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의 과제가 되 어야 한다. 

 

3. 정서의 정치화인가 반지성주의인가? 하나의 논점: 무페와 아도르노

우리는 그러한 민주적 에너지의 ‘승화’를 이론화하기 위해 우선 대중의 정서 혹은 정념이 정치에 대해 맺는 관계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의도적으로 필자는 여기서 매우 상이한 관점을 취하는 두 사상가(샹탈 무페와 아도르노)의 이론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특히 2018년과 2019년에 각각 출간되어 큰 화제를 모은 두 철학자들의 저작들 – 2018년 (브렉시트의 나라인) 영국에서 출간된 샹탈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와 이듬해인 2019 년 (나치즘의 경험이 있고 오늘날 우익 포퓰리즘의 급부상을 목격하고 있는) 독일에서 출간된 아도르노의 강연록 『신극우주의의 양상 (Aspekte des neuen Rechtsradikalismus)』 - 을 비교함으로써 사태의 양면성을 진단해보고자 한다.

2018년 출간된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는 출간과 동시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전 유럽에서 우파 포퓰리즘 정당의 선거 돌풍과 극우파 정치인들의 집권이 가시화되어 위기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포퓰리즘을 좌파의 전략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의구심을 자아냈다.

2019년 (그의 사망 50주년을 맞아) 출간된 아도르노의 『신극우주의 의 양상』 역시 독일 사회에서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이 책은 1966 년, 서독의 극우정당인 독일국민당(NPD)의 2차 대전 이후 최초 지역의회 진출을 계기로 위기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아도르노가 1967 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출간한 것으로, 최근 독일 우익 포퓰리즘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약진 속에 아도르노의 주장들이 현실과 오버랩되면서 화제를 모았다.14)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은 비슷한 시기 화제를 모은 이 두 저서들 이 우익 대중운동에 대한 상이한 관점을 도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페가 포퓰리즘 전략을 좌파가 전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익 포퓰리즘에 대해서도 그것의 ‘민주적’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아도르노는 그가 ‘우익급진주의’라고 부른 극우 경향의 정치운동이 잠재적으로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할 위험성에 대 해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물론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대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아도르노의 시대에는 유럽에서는 ‘포퓰리즘’이라고 불릴만한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민주주의 정치와 대중의 ‘정서’ 또는 ‘정념’이 맺는 관계에 대한 시각 차이 를 보여주기도 한다.

무페에 따르면, 오늘날 우익 포퓰리즘의 급부상은 ‘비합리주의’로 일방적으로 매도될 수 없으며, 거꾸로 “포스트 정치적 합의(postpolitical consensus)”가 낳은 산물로 간주될 필요가 있다.15)

 

    14) AfD의 성공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처음으로 보수당보다 더 오른쪽의 우익급진주의 세력이 연방의회에 진출한 일일뿐만 아니라, 단숨에 원내3당의 지위를 차지한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많은 이들은 나치즘을 경험한 독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경각심은 독자들을 이 책으로 이끌었다. <슈피겔(Spiegel)>은 아도르노가 이미 1967 년에 신우익의 주요 특징들을 분석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전했으며, 그 자매지인 는 ‘왜 그레타 툰베리 세대는 갑자기 아도르노를 읽는 가’라는 부제가 달린 분석기사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불안정과 함께 극우 세력의 부상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는 밀레니얼 세대가 아도르노 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15) Mouffe, Chantal: For a Left Populism, London/New York: Verso, 2018, p.51. 

 

다시 말해 오늘날 정치집단들 사이의 정치적 차이들은 사라져버렸으며, ‘제3의 길’이라는 이름의 중도적 합의가 등장했는데, 이는 시장만능주의와 공공영역의 해체라는 신자유주의적 대의에 의한 합의를 뜻하는 것이었다.

전통적 좌파와 우파 모두를 포함하는 엘리트 정치집단들 사이의 이러한 ‘탈정치적’ 방식의 정치적 합의에 대한 불만이 바 로 포퓰리즘적 정서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여기에는 다수 대중의 의지가 부정된다는 문제의식이 강하게 내포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엘리트 집단의 탈정치적 합의에 맞서 인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정치적 흐름이 등장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따라서 오늘날 정치의 과제는 이러한 인민적(포퓰리즘적) 목소 리의 분출을 어떤 방향으로 구성해내는가 하는 것이다. 무페는 ‘인 민(people)’과 ‘과두(oligarchy)’ 사이의 정치적 전선의 구성을 위한 담론적 전략으로서 좌파 포퓰리즘을 통해 현 정세에서 민주주의를 재발견하고 심화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의 유형을 구축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많은 이들은 우익 포퓰리즘 지지자들을 네오나치의 추종자 정도로 생각하고, 이들을 사회의 질병으로 규정한다. 반면 무페가 보기에, 우익 포퓰리즘 정당들을 통해 제기되는 대중의 요구들은 상당부분 ‘민주적’인 요구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무페는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 을 ‘극우’ 또는 ‘네오 파시즘’ 세력으로 도덕적인 낙인을 찍어 묘사 하는 것에 반대한다16).

 

       16) 같은 책, p.22. 

 

그녀가 보기에, 이들이 표출하고 있는 ‘반기득권 담론’은 실제로는 좌파적인 방향으로 이어질 잠재적 가능성 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좌파 포퓰리즘의 관점에서 이들을 도덕 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성장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무페는 인민이란 경험적 지시대상이 아니라, 담론정치적 구성의 대상이라고 본다. 그녀는 이 지점에서 인민을 구성하는 헤게모니적 실행의 과정에서 정치적 지도자가 갖는 중요성을 지적한다. 이 지도 자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중요한데, ‘공통 정서(common affect)’가 결정화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집합적 의지의 형성이 가능하기 때 문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와의 정서적 유대는 이러한 공통 정념의 형성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한다. 무페는 정치적 동원은 언제 나 감정, 정서, 정념의 요소를 통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 써 정치적 합리주의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지도 자와 지도력의 역할이 정치적 동원에서 필수임을 강조한다. 무페가 보기에, 기존 좌파는 과도한 합리주의적 접근으로 인해 이 러한 “정치의 역동성”을 파악하는데 실패해왔다. 반면 무페는 프로이 트와 스피노자를 차용하면서, “정서적 에너지의 동원”17)을 통한 집 합의지의 창출과정은 언제나 언어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들뿐만 아니 라 비언어적인 감성과 행위의 요소들을 결정적 추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을 제기한다. 이처럼 공통의 정서에 기반을 둔 “집합의지의 결정 화”를 목표로 하는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욕망과 정서의 다른 체제 를 창조”하고자 한다18).

 

       17) 같은 책, p.73.

       18) 같은 책, p.77.

 

여기서 이러한 ‘감정의 정치’를 동원하는 포퓰리즘을 부정적, 경멸적 의미로 언급하는 다수의 연구자들과 무페가 갈라지는 지점이 나타난다.

이러한 무페의 주장은 인민의 주체성을 정치의 제1원리로 고려한 다는 점에서 반(反)엘리트적이고 민주적인 성격을 갖는다. 또 우익 포퓰리스트 지지자들을 도덕적으로 가치절하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그녀의 주장은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그들은 동시에 신자유주의 질서의 피해자들이기도 하며, 따라서 우익 포퓰리즘에 대한 지지는 ‘항의’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또 그녀의 주장은 정치적 공동체성이나 집합적 주체성의 창출에서 감정이나 정서가 차지하는 본질적 위치를 강조하며, 이런 의미에서 규범적 당위론을 넘어선 정치적 현실주의를 담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무페와 그녀의 사상적 동반자 라클라우가 전개한 포퓰리즘 이론은 현실정치에서의 반향들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2011 년 5월부터 시작된 ‘인디그나도스 운동(분노한 사람들)’과 ‘15M(5월 15일) 운동’의 여파로 2014년 1월 16일 창당해 단기간 급성장하여 2020년에는 좌파연합 정부에 참여한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 는 포퓰리즘 정당으로 분류된다. 2021년 5월 정계 은퇴를 선언한 포데모스의 리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와, 지금은 포데모스를 떠나 마스 파이스(Más País)를 이끄는 이니고 에레혼은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스트 맑스주의를 자신의 정치적 사상과 결합했다.

즉 이들은 정통파 맑스주의의 사회주의론을 폐기하는 대신, 급진 민주주의를 통해 ‘인민’을 정치적 주체로 복권시키고자 시도하였다.

에레혼과 무 페가 나눈 대화는 2015년 책으로 출간되어, 포데모스 필독서가 되 었으며19), 이글레시아스는 포데모스 창당 첫 해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퓰리즘론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20)

반면 그녀의 주장이 갖는 한계 역시 드러난다.

    첫째로 그녀는 포퓰리즘 정치가 권위주의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베네수엘라나 에콰도르의 사례에서 보듯이, 좌파 포퓰리즘 역시 ‘적’과의 대면 속에서 홉스적인 국가 모델의 권위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21)

 

       19) Mouffe, Chantal / Errejón, Íñigo: Podemos. In the Name of the People, London: Lawrence & Wishart, 2016. 참고로 이 책에서 무 페와 에레혼은 여러 관점에서 견해의 일치를 보지만, 포데모스를 ‘좌파 포퓰리즘’으로 정의내리는 데에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에레혼은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 전략의 내용에는 동의한다고 밝힘에도 불구하고, ‘인민’ 의 이름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좌/우파 구별을 넘어서야 한다는 관점을 피력한다.

       20) 존 주디스, 『포퓰리즘의 세계화』, 오동훈 옮김, 메디치미디어, 2017, 184쪽.

       21) Gandesha, Samir: Understanding right and left populism, in: Morelock, Jeremiah (Ed.): Critical Theory and authoritarian populism, University of Westminister Press, 2018, p.63 

 

비단 남미에서뿐 아니라 유럽의 좌파 포퓰리즘에서도 권위주의의 문제가 종종 제기된다. 대중적 선동을 위해 난민에 적대적인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담론을 수용하거나, 정치적 동원을 선전전략 으로 환원하거나, 이를 가능케 할 소수의 인격적 리더쉽에 대한 지 나친 의존이라는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독일 좌파당(Die Linke)을 포퓰리즘 전략의 노선에 따라 이끌기 위해 발의된 단체 아우프슈테엔(aufstehen: 일어나라)이 이러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22)

 

          22) Opratko, Benjamin: Autoritäre Wende, populistische Wette. In: Daellenbach, Ruth/Ringger, Beat/Zwicky, Pascal (Hg.): Reclaim Democracy. Demokratie stärken und weiterentwickeln, Zürich: Edition 8, 2019, pp.146-147.

 

이는 둘째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데, 만약 ‘인민’ 이 담론의 구성물이라면, 누가 ‘진정한’ 인민인지를 판단할 기준이 어디에서 발견되어야 하는지 모호하다.

이 모호함은 인민을 ‘인민’으로 호명할 정치적 권력자나 카리스마적 개인 혹은 집단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에 대한 무방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인 민’ 대(對) ‘엘리트’라는 포퓰리즘의 전선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누 가 인민인가’라는 물음이 모호하듯, ‘누가 엘리트인가’라는 질문 역 시 다의적 답변이 가능하다.

정치적인 적수로 규정되는 엘리트에 누가 포함되느냐에 따라 인민의 불만이나 분노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무페는 전문가 집 단이나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증오로 표현되는 반지성주의 현상이 어째서 포퓰리즘 운동과 쉽게 결부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무페가 기각하고 있는 ‘정치적 합리성’에 대한 담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비록 집합적 주체성이나 공동체성의 형성에서 대중의 정서적 요소가 일차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러한 정서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라는 합리적, 반성적 숙고와 성찰과 분리될 수 없다.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무페와 정반대편에서 우익급진주의와 반지성주의의 결합에 대해 고찰했던 아도르노의 시선은 의미를 갖는 다.

아도르노는 총체화된 계몽의 실패를 진단하면서도, 계몽의 근본 적 잠재력을 ‘주체의 비판적 사유능력’에서 발견하려는 의미에서 ‘비 판적 계몽주의자’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는 항상 그러한 정치적 지배가 주체 의 사유능력을 박탈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이 지적된다. 이처럼 아도르노의 정치철학적 기획 전반은 항상 반지성주의와 전체 주의 사이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이는 거꾸로 민 주주의는 일정한 수준의 ‘시민적 지성’이 갖춰진 상태에서만 작동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반지성주의는 지성적 논의 전반에 대한 증오 또는 분노의 태도와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기존 사회의 원리에 대한 무비 판적 순응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다. 즉 아도르노 가 보기에 반지성주의란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 즉 ‘비판’에 대한 적대와 일치한다. 이런 의미에서 반지성주의는 민주주 의의 근본적 토대인 시민적 지성을 파괴한다. 이러한 비판은 ‘대중 여론’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많은 경우에 여론은 집단지성이 아 니라 집단정념의 산물이다. 따라서 그 안에는 편견, 사회적 권력관 계에 대한 내면화, 그리고 특정 집단에 대한 분노나 증오의 감정들 에서 비롯된 왜곡된 판단들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도르노의 비판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것은 대중은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엘리트주의인가?

오히려 아도르노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직업적 지식인이라는 엘리트집 단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주체로서의 시민들이 스스로 ‘지 성인’으로서의 성숙함을 지녀야만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민주주의란 그 개념상 ‘다수대중(인민)이 권력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체제’로 정의내릴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권력을 행사해야 할 다수대중이 능동적인 주체적 역량을 갖지 못하고 편견이나 선동에 예속된다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해지고 말 것 이다. 2019년 출간된 아도르노의 강의록 『신극우주의의 양상』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책에서 아도르노는 무페와 유사하게 우익급진주의를 지지하는 대중들을 ‘무지한 자들’로 낙인찍거나 비난하는 엘리트적 태도를 지녀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들이 “영원히 교화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위안을 주는 구절”은 이 소수의 “과격집단(lunatic fringe)”만 제외하면 현재의 민주주의가 정 상적으로 잘 작동할 것이라는 자기만족에 불과하다.23) 그렇다면 전후 서독에서 다시 우익급진주의가 등장한 진정한 원인 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경제적 내용상 민주주의는 오늘날까지 어디에서도 온전히 구체화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형식적으로 남아있 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이런 맥락에서 파시즘 운동은 “민주주의의 상처자국, 흉터”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24)

 

      23) Adorno, Theodor W.: Aspekte des neuen Rechtsradikalismus, Berlin: Suhrkamp, 2019, p.17.

      24) 같은 책, p.18.  

 

벤자민 아르디티의 연구를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표현들 속에서 아도르노는 우익급진 주의의 또 다른 요소인 “사회적 파국의 감정”을 부각시키며, 정념적, 감성적 측면이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가를 분석한다.

현재의 경제체제가 곧 위기 또는 공황을 겪을 것이라는 예언과 그로 인한 불안을 조장하면서 우익급진주의는 대중의 불안한 정서를 파고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특히 조작과 선전이라는 수단은 광범한 위력을 발휘 한다.

우익급진주의 운동에서 프로파간다는 “정치의 실체”를 이룬 다.25)

특히 이 과정에서 특정한 ‘적’이 설정되고 이 상상적, 허구적 적에 대한 분노의 에너지가 집중될 때, 이러한 운동을 이끄는 정치 세력의 카리스마적 지배력 역시 커진다.

따라서 우익급진주의는  순히 “자생적 대중운동”으로 볼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익급진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기는커녕 “민주적 게임의 규칙 에 적응”26)하였고 자유민주주의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25) 같은 책, p.24.

     26) 같은 책, p.36. 

 

그렇다면 이러한 프로파간다가 과연 표현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는 것이 합당한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는 오늘날 인터넷 사이트나 뉴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는 여성, 소수자, 난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 한 혐오발언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인권보호를 위해 적절히 규제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법철학적 논쟁을 연상시키는 질문이다.

이처럼 우익급진주의가 제공하는 프로파간다에 대한 아도르노의 분석은 무페의 포퓰리즘 분석에서 빠진 부분이다.

그런데 아도르노 의 이러한 분석은 소셜미디어를 비롯한 뉴미디어가 반지성주의와 결 합되어 일으키는 효과와 일정부분 공명한다.

예컨대 안티백신 음모론은 매우 쉽게 뉴미디어를 통해 대중적으로 전파되면서 엘리트 계급의 음모와 국가의 자유 침해에 맞선 민중적 저항의 이미지를 획득 할 수 있다.

난민 반대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무슬림들이 성범죄율을 증가시킨다는 프로파간다를 사실로 받아들인 다.

무페가 ‘인민’의 담론적 호명을 통한 포퓰리즘 정치의 구성방식이 갖는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조한다면, 아도르노는 그러한 구성방식이 프로파간다에 의해 왜곡될 수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포퓰리즘 운동이 낳을 수 있는 ‘권위주의적’, ‘반지성주의적’ 효과를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익급진주의 운동이 갖는 반지성주의와 프로파 간다의 위험성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이 갖는 ‘신중함’과, 포퓰리즘의 도전에 대해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맞불을 놓자는 무페의 ‘과감함’ 으로부터 모두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 통해 포퓰리즘이 갖는 민주주의적 에너지를 긍정하되, 그것이 나타낼 수 있는 반지성주의적, 프로파간다-정치적 위험을 동시에 사유하면서, 그러한 에너지를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위한 추동력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우리는 현재 우리가 처한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4. 포퓰리즘의 민주주의적 에너지와 민주주의의 민주화

일련의 저자들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공통적으로 오늘 날 신자유주의 시대 극단화된 ‘민주주의 없는 자유주의’의 출현이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의 표현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앞서 보았 듯, 외르케와 젤크는 포퓰리즘 발흥의 사회적 원인을 분석한다. 이 들에 따르면 포퓰리즘의 부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탈민주 주의적 자유주의의 헤게모니”가 갖는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개인적 권리나 시장의 자유와 같은 자유주의적 요소들이 민주적으 로 결정돼야 할 영역을 점점 더 제약하는 정치이념적이고 제도적인 질서”를 말하며, 특히 “경제 질서, 소유권, 교육체계나 이를 통해 생 산되는 사회적 위계”가 여기에 포한된다. 외르케와 젤크는 이제 “자 유주의적 가치들의 헤게모니”, “사회적 권리에 대한 부정적 권리의 우위”가 지배적으로 되었다고 진단한다.27) 이러한 맥락에서 ‘민주주 의의 사유화’가 일어났는데, 이는 ‘민주주의 없는 자유주의’를 뜻하 196 한상원 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탈민주주의적 자유주의는 사회구 조를 근본적 변화로부터 차단함으로써 현존하는 특권구조를 보호한 다.”28) 오늘날 우익 포퓰리즘 세력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대중의 불 만을 문화적 정체성의 언어로 치환해서 표출하며, 이는 자유주의적 합리화,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 질 수밖에 없다.29) 탈민주화된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공허한 형식으로 만들었다는 지적 역시 존재한다. 콜린 크라우치는 “민주주의의 형식적 요소는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 정치와 정부는 점점 더 민주주의 이전 시대에 특징적이었던 방식으로 특권적인 엘리트의 통제권 안으로 미 끄러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30)을 ‘포스트 민주주의’ 현상으로 지적 한다.

 

       27) Jörke, Dirk / Selk, Veith: Theorien des Populismus. p.158.

       28) 같은 책, p.161.

       29) 실제로 유럽에서 우익 포퓰리즘 세력은 기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우 경화, 신자유주의화를 대체하여 사회정책과 복지정책을 호소하면서 점차 ‘사회민주주의화’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폴 라니적인 우익 포퓰리즘”이 등장하고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전에 진보적 사회민주당에 투표했던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우익 포퓰리 즘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상실된 민주주의화 사회정책을 복원하기 위한 일정 부분 합리적 선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Jörke, Dirk / Nachtwey, Oliver: Die rechtspopulistische Hydraulik der Sozialdemokratie. Zur politischen Soziologie alter und neuer Arbeiterparteien, Leviathan, 45. Jg., Sonderband 32, 2017, pp.180-181.

       30) 콜린 크라우치, 『포스트민주주의』, 이한 옮김, 미지북스, 2016.

       31) 같은 책, 27쪽. 

 

특히나 기업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로비 단체의 영향력이 강화 되는 현상에 대해 그는 이것이 “강력한 자유주의 사회의 증거”는 될 지언정 “강력한 민주주의의 증거는 아니다”라고 주장한다.31) 나아가 이렇게 민주주의가 형식만 남게 된 가장 큰 이유를 그는 경제의 세계화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세계화를 향한 자본주의 의 돌진과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32) 이와 유사하게 웬디 브라운은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민주주의 없 는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탈정치화’에 상응하는 현상이라고 지적 한다. 브라운은 “오늘날 행정, 직장, 법정, 학교, 문화를 비롯한 광범 위한 영역에 만연한 신자유주의 이성이 민주주의 구성요소의 명백하 게 정치적인 특성, 의미, 실행을 경제적인 것으로 바꾸고 있다”고 주 장한다.33) 그녀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경제정책을 의미하는 것도, 국가권한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재정이나 통화 정 책으로 한정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이성 형식 으로 존재하며, 그에 따라 개인의 주체화 양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발휘한다. 브라운에 따르면, 오늘날 사회 내에 모든 영역을 경제화 하는 신자유주의는 개인을 경제적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변화 시킨다. 오늘날 개인은 오로지 시장 행위자로, 인적 자본으로 간주 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는 사이, 민주주의의 주체인 ‘인 민’은 사라지고 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시민에 맞춰 축소된 시민권이 공공재에 대한 관심으로 정의되는 시민권을 대체하면서 인 민, 즉 집합적 정치주권을 행사하는 데모스의 개념 자체가 제거된 다.”34)

 

    32) 같은 책, 47쪽.

    33) 웬디 브라운, 『민주주의 살해하기』, 배충효, 방진이 옮김, 내인생의책, 2017, 16쪽.

    34) 같은 책, 47쪽. 

 

그러한 데모스는 근대 사회에서 호모 폴리티쿠스의 형태로 출현하 였다.

호모 폴리티쿠스는 정치적 주권을 실행에 옮기는 존재로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을 일으키고 스스로 통치하는 자기주권적 존재로서 인민을 뜻한다.

근대 사회에서는 (마치 시민이 bourgeois와 citoyen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공존하듯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호모 폴리티쿠스가 나란히 존재해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러한 양날의 날개는 파괴되었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 정치의 주권적 주체의 소멸을 낳았고, 민주주의의 자기지속성을 근본 수준에 서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호모 폴리티쿠스는 신자유주의 이성의 가장 큰 희생양이다.”35) 이러한 진단이 가능하다면, 포퓰리즘은 ‘잃어버린 호모 폴리티쿠 스의 재등장’이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탈민주화라는 현상에 역행 하는 흐름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의 등장이 갖 는 ‘민주주의적 에너지’를 여기서 발견하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와 대척점에서 이해할 것이 아 니라, 이러한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이유 있는 대응으로 간주해야 한다. 여기에서 포퓰리즘의 민주주의적 에너지가 확인된다. 그러나 그것이 반지성주의와 권위주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는 보장이 존 재하는가? 콜리야 묄러는 ‘민주적 포퓰리즘’과 ‘권위적 포퓰리즘’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는 그들의 정치적 요구나 목표를 통해 구분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토대의 관점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그 에 따르면, “민주적 포퓰리즘들이 엘리트나 권력블록에 대항하며 그들의 ‘인민’을 이러한 갈등 속에서 비로소 형성한다면, 권위적 포퓰 리즘들은 항상 티자나 이방인에 의해 파괴될 위협에 처해 있는, 이 미 존재하는 동질적인 인민을 상정한다.”36)

 

       35) 같은 책, 111쪽.

       36) Möller, Kolja: Invocatio Populi. Autoritärer und demokratischer Populismus, Leviathan, 45. Jg., Sonderband 34, 2017, p.247.

 

인민을 갈등속에 구성되는 집단으로 규정할 것인가, 이미 존재하는 동질적인 집단으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두 관점은 완전히 다른 정치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전자에게 인민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며 다원적인 집합적 행 위자가 될 가능성이 있지만, 후자에게 인민은 실체적 동질성 속에서 다양성을 상실하고, 지도자의 카리스마에 복종하며, 타자에 대한 배타적 성격을 노출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민주적 포퓰리즘과 권위적 포퓰리즘은 명확히 구별되는가? 민주적 포퓰리즘이 권위적 포퓰리즘으로 전도될 위험은 없는 것일까? 볼프강 팔라버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따라서 그는 인민주권의 에너지는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법치국가적 제도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법치국가는 다시금 개인의 권리를 위해 인민주권을 제약할 수 있어야 한다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러나 인민의 의지가 갖는 폭발성에 대한 법치국가적 제약만으로는 “비인간적 포퓰리즘으로의 도착화”37)를 막을 수 없다.

 

     37) Palaver, Wolfgang: Populismus – Gefahr oder hilfreiches Korrektiv für die gegenwärtige Demokratie?, Jahrbuch für Christliche Sozialwissenschften Bd. 54, 2013, p.143. 

 

결국 그는 법치국가 질서와 인민주권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도덕적, 종교적으로 성숙한 시민들을 길러낼 수 있는 정치적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 한다.

그러나 ‘도덕적, 종교적’인 시민 계몽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까?

또 이러한 주장은 결국 포퓰리즘의 긍정적 에너지를 무화시키는 효과를 내지 않을까?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논의들 속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인민주권의 에너지를 민주적으로 제도화할 수 있는 역동적 시민권의 관점이 필요하고, 이를 토대로 민주주의 제도 자체의 민주화가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위기 속에서 정치는 발리바르가 말한 ‘민주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democracy)’를 요구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불완전하므로, 그것의 ‘참된 완성’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자기배반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며, 우리는 언제나 민주주의 제도 그 자체를 민주화함으로써만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38)

 

     38) Balibar, Etienne: Citizenship, trans. by Thomas Scott-Railton, Cambridge: Polity, 2015, p.124.

 

따라서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매 순간 발명인 셈이다.

우리는 앞선 분석에 힘입어, 오늘날 필요한 민주주의의 민주화 과제를 ‘민주주의의 탈민주화’에 저항하라는 요구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 없는 자유주의’의 시대에 잃어버린 민주주 의의 요소, 즉 데모스의 자기통치로서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심급을 재창출하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기실, 포퓰리즘 정치가 의도하는 바가 바로 그러한 ‘잃어버린 인민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우파 포퓰리즘은 그러한 인민주권 을 국민주권과 동일시하여 배타적인 국경통제에 대한 요구로 전환시 켰다. 민주주의의 민주화란 이처럼 민주주의와 시민권 제도가 낳는 배제에 저항하여 포괄적인 시민권의 정치가 부활해야 함을 의미하기 도 한다. 오늘날 ‘잃어버린 인민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요구가 어 떻게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동일성 정치(정체성 정치)로 함몰되지 않고, 호모 폴리티쿠스의 재구성으로 이어져 신자유주의적 탈민주화 를 극복하는 정치의 재발명으로 나아가도록 만들 것인가 하는 물음 은 매우 중요한 실천적 함의를 갖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포퓰리즘의 민주주의적 에너지는 민주주의의 민 주화를 위한 추동력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인민적 의지는 억압적 방식으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접합됨으 로써, 다원적으로 형성되는 인민주권의 등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러한 인민주권은 민주주의의 탈민주화에 저항하는 데모스의 창출이 라는 오늘날의 과제와 직결된다. 그것은 포퓰리즘의 에너지를 무매개적, 무반성적 충동에서 매개적, 반성적 역동성으로 승화시키는 과 제를 포함할 것이다.

이것은 반지성주의를 향한 포퓰리즘의 경향을 전환시켜, 집단지성을 갖춘 집합적 행위자로서 데모스를 창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한 승화를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한 오늘날의 과제 중 하나는 계급정치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여기서 계급투쟁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만능열쇠라는 식의 환원주의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계급투쟁이 사라진, 혹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무기력화된 세계에서, 불평등에 대한 개별적인 분노들이 집합적인 정 치적 언어를 통해 구조의 변화를 위한 동력으로 승화될 수 있는 통로를 상실한 것 역시 사실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보편화 이후 불안정한 삶의 형식이 확산되고 극단적인 불평등과 양극화가 나타나면서, 이로 인해 좌절한 세대들의 절망감이 원한감정과 공격 적 혐오의 정념으로 이어지는 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불만의 방향을 난민, 이주민, 소수자와 같은 약자들에 대한 공격적 증오가 아니라 현재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민주주의 정치의 에너지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러한 불만들을 조직화하고 정치 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계급정치의 발명들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제의 수행이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은 그러 한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정치세력의 존재 여부와 관 련되어 있다.

따라서 문제는 포퓰리즘의 흐름을 차단하지 않으면서 그 고유한 에너지를 민주주의의 급진화와 확장을 향해 나아가도록 추동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포퓰리즘 운동이 가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성찰하고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성찰은 마키아벨리와 그람시의 문제설정, 곧 현대의 군주에 대한 실천적 요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5. 나가며

이상의 논의를 요약해보자.

오늘날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이 글의 주장이 담고 있는 전제는, 오늘 날 일차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것은 포퓰리즘이 아니라, 기성정치의 위기라는 것이다. 특히 ‘민주주의의 탈민주화’라는 흐름은 대중의 분노와 소외감을 낳고 ‘잃어버린 인민주권’에 대한 요구가 퍼질 수밖 에 없는 조건을 창출했다.

이처럼 정치적인 것을 중립화하고 중도적 합의를 강제하는 신자유주의 또는 제3의 길에 맞서서, 능동적 시민 혹은 호모 폴리티쿠스의 재발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포퓰리 즘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대중의 분노의 에너지를 또 다른 배제와 차별로 흐르게 하는 우익 포퓰리즘과 달리, 좌파 포퓰리즘은 상이한 운동의 요구들을 ‘인민’이라는 범주속에 접합함으로써, 그러한 에너지를 체제에 대한 변화로 흐르게 한다.

따라서 양자는 동일하게 비판될 수 없다. 우리는 포퓰리즘의 정당한 요구가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적되어야 할 사실은 포퓰리즘이 무조건적으로 추 인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내부에서 반지성주의와 권위주의가 자라 나지 않기 위한 정치적 합리성에 대한 고민 또한 필요하다.

달리 말하자면, 포퓰리즘에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잠식할 위험과, 민주주의를 재활성화시킬 가능성, 잠재력이 동시에 내재해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중성은 민주주의의 불가피한 조건이다.

‘포퓰리즘으로부터 완전 히 벗어난, 순수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이 글은 포퓰리즘이 이중성을 갖는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였다.

즉 포퓰리즘에는 정당한, 민주주의적 에너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동시에 그것이 반지성주의와 권위주의를 자신의 계기로 포함함으로 써 민주주의의 토대를 잠식할 위험 역시 갖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은 일정한 정치적 실천이나 기예로 사라지지 않을 포퓰리즘 정치의 고유한 특징을 이룬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선택지는 포퓰리즘에 내재된 민주주의적 에너지를 민주주의의 확장을 향한 추동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포퓰리즘의 충동적, 무매개적 에너지를 반성적이고 매개된 힘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한 대중들의 정당한 외침이 타자에 대한 혐오나 권위주의 정치의 승인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 그러한 에너지를 사회 구조의 변화를 촉진할 ‘데모스의 집단지 성’으로 결정화시키는 것, 그러한 과제가 오늘날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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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uality of Populism and the Democratization of Democracy

Sangwon Han

In this article, I attempt to derive the relationship between populism and democracy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duality of populism. In other words, populism has its legitimate democratic energy in that the voice of the people's sovereignty which has been lost in the crisis of democracy is expressed. Populism, on the other hand, also carries the risk of being submerged in anti-intellectualism and authoritarianism. Then, the conclusion we can draw is to create sustainedly a flow of ‘radicalization of democracy’ that can actively respond to the current crisis of democracy through that energy while wary of the risk of populism's democratic energy falling into authoritarianism. To discuss this, this article refers to various discussions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populism and democracy, and examines how the energies of populism today can be sublimated toward the democratization of democracy itself. 207 포퓰리즘의 이중성과 민주주의의 민주화

 

Subject Sphere: Contemporary Political Philosophy, Social Philosophy, Theory of Democracy

Key Words: Populism, Democracy, Neoliberalism, Popular Sovereignty

 

논문투고일 2022년 2월 4일 / 심사일 2022년 2월 13일 / 심사완료일 2022년 3월 15일 

시대와 철학 2022 제33권 1호(통권 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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