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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한국전쟁 인식,서술, 활용/한상준.아주대

 I .머리말

역사학은 해석의 학문이다.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과 관점에 따라 역사의 해석은 달라지며, 그런 이유로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복수의 해석이 역사학에 서는 공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주체에 의해 발생한 ‘동일한’ 사건임에도 그 해석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1

한국전쟁도 복수의 해석과 기억이 존재한다.

북한의 남침에 따른 내전으로 시작됐던 한국전쟁은 미군과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확대 되었다.

전쟁의 당사자는 남한과 북한이었지만 중국도 전쟁의 참전국이었고, 오늘날 동아시아 3국은 자신들의 입장과 상황에 맞춰 한국전쟁을 규정하고 정의한다.

우선 한국전쟁을 부르는 명칭을 통해 각국이 전쟁을 어떻게 인식, 서술, 활용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 국제사회의 통상적인 명칭을 받아들여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하 며, 전쟁이 발발한 날짜에 주목하여 6·25 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

 

        1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과 시각에 따라 일각에서는 안중근을 의사(義士)로 기억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테러리스트라고 기억하며, 이에 따라 역사 해석도 차이가 난다.

        2 ‘6·25 전쟁’이라는 역사 용어가 정착되기 전까지 ‘6·25 동란’, ‘6·25 사변’, ‘6·25 남침’ 등이 사용되었다.

 

반면에 북한은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였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전쟁 은 한반도를 ‘식민 지배’하려는 ‘미국 제국주의’의 위협을 막아내고 ‘조국의 해 방’을 지켜냈던 ‘해방전쟁’이다. 그 속에는 미국이 ‘조국’을 침략했고 북한이 미 국에 맞서 ‘조국의 해방’을 지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편, 중국은 한국전쟁 을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부른다.

이는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을 원조하는 전쟁’이었다는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중국이 한국전쟁을 미국과 대결을 벌였던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3 특히 북중이 한국전쟁에서 공 동의 적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싸웠다는 사실과 기억은 북중 ‘혈맹관계’의 신화 를 생산, 유통, 강화시키는 원천적인 배경이 되었다.4

그런데 중국이 한국전쟁을 활용하는 방식은 중국이 처한 작금의 국제정치적 상황과 관련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중국은 한국전쟁 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과 서술을 현실 정치에 활용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미중 간의 패권경쟁이라는 현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국의 부상과 그것을 억제하려는 미국의 견제로부터 촉발된 미중 간의 패권경쟁이 심 화될수록 미중 간의 디커플링(decoupling), 곧 ‘탈동조화(脫同調化)’ 현상도 가속 화되고 있다. 미국의 공격이 거세질수록 중국의 반격도 거세지고 있는데, 그 과 정에서 중국은 가용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역사도 포 함된다.5

 

      3 김은정, 2023, 「승리의 기억: 남·북·중이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외국문학 연구』 제89호,78쪽.

      4 북중관계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혈맹관계’라는 표현에 관하여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혈맹’이라는 용어는 과연 현실적인 국가관계를 설명해줄 수 있는 적절 한 용어인가? 다시 말해 냉혹한 국제질서의 현실 속에서 정말로 ‘혈맹’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혈맹’이라는 표현은 현실적인 국가관계를 설명하는 학술적 용어 라기보다는 특정한 목적을 가진 정치적 선전 구호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5 김은정, 2023, 앞의 글, 85~86쪽; 金震共, 2021, 「중국의 한국전쟁 서사는 언제 정전(canon)이 되었는가?」, 『中國語文論譯叢刊』 第50輯, 66~71쪽. 

 

이 글에서는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 서술, 활용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Ⅰ장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중공정권이 한국전쟁을 어떻게 인식 했가하는 문제를 중국의 전쟁 발발 동의와 출병 결정에 대한 최근의 연구성 과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장에서는 중국정부의 의견을 대변하는 중국공산 당사 연구실과 중국군사과학원 등의 연구 성과를 분석하여 중국의 한국전쟁 역 사 서술의 내용과 논조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고, 이를 통해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적인 서술의 특징을 파악하고자 한다.

Ⅲ장에서는 미중 패권경쟁의 상 황 속에서 중국이 ‘항미원조전쟁’의 기억을 소환하여 그것을 현실 정치의 목적 에 맞춰 활용하고 있는 실태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II .중국의 한국전쟁 인식: 개전 동의와 출병 결정

오늘날 중국정부가 한국전쟁을 중국이 미국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둔 위대한 전 쟁이라고 규정하면서 국내외적으로 광범위한 정치적 선전에 활용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발발 당시 중공은 이 전쟁에 관하여 과연 어느 정도까지 정당성과 필 요성을 부여하고 있었고, 또한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출병 의지는 실제로 어 땠을까?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와 같이 사실 마오쩌둥 등 중공지도부 는 김일성이 전쟁을 섣불리 일으킨 것에 대해 원망과 불만을 품고 있었고, 김일 성의 전쟁 도발 계획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한 측면이 강했으며, 중국군 이 출병하여 북한을 돕는 문제에 관해서는 주저하거나 소극적인 입장과 태도를 드러내는 등 중공 지도부 내부의 의견이 분열되었다.6

 

       6 김동길, 2014, 「한국전쟁초기 중국군 조기파병을 둘러싼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동상이몽」, 『한국과 국제정치』 30권 2호; 김동길·박다정, 201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 및 한국전쟁 초기, 중국의 한국전쟁과 참전에 대한 태도 변화와 배경」, 『역사학보』 제225집; 김동길, 2016,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원인 연구: “국방선(國防線)”의 무혈확장」, 『韓國政治外交史論叢』 제37집 2호 등. 

 

1949년 4월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김일을 중국에 파견하였고, 김일은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났다.

마오쩌둥은 북한이 군사적 행동을 취하는 것, 즉 현 시점에서 남한을 공격하지 말고 더욱 유리한 정세를 기다려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그는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일본군과 무기를 한 반도로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그러면서 남쪽에 대한 북 한의 공격은 지금보다 국제정세가 보다 유리해지는 1950년 초 이후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7

마오쩌둥과 김일이 회담을 했던 때는 국공내전이 아직 진행 중이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중국은 북한의 군사행동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1950년 초가 군사행동을 실천하기에 적절한 시기라고 언급 했던 마오쩌둥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이 북한의 남한 공격에 원론적 으로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1949년 4월 시점에 중국은 북한의 군사행 동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면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이 수립되었다. 중국혁명의 성공은 무력통일에 대한 김일성의 열망을 더욱 고무 시켰다. 하지만 중국혁명의 성공은 중국공산당의 성격이 ‘혁명정당’에서 ‘집권 정당’으로 변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사실 중공정권이 당면한 최우 선적인 국가적 과제는 장기간의 전란으로 피폐해진 인민경제를 회복하고 신중 국의 경제건설을 신속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중국이 경제건설을 성 공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주변 국제환경의 안정과 평화가 절대적으로 필요 하였다. 그런 맥락에서 마오쩌둥은 여전히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에 대 해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8 신중국 수립 직후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중소의 입장은 일치하였다. 1949년 10월 26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보에서 북한이 남한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마오쩌둥의 의견에 동의하였고,9 12월 16일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모스 크바 회담에서도 중소는 현재 중국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며 경제를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고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휴식기가 필요하다는 것에 합의하였다.10

 

      7 「科瓦廖夫關于毛澤東與金一會談的情況致斯大林電(1949年5月18日)」, 沈志 華 主編, 2003, 『朝鮮戰爭:俄國檔案館的解密文件』(上冊), 臺北: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189~190쪽.

      8 김동길, 2020, 「개혁개방 이전 냉전시기(1949~1980), 중국의 한반도 정책 연구」, 『歷史學報』 第245輯, 285~286쪽.

      9 「斯大林致毛澤東電: 關于朝鮮問題的答復(1949年10月26日)」, 沈志華 主編, 2015, 『俄羅斯解密檔案選編:中蘇關係』 第二卷(1949.3~1950.7), 上海: 東方 出版中心, 139쪽. 

     10 「斯大林與毛澤東會談記錄: 中蘇條約和臺灣問題(1949年12月16日)」, 沈志華 主編, 2015, 『俄羅斯解密檔案選編:中蘇關係』 第二卷(1949.3~1950.7), 上海: 東方出版中心, 175쪽. 

 

하지만 1950년 1월 이후 소련이 기존의 입장을 바꾸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북한과 소련의 입장이 합치되기 시작하였다.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북한주재 소련대사관에게 전보를 보내어, 소련은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을 환영하며 구체적인 정세를 살핀 후 북한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11

1950년 4월 10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났다. 회담 에서 양측은 전쟁개시에 대한 중국의 동의를 얻는다는 것을 전제로 북한이 군사 행동을 취하는 것에 대해 합의하였다.12

이후 김일성과 박헌영은 5월 13일 베이 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을 만났다. 김일성은 모스크바 방문에서 스탈린과 나눴 던 내용을 전달하고, 전쟁에 관한 중국의 원조는 필요 없다고 하면서 전쟁 개시 에 대한 중공의 동의와 지지를 구하였다. 중국은 중국주재 소련대사관을 통해 김일성의 전언을 확인하고 소련이 북한의 전쟁 개시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인지 하였다.13

 

        11 「史達林關於同意會晤金日成討論統一問題致什特科夫電(1950年1月30日)」, 沈志華 主編, 2003, 『朝鮮戰爭:俄國檔案館的解密文件』(上冊), 臺北: 中央硏 究院近代史硏究所, 309쪽.

        12 「史達林與金日成, 朴憲永的會談記錄(1950年4月10日)」, 沈志華 主編, 2003, 『朝鮮戰爭:俄國檔案館的解密文件』(上冊), 臺北: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332~335쪽.

        13 「羅申關於金日成與毛澤東會談情況的電報(1950年5月13日)」, 沈志華 主編, 2003, 『朝鮮戰爭:俄國檔案館的解密文件』(上冊), 臺北: 中央硏究院近代史硏 究所, 383쪽; 「史達林關於同意朝鮮同志建議致毛澤東電(1950年5月14日)」, 沈志華 主編, 2003, 『朝鮮戰爭:俄國檔案館的解密文件』(上冊), 臺北: 中央硏 究院近代史硏究所, 384쪽.

 

하지만 스탈린과 김일성이 이미 한국전쟁 개전에 관하여 합의한 상황 에서 마오쩌둥만 홀로 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마오쩌둥도 김일성의 남한 공격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면에서 중국의 한국전쟁 개전 동의는 주도적인 측면보다는 강요받은 측면이 더 컸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한국전쟁 시작에 관한 북한과 소련의 결정 과정에서 중국은 소외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면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전 초기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은 중국군 출병을 둘러싼 중공지도부의 논의 과정 속에서 표출되었고,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전후로 상반되게 구 분된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 북한군이 전황에서 우세를 점했을 때 중국은 출병 을 적극적으로 고려했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었을 때 중국은 출 병을 주저하였다.

1950년 7월 7일 중국은 제1차 국방회의를 통해 동북변방군을 조직하여 8월 5일까지 북중국경 지역에 집결할 것을 결정하였다.14

또한 차이청원(柴成文)을 평양에 특사로 파견하여 7월 10일 김일성과의 면담을 진행하면서 중국의 파병 준비 계획을 전달하였다.15

7월 12일 마오쩌둥은 북한이 보낸 특사 이상조를 접견하고, 만약 북한이 원한다면 중국은 4개 군단 32만 명의 파병이 가능하며 대략 한달후인 8월 10일까지 중국군 파병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밝혀달라고 하였다.16

 

    14 「關于保衛東北邊防的批語(1950年7月7,8,13日)」, 中共中央文獻硏究室, 中國 人民解放軍軍事科學院編, 2010, 『建國以來毛澤東軍事文稿』(上卷), 北京: 軍 事科學出版社, 中央文獻出版社, 158~159쪽.

    15 김동길, 2016, 앞의 글, 10쪽.

    16 「什特科夫致斯大林電:戰線狀況和中國參戰問題(1950.7.20.)」, 沈志華 主編, 2015, 『俄羅斯解密檔案選編: 中蘇關係』 第二卷(1949.3-1950.7), 上海: 東方 出版中心, 435~437쪽. 

 

1950년 8월 4일 마오쩌둥은 정치국회의에서 미국의 승리는 중국에게 위협이 된다고 지적하면서 북한을 돕기 위한 중국군 출병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동북변방군 사령관 가오강(高崗)도 8월 13~14일 개최된 동북변방군 고급간부 회의를 통해 지금 주도권을 쥐고 출병하여 중국 영토 밖에서 미군을 섬멸하는 것이 중국의 국익에 유리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8월 19일 마오쩌둥은 훗날 중국 주재 소련대사를 역임하는 소련 철학자 유딘(Pavel F. Yudin)과의 대화에서, 만약 중국의 파병이 실현된다면 미군을 제압할 수 있고 동시에 제3차 세계대전 의 발발도 연기될 수 있는데, 이는 중국과 소련 모두에게 유리하다고 언급하 였다.17

중국군의 조기 출병은 북한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지만 결국 스탈린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한국전쟁 초기 중국군의 조기출병을 서둘러 추진했던 것일까?

이 점에 관해서는 기존 연구가 설명하고 있듯이, 조기출병은 타이완 문제를 포함한 중국의 국내문제 해결, 중국공산당의 통치기반 강화,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중국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일석삼조(一石 三鳥)’의 카드였다고 생각된다.18

이 중에서도 중국이 고려했던 핵심적인 사안은 중공정권의 안정과 신중국의 안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중국 국내는 정치적·경제적·사상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공정권이 붕괴되고 장제스(蔣介石) 정권이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소위 ‘변천사상(變天思想)’이 전국에 확산되었고,19 주요 대도시에서는 대량의 현금 인출 사태 발생, 시장에서 금과 은 가격의 폭등, 생필품 사재기 현상 등의 혼란이 발생하였다.20

 

       17 軍事科學院軍事歷史硏究部, 2000, 『抗美援朝戰爭史』 第1卷, 北京:軍事科學 出版社, 90~91쪽; 김동길, 2016, 앞의 글, 10쪽.

      18 김동길, 2014, 앞의 글, 63쪽.

      19 新華社 編, 1950, 「津市商人議論朝鮮戰事將有引起第三次大戰的可能(7月 10日)」,『内參參考』 第175期, 24~25쪽; 新華社 編, 1950, 「無錫幹部, 工人, 學 生對目前時局的反映(7月11日)」,『内參參考』 第176期, 31~32쪽.

       20 新華社 編, 1950b, 「天津出現世界大戰謠言:津市民對朝鮮戰事有疑問(7月1日)」, 『内參參考』 第171期, 3쪽; 新華社 編, 1950a, 「杜魯門聲明發表後上海市場情況 「(7月1日)」, 『内參參考』 第171期, 1~2쪽; 新華社 編, 1950, 「上海工人, 學生, 教授對杜魯門聲明的反應(7月4日)」, 『内參參考』 第172期, 1~2쪽. 

 

결국 중국은 조기출병을 통해 북한이 전쟁에서 유리할 때 승리를 확정지음으로써 중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중국군 출병에 유리한 시기는 사라졌으며 중국의 참전 의지는 약화되었다.

북한과 소련으로부터 출병 요청을 받은 중국은 1950년 10월 1일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참전문제를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고, 10월 2일 속개된 회의에서는 출병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10월 4일 개최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도 다수가 출병에 반대하였다.

김일성은 북한 내무상 박일우를 중국에 파견하였다.

박일우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작성한 군사지원요청 서신을 휴대하고 10월 2일 심양에 도착한 뒤 다음 날 북경에 도착하였다.

10월 3일 마오쩌둥은 두차례 박일우를 접견하고 총 10시간가량 대화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중국이 전력을 다해 북 도울 수 있지만 출병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마오쩌둥이 제시한 중공군 출병 불가의 근거는, 중국의 참전은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고 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있으며 중공군의 병력 수는 많지만 현대화된 장비와 무기가 부족하고 더욱이 공군과 해군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대신 마오쩌둥은 중국 동북지역을 북한이 후방 근거지로 활용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박일우는 귀국 후 10월 6일 조선노동당 정치국회의에 참석하여 중공중앙의 의견을 전달하였다.

결국 북한지도부는 회의를 통해 외부의 군사지원이 없는 상황을 감안하여 일부는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다른 일부는 중국 동북에서 새로운 병력을 조직하여 전쟁에 대비하기로 결 정하였다.21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여전히 참전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10월 5일 오전, 마오쩌둥은 우선 펑더화이를 설득하여 출병의 동의를 얻고 출병부대의 사령관직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5일 오후에 진행된 회의에서 펑더화이는 출병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양상쿤(楊尙昆)의 회고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북한, 소련, 중국을 마차를 끄는 3마리 말에 비유하면서 2마리의 말이, 즉 소련과 북한이 앞으로 달리고자 하는데 나머지 한 마리의 말, 곧 중국이 무슨 수로 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출병의 부득이함을 강조하였다.22

결국 정치국 회의는 중국의 참전을 의결하였고 펑더화이를 중국군 사령관으로 결정였다.

중국이 참전을 결정했지만 실질적인 전투를 진행할 때 소련의 무기제공과 공군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10월 8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중국의 참전결정을 알리고 소련의 군사적 지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저우언라이와 린뱌오가 소련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전달하였다.

하지만 10월 11일 진행된 스탈린과의 회담 결과는 중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스탈린이 저우언라이와 린뱌오가 제기했던 요구, 즉 중국 지상군과 소련공군의 동시 출동 주장을 거부했던 것이다.

10월 12일, 마오쩌둥은 회담 결과를 확인하고 이 결정에 일단 동의하였다.23

 

      21  沈志華, 2013, 『毛澤東, 斯大林與朝鮮戰爭』, 廣州: 廣東人民出版社, 296~ 297쪽.

      22 蘇維民, 2009, 「楊尙昆談抗美援朝戰爭」, 『百年潮』 4, 12쪽.

      23 沈志華, 2013, 앞의 책 , 298~299쪽; 김동길, 앞의 글, 28~32쪽. 24 沈志華, 2013, 위의 책, 310~315쪽. 

 

한편, 10월 13일 마오쩌둥은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출병 문제를 최종적으로 토론하였다.

마오쩌둥은 소련 공군 지원이 불가함에도 스탈린이 중국 영토에 대한 공중엄호와 중국에 대한 군사장비 제공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출병을 주장했고, 결국 중공은 소련의 공군지원이 없더라도 출병을 단행한다는 최종적인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중국군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도하하여 한반도로 진입하였고, 10월 25일 첫 전투를 시작으로 ‘항미원 조전쟁’의 막이 올랐다.24

중국의 참전 결정은 소련의 공군지원이 없는 상황에서도 북한을 구하기 위해 미국과 전쟁을 벌인 결단처럼 보이지만, 중국은 참전 초기 미군과의 전면전을 피하려고 하였다.

중국은 1개 군을 평양의 동북쪽 덕천(德川) 산악지대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3개 군과 3개 포병사단을 덕천 이북 지역에 주둔시켜 미군과 한국군의 북진을 중지시키려고 했으며, 만약 미군과 한국군이 진격을 멈춘다면 중국군도 평양과 원산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수립하였다.

이렇게 한다면 ‘중국의 국가방위선을 압록강에서 덕천, 영원 또는 이남지역으로 확대’할 수 있고, 이는 중국에게 ‘매우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25

즉, 중국은 미군과 한국군에 대한 선제공격 계획이나 의도가 없었고, 중국이 출병하면 미군과 한국군이 진격을 중지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참전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26

 

         24 沈志華, 2013, 위의 책, 310~315쪽. 

         25 「關于朝鮮情況和我軍入朝參戰意見給周恩來的電報(1950年10月14日)」, 中共 中央文獻硏究室 編, 1987, 『建國以來毛澤東文稿』 第一冊, 北京: 中央文獻出 版社, 558~559쪽.

         26 김동길, 2016, 앞의 글, 35~36쪽. 

 

III .중국의 ‘항미원조전쟁사’ 서술

중국은 한국전쟁을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을 원조하는 전쟁’이었다는 의미에서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명명한다.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명칭의 이면에는 ‘한국 전쟁은 미중전쟁이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중국이 한국전쟁 전체를, 즉 전쟁의 시작부터 정전까지의 기간 전부를 ‘항미원조전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조선전쟁’과 ‘항미원조전쟁’의 두 단계로 나눈다.

중국은 전쟁이 남북간 내전의 단계인 ‘조선전쟁’에서 중국과 미국이 충돌했던 ‘항미원조전쟁’의 단계로 이행되었다고 서술한다.

중국은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중미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조선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했지만, ‘항미원 조전쟁’은 10월 25일 시작되었다고 서술한다. 중국이 한반도에 진입한 것은 1950년 10월 19일이지만, 10월 25일 중국군의 첫 번째 교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6월 25일 내전이 발발했고, 6월 27일 미국의 개입으로 내전이 국제전으로 전환되었으며, 10월 25일 중국이 미국과 직접 무력 충돌을 벌이면서 ‘항미원조전쟁’의 단계로 전환되었다.

한국전쟁 기간 중국이 내세 웠던 구호는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이었는데, 이를 통해서 도 중국이 미국을 중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했고, 한국전쟁을 미국과 대결했던 전쟁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한국전쟁 연구자 쉬옌(徐焰)의 발언은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중국의 인식과 속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내전’ 이 발발했고, 미국이 ‘조선내전’에 개입하면서 6월 27일 전쟁은 국제전쟁으로 변했다.

4개월 후인 10월 25일 중국이 정식으로 참전했고 이때부터 중국인민의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선전쟁’은 무승부로 끝났지만, ‘항미원조전쟁’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곧, ‘항미원조전쟁’은 중국이 승리한 전쟁이다”, “미국은 조선내전을 구실로, 즉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에 출병하고 타이완을 점령하였다.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의 성질이 변했고, 이는 ‘조선 침략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전쟁은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바뀌었는데, 미국의 타국에 간섭하는 패권주의적 태도가 조선전쟁을 확대하는 원인이 되었다”, “6월 25일 조선에서 내전이 발생하자,

  ① 미국은 조선에 파병하고,

  ② 타이완에 미국 해군 제7함대를 파견했으며,

  ③ 인도차이나반도의 프랑스 군대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프랑스군에게 전면적인 군사원조를 제공하였다.

중국의 국가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았고, 중국은 자위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중국은 미국과의 대결 장소로서 한반도를 선택했던 것이다.”27

한국전쟁에 관한 중국의 입장은 정부가 관여하여 편찬하는 역사서술에 일률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며, 서술 과정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특징이 존재한다.

  첫째, 한국전쟁의 발발에 관한 서술에서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지는 않는다. 전쟁은 내전으로서 그 성격이 규정되며, 남북 간의 긴장과 군사적 충돌에 대한 서술이 강조된다. “미·소  양국 군대가 한반도에서 철수한 이후, 남북한 정부는 남북통일을 실현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과 투쟁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대립과 투쟁이 훗날 발발한 한국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1949년 초부터 남북한 군대는 삼팔선 지역에서 빈번하게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1950년 한반도 정세는 더욱 긴장 되었다. 1950년 초 남한은 삼팔선 지역에 대규모 무장 부대를 집결시키기 시작했고, 한반도 전역에 전쟁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지면서 내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삼팔선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진행되던 소규모 무장투쟁과 마찰은 마침내 대규모 내전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28

한국전쟁은 명백하게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음에도 중국은 이를 정확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중국도 전쟁이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북한과의 현실적인 정치적·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김일성의 언급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 서술하고 있다. “6월 25일 오전, 김일성은 긴급 내각회의를 소집하 여 전쟁 상황을 논의하였다.

김일성은 회의를 통해 북한군에게 ‘즉각 결정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침략자를 섬멸하자’고 요구했으며”, “6월 26일, 김일성은 라디오 연설을 발표하여 전체 인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헌법을 굳건히 지키고 인민의 적 이승만 괴뢰정권을 전복시켜 남한을 이승만 도당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남한의 진정한 인민정권인 인민위원회 를 회복시키겠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 아래 조국 통일을 완성하고 강대한 민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겠다. 이승만 매국 도당이 일으킨 내전에 반대하기 위해 진행된 이 전쟁은 조국의 통일, 독립, 자유, 민주를 쟁취하는 정의로운 전쟁이다.’”29

 

        27 「[신경진의 서핑차이나] 6·25 전쟁을 보는 중국의 속내」, 『중앙일보』, 2010. 7. 19, https://www.joongang.co.kr/article/4321773#home 검색일: 2023. 4. 19.

       28 軍事科學院軍事歷史硏究部, 2000, 앞의 책, 21, 23, 25쪽.

       29 軍事科學院軍事歷史硏究部, 2000, 위의 책, 25~26쪽. 

        

그런데 ‘반격을 개시’, ‘침략자를 소멸’, ‘이승만 매국 도당이 일으킨 전쟁’ 따위의 서술은 올바른 설명이 아니며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둘째,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무장간섭’과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무장침략’을 비판하는 서술이 강조된다.

미국의 한국전쟁 관련 정책과 행보는 한반도 내전에 대한 간섭인 동시에 중국 주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맥락에서 기술된다.

“트루먼은 정식으로 미 해군 제7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파견할 것을 비준하여 중국인민해방군이 타이완을 해방시키는 것을 무력으로 저지하고 타이완 해협에서 ‘분리’정책을 실행하였다”, “미국 당국의 이러한 정책 결정으로 한반도 내전에 대한 무력개입과 구체적인 실행 방법이 확정되었다.

동시에 침략의 범위를 중국의 타이완까지 확대하여 타이완을 둘러싼 중국의 내정문제에 대하여 군사적으로 간섭하고 한국 내전을 기회로 활용하여 침략 행동을 극동지역 전체로 확장하여 이미 계획하고 있던 극동 지역 침략 계획의 전면적인 실시를 결정하 였다”, “미국은 공공연하게 한국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였다. 미군의 군사적 침략으로 인하여 한국전쟁의 성격은 내전에서 미군 침략에 대한 북한인민의 반침략 전쟁으로 변화되었다. 미국의 타이완 침략은 미국이 한국 내전에 무장간섭을 시작하자마자 한국 문제와 중국의 주권 문제를 하나로 연결시키기 위한 조치 였다”, “미국 정부는 세계적인 패권적 지위 유지와 극동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 대라는 전략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이 지지하는 한국의 이승만 정권을 보 호한다는 정치적 결정을 내린 것이다”, “북한을 침략하기 위해 유엔군을 결성함으로써 미국은 북한 침략이라는 자국의 목적에 유엔군이라는 외피를 덧씌우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이때부터 국제화되고 확대되어 본래 통일문제 해결을 위해 발생한 한국내전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최초의 대규모 국제적 국지전으로 변하였다.”30

 

      30 軍事科學院軍事歷史硏究部, 2000, 위의 책, 35~36, 38, 44쪽. 

 

따라서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국 정부는 한국전쟁의 성격이 내전 임을 인정하고 북한을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런데 미국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면서 전쟁의 성격이 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신속하게 무장간섭을 실시하여 한반도 와 중국의 영토인 타이완에 파병함으로써 한국전쟁의 성격은 내전에서 침략과 반(反)침략 전쟁으로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질되었다. 게다가 미국은 타이완 을 침략하고, 일본과 필리핀에 주둔한 군사력을 강화하고, 프랑스의 인도차이 나 식민지 전쟁에 대한 지원을 확대함으로써 태평양 지역의 군사 전초기지를 아 시아 대륙으로 이동시켰다. 따라서 아시아 지역의 긴장이 급격하게 조성되었 고, 한국전쟁의 불씨는 주변 지역으로 번져나가 새로운 전쟁이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 중화인민공화국의 안전은 극도로 위협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신속하고 강력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31

 

      31 軍事科學院軍事歷史硏究部, 2000, 위의 책, 45~46쪽. 

 

   셋째, 중국의 ‘항미원조전쟁’ 서술에서 중국군의 참전은 미국의 침략에 대항 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의 결전에서 승리함으 로써 북한을 패망의 위기에서 구하고 신중국의 국가안전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신중국의 위상과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였다는 점이 강조된다.

 

“중국군이 출병해도 승리를 달성할 가능성은 있었다. 중국은 침략에 반대하는 정의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곳에서 지원할 것이며 사기가 드높고 병력이 충분했다. 중국군은 열악한 장비로 우수한 무기를 가진 적에게 승리를 거둔 풍부한 전투 경험과 전략 전술이 있었다”, “항미원조전쟁의 승리는 전국 인민들의 마음속에서 중국공산당의 위신을 크게 높여 주었다”,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는 중국인민의 민족적 자신감과 민족적 긍지를 높여주었으며 미제국주의에 대해 두려움과 환상을 가지고 있던 일부 사람들을 깊이 교육하고 각성시켰다.

항미원조운동에서 중국인민은 높은 애국주의 정신과 국제주의 정신을 발휘하였다”, “항미원조전쟁의 승리는 미국의 침략 확장의 기세를 막아내고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수호함으로써 신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전례 없이 드높였다.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는 아시아와 국제적 문제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지위와 위신을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32

 

한국전쟁에 관한 중국 정부의 공인된 인식과 서술은 중국의 역사교재에도 그 대로 반영되고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 역사교재의 서술 내용과 방향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시각과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세부적인 서술에서 강조와 보강이 덧붙여지는 정도의 차이와 변화가 감지된다.

일례로 『중외 역사강요(中外歷史綱要)』 2019년 판본과 2022년 판본에 기재되어 있는 ‘항미 원조전쟁’에 관한 서술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33

 

        32 中共中央黨史硏究室, 2011, 『中國共産黨歷史』 第2卷, 北京: 中共黨史出版 社, 72, 88~89쪽.

        33 唐益才·唐守國·錢志東 主編, 2019·2022, 『中外歷史綱要』(上,下), 延吉: 延 吉敎育出版社. 『中外歷史綱要』의 내용을 정리한 해당 자료 <표 1>은 동북아역사 재단 권은주 연구위원으로부터 받았음. 

 

    <표 1> 『중외역사강요』(상) 2019년판과 2022년판의 ‘항미원조전쟁론’ 서술 비교

 

2019년판(158쪽)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이 폭발하였다.

① 미국은 곧 무장간섭을 하며, 동시에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하여 중국의 통일대업을 방해 하였다. 미국은 또 UN 안전보장이사회를 조종 하여 결의를 통과시키고, 미국을 수반으로 하는 UN군을 조직하여 “38선”을 넘어서 곧바로 중조변경인 압록강과 도문강을 압박하고, 조선 침략전쟁을 확대하여 중국의 국가안보를 엄중 히 위협하였다. 1950년 10월

② 조선 정부의 요구에 응해서, 당은 조선에 들어가 전쟁할 것을 결정하였다. 마오쩌둥은

③ 펑더화이를 사령원으로 하는 중 국인민지원군을

④ 조선에 파견하여, 미국에 항거해 조선을 지원하며 가정과 나라를 지키고, 조선의 군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5차례의 전투를 거치며 중·조 군대가 전선을 “38선” 부근으로 안정시키자, 미국은 하는 수 없이 담판에 동의하였다.

지원군이 조선에 들어간 후 중국 국내에서는 매우 활발한 항미 원조운동이 전개되어, 항미원조전쟁을 힘차게 지원하였다. 한편으로 담판하면서 한편으로 전투하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자, 1953년 7월, 미국은 어쩔 수 없이

 ⑤ “조선정전협정”에 서명하였으며, 중국인민은

 ⑥ 항미원조전쟁의 승리를 거두었다. 항미원조전쟁은 국위와 군위를 드러내고, 신중 국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지원군에서는 양건스(楊根思), 황지광(黃繼 光), 추소우윈(邱少雲), 줘성조우(羅盛教) 등 30여 만 명의

 ⑦ 영웅 모범과 공신들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의 감동적인 영웅의 사연은 강대한 민족적 응집력이 되었고, 전국 인민들이 조국수호와 건설을 위해 단결하고 분투하도록 크게 고무시켰다.

 

2022년판(168쪽)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이 폭발하였다.

① 미국 정부는 그 세계전략과 냉전적 사고에서 출발하여 무장간섭을 하기로 결정하고, 아울러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하여 중국의 통일대 업을 방해하였다. 미국은 또 UN 안전보장이사 회를 조종하여 결의를 통과시키고, 미국을 수반으로 하는 UN군을 조직하여 “38선”을 넘어서 곧바로 중조변경인 압록강과 도문강을 압박 하고, 조선침략전쟁을 확대하여 중국의 국가안보를 엄중히 위협하였다. 1950년 10월

② 조선당과 정부의 요구에 응해서, 중국당과 정부는 조선에 들어가 전쟁할 것을 결정하였다. 마오쩌둥은

③ 펑더화이를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④ 조선전장에 파견하여, 미국에 항거해 조선을 지원하며 가정과 나라를 지키고, 조선의 군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5차례의 전투를 거치며 중·조 군대가 전선을 “38선” 부근으로 안정시키자, 미국은 하는 수 없이 담판에 동의하였다.

지원군이 조선에 들어간 후 중국 국내에서는 매우 활발한 항미원조운동이 전개되어, 항미원조전쟁을 힘차게 지원하였다. 한편으로 담판하면서 한편으로 전투하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자, 1953년 7월, 미국은 어쩔 수 없이

⑤ 정전협정에 서명하였으며, 중국인민은

⑥ 항미원조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 다. 항미원조전쟁은 국위와 군위를 드러내고, 신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지원군에서는 양건스(楊根思), 황지광(黃繼 光), 추소우윈(邱少雲), 줘성조우(羅盛教) 등 30여 만 명의

⑦ 영웅 공신과 약 6,000개 공신 집단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의 감동적인 영웅의 사연은 강대한 민족적 응집력이 되었고,

⑧ 위대한 항미원조정신을 단련하였으며, 전국 인민 들이 조국수호와 건설을 위해 단결하고 분투하 도록 크게 고무시켰다. ⑨ 항미원조전쟁의 위대한 승리는 중국인민이 일어서서 세계 동방에 우뚝 서는 선언서와 같고, 중화민족이 위대한 부흥으로 달려가는 중요한 이정비이다. 

 

IV .중국의 전쟁 기억 소환과 활용

1979년 미중수교 이래 양국은 상호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특히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고도의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면서 미 중의 경제적 상호 의존성이 강화되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등장한 차이나와 아메리카를 합친 ‘차이메리카(Chimerica)’라는 표현은 미중 간의 경제 상호 의존성이 깊어져 2개의 경제를 하나로 보아야 된다는 커플링(coupling, 즉 동조화)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었다.34

 

      34 주용식, 2021, 「바이든 시대의 대중국 통상무역전략: 미중패권경쟁의 정치경제적 시각에서」, 『국제통상연구』 제26권 제1호, 45쪽. 

 

그런데 2010년 중국의 GDP 경제 규모가 일본을 제치며 세계 2위로 올라서고, 중국의 경제성장이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 정 도로 커지자 미중관계는 점차 디커플링(decoupling, 즉 탈동조화)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정권은 미국과 패권경쟁을 벌이며 중화민족의 부흥과 중국의 ‘대국굴기(大國屈起)’를 이끌고 있다. 시진핑은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제18차 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되었고, 2013년 3월 후진타오 (胡錦濤)의 후임으로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2018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를통해 헌법에 명시된 국가주석직 2연임 초과 금지 조항을 삭제하면서  시진핑은 장기집권을 위한 법적 기틀을 마련하였고, 2022년 10월 중 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 폐막식에서는 자신의 3연임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다.

2012년 11월 29일 시진핑 주석은 중국공산단 정치국 상무위원 6명과 함께 중국역사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부흥의 길’을 참관하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은 바로 중화민족의 근대 이래로의 가장 큰 꿈이다”라고 언급했는데, 이것은 소위 ‘중국몽(中國夢)’ 담론의 본격적인 등장과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시진핑은 2013년 3월에 개최됐던 제12기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 회의 폐막 연설에서도 9차례나 ‘중국몽’을 언급하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의 실현은 국가부강, 민족진흥, 인민행복이다”라고 강조하였다.35

 

       35 이정남, 「시진핑(習近平)의 중국몽(中國夢)-팍스시니카(Pax-Sinica) 구상과 그 한계」, 『아세아연구』 제61권 4호, 166쪽. 

 

시진핑 정부는 2017년 10월 개최된 제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집권 2기를 시작하였다.

특히 제19차 당대회에서는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習近平新時代中國特色社會主義思想)’이라는 표현이 중국 공산당 당장(黨章)에 삽입되었는데, 시진핑은 집권 2기를 시작하면서 ‘신시대중국 특색 사회주의’ 69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32회, ‘샤오캉 사회(小康 社會)’를 17회 언급하면서, 2050년까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국을 실현하겠다는 ‘중국몽’의 원대한 목표와 포부를 제시하였다.36

그런데 2017년 출범한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기 위한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면서 미중 간의 패권경쟁이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2018년 3월 트럼프 행정부가 5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 고, 중국의 미국에 대한 투자 제한 등의 내용을 담은 행정명령을 발동하면서, 미중간의 무역전쟁과 디커플링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37

2018년 3월 미중 무역 분쟁으로 촉발되었던 미중 패권경쟁은 이후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경제 문제를 넘어 군사와 안보, 이념과 체제의 영역을 아우르는 전방위적인 대결로 확산되어갔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12월 국가안보전략보고서(NSS), 2018년 1월 국방전략보고서(NDS), 2018년 핵태세검토보고서(NPR), 2019년 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 등을 통해 중국의 부상을 막으려는 전략적 목표와 입장을 명확히 하였고, 2019년 6월 인도-태평양 전략보고서(IPSR) 에서는 중국을 보편적인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국가로 규정하면서 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38

 

      36 홍건식, 「시진핑의 중국몽과 정체성 정치: 일대일로, AIIB 그리고 패권정체성」, 『국제정치논총』 제58집 1호, 100~101쪽.

      37 2018~2020년까지 미중무역 전쟁 전개과정에 관해서는, 주용식, 2021, 앞의 글, 46쪽; https://www.yna.co.kr/view/GYH20200116000100044?input=1363 m(검색일: 2023.4.13)을 참고.

      38 최재덕·안문석, 2021, 「공격적 현실주의 관점에서 본 미중패권경쟁 양상 연구」, 『인문사회 21』 제12권 3호, 2982쪽.

 

2021년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에 들어서도 미국은 중국에 대한 공세를 계속하였다. 바이든은 “미국의 번영, 안보, 민주주의 가치에 도전하는 가장 심각한 경쟁자”로 중국을 규정하였고, 2021년 3월 발표된 바이든 정부의 ‘국가안보전략 중간지침(INSSG)’은 중국을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지속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자인 패권도전자로 지목하였다.39

그리고 그러한 미중 양국 간의 대립과 충돌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한편,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경쟁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 이나 그것에 대한 인식을 소환하여 현실 정치 문제에 활용하고 있다.

2017년 4월 6일에서 7일까지 미국 플로리다 마라라고(Mar-a-Lago)에서 미중 정상회담이 진행되었다.

회담이 끝난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4월 12일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40 “시 주석이 북한이 아닌, 중국과 한국(Korea) 역사에 대해 말했다”며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이곤 했다(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고 발언하였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10분간 시 주석의 설명을 들은 후 북한 문제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를 수 있다”고 말하였다.41

한국과 중국 관계와 그 역사에 관한 설명에서 나온 말이라고 보이긴 하지만 현재 중국의 최고 지도자의 왜곡되고 부적절한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 상징적인 사례라고 하겠다.42

 

      39 Joseph, Jr. Biden, 2020, “Why America Must Lead Again: Rescuing U.S. Foreign Policy After Trump”, Foreign Affairs, Vol. 99, No. 2, pp. 64~76; Joseph, Jr. Biden, 2021, “Interim National Security Strategic Guidance,” March, Washington D. C.: The White House(https://www.whitehouse. gov/wp-content/uploads/2021/03/NSC-1v2.pdf(검색일: 2021.3.15); 주용 식, 2021, 앞의 글, 65쪽.

     40 https://blogs.wsj.com/washwire/2017/04/12/wsj -trump-interviewexcerpts-china-north-korea-ex-im-bank-obamacare-bannon/(검색 일: 2023.4.20)

     41 「트럼프, 시진핑과 회담 뒤 “한국은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더라”」, 『한겨레』, 2017. 4. 19(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791367. html 검색일: 2023. 4. 20).

     42 현인택, 2012, 「미-중 패권전쟁과 한국의 생존전략」, 『신아세아』 제28권 제2호, 65쪽. 

 

사실 보도는 트럼프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진위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시진핑이 중국과 한반도 관계사에 대해 설명한 것을 트럼프가 언론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한 헤프닝일 수도 있지만, 몇 가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중국이 한국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미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문제, 즉 북핵 문제를 논의하면서 한국을 언급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한국(한반도)은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 는 내용일 필요와 이유는 없다.

그러한 언급이 북핵 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과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둘째, 트럼프의 발언은 단순한 실언이 아니라 계산된 행동일 수도 있다.

트럼프가 시진핑의 언급을 맥락 없이 전달하면서 중국에 대한 한국의 감정은 악화되었고, 한중간의 거리는 그만큼 더 멀어졌다. 아마도 트럼프는 한국이 중국에서 멀어진 거리만큼 미국 쪽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관한 역사적 경험도 현실 정치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10월 19일 시진핑 국가 주석은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서 열린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작전 70주년 전시’를 관람하였고, 10월 23일에는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한국전쟁 참전 7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하였다. 그 자리에서 시진핑은 한국전쟁을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신중국을 지켜낸 ‘위대한 승리’로 규정하였다. 또한 미국의 일방주의적 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주권과 국익이 훼손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도 경고하였다.

특히 시진핑은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 작전 70주년 기념대회’ 연설에서도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은 제국주의 침략 이 확장되는 것을 막고, 신중국의 안전을 지켰으며, 중국 인민의 평화로운 생활을 보위하였다”, “신중국 성립 초기 중국 인민들은 평화와 안정을 갈망했지만,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중국 인민들에게 전쟁을 강요하였다”, “미국은 중국 정부 의 거듭된 경고에도 조중 국경까지 불을 질렀고, 동북지방을 폭격해 국경 지역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중조 양국 인민과 군대는 생사를 같이하며 피로써 위대한 우의를 맺었고, 힘겨운 전투를 통해 미군의 불패신화를 깨뜨렸다”,43

 

      43 「시진핑, 한국전쟁 참전 70주년 기념식 연설 “항미원조는 위대한 승리”」, 『한겨레』, 2020년 2020. 10. 23,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966998. html 

 

“중국군은 위대한 애국정신과 영웅주의 정신을 발양해 북한 인민군과 손잡고 2년 9개월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이루었다”,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은 제국주의의 침략 확장을 억제하였다” 등의 언설을 쏟아내었다.44

이에 대해 한국의 대중과 일부 지식인은 격한 반응을 보이며 중국의 행태를 성토하였다.

심지어 시진핑의 5,060자 연설에서 ‘한국’은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중국의 이웃이며 한국전쟁 당사자인 한국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고 불만을 표시하였다.45

 

      44 「시진핑 “항미원조 승리, 인류 역사에 기록될 것”」, 『동아일보』, 2020. 10. 23.; 「시진핑, 담화에서 항미원조 전쟁의 의미 밝혀」, 『人民网(인민망한국어판)』, 2020. 10. 23,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01023/103595 940/1

     45 「시진핑 5,060자 항미원조 연설에 ‘한국’ 배려는 한글자도 없었다」, 『한국일보』, 2020. 10. 28,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10271349 0000218 

 

한국의 이러한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보다 냉정하게 사안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이처럼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언설을 강하게 쏟아냈던 배경에는 미중 패권경쟁이라는 상황이 존재한다.

즉,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시진핑이 언급한 내용들은 중국이 미국을 향해 보내는 일종의 정치적인 경고성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시진핑 정권은 미중 패권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던 시점에서 과거의 기억을, 즉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미국과 맞서 싸웠던 ‘투쟁과 대결의 역사’를 소환시켜 활용하는 것이다.

미중 패권경쟁의 상황 속에서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의 경험을 끄집어내어 미국에게 경고를 보내는 셈이니, 그곳에 ‘한국에 대한 배려’가 들어갈 자리는 애초부터 있기 힘든 것이었다.

미중 패권경쟁 상황에서 중국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항미원조전쟁’의 기억을 호출하는 것이다. 2019년 10월 중국 국경절에 맞춰 재개관할 예정이던 항미원조기념관은 항미원조기념 70주년인 10월 19일 갑작스레 재개관식을 진행하였다.

개관한 항미원조기념관의 건축 면적은 2만 3,800㎡로 기존보다 4배 커졌고,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북한을 수호한다’,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는 전쟁’ 등을 주제로 전시장을 구성하였다.

또한 2020년에는 기록영화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 과 70주년 기념 20부작 다큐멘터리 <항미원조 나라를 지켜라>가 방영되었고, 2021년에는 ‘항미원조’ 영화 <장진호(長津湖)>가 흥행 신기록을 세우기도 하 였다.46

그런데 중국이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이 본격화되었던 1990년대 중후반부터 시진핑 집권 이전까지 ‘항미원조’ 문제를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2001년 중국 CCTV는 1996년부터 5년 동안 제작한 드라마 <항미원조>를 방영하려 했지만 중국 당국은 방영금지조치를 내렸으며, 중국에서 ‘항미 원조’는 ‘조선전쟁’이라는 용어로 대체되곤 하였다.

이 시기 중국은 항미원조를 언급하는 것을 ‘회피’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한 비판도 자제하였다.

이는 중국의 경제성장에 미국과의 관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강화된 중미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47

 

        46 김은정, 앞의 글, 86쪽; 양승진, 2020, 「중국은 언제까지 ‘항미원조’를 우려먹을 까?」, 『군사저널』 12월호, 38쪽; 우성민, 2022, 「중국 정부의 ‘항미원조’ 참전군 보훈 관련 보도 현황과 교과서 서술 검토」, 『역사와 교육』 제34집, 432쪽; 金震共, 2021, 앞의 글, 66~67쪽.

        47 김란, 2017, 「중국 영화와 드라마의 ‘항미원조’ 기억과 재현」, 『역사비평』 봄호, 역 사비평사, 227~228, 237쪽. 

 

V .맺음말

중국의 ‘항미원조전쟁’에 대한 강조와 활용이 미중 패권경쟁 구도 속에서 생산, 유통, 보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인식, 서술, 활용을 분석 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이 측면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인식, 서술, 활용은 비(非)학술적 목적 달성, 즉 현실 정치의 목적을 위해 역사를 의도적으로 활용하고 해석한다는 경향이 농후하다.

중국이 사용하는 ‘항미원조전쟁’이라는 용어의 뜻은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을 도와준 전쟁’이라는 의미이다.

중국이 사용하는 ‘항미원조전쟁’이라는 용어 자체가 한국전쟁을 두 단계로 나누어 인식하고 있는 중국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 하고 있다.

즉, ‘조선전쟁’과 ‘항미원조전쟁’은 분리된 전쟁인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이 이해하는 한국전쟁은 남북간 내전의 단계인 ‘조선전쟁’에서 중국과 미국이 충돌한 전쟁인 ‘항미원조전쟁’의 단계로 이행했던 것이고, 결국 내전으로 시작된 전쟁이 중미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조선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했지만 ‘항미원조전쟁’은 1950년 10월 25일 시작 되었다고 규정한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북한을 도와 미국과 대적하여 싸웠다는 ‘항 미원조전쟁’의 서사가 만들어졌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이 제7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파견했던 것은 신중국의 주권과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 었다.

중국은 신중국의 국가안전과 중국인민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미국과의 대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중국은 한국전쟁을 반(反)침략 전쟁, 정의로운 전쟁, 승리한 전쟁으로 정의한다.

한국전쟁에 관한 중국 정부의 인식과 서술은 하나의 정전(正典, Canon)으로 규정되어 중국에서 편찬되는 역사 서적, 언론, 교육기관의 교재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정치적 목적과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한국전쟁에 관한 중국의 집단적 기억을 소환하고 활용한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세계 최대 강국 미국과 대적하였고, 결국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하였다는 ‘항미원조전쟁’의 결론은 중국의 문학, 영화, 드라마, 역사 서적, 역사 교재 등을 통해 끊임없이 생 산, 유통, 보급되었다.

그런데 중국 정부의 ‘항미원조전쟁’ 기억에 대한 소환과 활용은 중국이 처한 정치적·시대적·국제적 상황에 따라 약간씩 변화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 미국이 경쟁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시기에는 ‘항미원조전쟁’에 관한 서사를 크게 강조하지 않지만, 미중 간의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에는 ‘항미원조전쟁’의 집단기억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활용한다.

이런 맥락에서 시진핑 집권 시기 ‘항미원조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강조는 미중 간의 패권경쟁의 심화라는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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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중국의 한국전쟁 인식, 서술, 활용 한상준 중국은 한국전쟁을 반(反)침략 전쟁, 정의로운 전쟁, 승리한 전쟁으로 정의 한다. 한국전쟁에 관한 중국 정부의 서술은 하나의 정전(正典, Canon)으로 규정 되어 중국에서 편찬되는 역사서적, 언론, 교육기관의 교재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북한을 도와 미국과 대적하여 싸웠다는 ‘항미원조 전쟁 ’의 서사가 만들어졌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조선내전’과 ‘항미원조 전쟁’으로 구분하여 인식한다.

중국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한반도 내부 에서 발생한 내전(內戰)으로 시작되었지만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국제전(國際戰)으로 전쟁의 성격이 변질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이 제 7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파견한 것은 신중국의 주권과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신중국의 국가안전과 중국인민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미국과의 대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되었다.

중국공산당은 정치적 목적과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한국전쟁에 관한 중국의 집단적 기억을 소환하고 활용한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세계 최대 강국 미국과 대적하였고, 결국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하였다는 ‘항미원조전쟁’의 결론은 중국의 문학, 영화, 드라마, 역사 서적, 역사 교재 등을 통해 끊임없이 생 산, 유통, 보급되었다.

그런데 중국정부의 ‘항미원조전쟁’ 기억에 대한 소환과 활용은 중국이 처한 정치적·시대적·국제적 상황에 따라 약간씩 변화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 미국이 경쟁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시기 에는 ‘항미원조전쟁’에 관한 서사를 크게 강조하지 않지만, 미중 간의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에는 ‘항미원조전쟁’의 집단기억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활 용한다.

이런 맥락에서 시진핑 집권 시기 ‘항미원조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강조는 미중 간의 패권경쟁의 심화라는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주제어: 한국전쟁, 역사인식, 역사서술, 미중패권경쟁, 항미원조전쟁

 

ABSTRACT

Perception, Narrative, and Utilization of the Korean War in China

Han Sangjun

China defines the Korean War as a war of anti-aggression, a just war, and a victorious war. The Chinese government’s narrative about the Korean War is enshrined as the canonical version and is reflected in historical publications, media, and educational materials in China. As China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the narrative of the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emerged, according to which China helped North Korea in their opposition to the United States. China distinguishes the Korean War as a “civil war in Korea” and a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According to China’s explanation, the Korean War initially began as an internal conflict within the Korean Peninsula, but it transformed into an international war when the United States intervened. Particularly, the dispatch of the U.S. Seventh Fleet to the Taiwan Strait immediately after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posed a serious threat to the sovereignty and security of the newly established People’s Republic of China. To safeguard the www.dbpia.co.kr 76 | 동북아역사논총 80호(2023년 6월) national security of the new China and the survival of the Chinese people, China had no choice but to confront the United States, leading to the start of the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summons and utilizes the collective memory of China regarding the Korean War for political purposes and practical needs. As China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confronting the world’s leading superpower, the United States, and ultimately achieving a decisive victory, the conclusion of the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has been constantly produced, disseminated, and popularized through China’s literature, films, dramas, historical books, and textbooks. However,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the invocation and utilization of the Chinese government’s memory of the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have slightly changed depending on the political, temporal, and international situations China has faced. During periods when China and the United States maintained a competitive cooperative relationship, the narrative of the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was not heavily emphasized. However, during times of heightened tensions and conflict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China, there was extensive promotion and utilization of the collective memory of the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In this context, the active emphasis on the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during Xi Jinping’s tenure is deeply related to the intensification of the power competition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China.

 

Keywords: Korean War, historical perception, historical narrative, US-China power competition,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동북아역사논총 80호(2023년 6월) 

* 투고: 2023년 4월 15일, 심사 완료: 2023년 5월 10일, 게재 확정: 2023년 5월 12일

중국의 한국전쟁 인식, 서술, 활용.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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