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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25-37 내러티브 읽기/박노식.강남대

초록

누가복음 10:25-37은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 불리는 예수의 비유를 갖고 있는 단락이다.

사마리아인 비유(눅 10:30-35) 자체로도 완벽한 내러티브 이지만 본 연구는 누가복음 10:25-37을 하나의 단위로 해석하고자 한다.

사마리아인 비유는 수사적 전략에 따라 사용된 일종의 예화이고, 비유가 종결된 후에도 예수와 율법사의 대화는 다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예시하는 모범적 비유로 분류되면서, 비유는 필요에 있는 사람에게 그 필요를 적극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윤리적 해석의 범주안에 가두어졌다.

모범적 행동이라는 윤리적 해석은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이 배태한 의미성을 최소화시킬 수있다.

비유가 일상과 비일상의 비교보다 이상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비유의 고유성이라는 하나님나라에 관한 신학적 실재와 비유의 극적 효과라는 청중의 실존적 참여의 의미성은 최소화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연구는 누가복음 10:25-37의 인물들과 그들의 행동에 관련된 문학적 구성을 우선적으로 분석하여, 인물들의 행동을 통하여 암시된 삶의 다양성에 관련된 신학적 사유를 제시할 것이다.

본 연구는 예수와 율법사의 대화가 보여준 ‘의롭다고 인정됨과 이웃 되기’에 관련된 은유성과 더불어 예기치 못한 사람의 등장과 그의 자비로운 행동의 재현에 관련된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확인할 것이다.

주제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하나님나라, 누가복음, 문학비평, 은유

 

 

I. 서론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예수의 비유 중에 대표적 인 비유이다. 이 비유의 기원에 대한 토론이 있었지만, 누가의 특수 자료로서 비유의 진정성은 이제 의심되지 않고 있다.2)

비유에 대한 연구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3)

 

       2) J. D. Crossan, In Parables: The Challenge of the Historical Jesus (Sonoma: Polebridge Press, 1992), 57-59; R. Bultmann, 『공관복음서 전승사』, 허혁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4), 227-28.

      3) 조태연은 사마리아인 비유의 해석사에 대한 비평적 평가를 탁월하게 진행 했다. 조태연, “비유해석의 역사와 새로운 연구의 필요성: 이미지 네트워킹 (image networking)의 새 방법론을 모색하며,” 『신약논단』 25 (2018), 901-46. 

 

초기 교회 교부들의 해석 이래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알레고리적 방법론이 다양한 해석들을 생산했고, 그리고 최근에 역사비평을 통하여 비유는 모범적인 이야기로 해석되기도 했다.

또한 비유의 은유성 연구를 통하여 문학비평은 청중을 비유의 신학적이고 실존적 세계에 참여하게 하였다.

하나님나라의 실재와 청중의 참여를 제시하기 위해서 연구는 누가 복음 10:25-37의 인물들과 그들의 행동에 관련된 문학적 구성을 살펴 보고, 삶의 다양성을 함의하는 인물들의 등장과 이에 관련된 사유를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연구는 예수와 율법사의 대화가 보여준 ‘의롭 다고 인정됨(참고 눅 10:29, dikaio,w)과 이웃’ 혹은 ‘의롭다고 인정됨과 이웃되기’에 관련된 은유성과 더불어 예기치 못한 사람의 등장과 그의 자비로운 행동에 관련된 의미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연구는 서사적 은유의 문학적·신학적 의미, 특히 비유에 배태된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실 존적 차원에서 분석하려는 것이다.

연구는 내러티브의 극적 효과에도 관심을 두고자 하는데 이는 문학비평 안에서 극적 효과는 청중과 등장 인물 간의 실존적 동일시 이슈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내러티브와 하나님나라의 상관성을 청중의 실존적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II. 문제 제기: 연구의 필요성과 이슈

 

누가복음 10:25-37에서 관심을 받았던 것은 예수와 율법사의 대화 보다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 불리는 예수의 비유이다. 사마리 아인 비유(눅 10:30-35) 자체로도 완벽한 내러티브이기 때문에, 사마리 아인 비유를 독립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마 리아인 비유는 수사적 전략에 따라 사용된 일종의 예화이고, 비유가 종결된 후에도 예수와 율법사의 대화는 다시 이어지기에, 본 연구는 이 단락을 하나의 단위로 읽고자 한다.4)

 

       4) 김춘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5)에 나타난 예수의 해학,” 『신 학과목회』 37 (2012), 151-82; 김판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5) 연구,” 『신약논단』 14 (2007), 1015-52; 김덕기, 『예수 비유의 새 로운 지평: 프랑스 구조주의와 문학사회학 방법에 근거한 예수 비유의 정 치적·윤리적 해석』 (서울: 다산글방, 2001), 353-61; 정양모, 『공관복음서의 비유』 (서울: 성서와 함께, 2000), 187-18; Kenneth E. Bailey, Through Peasant Eyes: More Lucan Parables, their Culture and Style (Grand Rapids: W. B. Eerdmans, 1980), 33; 허혁, “예수의 비유연구에 관한 소고,” 『성서와 신 학』 (서울: 성광문화사, 1977), 1-52; G. Sellin, “Lukas als Gleichniserzäehler:Die Erzäehlung vom barmherzigen Samaritaner(Lk 10:25-37),” ZNW 65 (1974), 166-68; G. V. Jones, The Art and Truth of Parables (London: SPCK, 1964), 258; C. 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35), 147. 다음은 인접 문맥 안에서 사마리아인 비유를 연구한 논문들이다. 이민규, “누가복음 10:25-35에 나타난 고정관념의 탈출: 예수와 율법사와의 논쟁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신약논단』 9 (2002), 323-48; 최갑종, 『예수님의 비유』 (서울: 이레서원, 2001), 107-20; 김춘기, “신해석학(The New Hermeneutic)에 따른 ‘선한 사마리아인 의 비유’의 의미: 눅 10:25-37,” 『신학과목회』 2 (1998), 107-14; 김득중,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연구,” 『신학과세계』 15 (1987), 239-68; 정태현, 『놀라운 발견』 (서울: 바오로딸, 1996), 91-101. 

 

그리고 하나의 내러티브로서누가복음 10:25-37은 하나의 행동을 재현하기 위해 서사적 은유를 다수 사용하고 있다.5)

내러티브 속 내러티브인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예시하는 모범적 비유(example parable)로 분류되면서,6) 비유는 필요에 있는 사람에게 그 필요를 적극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윤리적 해석의  범주 안에 가두어졌다.

 

     5) 사마리아인 비유의 서사와 은유에 대한 논의는 김덕기의 논문을 보라. 김 덕기, 『예수 비유의 새로운 지평』, 359-61. 비유 해석에 있어서 은유의 중 요성은 신해석학의 등장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을 보라. Amos N. Wilder, Early Christian Rhetoric: The Language of the Gospel (Eugene: Wipf and Stock, 2014); M. A. Tolbert, Perspectives on the Parables: An Approach to Multiple Interpretation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9).

     6) 이것을 예화 혹은 모범적 이야기로 분류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Adolf Jülicher, Die Gleichnisreden Jesu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63), 1:112; R. Bultmann, 『공관복음서 전승사』, 227-28; Colin M. Ambrose, “Desiring to Be Justified: An Examination of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in Luke 10:25-37,” Sewanee Theological Review 54 (2010), 18; A. J. Hultgren, The Parables of Jesus: A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2000), 92; Crossan, In Parables, 55; Jeffrey T. Tucker, Example Stories: Perspectives on Four Parables in the Gospel of Luke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1997), 71-144; Joseph 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Garden City: Doubleday, 1985), 883; I. Howard Marshall, The Gospel of Luke: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8), 445. 

 

자비를 행한 사마리아 사람이 이상적인 인물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에 준할 때 사마리아 사람 의 행동이 비교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범적 행동이라는 윤리 적 해석은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이 배태한 의미성을 최소화시킬 수 있 다. ‘모범적인 이웃이 되라’를 권고하기 위해서 유대인에게 증오와 혐 오로 가득한 사마리아 사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이러한 이해는 내러티브의 흐름을 너무 진부하게 만들며, 문학 구조를 완전히 손상시킨다.7)

만일 이상적 이웃을 보여주려는 의도 라면, 사건들의 배열은 강도 만난 유대인,8)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이스라엘 평민으로 구성하여 이스라엘 평민이 희생자를 돌보아도 충분해 보인다.

혹은 강도 만난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으로 묘사하고, 바리새인을 등장시켜 희생자를 도와준다면, 원수사랑(눅 6:27, 35)을 실천하는 바리새인이라는 프로파간다도 만들어질 수 있다.

또한 헐트그렌(Arland J. Hultgren)이 정의한 것처럼 모범적 비유가 일상과 비일상의 비교보다 모범적 행동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라면,9) 비유의 고유성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나라에 관한 신학적 실재와 비유의 극적 효과라는 청중의 실존적 참여의 의미성은 최소화될 수밖에 없다.10)

 

       7) Robert W. Funk, Funk on Parables: Collected Essays (Santa Rosa: Polebridge, 2006), 77.

       8) 김판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5) 연구,” 1035; Funk, Funk on Parables, 85; Craig L. Blomberg, Interpreting the Parables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12), 301.

       9) Klyne Snodgrass도 일상과 비일상의 비교가 없는 모범적 비유 범주에 사마 리아인 비유를 분류하지 않았다. Klyne Snodgrass, Stories with Intent: A Comprehensive Guide to the Parables of Jesus (Grand Rapids: Eerdmans, 2008), 27.          10) Funk, Funk on Parables, 37; Hultgren, The Parables of Jesus, 92. 2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해석은 후속 대화(눅 10:36-37) 에 배태된 은유성도 무시될 수 있다.

내러티브는 ‘누가 내 이웃이냐’ (눅 10:29)에 대응하여 사마리아 사람을 의도적으로 출현시켰고, 또한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희생자의 이웃이 되느냐’라는 질문을 통하여 ‘자비를 베푼 자’(o` poih ,saj to. e;leoj)라는 대답을 의도적으로 유도하였다.

이러한 문학적 구성은 내러티브의 구조적 특이점과 중요성을 보여 주는 요소이다. 그러나 윤리적 해석은 이같은 문학적 구성의 의도와 효과를 간과하게 한다. 윤리적 해석은 율법사가 ‘사마리아 사람’이 아 니라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에서 드러난 은유의 힘을 간 과할 수 없다. 김판임도 사마리아인 비유의 문학적 완성도를 분석하면서 ‘이웃사랑’ 이라는 해석의 불충분성에 대하여 지적한다.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서 의 이웃을 규정하기 위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비유를 제공하고자 의 도했던 누가의 처리는 그리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 유의 도입부에서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하고, 그 대답을 위해 예 수의 비유를 전하는 누가의 의도를 분명히 하려면, 도움을 필요로 하 는 자가 이웃으로 보이도록 했어야 하기 때문이다.”11) 이러한 평가는 적절하며 설득력이 있다. 김판임의 비평에 덧붙여서, 내러티브는 도움 을 제공하는 사람을 이웃으로 보이도록 구성하는 것도 설득력 있게 보 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최종성은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을 예 외로 둘 수 없다. 곧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 자체가 내러티브의 특이점 이다. 그러므로 위의 사실들을 종합할 때, 내러티브의 의도는 이웃사랑 이라는 윤리적 차원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12)

 

     11) 김판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5) 연구,” 1020.

     12) Crossan도 ‘이웃을 도우라’는 윤리를 가르치는 비유가 아님을 이미 지적하 였다. 그는 행위자 즉 사마리아 사람을 중심에 두고 해석하고 있다. Crossan, In Parables, 59, 62.

 

만일 그렇다면, 그 이상은 무엇일까? 내레이터는 왜 ‘의롭게 됨’ 모티프를 사용 하여 ‘이웃이 누구인가’를 질문하고 있을까? 그리고 비유는 이것과 관 련하여 하나님나라의 어떤 실재를 보여주는 것일까?

김덕기는 사마리아인 비유에 배태된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간략하게 언급하기도 했지만,13) 하나님나라의 상관성은 결국 비유의 종류에 관한 질문으로 보인다.

사마리아인 비유 후에 속개된 예수와 의로움을 스스로 확정한 듯한(qe,lwn dikaiw/sai e`auto.n) 율법사의 대화는 하나님 나라에 연관된 실재를 보여주는 수사적 발화와 서사적 은유들을 사용 하고 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이웃이 되느냐’는 질문의 답은 ‘저 사마리아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자비를 베푼 자’라는 율법사의 오답으로 구성된 수사적 발화를 가지고 있다.

보건대 예수와 율법사의 후속 대화에 사용된 수사적 질문과 대답은 상당한 은유성을 보여준다.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사건들에 배태된 하나님나라의 실재는 무엇일까?

특히 사마리아인 비유는 ‘의롭다고 인정됨’ 모티프에 연계한 질문의 대응이기에, 의로움이란 단어의 의미성을 간과하는 것 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내러티브에서 의롭게 됨에 관한 모티프가 하나님나라의 시작을 말하는 것인지 혹은 행동의 결과를 말하는 것인지?

의로움이 이웃을 찾아서 그의 필요를 제공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웃을 찾아서 그의 필요를 제공한 것의 결과인지? 이것이 시작이든 결과이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율법사의 대답이 드러내는 서사적 은유의 힘은 상당한 것처럼 보인다.

누가복음 10:25-37의 문학적 구성을 이웃사랑이라는 윤리를 가르치는 모범적 비유로 확정하기에는 너무 많은 질문이 만들어져 있고, 또한 행동을 함의하는 다수의 은유를 가지고 있다.14)

 

      13) 김덕기, 『예수 비유의 새로운 지평』, 359-61.

      14) 김덕기는 사마리아인 비유의 은유성에 대한 연구를 심도있게 진행하였다. 『예수 비유의 새로운 지평』, 353-59.  

 

III. 서사적 은유

 

문학비평의 등장으로 새롭게 제시되고 있는 비유의 성격은 닫힌 구 조적 특성이 아니라 열린 구조적 특성이다.15)

비유의 개방성은 청중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기에 비유의 내러티브 세계는 청중에게 기대 하지 않은 어떤 상황을 보여줄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청중은 비유 세 계에 실존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예수의 비유는 하나님나라와 일상적인 것 사이의 비교라는 점에서 은닉성의 특징도 부인할 수 없지 만,16) 청중의 참여는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나게 할 것이다.

이 단락(눅 10:25-37)은 사마리아인 비유를 포함한 예수와 율법사의 대화 내러티브이다.

내러티브는 시·공간의 구조적 인과관계 안에서 인 물들의 행동을 삶에 관련된 필연적인 행동으로 재현한 것이기에, 고귀 한 행동을 재현한 내러티브는 인간의 삶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예수와 율법사의 대화와 여기에 사용된 사마리아인 비유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삶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구조화된 내러티브는 다양한 전략이나 장치로 구성된 사건의 행동이나 인물의 행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이를 위해 내러티브는 인과 관계 안에서 문학 세계를 창의적이고 효과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창의적 구성의 핵심 도구가 은유이다. 내러티브가 생산한 은유를 서사적 은유라 할 수 있는데, 은유는 두개의 사물이나 개념을 비교하는 수사이다(A는 B이다).

은유는 A를 숨겨서 비교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내러티브 안에서 은유는 경험을 직 접 표현하지 않고 다른 매개적인 행동을 통하여 표현하는 것이다.17)

 

      15) Funk, Language, Hermeneutic and Word of God, 143, 213; Hedrick, Many Things in Parables, 90; Kelber, The Oral and the Written Gospel, 112.

      16) 누가복음 10:25-37의 사마리아인 비유(눅 10:30-35)는 ‘내 이웃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소개된 것이지만, 예수는 사마리아인 비유 안에 이웃이 누구인가에 관련된 다양한 신학적 함의, 하나님나라를 은닉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인 비유는 알레고리를 생산하기 위한 사건들의 결합이 아니 라 은유에 의해서 생산된 행동의 구조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론처럼 내러티브의 파편적이거나 세부적 요소에 관심을 둘 경우, 진지한 행동을 보여주는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17)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57b. 5-15, 천병희 역 (서울: 문예출판사, 2000), 115-17를 보라. Funk, Language, Hermeneutic and Word of God, 136-43. 

 

그래서 은유는 A와 B 간의 비교될 수 없는 것을 병렬로 놓을 수 있기 때문에 내러티브에서 은유의 사용은 창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창의성을 통하여 은유는 신학적이고 존재론적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 다.

또한 은유는 수사적 차원과 인식론적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수사적 차원에서 은유는 일종의 문학 장치이지만, 인식론적 차원에서 은유는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상징에 대한 (인간의) 해석방식의 일환이다.

이것은 리쾨르가 이미 제시했던 은유에 대한 이해이다.

그에 따르면 청중의 세계를 새롭게 재구조화할 수 있는 도구가 은유다.

왜냐하면 은유의 힘은 인식, 상상력, 그리고 정서적 공감을 통합하여 단번 에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18)

그리고 서사적 은유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인물들의 실존을 보여 주는 행동과 등장인물의 성격묘사를 위한 외형적 구조로서 차이와 함께 동일성을 추구하는 수사와 미적 효과에 관한 것이다.

서사적 은유는 내러티브를 경험한 청중의 세계를 재구조화할 때 사용되는 실존적 자기 정체성 확립에 작동하는 특별한 것이다.

과거의 행동과 현재의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성을 극복하게 하고 새로운 행동을 추구하게 하는 내러티브에서 은유는 살아내려는 청중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 하게 하는 도구일 수 있다.19)

내러티브의 목적이 행동의 재현(mi,mhsij) 에 있기에 서사적 은유는 이 미메시스를 끌어내는 힘으로 기능한다.

이것은 삶에서 실존적으로 재현되어야 하는 행동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동은 등장인물과 청중이 미메시스해야 하는 바로 그 대상이고 주체이다.

그러기에 내러티브의 서사적 은유는 청중이 자신의 행동을 재현 하고자 하는 의지에 관련된 근원적인 기반이라 할 수 있다.20)

 

      18) Michael Kelly, Encyclopedia of Aesthetic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210.

      19) 오윤호, “서정인 「강」의 서사적 은유,” 『시학과언어학』 15 (2008), 114.

      20) J. Bruner, Making Stories (New York: Farrar, Strauss, and Giroux, 2002). 

 

또한 행동을 유발하는 서사적 은유는 플롯의 한 요소인 반전(급전)에 관련 되어 있다.

청중의 축적된 이성적·정서적인 공감은 플롯의 반전(급전) 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발생하기에21) 행동을 유발하는 서사적 은유는 플롯의 완성도를 제고하는 요소임이 분명하다.

청중의 실존적 참여는 사건들의 배열 안에서 발생한 등장인물에 대 한 자기 이해에 기반하여 생산되는 것이다.

그래서 청중의 경험과 상황에 따른 차이를 극복하면서, 청중의 참여를 의도한 서사적 은유는 살아내려는 존재에게 자기 이해를 완성하게 하는 전략적 도구로 기능 한다.22)

그러므로 누가복음 10:25-37의 은유는 청중들이 실존적 존재 로 나아가려는데 필요한 자기 이해를 신학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전 략적으로 사용된 것이다.23)

이 단락의 은유는 예수와 율법사 사이에 일어난 질문과 대답에 따른 작용과 반작용 그리고 강도 만난 사람과 제사장, 레위인, 혹은 사마리아 사람의 조우에 따른 무시와 관심이 보 여주는 행동에 관련된 것이다.

적어도 사마리아 사람에 의해 수행된 예기치 못한 실존적 결단과 이에 대한 인정과 수용은 계층적 인종적 갈등을 제거하고 다양한 청중들을 동등한 사람으로 존재하게 한다.24)

 

       21) Wilder, Early Christian Rhetoric, 84; D. O. Via, The Parables: Their Literary and Existential Dimension (Philadelphia: Fortress, 1974), 41, 53.

      22) 폴 리쾨르, 『텍스트에서 행동으로』, 박병수·남기영 역 (서울: 아카넷, 2002), 13; 장일구, “은유의 문화적 구성 역학: 「혼불」을 사례로 한 시론,” 『시학과언어학』 15 (2008), 139.

      23) Crossan은 은유적 장치를 문학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 평가한다. Crossan, In Parables, 64.

     24) Jones는 비유를 종교적 인종적 우월성을 고발하는 비유로 해석하고 있다. Jones, The Art and Truth of Parables, 258; Amy-Jill Levine, The Misunderstanding Jew: The Church and the Scandal of the Jewish Jesus (San Francisco: HarperOne, 2006), 148. 김득중도 사회과학적 차원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대조를 분석하였다. 김득중, 『복음서의 비유들』 (서울: 컨콜 디아사, 1988), 237-40.

 

그리고 누가복음 10:25-37의 단락은 담화(discourse)적 성격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 단락은 예수와 율법사의 대화로 시작한다는 것과 다수의 의미가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것에서 담화적 특성을 부인할 수 없으며,25) 또한 담화는 사적인 경험을 공적인 것으로 전이하기 위한 언어의 외재화이다.

 

      25) 여기서 ‘다수의 의미들’이라 함은 영생, 의로움, 이웃, 지나침, 측은함, 거반 죽은 상태, 자비 등등을 말한다. 

 

담화적 내러티브란 ‘어떤 특정 주제에 대한 논리적인 토론을 가지고 있는 내러티브’를 말한다.

누가복음 10:25-37의 담화에서 사적인 것에서 공적으로 전이시키려는 것은 무엇일까?

율법 사의 대립이 보여주는 담화의 의미 구조는 무엇인가?

 

IV. 내러티브의 구조

누가복음 10:25-37은 예수의 여행 단락(눅 9:51-19:28)의 첫 부분에 해당하지만, 이 소단락의 내러티브적 흐름과 극적 효과는 다른 어떤 단락보다 탁월하다. 내러티브의 독특한 흐름과 은유적 특성은 해석자 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사마리아인 비유를 포함한 이 단락의 내러티브적 구조에 대한 토론은 상당한 결과 를 가져왔다.26)

 

      26) Brad Young, The Parables. Jewish Tradition and Christian Interpretation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98), 105; Via, The Parables, 12, 16.

 

우선 문학적 단락 구분은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아리스토 텔레스적 구분27)    현대소설 이론 구분28)                             내용

 

                시작                                 발단과 전개              - ‘무엇으로 영생을 얻느냐’는 율법사의 질문과 율법 이해 방법에                                                                                                        대한 예수의 대응 질문 (25-26)

                                                                                          -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란 율법사의 대답과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예수의 대응 대답(27-28)

 

                중간                                    위기                        -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내 이웃이 누구냐’는

                                                                                              율법사의 두 번째 질문(29)    

                                                                                          - 사마리아인 비유라는 예수의 대답(30-35)

 

                                                          절정                         -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느냐’라는

                                                                                             예수의 두 번째 질문(36)

                                                                                          -‘자비를 베푼 자’라는 율법사의 대답(37a)

 

             종결                                    대단원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는 예수의 권고 (37b)

 

 

                 27)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50b. 30.

                28) E. M. 포스터, 『소설의 이해』, 이성호 역 (서울: 문예출판사, 1990). 포스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계

                   플롯 구성 이론을 5단계 이론으로 변형시켰다. 

 

1. 기본 구조

내러티브의 구조는 행동을 위한 개연성과 필연성으로 만들어진 사건들의 배열에 기반하여 청중을 내러티브 세계로 참여하게 한다.

성격 묘사를 포함한 사건들의 배열을 통하여 청중은 인물들의 행동을 학습 하여 행동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중을 내러티브 세계로 초대하기 위해서 내러티브는 논리적이며 감성적인 기본 구조를 구축한 후, 플롯 구성에 필요한 여러 요소를 활용하여 사건들의 배열을 완성한다.

그중 하나가 인물에 성격을 부가하는 것이다.

청중의 참여는 사건들의 배열로 발생한 두려움과 연민이라는 정서적인 요소와 학습이라는 이성적 요소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일어난다.29)

사마리아인 비유(눅 10:30-35)를 중심으로 인물 1과 인물 2간의 전후 대화(눅 10:25-29, 36-37)로 구성된 단락은 내러티브의 선형성(linearity) 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30)

 

      29) 박노식, “마가의 플롯: 능동적 존재를 향한 참여적 기독론,” 『신약논단』 12 (2005), 352-53.

     30) 비유의 문학성에 관한 연구는 다음을 보라. B. Kollmann, “Jesus als jüedischer Gleichnisdichter,” NTS 50 (2004), 457-75.

 

누가복음 10:25-37의 내러티브적 선형성은 구조적인 측면에서 매우 효율적으로 관리되어 있다.

내러티브는 인물 1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의 질문은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한 것 이다.

그러나 인물 2는 오히려 대응적 질문을 제기했다: ‘율법에 뭐라 기록되었고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리고 인물 1은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대답했다.

이에 대하여 인물 2는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는 대답으로 권고했다.

그리고 인물 1의 두 번째 질문이 일어난다. 인물 1은 ‘내 이웃이 누구냐’(눅 10:29)를 다시 질문했다.

이에 대한 대답이 곧바로 소개된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이다.

소개된 사마리아인 비유의 내러티브적 선형성도 선명하게 유지되어 있다.31)

인물 2는 사마리아인 비유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내러티브에 재현된 행동을 구술하였다.

비유의 기본 구조는 등장인물 들을 출현시켜 객관적이고 단조롭게 사건들을 배열하고 있다.

비유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에 강도를 만났고 강도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거의 죽게 되어 길에 버려졌다. 마침(kata . sugkuri ,an de.)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첫 번째 사람이 그곳 에 출현하였는데, 그는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갔다. 또 이처럼(o`moi,wj de.) 두 번째 사람도 출현하였는데 그도 첫 번째 사람처럼 보고 그냥 지나갔다. 또(de ,) 세 번째 사람이 그곳에 출현하였다.32)

 

     31) 사마리아인 비유만의 소설적 단원 구분을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발단(30-31)--여행 중에 강도 만난 어떤 사람이 거의 죽은 상태로 버려짐; 전개와 위기(31-32)--제상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감; 절정(33-34)--사마리아 인이 측은히 여겨 돌봐줌; 대단원(35)--여관주인에게 위탁하고 돌아올 것을 약속함.

    32) 강도 만난 사람 옆을 지나간 사람이 세 명이라는 것은 구술 문학의 한 특 징인 삼의 법칙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Bernard B. Scott, Hear Then the Parable: A Commentary on the Parables of Jesus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9), 35-36, 40.

 

그는 어떤 행동을 할까? 만일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지나치게 되면, 극적 긴장감과 흥미가 감소 되어 지루한 느낌을 야기시킬 수 있기에 내레이터는 그를 그냥 지나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겨 그를 돌보고 네번째 사람에게 위 탁시키고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사마리아인 비유를 소개한 직후 인물 2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이웃이 되느냐’고 질문했고, 인물 1은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내러티브는 인물 2의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는 강력한 권고로 종결된다.

흥미를 잃지 않을 정도의 긴장감을 유지한 것으로 보아, 내러티브 의 기본 구조는 완벽에 가깝다.

내러티브의 기본 구조에서 한 가지 특이점은 인물들의 등장에 관련된 것인데, 처음 두 사람과 세 번째 사람의 출현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접속사 de,를 사용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접속사는 인물들의 행동을 단 순하게 비교 대조하기 위함이다. 내러티브의 기본적인 구조가 완성되면, 작가는 내러티브의 선형성을 안정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다양한 동기와 모티프를 사용하여 인물에 성격을 부여한다. 이를 통하여 내러티브에 사용된 사건들의 인과관계 와 핍진성은 제고되는 것이다. 내러티브(눅 10:25-37)의 청중은 사건들 의 배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직업과 인종적 기원을 통해 그들의 성 격이나 행동을 유추하도록 유도된다. 율법사로 규정된 인물 1이 질문을 제기한다. 율법사의 질문은 인물 2인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그러 나 예수가 이 질문에 대하여 답하지 않고 대응적 질문을 제기함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순간적으로 확보했다. 예수의 대응 질문으로 말미암 아 예수를 시험하려던 율법사의 의도는 무력화되었다. 율법사는 예수 의 대응적 질문에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지체없이 대답했다. 예수는 이 대답에 대하여 ‘옳으니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권고했다. 예수의 권고는 영생에 관련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기도 하다. 그런 중에 율법사의 두 번째 질문(내 이웃이 누구냐?)을 통하여 긴장감을 만들고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다.33)

율법사는 자신의 의로우려는 의지(qe,lwn dikaiw /sai e`auto .n)를 보이기 위해서34) ‘내 이웃이 누구냐’(눅 10:29)를 새롭게 질문하였다.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이다.

인물 1과 인물 2의 성격묘사와 함께 세부 사항들이 부여됨으로 내 러티브는 더 안정적인 흐름과 치밀한 인과관계를 갖게 되었다. 치열한 신학 논쟁을 위해서 예수와 율법사는 신중하고 진지한 질문들을 주고 받았다.

안정적인 흐름은 주도권 확보에 관련하여 긴장감 을 생산하였지만, 예수와 율법사의 짧은 대화의 선형성은 조금도 흔들 림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특히 무엇보다 사마리아인 비유의 필연 적인 배열이 돋보이게 된다. 내레이터로서 예수는 ‘어떤 사람’을 제외하고 인물들의 직업이나 인 종을 명시하여 구술함으로 성격묘사를 완성하면서 내러티브의 기본 구조를 제고했다. 어떤 사람(a ;nqrwpo,j tij)이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났 다.35)

 

    33) 레위기 율법을 알고 있는 율법사가 이웃이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것은 매 우 예외적이다. 그들의 관례와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이 질문은 필요없는 질문이다. 그렇다. 이웃의 범위와 한계는 레위기 19장에 이미 명문화되어 있다. 레위기 19장은 이스라엘 사람과 거류민 즉 이방인을 포함하고 있다. 이웃은 이미 동족, 인종, 종교의 전통적인 제도로 제한되지 않는다. 구약성 서는 이웃을 이방인들까지 포함하였고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지명하였 다. “또한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 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신 10:18).

    34) 누가복음은 동사 dikaio,w를 다섯 번 사용한다(7:29; 7:35; 10:29; 16:15; 18:14). 마태복음은 두 번 사용하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이 동사를 전 혀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이 형용사 형태로 두 세 번 정도 사용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율법사의 의로 움을 교정하기 위해 사마리아인 비유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동 사에 대한 연구는 다음을 참고하라. C. M. Ambrose, “Desiring to Be Justified,” 21-24; A. J. Hultgren, “Enlarging the Neighborhood: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Luke 10:25-37),” Word & World 37 (2017), 72.

     35) 내레이터는 어떤 사람에 대한 성격묘사를 생략하지만, 이 또한 내레이터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는 장치이다. 이 어떤 사람은 유대인도 될 수 있고 또는 다른 인종의 사람도 될 수 있다. 이야기의 흐름과 청중의 상황에 따라 어떤 사람의 신분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이는 청중을 비유의 세계로 초대하는 장치이다.

 

그리고 그는 거의 죽은 상태로 길에 버려졌다. 도움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상태였다.

때마침(kata . sugkuri,an de.) 제사장이 그곳을 지갔다.

그런데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칠 이유는 나타나지 않는다.

첫 번째 사람이 그냥 지나치는 것이 내러티브의 흐름에 적절해 보이지만 그 첫 번째 사람이 제사장으로 구체화된 상태에서 제사장의 행동은 청중의 정서에 동요를 일으킬 수 있다: 왜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지 않고 그냥 지나친 것일까? 이 질문은 누구나가 제기할 수 있는 종교 윤리적인 질문이다.

비유의 청중이 알 수 있듯이, “대제사장과 나 실인은 그들의 죽은 친족 때문에 불결함과 접촉해서는 안 되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주검 때문에 불결함과 접촉하는 것은 허용된다”(미 쉬나 NAZIR, 7.1).36)

제사장이 돌보지 않는 이유를 종교 윤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이 쉽지 않다.37)

 

      36) 김춘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5)에 나타난 예수의 해학,” 18 재인용.

      37) 이민규는 제사장의 행동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민규, “누가복음 10:25-35에 나타난 고정관념의 탈출,” 337. Scott, Hear Then the Parable, 195-97도 참고하라.

 

이로 보건대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야 하는 동기인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레위인이 또 이와 유사하게(o`moi,wj de.) 출현했다.

희생자는 레위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었지만, 그도 제사장처럼 희생자를 보고 그냥 그렇게 지나쳤다. 두 번째 등장한 사람이 율법을 알고 있는 레위인이라면, 그도 그냥 그렇게 지나칠 수는 없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존재적으로 더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청중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어떻게 제사장이 이렇게 할 수 있지! 그래도 레위인은 율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니, 율법의 핵심인 자비를 행했어야지!’ 사마리아 사람이 또(de,) 출현했다. 등장인물의 성격묘사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 번째로 등장한 사람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지만, 사마리아 사람으로 성격묘사가 완성된 세 번째 사람은 그냥 지나칠 것으로 예측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의 빵을 먹는 것과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m Seb 8:10).

그러나 구술문학의 법칙을 유지하면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측 은히 여겨 돌보았고 여관주인에게 위탁까지 했다. 사마리아 사람과 여관주인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예기치 않은 행동은 충격과 놀라움이다.

사마리아인 비유를 소개한 직후 예수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이웃 이 되느냐’고 질문했고,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 단락은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는 예수의 강력한 권고로 종결된다.

이 단락의 완성된 플롯을 고려할 때, 예수와 율법사의 후속 대화(눅 10:36-37a)는 이 내러티브의 결정적인 전환을 보여주는 반전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등장인물과 청중은 이웃의 범위가 인종 과 종교가 아니라 ‘자비’라는 행동에 관련된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두 번째 질문은 율법사와 청중을 동일시 하려는 수사적 질문이다.

예수는 이 동일시를 통하여 청중을 비유의 세계로 초대하기를 준비했다.

사실 예수와 율법사간의 시작부 대화는 청중의 감정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순조롭게 진행된 것으로 보이지만, 중간부와 종결부에 이르러 청중은 내러티브의 세계로 참여 할 수밖에 없었다.

이웃의 대상이냐(눅 10:29) 혹은 이웃의 주체냐(눅 10:36)에 관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와 율법사 간의 후속 대화 도 이웃과 행동을 중심 주제로 사용하여 내러티브의 흐름을 손상시키 지 않았으며 이 단락의 내러티브는 매우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관리 된 것처럼 보인다. 비유의 기본적인 구조는 등장인물들의 직업과 인종을 표기하여 내 러티브의 문학적 최종성을 이루었다. 내레이터의 구술은 접속사(de ,)를 사용하여 행동의 움직임을 나열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들이 보고 지나갔다는 행동에 기반하여 내러티브는 등장인물의 행동을 서로 평행적으로 나열한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종교적 경건성을 자세하 게 언급하지 않는 것과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을 준비하지 않은 것도 바로 행동의 다양성에 집중하려는 직관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더 요약하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유대교의 율법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행동은 청중의 정서적 동요를 일으키는 요인이다. 제사장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간 것 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일이다. 레위인도 행동적인 측면에서 혼란을 가 중시키고 있다. 동료의 위기에 대한 그들의 무기탄한 행위는 어떤 것 에 의해서도 용납될 수 없다. 비유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도움을 제공 하지 않는 행동을 종교적 경계와 인종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행위로 직관화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인과 여관주인의 출현은 청중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을 충 격에 빠트릴 수 있는 내러티브 구성이다. 사실 이들이 출현해야 할 개연성이나 필연성이 비유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내러티브의 흐름 안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듯이, 그냥 보통의 이스라엘 사람이 출현해도 충분하다.38)

 

    38) 유대교 문헌은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표현되는 관용적 표기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 다음을 보라. Michel Gourgues, “The Priest, the Levite, and the Samaritan Revisted: A Critical Note on Luke 10:31-35,” JBL 117 (1998), 710-12.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출현은 내러티브의 안정 성을 흔들어, 다른 차원에서 청중들을 동요시킬 수 있다. 특히 사마리 아 사람의 등장 자체는 내러티브의 안정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수 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이 내러티브적 안정성을 완전히 파 괴시켜서 내러티브 세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니다. 내러티브적 핍진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하지 못할 이유 도 명백하지 않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은 내러티브의 흐름에서 심리적인 안정을 약간 흔들 정도이다. 예기치 못한 인물의 출현은, 비 유의 청중이 사마리아인 같은 이방인이든 혹은 유대인이든,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측면에서 작동하는 요소이지 내러티브 자체에 영향을 미 치는 심각한 요소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등장은 결코 제사장의 ‘우 연’(kata . sugkuri,an de.)이나 레위인의 ‘이와 유사하게’(o `moi ,wj de.)가 아니 라 상당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배열이다.39)

특히 누가복음 9장에서 언급된 사마리아 마을에서 일어난 그들의 예수 거부를 기억한다면(눅 9:51-56),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은 더욱 의 도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9장에서도 예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입에서 사마리아 사람을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들의 불살라 버리자(눅 9:54, 참고 왕하 1:10-12)는 험악한 말은 당시 유대와 사마리아 간의 갈등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과 더불어 행동 즉 강도 만난 사람을 접촉하는 행위는 강도 만난 사람을 매우 곤경에 빠트릴 수 있다.40)

 

     39) P. F. Esler, “Jesus and the Reduction of Intergroup Conflict: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in the Light of Social Identity Theory,” Biblical Interpretation 8 (2000), 337.

     40) 박노식, “마가복음의 정결법 이슈:시간·공간·접촉,” 『신약논단』 25 (2018), 581-613. 

 

만일 강도 만난 사람이 어떤 유대인이라면, 이러한 곤경은 종교적이고 인종적인 경계를 위반한 것이다.

 

2. 문학 장치 미장센

 

내러티브의 미장센은 이야기의 흐름과 의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 이다. 장치로서 세부적인 미장센은 신학적 의미를 알레고리하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현실성과 사건들의 인과성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미장센은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날 뿐 아니라 여러 사람 이 지나가는 장소인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잇길’이라는 지리적 배경이다.41)

허혁은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잇길이란 미장센을 강도 만나기 좋 은 장소로 해석한다.42)

그가 해석했던 것처럼, 만일 예루살렘과 여리고 를 한적한 곳이어서 강도 만나기 쉬운 장소를 표현하려 했다면, 이런 유명한 지명을 사용하기보다 “어느 인적이 드문 한적한 거리”로 표현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래서 김판임은 강도 만나기 좋은 장소라는 지적에 대하여 긍정적이지만 비평적으로 평가한다.43)

예루살렘과 여리 고 사잇길이 강도 만나기 좋은 장소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보다 다양한 사람들의 빈번한 왕래를 보여주려는 장치로 보아야 한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가야 하고, 사마리아인도 지나갈 수 있는 곳 은 어디여야 할까? 아마도 그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예루살렘 혹은 그 근교 사이의 어디 정도는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강도 만난 사람이 버려진 그곳(예루살렘에서 여리고에 이르는)은 사람 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사마리아 사람도 출현할 수 있어야 하는 장소여 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잇길은 다양한 사람 들의 출현을 위한 내러티브의 핍진성을 높이는 장치이다. 특히 어떤 사마리아 사람을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큰 도시 근교가 되어야 하지 않 을까?

예레미아스에 따르면, 1세기 당시 예루살렘의 거주민은 약 55,000명 정도이지만, 절기에는 125,000명의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한다.44) 그리고 역사적으로 헤롯 대왕의 정책에 따라 유대와 사마리아 간의 갈등도 약간 완화된 면이 있었다.45)

 

      41) 미장센에 대한 개념은 박노식의 다음을 논문을 보라. 박노식, “마가복음과 그리스 비극의 비극적 공간 메타포의 비교연구: 신학적 함의와 윤리적 적 용,” 『신약논단』 22 (2015), 895-929.

     42) 허혁, “예수의 비유연구에 관한 소고,” 20.

     43) 김판임은 비유의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의 어느 곳이라는 미장센의 의미를 이미 잘 정리하였다. 김판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5) 연 구,” 1028-29.

     44) J. Jeremias, 『예수 시대 예루살렘』,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역 (천안: 한국 신학연구소, 1986), 106-20 참조.

     45) 기원 전후 유대와 사마리아 간의 종교적 정치적 관계에 대한 것은 박정수의 논문을 보라. 박정수, “유대교의 사마리아 통합의 갈등과 초기기독교 의 선교,” 『신약논단』14 (2007), 200-12. 

 

구체적인 지명을 제시한 것은, 김판임이 지적한 것처럼, 이야기의 핍진성을 높이기 위함 이고 이를 통하여 극적 요소를 강화하는 것이다.46)

 

      46) 김판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5) 연구,” 1028.

 

비유의 현실감 있 는 핍진성은 청중을 비유 세계로 이끌어오는 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비유 이야기의 지리적 배경을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로 명징하게 지 정한 것은 문학적 핍진성을 제고하여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을 준비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은 비유의 핵심적인 이슈 중 하나이다.

 

V. 하나님나라의 실재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예측되고, 이것에 따라 청중은 행동을 재현하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내러티 브의 문학적 완성도는 상당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소개된 비유의 극적 전환은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에서,47) 그리고 전체 내러티브의 극적 전 환은 비유가 소개된 후 진행된 예수의 질문(눅 10:36)과 율법사의 대답 (눅 10:37a)에서 일어난다.

 

      47)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한 치밀한 토론은 다음의 논문을 보라. Gourgues, “The Priest, the Levite, and the Samaritan Revisted,” 709-13.

 

두 개의 극적 전환을 통합적으로 해석하면, 사마리아인 비유는 하나님나라에 관련된 윤리를 가르치는 모범적인 예 화 비유이면서 동시에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보여주는 비유이다. 하나 님나라의 실재는 후속 대화에 사용된 수사적 질문과 서사적 은유성에 서, 특히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는 율법사의 수사적 발화와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라는 대응에서 나타나고 있다. 서사적 은유의 의미성은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과 수반된 행동에 숨겨져 있다.

1세기 주변에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의 정치 종교적 반목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48)

이웃사랑을 핵심 주제로 제시하려 했다면, 사마리아 사람 대신에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의 등장 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러티브의 최종성은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과 그의 행동을 배열한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 사람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사람과 그의 행동을 포함시켜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선포했 다.

사마리아사람의 출현을 명징하여 예수는 전통적인 종교·인종적 경계가 파괴된 하나님나라를 보여준다.49)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종교와 인 종에 의해서 생산된 편협되고 제한된 행동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 누가복음 10:25-37은 종교와 인종으로 이웃의 경계를 지으려는 특수성에 반기를 표명한 것이다.

하나님나라에서 이웃되기는 편협되고 제한된 행동이 제거된 상태를 수용한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나라는 내부인과 외부인의 구분과 경계(참고 막 4:11-12)가 없는 협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강도 만난 사람을 감싸며, 오직 자비의 복음을 통해 가장 보편적인 공동체를 만들어낸 그들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존적 행 동이 편만한 나라이다.

1세기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이웃의 범위를 같은 종족과 동일 종교 중심으로 규정하였다.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철저하게 동족을 표시하는 단어였지만, 내러티브에서 이웃은 종족, 지연, 혈연, 이념, 그리고 종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50)

 

      48) M. Chalmers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감보다는 두 그룹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여 비유를 해석하고 있다. 이를 위해 다음 논문을 보라. M. Chalmers, “Rethinking Luke 10: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Israelite,” JBL 139 (2020), 543-66.

     49) Crossan, In Parables, 64.

     50) Ambrose, “Desiring to Be Justified,” 17. 

 

이러한 이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 사람 같은 부정한 사람의 이웃되기는 율법의 본래성을 재선포한 것이다.

율법은 적어도 가까이 있는 사람을 이웃으로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이웃되기는 유대인들과 땅을 공유하는 거류민을 포함했던 개념이다: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 낳은 자 같이 여기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거류민이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레 19:34).

이제 이웃은 계층과 인종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자비를 공유할 ‘어떤 사람’이다.

비유의 충격과 놀라움은 자비의 행동이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베풀어 질 수 있다는 것과 함께 이교도의 자비로운 행위가 수용된다는 것이다.51)

내러티브의 주제는 모범적인 윤리적 행동 이슈 너머의 혼란과 모욕, 경멸과 혐오의 세계에서 타자(이교도를 포함한)를 수용하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실재이다. 이것이 바로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혁신이며 놀 라움이다. 이교도이지만, 희생자를 보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자비를 지체없이 행하는 것(눅 10:37)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 이기에, 하나님나라는 어떠한 경계와 구분이 없다. 자비는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이다. 희생자에게 지체없는 정의를 행 하는 것이 궁극의 지향점이다. 예수의 이러한 ‘이웃되기’는 하나님나라 의 도래를 알리는 복음이다. 예기치 않은 사람도 하나님나라에서 동무 일 수 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제도적 의로움이 아니라 거반 죽은 사람을 살리려고, 능동적으로 행하는 사람이 수용된 나라이다. 매우 일 상적이고 평범한 사람과 혐오스러울지라도 자비를 행하는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는 하나님나라이다. 곧 하나님나라는 “상호배제...가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포용을 통한 궁극적인 화해”가 편만한 나라이다.52)

 

      51) Gourgues, “The Priest, the Levite, and the Samaritan Revisted,” 712.

     52) 정종성, “잃은 양 비유(마 18:12-14)에 대한 해석학적 연구,” 『신약논단』 20 (2013), 672. 

 

내러티브에서 율법사와 예수의 후속 대화(눅 10:36-37)도 새로운 국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이웃 개념을 통하여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전이된 하나님나라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는 사마리아인 비 유를 전달한 후 율법사에게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느냐’고 질문했다.

이 질문의 특이점은 예수가 ‘내 이웃’(눅 10:29)의 한정을 사마리아 사람을 포함한 ‘이 세사람’(tou,twn tw/n triw/n) 으로 포괄한 것에 있다.

그리고 율법사의 대답(눅 10:37a)은 의도된 수사적 구성이다.

질문에 대한 율법사의 가장 명징한 대답은 사마리아 사람이지만, 율법사는 명징한 대답을 포기하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발화한다.

어쩌면 인종적 우월성과 종교적 특수성에 몰두된 율법사는 이렇게 밖에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율법사가 강도 만난 희생자의 이웃을 사마리아 사람으로 특정할 경우,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자신의 인종적 종교적 우월성을 포 기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참고 눅 11:45-54).

이것을 피하기 위해 율법사는 수사적으로 자비를 베푼 자라고 한 것이다.

누가복음의 수사적 전략은 탁월하게 진행된 듯하다.

율법사는 바로 이 사마리아 사람을 자신과 존재론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자비를 베푼 자’로 대답했던 것이지만, 오히려 자비를 베푼 자 라는 대답이 복음서의 의도를 더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복음서는 율법사의 대답을 통하여 유대교적 특수성과 인종적 우월성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자비를 베푼 자’라는 대답은 복음서의 의도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오답이다.

내러티브의 은유가 여기에 있고, 또한 이것이 비유의 충격과 놀라움이다.

그리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는 대답은 비유의 시작에서 표기되었던 ‘어떤 사람’(a ;nqrwpo ,j tij)을 소환한다(눅 10:30).

자비를 베푼 사람은 바로 ‘어떤(ti.j) 자비를 베푼 사람’이다.

곧 내러티브는 사마리아라는 지명이 함의할 하나님나라의 제한성과 한계성을 제거하고, ‘자비를 베푼 어떤 사람’이라는 대답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편만성과 개방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곧 누가복음 10:25-37 의 담화는 율법사의 정형화된 개념을 대신하여 예수의 신개념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전통적인 입장의 영생(눅 10:25)과 의롭게 됨(눅 10:29)은 그 집단에 소속된 것으로 영유되지만,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영생과 의롭다고 인정받음은 구분과 경계를 파괴하는 것에 있다.

서사적 은유라는 차원에서 예수의 마지막 권고(눅 10:37b)는 이 비유를 청중의 비유로 만들어준다.

내러티브의 카타르시스는 행동을 재현하게 하기에 예수의 마지막 권고는 사마리아인 비유를 가장 은유스럽게 만든 발화이다.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렇게 청중에게 나타나서 청중을 존재하게 한다.

이것이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삶이다.

그래서 ‘자비를 베푼 자’라는 대답과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는 권고를 통하여 청중은 자비를 베푼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임을 배울 뿐만 아니라 율법사가 자신임을, 또한 희생자가 자신임을 배우는 것이다.53)

 

      53) M. A. Proctor, “Who Is My Neighbor? Recontextualizing Luke’s Good Samaritan (Luke 10:25–37),” JBL 138 (2019), 206 각주 11.

 

VI. 결론

 

사마리아인 비유는 하나님나라의 존재를 그려주는 비유이다.

그래서 이 비유는 하나님나라에 있어야 하는 행동을 재현하게 하는 실존적 비유라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연구는 사건의 배열 안에서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과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는 대답의 내러티브 구조와 여러 인물의 행동에 주목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사의 두번째 질문(눅 10:29)과 두번째 대답(눅 10:37a)은 비유 내러티브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수사적 질문과 발화이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는 그의 대답은 비유의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특수의 경계를 허무는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그의 대답을 통하여 예수는 사마리아 사람의 출현과 그의 행동을 묘사했던 소기의 목 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예수의 ‘이와 같이 행하라’는 마지막 권고는 영생에 대한 첫 질문으로의 복귀와 두 번째 질문의 의로움 모티프를 다시 상기시킨다. 

그래서 영생과 의로움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희생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며, 예기치 않은 사람에 의해서 일어난 도움도 자연스럽게 수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는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하여 율법사의 질문(눅 10:29)을 인간 동등성 이슈로 대응했던 반면, 율법사는 ‘자비 를 베푼 자’라는 대답을 통하여 예수의 질문(눅 10:36)을 경계 이슈로 대응하려 했다. 비유의 이슈는 ‘이웃이 누구냐’와 ‘누가 이웃이 되느냐’ 라는 경계의 이슈가 아니라 자비의 행함을 통하여 누구나 존재론적으 로 동등하다는 하나님나라에 관한 이슈이다. 누가복음 10:25-37은 수용의 문제를 윤리적 측면보다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하도록 제시한다.54)

 

    54) Crossan, In Parables, 64.

이런 점에서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이다. 도래한 하나님 나라는 모욕과 혐오없이, 자비로운 행동으로 모두를 동등하게 인정하 고 동무 되는 나라이다. 존재론적 동등성은 복음 안에서 그 공간과 그 시간에 희생자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을 함 의한다. 하나님나라는 전통과 제도에 의해서 발생한 혐오와 차별을 제 거하고 서로를 존재론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나라이다. 이것이 하 나님나라의 본래성이고 가치이다. 비유는 실존에 관한 행동 비유이다. 사마리아인 비유는 하나님나라 에 관한 실존적 행동을 보여주는 비유이다.

이웃사랑이라는 윤리를 가르치는 모범적 비유는 하나님나라에 관련하여 미래적이라면 실존에 관한 행동 비유라는 함은 하나님나라에 관련하여 지금 여기를 말하는 것이다.

존재론적 동등은 모든 인간의 불평등과 차별, 혐오를 극복하 게 하는 요인이다.

강도 만난 자의 입장에서도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로운 행동을 수용해야 하고,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의 입장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동무로 수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도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과 이를 전하는 누가의 입장을 수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의 행동을 인종과 종교라는 고정된 가치에 의해서 판단 받고 행위를 제한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누가복음 10:25-37은 하나님나라의 가치기준에서 존재적으로 동등함을 보여주는 고귀한 행동을 가르치는 내러티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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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A Narrative Reading of Luke 10:25-37

Park, Roh-Sik (Kangnam University, Professor)

Luke 10:25-37 is a passage that has a parable of Jesus, the so-called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Luke 10:30-35) is a complete narrative. However, given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is an illustration used according to a rhetorical strategy, and the conversation between Jesus and the lawyer continues even after the parable ends, the present study seeks to interpret Luke 10:25-37 as a narrative unit.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was classified as an example parable that exemplified the practice of loving one’s neighbor, and was categorized as an example that encourages ethical interpretation, which highlights the theme of actively providing for those in need. However, ethical interpretation of exemplary behavior can minimize the significance of the appearance of the Samaritan. If exemplary parables simply show ideal behavior rather than a comparison between the kingdom of God and the everyday life, the theological reality of the kingdom of God, which is the uniqueness of the parable, and the meaning of the audience's existential participation, which is the dramatic effect of the parable, are minimized. The present study has two main aims. The literary composition related to the characters and their actions in Luke 10:25-37 will be analyzed and then, it will suggest the theological thoughts related to the diversity of life implied through the characters’ actions. Finally, the study will confirm the reality of the kingdom of God, through examining how appearance of an unexpected person and the representation of his merciful behavior relate to the Kingdom of God, and the metaphor related to ‘righteousness and becoming a neighbor’ shown in the conversation between Jesus and the lawyer.

 

Keywords The Parable of Good Samaritan, the Kingdom of God, the Gospel of Luke, Literary Criticism, Metaphor

 

신약논단 제30권 제2호. 2023년 여름

 (투고일: 2023. 5.3 최종심사일: 2023. 5.25 게재확정일 2023. 5.29)

누가복음 1025-37 내러티브 읽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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