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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비유를 통해서 본 하나님의 정의/김판임.세종대

초록

이 논문은 세 가지 예수의 비유를 해석하여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예수의 이해에 도달하고자 한다. 세 비유는 각각 노동과 임금(포도원주인의 비유), 부채탕감(탕감 받았으나 탕감해주지 않는 종의 비 유), 부채 삭감(불의한 청지기 비유) 등 구체적인 경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경제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예수의 비유가 글이 아니라 말로 전달되었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청중의 반응을 상상해보는 방법을 적용하여 비유의 핵심 메시지를 이끌어내 보았다. 청중의 반응에 대한 재구성은 2천 년 전 팔레스타 인의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시대 상황에 대한 지식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 연구결과 포도원주인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탕감 받았으나 탕감해주지 않는 종 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는 하나 님의 정의가 무엇 때문에 실현되어야 하는지, 정의의 목적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며, 방법은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하나님이 정의 를 실현하려는 목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세 비유 모두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메시지 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를 보인다.

 

주제어: 하나님의 정의, 예수, 포도원주인의 비유, 탕감, 불의의 청지기 비유

 

1. 들어가는 말

1) 문제제기와 연구목표: 예수와 정의

몇 년 전부터 한국 사회에서 “정의”가 화두로 떠올랐다. 미국 하버드대의 교수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1)가 100만부 이상 팔렸을 뿐만 아니라 여러 대학에서 강연자로 초빙한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에 떠오르는 정의에 대한 관심의 뜨거움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또한 교계의 소식은 2013년 세계 교회협의회 10차 대회가 부산에서 열리게 되었고, 그 주제가 “생명과 평화를 위한 정의”라는 것 이다.2)

 

        1) 마이클 샌델/이창신 역, 『정의란 무엇인가』(서울: 김영사, 2008).

       2) 정확히 말하자면,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이다.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평화를 최고 목표 로 하고 있으며,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정의라고 이해할 때, 이 주제는 기독교의핵심적 사상이며, 한국뿐만 아니라 전 지구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을 예방하고 치유할 수 있는 좋 은 주제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신약성서학을 전공하는 필자에게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 름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예수의 사상을 이야기 할 때 정의가 별로 논의되지 않 았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 라”(마 22: 36-40/막 12:28-34/눅 10: 27)고 가르쳤던 사실이 너무나 강조되어, 정의는 기독교 안에 서 그 자리를 잃고 사랑만 기독교의 핵심적 윤리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다른 모든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에게도 최고의 가치는 성서에 있고, 구약성서에 나오 는 하나님의 활동은 언제나 두 가지 차원에서 언급된다. 사랑(헤세드)와 정의(체덱). 예수는 과연 하 나님의 사랑만 언급하고 하나님의 정의는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 논문은 예수의 메시지나 사상 연구에서 오랫동안 간과되었던 하나님의 정의가 예수가 말한 비유 들을 통해 얼마나 강렬하게 전달되고 있는지 찾아보고 하나님의 정의의 내용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 연구방법: 예수와 비유

1세기 초 예수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여느 학자처럼 글을 쓴 적이 없다. 베 스트셀러는커녕 작은 문서조차도 남긴 적이 없다. 그는 다만 입을 열어 말을 했을 뿐이다. 그가 말하 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희망도 비전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많은 학자들은 예수가 말한 것의 주제를 “하나님나라”라고 하고, 그의 이야기들이 주로 비유였다고 결론 내렸다.3) 하나님나라에 관한 그의 말들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은 청중의 머리에서 잊 히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 혹은 콘서트와 같은 예술적인 작 품들을 통해 감동을 받곤 한다. 어떤 작품은 오래 기억되고 어떤 작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 속에 서 희미해지기도 한다. 예수 시대 사람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하는 데에는 이야 기가 사용하였다. 예수가 비유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관한 비전을 제시한 것에 근거하여 예수는 천재 였다고 극찬을 한 학자가 있다.4) 필자도 이에 동의하는 바이다. 예수는 놀라운 비전을 쉬운 이야기로 전한 천재적인 이야기꾼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기억하는 것, 익히 들었던 말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예수의 말은 그만큼 강력했 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나라에 관해 말할 때, 사람들은 이전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그렸 다. 새로운 세계에서 그들은 경이로워하고 기대에 부풀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처한 현실세계를 이겨 낼 수 있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들에겐 예수 시대와 또 다른 삶의 문제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문 제 해결을 위해 예수의 비유가 힘이 되기도 했다.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소재들과 인물들5)

 

    3) 예수의 비유를 하나님나라에 관한 선포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올바르게 파악한 학자는 다드이다. C.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New York: Charles Schribner's Sons, 1961,1936, 33-34.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해석사는 다음을 창조하시오. 김창락, “하나님나라, 그 기원과 해석의 역사”, 『하나님나라, 그 해석과 실천』(황성규 박사 정년은퇴 기념논문집),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0), 11-57. 같은 책에 실린 김 재성의 논문도 예수의 비유와 하나님나라 주제를 연결시킨 좋은 논문이다. 김재성, “예수의 비유에 나타난 하 나님나라”, op.cit., 79-113. 예수의 선포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특징에 관해서는 필자의 논문 참조. 김판임,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 - 예수의 선포에 나타난 하나님나라 백성의 특권과 의무에 관한 소고”, 「대학과 선 교」17 (2009.12), 9-37(특히 15) 참조.

     4) 스캇/김기석 역,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파주: 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17.

     5) 뷜리발트 뵈젠/황현숙 역, 『예수 시대의 갈릴래아』,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0), 311-337 참조.  

 

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그의 청중이 어떠한 사람들이 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막 4:1-9: 마 13:1-9; 눅 8:5-8), “저절로 자라는 씨 의 비유”(막 4:26-29), “겨자씨의 비유”(막 4:30-32; 마 13:31-32; 눅 3:18-19)등은 그의 청중들이 농사꾼들임을 말해준다. “그물비유”(마 13:47-48)는 그의 청중 중에 어부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예수 당시 농사꾼이나 어부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마 13:44)”에서는 밭을 갈던 농사꾼이 땅 속에서 보물을 발견하고도 발견 하자마자 가지지 못하고 자기 모든 것을 팔아 그 땅을 사기까지 땅 속에 감추어 두는 것으로 보아 자 기 땅을 일구는 농사꾼이 아니라 남의 땅을 부쳐 먹고 사는 소작인임을 알 수 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 20:1-16)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의 청중들 중에는 포도원 주인과 같은 사람 이나 혹 삭개오와 같은 재산가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 외엔 아무 것도 가진 것이라고는 없는, 일용직노동자나 소작인과 같은 극빈자들이다. 이 논문에서는 예수의 비유 중에서 셋을 선택하였다. 이 세 비유들은 모두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경제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 20:1-15), 탕감 받았으나 탕감해주지 않은 종의 비유(마18:23-34),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눅 16:1-8a)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하나님의 정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6) 비유 해석에 있어서 필자는 비유를 듣는 청중을 설정하고, 청중이 예수의 비유 이야기를 들으며 호흡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추론해 보는 방식을 시도해 보았다. 그것은 예수가 비유를 글로 쓴 것이 아니라 말로 행하였다는 점, 즉 구술행위였다는 점에 착안하였다.7)

기록된 글을 읽으며 연구하 는 행위는 기록된 글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화하는 고도의 사유 활동이지만, 듣는 행위는 화자와의 일치감과 즉각적인 깨달음을 얻는 직관적 행위이다.8)

 

        6) 하나님의 정의를 이해하려는 이 논문에서 경제생활과 관련이 있는 비유들이 선택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정의라 하면 정치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활동은 경제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경제와 정의는 종종 별도로 생각되었다. 정의롭지 않게 경제 활동을 하며 살아온 결과 부익부빈익빈 이라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현상을 초래했다. 이 점에 필자는 문제의식을 갖는다. 세 비유를 통해 예수가 말하 는 하나님의 정의란 무엇이며,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지, 마지막으로 정의 실현의 목적 등에 대해 해답을 얻 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7) 예수의 비유 연구를 기록된 글을 읽고 해석하는 것을 넘어 말로 들으며 이해하려는 시도는 스캇과 포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B. B. Scott, Hear then the parable,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9; Richard Q. Ford, The Parables of Jesus - Recovering the Art of Listening, (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1997), 1-10 참조.

      8) 에수가 비유를 글로 기록해서 전달한 것이 아니라 말로 했다는 사실은 필자에게 비유 해석의 관점을 완전히 새롭게 했다. 이러한 안목은 구술성과 문자성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준 월터 옹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월터 J. 옹/ 이기우, 임명진 역,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서울: 문예출판사, 2000.

 

예수의 비유 해석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예수의 사상과 멀어져 간 이유는 예수의 비유를 듣기 보다는 기록된 문서를 읽고 사유하는 연구방법에 천착하였기 때문이다.

 

2. 본론

1) 포도원주인의 비유(마 20:1-15)

     -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예수의 답변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그러나 예수의 진정한 비유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9)

 

      9) 20세기 말 북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예수세미나에서 이 비유는 레드색을 얻어 단연 예수의 비유로서 진 정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R.W.Funk/B.B.Scott/J.B.Butts(de.), The Parables of Jesus: Red Letter Edition , (Califonia: Polebridge Press, 1988), 26, 102-104 참조. 물론 15절의 적용어는 마태의 첨가어이다. 에수의 비유와 이후의 복음서 기자 및 교회의 첨가문에 대한 분석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시도되었고, 15절이 첨가어임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확인된다.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논문 “포도원주인의 비유(마 20:1-15)를 통해서 본 경제정의에 대한 예수의 이해”, 「신학사상」154집(2011/가을), 147-149 참조.  

 

포도원은 예수의 비유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원이 아니라 포도원주인이 하나님나라에 비유되 었다. 다른 비유들에 비해 매우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적이다.10)

 

 1)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이 비유는 3막 극의 드라마처럼 전개되고 있는데, 이 점은 이미 몇몇 학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11)

필자는 듣기 훈련을 위해 청중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상상해본다.12)

 

            10) 하니쉬에 의하면 비유의 등장인물은 둘이나 셋으로 제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W. Harnisch, Gleichniserzaelungen Jesu, (UTB 1343), (Göttingen: Vandenhoeck und Ruprecht, 1985), 29-36.

            11), W. Harnisch, op.cit., 177-179. 하니쉬는 예수의 비유들이 무대공연 작품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도 파악하 였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Gleichnis als Bühnestück”이다. M. Koehnlein, Geichnisse Jesu - vision einer besseren Welt (Stuttgart: Kohlhammer, 2009), 45-59. 국내에서는 최갑종교수가 이 비유를 연극의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보는 시도를 하였다. 최갑종, 『예수님의 비유』, (서울: 이레서원, 2001), 159-164 참조. 최근 독일에서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한 예수에 대해 “시인 예수”라는 타이틀을 즐겨 붙이기도 하는데(가령, 타이센 혹은 콜만 등), 이 논문에서 다루는 비유들이 모두 3막극으로 구성된 단막극이 라는 점에서 본다면, 시인이라기보다 극작가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게르트 타이센, 아네테 메르츠/ 손성현 옮김, 『역사적 예수』(서울: 다산글방, 2001), 460-501; B. Kollmann, "Jesus al jüdischer Gleichnisdichter", in: NTS 50/4(2004), 457-474.

            12) 필자는 이미 이러한 시도를 통해 이 비유를 해석해보았다. 김판임(2011), op.cit., 143-177 참조. 

 

    제1장면)

새벽녘 인력시장 이야기> 아침 해가 채 떠오르지 않은 푸르스름한 새벽녘, 하루 일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인력시장에 포도원 주인이 나타난다.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겠다고 하자 몇 명의 사람이 일을 하겠다고 일어선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 말한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청중> ‘요즘같이 실업자가 많은 때에 오늘 일을 얻은 사람들은 다행이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 는 일용직노동자들인데, 일을 얻은 사람은 하루를 살겠지만 일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할꼬.’

 

제2장면)

장터 이야기> 오전9시 경 하루의 일상이 시작되는 시간, 포도원 주인은 장터로 간다.

새벽 인력시장에서 일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장터에서 서성이고 있다. 포도원 주인은 몇몇 사람들에게 자기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라고 한다. 하루 품삯은 적절하게 주겠다고 한다. 청중> ‘적절한 임금이 얼마나 되는 걸까? 아무렴 어때, 일이 없이 빈둥거리며 노는 것보다야 낫겠 지.’ 이야기> 주인은 세 시간 후인 정오에도 나가 똑같이 일군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인다. 또 세 시간 이 지나자 다시 장터에 나가 똑같이 포도원으로 불러들인다.(반복) 그리고 오후 5시쯤 하루 일을 마감하기에 1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 되었다. 포도원 주인 이 다시 장터에 나간다. 장터에는 하루 일을 얻지 못해 아직도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주인은 그 들에게 묻는다. “너희가 어찌하여 그렇게 빈둥거리고 있느냐?” 그들은 대답한다. “우리들에게 일을 주 는 사람이 없나이다.” 청중> ‘그럼 그렇지. 실업자들이 뭐 일하기 싫어서 일을 안 하는 건가. 아무도 일을 주지 않으니 어 쩔 수 없이 노는 거지. 그 사람들 참 속 시원히 말 잘하네. 우리 현실을 그대로 말해주는군.’ 이야기> 주인은 말한다. “너희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청중>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람. 조금 있으면 해가 질텐데 일을 하라니..... 주인은 도대체 얼마를 주려는 걸까? 여하튼 저 일군들은 포도원에 가서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해야겠지.’

 

제3장면)

포도원 이야기> 해가 저문 시간, 하루 일과가 끝나고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루 임금을 받을 시간이다.

주인 이 관리인에게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임금을 주라고 말한다. 노동자 한 사람마다 한 데나리온씩 받아 간다. 청중> ‘아, 주인의 마음은 바로 마지막에 부른 저 사람에게도 하루 임금을 주고 싶었던 거구나. 감 사하기 짝이 없다. 바로 그래. 최소한 가족들 입에 풀칠이나 하려면 적어도 한 데나리온은 있어야 하 지 않겠어.’ 이야기>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씩 받아가는 모습을 보자 새벽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은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으로 계약하고 포도원에 일하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네들은 좀 더 쳐 주지 않을까 기 대한다. 그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 지급되자 그들은 항의한다. “맨 나중에 온 사람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우리와 똑같이 지불합니까?” 청중> 당황! ‘노동자들이 어떻게 주인에게 대들 수가 있지? 간도 크다. 주인이 일을 주지 않았다면, 하루를 공치고 아무 것도 얻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이유를 들어보니 그럴 듯도 하군. 나중 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줄 정도로 관대하신 주인이라면 하루 종일 일한 노동자들에게는 좀 더 생각해 주어 두 세 데나리온 정도 주면 좋지 않았을까? 이야기> 그러나 이러한 불평은 포도원 주인에게 통하지 않았다. 주인은 말한다. “나는 당신을 부당 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돌 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 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청중> ‘그래. 맞아. 애당초 하루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라고 일하기 전에 이미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 나? 주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 새벽부터 와서 종일 일한 사람이나 저녁 다 되어 와서 적게 일한 사람 이나 주인이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다. 늦은 오후 시간에 노동자들을 불러 일할 기 회를 줄 때에 이미 주인은 그들에게 하루 품삯을 주고자 한 것이다. 하루 품삯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에게 최소한의 것이라도 제공하고자 하는 주인의 마음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2) 비유 해석

많은 학자들이 이 비유를 해석했다.

초기 교부들과 중세 학자들에 의해 알레고리적 해석이 애호되었고, 알레고리적 해석이 배격된 이후 지금까지 가장 지배적인 해석은 예레미아스가 이끌어왔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 비유를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도 제시할 수 없는 소외된 자들, 즉 죄인 들을 값없이 용서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이 비유는 적대자들 을 향한 복음의 변호이다: “하나님은 전혀 자격이 없는 죄인들과 세리들도 그의 구원에 동참케 한다. 그는 마지막 날에 이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실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다.”13) 하나님 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이 비유가 유대교의 보응사상에 대결하는 것 으로 해석해왔다. 마태복음 주석을 쓴 루츠,14) 한국의 비유 해석가 김득중,15) 김창락16)의 해석도 예레미아스의 해석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13) 예레미아스/허혁 역, 『예수의 비유』(왜관: 분도출판사, 1974), 132.

        14) U. Luz,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III(EKK 1/3),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97), 150.

        15) 김득중, 『복음서의 비유들』, (서울: 컨콜디아사, 1987), 196. “그는 세리와 죄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에 참 여할 수 있게 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그들의 공로와 자격 때문이 아니었다.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그들 을 그렇게 대하실 것이다.”

        16) 김창락, 『귀로 보는 비유의 세계』,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7), 87.

 

이 비유에서 예레미아스가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다고 보는 점에는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나를 악하다 하느냐!”는 강한 호령에서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죄 인들과 세리들을 구원에 동참케 하신다는 해석은 이 비유와 상관이 없다.

이러한 오류는 그가 전제로 가졌던 바울 신학적 입장에서 도출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비유에서 그 어떤 것도 죄인을 연상시키는 것은 없다.

하루 종일 일을 얻지 못하고 장터에서 빈둥거리다가 하루해가 지기 전에 일을 얻게 되어 1시간 밖에 일하지 못한 노동자가 게으르거나 방탕한 죄인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일을 얻지 못했을 뿐이다. 쇼트로프는 이 비유가 실직이나 질병을 당했을 때 사회보장이 전혀 없는 일용직 노동자의 일상을 보여준다고 파악하였다. 새벽부터 종일토록 일한 노동자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과 같은 품삯을 받게 되자 주인에게 항의한다.

이들의 항의에 대해 주인은 강한 질책을 하는데, 이를 근 거로 하여 쇼트로프는 이 비유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공동체 안에서 죄인들과 비죄인들 사이의 차별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하여 “마 20:1-15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과 공격이 아니라 그들을 예수의 추종자들의 편에 서도록, 가난한 자와 세리와 죄인들과 연대하도록 하려는 시도”라고 해석한다.17)

피오렌자도 유사한 견해를 피력한다. “예수의 비유는 그의 청자들로 하여금, 하 나님의 자비로우신 선하심이 우리 모두 가운데, 의인과 죄인,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바리새 인과 예수의 제자 사이에 동등성과 연대성을 세우신다는 점을 인식하도록 자극한다.”18)

이들 여성신학자들은 이 비유에서 다양한 인간들의 동등성과 연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예레미아스보 다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지만, 죄인과 비죄인(혹은 의인)이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예레미아스 의 잘못된 전제를 기초로 하고 있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최근 한국의 여성신학자 김경희는 이 비유에서 죄인과 비죄인이란 표현이 사용되는 것의 문제를 지적하며, 이 비유는 하나님나라가 지향하는 바,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평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였다.19)

이 비유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는 학자들은 이 비유에서 포도원주인의 태도에 관한 것들이다.

가령 헤어초그는 이 비유에서 포도원주인은 기준 없이 자기 멋대로 같은 품삯을 주는 폭군같은 존재라고 비난하고 있으며,20)

국내 김선정은 이 비유의 주인은 맨 나중에 와서 일하게 된 품꾼에게만 자비한 주인이지, 새벽부터 와서 일한 일꾼에겐 전혀 자비롭지 못했다고 본다.21)

크로산도 같은 입장이다. “주인이 마지막 고용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다음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비례해서 임금을 인상했더라면 그는 선하고 자비로웠을 것이다.”22)

크로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포도 수확철이라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하여 이른 새벽에 충분한 노동자를 고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도원주인은 구두 쇠라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적은 노동자를 고용하였고, 그리하여 일군들을 고용하기 위해 자주 장 터에 나가야 했던 점을 지적하였다.23)

 

       17) L. Schottroff, “Die Güte Gottes und die Solidarität von Menschen: Das Gleichnis von den Arbeitern im Weinberg”, Der Gott der kleinen Leute Bd 2, ed. W. Schottroff, W. Stegemann, (München: Kaiser, 1979), 71-93 특히 71-79 참조.

      18) E. S. Fiorenza, In Memory of Her. A Feminist Theological Reconstruction of Christian Origins (New York: Crossroad, 1983), 132.

      19) 김경희, “예수의 하느님나라 선포를 통해 본 평등의 비전”, 「신학사상」150집(2010/가을), 37-81.

      20) W. R. Herzog II, Parables as Subversive Speech: Jesus as Pedagogue of the Oppressed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94).

      21) 김선정, “포도원주인의 두 가지 길- 마태복음 20:1-16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 「신약논단」 13/4(2006 겨 울), 785-810.

       22) J.D. Crossan, In Parables. The Challenge of the Historical Jesus, (New York: Harper & Row, 1973), 109-112.

       23) 크로산/김준우 역, 『비유의 위력』, (파주: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145-149.

 

이들은 모두 자신도 모르게 자본주의적 질서에 매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면서 비유의 핵심에서 벗어난다.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활동을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각 사람에게 계약된 금액보다 더 주려는 데 있 었던 것이 아니다.

주인의 처사에 불만을 표현한 일군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불평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한 경 우들이 많았지만,24) 필자는 이 비유의 주인공이 포도원 품꾼들이 아니라 포도원주인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24) 가령 김득중, 『복음서의 해석과 설교』(서울: 성서연구사, 1999), 173-188. 이 책에서 그는 “어느 고용주와 노동자들의 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이고 처음부터 일한 노동자들의 불평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여, “일과 노동을 대가와 보수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었 다”는 것을 지적하고, “일한다는 자체에 기뻐하고 만족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설교하는 식으로 빠졌다. 최갑종도 마찬가지로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라고 제목을 붙이고, 불평은 크리스찬의 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도덕적 가르침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최갑종, op.cit., 155-174.

 

즉, 이 주인의 행위가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주인은 하루에 한 번만 아니라 여러 번 일군들을 불러 포도원으로 보냈으며, 심지어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에도 일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과 대화한 후 “불쌍히 여겨” 자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일자리를 준 다. 그리고 모두 동일한 임금을 준다. 하루 임금은 노동자의 가족이 하루 이틀 먹고 살 수 있게 해주 는 기본 급료에 해당하는 셈이다. 주인은 이것을 주고 싶어서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한 것이다. 주인의 마음은 일을 얻지 못해 하루 종일 놀고 있어야 했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3) 비유의 메시지: 하나님의 정의란 무엇인가

 

탁월한 관찰력으로 이 비유를 하나님의 정의라는 주제와 연결시킨 학자는 스캇이다.

그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유의 주제는 하 나님나라의 속성이다. 그것은 일과 급료로 나타났다. 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 들을 살리기 위해” 작용한다. 즉, 포도원주인이 사람을 불러 일을 시킬 때에는 - 새벽에 만나 일을 주든, 아니면 오후 늦은 시간에 만나 일을 주든 - 얼마나 적은 임금을 주어 이윤을 최대화할까와 같 은 현대 경제학 원론의 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경제정의는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 이 목적이 아니라 그 나라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려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에 근거하 여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정의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작용하는 원리라고.

 

2) 탕감 받았으나 탕감해주지 않은 종의 비유(마 18:23-34)

    - 정의란 어떻게 실현하는가에 대한 예수의 답변

 

이 비유도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이다. 마태는 자신의 목회적 필요에 의해 이 비유를 예수의 다 섯 가지 설교 중 네 번째인 교회에 관한 설교(18:1-35)의 마지막에 위치 설정을 하고 있다.25)

 

          25) 이 비유가 마태의 철저한 편집의 틀 안에 있고 주제조차도 마태에게 적절하다는 인상 때문에 예수의 비유가 아니라 마태의 창작이라는 의심을 받아 왔다. 김득중,『복음서의 비유들』(서울: 컨콜디아사, 1988), 188 참 조. 김득중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 비유가 역사적 예수에게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마태의 창작일 것에 대한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자들을 대변하고 있다. 첫째 이 비유가 정경이나 외경에 병행 구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둘째 비유대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문학적으로 너무나 발전된 형태를 가지고 있 으며 비유의 서론과 결론 등 마태적인 특징이 매우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비유를 유발시키는 역할을 하는 용 서에 관한 담론(21-22절)과 조건부의 협박성 결어(35절)을 제외하면, “천국은 ~와 같으니”에서 비유가 시작 하고 있다고 보면 예수의 비유로서 특징이 많은 비유이다. 물론 마태는 21-22절과 35절을 비유의 틀로 만들 어 예수의 비유를 공동체 유지를 위해 서로 용서하라는 마태 자신의 메시지를 위해 사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23-34절로 이어지는 비유 자체로만 보면 하나님나라 백성의 행해야 할 일을 주제로 하는 예 수의 사상에 적합하다. 김득중과 달리 이 비유를 예수의 진정한 비유로 보는 최갑종은 아쉽게도 마태의 틀과  예수의 비유를 구별하지 못하고 마태가 전하는 범위 내에서 예수의 비유를 읽고 있다. 마태의 문맥에서 이 비 유를 읽으면, 용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비유를 예화로 사용한 것이 되고, 비유 끝에 적용어는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비유에 나오는 “탕감받았다가 다시 취소당하는 종”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무효화되리라는 경고성 메시지가 된다. 그리고 비유의 틀 안에서 읽고 있기 때문에 최갑종은 이 비유의 제목을 “용서하지 않은 종의 비유”로 설정하였다. 최갑종, op.cit., 135-153 참조. 

 

마태는 “몇 번이나 형제를 용서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과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이 비유의 앞 부분(마 18: 21-22)에 위치케 하고, 비유를 마친 후 비유에 대한 적용어로 “너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도 그와 같이 하리라(마 18:35)”는 말로써 비유의 틀을 제공하여 비유의 주제를 “무한한 용서”라는 주제에 대한 예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마태가 만든 비유의 틀을 제외하면, 23절로 시작하는 비유는 예수의 진정한 비유로서 손색이 없고, 마태가 만든 틀로부터 자유롭게 읽는다면 예 수의 진정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26)

 

        26) 북미지역에서 있었던 예수 세미나의 투표 결과 이 비유는 핑크빛을 얻었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예수의 진정 한 비유로 거의 의심치 않는 것으로 여겨 빨간 색을 받은 비유로는 누룩 비유,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 겨자 씨 비유, 포도원 일군의 비유 등이 있고, 핑크 빛은 많은 학자들이 긍정적으로 보고 소수의 반대자를 포함한 경우이다. R. W. Funk/ B.B Scott/ J.B. Butts, op.cit., 26, 102-103 참조. 버나드 브랜든 스캇/김기석 역, op.cit., 32. 21-22절의 베드로와 예수의 문답과 35절의 적용문을 마태의 작품으로 평가하고 23-34절까지 예수의 진정한 비유로 보는 국내 학자로는 정양모와 김창락이 있다. 정양모, 『공관복음서의 비유』(서울: 성 서와 함께, 2000), 136-137. 그러나 김창락이 “용서받았으니 용서해야 한다”라고 제목을 붙이고, 탕감이라는 구체적 경제행위를 용서라는 종교적 이미지로 변환시켜 마태의 의도 안에서 해석해 버린 것은 아쉬운 일이다. 김창락, op.cit., 341-349 참조

 

 

(1)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이 비유도 3막극의 드라마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27)

 

        27) 이 비유가 3막 극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관찰한 학자들이 많다. 가령, J. D. Crossan(1974), op.cit., 105-107; W. Harnisch, ,op.cit., 255-259; Richard Q. Ford, op.cit., 47-49. 국내 학자로는 최갑종, op.cit., 139-141. 

 

23절은 비유의 서두로서 천국은 빚을 청산 하려는 임금에게 비유되고 있다.

 

제1장면)

임금이 있는 왕궁 이야기> 임금과 빚진 자(종)의 대면이 이루어지고 있다. 종이 빚진 금액은 일만 데나리온이다.

청중> ‘일만 달란트가 얼마야? 상상할 수도 없는 액수인데. 세상에 그 큰 빚을 어떻게 지게 된 거 지? 그러나 저러나 그 많은 빚을 어떻게 갚나?’ 이야기> 사실 그 종은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갚을 수가 없다. 주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을 것을 독촉한다. “너 자신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한다.

청중> ‘자기 자신을 팔고 아내와 자식, 모든 것을 판다고 해도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갚을 수가 있을까?’ 이야기> 그 종은 사실 갚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못 갚겠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못 갚 겠다는 말은 주인의 노여움만 키울 뿐이다. 그래서 그는 엎드려 주인에게 사정하는 체한다. “내게 참 으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에게 모두 갚겠나이다.”

청중> ‘암, 그래야지. 갚을 수 있건 없건 갚겠다는 의지가 있음을 말해야지.’ 이야기>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청중> ‘세상에, 그런 일이 . . . 대단한 주인이군. 그 많은 빚을 탕감하여 주다니.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어. 빚을 갚을 수 없는 형편인데. 그렇다고 죽여야겠어? 죽일 수도 없고 도로 받을 수도 없다면? 탕감밖엔 없지. 아무튼 탕감을 받은 사람은 앞으로 잘 살아야겠네!’

 

 제2장면)

왕궁에서 마을로 가는 길 이야기> 일만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등장한다.

길을 가는 도중에 자신에게 100 데나 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만난다. 그를 붙들어 목을 조르며 “네가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고 말한다.

청중> ‘100데나리온이라? 이 빚은 생활고로 인해 생긴 빚이군. 그 정도 빚은 우리들도 다 있지. 좀 참고 기다려 달라고 해. 절대로 떼어먹지 않겠다고 말이지. 언제가 될 진 몰라도 벌이가 나아지면 꼭 갚겠다고 말이야.’ 이야기> 그러자 빚진 동료가 엎드려 사정을 한다. “내게 참으소서.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갚으리이 다.”

청중> ‘그래야지. 잘했어. 지금은 형편이 어려워서 빚을 지고 있지만, 형편이 나아져서 일거리가 좀 많아지면 갚을 수 있지 않겠어! ’ 이야기> 그러나 그는 들어주지 않고 갚을 때까지 그를 옥에 가두었다.

청중> ‘에구 저런, 자기는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 어쩜 저렇게도 모질지? 백 데나리온의 빚이야 정말 좀 기다려주면 갚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빚을 못 갚는다고 감옥에 처넣다니, 해도 해 도 너무 하군. 사람이 먹고 살아야 빚도 갚고 할 것 아니겠어!’ 이야기> 그들 주변에 있던 여러 동료들이 이 일을 보고 민망히 여겼다.

청중> ‘그 사람이 하는 짓을 보고 민망히 여긴 것은 우리만이 아니군. 자기는 그 어마어마하게 큰 빚 을 탕감 받으면서, 그 얼마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에겐 너무 가혹했어.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러나 저러나 생계형 빚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과 그 가족은 어떻게 살지?’

 

제3장면)

제1막과 같은 장소 이야기> 100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갚겠다고 하는데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감옥에 들여보 낸 일을 민망하게 여긴 동료들이 주인에게 가서 이 일에 대해 고한다.

이야기를 들은 주인은 다시 그 종을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말한다.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네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그 러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청중> ‘그래 맞아. 그만큼 받았으면, 좀 베풀어야 할 게 아닌가? 자기는 그렇게 큰 빚을 탕감을 받 았으면서 다른 동료가 먹고 살기 위해 조금 빚진 것은 그렇게 악랄하게 받아먹으려고 하는 걸까?’ 이야기> 그 주인은 이렇게 분노를 표출하고 모든 빚이 청산될 때까지 그를 옥졸에게 맡겨 두었다.

청중> ‘그 종이란 사람, 모질게 굴더니 도리어 당하는군. 은혜를 받았다면, 받은 만큼 베풀었어야 할 게 아닌가! 베풀지 않으니 받은 것을 도로 빼앗기는군. 역시 사람은 선을 베풀면서 살아야 해.’

 

(2) 비유 해석

 

마태가 “용서”라는 주제로 전개되었던 베드로와 예수의 대화(마 18:21-22)를 비유 앞에 연결시키 고, 비유 끝에 적용문을 첨가함으로써 예수의 비유는 한없이 용서하라 가르침을 위한 예화로 변질되 었다. 용서란 주제는 마태 공동체를 비롯한 모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생긴 갈등과 분열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를 자신의 공동체에 필요한 메시지로 엮으려는 마태의 작업에서 서툰 모습을 발 견하게 된다. 마 18:21-22에서 베드로와 예수의 대화에서는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법을 일흔 번 까지 라도 용서하라고 함으로써 무한 용서를 당부했다면, 이 비유는 이 가르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 한 번 빚을 탕감해 준 사람을, 그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다시 불러 그 사람이 동료에게 행한 것과 똑같이 보복해주는 이 비유의 내용으로서 무한 용서하라는 가르침에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35절에 “그러므로 만일 너희들도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 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적용어를 첨가함으로써 용서의 가르침 은 위협의 말로 성격이 달라졌다.

이 비유의 컨텍스트를 용서라는 주제로 만든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마태의 작업으로 말미암아 비유 안에 담긴 탕감이란 경제적 주제는 곧바로 “용서”라는 일반윤리의 주제로 변질되었다. 예수 자신의 비유와 마태가 만든 비유의 틀을 구분하는 학자들조차 용서라는 주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 다.28)

물론 용서라는 말과 탕감이란 말은 헬라어에서 동일한 어휘가 사용되지만, 탕감이라고 할 때는 경제적인 것이 직결되고, 용서라고 할 때는 경제적인 면을 넘어 일반적인 윤리 차원으로 넘어가면서 경제적 의미가 상실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통해 전하려는 예수의 의도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유 내용이 전적으 로 경제적인 것, 그것도 탕감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 비유는 과장적인 내용으로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대조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즉,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이라는 빚의 규모의 대조,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과 백 데나리온의 빚으로 감 옥에 넣는 것으로 나타나는 채무자에 대한 채권자의 태도의 대조, 마지막으로 탕감과 탕감 취소의 대 조이다. 대조 기법은 청중들에게 오랫동안 기억을 돕는 방법이다. 먼저 빚의 규모부터 살펴보자. 일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다. 예수 당시 일반 유대 가정은 200-240 데나리온 정도가 일 년 수입이었다. 당시 왕으로 있던 헤롯대왕의 일 년 수입이 900달란트 정도였다고 하니29) 일만 달란트란 갈릴리의 농부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액수를 가리킨다 고 하겠다. 일만 달란트란 엄밀히 계산하면 6천만 데나리온, 즉 당시 일용직노동자가 일 년에 버는 것이 200 데나리온이라고 할 때 30만 년을 쓰지 않고 꼬박 모아야만 가질 수 있는 금액인 것이다. 이 금액을 듣는 순간 청중은 헤아릴 수 없는 금액, 어마어마한 금액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된다. 몇 백 만원도 없는 사람이 수백 조원의 금액을 듣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리라. 일만 달란트는 갚을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30)

왕은 빚진 자에게 그 자신과 아내, 자식들과 소유물을 다 팔아 빚을 갚으라고 호령을 한다. 아내를 파는 것은 유대법에 금지되어 있었고, 예수 당시 노예의 가격은 500-2000 데나리온 정도였다고 한다.31)

그러므로 아들 대여섯 명을 다 판다 해도 한두 달란트는 갚 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만 달란트는 죽었다 깨어나도 갚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제1장면의 등장인물을 임금과 종으로 설정한 것은 아마도 빚의 규모에 어울리게 하기 위해서인 것 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주인과 종 사이에서는 그 정도의 빚을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종이라 고 표현되었지만, 그는 임금을 상대하는 귀족 내지 국가 고위 관리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임금은 그가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탕감을 해준다. “불쌍히 여겨”라는 표현에 관심을 가 질 필요가 있다.32)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채무자가 자력으로는 빚을 갚고 자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그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탕감의 이 유는 오직 하나, 그가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빚을 갚을 수 없을 때 사람은 노예가 된다.33)

 

         28) L. Schottroff, op.cit., 196-203. 김창락, op.cit. 341-349.

         29) Josephus, Jewish Antiquites, 17.11.4.

        30) 스캇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서 일만 달란트가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었다(Jewish Antiquites, 14.4.5).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시리아가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전한 후 로마가 이스라엘 에게 일만 달란트 이상의 배상금을 거둬갔다는 것이다. 스캇/김기석 역, op.cit., 165 참조.

         31) 예레미아스/허혁 역, op.cit., 204. 32) 불쌍히 여기다(σπλαγχνιζομαι)라는 어휘는 복음서에서 12번 사용되나. 주로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성품, 죽 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창조주의 의지와 관련해서 사용되고 있다.

         33) 인류 역사에서 노에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전쟁에서 패망했을 때 전쟁노예와 빚을 갚을 수 없을 때 빚노예이다. 이스라엘이 430년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한 것은 가뭄으로 인해 먹을 것이 부족하자 살기 위해 이집트에서 곡식을 꾸어 먹다가 결국 갚을 수 없을 만큼 빚이 늘어났기 때문에 일어난 역사이다.  

 

아내와 자식들을 다 팔아 빚을 갚으라는 것은 바로 빚을 진 채무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 노예가 되는 시스템을 말하고 있다.

빚을 탕감해주어야만 채무자는 정상적으로 살 수 있다.

기존의 많은 학자들은 이 비유에서 일만 달란 트의 빚과 백 데나리온의 빚은 대조라는 이야기 기법으로 청자들로 하여금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기는 것으로 해석해왔다. 임금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은 하나님나라에서만 일어나지, 실제로 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비유에서 임금은 곧바로 하나님과 동일시되었다. 최근 스캇을 비롯해서 몇 명 학자들은 이 비유 이야기가 과장된 이야기만이 아니라 당시 로마가 이 스라엘로부터 거둬간 전쟁배상금과 같은 일로서 청중들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일로 평가하고자 한 다.34)

현대 사회에서도 유사한 일을 언급할 수 있는데, 가령 인천시장이나 서울시장이 거대한 사업계 획을 제대로 하지 못해 빚만 늘어난 경우라든가, 큰 사업에 실패한 사업가가 파산 신청을 하고 난 후에 조치해주는 것과 유사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업을 잘못 운영해서 상상하지 못할 만큼 의 큰 빚을 지어 못 갚을 정도라 해도 죽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죽인다 한들, 그 엄청난 빚을 되받을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갚을 수 있을 만한 소액의 빚일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갚으라고 윽박을 지르며 감옥에 넣을 것이 아니라 갚을 수 있도록 일자리를 알아봐주는 것이 올바른 일, 정의로운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스캇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하는 왕의 이야기를 희년 모티브로 해석한다. 왕의 개념에서 메시 아를 유추해내고, 메시아가 와서 막대한 빚의 탕감이라는 엄청난 일을 행하여도, 그 종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희년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왕의 최종적인 행동은 그 희망을 산산이 깨 뜨리고 만다”고 지적하면서 이 비유가 메시아적 왕권에 대한 대중적인 관념에 도전을 하고 있다고 본 다. 즉. 자신의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고도 동료의 소액의 빚을 탕감하지 않은 무자비한 종의 행동에 대해 주변 동료들이 보고 처벌을 원하였고, 그래서 왕에게 고해 바쳐 결국 왕은 그를 형리에게 넘김 으로써 이야기가 마감되는데, 이 비유 이야기를 듣는 청중도 그 동료 종들이 분개한 것과 똑같이 분 개함으로써 결국은 첫 번째 종이 한 짓과 똑같은 짓을 한 셈이고, 따라서 이 비유는 모든 사람이 빠 져 있는 악, 구조적인 악을 간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35)

 

     34) 스캇/김기석 역, op.cit., 162-167.

     35) Op.cit., 169-172 - 12 - 

 

스캇이 이 비유를 탕감이란 주제 때문에 메 시아나 희년과 관련시킨 것은 매력적인 일이지만, 이 비유가 50년에 한 번만 일어날 일로서 제시되었 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동료 종들이 분개한 것처럼 청중도 똑같이 분개했으리라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청중은 무자비한 동료에 대한 분개보다는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동정의 마음이 강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비유가 구조적인 악을 고발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큰 비약인 것 같다. 앞서 비유 다시 듣기에서 추론하였듯이 이 비유를 듣는 청중은 분개해서 그 무자비한 종을 처 벌해줄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그 무자비한 종에 의해 감옥에 갇힌 종이 풀려나 일상생활에 복귀할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가 희년의 희망을 깨뜨리고 말았다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담았다기 보다는 역설 적으로 네가 탕감을 받았다면, 타인의 빚을 탕감해주라는 명확하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는 마태복음 7장 12절에 전하는 예수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 비유의 메시지: 정의는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의라 하면, 법을 먼저 떠올리고, 법대로 하면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빚진 자가 갚지 못하면 감옥에 가두어 놓는 것이 정의의 실현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정 의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어 놓는다. 100 데나리온의 빚이란 거의 생계형 빚일 가능성이 높다. 생계형 빚을 진 사람에게 빚 독촉하고 감옥에 가두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필자는 이 비유의 해석의 결정적 단서를 33절에서 찾았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불쌍히 여김은 이 곳 외에 복음서에서 11번 사용된다. 예수가 병자를 치유할 때(막 1:41), 급식기적을 일으킬 때(막 6:34; 마 14:14; 막 8:2; 마 15:32), 귀신축출 기적을 일으킬 때(막 9:22; 마 9:36; 마 20:34)나 기적을 일으킬 때(눅 7:13) 예수의 마음을 표현했 으며, 그 외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3)와 돌아온 탕자의 비유(눅 15:20)에서도 나오는 표현이다. 예수의 행위를 묘사하는 곳에서나 예수가 전하는 비유에서나 불쌍히 여김은 ‘그대로 두면 죽겠구 나’ 하는 판단과 함께 살리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태도로 연결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동인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불쌍히 여긴다는 것도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만 달란트라는 거대한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빚을 탕감해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자신에게 소액의 빚을 진 사람에게 가 혹하게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 쉽게 말해서 받은 대로 행할 것을 가르치는 비유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비유는 하나님나라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본다.

즉,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그대로 베풀 때에, 그리하여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해줄 때에 실현된다는 것이다.

 

3) 청지기 비유(눅 16:1-8a)

     - 정의의 실현 목적에 대한 예수의 답변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그렇지만 예수의 진정한 비유로 의심되지는 않는다.

율리혀가 이 비유가 매우 난해하다고 지적한 이래로36) 대다수의 학자들이 해석하기 매우 어려운 예수의 비유로 손꼽고 있다.

 

        36) A. Jülicher, Die Gleichnisreden Jesu, (Tübingen: Mohr, 1910), 495. - 13 -       

 

청지기가 빚진 자들의 빚을 임의로 삭감해주는 내용의 이 비유도 3막극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1)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제1장면)

주인의 집 이야기> 청지기를 가진 부자가 있다.

청중> ‘청지기를 두고 재산을 관리할 정도라면 정말 대단한 부자로군.’ 이야기> 주인은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리하여 청지기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청지기를 부른다.

청중>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다는 소문은 누가 낸 걸까? 주인이 빚을 진 사람들에게 직접 따져 물었던 것일까? 빚진 사람들이 이자도 꼬박꼬박 잘 내는데, 안 받았다고 주인이 직접 문책하다가 알게 된 것일까? 중간에 관리자가 가로채는 경우가 많지.’ 이야기>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 소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해고를 선언하고,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정리하도록 명한다.

청중> ‘저런! 우리가 주인에게 빚진 것과 이자 등 제대로 드렸다는 뜻에서 말한 거였는데, 청지기가 해고를 당하게 되었구먼.’

 

제2장면)

청지기 자신의 집 이야기> 청지기가 해고 후의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한다.

‘아, 이제 해고되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지금까지 청지기 일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다른 소작인들처럼 땅을 파면서 살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청중> ‘청지기도 고민할 때가 있군. 그동안 우리들에게서 탈취하여 모아둔 것도 있을텐데...’ 이야기> 청지기는 고민 끝에 해법이 떠올라 무릎을 치며 말한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군.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그래. 이렇게 하면 내가 실직을 하더라도, 사람들이 나를 자신들의 집으 로 영접해줄 거야!’ 청중> ‘청지기가 생각하는 게 뭐지? 우리가 낼 거 다 내도 주인이 와서 빚 갚으라고 하는 거 보면, 청지기가 중간에서 빼돌렸던 사람인데, 이젠 무슨 일을 하려나!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사람인데.’

 

제3장면)

청지기의 사무실. 이야기> 청지기가 빚진 사람들을 호출하고 빚진 자에게 묻는다.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냐고. 기름 백 말이라고 하자 절반을 삭감하여 증서에 오십이라 쓰라고 한다. (빚진 자의 반응을 언 급되지 않는다.)

청중>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청지기가 생각한 방법이 바로 이거였나? 빚진 자들에게 빚의 일부 를 삭감해주는 것, 그런데 절반이나? 이거 대단한 일이군. 사실 기름 백 말의 빚이란 너무 어마어마해서 갚을 엄두가 나지 않았을텐데, 빚을 삭감해주니 그 마음을 생각해서 갚도록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겠네.’ 이야기> 청지기가 다른 빚진 이에게 묻는다. 너는 주인에게 얼마나 빚을 졌느냐고. 밀 백석이라고 하자 증서에 팔십이라 쓰라고 한다. 밀은 20%를 삭감해준 것이다.

청중> ‘청지기가 대단한 결심을 했군, 그동안 사람들의 빚을 부풀려 괴롭히더니, 이제 회개했나? 어 쨌든 고맙군. 이제 빚에 대한 부담은 좀 덜어진 셈이네.’ 이야기> 주인이 청지기가 일처리 하는 것을 보고 칭찬하였다.

청중> ‘역시 주인의 마음은 이거야. 사람들이 빚에 허덕이며 인생살이에 지쳐 있는데, 주인은 사람 들이 빚을 갚으라고 혹독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 삭감을 해서라 도 말이지.’

 

(2) 비유 해설

 

많은 학자들이 이 비유를 이해하기 매우 난해한 비유들 중의 하나라고 평가한다.37) 특히 8절에 언 급된 청지기에 대한 주인의 칭찬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즉,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여 해고령을 받은 청지기가 결국 회계 문서를 조작하여 주인의 재산을 더욱 축소시켰는데, 그러한 불의의 청지기 를 주인이 칭찬한 점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8절에 나오는 주인이 비유 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이 비유를 전하는 예수로 보기도 한다.38)

 

       37) J.S. Kloppenberg, "The Dishonored Master (Luke 16:1-8a)", Bib 70(1989), 474. W.R. Herzog, Parables as Subversive Speech: Jesus as Pedagogue of the Oppressed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94), 233. 최갑종, op.cit., 233-243. F. Bovon, Das Evangelium nach Lukas (Lk 15:1-19:27), EKK III/3(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2001), 82-85 참조.

      38) 가령, 예레미아스, op.cit, 30-33. 최근 한국에서 이 문제를 다룬 민경식도 이 비유는 7절에서 마감되고 8절 은 비유를 마친 후 예수의 말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민경식,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이는 누구인가: 누가복음 16장 8절의 퀴리오스 번역에 대한 고찰”, 「캐논 앤 컬쳐」제1권1호(2007), 237-267; “누가 불의 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는가. 누가복음 16:8”, 구제홍, 김선정 외,『예수의 비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221-246. 

 

최근 비유 연구에 헌신한 스캇은 이 비유가 어렵게 여겨진 것은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이 비유에 접 근할 때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전제하기 때문임을 지적하였다. 이 비유 에서 주인은 하나님, 그리고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또한 해석자들은 주인의 입장 에 서서 주인을 청지기에 의해 횡령당한 사람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올바른 지적을 한다.39)

즉, 이 비유의 해석의 곤란은 주인의 재산을 횡령하여 해고된 청지기가 자신을 해고한 주인에 대해 앙갚 음하는 사기꾼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주인이 칭찬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 집중되었 다. 청지기에 대한 칭찬을 이해하려는 몇몇 학자들은 이 청지기가 기름 50%, 밀 20%를 삭감한 것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에게 돌아올 몫을 포기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칭찬받았다고 해석하기도 하지 만, 이 또한 입증할 길이 없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였듯이 8절이 비유에 속하지 않는다면 비 유가 이야기를 하다만 듯한,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인상을 준다. 그러므로 필자는 8a절까지 비 유로 보고자 한다. 물론 이 비유가 현재 학자들에게만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비유가 전수되던 아주 초기 시절부터 어 렵게 여져졌다는 사실은 이 비유 끝에 연결된 여러 적용문들(8a-13절)을 보더라도 확인된다.40)

예레미아스는 청지기의 민첩성을 비유의 핵심으로 보고, 종말론적 위기에 처해서 얼마나 빠르게 대 처하느냐를 칭찬한 것으로 해석하였고,41) 최근 클로펜버그는 명예와 수치라는 사회학적 개념을 사용 하여 주인이 청지기를 통해 수치보다는 명예를 얻는 방법을 택했다는 식으로 해석하였다.42)

필자는 이 비유에서 핵심적인 부분이자 동시에 칭찬의 내용이 청지기의 위기 탈출의 신속성보다는 위기 탈출 을 위해 행한 행위, 즉, 빚의 삭감에 있다고 본다. 청지기는 자신의 위기를 맞이하여 자신의 위기 해 결방안으로 빚진 자들의 빚을 삭감하였고, 바로 이 행위를 주인이 칭찬한 것이다.43)

기존의 많은 학자들이 보아왔듯이 청지기가 행한 빚의 삭감을 문서 조작이라는 사기행각으로 본다 면 이 비유는 해석하기 난해하기 짝이 없다. 세상 사람들에겐 불법에 해당되는 것이 예수에겐 하나님 의 법에 합당하고,44) 세상에서 불의라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정의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능케 하는 비유이다.

 

      39) 스캇/김기석 역, op.cit.,, 142-143.

      40) 8b-13절까지 비유의 적용문들이 열거되어 있다. 김창락교수가 지적하듯이 전승과정에서 차례로 생겨난 것이 다. 김창락, op.cit., 257-259 참조. 이렇게 많은 적용문이 이어진 것은 처음 적용문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다른 식으로 이 비유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이고, 이는 이 비유가 이해하기 어려웠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41) 예레미아스는 이 비유를 “위기의 비유”로 보고 이 비유에서 청지기가 칭찬받은 것은 위기 대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범이야기로 본다. “너희는 여기서 배우라 너희는 지금 목에 칼이 놓여 있는 생존의 파국으 로 위협당하고 있는 이 재산 관리인과 똑같은 위치에 놓여 있다. 그러나 너희를 위협하는, 아니 너희가 이미 그 한가운데 빠져 있는 이 위기는 비길 데 없이 무서운 것이다. 이 사람은 지혜로웠다. 즉 그는 이 위기일발 의 상황을 인식했다. 그는 체념한 채 수수방관하지 않고 위협적인 파멸이 그를 덮치기 전에 마지막 순간에 행 동했다” 예레미아스/허혁역, op.cit., 176.

     42) J.S. Kloppenberg,op.cit., 478-480.

     43) 동일한 의견은 다음과 같은 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김창락, op.cit., 261 참조.

     44) 가령 안식일법에 대한 예수의 생각. 이에 관해서는 김판임, “안식일법에 대한 쿰란공동체와 예수의 입장 비 교”, 「신학연구」58(2011 여름), 39-58참조.  

 

 

청지기가 행한 방법, 즉 빚 문서를 새롭게 조정하는 것이 정의롭지 못했을지라도, 많은 빚 에 대한 삭감은 정의로운 것이다. 빚의 삭감은 주인에게 손해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자에 이자가 붙 어서 빚이 어마어마한 규모가 되면, 채무자는 더 이상 빚을 갚을 의지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인이 처음 들었던 소문이라는 것은 그에게 빚을 진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이 빚을 잘 갚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지기가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에서 가로채고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빚이 이자와 함께 늘어나 너무 부담이 되면 빚을 갚을 엄두조차 나지 않게 될 위험 이 있다.45)

 

       45) 예레미아스에 의하면 이 비유에서 언급된 기름 백말, 밀 백섬은 개인이 갚을 수 없을 매우 큰 규모의 빚이 다. “기름 100바트(개역: 100말=36.5 hl)는 감람나무 146그루의 소산이며 약 1000 데나리온의 금액에 해당 한다. 밀 100코르(개역 100석=364.4h)는 약 27500 킬로그램으로서 42 헥타르의 소출이며, 약 2500 데나리 온의 금액에 해당한다. 예레미아스/허혁 역, op.cit., 175-176 참조. 이와 같이 이 비유에서 언급되는 기름의 빚과 밀 빚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그의 연구서에서 이미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연구한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빚의 규모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 유감스럽다. 

 

빚의 삭감은 채무자와 채권자의 윈-윈이다.

빚이 삭감됨으로써 채무자는 빚을 갚을 수 없 다는 절망감에서 해방된다.

삭감으로 인해 빚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면 빚 상환의 의욕이 상승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지기는 자신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채무액 삭감이란 과감한 행위를 한 것인데, 이는 주인과 빚진 자, 그리고 청지기 모두에게 유익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인 이 원했던 바였다.

 

(3) 비유의 메시지

이 비유에서 필자는 하나님의 정의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읽게 된다.

즉,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을 살리는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빚을 갚을 능력을 초월할 정도의 과도한 빚은 사람을 피폐케 한다.

빚진 자가 시간이 흐를수록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은 중간이득을 취하는 자가 많은 것을 취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이 비유에서 중간이득을 취하는 자는 청지기로 묘사되었고, 주인이 그의 부당함을 알고 해고를 명하자, 자신의 부당이익을 포기하고 빚진 자들의 빚을 삭감하는 과단성 있는 결정을 한다.

이에 대해 주인은 칭찬을 함으로써 채권자의 명예가 높아지고, 채무자들은 삶에 부담을 덜었으며, 청지기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3. 결론 : 하나님의 정의와 생명

 

세 가지 예수의 비유를 연구한 결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본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포도원주인의 비유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의 정의란 기본적 으로 정한 법을 지키면서 사람들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새벽 인력시장에서 사람을 고용할 때 하루 임금을 정하였다. 고대사회에서 일용직 노동자는 시간제 노동이 아니라 일일 노동인 것이다. 오후 늦은 시간에 만난 사람이 놀고 있는 것을 본 포도원 주인은 하루 임금을 받지 못하고 빈털털 이로 귀가할 사람과 그의 가족들의 생계를 염려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도 하루 품삯을 주고 싶다. 하루 품삯을 주고 싶다는 것은 그와 그의 가족들을 먹이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그날 일할 수 있는 시간이 1시간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도 그를 고용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인 것이다. 하나님의 정 의란 노동 시간의 분량대로 따지거나 노동자가 성취한 업적 위주로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노 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분배해주는 방식이다. 탕감 받았으나 탕감해주지 않은 종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정의도 포도원주인의 비유와 다른 것이 아 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종을 탕감하여 준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죽었다 깨 어나도 갚을 수 없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아내와 자식,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빚을 갚으라고 엄포를 놓지만, 다 팔아도 빚을 갚을 수 없다는 현실을 주인은 안다. 그렇기 때문에 빚의 탕감은 그와 그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 택한 방식인 것이다. 그러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받은 대로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고 나아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에게 자비 를 베풀지 않은 종에 대한 주인의 조처는 코믹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포도원주인의 비유가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면, 탕감받은 종의 비유는 하나님의 정의를 사람(하나님의 백성)도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 는 방법은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의의 청지기의 비유(눅 6:1-8a)는 하나님의 정의의 목적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정의 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는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청지기가 자신의 실직 위기에서 살아갈 방도를 모 색한 결과,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삭감하는 일을 감행한다. 청지기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행한 일이지만, 이는 결국 주인이 원하는 일이다. 주인은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사람들을 착취할 마음 이 없다. 주인이 사람들에게 밀과 기름을 꾸어준 이유는 그들도 살고 자신도 살기 위함이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청지기가 과도하게 부과하여 빚진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었음을 주인이 알고 그의 해 고를 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을 살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사람을 괴롭게까지 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정확히 축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을 이해하기 위해 접근한 예수의 세 비유는 모두 사람들의 경제 활동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포도원주인의 비유는 노동자의 임금문제, 탕감받은 종의 비유는 빚의 탕감, 그리고 마지막 청지기의 비유는 빚의 삭감을 주제로 하였다. 모두 다 경제문제이다.

경제생활이란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경제학원론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윤 추구, 혹은 부의 축적이 경제 활동의 목적 이 될 때, 사람은 이러한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된다.

또한 진정한 목적이 되어야할 사람의 생명이 이윤 추구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릴 위험이 농후하다.

그러므로 예수의 비유를 통해 밝혀진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로 하여금 이윤 추구라는 왜곡된 경제 활동의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생명 살림이 라는 경제생활의 진정한 목적을 향하게 해 준다.

하나님의 정의는 법을 수호하는 것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임을 이 세 비유에 대한 연구 결과로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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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God's Justice in the parables of Jesus

Kim Pan-Im

his paper aims to find the understanding of Jesus about the justice of God through the interpretation of three parables of Jesus: the parable of the vineyard householder, the parable of the servant who did not cancel the debt of his colleague and the parable of the unjust servant. It is very interesting, that three parables deals with the economical issues, - 18 - for example pay of workers, the cancellation of debt, the reduction of debt. I tried to image the audience of the parables in the basis of the fact that the parables was spoken and heard when Jesus had spoken. The parables of Jesus should be heard. The imagination of the hearer is not easy, but not impossible on the assumption of the extensive knowledge about the historical, religious and cultural situation. The results of the analysis and interpretation of the three parables of Jesus are as follows: 1) The parable of the vineyard householder gives us the message what is the justice. The justice should be based on the rule. The householder did the goodness on the basis of the contract between him and the vineyard workers. 2) In the parables of the servant who was cancelled his debt and did not cancel the debt of his colleague we find the method of the exercise of the justice. Man should give the neighbor as he has taken from God. 3) The parable of the unjust servant seems to provide the message about the purpose of the justice. The ultimate goal of the justice is the life. In order to give the life, the justice should be realized. Three parables are in accord that they show the justice of God.

 

Key Words the justice of God, Jesus, the parable of the vineyard householder, cancellation of debt, the parable of the unjust servant

 

 

신학사상1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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