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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과 이웃사랑 :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이론에 견주어 살펴보는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 /이인미.성공회대

 I. 머리말

논문은 논리(logic)를 중시한다. 논리가 없는 논문은 좋은 논 문이 아니며 논문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논문이 논리를 중시 하는 것만큼이나 이야기는 행위(action)를 중시한다.

행위가 없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며 이야기답지 않다. 아예 이야기가 아니다.

행위가 없이는 이야기가 시작될 수 없다. 사실의 이야기, 가상의 이야기, 인간의 이야기, 의인화된 동식물의 이야기는 물 론, 무생물, 컴퓨터, AI, 로봇이 등장하는 공상과학 이야기일지라 도 모든 이야기의 기초단위는 행위이다.

여기서 행위는, 단순한 몸짓이나 생리현상의 개별적 뒷처리나 기계적/반사적 동작 같은 움직임을 무차별적으로 모두 다 가리 킨다기보다는 ‘말을 동반하는 것’(accompaniment of speech)을 선택적으로 지정한다.1

행위가 말을 동반한다는 개념은, 행위가 기본적으로 ‘의사소통 지향적’임을 표상한다.

행위가 말을 동반하 며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까닭에, 행위는 행위자 이외에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사람이 존재하는 시공간에서 나타난다.

행위자는 이웃 해있는 타인(들)의 존재를 전제 혹은 상정하며, 그(들)와의 관계 를 의식하며, (사랑이든 미움이든 괴롭힘이든 우러름이든, 기타 무엇이든) 자기 자신의 것을 내보이려 한다. 행위에는 행위를 시 작한 자를 주체로 ‘드러내는 특징’(revelatory character)이 있다.2

이것이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행위개념이 다.

아렌트의 행위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프락시스’ (praxis)에 연원을 두고 있긴 하나, 프락시스와 사실 같지 않다.

아 렌트는 행위의 의미를, 서구 철학전통이 오랫동안 지녀온 목적론 적 · 도구론적 이해로부터 해방시켰다.

아렌트가 말하는 행위란 외적 목적에 의식적으로 봉사하는 행위가 아니다.

아렌트의 행위 는 ‘행위를 위한 행위’로서 탈목적적, 자기충족적이다.3

 

       1 이 논문에 쓰인 모든 ‘행위’라는 단어는 특별히 ‘말’을 제외하겠다는 것을 명시하지 않는 한 ‘말’을 포함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로, 즉 아렌트의 의미로 사용한다.

       2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178.

       3 서유경, “한나 아렌트의 政治行爲(action) 분석,” 「정치사상연구」(제3집, 2000년 가을), 95-96. 

 

아렌트는 ‘이론-실천’(테오리아-프락시스)의 구도에서 실천의 의미로 행위 를 보는 게 아니라, 행위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서 행위를 본다.

위와 같은 행위개념으로 아렌트는 자신의 행위이론과 이야기 이론을 직조하였다.

아렌트는 이 두 이론을 행위자(들)의 ‘인생이 야기’(Life Story or Biography)라는 지점에서 종합하였다.

실제로 세상 모든 인생 이야기는 주인공이 누구든 그 주인공과 여타 다른 존재(타자)들 사이에 말을 동반하는 (의사소통 지향적인) 행위들 이 연쇄적으로 오가는 가운데 발생한 사건들의 연쇄이다.

‘행위, 사건’은 아렌트의 이야기이론이 장착하고 있는 주 핵심어들이다. 그러므로 아렌트에 따르면, 이야기에 접근할 때는 행위가 중심이 되지, 행위에 동반되어 나타나는 말(언어)이 중심을 차지할 수가 없다.

한편 민중신학은 태동기 때부터 ‘사건의 신학’을 자처하였다.

민중신학에서 사건은 민중의 행위에서 시작되고 민중의 행위를 통해 전개된다. 요컨대 민중신학은 사건에 관련된 민중의 주체적 행위에 주목한 신학이다.

민중의 행위에 집중하고자, 민중신학은 탁상공론, 추상화, 관념화 같은 것들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을 가 하였다. 또 민중신학은 전래하는 민담, 서사시, 탈춤 같은 민중예 술에 관심을 보였다.

민중신학이 그 같은 민중예술장르에 관심을 보인 것에 대하여, 민중신학이 문화예술비평신학 같은 것을 지향 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면 그 설명은 사려 깊지 않다. 민중예 술에 대한 민중신학적 관심의 ‘계기’를 포착하는 데에 혼란을 야 기할 우려가 있다.

민중신학이 민중예술에 주목한 동기는, 민중예술이 민중의 행위 다시 말해 이야기를 중심요소로 하고 있다는 그 이유 때문이 었다.

태동기 및 형성기에 민중신학이 민중예술을 볼 때는 흔히 190 한국조직신학논총 제56집(2019년 9월) 생각하는 감상적 의미의 예술적 ‧ 미학적 형상화의 측면이나 미 (beauty)의 요소를 비평하거나 논술하려는 목적이 없었다.

민중 신학은 민중의 행위가 도발하는 민중사건(들)의 기세(momentum), 민중사건(들)이 일으키는 변화와 파장이 담긴 이야기를 중 시했다.

민중신학은 민중예술을 ‘향유, 감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사회변혁운동의 기점, 토대, 반향 등으로 취급하였다. 민중신학은 민중예술을 민중의 사회변혁 운동과 하나님 나라 운동을 표상하 는 자료로 대하였다.

이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Socialistic Realism)의 태도와 상통하는데,4 이 태도 때문에 이른바 제1세대 민중 신학자들 중 몇몇은 얼토당토 않게도 ‘좌익’ ‘사회주의자’ ‘운동권’ 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4 박사학위논문 “북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조선화(Koreanization)’: 문학에서의 당의 유일사상체계의 역사적 형성”에서 김태경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강령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의란 두 가지 항목을 필수적으 로 포함했다. 하나는 “혁명적 발전 속에서 현실을 진실되게 역사적으로 구체적으 로 재현할 것,” 다른 하나는 이러한 문학예술을 통해 “사회주의적 정신에서 노동계 급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개조하고 교육하는 것”이다(Schmitt and Schramm 1989). 김태경, “북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조선화(Koreanization)’: 문학에서의 당의 유 일사상체계의 역사적 형성,” (서울: 서울대학교대학원, 2018), 11-12. 5 이 논문은 총 열 편의 이야기를 풀이하고 있다. 본문에 예시한 여섯 이야기 외에 네 편의 이야기(장마, 소리의 내력, 신궁, 말뚝)이 더 있다. 서남동, “한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뺷민중신학의 탐구뺸 (서울: 한길사, 1983), 83-110.

 

‘김경숙의 한, 오원춘의 한, 석문의 전설, 서편제, 장일담’ 등의 이야기들에 접근하는 서남동의 글을 보면 그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지향성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5

탈춤, 병신춤 등 연희장르를 민중신학적으로 풀이하는 현영학도 마찬가지였다. 태동기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예술에 접근할 때에 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예술적 완성도보다 민중행위의 형상화 및 의식화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민중신학자들은 이야기라는 방법론에 비상한 관심을 두었다. 이 비상한 관심의 정체와 동기는, 이 논문의 본론에서 행위, 특별 히 이웃사랑 행위로 분석될 것이다. 먼저 이 논문은 민중신학의 후 예들이 이야기에 접근할 때에는 예술에 방점을 찍을 게 아니라, 민 중의 행위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논문을 시작한다.

 

II. 문제제기: 이야기를 언어적 예술의 한 장르가 아니라 ‘행위의 기록’으로 접근하자

 

1. 이야기신학에 관한 앞선 연구들

 

민중신학은, 적어도 제1세대에서는, 소위 ‘학문적 무게를 잡 는’ 형식을 취한 적이 없다.

지식층이 선호하는 학술적 ‧ 형이상학 적 이론체계로 신학을 하지 않겠다는 기본태도가 민중신학의 태 생적 원칙이자 방침이었다. 이야기신학 이론은 그러한 원칙, 방침 을 대표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 자체도 잡담을 통해서 또 잡담형식으로 형성될 수 없을까” 하는 꿈 같은 소망,6 “신학을 저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시작”하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 에 토대하여 이야기신학은 제창되었다.7

 

       6 현영학, “민중과 민중신학자,” 뺷예수의 탈춤: 한국그리스도교의 사회윤리뺸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7), 80.

      7 현영학, “학문과 학자와 현실과,” 뺷예수의 탈춤뺸, 19.

 

그런 점에서 이 논문은 ‘잡담, 낮은 곳,’ 이 두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와 의도를 이야기신 학 이론의 계승과 재도약의 첫 단계로 삼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현재 이야기신학 이론은 체계적으로 정립되어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야기가 (민중)신학의 한 방법론적인 전문용어로 서 정확하게 개념적으로 정의되어 일관성 있게 사용되고 있는 단 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무려 30여 년 전의 평가가 안타깝게 도, 지금까지 유효한 실정이다.8

실제로 이야기신학 이론을 집중 탐구한 논문은 「조직신학논총」에서는 찾기 어렵다.9

 

        8 김창락, “이야기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 「신학사상」 제64집 (1989, 봄), 6-7.

        9 「조직신학논총」 수록논문 중에 이야기신학 이론을 주제로 한 것은 단 한 편도 없 다. 

 

물론 타 학술지에서는 간간이 있었다.

그중 이야기신학 이론을 하나의 신학 체계로 깊은 관심을 보이며 접근해 들어간 논문들 중 몇 편을 골 라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는 이 논문들에서 민중신학 이야기신학 이론의 전모를 다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야기신학에 관한 통상 적 접근 두 가지를 관찰할 수 있다.

첫째는 이야기를 민중언어로 보면서 행위(말을 포함함) 자체로부터 조금 멀리 가려는 경향성 이고,

둘째는 이야기를 타 학문분야(언어학 ‧ 문학 ‧ 정신분석학 ‧ 심리학 ‧ 윤리학) ‘안 혹은 아래’에 두고 그 같은 학문 분야들에서 학습한 지식을 신학 분야에 ‘적용’하는 것 같은 경향성이다.

먼저 이정희의 논의는 이야기에 관한 논문이라기보다는 민중 언어에 관한 논문이다.

“말이란 하나의 신비롭고도 모호하며 양의 적이며”라는 바츨라프 하벨의 문장에서 시작해 “말은 뛰어난 이 데올로기적 현상”이라는 미하일 바흐찐의 문장으로 끝나기까지, 그는 말에 관하여 논의한다.10

최형묵도 ‘민중신학은 곧 민중언어 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민중언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물러선다.

다만 민중언어가 일상언어일 수도 있고 민 중적 세계관일 수도 있다는 식의 포괄적 결론을 내린다.11

한기채 는 윤리적으로 바른 이야기, 진실된 이야기가 담고 있어야 하는 내용을 ‘한’(恨)으로 한정하면서, 민중의 이야기는 한을 계시하고, 공감하고, 초월한다고 주장한다.12

앞의 두 연구자들과 마찬가지 로 이야기를 민중언어로 전제한 한기채의 관심은 이야기 자체라 기보다는 이야기가 장착하고 있어야 하는 윤리적 속성이다.

다음 으로, 최근 들어 마치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이야기신학 이론의 이론적 체계화에 착수한 이른바 제2세대 민중신학자 권진관은, 이야기를 담론의 세계와 구별되는 ‘다른 세계’의 것으 로 규정한다.

권진관은 그 세계를 언어가 구축하는 문학의 세계로 본 듯하다.

그는 ‘은유, 환유, 상징’ 같은 문학예술적 장치들을 중 요하게 끌어들인다.

또 이야기를 ‘주체’와 ‘집단무의식’ ‘원형상징’ 등의 주제 위에서 다루면서 부분으로 정신분석학을 도입하기도 한다.13

 

     10 이정희, “민중의 언어 없이 민중의 시대는 오지 아니한다,” 「신학사상」 제81집 (1993년 여름), 100-126.

     11 최형묵, “1990년대 민중신학 논의의 몇 가지 쟁점들,” 「시대와민중신학」 5 (1998), 348.

     12 한기채, “민중 이야기 윤리를 위한 방법론적 논의,” 「신학사상」, 제93집 (1996 년 여름), 219.

     13 권진관(2017년 10월 16일 민중신학회 발표논문), “이야기란 무엇인가? 사건과 이야기의 신학을 위하여” 중에서. 

 

2. 이야기신학 이론의 한 걸음 진전을 위하여 직면하여야 할 두 가지

 

이야기신학 이론을 다룬 연구자들은 대체로 이야기를 민중언 어로 먼저 전제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 이야기를 언어학, 기호학, 문학예술, 심리학, 윤리학 이론들에 결합하는 식 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민중언어이기만 할까?

이 논문은, 머리말 에서도 한 차례 밝혔듯이, 그렇지 않다는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지 고 있다.

이 논문은 그 문제의식에 토대하여 두 가지 작업을 진행하고 자 한다.

 첫째, 이 논문은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이 언어만이 아 닌, ‘언어를 수반하는 민중의 행위’를 주제로 하는 신학이라는 점 을 환기한다.

이 논문이 이야기를 논의하는 방식은 언어를 별도로 따로 떼어내지 않고 행위 안에 집어넣는 데에서 시작된다.

이같이 민중의 행위에 집중하는 태도는 사실상 민중신학의 기본원리를 따르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이야기신학 이론에 내포된 제1세대 민중신학자들의 태도는 요약컨대 역사라는 큰 이야기 속에서 민 중이 주인공으로 행위하는 바, 그들의 ‘주인공 됨’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해를 공표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제1세대 민중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엘리트스러운 모습을 반성했다.

민중이라 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들을 직면한 것이다.

이 논문은 후배 민중 신학자들이 그 같은 직면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그것이 민중신학의 본령, 원칙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야기신학이 애초에 이야기의 주인공을 추어올리거나 깎아내리는 이야기의 한계 및 속성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학문적 지식이 아직 없이 제창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지적은 이 논문 이전에는 누구도 하지 않은 지적이다.

이 논문은 이야기 신학 이론의 한계(제한점)로서 그 문제점을 드러내며 그 문제점 을 해결해나갈 방안을 탐구할 것이다.

이야기신학 이론은 ‘민중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보고 민중의 사회전기(인생이야기)에 집중한 다’는 탁월한 장점을 지녔지만, 이야기 주인공에 대한 ‘비하-미화’ 의 구도에 갇힐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를 점검하지 못했다.

위와 같은 두 가지 작업을 전개함으로써 이 논문은 다음과 같 은 학문적 의의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첫째, 민중신학의 오래된 혹은 민감한 주제, 민중신학자들이 거의 인정하지 않고 직접 다루 려 하지 않는 주제, ‘민중미화의 위험성’을 정면에서 논의한다.

‘민 중미화의 위험성’이라는 주제는 민중신학자들의 가슴에 늘 들어 있어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자주 이야깃거리로 올라오곤 했다.

이 논문은 그것에 직면하려는 것이다.

둘째, 민중신학의 원칙과 의지에 입각하여 ‘이야기’를 환기한다.

이야기를 언어영역이 아니 라 민중의 ‘행위,’ 다시 말해 민중의 정치적 활동에 초점을 맞춤으 로써 기존하는 민중신학 체계가 지녔던 정치신학적 원칙과 방침 을 훼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견고하게 확충한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III에서 민중신학의 이야기 신학 이론이 행위를 강력히 부각시켜야 할 필요성을 충분히 환기 하고,

IV에서는 아렌트가 내어놓은 정치이론으로서 이야기이론 에 나타난 행위(정치적 활동)와 민중신학이 강조해온 행위의 의 미가 내포하는 연관성, 동질성을 살펴본다.

그다음, V에 이르러 민중이라는 역사적 주체(민중 이야기의 주인공, 달리 말하면 ‘행 위자’)와 정치적 연대를 감행하는 관찰자(이야기꾼)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공정성(비부분성) 개념을 칸트와 아렌트에게서 배운다.

이 공정성 개념은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에 자그마한 새 바람을 일으켜줄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민중에 대한 미화-비하의 틀을 넘어서서 이야기신학 이론을 전개하는 제삼의 대안을 마련 할 수 있을 것이다.

 

III.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

 

1. 오클로스론: 성서 속 이야기들에 대한 예민함에서 출발하다

 

민중신학은 현장성을 중시하지만, 못지않게 성서해석을 중시 하는 신학이다.

민중신학은 ‘오클로스’라는 성서적 개념에 각별히 주목했을 만큼 성서적으로 매우 섬세하였다.

오클로스론은 민중 신학이 성서신학에 가까운 신학임을 증명해주는 이론이다.

민중신학이 성서에서 발견한 단어 오클로스는 무리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보통명사로서 단수형태이다.

복수형태는 ‘오클로이’ (ὄχλοι)이다.

성서에서 그것은 가난한 사람 일반을 가리키는 용 어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으로는 ‘프토코스’(πτωχός)라는 단어가 별도로 존재한다.

민중신학은 프토코스가 아닌 오클로스를 ‘민중’ 으로 받았다.

그러므로 민중을 가난한 사람의 의미로 좁혀 사용하 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마가복음서 기자가 “민중이라는 개념 내용이 필요했는데 다른 말이 없어서 오클로스라고 하는 단 어를 빌려썼다고 말해야 할 것”이라면서,14

민중을 오클로스보다 본질적 ‧ 원형적인 개념으로 주장한 바 있으니, 여기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으로서 오클로스’를 “어떤 집단에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종속되지 않아 그 사회와 아무런 연 대관계를 맺지 않는” 자들로 개념정의하였다.15

그리고 “바닥에 깔리고 그 지배기구에서 밀려나가고 인간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 앉은” 사람들로 개념정의하였다.16

그러므로 민중의 기초적 의미 는 ‘가난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배제된 사람’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학의 눈으로 보면 오클로스, 민중이라는 개념은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은 똑 떨 어지게 하나의 계층, 하나의 계급을 가리키는 개념어라고 하기 어 렵다.

하층민, 하위주체를 가리키되 “이론적인 엄격함이 존재하지 않”는 용어인 서발턴(subaltern)에 민중을 견주는 이들도 있지 만,17 이 논문은 프랑스 대혁명기에 활약했던 ‘상-퀼로트’(SansCulottes)라는 용어에 민중을 견주고자 한다.

 

       14 서남동/NCC신학연구위원회 엮음, 뺷민중과 한국신학뺸 (서울: 한국신학연구 소, 1982), 245.

       15 안병무, 뺷갈릴래아의 예수뺸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0), 137.

       16 서남동, 뺷민중신학의 탐구뺸 (서울: 한길사, 1983), 215.

       17 G. C. Spivak, The Post-Colonial Critic: Interviews, Strategies, Dialogues, Sarah Harasym ed. (New York and London: Routeledge, 1990): 스티븐 모튼/이윤 경 옮김, 뺷스피박 넘기뺸 (서울: 도서출판 앨피, 2005), 92에서 재인용. 

 

서발턴과 조금 다르게 ‘상-퀼로트’는 처음 생겨날 때부터 아예 하나의 계층, 계급을 일컫는 단어가 아니었고 그런 어원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권위있는 마르크스주의적 프랑스 혁명사가(革命 史家) 알베르 소부울(Albert Soboul)에 의하면, 상-퀼로트는 잡다 한 사람들, 잡다한 사회적 성분들의 동맹체였다.18

귀족들이 입는 바지 ‘퀼로트’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퀼로트로 분 류됐고, 혁명이 한창 힘을 받을 때는 사람들마다 자칭 타칭 상-퀼로 트이고 싶어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상-퀼로트는 제1신분, 제2 신분 등 ‘상당한 분들’에 대비되는 제3신분(the Third Estate)으로부 터 나왔지만 제3신분과 동의어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적 술어로 모호해 보이는 지점이 생겼으나 역사적 실체와 정확히 일치된 용어라는 것이 소부울의 견해이다.19

소부울은 사회적 동질감도 아니고, 경제적 비참함도 아닌 그들의 정치적 행동이 상 -퀼로트를 단결시켰다고 말한다.20

 

     18 알베르 소불/이세희 옮김, 뺷상뀔로트뺸 (서울: 일월서각, 1990), 49.

     19 알베르 소부울/주명철 옮김, 뺷프랑스혁명사뺸 (서울: 탐구당, 1987), 139.

     20 알베르 소불/이세희 옮김, 뺷상뀔로트뺸, 54. 이인미 |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과 이웃사랑 199 

 

가난한 기술자도 부유한 부르 주아도 공화국을 지지하며 정치적으로 같이 행위하는 사람들이 라면 공히 상-퀼로트였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상-퀼로트가 다른 그 어떤 요인도 아닌 ‘정치적 행 위’로 이해되는 것이 적합하듯, 오클로스와 민중에게서도 정치적 행위가 강조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즉, 예수 사건을 기억하 고 전파하는 정치적 활동(행위)을 펼친 오클로스를 중요하게 주 목했던 민중신학의 오클로스론이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신학 이론과 통합적으로 논의를 전개해나갔더라면 곧장 ‘배제된 사람들의 행위와 그에 따르는 연쇄행위들’을 체계화하는 행위(언어를 포함함)의 이론으로 나아갔었을 수 있었다고 가정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2. 유언비어이론: 행위에서 언어를 따로 분리하여 들여다보다

 

오클로스론은 유언비어이론으로 나아갔다.

행위의 이론이 아 니라, 언어의 이론으로 나아간 것이다.

오클로스론을 제창한 민중 신학자들 중 한 명인 안병무는 오클로스의 언어를 ‘유언비어’(流 言蜚語, rumor)로 규정하고는, 유언비어의 특징을 집중탐구하였 다.21

이후 안병무의 제자 김진호는 오클로스론을 민중과 예수의 ‘언어적 상호작용’ 즉 대화를 크게 강조하는 지점까지 밀고 나갔 다.22

김진호는 말이 삶을 서로 연루시킨다고 설명하면서, 예수와 오클로스(유랑하는 설교자)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감성적 교감” 으로 대변되는 “말 사건”으로 정의한다.23

 

     21 안병무,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한국신학연구소 엮음, 뺷1980년대 민중신학의 전개뺸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239.

     22 김진호는 안병무의 “예수와 오클로스”에서부터 “예수사건의 전승모체”에 이 르는 논문을 분석하면서 오클로스론을 언어의 한 형식으로서 유언비어에 연 결하고 있다. 그는 민중언어의 전달형식, 지배언어와의 구분, 유언비어의 강 점 등을 강조한다. 김진호의 분석에 의하면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은 “예수와 오클로스 간의 시공간적 대화의 과정이 곧 역사의 예수사건이요 마르코(마 가)의 예수사건이며, 그것들 간의 연계의 근거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그밖 에도 김진호는 오클로스를 오클로스가 사용하는 ‘언어’를 근간으로 하여 설명 하고 있다. 김진호 ‧ 이정희 ‧ 차정식 ‧ 최형묵 ‧ 황용연, 뺷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 무를 다시 본다뺸 (서울: 삼인, 2006), 104-105. 23 앞의 책, 136.

 

김진호는 예수와 오클로스의 대화를 “세계의 폭력에 의해 난도질당한 이들의 고통스러 운 현실”에 대한 공감적 “대화”로 본다. 그는 예수와 민중 사이에 “감성적 공감”이 있으며, 그것이 “복음의 기저”를 이룬다고 설명 한다.24

여기서 “감성적 공감”이라는 그의 표현은, 이야기와 행위 와 역사(성)의 밀접한 관련성을 희석시키는 부대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행위는 언어를 동반한다.25

 

       24 앞의 책, 144.

       25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1998), 178. 

 

언어의 중요성은 그것이 행위와 함께 나타나 소통을 지향한다는 데에서만 존재한다.

민중의 행위 도 행위로서 소통을 지향한다.

행위는 그것이 민중의 행위든 누구 의 행위든, 이야기를 구성하는 재료가 된다. 행위와 행위가 연쇄 되며 일으킨 사건들은 이야기로 기록되어 전파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야기는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순전히 100% 말만 으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있을까? 없다.

이야기는 행위로 이루어지 며, 행위는 말을 수반한다.

개별 사람들의 행위가 담긴 이야기는, 역사라는 ‘더 많은 사람들의 크고 의미있는 이야기’로 통합된다.

역사적 예수를 증언할 때 오클로스는 이야기를 사용했다.

그 들은 예수에 관한 신학논문을 쓰거나 바울처럼 신학적 서신으로 예수를 전파하지 않았다.

논리적 방법을 훈련받은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문학예술 작품으로 예수를 묘사할 수 없었다.

예술적 방법을 훈련받은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클로스들은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예수, 자신들의 인생사(lifestory, biography) 에 들어온 예수를 ‘행위중심으로’(말을 포함함) 발설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딱히 “의미를 규정하려는 실수 없이 그것을 드러내게 해주는” 이야기 방식을 사용했던 것이다.26

 

           26 켄 크림슈타인/최지원 옮김 ‧ 김선욱 감수, 뺷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뺸 (서울: 도서출판 더숲, 2019), 233.

 

그것이 복음서다.

 

3. 민중신학의 이야기: 민중을 인간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기 위해 그들을 미화하다

 

오클로스는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승한 사람들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미화될 이유도, 비하될 이유도 없 는, 그냥 사람들이다.

‘죄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유한한 존재 이며 죄성을 지닌 인간이다.

사도 바울이 진정성있게 표현했던 바, 이 세상에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There is no one righteous, not even one).27

 

      27 로마서 3장 10절. 

 

아무리 민중이라 해도 그들이 신이 아닌 이상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처음에 오클로스는 예수공동체 에 참가했던 방대하고 잡다한 사람들의 무리였다.

거기에는 단순 참가자들, 어영부영 휩쓸린 참가자들에서부터 목적의식적 참가 자들까지 무작위하게 다 들어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제1세 대 민중신학자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바로 그 점, ‘배제됨(be excluded), 무시당함(be dispised),’ ‘가난함’ 등이라 할 수 있을 것 이다.

성서 텍스트에서 오클로스라는 단어는 다만 ‘그들’ 즉 많은 사 람들을 가리키는 명사로 보이며 그런 점에서 ‘(가치)중립적’ 단어 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중신학자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무리’ 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골라 쓴’ 흔적이 엿보인다는 바로 그 사 실에 주목하면서 오클로스를, 지혜 있는 자들이 배제하고 싶어했 던 사람들로 보았으며, 하나님께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 실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택하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에 연결 했다(고전 1:27).

민중신학자들은 ‘무리’라는 헬라어 명사 오클로스를 ‘민중’ 개념으로 받아, 배제되고 무시당하는 민중의 행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민중신학은 민중을 배제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민중을 인간으로 동등히 여기고 존중하였다. 성서적으로 말하자 면 강도 만난 사람을 이웃으로 알아보며 사랑하려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게 아니라 거꾸로 그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한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부름에 응답하여 구 원받은 사람이라는, 서남동의 독특한 역설적 고백도 말하자면 민 중을 배제, 무시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28

그런데 안병 무는 오클로스를 예수와 밀접히 연결된 사람들로 존중하더니, 나 중에는 메시아로까지 드높였다.29

 

         28 서남동, 뺷민중신학의 탐구뺸, 107.

         29 안병무, 뺷갈릴래아의 예수뺸, 136-141.

 

그런 까닭에 민중신학은 민중 미화라는 혐의에서 자유롭기가 조금 더 난감해진 감이 있다.

민중비하가 불편의 정서를 일으키는 것처럼, 민중미화 또한 불편의 정서를 일으킬 수 있다.

둘 다 공정하지 않으며, 둘 다 경험 적 사실에서 멀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좋게 본다’는 ‘지나치게 나쁘게 본다’에 상응한다.

양쪽 모두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보는 게 아니라, 과잉하여 제시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현실에서 ‘미소지니’(misogyny)와 ‘필로지니’(philogyny)가 동일하게 내포하는 문 제는 비현실성이며,30 그것은 필연적으로 불편감을 자아낸다.

물 론 민중신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민중으로 추앙(?)했던 이들이 보이는 현실적 모습을 알고 있었으며, 유한한 존재로서 인 간인 이상 민중이 완벽하지 않음 또한 알고 있었다.31

그렇지만, 독일 신학자들도 염려했던 바, 민중메시아를 주장하기까지 하였기 때문에,32 민중신학은 민중미화 경향성을 갖고 있었다고 정직 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평가는 두 가지 부연설명을 필요로 한다.

 첫 째, 민중신학이 민중미화의 이야기들을 중점적으로 발굴, 발표했 다는 사실에서,33

 

       30 http://weolganyeogi.tistory.com/52. 

       31 현영학, “민중의 고난과 민중신학,” 뺷예수의 탈춤: 한국그리스도교의 사회윤 리뺸 (1997), 160.

       32 신학사상편집부 옮김, “연구자료-민중신학자들과 독일 신학자들의 대화,” 「신 학사상」 제69집 (1990년 여름), 406; Jürgen Moltmann/김균진 옮김 ‧ 민중과 신학 편집실 요약, “안병무의 민중메시야론과 문제점,” 「민중과신학」 제4호 (2000년 겨울), 30.

        33 서남동은 민중신학이론을 전개하는 논문에서 논픽션인 김경숙의 한 이야기, 오원춘의 한 이야기 등을 비중있게 인용하였다. 물론 픽션인 ‘장일담 이야기’ 도 의미있게 환기하곤 하였다. 현영학은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의 인생사를 중 심으로 논문을 작성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연희예술 중 탈춤의 각 과장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논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의 전모는 후배 및 제자들과의 대화체로 쓰인 뺷민중신학 이야기뺸라는 책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생존인물 전태일의 이야기나 홍경래의 이야기를 의미 있게 인용한다. 또 안병무는 말년에 자기 어머니의 인생사를 민중신학적 관점  으로 성찰하는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제목: 뺷선천댁뺸). 

 

우리는 1970-80년대 군부독재 치하의 빈약한 인권감수성, 척박한 민주주의 감수성에 대한 저항의 표출과 함께 그 동기(motive)로 ‘기독교적 이웃사랑’을 추론해낼 수 있다.

군부독 재 치하라는 민중신학 태동기에는 거칠게 요약해 민중의 이야기 를 경청하고 그것을 공적 영역에 전파하는 방법, 민중신학적 사랑 법이 의미가 없지 않았다.

실제로 민중은 바로 그러한 ‘목사님들 의 사랑’에 감복하며 스스로의 인간존엄성을 자각, 의식했던 것이 다.

여기서 민중신학적 사랑법이란 곧 예수가 명령한 두 계명 중 하나로서 이웃사랑에 다름 아닐 것이다.

둘째, 민중신학자들에게 는 이야기라는 방법이 미화(‘비하’도 포함)를 내포할 수 있다는 지 식, 이야기와 공정성의 관계에 관한 지식이 아직은 명확히 있지 않았다.

흔히 민중의 이야기를 경청, 전파할 때에는 거의 필연적 으로 그 이야기들이 미화 혹은 비하에 치우칠 수가 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적 대안을 찾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가 그 치우침을 겪은 것이다.

이는 오류라기보다는 시대적, 사회 적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IV. 아렌트의 이야기이론

 

1. 공정한 이야기: 미화-비하의 구도를 넘어

 

이 논문은, 아렌트의 이야기이론이 지난날 민중신학이 치우침을 겪었다고 볼 수 있는 미화-비하 구도를 초월하는 데에 활용 가능한 개념과 논리체계를 갖고 있다고 본다.

이를 받아들여 익힌 다면 이야기신학 이론은 훨씬 더 탄탄해질 것이다.

그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행위에 대한 집중이며, 다른 하나는 행 위에의 집중을 통해 갖출 수 있는 공정성이다.

아렌트는 시작(탄생)과 끝(죽음)이 있는 이야기로 발화 ‧ 청취 되는 모든 행위자들의 인생 이야기가 역사의 전제조건인 까닭에 역사를 “인류의 이야기”로 간주한다.34

 

       34 Hannah Arednt, The Human Condition, 184.

 

아렌트의 이야기이론은 ‘역사의 주인공’을 다루는 이론에 다름 아니다.

역사의 주인공, 즉 역사의 주체는 누구일까? 민중신학은 ‘민중이다’라고 대답할 것이고, 아렌트는 ‘행위자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두 대답은 실제로는 같은 것이다.

민중신학의 ‘민중이다’라는 대답이, 민중사건을 일으키는 행위자를 민중으로 일컫는 까닭이다.

민중은 ‘배제된 사 람’이라는 기초적 의미 외에 ‘행위자’라는 또 다른 핵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민중신학은 태동 때부터 일관되게 배제된 사람들 모두 를 무차별적으로 민중으로 호명하기보다는, 그들 중 행위자로 나 선 사람들을 민중으로 호명하였다.

요컨대 민중신학에서 민중은 형용사(배제된 상태)와 동사(행위하는 활동)를 통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민중주의적 정치사상가 아렌트에게서도 마찬 가지이다.

아렌트는 행위자들이 일어나 사건을 일으켰을 때, 그 사건(원 인을 포함하여)들이 실제 현실에서는 아무리 우발적이거나 우연한 행위들이라 할지라도, 이야기 안에서 일관성 있는 줄거리로 엮 인다고 지적한다.

즉 이야기 안에서는 주인공인 인간의 말과 행위 가 언제나 충분히 일관성 있게 제시된다는 것이다.35

훌륭한 통찰 이다.

사건(들)은 화자가 자기의 감동 포인트를 그저 추상적 개념 어들로 나열할 때보다,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로 구성해 발화할 때 행위하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서사적 일관성이 형성되어, 훨씬 이 해하기 쉽고 감동받기 쉬우며 전달하기도 쉽다.

이야기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공통경험으로 들어서게 할 수 있다.

한 개인은 대 체로 자기의 “경험을 내러티브(이야기) 형태로 만들면서 최초로 인식”하게 되는데,36 그렇게 경험(과거의 행위)이 이야기로 형성 되고 발설되면, 이야기를 시작하기 이전보다 자기의 경험(과거의 행위)이 더 잘 이해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35 Ibid., 97.

      36 캐더린 콜러 리즈만/대한질적연구간호학회(김원옥, 강현숙, 조결자, 은영) 옮 김, 뺷내러티브 분석뺸 (서울: 군자출판사, 2005), 4.

 

이러한 효과는 사적, 개 인적으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공적인 영역에서 공동체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한편 어떤 이야기는 한 번 발화되고 끝나지만, 어떤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되고 멀리까지 전파될 뿐 아니라, 사회변혁까지 이 끌어온다.

이야기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어서 그러한가?

2016- 2017 촛불집회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들 즉 민중을 중심에서 이끌 었던 ‘세월호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세월호 이야기란, 주로 청소년들이었던 세월호 참사 사망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가리킨다.

세월호 이야기는 그냥 어느 집 어느 아이의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이야기들은 ‘박근혜 정권의 문제점’이라는 공적 주제의식에 집중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었고 수용되었고 전파되었고,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세월호 이야기는 특정 주제의식을 다수의 사람들이 공적으로 공유한 이야기였고, 미화할 것도 비하할 것도 없이 다만 사실에 근거한 공정한 이야기 였다.

그 결과 세월호 이야기를 모으며 구술하며 전파한 사람 (storyteller, 이야기꾼)들은 말하자면 한국의 사회변혁 운동 역사 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37

 

       37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184; Ronald Beiner (ed.), Hannah Arendt. Lectures on Kant’s Political Philosoph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Kindle Electronic Edition, Location 1131. 

 

역사가가 되었다.

한편 세월호 이야기 중에 세월호에 탑승했던 승객들을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이야기들도 나타났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흐지부지 사라 지고 말았다.

똑같이 이야기의 형식을 띠고 나타났으나 공적 영역 에서 지속력이 매우 짧았다.

공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다.

 

2. 공정한 이야기꾼: 이야기를 역사로

 

이야기에는 미화든 비하든 일정 정도 이야기꾼의 의도가 들 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일관성을 갖추는 과정에서 그런 의도 가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는 공정한 이야기, 진 실한 이야기가 유효하며 통용된다.

미화/비하의 의도가 거의 대부 분 걸러진다.

그리하여 끝까지 공감되며 전달되는 이야기는 공정한 이야기이다.

이 같은 공정한 이야기가 곧 역사일 수 있다.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은 이야기를 논의할 때 역사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지만, 공정성을 다룬 적은 없다. 이 논문은 민 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을 더 잘 설명하며 확충하기 위해 아렌 트의 이야기이론을 끌어들이려 한다.

아렌트는 역사가 된 이야기 의 사례로 소크라테스를 제시한다.

어떤 사람이 누구였고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주인 공인 이야기를 알 때에만 가능하다.

달리 말해서 그의 전기를 알 경우에만 가능하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한 줄의 글도 또 어 떤 작품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 대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많이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소크라테 스가 누구인가를 더 잘 그리고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 해를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누구인가보다는 소크라테스가 누구인지를 우리는 더 잘 아는 것이다.38

 

     38 한나 아렌트/이진우 ‧ 태정우 옮김, 뺷인간의 조건뺸 (서울: 한길사, 1996), 247.

 

소크라테스처럼 역사적 예수는 “한 줄의 글도 또 어떤 작품도” 남기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다. 그런데 역사적 예수는 소크라테스와 달리, 플라톤이나 아리스토 텔레스 같은 이론가, 철학자들이 아니라 오클로이라는 이야기꾼 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 이야기꾼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의 특정부분을 부각하는 바울 서신들만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고,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지금처럼 풍부하고 진실되 게 알 수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클로스들은 이야기꾼들이었고, 또 역사적 예수를 다채로운 부면에서 증언한 역사가들이었다.

이 논문의 필자는, 그 역사가들이 오클로스였다는 점, 플라톤 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가 아니었다는 점에 여느 민중 신학자들처럼 주목한다.

하나님께서 오클로스-민중과 함께하셨 다고 확신한다(고전 1:27-28).

하나님의 뜻은 오클로스라는 이야기꾼들을 통하여 구현 · 구술되어 신약성서에 복음서의 형태로 실 려있다.

신약성서는 복음서를 네 권 보유하고 있다.

복음서들은 동일한 이야기에 대하여 때로 서로 다른 관점, 심지어는 서로 상 충하는 관점들까지 굳이 일치시키는 처리를 하지 않고 각각의 부분성들을 오히려 그대로 간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비부분성을 획득하는 신비로움을 발휘한다.

여기서 비부 분성은 공정성(impartiality)을 의미한다.

 

3. 비부분적(impartial) 관찰자: 부분적(partial) 행위자들 가운 데 앉아서 판단함

 

아렌트는 이야기이론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말해질 때 그 이야기의 형성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했다.

하나는 ‘부분 적 행위자’이고, 다른 하나는 ‘비부분적 관찰자’이다.

행위자는 행 위하는 순간 자신의 행위에 집중한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자기대로 여러 부분을 검토하긴 하겠지만 행위자는 자기 행위와 그 행위를 뒤따르는 반응행위들을 행위의 와중에는 전 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행위의 순간이 지나고 나서, 즉 행위의 순간으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어야 그 행위(들)의 동기와 의미와 파장을 부분적으로가 아 니라 비부분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역사적 의의도 깨달을 수 있다.

행위자가 부분적인 반면 관찰자는 비부분적이다.

비부분적이 라는 것은 부분에 함몰되지 않고 전체를 볼 수 있다는 의미를 내 포한다.

관찰자는 행위(자)와의 거리, 행위가 일으킨 사건과의 거 리를 확보하는 데에 행위자보다 좀 더 유리한 자리에 있다.

물론 비부분적 관찰자도 인간인 이상 완벽한 공정성을 구가할 수는 없 을 것이다.

다만 부분에 집착하지 않을수록 다시 말해 비부분적일 수록 공정성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뿐이다.

비부분적인 관찰자가 공정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을 지 녀야 한다.

 첫째, 비부분적 관찰자는 자신의 관찰과 그에 따르는 생각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둘째, 비부분적 관찰자는 행위자들 가운데 있어야 한다.39

 

       39 한나 아렌트/김선욱 옮김, 뺷칸트 정치철학 강의뺸 (서울: 푸른숲, 2002), 125. 

 

관찰자의 비부분성은 자동으로 갖춰진다 기보다는 ‘행위자들 속에 앉아있다’는, 내적 ‧ 외적 분투행위를 요 구한다고 하겠다.

  셋째, 비부분적 관찰자는 행위자들 속에 앉아서 판단이라는 정신활동을 수행하여야 한다.

여기서 판단이란, 일정한 규정이나 원칙에 의거하여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재판’이나 심판의 의미가 아니다.

판단이란, 아렌트가 풀이하는 칸트적 의미의 판단개념을 의미한다.

항상 타인과 타인의 취미를 반성하는 가운데, 그들이 내릴 수 있 는 가능한 판단들을 고려하게 된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내 가 인간이고 또 인간들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판단하는 것이지, 초감각적 인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40

 

      40 앞의책, 132.

관찰자들이 수행하여야 하는 판단은, 공동체를 염두에 둔 정 신활동이다.

이 정신활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곧 관찰자이며, 그 에게서 발견되는 속성이 곧 비부분성이다.

판단하는 관찰자는 이 야기꾼이 될 수 있으며 역사가가 될 수 있다.

단 그가 공동체의 구 성원으로서 판단할 경우에 한해서이다.

이를 우리 현실에 견주어 다시 말해보자.

관찰자들은 팩트체크를 필수로 진행하는 사람들 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가짜뉴스를 경계할 것이다.

그들은 행위 자들 사이에 앉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판단하기에 미화와 비하를 넘어서고자 한다. 그들이 그것을 성취 할 때 마침내 관찰자들은 행위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공정한 이야 기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렇게 구성된 이야기라 할지라 도 100% 완벽한 공정성을 구가할 수는 없다.

잠재적 공정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V. 주인공 못지않게 이야기에서 중요한 요소 : 관찰자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은 이제까지 관찰자 또는 이야기 꾼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다.

몰랐거나 언급할 필요를 못 느꼈 을 것이다.

이 논문은 이야기꾼을 이야기신학 이론의 중심테마의 한 부면으로 끌어들여 논의하는 최초의 민중신학 논문이 되리라 생각된다. 이 논문은 이야기꾼을, 역사가로서 비부분적 관찰자의 다른 표현으로 본다.

아울러 민중신학이 아렌트를 알았더라면 비 부분적 관찰자라는 용어를 사용했거나 최소한 연구했을 것이라 고 확신한다.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은 이야기의 주인공, 행위자 즉 주체로서 민중은 이야기꾼과 함께 있을 때 의미가 있음을 밝힌 이 론이다.

이는 연대(solidarity), 협력(collaboration)을 의미한다.

즉 민중이 부족하거나 결함투성이라서 ‘타인’에게 보충되어야 한다 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유한한 존재여 서, 그가 민중이든 민중이 아니든, 배제된 자든 포함된 자든, 권리 를 가진 자든 가지지 못한 자든,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에 서 그러하다.

현 사회의 불의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서로 함께해야 만 현 사회를 바꿀 수 있다.

혼자서는 사회변혁을 이룰 수 없다.

동료들과 같이 해야 하고 연대해야 한다.

혼자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독단을 부린다고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칸트는, 인간이 없는 세계는 곧 ‘관찰자(spectator, 행위를 지 켜보는 사람)가 없는 세계’라고 말했다.41

다른 인간이 하나도 없는 세계에서 살고 싶어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 행 위를 보고 듣고 반응을 해줄 타자의 존재를 요구한다.42

환언하면 인간은 타자의 공감, 협력, 연대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된다.

예를 들어보겠다.

민중신학이 출범동기로 내세운 전태일 분신 사건에서 전태일이 죽기까지 주장하였던 것은,43 자기 자신을 물리적 객체(물건, 비인간, 기계)로서가 아니라 인간존재로서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그는 분신 사건의 관찰자들에게 역할과 책임을 당부했 다.44

 

       41 한나 아렌트/김선욱 옮김, 뺷칸트 정치철학 강의뺸, 123.

      42 실화소설 뺷로빈슨 크루소뺸에서,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는 앵무새와 고양이에게 성경을 잃어주는 행위를 하며 인간다운 삶을 유지한다. 영화 <캐 스트어웨이>의 주인공 척은 배구공과 대화하며 인간다운 삶을 유지한다. 인 간다운 삶은 ‘행위’(말을 포함함)를 보고 들어줄 수 있는 타인과 함께할 때 건 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43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근로자에게도, 모든 것을 빼앗 긴 지지리도 천한 핫빠리 인생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는 있는 것이로구나” 라는, 거의 “환희”에 가까운 깨달음의 사건이었다. 바보회 활동, 설문조사 활 동, 신문방송에의 접촉활동, 마침내 분신자살 활동까지···, 전태일의 모든 활 동은 ‘인간답게 살 권리의 주장’에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태일기 념관건립위원회 엮음, 뺷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뺸 (서울: 돌 베개, 1983), 119.            44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176.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전태일의 당부에 부응하는 관찰자들, 이야기꾼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태일 이야기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전태일의 인생이야기를 발설한 열혈 이야기꾼들 중 한 부류가 민중신학자들이었음은 재론의 여지 조차 없는 사실이다.

전태일의 인생이야기는 민중신학적 신앙고백으로 번역되어 통용되었다.

민중신학은, 민중사건이 행위자 혼자 만들어내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를 구술하는 이야 기꾼들과 연대, 협력할 때 나타나고 유지된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그 연대와 협력의 의미를 제1세대 시기에 자신들 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으면서도, 명확히 짚어주지 못했다 는 점이다.

제2세대 이후에는 그것 아닌 다른 지점을 탐구하였다.

이 논문은 이야기신학 이론을 통해 민중신학도들이 연대와 협력 의 의미를 더욱더 전개해나가자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야기신학의 최초주창자들은 자신들이 민중이 아니라고 주 장했지만 자신들이 누구인지는 굳이 밝히지 않았다.

이 논문은 이 제 그들을 ‘비부분적 관찰자/이야기꾼’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녹음기처럼 민중의 말을 재생하는 방식으로 증언하지 않았고, 민중이라는 행위자들 사이에 앉아있으면서 이야기를 구축 해냈고, 전파했다.

이야기를 통해 행위의 의미를 분석하기도 했고,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선배 민중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하기(storytelling)가 공동체를 염두에 둔 판단활동(칸트의 의미에서 ‘판단’)에서 나온 것임을 명확하게는 몰랐던 것 같다.

다만 묵묵히 판단활동을 지속했을 따름이다. 그들이 그 판단활동 을 지속한 결정적 이유는, 예수가 말한 이웃사랑 계명을 지키는 차원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체포와 해직과 고문이 낭자 하던 당대에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그들은 비부분적 관찰자인 동시에 부분적 행위자이기도 했기 때문이 다.

안병무는 대놓고 이론적 체계화를 후배들에게 맡겼다.45

 

        45 안병무, 뺷민중신학이야기(개정신판)뺸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8), 73. 

 

VI. 맺음말

 

이 논문은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을 아렌트의 이야기이 론에 비추어 살펴보면서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이 지닌 두 가지 원칙적, 원형적 강점을 강조하였다.

  첫째는, 민중신학이 배 제되고 무시당하는 가난한 사람들(민중)의 행위를 담은 ‘이야기’ 를 중시함으로써 민중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줄기차게 표현해왔 다는 점이다.

  둘째는, 행위자의 부분성, 관찰자의 비부분성 그리고 칸트의 판단개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면, 민중신학자들의 그 같은 활동은 이웃사랑의 실천에 다름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의 강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 논문은 먼저 아렌트의 이야기이론이 밝히고 있는 행위개념을 환기하였다.

아렌트의 행위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프락시스’ 개념과 유사하나, 동일하지 않다.

아렌트는 프락시스에 들어있는 목적성과 도구성을 삭제하여 하버마스의 표현대로 프락시스를 새롭게 하였다.

이는 서구 철학 전통에 오랫동안 경직되게 스며들어있던 목적론적 ‧ 도구주의적 이해로부터 행위를 해방 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논문은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을, 정치신학으로 출범했던 민중신학 내부의 개념만을 가지고 탐구하는 게 아니라, 정치사상가인 아렌트의 행위이론의 개념을 가져와, 프락시스에 연원하되 프락시스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행위와 이야기를 풀이하며, 민중 미화의 위험성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작업을 감행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민중신학이 철저하게 기독교적 신앙에 기반하여 있음을 입증하였다.

다음으로 이 논문은 아렌트가 자신의 이야기이론에서 언급한 비부분성 즉 공정성개 념과 칸트의 판단개념이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에도 유익 하게 활용될 수 있음을 보였다.

다시 말해 칸트에 연원하는 공정성 개념이 민중신학의 이웃사랑 행위를 설명하는 데에 유익한 개 념임을 보인 것이다.

이 논문의 학술적 의의는

   첫째, 그간 민중신학이 자주 다루지 않았던 ‘민중미화의 위험성’ 문제를 민중신학의 원칙과 목적을 훼 손하지 않으며 다룬 진지한 접근이라는 데에 있을 것이다.

   둘째, 이 논문은 이야기신학 이론에 대한 건설적 비판과 참신한 대안 제시가 드문 현실에서 언어 ‧ 문학, 혹은 정신분석학 영역에 관한 지 식을 ‘신학에 적용하는’ 게 아니라 매순간 역사로 지어져가는 우리의 일상과 민중사건 현장을 ‘독자적으로 관찰하고 성찰하는’ 방 법론으로서 행위 중심의 이야기를 주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세월 호 이야기와 전태일 이야기를 직접적 사례로서 살펴보았다.

  셋째, 이야기를 이웃사랑 행위에 연결하여 풀이하는 새로운 시도를 감 행하였다.

이 논문이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을 이제까지와 는 다른 새로운 각도로 살펴보면서 새로운 논쟁거리를 제시하는 자그마한 시도였다고 이 논문의 필자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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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초록

 이 논문은 1970-80년대 한국사회에서 민중이 행위자로 나섰던 때 그 민중의 행위를 이야기로 열심히 전파한 민중신학자들의 신앙적 동 기에 관심을 둔다.

물론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사건 현장에 직접 뛰어 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민중신학자들은 스스로를 민중이나 역사 적 주체로 부르지 않았다.

민중신학자들은 자신들을 민중에 동일시 하지 않았다.

이 논문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올바랐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우선적 역할이 ‘이야기하기’ 임을 정직하게 수용했기 때문이다.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이론에 비추어볼 때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의 “틈새”(아렌트의 용어)에 항상 충실히 앉아있었다.

아렌트의 용어로 설명하면 관찰자이자 이야기꾼 노릇을 제대로 감당하 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민중신학자들에게 자연스럽고 적 합한 것이었으며 기독교 신앙에 비추어볼 때 타당한 것이었다.

이 논문은 민중신학자들의 그 같은 활동의 동기를 예수의 두 계명 중 하나 인 ‘이웃사랑’에 연결한다.

즉,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은 민중 신학자들이 민중과 “함께 행위한”(아렌트의 용어) 사랑의 행위를 종합적으로 그려낸 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아렌트의 이야기이론은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이 지닌 그 같은 장점을 아주 잘 드러내어준다.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각도로 살펴보는 이 논문의 학술적 의의는

  첫째, 그간 민중신학이 자주 다루 지 않았던 ‘민중미화의 위험성’ 문제를 민중신학의 원칙과 기치와 목적을 훼손하지 않으며 다룬 진지한 접근이라는 데에 있을 것이다.

  둘째로는, 이 논문이 언어 ‧ 문학, 혹은 정신분석학 영역에 관한 지식 을 ‘신학에 적용하는’ 게 아니라 매순간 역사로 지어져가는 우리의 일상과 민중사건 현장을 ‘독자적으로 관찰하고 성찰하는’ 방법론으로서 행위중심의 이야기를 강조하였다는 데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 논문은 이야기를 이웃사랑 행위에 연결하여 풀이하는 새로운 시도 를 감행하였다.

이 논문은 민중신학의 이야기신학 이론을 이제까지 와는 다른 새로운 각도로 살펴보며 새로운 논쟁거리를 제시함으로 써 민중신학계에 기여하고자 한다.

 

주제어 ‖ 이야기신학, 한나 아렌트, 행위, 민중미화, 관찰자

 

Abstract

Iyagi Theology in Minjung Theology and Love of Neighbor : Rereading Iyagi Theology by Comparing with Story Theory by Hannah Arendt

Lee, Inmee (Th.D. Researcher of the Institute for the Study of Theology Sungkonghoe University Seoul, Korea)

 

In this essay, the author attempts to prove that so-called 1st generation Minjung theologians were as storytellers when Minjung were as actors in South Korean society in 1970-80’s. The author’s attention is what was Minjung theologians’ inner motives of becoming storytellers at that time. As we know, 1st generation Minjung theologians were actors too. But then they didn’t call themselves as Minjung, i.e. the subject of history which means actors. Of course Minjung theologians went into the site of many Minjung events and acted together with Minjung, however they didn’t identify themselves with actors or the subject of history in those days. The author sees that’s right for political. Because they faithfully admitted that their priority was storytelling.  From the point of view of Hannah Arendt, a political thinker, actually Minjung theologians always have been trying to sit “inbetween”(Arendt’s term) Minjung. For them, Minjung theologians, that was spontaneous, proper, and relevant to their Christianity. The author considers that Minjung theologians have carried out ‘love of neighbor,’ one of the greatest commandments that Jesus Christ have told his disciples. According to Story theory by Arendt, that’s for very sure. Therefore the author emphasizes that Minjung theologians’ Iyagi(Story) theology was a love theory, and was an expression of “acting in concert”(Arendt’s term) as spectators at Minjung events.

 

‖ Keywords ‖  Iyagi theology, Hannah Arendt, Action, Minjung glamorizing, Spectator ‧

 

투고접수일: 2019년 7월 14일 ‧ 심사(수정)일: 2019년 9월 4일 ‧ 게재확정일: 2019년 9월 9일

 한국조직신학논총 제56집(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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