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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반드루넨의 공공신학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황경철.CCC

[한글초록]

기독교 인구의 감소와 한국교회의 쇠퇴는 코로나 3년을 지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와 맞물려 교회의 공적 책임과 기독교의 공공선에 대한 강 조도 부각되었다. 교회가 사회 속에서 어떻게 공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지를 다루는 신학 분야를 공공신학이라고 한다. 본고의 목적은 최근 개혁 파 진영에서 자연법과 두 왕국론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데이비 드 반드루넨의 공공신학을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본고 의 진행순서는 다음과 같다. 서론에서 반드루넨의 이론에 대한 최근의 다 양한 논쟁들을 예비적으로 소개하며, 쟁점이 되는 요소를 세 가지로 추출 할 것이다. 본론에서는 이 세 가지에 해당하는 1) 두 왕국론 2) 문화명령 부정 3) 자연법과 노아 언약을 개관할 것이다. 이어서 그의 주장이 개혁신 학적으로 정당한 지지를 받는지 검토하기 위해 성경신학적, 조직신학적 도구를 활용하여 항목별로 평가를 시도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 측면 모 두 개혁신학 전통 안에 안전히 자리하고 하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다는 것이 본고의 요지이다. 이러한 논구를 통해 우리는 개혁파 전통에 충실한 공공신학의 특징이 무엇인지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주제어: 데이비드 반드루넨, 공공신학, 두 왕국론, 자연법, 노아 언약, 문화명령]

 

Ⅰ. 들어가는 말

코로나 3년을 지나면서 한국교회는 사회적 비판을 마주하는 동시에 기 독교 인구의 감소를 겪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 목회자 협의회의 발표에 따 르면 개신교 15.0%, 불교 16.3%, 가톨릭 5.1% 수치로 개신교 인구는 불교 에 미치지 못하였다.2)

이러한 현상에 대한 원인과 한국교회의 문제점으 로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 및 공적 책임에 대한 결여가 대두되었다. 목회 데이터연구소는 향후 한국교회가 집중해야 할 1순위로 ‘자기 교회 중심에 서 벗어나 한국교회 전체를 바라보는 교회의 공공성’을 꼽았다(개신교인 39%, 비개신교인 49%).

또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하여 ‘지역 사회와 한국 사회를 섬기는 공적 역할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개신교인의 80%, 비개신교인의 83%가 ‘그렇다’고 응답하였다.3)

 

     2)리폼드투데이,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신앙의식 조사”, https://blog.naver.com/heartspirit/ 223035278308 (2023. 4. 7. 접속).

     3) 목회데이터연구소, “지난 1년간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한국교회 신뢰도 32%에서 21%로 급락”, 「넘버즈」 82 (2021. 1): 1-10. 

 

조영호는 양극화가 심화되어가는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갈등 조정자로서 그리고 공동선 제 안자로서 자질이 부족한데, 그것은 형편없는 도덕성과 구조악에 대한 무 관심, 방관, 협조로 인한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4)

교회가 사회에서 어떻게 공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신 학 분야를 공공신학(公共神學), 또는 공적신학(公的神學)이라고 한다.5)

본고의 목적은 공공신학과 관련하여 개혁신학 진영에서 활발하게 활동 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데이비드 반드루넨(David VanDrunen, 1971- )6)의 주장을 개괄하고 그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를 시도하는 것이다.

반드루넨은 ‘자연법과 두 왕국론’에 기초하여 그리스도 인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 제 시한다.

두 왕국이란 교회와 국가를 말하는데, 반드루넨은 자신의 두 왕국 론이 개혁파 전통 안에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루터와 칼빈의 궤적을 이러한 관점에서 추적한다.7)

 

     4) 조영호, “복음주의와 공공신학”, 「조직신학 연구」 27 (2017): 185-86.

     5) 현대 공공신학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프린스턴의 교수이자 ‘카이퍼 센터’의 초대 원장이었던 맥스 스 택하우스 (Max L. Stackhouse)는 “공공신학이란 사회의 영역에서 종교가 지니는 역동성을 인정 하되 그 역동성의 어떤 특질이 유효하고 정당한지를 평가하기 위해 윤리적인 기준에 따라 성찰하고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Max L. Stackhouse, God and Globalization: A Public Theology for a Global Era (New York: Continuum International Press, 2007). 이승구 는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증언하는 교회의 신학”으로 정의한다. 이승구, 『광장의 신학』 (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10), 41. 영어 표현인 public theology를 공공신학이나 공적신학 으로 모두 번역할 수 있겠으나, 논자는 비교적 많이 통용되는 ‘공공신학’으로 본고에서 사용하고자 한다.

      6) 반드루넨은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시카고 로욜라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 및 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재직 중 이며, 정통장로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이자 정식 자격증을 취득한 변호사이기도 하다. 박사 논 문은 Natural Law and Common Law: The Relationship of Law and Custom in the Moral Theology of Thomas Aquinas (Chicago, Illinois: Loyola University, 2002)이다.

      7) David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Grand Rapids: Eerdmans, 2009), ⅶ-ⅷ, 13; 김남국 역, 『자연법과 두 나라』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4-7, 32. 

 

반드루넨의 두 왕국론 의 핵심은 교회는 특별계시인 성경이 다스리고, 국가는 일반계시인 자연 법이 다스리므로 서로 구별되며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 록, 둘 다 하나님에게서 임명받았고 하나님의 법 아래에 있지만,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규칙에 따라 작용한다는 것이다.8)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인의 세상 문화에 대한 태 도와 일상 속 삶의 양식을 결정하는데, 반드루넨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 의 삶을 ‘나그네’로 규정한다.

즉, 신자는 문화 활동을 수행할 때, 세상을 변혁하고자 기독교적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와 그런 활동을 함 께하는 나그네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9)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왕국을 여전히 노아 언약에 기초한 자연법을 통해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 와 구별된 왕국인 교회는 문화를 변혁시킬 것이 아니라 교회다움에 집중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0)

이러한 반드루넨의 주장은 이 세상과 문 화는 재림 때에 종결될 것이라는 그의 종말론적 관점에 의해 한층 강화된 다.11)

반드루넨은 문화명령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사명을 완수하셨기에 첫 아담에게 주어진 사명도 완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

 

     8)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13; 『자연법과 두 나라』, 31; 김남국 역, 『하 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168.

     9)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24.

    10)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174-75; 박문재 역, 『오직 하나님의 영광』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271.

     11)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83.

     12)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82. 

 

본고는 ‘자연법과 두 왕국론’에 기초한 반드루넨의 공공신학적 주장이 과연 개혁신학 전통에 정당한 지지를 받는지 평가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반드루넨에 대한 선행 연구 작업을 통해 논쟁의 핵심이 되는 세 가지 쟁점 을 추출할 것이다.

이를 중심으로 하여 반드루넨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 지 살핀 후에, 각 쟁점별로 평가를 시도를 거쳐 결론을 맺고자 한다.

 

Ⅱ. 논쟁의 핵심

 

반드루넨에 대한 논의는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최근까지 지속되고 있다.13)

개혁신학 내에도 반드루넨의 ‘자연법과 두 왕국론’을 찬동하는 입 장이 있는가 하면,14)

개혁파 “전통과는 낯설다거나 루터파에 가깝다고 강 하게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15)

제리 와딩톤은 반드루넨의 󰡔언약과 자연법󰡕 에 대한 서평에서 반드루넨이 개혁신학의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구속사 와 성경 신학에 기초한 자연법의 형성과 내용과 기능을 서술하였다고 말 한다.16)

 

      13) 황경철, “제임스 스미스와 데이비드 반드루넨의 공적신학 비교연구” (철학박사학위논문, 합동신학 대학원대학교, 2022); 우형민, “데이비드 반드루넨의 개혁파적 두 왕국 이론과 자연법사상에 대한 연구 (철학박사학위논문, 백석대학교, 2022).

     14) 이러한 입장으로는 마이클 호튼, 메러디스 클라인, 데릴 하트를 거론할 수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 들은 모두 반드루넨이 재직 중인 서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진들이다. Michael Horton, Beyond Culture Wars (Chicago: Moody, 1994), 35, 83; Darryl Hart, “Two Kingdoms Come,” Touchstone (2006, 2), 41. 반드루넨과 일치된 입장은 아니지만, Matthew Tuininga, “The Two Kingdoms Doctrine: What’s The Fuss All About? Part One,” Reformaion 21, (2012. 3); Calvin’s Political Theology and Public Engagement of the Churc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도 보라.

     15) 반드루넨의 두 왕국론에 반대하는 입장으로는 Willem J. Ouweneel, The World is Christ’s: A Critique of Two Kingdoms Theology (Toronto: Ezra Press, 2018), 5; S. G. de Graaf, “‘Christ and the Magistrate’ and ‘Church and State’: Two Addresses by S G. de Graaf,” trans. Nelson Kloosterman, in Kingdoms Apart: Engaging the Two Kingdoms Perspective, ed., Ryan C. Mcllhenny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12), 85-124, esp., 89-91; Michael N. Jacobs, “The Resurgence of Two Kingdoms Doctrine: A Survey of the Literature,” Themelios 45/2 (2020): 328; Cornelis P. Venema, “Christ’s Kingship in All of Life,” MidAmerica Journal of Theology 25 (2014): 8; John M, Frame, The Escondio Theology (Lakeland, FL: Whitefield Media Productions, 2011).

     16) Jeffrry Waddington, “Review of Book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78/1 (2016): 203. 

 

자연법이 특별계시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하나 님께서 규범으로 말씀하시는 도덕 질서라는 점, 자연법의 성경적 근거를 노아 언약과 관련지어서 주해적으로 해설한 점, 보편적 자연법이 무시되 고 파기된 것을 고발한 내용을 선지서와 신약의 로마서 2장 15절과 연결 하여 설명한 점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하나 님이 아담과 맺은 창조 언약(행위 언약)을 반드루넨이 자연법적 성격을 띤다고 보면서도, 그것이 은혜 언약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간과한 점, 개 혁파 언약 신학에서 볼 때 자연법 안에 함의된 종말론적 요소를 충분히 강 조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그의 자연법 사상이 개혁파 전통에 충실한지 의문을 제기한다.17)

마이클 호튼은 두 왕국 사상에 찬동하면서 복음이 사회적인 이슈와 구 분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 이유는 복음이 모든 공적인 영역 과 사회적인 이슈에 대하여 답변을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인데, 이생의 일 시적인 문제는 일시적인 답변으로 해결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 다.18)

가령, 호튼은 그리스도인이 동성애자의 권리에 대항하여 십자군처 럼 대응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동성애가 교회에서 수 용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그러한 반대가 복음이 사회 적, 정치적으로 울려 퍼질 기회를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일한 입장에서 대릴 하트(Darryl Hart)는 교회의 사명은 오고 오는 세상 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지, 이 세상을 새롭게 하거나 개혁하기 위 하여 선지자적 선포를 하도록 부름받은 것은 아니라고 두 왕국론을 지지 한다.19)

반드루넨의 자연법 사상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대화의 종결자로 비치기 쉬운 종래의 크리스텐덤적 접근에서 벗어나 상대를 존중하며 보편적 가치를 논의하는 대화의 장을 열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에 실천적으로 유익한 면이 있다.

󰡔기독교 정치학󰡕에서 제시 한 그의 정부의 크기와 역할, 구체적인 정책과 대안들은 기존의 신칼빈주 의 정치신학 비전이 지닌 낭만적이고 공허한 면모를 극복하고 매우 정교 하고 실질적이다.20)

 

       17) Jeffrry Waddington, “Review of Books,” 205.

      18) Michael Horton, Beyond Culture Wars (Chicago: Moody, 1994), 35, 83.

      19) Darryl Hart, “Two Kingdoms Come,” Touchstone (2006, 12): 41.

      20) VanDrunen, Politics after Christendom, 120, 161, 234, 346-48.

 

또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의 입장을 따라 신자가 이땅의 이웃들과 “신실한 함께함”으로 순례자로 살아갈 때, 교회의 교회다 움이 회복되고,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은 적실하다.21)

반면에 반드루넨의 자연법과 두 왕국론에 대한 다양한 비판도 제기된 다. D. A. 카슨(D. A. Carson)은 두 왕국 사상이 성경 주제에 대해 지나 치게 치우친 독법(讀法)이라고 비판하면서 이것은 전통적인 개혁파 사상 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22)

카슨은 두 왕국 사상의 위험을 언급하 며 성경이 말하는 총체성의 가르침을 간과하고, 하늘 시민권과 로마 시민권을 동시에 인정하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회피하며, 정부의 문 제에 대한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주변으로 밀어냄으로써 자신들 이 신실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23)

넬슨 클루스터만(Nelson Kloosterman)은 바빙크를 인용하며 두 왕국론에 입각한 반드루넨의 주 장은 두 명의 바빙크를 주장하려는 시도와 같다고 비판한다.24)

두 왕국론 에 대한 비판은 존 프레임(John M, Frame)에 의하여 강도 높게 드러난다.

프레임은 반드루넨의 두 왕국 사상이 루터파에 가깝다고 지적하면서 심 각한 의구심을 제기한다.

심지어 그것은 정통 개혁신학과는 결이 다른 그 들만의 신학이라고 비평하며, ‘에스콘디도 신학’이라고까지 규정한다(에 스콘디도는 서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위치한 도시 이름이다).25)

프레 임은 호튼이 탁월한 글쓰기와 의사소통으로 “두 왕국 신학” 또는 “에스콘 디도 신학” 운동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지목한 다.26)

 

    21) VanDrunen, Politics after Christendom, 170-71; 『기독교 정치학』, 251-52.

    22) D. A. Carson, Christ and Culture Revisited, 김은홍 역, 『교회와 문화, 그 위태로운 관계』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09), 374-77.

    23) Carson, 『교회와 문화, 그 위태로운 관계』, 261.

    24) Nelson Kloosterman, “A Response to ‘The Kingship of Christ Is Twofold’: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 in the Thought of Herman Bavinck by David VanDrunen,” Calvin Theological Journal 45 (2010): 165-76.

     25) John M, Frame, The Escondio Theology (Lakeland, FL: Whitefield Media Productions, 2011).

     26) Frame, The Escondio Theology, 13. 

 

윌리엄 데니슨(William D. Dennison)은 반드루넨이 두 왕국 사상을 주장하기 위하여 인용한 논거적 자료가 취약하여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 한다.

데니슨은 반드루넨의 두 왕국과 자연법 사상(Two Kingdom and Natural Law)이 사용한 영어판 1차 사료의 적실성과 신뢰성에 대한 의문 을 제기하며 그의 연구가 작가의 원래 의도를 제대로 포착하였는지에 대 하여 회의적 입장을 표한다.

반드루넨의 연구는 개혁파 전통에 비추어 볼 때, 그 주제의 역사적 연구에 대한 사소한 각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27)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근거하여 두 왕국 이론에 대한 반드루넨의 독단적이고 과장된 평가와 해석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경각 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반드루넨의 주장은 사상가들 의 구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학제적 맥락들을 그가 진정으로 이 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28)

두 왕국론은 역사적으로 로마제국에서와 같이 이분법적 사고를 강화하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문화명령의 사명을 간과한 채, 그저 주어지는 사회적 문화적 이슈들에 응답하는 것을 정당화시킨다고 데니슨은 지적한다.29)

코넬리스 비네마(Cornelis P. Venema)도 두 왕국 사상이 이원론적 세계관 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영적이며 교회적인 것(the one spiritual and churchly)과 비영적이며 세속적인 것(the other non-spiritual and worldly)을 구분하려는 최근 개혁파 안에서의 새로운 주장은 이원론적 세계관의 하나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비네마는 이러한 사상의 이론적 기초가 두 왕국과 자연법 사상이라고 지적하며 이를 주도하는 신학자로 반드루넨을 적시한다.30)

 

       27) William D. Dennison, “Review of VanDrunen’s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75 (2013): 369.

       28) Dennison, “Review of VanDrunen’s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370.

       29) Dennison, “Review of VanDrunen’s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370.

       30) Cornelis P. Venema, “Christ’s Kingship in All of Life,” Mid-America Journal of Theology 25 (2014): 8.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우리는 두 왕국의 관할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지 않는다며 두 왕국론을 비판한다.31) 교회가 이미 예배를 통해 참된 주되심을 선포하는 정치 공동체 (폴리스)로서 영혼의 회심뿐 아니라 사회적 상상의 회심이라는 방식으로 사회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증언하고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32)

 

     31) James K. A. Smith, Awaiting the King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7), 159; 박세혁 역, 『왕을 기다리며』 (서울: IVP, 2019), 273.

     32) Smith, Awaiting the King, 162; 『왕을 기다리며』, 275. 

 

이상의 논의를 통해 나타난 주요 쟁점인 두 왕국론, 문화명령 부정, 자 연법에 대하여 본고는 반드루넨의 주장을 먼저 확인한 후에, 그에 대한 평 가를 진행하고자 한다.

 

Ⅲ. 반드루넨의 주장

 

1. 두 왕국론

 

반드루넨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한 분 왕이지만, 두 개 의 왕국을 통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신다고 말한다.33)

 

      33)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그는 신자 와 불신자 사이에 근본적인 영적 대립도 발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자 와 불신자 사이에 상당히 큰 문화적 공통성도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한다.

두 왕국론에 대한 그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하나님은 노아 언약을 통해 일반 나라를 통치하시는데, 자연계의 질서를 유 지하시며 신자나 불신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망라하는 사회질서를 규정 하신다.

또 한편,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정식으로 맺으신 은혜 언약을 통해 구속의 나라를 통치하시는데, 신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며 세상과는 별도로 신자를 믿음과 예배의 거룩한 공동체 안에 두신다.

그 두 나라는 고유한 독특성을 지니며 이 세상에서 별개의 목적에 기여하지만, 두 나라 모두 주권자 하나님의 윤리적 권위 아래서 움직인다.

두 나라는 신적 언약을 기반으로 수 립되는데, 하나님은 두 나라 모두에서 자신을 섬기도록 신자에게 명령하신 다.34)

반드루넨은 두 왕국 사이에 명확한 구별성과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하 면서, 국가는 노아 언약과 자연법에 그 권위와 근거를 두지만, 교회는 아 브라함과 맺으신 은혜 언약에 기초한다고 한다.

국가는 한시적이어서 재 림시 종결되지만, 교회는 재림 후에도 영원히 지속되는 구속의 나라이다. 신자는 이 두 왕국에 속한 사람으로서 국가에 속한 정치 활동과 문화를 향 유하지만, 그것을 변혁하고 구속해야할 사명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35)

신 자는 비록 두 나라에 살고 있지만, 이 중 한 나라만이 지속될 운명임을 기 억하고 일반 나라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면서, 재림의 때에 구속의 나 라가 충만한 영광 가운데 도래할 것을 간절히 기다린다.36)

 

       34)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127.

       35)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24.

       36)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167. 

 

반드루넨은 두 나라의 대립성 가운데 신자의 세상 문화에 대한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 예 레미야 29장에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인용한다.

기본적 그림은 분명해진다.

70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은 바벨론에서 나그네 로 살 운명이었으며, 보통의 문화 활동을 수행하고 약속의 땅을 짓밟은 바로 그 민족의 평안을 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참되신 하나님께 대한 종교적 헌신에서 바벨론 사람과 여전히 구별되어야 하고,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소망을 붙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비록 보전할 수 없더라도 집을 짓고 텃밭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 다.

70년의 기한이 끝나면,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 집과 텃밭을 남겨두고 떠나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벨론 에서 보낸 시간은 주인인 바벨론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시간인 동시에, 바 벨론이 멸망한 날을 간절히 소망하는 시간이었다.37)

반드루넨의 두 왕국의 대립성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가 중보사역으로 이룬 ‘구속’과 ‘회복(재창조)’을 분리하려는 시도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반드루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회복 으로 이어진다는 많은 주장에 대하여, 이는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고 거부한다.38)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속 사역의 성 취를 통해 아담에게 주어진 문화명령을 종말론적으로 달성했다는 것이 다.39)

그 결과 신자는 더 이상 종말론적 안식을 위해 일하는데 있어서 하 나님을 닮는 것이 아니라, 그 안식을 누림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는다고 주 장한다.40)

그리스도의 승천을 통하여 새 창조가 완성되었기에 신자에게는 창조세계를 회복시키거나 점진적으로 변형시켜야 할 어떠한 사명이나 책 임도 없다.41)

신자는 현재의 하늘과 땅을 태워 버릴 마지막 날의 불 심판 (벧후 3:5-12; 히 12:25-28; 계 6:12-14)을 염두하여 오는 세상에서 사라질 인간 문화 산물을 변혁하기보다 장차 올 세상에 나타날 참된 본향을 사모 하고 동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롬 8:18; 히 11:10).42)

 

      37)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123-24.

      38)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82 (강조는 덧붙인 것);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429; 『자연법과 두 나라』, 652.

      39) David VanDrunen, Divine Covenants and Moral Order (Grand Rapids: Eerdmans, 2014), 447; 김남국 역, 『언약과 자연법』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603.

      40) VanDrunen, Divine Covenants and Moral Order, 447; 『언약과 자연법』, 603.

      41) VanDrunen, Divine Covenants and Moral Order, 438; 『언약과 자연법』, 597.

      42) VanDrunen, Divine Covenants and Moral Order, 437-38; 『언약과 자연법』, 596-97;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165-66.

 

이러한 그 의 주장은 신자의 세상 문화에 대한 태도를 확립하는데, 그것은 문화명령 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난다.  

 

2. 문화명령 부정

 

반드루넨은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문화명령(창 1:26-28)을 부정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논자는 그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반드루넨의 논거를 요약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문화명령의 부정은 두 왕국의 날카 로운 대립성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43).

 

우리가 이룩한 문화적 성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룩한 문화적 성과 자체는 장차 올 세상에까지 지속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44)

신자는 침몰 중인 배와 같이 마침내 사라지고 마는(고전 7:31) 한시적인 것에 문화적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천국 시민의 영생과 상속자가 되는 경이로움의 빛 아래서 문화 활동을 전망하고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드루넨은 문화 활동 자 체를 무가치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 들은 오는 세상의 영구한 도성에 비길 때, 일시적이고 제한적 기쁨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가족, 학교, 기업, 정부는 선하고 정당한 제도지만 또한 덧없고 일시적인 제 도이기도 하다.

문화 활동에서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순례자가 느끼는 기쁨 이요 거류민과 나그네가 느끼는 기쁨이다.

그것은 궁극적인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잠시 베푸시는 작은 복에 조용히 감사하는 기쁨이다.45)

 

 둘째, 그리스도가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마지막 아담으 로 오신 그리스도가 십자가 사명을 완수하셨기에 첫 아담에게 주어진 사 명도 완성되었다는 것이다.46)

 

       43)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427-29; 『자연법과 두 나라』, 649-50, 652.

       44)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18.

       45)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17-18.

       46)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82.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회복 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고, 거룩한 성전으로 바꾸고 보호하기 위해 일정 구획의 땅을 받은 적도 없으며, 마귀를 무찌르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없 다.47)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까닭에 우리가 회복을 위한 어떤 노력도 그분이 완성한 사역과 거저 주신 은혜에 우리의 공로를 얹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신자는 마지막 날 부활의 생명과 영광의 통치에 참여할 것을 소망하며 이 땅의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다.48)

 

셋째, 이생의 문화 활동과 산물이 철저히 종결될 것이기 때문이 다.49)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 질서가 급작스럽게 그리고 철저히 종결 되고, 장차 올 세상은 이 세상이 파괴되는 모습 가운데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한다.50)

이것은 이생과 내생 사이의 불연속성에 대한 반드루 넨의 관점을 반영한다.51)

그렇다면 공공신학적 관점에서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인에게 세상 문화 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라고 제안하는 것일까? 반드루넨은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신자는 자기 이웃에 대한 승리와 정복 정신으로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정신으로 문화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둘째, 신자는 인간 문화에 비판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타락한 세상에서 죄가 인간 문화를 부 패시키는 많은 방식에 대하여 항상 경계하고 유의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셋째, 신자는 장차 올 세상에 나타날 우리의 참된 본향을 동경하고 이 세상에 나그네로서 깊은 거리감을 유지하며 문화 활동에 참여해야 한 다는 것이다.52)

 

     47)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82; David VanDrunen, Politics after Christendom: Political Theology in a Fractured World (Grand Rapids: Zondervan, 2020), 174; 박문재 역, 『기독교 정치학』, (서울: 부흥과개혁사, 2020), 257.

    48)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76.

    49)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83.

    50)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84.

    51) VanDrunen, Divine Covenants and Moral Order, 438; 『언약과 자연법』, 598; 『하나님의 두 나 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166.

    52)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162-66. 

 

3. 자연법과 노아 언약

 

자연법은 반드루넨의 두 왕국론을 지탱하는 기초와 토대가 된다.

일반 나라의 기초가 자연법이라면, 구속의 나라의 기초는 특별계시인 성경 이다.53)

일반 나라의 목적은 타락으로 인해 만연한 부패와 죄를 억제시키 는 것이라면, 구속의 나라의 목적은 의인을 배출하여 신자들이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도록 돌보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법은 일반 나라의 통치원리 로 작동하여 이 세상을 재림의 시점까지 보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 다면 반드루넨이 주장하는 자연법 사상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반드루넨은 그것을 노아 언약(창 8:22-9:17)에서 찾는다.54)

노아 언약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온 인류를 포용한다는 점에서 ① 보편적이고, ② 자연 질서와 사회질서를 보전하며(구속이 아니라), ③ 항구적이 아니라 한시적 이며, ④ 정의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합법적이다.55)

반드루넨에 따르면 보편적 정치 공동체는 노아 언약에 근거한 자연법에 기원을 두고, 하나 님의 정의를 시행함으로써 시민 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것이다(롬 13:1-4).56)

흥미로운 점은 반드루넨이 노아 언약의 성격을 규명하면서 은혜 언약적 성격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57)

 

    53) VanDrunen, Politics after Christendom, 325; 『기독교 정치학』, 491.

    54)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104-106.

    55) VanDrunen, Politics after Christendom, 26-38; 『기독교 정치학』, 32-47;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104-105.

    56) VanDrunen, Politics after Christendom, 96; 『기독교 정치학』, 150.

    57) VanDrunen, Divine Covenants and Moral Order, 110; 『언약과 자연법』, 154-55. 

 

노아 언약은 이후에 주어지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새 언약과 달리 구속적 성격의 은혜 언약이 아니라 보존적 성격의 일반 언약이라고 확언한다.

반드루넨에게 노아 언약은 은혜 언약이라기보다는 일반 국가의 설립과 보존을 담보하는 일반 언약이다.

그는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은 맞지만, 예수님이 국가 제도를 세우신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교회는 은혜 언약 아래 있는 구속의 나라이고, 국 가는 노아 언약 아래 있는 일반 나라라고 하면서 둘의 관계를 날카롭게 대 립시킨다.58)

노아 언약을 통해 그들은 계속해서 형상을 지닌 자로서 하나님의 도덕법에 구속되고, 노아의 자연법을 통해 그들은 계속해서 그것이 기본적인 수준에 서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구속적인 은혜 언약이 아닌, 노아 언약은 이 도덕적 책무를 수립한다.

그런 까닭에 나는 결혼의 정체성, 태아의 지위, 부와 가난의 문제와 같이 논쟁의 여지가 있는 사회적 문제들이 모든 사람과 연관된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며, 공공정책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고 그리스도 인들이 생각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59)

반드루넨은 신자가 이 자연법 사상을 활용하여 오늘날 다원주의 사회 에서 불신자와 상식(일반은총)에 근거하여 정당한 토론이 가능해질 수 있 다고 논증한다.

즉, 신자가 문화 활동을 수행할 때, 객관적으로 고유한 기독교적 방식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60)

왜냐하면, 문화적 과업에서 신자에게 기대되는 윤리적 요건이나 불신자에게 기대되는 윤리적 요건과 대체로 똑같고, 그런 문화적 과업에 대한 우수성의 기준도 신자와 대 체로 동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1)

사람은 비록 성경을 결코 읽은 적이 없더라도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기본적인 윤리법을 여전히 알고 있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2)

 

       58)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158.

       59) VanDrunen, Divine Covenants and Moral Order, 490-91; 『언약과 자연법』, 661-62.

       60)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20.

       61)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21.

       62)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21.

 

노아 언약은 ‘인간의 통상적인 활동과 제도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하고, 따라서 인간 공동체는 실질적이면서도 소박한 공동선을 중심으로 통합 된, 광범위하게 다원주의적인 공동체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것은 인종 차별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종교의 자유를 광범위하고 관대하게 보장하는 다 원주의다.63)

그러므로 신자와 불신자가 똑같이 정치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한다고 할 때, 신자가 불신자에 비해 정치 공동체의 구조와 본질에 더 잘 안다고 보증할 수 없다.64)

 

      63) VanDrunen, Politics after Christendom, 213; 『기독교 정치학』, 314.

      64) VanDrunen, Politics after Christendom, 180; 『기독교 정치학』, 263. 

 

이제 반드루넨의 주장에 대하여 그것이 얼마나 개혁신 학에 부합하고, 지지를 받는지 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방법론 상 성경신학적, 조직신학적인 도구들이 활용될 것이다.

 

Ⅳ. 반드루넨의 주장에 대한 평가

 

여기에서는 반드루넨의 주장 가운데 핵심적 쟁점이 될만한 세 가지를 중심으로 개혁신학 관점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두 왕국론에 대하여, 둘째 문화명령을 부정하는 기초가 되는 이생과 내생의 불연속성에 대하 여, 셋째 자연법과 노아 언약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1. 두 왕국론에 대하여

 

반드루넨은 자신의 두 왕국론이 개혁파 전통 안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개혁파 전통은 반드루넨이 말하는 두 왕국론을 지지하는가?

반드루 넨은 󰡔자연법과 두 나라󰡕에서 자신의 두 왕국론을 개혁신학 전통에 위치 시키기 위하여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을 비롯한 다양한 신학자의 사상을 추적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의 가르침과 자신의 두 왕국론 사이에 연속성을 주장한다.

 

1)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두 도성, 즉 천상 도성과 지상 도성을 말한다.65)

반드루넨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두 도성이 교회와 국가라는 제도적 구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 미암아 종말론적인 새 창조를 향해 순례길을 가는 하나님의 백성과 이 세 상에 살면서 종말론적인 죽음을 향해 가는 타락한 인류를 가리킨다고 설 명한다.

그리고 이 두 도성의 백성을 구별하는 핵심적인 특징은 서로 다른 두 사랑인데, 하나님의 도성 시민은 창조주를 무엇보다도 사랑하나, 지상 도성 시민은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옳게 지적한다.66)

반드루넨은 아우 구스티누스가 제시한 두 도성 사이에 사랑의 방향에 있어서는 극명한 대 립성을 띠지만, 교회와 국가의 차원에서 볼 때는 깔끔하게 분리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뒤섞여 혼합성을 띠고, ‘이미와 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는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바르게 설명한다.67)

그럼에도 반드루넨은 아우 구스티누스의 두 도성을 자신의 두 왕국론으로 발전시킬 때에 두 도성의 대립성에만 주목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대립성만을 전 면에 내세운 자신의 두 왕국론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과 연속성을 가질 뿐 아니라 꼭 닮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68)

 

      65) Augustine, De Civitate Dei, 조호연 · 김종흡 공역, 『하나님의 도성』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11. 1.

      66) VanDrunen, Politics after Christendom, 39; 『기독교 정치학』, 51-52.

      67) VanDrunen, Politics after Christendom, 39; 『기독교 정치학』, 52; 사랑의 대립성과 관련해서 는 Augustine, 『하나님의 도성』, 14. 4, 두 도성의 혼합성에 대해서는 Augustine, 『하나님의 도 성』, 18. 49; 19. 26, 그리고 두 도성의 이중성과 긴장성에 대해서는 Augustine, 『하나님의 도성』, 18. 1.

      68)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59-61; 『자연법과 두 나라』, 101-105.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두 도성의 특성들(대립성, 혼합성, 이중성)을 온전히 담아내지 않은 채 그 일부만(대립성) 선택적으로 인용해 놓고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잇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온당하 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루넨도 두 왕국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론 사이의 차이점을 인정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사소한 것으로 간 주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 이론을 ‘보완’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 한다.69)

과연 그런가?

제임스 스미스는 반드루넨이 두 왕국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 론의 차이점을 메우기 위해 ‘보완적 패러다임’을 사용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스미스는 반드루넨이 ‘보완’이 아니라 ‘생략과 치환’을 하고 있 다고 꼬집는다.70)

이런 생략은 두 왕국론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를 소환할 때 이상한 해석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반드루넨은 루터의 두 나라 교리를 설명하면서 그것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의 핵심적 특징과 대단히 비슷하다”고 주장한 다.

실제로 그는 루터를 아우구스티누스의 연장으로 해석한다. … 반드루넨 은 이런 해석을 “보완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면서 루터가 그저 아우구스티 누스의 사상을 확장했다고 주장한다. …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그저 아우구 스티누스를 보완하는 것인가?

루터가 그저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복잡한 층위를 추가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이상한 수학이다. 그 과정에 서 합이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핵심적 양상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점진적·점증적 전환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은 치환(置換)이다.71)

 

      69)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60; 『자연법과 두 나라』, 103.

     70) Smith, Awaiting the King, 45-46; 『왕을 기다리며』, 96-97.

     71) Smith, Awaiting the King, 46; 『왕을 기다리며』, 96-97 (강조는 덧붙인 것).

 

김명혁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 개념을 설명하면서 두 도성 사이 의 대립은 공간이나 왕국의 대립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의 방향의 대립이라고 적시한다.72)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 개념에는 종말론적 긴장과 이중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강조한다.73)

결론적으로 반드루넨은 아우 구스티누스가 말한 두 도성 간의 사랑의 방향의 대립을 영역과 영토로의 공간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스미스가 볼 때, 반드루넨은 아우구스티누스 가 강조한 두 도성 사이의 ‘사랑’의 대상에 있어서 엄격한 대립을 생략해 버렸다.

그 결과 지상 “도성(civitas)”이 “공민적 영역”이나 “지상 영토”로 공간화되고 말았다.74)

 

     72) 김명혁, “어거스틴 두 도성에 대한 개념”, 「신학정론」 1/1 (1983. 4): 80.

     73) 김명혁, “어거스틴의 교회관과 국가관”, 「신학지남」 43/2 (1976): 34.

     74) Smith, Awaiting the King, 45; 『왕을 기다리며』, 97 (강조는 스미스의 것). 반드루넨의 입장에서 는 스미스의 이러한 비평이 지나치거나 부당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반드루넨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의 핵심을 “사랑”으로 읽고 있기 때문이다(『자연법과 두 나라』, 47, 52; 『기독교 정치학』, 51-52). 그러나 반드루넨과 스미스의 근본적 차이점은 이것이다. 둘 다 아우구 스티누스가 “언급한 엄격한 사랑의 대립”을 인용하면서도 반드루넨은 이 사랑의 대립을 두 나라로 공간화시키는 반면, 스미스는 두 종류의 욕망과 삶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반드 루넨보다는 스미스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충실하게 읽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반드루넨의 ‘두 왕국론’ 내용 자체가 개혁신학적으로 옳다고 인정하더라도, 반드루넨의 치명적 결함은 이것이 다.

즉,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 개념을 자신의 두 왕국론의 근거로 끌 어오는 과정에서 논리적 비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드루넨은 차이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보완적 패러다임으로 메우려고 시도하지만, 이것은 스미스의 지적대로 생략이나 치환에 가깝다는 강한 의구심을 남긴다.

 

2) 칼빈의 두 통치

 

반드루넨은 칼빈이 자신의 신학 이력상 처음부터 끝까지 두 나라 교리 (Two kingdom theory 두 왕국론)를 인정했고, 아주 특별하게는 그리스도 인의 자유 및 교회와 국가 각각의 권위를 언급할 때 두 나라 교리를 활용 했다고 주장한다.75)

 

    75)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70; 『자연법과 두 나라』, 117. 

 

그러면서 칼빈의 두 나라 이해와 자연법 교리를 검토 함으로써 칼빈의 두 나라 교리를 더 넓은 기독교 전통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려고 한다는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밝힌다.76)

그는 칼빈의 󰡔기독교 강 요󰡕에서 루터의 두 왕국론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 한다.

 

두 나라 교리에 대한 칼빈의 신학적 주장은, 특히 칼빈의 󰡔기독교 강요󰡕(초 기와 후기에 나온 모든 판)에서 루터와 비슷한 입장을 드러낸다. … 칼빈의 두 나라 신학은 그의 이력에서 눈에 띄게 지속적이었다.

이 점은 단지 칼빈이 개신교로 회심한 직후, 제네바에 첫 방문 이전에 한 청년으로 저술했던 󰡔기독교 강요󰡕 초판본(1536)과 그가 죽기 바로 몇 년 전에 저술했던 최종판(1559) 만 비교해도 명백해진다. 두 나라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많은 단락은 거의 동일한 상태로 남아있다. 칼빈은 교회에서 현재 모습을 나타내는 천상적인 영적인 나라와 시민 정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모습을 나타내는 지상적 이고 시민적인 나라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가장 이른 시기에서 생애 마지막까지, 루터의 두 나라와 두 통치에 대한 가르침의 영향 을 보여주었다.77)

 

     76)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69; 『자연법과 두 나라』, 116.

     77)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69-70; 『자연법과 두 나라』, 117-18. 

      

칼빈의 두 나라 교리는 반드루넨의 주장처럼 과연 루터의 두 왕국론과 연속성을 가지는가?

둘 사이에는 어떤 불연속성이나 차이점도 존재하지 않는가?

반드루넨은 칼빈의 두 나라 교리와 자신의 두 왕국론 사이에 차 이점이 있음을 인정한다.

칼빈의 두 나라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 이론이 아니었다.

칼빈의 두 나라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통치를 받는다.

각 나라는 세상에서의 삶을 위한 의미 있는 적극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지상의 삶을 사는 동안 두 나라 모두의 회원이다. 칼빈은 두 나라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인식했지만, 근본적인 대립 관계는 아니었 다.78)

반드루넨은 󰡔기독교 강요󰡕를 인용하여 칼빈의 두 나라가 영적 통치와 시민적 통치를 가리키는바, 전자는 내적인 영혼의 삶에 관계되고 후자는 외적인 현세의 문제들에 관계된다고 옳게 설명한다.79)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지점에서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의 구속주로서의 통치와 창조주로서의 통치를 분리시킨 후에 이것을 자신의 두 왕국론의 근거로 병합시킨다.80)

논자는 여기서 두 가지 비평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칼빈이 설명한 두 통치가 반드루넨의 두 나라와 내용상 동일한 연속성을 지니는가?

 둘째, 칼빈이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구속주로서의 통치와 창조주로서의 통치로 분리하고 있는가?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 자.

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2권에서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루고 있다.

반드루넨은 칼빈이 확실히 종교적으로 통합되고 심지어 기독론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구속 사역을, 그리고 시민적 나라와 영적 나 라를 뚜렷하게 구별함으로써 이것을 표현했다고 주장한다.81)

그리고 이러 한 구별은 두 나라 사이의 명백한 분리라고 대조시킨다.

칼빈이 영적인 나라는 ‘영혼의 생명’으로, 시민적 나라는 ‘이생의 문제나 외적 행위’로 연결 짓는다(Institutes, 3. 19. 15)고 설명한다.82)

 

       78)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71; 『자연법과 두 나라』, 119.

       79)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72; 『자연법과 두 나라』, 120.

       80)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74, 75; 『자연법과 두 나라』, 124, 26.

       81)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75; 『자연법과 두 나라』, 126.

       82)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75; 『자연법과 두 나라』, 126.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 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칼빈의 이러한 영적인 통치와 시민적인 통치의 날카로운 대립을 자신의 두 왕국론으로 포섭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 이 문제인가?

칼빈의 두 개의 통치(영적 통치와 시민적 통치)가 반드루넨의 두 왕국(교회와 국가)의 범주가 명백하게 일치하지 않는데도 반드루넨 은 둘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칼빈이 두 개의 통치에서 말하려고 했던 바는 반드루넨이 옳게 읽은 것처럼 영적 통치와 시민적 통치요, 내면적 통치와 외면적 통치요, 영혼과 육체의 구별이다.83)

칼빈은 이러한 설명을 통해 두 왕국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 니다. 오히려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이중적으로 작동하는 내면적 통치와 외 면적 통치, 영적 통치와 시민적 통치를 영혼과 육체로 설명한 것뿐이다.84)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해방되었다고 해서, 외적인 통 치에 있어서도 사람의 법에 덜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자유롭다고 해서 모든 육체의 예속으로부터 풀려나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85)

즉, 칼빈은 한 개인이 내적으로는 영적인 통치를 받는 동시에 외적으 로는 시민적 통치를 받는 이중 시민권자임을 말하는 것이다.86)

 

     83)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79; 『자연법과 두 나라』, 130. 84) Calvin, Institutes, 4. 20. 1. 85) Calvin, Institutes, 3. 19. 15. 86) Calvin, Institutes, 4. 20. 5. 87) Calvin, Institutes, 3. 19. 15. 88) Calvin, Institutes, 4. 20. 1. 

 

칼빈은 한 곳에서는 두 통치의 엄격한 구별과 분리를 말하면서도,87) 다른 곳에서는 두 통치가 본성상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이 둘을 서로 결합시키는 것이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둘은 필히 결합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 장한다.88) 어떻게 칼빈은 이렇게 역설적인 주장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일까?

그것은 칼빈이 설명하는 두 통치가 반드루넨처럼 공간과 영역으로 구분된 두 왕국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 안에서 작용하는 내적 통치와 외적 통치, 영적 통치와 시민적 통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칼빈은󰡔기독교 강요󰡕 4권 20장에서 이 두 통치의 긴밀하고 중첩적인 관계에 대 하여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신자는 정치적 속박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영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고전 7:21; 갈 3:28),89) 이유는 신자가 교회의 다스림과 시민국가의 통치 모두 아래 있기 때문이요,90) 하나님에 대한 순종 아래에서 통치자에 대한 순종을 따르기 때문이다.91)

그래서 시민국가의 직무는 교회의 사역과 구별되지만, 교회의 사역으로 인해 부인되지 않는다.92)

요컨대, 영적 통치와 시민적 통치의 구별이 현격하다고 해서 국가의 모든 질서를 오염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이 신자와는 무관하다고 생 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93)

김요섭은 칼빈의 두 통치 개념을 반드루넨이 두 왕국론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지적한다.94)

칼빈이 ‘영적 왕국’과 ‘정치적 왕국’을 분리해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자유를 바르게 이해하고 자유롭게 삶의 동기를 설명하기 위함이었다.95)

 

        89) Calvin, Institutes, 4. 20. 1.

        90) Calvin, Institutes, 4. 20. 5.

        91) Calvin, Institutes, 4. 20. 32.

        92) Calvin, Institutes, 4. 20. 7.

        93) Calvin, Institutes, 4. 20. 2.

        94) 김요섭, “그리스도 왕국의 두 통치: 칼빈의 정치신학의 기본개념 연구”, 「역사신학 논총」 41 (2022): 20.

        95) 김요섭, “그리스도 왕국의 두 통치”, 27.

 

칼빈은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통치 주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칼빈의 문제 제기는 로마 가톨릭이 과도하게 행사한 권세가 세속 군 주들의 권세를 침해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문제 제기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침해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칼빈이 교회에게 부여된 권세가 세속적 권세가 아니라는 점을 말한 것은 시민적 권세의 자율성을 옹호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모든 영역에서 구현되어야 할 그리스도의 통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96)

매튜 투이닝가(Matthew Tuininga)도 칼빈의 두 왕국론 개념을 반드루 넨과 같이 분리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의 표현을 따라 ‘영혼 과 육체’라는 유기적인 관점에서 교회의 공교회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97)

투이닝가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제시한 ‘제도로서의 교회(the church as institution)’와 ‘유기체로서의 교회(the churcr as organism)’ 개념을 사용 하여 제도로서의 교회는 복음선포, 성례, 권징, 구제를 실천하고,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증거함으로써 보편교회로서의 공교회성을 수행한다고 강조한다.98)

둘째로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과연 구속주와 창조주로 분리시키고 있는가?

비네마는 이 질문에 대해 유용한 답변을 제공한다.

그는 반드루넨이 칼빈의 두 왕국 교리를 해석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품 행을 다스리는 이중적 방법 간의 구별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다.

비록 시민 왕국에 속한 것의 범주를 상당히 확대한다고 하더라도, 신자들의 이중적 지위에서 자연법과 성경 역할에 대한 칼빈의 관점을 해석 할 때 특별히 결함이 있다고 평가한다.99)

 

     96) 김요섭, “그리스도 왕국의 두 통치”, 37; 안인섭도 칼빈이 교회와 국가를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쪽에 강조점을 두었다고 확언한다. 안인섭, “어거스틴과 칼빈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소식」 65 (2004): 34-35.

     97) Matthew Tuininga, “Good News for the Poor: An Analysis of Calvin’s Concept of Poor Relief and the Diaconate in Light of His Two Kingdoms Paradigm,” Calvin Theological Journal 49 (2014): 223, 247.

    98) Matthew Tuininga, Calvin’s Political Theology and Public Engagement of the Churc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Kindle Version 372-73.

    99) Cornelis Venema, “The Restoration of All Things to Proper Order: An Assessment of the Two Kingdoms/Natural Law Interpretation of John Calvin’s Public Theology,” 조영팔 역,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라이언 매킬헤니 편집, (서울: 개혁주의 신학사, 2020), 86; “One Kingdom or Two?- An Evaluation of the Two Kingdom’s Doctrine as an Alternative to Neo-Calvinism,” Mid-America Journal of Theology 22 (2012): 83.

 

칼빈 신학에서, 자연 계시와 하나님의 특별계시 사이에는 반드루넨의 해석 이 암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관계가 있다.

 

자연 계시와 특별계시 간 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개념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인간의 품행을 위한 창조 주와 구속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하고 온전하게 드러내는 특별계시에 우선순위를 허용한다. … 신자들이 결혼과 가족이든, 사회적 관계들이든, 경 제적 노력들이든, 아니면, 예술과 과학들이든, 인간 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 에서 그들의 독특한 직업적 소명을 성취할 것을 추구할 때, 칼빈은 하나님이 성령의 성화시키고 중생시키는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회복 시키고 있는 사람들의 품행을 위한 더 분명하고 종합적인 하나님의 뜻의 드 러내심인 성경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100)

 

칼빈은 반드루넨이 주장하듯이 구속의 나라와 일반 나라, 구속주와 창 조주 사이의 분리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사람 안에 작용하 는 두 통치에 방점을 둔 것이다. 즉, 구속주와 창조주를 분리하려는 반드 루넨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반드루넨이 매우 많이 인용하는 칼 빈의 󰡔기독교강요󰡕 4권 20장의 목적은 세속 권세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제 시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 권세도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에 종속되어 있다 는 신학적 이해를 밝히려는 것이다.101)

칼빈은 두 개의 통치를 말했으나, 반드루넨은 이를 두 개의 왕국으로 환원시켰고, 여기에는 논리적 비약이 포착된다.102)

 

       100) Venema, “적법한 질서로 만물의 회복”, 87.

       101) 김요섭, “그리스도 왕국의 두 통치”, 39.

       102) Calvin, Institutes, 3. 19. 15에서 ‘영적 관할과 세속적 관할(통치)’로 번역된 라틴어 원문은 ‘iurisdictio spiritualis et temporalis’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로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황 경철, “제임스 스미스와 데이비드 반드루넨의 공적신학 비교연구” (철학박사학위논문, 합동신학 대학원대학교, 2022), 197-201. 

 

반드루넨은 칼빈의 두 통치를 끌어들여 하나님은 영적 나라 를 구속주로 통치하시고, 시민적 나라를 구속주가 아닌 창조주와 보존자 로 다스리신다고 분리된 이원적 두 왕국론을 강화하지만, 정작 칼빈은 그리스도의 ‘구속’이 만물의 총체적 ‘회복과 재창조’로 겹쳐진 이중적 두 통치를 말하고 있다.103)

 

2. 문화명령 부정 - 이생과 내생의 불연속성에 대하여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인의 문화명령을 부정한다.104)

논자는 본고에서 그의 논거 세 가지를 언급하였다.

여기서는 그중 하나인 이생과 내생의 불 연속성에 대한 반드루넨의 주장을 주해적으로, 또 조직신학적으로 평가하 고자 한다.

반드루넨은 재림시 장차 올 세상에서 이 땅의 문화 활동과 산물은 급작스럽게 그리고 철저히 종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벧후 3:5-12; 히 12:25-28; 계 6:12-14).105)

헤르만 바빙크는 종말에 마지막 심판 이후 나타나는 새 하늘과 새 땅 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극단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필로와 같이 이 세상은 현재의 형태 그대로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운명 지워졌다는 주장이다.

다른 극단은 오리겐, 루터교, 메노나이트, 소시니안과 같이 이 세계의 형태가 변화할 뿐 아니라 그 성분 재료도 다 없어질 것이며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대체될 것이라는 주장 이다.106)

 

     103) Calvin, Institutes, 1. 4. 1; 그리스도의 구속의 중보자와 창조의 중보자로서 상호 긴밀한 사역에 관한 자세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Vevema, “Christ’s Kingship in All of Life,” Mid-America Journal of Theology 25 (2014): 13, 25; Susan E. Schreiner, “Creation Set Free,” in The Theater of His Glory: Nature and Natural Order in the Thought of John Calvin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1), 97-114; Willem van’t Spijker, “The Kingdom of Christ according to Bucer and Calvin,” in Calvin and the State, ed., Peter De Klerk (Grand Rapids: Calvin Studies Society, 1993), 109-132.

      104)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82, 217-18.

      105)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82-83, 165-166; Divine Covenants and Moral Order, 437-38; 『언약과 자연법』, 596-97.

      106) Herman Bavinck, The Last Things, 김성봉 역, 『개혁주의 종말론』 (서울: 나눔과 섬김, 1999), 239. 

 

바빙크는 둘 다 성경이 지지하는 바가 아니라고 경계한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의 불 심판은 태우고 깨끗하게 하고 정하게 한다는 것이지, 멸망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요한일서 2장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가 우리 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세상과 물질의 소멸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 재 이 세상이 가진 죄로 손상된 형태가 사라진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 이다.107)

즉, 세상의 재창조는 두 번째의 완전히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세상을 다시 만드는 것(re-creation)이므로, 하나님의 영예는 똑같은 인류, 같은 세계, 같은 하늘과 땅이지만 죄로 인해 멸망하고 오염 된 이런 것들을 구속하셔서 다시 새롭게 하신다는 것이다.108)

이생과 내생의 연속성과 관련하여 계시록 21장 24절은 이에 대한 적절 한 안내를 제공한다.

보편적으로 개혁파 조직신학자들은 이생과 내생 사이의 연속성을 지지하고, 일반은총과 문화물의 보존을 긍정한다.109) 또한, 다수의 성경신학자가 이생과 내생의 문화적 연속성을 지지하는 쪽으로 주해를 제시한다.110)

번 포이트레스(V. S. Poythress)는 ‘만국’은 문화적 배경이 다양한 구속된 인류를 나타낸다고 주석함으로써 이 세상과 오는 세 상 사이의 문화적 연속성을 시사한다.

마지막 날에 만국은 자기들의 광채, 곧 그것이 물질적이든, 지적이든, 예술적이든 영적이든, 부의 모든 다양함을 가지고 성안으로 들어온다(사 60:3-5; 학 2:7-9).111)

 

      107) Bavinck, 『개혁주의 종말론』, 241.

      108) Bavinck, 『개혁주의 종말론』, 241.

      109) Bavinck, 『개혁주의 종말론』, 246-47; Louis Berkhof, 『조직신학』, 권수경·이상원 역 (서울: 크 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1014; Wayne A. Grudem, Bible Doctrine: Essential Teachings of the Christian Faith, 박재은 역, 『성경 핵심 교리』, (서울: 솔로몬, 2018), 735-36; Cornelis Venema, Promise of the Future, 박승민 역, 『개혁주의 종말론 탐구』,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559-60;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이용중 역, 『개혁주의 종말 론』,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390; John M. Frame, Systematic Theology, 김진운 역, 『조 직신학』,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9), 1104.

      110) G. E. Ladd, 『요한계시록 주석』, 이남종 역 (서울: 크리스챤서적, 1990), 370; R. Bauckham, Guide to The Book of Revelation, 이필찬 역, 『요한계시록 신학』, (서울: 한들출판사, 2013), 199-200; G. K. Beale, “Eden, the Temple, and the Church’s Mission in the New Creation,”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48/1 (March 2005): 29.

       111) V. S. Poythress, A Guide to the Book of Revelation, 유상섭 역, 『요한계시록 맥잡기』, (고양: 크리스챤출판사, 2002), 212.

 

필립 E. 휴즈(Philp E. Hughes)는 21장 24절의 장면은 새 예루살렘 시민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오는 기쁨과 영광의 장면이라고 진술한다.

영원한 복 과 화해의 장에 모여든 수많은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았을 때 부여받은 놀랄 만한 잠재력, 능력들이 재창 조에서 만개하여 나타나는 것이다.112)

송인규는 이생과 내생 사이에 세 가지 불연속성과 세 가지 연속성이 있다고 정리한다.

불연속성은 오는 세상에서

  ① 사탄의 파멸(계 20:10), ② 세상 정신의 종언(요일 2:17), ③ 죄성의 제거(히 12:23)이고,

연속성은

  ①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함(계 21:3), ② 피조물의 동반(롬 8:21-22), ③ 문화물의 존속(계 14:13; 마 25:21)

으로 재림 후 세상에서도 지속된다고 요 약하였다.113)

라영환도 문화를 신앙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작업은 종교개혁 전통에서 벗어난 이원론적 세계관이라고 비판하며, 기독교 문화는 개인의 고백에 머물지 않고 작품을 통해 샬롬이 없는 세상에 샬롬을 말함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강조한다.114)

 

       112) Philp E. Hughes, 『요한계시록』, 오광만 역 (서울: 여수룬, 1993), 334.

       113) 송인규, 『일반은총과 문화적 산물』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281 (강조는 덧붙인 것).

       114) 라영환, “예술과 소명 그리고 샬롬”, 「조직신학 연구」 43 (2023): 124-25.

     

3. 자연법과 노아 언약에 대하여

 

반드루넨은 두 왕국론의 기초로 자연법 사상을 삼고, 다시 자연법의 근거를 노아 언약에서 찾는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일반은총이나 종교의 씨앗, 양심 등의 표현으로 자연법의 존재를 인정한다.115)

     

         115) Calvin, Institutes, 1. 3. 1. 이에 대한 논의로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라. Kirk M. Summers, Morality After Calvin: Theodore Beza’s Christian Censor and Reformed Ethic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66-67; William Klempa, “Calvin and Natural Law,” Calvin Studies Ⅳ (1988): 16-17; 송용원, 『칼뱅과 공동선』 (서울: IVP, 2017), 146-51. 

 

그러나 칼빈은 부패한 인간은 죄의 인지적 효과로 인하여 자연법을 올바르게 인 식할 수도, 활용할 수도 없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자연법의 한계를 분명 히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자연법의 역할과 가치를 매우 폭넓게 인정하려는 반드루넨의 주장에 동의하기를 주저하게 한다.

모든 사람은 비록 성경을 켤코 읽은 적이 없더라도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 의 기본적인 윤리법을 여전히 알고 있다.

노아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정직 하고 공정하고 근면하고 환경을 생각하고 권위를 존중할 책임을 모든 사람 에게 지우신다.116)

반드루넨은 자신의 자연법 사상이 많은 부분 아퀴나스와 연속선상에 있음을 인정한다.117)

그리고, 국가와 정치의 영역을 자연법의 통치질서에 맡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반 은혜로 보존하시기 때문이라고 설명 한다.118)

그러나 칼빈은 죄의 상태 아래에서 인간은 영적 왕국뿐 아니라 자연 왕국에서의 인간의 품행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기에는 불충분한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제에 만족하지 않고 정당한 것 이상을 자기들의 것이라 고 변론하면서 자기들 뜻대로 어두움을 끌어들여서 마침내 무모하고 사악한 자만에 빠져 스스로 어리석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어리석 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어리석음은 헛된 호기심에서 비 롯될 뿐만 아니라 마땅한 것 이상을 알기를 원하는 정욕에 거짓 자부심이 결 합된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119)

 

       116)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21.

       117) VanDrunen, Politics after Christendom 106, 113; 『기독교 정치학』, 181, 195; Divine Covenants and Moral Order: A Biblical Theology of Natural Law, 22-36.

       118) VanDrunen, Politics after Christendom, 62; 『기독교 정치학』, 87.

        119) Calvin, Institues, 1. 4. 1.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라는 안경”을 쓰고서야 창조의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죄의 영향으로 자연 계시만으로는 도출될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통하게 된다.120)

진 하스(Gene Hass)도 자연법의 불완전함과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자연법은 그것이 구체적인 인간 생활의 결정들에 적용되었을 때,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게 해줄 가능성은 매우 적다. 여기의 결과 들은 칼빈 자신이 주목하는 것처럼 뒤섞여져 있다.

이것은 여전히 죄악된 인 간들이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의 행위들에 대한 바른 결정들을 내린다는 것 을 인정한다. 그리고 통치자들 역시 어쩌면 구체적인 행위들에 대해 법들을 바르게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이 보기에, 적용이 더 구체적이면 구체 적일수록, 더 많은 잘못된 결정들과 판단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높아진다.121)

인간에게 미친 죄의 심각한 영향과 결과를 고려한다면, 신자는 불신자 의 양심 속에 있는 자연법에 호소하는 일이 불신자로 하여금 시민법을 성 경에 계시된 법들에 더 많이 일치하도록 인도해 갈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 다.

요컨대, 반드루넨은 칼빈이 일반 왕국에서 인간의 삶과 품행을 규제하 기 위한 원천과 기준으로 자연법에 호소하였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자연 법의 올바로 인식되고 사용되기 위해 특별 계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는 점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였다.122)

한 가지 더, 반드루넨은 자연법의 근거인 노아 언약이 구속적 성격이 없으므로 은혜 언약이 아닌 일반 언약(혹은 자연 언약)이라고 주장하지 만,123) 이 또한 개혁파 언약 신학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120) Calvin, Institues, 1. 4. 4.

     121) Gene Haas, “칼빈, 자연법, 두 왕국”,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라이언 매킬헤니 편집, 조영팔 역 (서울: 개혁주의 신학사, 2020), 132.

     122) Venema, “Christ’s Kingship in All of Life,” Mid-America Journal of Theology 25 (2014): 11-12.

     123) VanDrunen, Divine Covenants and Moral Order, 490-91; 『언약과 자연법』, 661-62; Politics after Christendom, 65; 『기독교 정치학』, 90-91.

 

노아 언약이 보편적이고, 보존적이라는 반드루넨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해도 은혜 언약적 성격을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팔머 로벗슨 (Palmer Robertson)은 노아 언약이 창조 언약과 구속 언약의 면밀한 상호 관계를 강조한 까닭에 분명히 구원적이라고 확언한다.124)

반드루넨은 노 아 언약이 기도나 예배처럼 어떤 종교적 헌신을 명령하지 않는다고 주장 하지만,125) 존 프레임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홍수 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가족들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분명히 예배 행위를 수행하였다 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8:20).126)

 

       124) Palmer Robertson, The Christ of The Covenants, 김의원 역,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서 울: P&R, 2013), 114-15. 노아 언약의 구속적 성격에 관한 논의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D. J. McCarthy, “Berit and Covenant i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Supplement to Vetus Testment (1972): 81; John Murray and N. B. Stonehouse, The Free Offer of the Gospel (Edinburgh: Banner of Truth, 2002), 21-26.

       125) VanDrunen,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105.

       126) John M. Frame, Systematic Theology, 김진운 역, 『조직신학』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9), 98-99.

 

 

Ⅴ. 나가는 말

 

반드루넨의 주장을 개혁신학적으로 검토할 때, 그의 두 왕국론, 문화 명령 부정, 자연법의 인식과 활용에 대한 폭넓은 긍정, 어느 것도 개혁신 학 전통에 안전하게 자리한다고 확언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본고는 그 의 자연법과 두 왕국론에 기초한 공공신학이 개혁신학적으로 지지를 받 는다고 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반드루넨이 개혁파 조직신학자로서 루터파라는 혐의를 받으면서까지 역사 속 개혁신학자들을 소환하여 자연법과 두 왕국론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가운데 급격히 감소하는 기독교와 세속화 되어가는 현대 교회를 안타까워하며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고자 순례 자적 영성을 강조한 것은 충분히 공감된다.

또한 문화 변혁을 외치는 신칼빈주자들이 참으로 교회의 예전을 중시하고, 자기 부인에서 비롯된 겸손 과 섬김의 자세로 변혁 활동을 수행하는지 성찰하게 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나아가 이념 간, 세대 간, 지역 간, 빈부 간 대립이 심화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공동선’이라는 대화의 장으로 나아오게끔 ‘자연법’이 공통의 언어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큰 틀에서 그의 자연법과 두 왕국 론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실천적 제언들은 개혁파 공공신학의 성 숙과 발전에 유의미한 시사점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루넨이 제시한 두 왕국론은 그의 의도와 상관 없이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와 세속 정부를 두 왕국으로 구분해서 생각하 는 이원론적 사고를 강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해명 이 요구된다.

칼빈의 말처럼 그리스도는 온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이시자, 십자가 구속을 통해 온 우주를 새롭게 하신 구속주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구속주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이미 하나님 나라 회복을 시작하신 재창조주 그리스도를 예배함으로써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고 자 힘쓴다.

최근 루터파 내에서도 반드루넨의 두 왕국론이 루터가 말한 두 왕국론과 거리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127)

루터는 사실 두 왕국을 대립적 관점보다 통일적이고 상호의존적이라고 파악하여 ‘두 왕국론’ (Two Kingdoms)보다 ‘두 통치론’(Two Regiments)에 초점을 맞춘 에른스트 킨더(Ernst Kinder)와 구스타프 퇴른발(Gustav Tornvall)의 주장을 김명배는 근거로 제시한다.128)

 

       127) Jordan B Cooper, “The Two Kingdom Paradigm & Escondido Theology,” https://www. youtube.com/watch?v=oV3fWC29hdI, 2023년 6월 9 접속.

      128) 김명배, “루터의 두 왕국론에 관한 연구”, 「한국교회사학회지」 25 (2009): 132. 

 

루터의 두 왕국론이 종교개혁 당시 어떤 배경 에서 제기되었는지, 만인제사장과 모든 사람의 소명의 무게가 하나님 앞 에 동일하다는 루터의 가르침이 두 왕국론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역사신학적 연구를 통한 규명을 기다린다.

또한 문화명령을 부정하는 반드루넨의 주장은 성경에 충실하고자 했던 개혁파 전통과는 다소 낯설다.

문화명령은 반드루넨의 말처럼 그리스 도의 구속사건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사건을 통해 모든 신 자가 첫 아담 안에서 실패했던 문화명령을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수행할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가 일상 에서 수행한 문화명령의 수고와 결과들은 마지막 때에 철저히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이웃을 향한 공적인 책임이 새 하늘 새 땅 과 연속성을 가진다는 믿음 위에서 하루하루를 종말에 잇댄 종말론적 삶 을 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반드루넨의 자연법 사상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비신자와 소통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는 있지만, 자연법의 한계도 균형있 게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법을 온전히 인식할 수 도, 활용할 수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죄의 인지적 효과(the noetic effect of sin)가 그만큼 전포괄적이고,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이러 한 비평들에 대하여 두 왕국론자들의 정교하고 활발한 논의가 보완된다 면, 한국교회 내 공공신학은 개혁신학의 든든한 기반 위에서 폭넓은 지평 으로 확장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목회 현장에서도 교회의 공공성과 신뢰성이 회복되어 교회는 구원의 방주뿐 아니라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Abstract

A Reformed Theological Evaluation on David VanDrunen’s Public Theology Keang Chell Hwang (CCC, P2C team leader) The decline of the Christian population and the Korean church has intensified as the three years of COVID-19 have passed. In line with this, the emphasis on the public responsibility of the church and the public good of Christianity was also highlighted. Public theology is the field of theology that deals with how the church should perform its public role in society. The purpose of this work is to evaluate David VanDrunen’s public theology, which has recently been active in the Reformed camp, especially focusing on natural law and two kingdom theory from a Reformed theological perspective. The procedure of this paper is as follows. In the introduction, I will preliminarily introduce various recent debates on VanDrunen’s theory, and extract three controversial elements. In the main body, I will outline these three things: 1) Two kingdom theory 2) Denial of the cultural mandate 3) Natural law and the Noah Covenant. Next, I will attempt to evaluate VanDrunen’s argument using biblical theology and systematic theology tools to examine whether his claim is legitimately supported by Reformed theology. In conclusion, this study finds that none of the three aspects are fully satisfactory for safely settling themselves within the tradition of Reformed theology. Through these arguments, we can more clearly identify the characteristics of public theology faithful to the reformed tradition.

 

[Key words: David VanDrunen, public theology, two kingdom theory, natural law, Noah covenant, cultural man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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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투고일: 2023.06.09. 게재 확정일: 2023.07.02.

조직신학연구 제44권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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