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제5사단 병참부의 편성과 병참선로 선정
III.부산 병참주지 설치와 제5사단의 북상
IV. 초기 경부 병참선의 운영 실태
V. 맺음말
I.머리말
청일전쟁 시기 일본군의 제5사단은 한반도에서 경복궁 점령부터 성환, 평양 전 투 등 군사 작전을 수행한 주력이었다.
일본의 작전계획은 1894년 6월 21일에 작성된 육해군 공동 작전안을 기초로 하고 있었는데, 이 작전계획의 목적은 발 해만 북안 지역에서 청나라와 결전하여 승리하는 것이었다.1
이 목표는 제해권 을 놓고 청의 해군과 결전을 벌이기 전과 후의 두 단계로 구분되는데, 제1단계 는 제5사단을 한반도에 상륙시켜 청군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즉, 육군은 본토 방위를 강화하면서 조선으로의 출정 준비에 착수하고 동시에 해군은 이 사이에 청나라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미 두 차례 에 걸쳐 인천에 상륙한 혼성제9여단이 7월 말에 청군과 성환전투를 벌이던 시 기에, 대본영은 1만 명의 청군이 평양에 집결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청군을 견 제하기 위해 제5사단의 잔여 병력을 서둘러 한반도로 파견하기로 했다.2
1 参謀本部 編纂, 1904a, 『明治二十七八年日清戦史』(第1巻), 東京印刷, 177~ 180쪽.
2 参謀本部 編纂, 1904b, 『明治二十七八年日清戦史』(第2巻), 東京印刷, 8~11쪽.
제5사단의 잔여 병력을 한반도로 파견하는 제3차, 제4차 수송계획은 7월 중순에 작성했고 필요한 운송선도 준비된 상태였다.
하지만 일본 해군이 제해권 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해상으로 인천항까지 직송하는 일은 위험성 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제3차로 수송된 부대는 대부분 부산에 상륙했고 그들 중 극히 일부 전투부대는 원산항으로 이동했다.
제5사단은 한성으로 병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경부, 경원, 경인 세 루트를 사용했다.
이 중에서 경인 간은 혼성 여단이 사용한 병참선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었고, 소규모 병력이 상륙한 원산 은 한성까지의 거리도 짧았다.
이에 비해 경부 간의 병참선은 거리가 멀었을 뿐 만 아니라 험한 산지와 고개도 많았기 때문에 이 구간의 병참선을 어떻게 설치 해야 하는지 제5사단과 대본영으로서는 난제였다.
실제로 제5사단 병참부(兵站部)는 대본영의 지시에 따라 경부 간의 중로(中 路)를 육로 병참선으로 하되 동시에 낙동강과 남한강을 활용하는 수로 병참선도 계획하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르면 제5사단의 잔여 부대는 대부분 경부 병 참선을 따라 북진해야 했으나, 대본영은 인천까지의 항로가 안전하다는 판단에 따라 부산에 남겨진 제3차의 일부와 제4차 수송병력은 부산에서 해로를 통해 인천항으로 직행했다.
결과적으로 경부 병참선은 제5사단의 지휘부와 일부 병 력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통과해야 하는 험로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경부 병참선은 일부 병력의 통과 후 사용 가치가 없어졌음에도 철거되지 않았으며 심 지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주로 일본군이 경부 병참선에 가설한 군용전신선 문제에 집중해왔다.
경부 전신선을 둘러싼 외교교섭과 가설과정에 관련하여 적지 않은 연구가 축적되었다.3
특히 공사를 맡은 제1전신가설지대장의 일기가 발굴되면 서 이 지대가 최종 가설한 노선이 당초 받은 명령보다 약간 동쪽으로 변경된 사 실도 밝혀졌다.4
3 斎藤聖二, 2003, 『日清戦争の軍事戦略』, 芙蓉書房出版, 제3장; 이승희, 2004, 「청일·러일전쟁기 일본군의 군용전신선 강행가설 문제 -한국 파견 ‘臨時 憲兵隊’를 중심으로-」, 『일본역사연구』 제21권; 延廣寿一, 2011, 「日清戦争と朝 鮮民衆-電線架設支隊長の日記から見た抵抗活動」, 『日本史研究』 通号584.
4 위의 延廣寿一의 논문에서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도서관에 소장된 제1전신선가 설지대장의 일기(吉見精, 『入韓日誌一』, 防衛省防衛研究所図書館)를 탈초하여 사용했다. 이하 이 글은 延廣寿一의 논문에서 이 일기를 재인용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이하 『吉見日誌』로 표기).
즉, 부산에서 대구까지는 그대로였지만 대구에서 원래 청주 방 향으로 가설하려던 계획이 충주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병참선로와 일치하게 되었지만 대본영이 지시를 변경한 원인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제2차 동학농민운동의 봉기와 경부 전신선 가설과의 연관성 도 주목받았다. 경부 간의 전신선과 병참지들이 농민군의 공격, 저항의 대상이 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군이 농민군을 진압하는 실체도 복원되었다.5
5 강효숙, 2002, 「第2次東学農民戦争と日清戦争」, 『歴史學研究』 762.
물 론 시기적으로는 경부 병참선이 가설된 이후였다. 하지만 경부 병참선이 설치되고 운영된 구체적인 과정에 관한 연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경부 간의 병참선로가 어떻게 선정되고, 육 로와 수로 병참선을 결합해서 이용하는 병참선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일본군 이 경부 병참선을 설치하고 운영한 과정에서 조선정부와 지역사회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또 도쿄의 대본영과 현지의 사단 사이에 병참선을 둘러싼 의견 대 립이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등에 대해 세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일본 측의 전사와 전역통계 등 기초적인 자료뿐만 아니라 대본영 병참총감부와 제 5사단 병참부의 기록, 제5사단장의 일기, 병참 장교의 회고록 등 다양한 공문 서, 에고 도큐먼트 그리고 조선 측의 기록인 구한국외교문서도 활용했다.
II.제5사단 병참부의 편성과 병참선로 선정
경부 간의 병참선은 거의 500km에 가까운 장거리이기 때문에 먼저 이것을 담 당할 제5사단 병참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본영은 이미 1894년 6월 중순에 제5사단의 일부를 떼어 편성한 혼성제9여단과 이를 지원하 는 병참부를 인천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제5사단 사령부가 한성에 도착하면 제 5사단의 병참부에 흡수될 예정이었다.
제5사단 병참부는 「병참근무령(兵站勤務令)」에 규정된 병참감부(兵站監 部), 병참사령부, 병참치중(兵站輜重) 등 삼대 요소를 완비한 조직이었다.
이를 구성하는 장교와 병사는 모두 육군에서 선임되었고 하사관 이하는 임시 고용한 인원으로 충원했다.6
지휘부인 병참감부는 본부와 지부로 이루어져 있고 110명 의 인력과 45필의 승마가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본부는 지휘관인 병참감 (대·중좌급)과 그의 부관 2명(포병과 공병 각 1명), 군리 1명, 하사 5명으로 구성 되었다.
그리고 지부는 금궤부와 양향부(糧餉部)를 관리하는 감독부, 헌병, 군 의부, 우편부로 이루어져 있고, 종졸·마졸·수졸도 배치되어 있었다.7
병참감에 는 공병 대좌 후루카와 노부요시(古川宣誉), 그의 부관에는 포병 대위 쓰루미 가 즈마(鶴見数馬)와 공병 중위 마쓰이(松井庫之助)가 배속되었다.8
각 병참사령부에는 병참사령관(소좌급), 부관 1명(대·중위), 하사 2명, 그리 고 마졸(2명)·수졸(4명) 등 10명의 인원과 승마 2필을 할당했다.9
부산에서 한 성까지의 거리가 대략 120리였기 때문에 6리(24km)마다 병참지를 설치한다는 「병참근무령」의 규정에 따르면 16개의 병참사령부가 필요했다.
그 결과 7월 중 순에는 16개의 병참사령부를 담당할 지휘관(소좌급)과 부관(대·중위)이 선임되 었다.10
물론 이 32명의 장교는 모두 예비역과 후비역 중에서 선정되고, 군의관 8명, 수의사 2명, 군리 10명도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애초의 계획에는 한참 못 미치는 규모였다.11
6 「第41号~第50号」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C13110351500, 臨時 事変に関する書類綴(乙) 明治27年6月(防衛省防衛研究所), 제51호를 참조(이하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의 사료를 인용할 때 JACAR 뒤의 괄호 표시를 생략한다. 그리 고 Ref. 뒤에 ‘C’로 시작한 사료는 모두 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 자료이므로 반복해 서 표시하지 않겠다).
7 「第41号~第50号」 JACAR Ref.C13110351500, 臨時事変に関する書類綴(乙) 明治27年6月, 제28호의 제2를 참조.
8 「留守第5師団より兵站部並第3野戦病院等職員表進達の件」 JACAR Ref. C05121512900, 明治27年8月戦役日記.
9 「第41号~第50号」 JACAR Ref.C13110351500, 臨時事変に関する書類綴(乙) 明治27年6月, 제45호의 제4를 참조.
10 「留守第5師団より兵站部並第3野戦病院等職員表進達の件」 JACAR Ref. C05121512900, 明治27年8月戦役日記. 50 | 동북아역사논총 86호(2024년 12월) 청일전쟁기 일본 제5사단의 한성 집결과 경부 병참선 설치 | 51
병참치중은 ① 야전포창(野戦砲廠, 23명·승마 1필), ② 포창감시대(砲廠監視 隊, 66명·승마 7필), ③ 치중감시대(53명·승마 6필), ④ 위생예비원(衛生預備員, 87명·승마 1필), ⑤ 위생예비창(衛生預備廠, 92명·승마 1필), ⑥ 환자수송부 (17명) 등 감독과 의료 관련 인력을 포함하고 있다.12
다만 제5사단의 병참부 편 제표에는 ①~③번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들을 편제표의 590명과 85필의 승마 와 합산하면 제5사단 병참부는 700명의 인원과 100필의 승마를 보유한 대규모 의 조직이 된다.13
한편, 7월 5일 대본영의 병참총감을 겸하고 있던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 六) 참모차장은 병참총감부 소속의 후지이 시게타(藤井茂太) 포병 소좌에게 부 산-한성 간의 병참선을 정찰하라고 지시했다.
후지이는 육군대학교에서 독일 교관 멕켈로부터 직접 병참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독일 유학 경험 도 있는 엘리트 장교였다.
그는 육군대학교 교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6월에 가와 카미 참모차장의 명령으로 대본영 병참총감부에 배속되어 관련 업무에 종사하 며 여러 가지 조언을 했고 경부 병참선 정찰도 그의 제안이었다.14
11 원래의 계획에 따르면 사람과 우마의 의료를 담당하는 의료 인력(52명), 즉 군의관 8명, 간호수(看護手) 24명, 수의사 2명, 蹄銕工(下)長 6명, 蹄銕工卒 12명. 그리 고 군리(軍吏, 30명), 수졸(40명)·마졸(5명) 등 127명과 승마 5필(군리용)도 배치 되었다. 「第41号~第50号」 JACAR Ref.C13110351500, 臨時事変に関する書類 綴(乙) 明治 27年 6月, 제45호 제3을 참조.
12 ①~③은 제29호 참조. 「第21号~第30号」 JACAR Ref.C13110351300, 臨時事 変に関する書類綴(乙)明治27年6月; ④~⑥은 제49호와 제51호 참조. 「第41号~ 第50号」 JACAR Ref.C13110351500, 臨時事変に関する書類綴(乙)明治27年 6月.
13 「留守第5師団より兵站部並第3野戦病院等職員表進達の件」 JACAR Ref. C05121512900, 明治27年8月戦役日記. 14 秦郁彦 編, 2005, 『日本陸海軍総合事典』(第2版), 東京大学出版会, 137쪽; 藤 井茂太, 1936, 『両戦役回顧談』, 偕行社, 178~181, 194~195쪽.
가와카미 병참총감은 조사해야 할 항목을 다음과 같이 매우 상세하게 지시 했다.
1. 부산과 경성을 연결하는 병참선로를 정찰할 것.
단 병참선로는 중로(中路)로 가정할 것.
그렇지만 정찰의 결과에 따라 중로를 사용하기 매우 곤란할 경우 대 구에서 성주, 청주를 거치는 도로를 정찰하고 그중 하나를 선정한다.
2. [도로는] 경편 짐수레(軽便荷車)가 사용 가능할 정도까지 수리되어야 하는데 도로의 수리는 여러 구간으로 나누어 각 구간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
도로의 상 태, 짐수레의 통행이 어려우면 각 부분에는 다수의 인부를 준비하여 운반하는 것도 괜찮다. 인부(工夫) 및 재료를 현지에서 징집할 수 있는지, 단 징집할 수 있는 것으로 각 구간이 며칠 소요할 것인지, 각 교량 가설 혹은 수리에 필요한 인부와 재료의 수량 및 그 유무. 만약 이것을 다른 곳으로 운반하면 그 방법, 도 로 중 짐을 운반하기 위해 경편철도를 부설할 수 있는 구간과 그 길이(里程)
3. 병참지와 창고, 혹은 임시 창고를 설치할 위치의 선정
4. 운반에 필요한 인부와 재료의 조사
5. 병참 근무의 보조로서 수리(水利)를 이용할 수 있는지의 조사
6. 병참선로 및 연도(沿道)에서 자원의 조사
7. 지시한 중로를 정찰하고 이 길이 병참선로의 목적에 적합할 경우, 경성을 통해 인천에서 배편으로 귀항한다.
단, 충주에 이르는 이 도로가 목적에 부합하지 않 을 때는 대신 청주 및 성주를 지나는 도로를 정찰하고, 대구로 돌아와서 귀환 한다. 8. 제2전신가설지대에서 사관, 하사, 병졸 각 1명을 보조로 제공한다.
단, 사관 이 하의 분견에 대해서는 지대사령관과 협의해야 한다.
9. 통역관 약간 명을 고용하여 사용할 수 있다.
10. 부속자(附屬者)가 필요한 비용은 실비로 지불한다.15
15 이 중에서 1~6번은 「雜第一四○号其一」 훈령의 내용이고 7~10번은 「雜第一四 ○号其二」 훈령의 내용이다. 「兵站総監より藤井少佐宛訓令」 JACAR Ref.C060 61941900, 明治27年6月12日~7月22日 「玉手箱 第4号」; 「7月5日兵站総監よ り藤井少佐宛訓令」 JACAR Ref.C06061942100, 明治27年6月12日~7月22日 「玉手箱第4号」; 「7月」 JACAR Ref.C06062203800, 明治27年6月「陣中日誌 7兵站総監部27自6, 5至9, 3」, 1894년 7월 5일 참조. 7兵站総監部27自6, 5至9, 3」, 1894년 7월 5일 참조.
이처럼 가와카미 훈령의 핵심은 경부 병참선의 선정이었고 특히 중로 사용 의 가능 여부였다.
가장 큰 관건은 문경새재를 무사히 넘어갈 수 있는지였다.
이 에 따라 중로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성주와 청주로 이어지는 서로를 선택할 것인지가 결정된다.
그리고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노선에 대해 문경새재를 넘 을 경우 인천을 통해 귀국하라고 지시한 부분을 보면 병참총감부는 충주에서 서 울까지 큰 어려움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 경사가 심한 고개도 없고 조선의 전신선도 가설된 서로를 두고 굳이 중로를 선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후지이의 회고록을 통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서로가 아산에서 18리밖에 떨어 져 있지 않은 청주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아산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이 문 제가 될 수 있었다. 만약 혼성제9여단과의 전투에서 패할 경우 청의 패잔병들은 서해안 쪽으로 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륙의 청주를 거쳐 평양으로 북상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청주를 지나는 일본의 병참선이 크게 위험해질 가능 성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로 병참선은 남쪽에서 봉기하여 형세가 매우 창궐 해진 동학농민군의 공격 목표가 될 가능성도 충분했다.16
대본영이 주의를 기울였던 또 다른 문제는 도로 정비였다.
당시 철도가 부설 되지 않은 한반도에서 유일한 교통수단은 짐수레였다.
따라서 군수품의 운반을 보장하기 위해 병참총감은 도로의 상태와 수리, 교량 가설 등에 대해 구간을 나 누어 상세하게 조사하도록 했다.
이처럼 경부 간의 병참선은 계획 단계에서부터 짐수레나 손수레를 가장 중요한 운반 수단으로 삼았고 이를 위해 도로의 상태와 정비에 집중했다.
실제로 병참총감은 제5사단 병참부에 무려 700여 개의 짐수 레를 제공했다.17
16 藤井茂太, 1936, 앞의 책, 195~196쪽.
17 「8月」 JACAR Ref.C06062203900, 明治27年6月 「陣中日誌7兵站総監部 27自6, 5至9, 3」, 1894년 8월 4일 참조.
그 밖에 특이한 점은 경편철도에 대한 언급이다.
가와카미는 1892년에 이미 경부철도의 부설을 제안했으나 위에서 언급한 경편철도는 설치 와 철거가 모두 간편하고 비용이 훨씬 저렴한 임시군용철도를 의미한다.
육로 병참선과 관련된 지시사항에 비하면 수로에 대한 정찰 요구는 매우 간 략했고 심지어 구간조차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지이 일행이 정 찰했던 과정을 살펴보면 실제로 수로를 전혀 이용하지 않았다.
이미 6월 하순부 터 한강 수로 병참선이 성공적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보고가 대본영에 올라가고 있었음에도,18 당시 병참총감부는 수로 병참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본영의 훈령을 받은 후지이 소좌는 7월 6일 도쿄 신바시(新橋)역에서 기 차로 히로시마에 도착한 후 8일 우지나항을 출항하여 이틀 뒤인 10일 부산에 도 착했다.19
후지이 일행 12명 중 무려 7명이 통역 담당이었다.20
이처럼 정찰 임 무에 많은 통역을 수행한 이유는 당시 부산에서 대구까지만 전신선이 가설되어 있었고 대구를 벗어나면 인편을 통한 연락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7월 13일, 후지이 일행은 무더위 속에서 천막을 메고 부산을 출발했다.
시가지와 마을 안 으로 들어가서 숙박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도로(本道)에서 8km 정도 떨어진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 야영했다.21
더불어 후지이는 외무성 서기관 의 신분을 사용했다.22
18 위신광, 2024, 「청일전쟁기 일본군의 경인 병참선 구축」, 『동양사학연구』 제 168집.
19 「7月6日寺内大佐発山根少佐宛」 JACAR Ref.C06060697000, 明治27年自 7月1日至8月24日「発電綴(二)」.
20 藤井茂太, 1936, 앞의 책, 201쪽 참조.
21 藤井茂太, 1936, 위의 책, 202쪽 참조.
22 「7月12日藤井少佐発川上総監宛」 JACAR Ref.C06060786600, 明治27年7月~ 8月 「着電綴(三)」.
부산을 지나 밀양(密陽)현에 도착했을 때 군수와 기타 관 리들의 심문을 받아 입성하지 못했고 매우 당황하여 한밤중에 급하게 출발한 일 도 있었다.
18일 대구에 도착하기 전에 후지이는 전신선을 이용하여 정찰한 상황을 병참총감부에 충실하게 보고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15일에 동래, 구포, 김해, 창원, 마산포, 옹천, 명호명 등 지방 도로의 상태와 짐수레 통행의 편리성을 보 고했고 17일에는 부산포 거류지의 인구와 가구수 등을 보고했다.23
대구에 도착 했을 때 입성을 거절당하여 이틀 연속 감찰사의 면회를 요청했으나 수용되지 않 았다.
심지어 근처의 언덕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갑자기 수백 명의 주민 들이 몰려와서 우리 일행에게 돌을 던지”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 후 후지이 일행은 한성에 도착한 후 오토리 일본공사를 통해 조선정부에 민중과 지방관의 단속 그리고 투석범에 대한 엄벌을 요구했다.24
23 「7月」 JACAR Ref.C06062203800, 明治 27年 6月「陣中日誌7兵站総監部 27自6, 5至9, 3」, 1894년 7월 15일 및 17일 참조.
24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編, 1967, 『舊韓國外交文書』(第3卷 日案3), 高 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고종 31년 7월 7일(1894년 8월 7일), 大邱府民의 外務省官吏에 對한 投石事件과 行旅의 安全保護要求(문서번호 2965); 고종 31년 7월 8일(1894년 8월 8일), 上件准飭與投石犯嚴懲回答(문서번호 2966).
이어서 조령 남쪽의 유곡촌(幽谷村)에 이르렀을 때도 현지 민중과 군수가 일 행들에게 적의를 보였다.
7월 25일 문경현에 도착했고 결국 조령에 도달했는데 경사가 심한 조령의 산길을 병참로(兵站路)로 개조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고 이로써 후지이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가 완수되었다.
그 후 후지이는 육 로로 이천을 거쳐 8월 1일에 경성에 도착했다.
하지만 후지이의 정찰 결과가 병참총감부의 중로 병참선 선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후지이는 전신 이용이 불가능한 지역에 서 인편을 통해 두세 번 병참총감부에 보고했다고 하지만, 그가 대구를 떠난 7월 21일경부터 한성에 도착한 8월 1일까지 전신을 통한 대본영과의 통신은 불 가능했다.
이처럼 후지이가 전보로 대본영에 보고할 수 없는 시기에 대본영은 제5사단의 부산 파견을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기록에 남아 있는 7월 26일 자 병참총감부에 도착한 후지이의 정찰보고서는 내용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전신이 불가능한 지역에서 인편을 통해 부산을 거쳐 대본영에 전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5
내용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 병참총감부의 결정 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 힘들다.
아울러 후지이 정찰과 무관하게 7월 6일 병참총감부는 경부 병참선 설치에 대략적인 밑그림을 갖고 있었다.
즉, 병참총감 밑에서 야전감독장관(野戰監督 長官)을 맡고 있던 노다 히로미치(野田豁通)는 경부 병참선에 필요한 식량과 임 시 숙소 등을 위해 적어도 24개의 병참지를 확보하고 각 병참지에 500명을 수 용할 수 있는 임시 막사를 설치할 재료를 시모노세키 집적장의 창고로 보내 달 라고 육군대신에게 요청하고 있다.26
21일 병참총감부는 제1전신가설지대장에 게 노다의 제안대로 낙동강을 이용하여 운반한 쌀을 저장할 창고를 대구와 상주 에 설치하고 호위병을 배치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27
25 「7月」 JACAR Ref.C06062203800, 明治27年6月「陣中日誌7兵站総監部27自 6, 5至9, 3」, 1894년 7월 26일 참조.
26 위의 사료, 1894년 7월 6일 참조.
27 위의 사료, 1894년 7월 21일 참조.
III.부산 병참주지 설치와 제5사단의 북상
1894년 7월 27일, 경부 병참선 정찰에 나선 후지이 소좌의 최종 보고서가 나오 지 않았고 성환전투의 승패도 알 수 없던 상황에서 가와카미 병참총감은 제5사 단의 병참선 설치에 관해 노즈 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했다.28
28 위의 사료, 1894년 7월 27일 참조.
1. 인천-부산 간의 항로가 폐쇄되는 경우 육로로 부산에서 대구, 상주, 충주를 경 유하는 도로를 병참선로로 채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 도로는 매우 험악해서 미 리 수리하지 않으면 도저히 병참선로로 쓸 수 없으므로 수리에 착수해야 한다.
전에 파견한 정찰관(후지이 시게타)의 보고에 따르면, 현재 연도에서 군수물자,특히 쌀을 수집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미리 쌀을 수송하고 각 장소에 예비창고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 현재 가설하고 있는 전신선을 보호하지 않으 면 파괴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호위해야 한다.
2.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병참감 후루카와 대좌에게 다음과 같은 인원을 부 속시키고 부산으로 파견해야 한다.
헌병·군의부(軍医部)·우편부를 제외한 병 참감부와 3개의 병참사령부를 구성할 수 있는 인원, 공병 제6대대 제1중대
3. 병참감 후루카와 공병 대좌는 (7월) 31일 오후 5시 이즈미호(和泉丸)로 우지나 항(宇品港)에서 출항하고, 모지항(門司港)에서는 공병 제6대대 제1중대를 승 선시켜야 한다. 단, 이 중대의 출발 명령과 모지항에서의 승선 명령은 제6사단 장을 통해 하달해야 한다. 4. 후루카와 병참감은 도로 수리에 대해서는 병참총감의 지시를 따르고, 군수물자 의 수집, 수송과 창고의 설치에 대해서는 야전감독장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5. 도로 수리에 필요한 인부(工夫)는 되도록 현지에서 구해야 한다. …
6. 파견에 필요한 선박에 관해서는 우지나의 야마네 소좌[야마네 다케스케(山根 武亮), 우지나 운수통신지부장(運輸通信支部長)]과 협의한다.
병참총감은 위와 유사한 명령을 후루카와 병참감에게도 하달했다.29
29 「7月」 JACAR Ref.C06062203800, 明治27年6月「陣中日誌7兵站総監部27自 6, 5至9, 3」, 1894년 7월 28일 참조.
제5사 단장에게 내린 위의 명령에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경부 간의 육로 병참선은 부산-인천 간의 해로를 이용할 수 없을 때의 대안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해상수송을 이용하여 군대를 인천으로 보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만 당시 벌어진 풍도 해전에서 승리했음에도 일본 해군이 서해의 제해권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본영은 해상수송의 위험성 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대본영은 거리가 멀고 길도 매우 험악했지 만 경부 간의 육로 병참선을 설치하는 플랜 B를 들고 나왔다.
둘째, 이 병참선은 물론 부대의 이동을 지원하는 ‘통과형’ 병참선이지만 원 활한 기능을 위해서는 도로의 수리와 전신선의 보호가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대본영은 제6사단의 공병 중대를 제5사단 병참감에게 배속시켜주었다.
그리고 도로 수리의 명령과 업무 보고는 가와카미 병참총감이 직접 챙긴 것으로 보아 육로 병참선에서 도로 정비의 중요성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조선 말기까 지 도로는 대부분 폭이 좁고 자연적인 지형에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에 소나 말 이 겨우 지날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고정된 법정 도로가 드물고 통행자의 편의 에 따라 언제든지 노선이 바뀔 수 있어서 대량 수송에 적합하지 않았다.30
셋째, 병참총감이 지정한 부산-대구-상주-충주의 중로 병참선로는 조선 시대 간선도로 중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제4로의 노선과 일치했다.
조선시대 의 지리서에 따르면 제4로의 경유지는 한강-용인-충주-문경-대구-청도-양 산-동래로서 총 907리였다.31
하지만 훗날 노즈 사단장이 평가했듯이 “도로의 대부분은 험악한 돌길이었고 도로라고 하기 어렵고 단지 논두렁길에 지나지 않 는 부분이 많아 매우 어려운 길”이었다.32
30 朴慶龍, 1995, 『開化期 漢城府 硏究』, 一志社, 166쪽.
31 조선시대 전국적 도로망을 밝힌 대표전 지리서로는 『도로고(道路考)』(1770), 『증 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동지지(大東地志)』(1860)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신경준이 편찬한 『도로고』에서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에 6개의 간선도로가 뻗어 나가는 것으로 기록했다. 『증보문헌비고』의 9대로(大路), 『대동지지』의 10대 로 더 상세하게 기술했다. 각 노선과 경유지에 대해서는 한국도로공사, 1981, 『韓 國道路史』, 韓國道路公社, 180쪽; 고동환, 2015, 『한국 전근대 교통사』, 들녘, 95~96쪽; 허우긍, 도도로키 히로시(轟博志), 2007, 『개항기 전후 경상도의 육상 교통』, 서울대학교출판부, 27~29쪽 참조.
32 「申報, 第5師団長野津中将から参謀総長宛, 8月24日」 JACAR Ref.C0606176 2600, 明治27年自6月至9月 「混成第9旅団 第5師団 報告」.
동시에 이 노선은 제1전신가설지대가 가설하는 군용 전신선 루트와 완전히 일치했다.
사실 당초 받은 명령에 따르면 제1전신가설지대는 부산에서 대구-성주-추풍령을 거쳐서 청주까지 가설해야 하는데 병참선로가 동쪽으로 변경됨에 따라 대구-낙동-상주-충주 루트로 바 뀌었다.33
따라서 대본영은 군대와 물자의 이동, 통신의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제6사단의 공병 중대까지 충원하여 도로 정비와 전신선 설치 및 보호에 특별히 신경 썼다.
이처럼 경부 간의 육로 병참선이 중로로 결정됨에 따라 일본군의 전 신가설 노선도 변경되었다.
7월 28일 가와카미 병참총감은 후루카와 제5사단 병참감에게 도로 정비에 관해 구체적인 명령을 하달했다.34
특히 도로 수리는 착수하기 전에 연도의 조 선 지방 관리에게 통지하여 그들의 도움을 얻도록 하고 가능하면 영사의 손을 거쳐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리고 도로 수리에 필요한 재료는 육군대신으로부터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전에 제1전신가설지대의 대장 요시미 세이(吉見精) 소좌에게 보냈던 화약과 도구를 부산의 운수통신지부장 시바 중위로부터 수령 하여 먼저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7월 31일 후루카와 병참감은 병참감부의 일부와 3개의 병참사령부, 그 리고 공병 제6대대의 제1중대[대장 히구치 세이자부로(樋口誠三郎) 대위]를 이끌 고 우지나항을 출항했다.35
육군성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제5사단 병참부의 규 모는 병참치중의 앞의 ④~⑥과 인부를 제외한 인원 264명과 승마 29필, 여기 에 제6사단 공병 중대 231명과 승마 4필을 합하면 전 인원은 495명과 승마 33필이었다.
그 밖에도 제5사단 소속의 인부 464명과 51명의 석공도 병참부에 배치되었다.36
33 제1전신지대의 가설 노선이 변경된 경위에 대해서는 延廣寿一, 2011, 앞의 글; 斎 藤聖二, 2003, 앞의 책, 제3장 참조.
34 「7月」 JACAR Ref.C06062203800, 明治27年6月「陣中日誌7兵站総監部27自 6, 5至9, 3」.
35 参謀本部 編纂, 1907, 『明治二十七八年日清戦史』(第8巻), 3~4쪽.
36 参謀本部, 1907, 위의 책, 3~4쪽; 陸軍省 編纂, 2005, 『日清戦争統計集: 明治 二十七·八年戦役統計』(下卷1), 海路書院複製, 26~28쪽.
이렇게 보면 제5사단 병참부는 무려 1,000명이 넘는 대규모의 조직이었다.
같은 날 제5사단장은 보병 1개 대대를 다른 배로 부산으로 보냈고, 8월 1일 선전포고가 발포되자 다음 날 제5사단장은 사단사령부와 지부를 포함 한 제3차 수송부대를 이끌고 직접 부산으로 출항했다.37
8월 2일 부산에 상륙한 후루카와 병참감 일행은 부산을 병참주지(兵站主地) 로 정하고 거류지 상법회의소를 병참감부의 사무실로 쓰는 동시에 우마야바라 (馬屋原) 소좌를 부산 병참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앞서 도착한 제1전신 가설지대장에 따르면 당시 부산 거류지에는 일본인이 1,016가구에 4,481명이 살고 있어서 음식물과 약품을 얻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38
후루카와는 공병 중 대에 거류지 부근의 도로부터 수리에 착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병참총 감부는 후루카와에게 비어 있는 부산 운수통신지부장직을 겸임하되 부산을 떠 날 때는 부산 담당 병참사령관에게 인수인계를 하도록 지시했다.
더불어 도로의 수리비는 군비에서 지급하고 병참선 설치를 위해 추가로 5개의 병참사령부를 증파하겠다고 통지했다.39
37 제5사단장이 7월 중순에 두 차례로 나누어 해로로 수송하는 계획을 작성했다. 이미 혼성여단을 두 차례로 운송했기 때문에 제5사단 잔여 부대의 수송은 제3차와 제 4차 수송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① 제3차 수송부대: 사단사령부 및 지부, 보병 제 12연대, 기병 제5대대 본부 및 제2중대의 2소대, 야전 포병 제5연대 본부 및 제1대 대, 양식 종열 0.5, 탄약대대 본부와 보병 탄약 종열 0.5, 산포탄약 종열 1, 攻城廠 縱列, 치중감시대 1. ②제4차 수송부대: 보병 제10여단 사령부, 보병 제22연대, 기 병 제5연대 제2대대, 치중병 제5대대 본부 및 양식종열 0.5, 보병탄약 종열, 산포 탄약 종열 1, 위생대 1, 야전병원 1, 야전 포창 1, 포창감시대 1, 위생예비원 1, 위생 예비창 1. 그 후 여기에 임시 공병 중대와 병참부를 부속시켰다.
38 『吉見日誌』, 1894년 7월 7일 자. 39 「8月」 JACAR Ref.C06062203900, 明治27年6月 「陣中日誌7兵站総監部27自 6, 5至9, 3」.
8월 3일, 후루카와 병참감은 일본에서 모집한 인부 500명을 공병에게 나누 어 주고 경부 간 도로 8곳을 동시에 수리하는 대대적인 작업을 개시했다.
또 선 두에 선 대대를 지원하기 위한 우마 70마리와 조선인 인부 500명을 부산에서 고용하여 한성까지 사용할 경우 더 이상 부산에서 후속 부대를 도울 인부를 고 용하기 어려우니 신속하게 충분한 인부를 일본에서 충원해달라고 병참총감에 게 요청했다.
이에 대해 가와가미 병참총감은 즉시 일본인 인부 300명을 모집 하여 부산으로 수송하는 사안을 육군대신에게 요청했고, 그 후 일륜차(猫車) 700대와 인부 300명을 6일 다도쓰항(多度津)에서 배로 수송하겠다는 통지를 후루카와에게 보냈다.40
사실 이미 한 달 전부터 부산의 인부와 우마 고용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 었다.
일례로 7월 3일 요시미 제1전신가설지대장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하루 40전의 임금으로 400명을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불과 이틀 뒤에는 “인부 모집 이 매우 곤란”하여 일당을 70전 이상 내야만 했는데도 150~160명밖에 구할 수 없었다.41
다음 날인 7월 6일에는 부산을 떠나기 전에 하루 20전이고 출발한 후에는 70전씩 주겠다고 하여 인부 310명을 모집했다.42
이처럼 임금을 올려주 더라도 현지의 조선 민중이 쉽게 모집에 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심지어 부산에서 출발한 7월 21일 새벽 5시 짐을 운반할 소를 충분히 확보 하지 못해 오전 10시 선발대만 먼저 보내야 했다.
요시미 지대장은 120마리의 소를 계약했지만 그 수량만큼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렵게 모집한 인부 들도 틈만 보이면 도망하기 일수여서 급히 대본영에게 인부 500~600명을 보 내 달라고 요청했다.43
이러한 전례가 있어서 8월 초 후루카와 병참감이 일본인 인부의 지원을 요청했을 때 병참총감부의 조치는 믿기 힘들 정도로 신속했다.
한 달 전 경인 병참선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혼성제9여단의 병참부가 조선인 인 부의 부족을 호소하자 대본영은 식량과 인부를 현지조달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질책한 바가 있었다.44
40 위의 사료.
41 『吉見日誌』, 1894년 7월 5일 자.
42 『吉見日誌』, 1894년 7월 6일 자.
43 『吉見日誌』, 1894년 7월 21일 자. 44 위신광, 2024, 앞의 글.
8월 4일 아침 후루카와 병참감은 2개의 병참사령부를 대구와 상주로 파견 하면서 부산에서 출발한 선발대 보병 제12연대 제2대대에게 우마 70마리와 인 부 642명을 배속시키고 13일간의 식량도 미리 대구로 보내주었다.45
물론 도로 를 수리하는 공병도 이들과 함께 출발했다.
대구의 병참사령부는 마쓰무라(松 村) 소좌가 9일에 개설했고 12일 상주에 도착한 이마바시(今橋) 소좌는 명령이 변경되어 수운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낙동진에 병참사령부를 설치하게 되었 다.46
이처럼 제5사단의 병참부는 대본영의 적극적 지원 아래 부산을 출발한 지 일주일 만에 대구와 낙동진에 병참사령부를 신속하게 설치할 수 있었다.
더불어 병참지가 예정된 상주에서 낙동진으로 변경된 사실을 통해 제5사단 병참부가 낙동강의 수로 병참선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의도를 재차 확인할 수 있 었다.
8월 6일 오전 9시부터 노즈 제5사단장이 인솔하는 제3차 수송부대들이 속 속 부산에 입항했고 순차적으로 상륙하기 시작했다.47
그러나 노즈 사단장은 중 로 병참선로가 매우 험하고 인마 모집도 쉽지 않다는 보고를 받자 오후 1시에 보 병 1개 대대만 중로를 이용하고 나머지 병력은 한성까지의 이동 거리가 짧은 원 산으로 보내겠다고 대본영에 제안했다.48
45 「8月」 JACAR Ref.C06062203900, 明治27年6月 「陣中日誌7兵站総監部 27自6, 5至9, 3」.
46 参謀本部, 1907, 앞의 책, 4쪽; 陸軍省 編纂, 2005, 『日清戦争統計集: 明治 二十七·八年戦役統計』(上卷1), 509~513쪽.
47 「申報, 第5師団長野津中将から参謀総長宛, 8月24日」 JACAR Ref.C060617 62600, 明治27年自6月至9月「混成第9旅団第5師団報告」; 「意見書9月30日」 JACAR Ref.C06061765800, 明治27年自6月至9月 「混成第9旅団 第5師団 報 告」.
48 第五師団長野津道貫中将, 『明治二十七八年陣中日記』(1894.6.4.~1895.5.15.), 일본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소장 『野津道貫関係文書』 28-1·28-2(이하 『野津 日記』로 표기).
따라서 노즈 사단장은 급히 나머지 병 력의 상륙을 중지시키고 보병 제12연대 제3대대의 3개 중대에게 7일 아침에 중 로를 따라 행군하도록 지시하고, 탄약대대와 보병 제12연대 제3대대의 1개 중 대는 일단 부산에서 대기하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원산항으로 보내고자 했다.
하지만 대본영은 노즈 사단장의 결정을 무시하고 일부의 전투부대만 원산으로 수송하고 사단장은 한성으로 급행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노즈 중장은 8월 7일 중로를 따라 북상할 부대들을 추가로 상륙시키 는 한편 원산으로 갈 보병 제12연대 제1대대와 야전 포병 제5연대의 본부와 제 1대대를 두 척의 수송선에 나누어 부산항을 출발시켰다.49
당시 수송선으로 부 산에서 원산까지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임시방편으로 1개의 병참 사령부도 원산으로 보내 병참 업무를 처리하고 부대들이 원산에서 한성으로 출 발하면 즉시 부산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50
실제로 이 병참사령부는 8일 원 산에서 업무를 개시했고 13일 부산으로 복귀했다.51
한편, 노즈 일행이 출발한 당일 부산의 무로타 요시아야(室田義文) 총영사가 오토리 일본공사를 통해 조선 정부에 중로를 따라 행군하는 일본군대를 위해 인부와 마필의 모집, 조선 동전 (한전)의 환전에 대한 협조를 요청해두었다.52
이에 다음 날(8일) 김윤식 독판교 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연도의 관리들에게 전보로 통지했다고 알려 왔다.53
49 이 중에서 보병 제12연대의 제1대대는 제1, 3, 4중대 각 1소대 부재, 야전 포병 제 5연대의 제1대대는 제2중대 부재.
50 「8月」 JACAR Ref.C06062203900, 明治27年6月 「陣中日誌7兵站総監部27自 6, 5至9, 3」.
51 陸軍省 編纂, 2005, 앞의 책(上卷1), 509~513쪽.
52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앞의 책, 고종 31년 7월 7일(1894.8.7.), 釜山發上京日軍에 對한 沿道各地方官의 協調依賴(문서번호 2964).
53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앞의 책, 고종 31년 7월 8일(1894.8.8.), 上京日軍에 對한 協調의 准飭回答(문서번호 2967).
IV.초기 경부 병참선의 운영 실태
여기서는 제5사단장의 한성 행군을 중심으로 경부 병참선의 이용 실상을 살펴 보고자 한다.
8일 새벽 노즈 사단장은 참모부의 부관과 기병 1소대를 이끌고 부산을 떠나 한성으로 향했다.
그의 행군 궤적은 <표 1>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표 1> : 생략 (첨부 논문파일 참조)
<표 1>에서 제시한 것처럼, 노즈 사단장 일행은 부산에서 충주까지 육로를 이용했고 보통 새벽에 출발하여 해가 지기 전에 정박지에 도착한 후 다음 날 새 벽 다시 출발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대구에서는 이례적으로 행군이 정지되었는 데 그 이유는 “고용한 조선인 인부들의 도망”과 “한전과 식량의 부족”으로 인해 전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55
그리고 문경새재를 넘어서 충주 근처의 가흥부터 는 한강의 수운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광진 나루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제5사단장 일행은 육로와 수로를 이용하여 12일 후인 19일에 한성에 도착했다.
제5사단장 일행이 이용한 중로는 중간에 험한 고갯길과 도강을 해야 하는 구간도 있었고 게다가 도로 수리가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길이 “모두 황폐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56
참고로 대마도 통사 오다 이쿠고로(小田幾五郎, 1755~ 1832)의 『상서기문(象胥記聞)』에 따르면, 이 도로의 주요 구간의 도로 폭은 9척 이며 가로수가 이어져 있지 않아 한여름에는 걷기 힘들고, 보통 사람이 하루에 걷는 거리를 100리로 보았을 때 동래에서 서울까지 총 940리의 길은 대략 12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57
조선 후기 상인과 여행객의 하루 이동 거리는 대략 70~80리였고 최대 100리를 넘기 어려웠는데 도보로는 한 시간에 약 10~15리 를 갔다고 한다.58
어쨌든 당시의 기록과 비교해보았을 때 노즈 사단장 일행의 행군 속도는 매우 빠르다고 할 수 없다.
노즈 사단장도 이러한 사실을 의식한 듯 한성에 도착한 후에 참모총장에게 올린 보고서에 “도로의 험악함, 한전의 결핍, 인부와 마필의 부족 등으로 인해 군대의 행진이 매우 곤란했다”고 변명하고 있다.59
55 『野津日記』, 1894년 8월 11일·13일 자.
56 「8月」 JACAR Ref.C06062203900, 明治27年6月 「陣中日誌7兵站総監部 27自6, 5至9, 3」.
57 小田幾五郞 저, 쿠리타 에이지(栗田英二) 역, 2005, 『상서기문』, 이회문화사, 44~45쪽.
58 김종혁, 2001a,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에 나타난 한강 유역의 장 시망과 교통망」, 『경제사학』 30권 0호, 16~17쪽; 김종혁, 2001b, 「朝鮮後期 漢 江流域의 交通路와 市場」, 고려대학교 대학원지리학과 박사학위논문.
59 「申報, 第5師団長野津中将から参謀総長宛, 8月24日」 JACAR Ref.C0606176 2600, 明治27年自6月至9月 「混成第9旅団 第5師団 報告」; 「意見書 9月30日」 JACAR Ref.C06061765800, 明治27年自6月至9月 「混成第9旅団 第5師団 報告」.
노즈 사단장 일행은 출발 첫날부터 짐수레는 물론 마필의 통행도 곤란한 지 형을 만났고 짐을 휴대하고는 행군할 수 없을 정도의 무더위에 직면하자, 다음 날(9일) 즉시 일행들의 배낭을 수로를 통해 부산으로 돌려보내고 해로로 인천까 지 운송하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후루카와 병참감에게 같은 조치를 취하여 후발 부대의 짐도 줄이라고 지시했다.60
14일 낙동진을 거쳐 상주에 도착한 노즈 사 단장은 도로의 험악한 상태, 한전과 식량의 부족, 조선인 인부의 고용난을 호소 하면서 다시 한번 대본영에게 후속 부대들을 원산항이나 인천항으로 수송해달 라고 요청했다.61
낙동진에서 요시미 소좌의 제1전신가설지대를 만난 노즈 사단장은 전신선 의 가설 상황과 조선정부가 연도의 부사(府使)들에게 일본군에게 편의를 제공하 라는 공문을 내렸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62
실제로 오토리 일본공사는 노즈 사 단장이 호소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정부에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의 관찰사에게 협조 공문을 내리라고 수차례에 걸쳐 요구했다.63
60 『野津日記』, 1894년 8월 8일 자.
61 『野津日記』, 1894년 8월 14일 자.
62 「申報, 第5師団長野津中将から参謀総長宛, 8月24日」 JACAR Ref.C0606176 2600, 明治27年自6月至9月 「混成第9旅団 第5師団 報告」.
63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앞의 책, 고종 31년 7월 11일(1894.8.11.), 約束한 日軍所用銅錢准借關文의 速發要請 (문서번호 2983호); 고종 31년 7월 12일(1894.8.12.), 上京日軍에 對한 沿道便宜提供再飭要望 (문서번호 2987호); 고종 31년 7월 13일(1894.8.13.), 忠州等地日軍需用米·錢·人·馬의 供給 및 塾 用飭令要請 (문서번호 2989호); 고종 31년 7월 14일(1894.8.14.), 同上驪州·楊 根·廣州等地另飭關文의 繕交催促 (문서번호 2991호).
일본공사가 조선 정부에 여러 번 동일한 요청을 반복했다는 사실은 거꾸로 일본의 압박이 별로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을 방증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본의 요구는 일본 화폐의 교환에서 일본군의 이동을 도울 ‘방조원(幫助員)’의 파견까지 압박 수위가 올라갔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64
그 후에도 노즈 일행의 고난의 행군은 계속되어 문경새재에서는 암석들 사 이를 어렵게 빠져나와야 했는데 경사가 심한 바위를 넘던 도중에 말이 쓰러지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다급해진 노즈 사단장은 근처에 있던 제1전신가설지대에게 도로 수선을 지시하여 후발 부대의 안전을 꾀했다.65
17일 오전 남한강 상류의 가흥에 도착한 노즈 일행은 수운을 이용하기 위해 모두 승선했다.
배 한 척에 말 3필과 기병 그리고 마부를 태우고 장교 이하의 인원과 이틀분의 양말(糧粖)을 별도의 배에 선적한 후 오후 1시에 출발했다.66
노즈 사단장은 주야겸행의 강행 군을 하기로 했지만 급할 것이 없는 조선인들이 밤에 쉬지 못하도록 각 배마다 당번을 정하여 독촉하게 하는 한편, 맨 끝의 배에는 하사와 통역을 태워 뒤처지 는 배가 없도록 했다.
이처럼 노즈 일행은 밤낮 쉬지 않고 배로 한강을 내려온 끝에 다음 날 밤 9시 반 광진 나루에 도착했다.
이것은 가흥에서 광진까지 대략 33시간 만에 주파한 것으로 같은 거리를 2, 3일 걸린 조선시대의 조운선에 비 하면 상당히 빨랐다. 노즈 사단장 일행의 이동 경로는 조선시대 경상도의 세곡이 용산의 경창(京 倉)으로 운송되는 노선과 정확히 일치했다.
조선 태종 때 경상도 해운의 전면 중 지에 따라 경상도 남부 각 군·현은 세곡을 해당 군·현에서 가까운 남강과 낙동 강까지 가져와 배에 싣고 북상하여 상주군 낙동면에 있는 낙동진으로 옮겼다.67
64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앞의 책, 고종 31년 7월 15일(1894.8.15.), 忠州大邱間日軍便宜提供飭令關文의 發給 및 幫助員 飭派要請(문서번호 2994호).
65 위의 사료.
66 「申報, 第5師団長野津中将から参謀総長宛, 8月24日」 JACAR Ref.C0606176 2600, 明治27年自6月至9月 「混成第9旅団 第5師団 報告」.
67 吳浩成, 2007, 『朝鮮時代의 米穀流通시스템』, 국학자료원, 72~74쪽.
여기서부터는 인부와 말을 고용하여 세곡을 험준한 조령을 넘어 충주의 가흥창 (可興倉)까지 육로로 운송하였는데 이 육로는 대략 40km에 지나지 않았지만 험준한 산길을 끼고 있어 보통 4일이 걸렸다고 한다.68
가흥창에 모인 세곡은 한강의 수로로 경창까지 운송되었고 그 시간은 계절적인 수량에 따라 차이가 나 지만 빠르면 하루 느려도 4일 정도였다고 한다.69
다만 남한강에서 사용된 선박 의 크기에 따라 선적량의 차이가 나는데, 대선 250~300석, 중선 200~250석, 소선 130~200석 정도였다.70
68 상주에는 수백 마리의 말과 인부가 있었고 이들이 이용하는 馬房도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말 등에 쌀을 싣고 조령을 넘어 충주까지 가는 데 보통 4일 이 걸렸으므로 산속 중간에 인마의 숙식 장소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69 『여지도서(與地圖書)』 상, 여주, 충주, 단양, 영춘 전세조; 최영준, 1997, 『국토와 민족생활사: 한국역사지리학 논고』, 한길사, 124~126쪽.
70 『세종실록』 권113 28년 9월 신사조; 강선(江船)의 종류와 크기는 『경국대전』(工典 舟車, 造營尺 1尺=31.195cm)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대선 중선 소선
측정법 길이 넓이 길이 넓이 길이 넓이
조영척 50척 10척 3촌 46척 9척 41척 8척
미터법 16m 3.3m 14.7m 2.9m 13m 2.6m
노즈 사단장과 함께 부산에 상륙한 보병 제12연대는 원산으로 올라간 일부 를 제외하면 대부분 중로 병참선을 통해 용산까지 이동했다.
전체 일정을 정리 하면 노즈 사단장에 앞서 1개 대대가 7일 출발했고, 뒤이어 하루 간격으로 노즈 사단장 일행, 제2차, 제3차 부대, 11일에 마지막 제4차 부대가 출발했다.
출발 은 하루 간격이었지만 용산 도착은 8월 22~29일로 뒤로 갈수록 늦어졌다.
이 것은 뒤에 출발한 부대들의 행군이 앞선 부대들에 비해 원활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이들 다섯 그룹의 행군을 지원한 병참 시스템이 어느 정도 효율적 으로 가동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부산에서 병참 시스템을 지휘하고 있던 후루카와 병참감은 노즈 사단장 일 행이 부산을 떠나자 다음 날(9일) 군대가 순차적으로 출발해야 하니 병참부에 필요한 인력을 모두 보내 달라고 병참총감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8월 10일에는 상주에 설치 예정이었던 병참지를 수운이 용이한 낙동진으로 옮기라고 지시하 고 삼랑진, 대구, 문경, 하담에 설치할 병참사령부의 병참사령관을 임명하고 다음 날(11일) 즉시 출발하도록 지시했다.71
13일에도 문경새재 이북의 안보(安 保), 장호원, 이천, 조현 등 네 곳에 병참사령부를 설치할 요원을 파견하고 대구 에는 위생예비원(衛生預備員)과 수의관(獸医官)을 보내고 환자수송부를 하담에 두는 한편, 부산에서는 병참병원의 설치에 착수했다.
이처럼 후루카와 병참감 은 부산-송파진 사이에 20개의 병참지와 9개의 병참 창고를 선정했다는 사실 을 14일 병참총감에게 보고했다.72
이어서 17일 후루카와는 송파진의 병참사령관으로 야마가타 소좌를 파견 했다.
18일 오전에 4개의 병참사령부를 만들 수 있는 인원이 제4차 수송부대와 함께 부산에 도착하자 19일 후루카와는 군의관과 간호사 1명씩을 원산항으로 보냈고, 20일 청도, 다부, 해평 세 병참지로도 병참사령부를 구성할 인력을 파 견했다.73
주목할 것은 제5사단장이 한성에 도착한 이후에도 후루카와 병참감 은 부산에서 송파진까지 주요 병참지에 병참사령부를 계속 설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74
71 일차로 출발한 대대와 노즈 사단장 일행은 병참사령부 예정지인 하담 대신에 강의 맞은편에 위치한 가흥을 이용했다. 「8月」 JACAR Ref.C06062203900, 明治 27年6月 「陣中日誌7兵站総監部27自6, 5至9, 3」, 1894년 8월 10일 참조.
72 「8月」 JACAR Ref.C06062203900, 明治27年6月 「陣中日誌7兵站総監部 27自6, 5至9, 3」, 1894년 8월 14일 참조; 國史編纂委員會 編, 1987, 『駐韓日本 公使館記錄』(2卷), 國史編纂委員會, 二(9) 참조. 병참지는 총 20개, 창고 위치는 별표 표시. ☆釜山 亀浦 勿禁店 ☆三浪津 密陽 清道 ☆大邱 多富 海平 ☆洛東 台封 ☆聞慶 安保 忠州 ☆河潭 長湖院 ☆利川 昆池岩 ☆島硯 ☆松坡鎮
73 竹内正策, 2017, 『韓地從征日記』, 竹内正策古文書研究会 编集· 発行, 1894년 8월 19일 자.
74 参謀本部, 1907, 앞의 책, 4쪽; 陸軍省 編纂, 2005, 앞의 책(上卷1), 509~513쪽.
심지어 부산에 도착한 제4차 수송부대가 중로 병참선을 사용하지 않고 인천으로 직행했음에도 후루카와는 이미 제12연대의 병력이 통과한 노선 을 따라가며 병참선 구축에 매진한 사실은 중로 병참선이 모양만 갖춘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사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병참선을 지향했음을 보여준다.
중로 병참선의 중요성에 대한 대본영의 인식은 후루카와의 그것을 훨씬 뛰 어넘고 있었다.
일례로 부산에서 도로 수리를 위한 인부의 모집이 곤란해지자 가와카미 병참총감은 즉시 일본인 석공(石工) 300명과 우물을 파는 기술자 20명을 육군대신에게 요청했고 육군대신도 22일에 절반의 공병 중대와 석공 200명, 우물을 파는 기술자 20명을 보내주는 등 지나칠 정도로 신속하게 반응 했다.75
또 후루카와 병참감이 부산 일대의 소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어 지금까 지 소 24마리가 죽었고 앞으로 더 많이 죽을 것 같으니 수의사 여러 명을 급히 파견해달라고 요청하자 이때도 병참총감은 즉시 소 전염병 박멸을 위해 구로스 (黑須) 일등 수의사를 부산으로 파견하면서 도착한 후에 후루카와 병참감의 지 휘를 받도록 조치했다.76
75 「8月」 JACAR Ref.C06062203900, 明治27年6月 「陣中日誌7兵站総監部 27自6, 5至9, 3」, 1894년 8월 13일·19일 참조.
76 위의 사료, 1894년 8월 11일 참조.
이처럼 대본영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병참 관 련 자원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인해 중로 병참선은 사실상 주요한 병참지에 병참 사령부만 설치해놓았을 뿐 병참지와 병참지를 연결시켜줄 종열(인부와 짐말로 구 성)을 갖춘 완전한 병참선에는 이르지 못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노즈 사단장과 제5사단이 경부 병참선을 통해 이동하던 중 에 지역사회와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여 발생한 많은 애로사항을 해소하기 위하 여 일본은 오토리 공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조선정부에 편익 제공을 압박했다.
하지만 일본군과 지역사회의 불편한 관계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이러한 애로 사항들은 노즈 사단장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에 돌입한 모든 일본 군 대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한반도 내에서 보다 자유로 운 군사행동을 보장받기 위해 강력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필요했다.
이러한 경 험들은 곧이어 체결되는 『조일공수동맹조약(朝日攻守同盟條約)』의 성립과 무 관하지 않다고 사려된다.
V.맺음말
청일전쟁 시기 경부 병참선은 일본군이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부산-인천 간의 해로를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필수적인 수송로였다.
늦어도 1894년 7월 초까지 대본영의 병참총감부는 이미 청군과 동학농민군의 봉기 등 정세를 종합해서 중로를 병참선로로 선정하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단지 경사가 심한 조령을 적절하게 개조해서 이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중로와 서로 중에 최종 선택을 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가와카미 병참총감은 육군대학교 출신의 엘리트 장교 후지이 소좌를 현지로 보내 중로의 도로 상태를 3주간에 걸쳐 매우 상세하게 조사했다.
결국, 한반도로 먼저 파견된 혼성여단 병참부의 보고까지 고려하여 병참총감부는 중로의 육로 병참선과 낙동강, 남한강을 활용하는 병참 선을 설치하라는 지시를 제5사단에 내렸다.
경부 병참선은 제5사단의 한성 집결을 위해 설치되었지만 실제로 노즈 사단 장을 비롯한 일부의 병력만 통과했다.
원래의 계획에 따르면 제5사단의 잔여 부 대는 대부분 경부 병참선을 따라 이동해야 했으나 일본 육군은 안전한 육로의 병참선을 포기하고 위험 부담이 큰 해로수송을 선택했다.
이것은 육로 병참선이 단지 ‘통과형’일지라도 해상수송에 비하면 그만큼 어려움이 컸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본영이 경부 간의 병참선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전투의 전개 상황을 미리 모두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만 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경부 간의 병참선은 유지해야만 했다.
이것은 제5사단의 병력이 모두 한성에 집결한 후에도 대본영의 병참총감이 직접 이 구간을 관할하 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초기 경부 병참선의 사용을 둘러싸고 현장의 노즈 제5사단장과 대본영의 의 견 대립도 눈에 띈다.
길이 멀고 험준한 고개도 많은 중로 병참선을 통과해야 하 는 사령관으로서 노즈는 되도록 해로를 이용하여 후속 부대를 인천이나 원산으 로 직송하도록 거듭 요구했지만 안전성을 중시한 대본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결과 노즈는 경부 병참선을 통과하는 부대들의 짐만 해로를 이용하여 인천으로 수송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물론 경인 병참선을 설치할 때 국내 인부 파견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대본영이 부산에 파견한 사단 병참부의 요청에는 즉시 지원 해준 것을 보면 짧은 기간이지만 병참에 대한 대본영의 인식이 바뀌었다는 사실 을 엿볼 수 있다.
한편, 병참선의 설치와 운영은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타국에 서 대규모의 병력이 장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설치된 병참선은 일괄성으로 통과 하는 병력들과 달리 각 병참의 거점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만 원활하게 운 영되는 체제이다.
즉, 각 병참지를 담당할 인력들은 그곳에 남아서 통과하는 병 력들을 위해 숙소와 식량, 짐들의 운반을 책임져야만 했다.
이러한 병참선을 운 영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지역의 관리, 주민들과 접촉이 많을 수밖에 없고 따 라서 원활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경부 병참선은 주변 지역사회 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반감과 저항까지를 초래했다.
이 부 분은 동학농민운동과 연계하여 좀 더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사료
『경국대전』(工典 舟車). 『세종실록』 권113. 『여지도서(與地圖書)』 상.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編, 1967, 『舊韓國外交文書』(第3卷 日案3), 高麗大 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兵站総監より藤井少佐宛訓令」 JACAR Ref.C06061941900, 明治27年6月12日~7月 22日 「玉手箱 第4号」. 「申報, 第5師団長野津中将から参謀総長宛, 8月24日」 JACAR Ref.C06061762600, 明治27年自6月至9月 「混成第9旅団 第5師団 報告」. 「留守第5師団より兵站部並第3野戦病院等職員表進達の件」 JACAR Ref.C0512151 2900, 明治27年8月戦役日記. 「意見書9月30日」 JACAR Ref.C06061765800, 明治27年自6月至9月 「混成第9旅団 第5師団 報告」. 「第21号~第30号」 JACAR Ref.C13110351300, 臨時事変に関する書類綴(乙)明治27 年6月. 「第41号~第50号」 JACAR Ref.C13110351500, 臨時事変に関する書類綴(乙)明治27 年6月. 「7月」 JACAR Ref.C06062203800, 明治27年6月「陣中日誌7兵站総監部27自6, 5至 9, 3」. 「7月5日兵站総監より藤井少佐宛訓令」 JACAR Ref.C06061942100, 明治27年6月12 日~7月22日 「玉手箱第4号」. 「7月12日藤井少佐発川上総監宛」 JACAR Ref.C06060786600, 明治27年7月~8月 「着電綴(三)」. 청일전쟁기 일본 제5사단의 한성 집결과 경부 병참선 설치 | 73 「8月」 JACAR Ref.C06062203900, 明治27年6月 「陣中日誌7兵站総監部27自6, 5至 9, 3」. 吉見精, 『入韓日誌一』, 防衛省防衛研究所図書館. 藤井茂太, 1936, 『両戦役回顧談』, 偕行社. 小田幾五郞 저, 쿠리타 에이지(栗田英二) 역, 2005, 『상서기문』, 이회문화사. 野津道貫, 『野津道貫関係文書』 28-1·28-2, 일본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소장. 陸軍省 編纂, 2005a, 『日清戦争統計集: 明治二十七·八年戦役統計』(上卷1), 海路 書院複製. __________, 2005b, 『日清戦争統計集: 明治二十七·八年戦役統計』(下卷1), 海路 書院複製. 竹内正策, 2017, 『韓地從征日記』, 竹内正策古文書研究会 编集·発行. 秦郁彦 編, 2005, 『日本陸海軍総合事典』(第2版), 東京大学出版会. 参謀本部 編纂, 1904a, 『明治二十七八年日清戦史』(第1巻), 東京印刷. , 1904b, 『明治二十七八年日清戦史』(第2巻), 東京印刷. , 1907, 『明治二十七八年日清戦史』(第8巻), 東京印刷.
단행본
朴慶龍, 1995, 『開化期 漢城府 硏究』, 一志社. 吳浩成, 2007, 『朝鮮時代의 米穀流通시스템』, 국학자료원. 최영준, 1997, 『국토와 민족생활사: 한국역사지리학 논고』, 한길사. 斎藤聖二, 2003, 『日清戦争の軍事戦略』, 芙蓉書房出版.
논문
강효숙, 2002, 「第2次東学農民戦争と日清戦争」, 『歴史學研究』 762. 김종혁, 2001a,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에 나타난 한강유역의 장시망과 교통망」, 『경제사학』 30권 0호. , 2001b, 「朝鮮後期 漢江流域의 交通路와 市場」, 고려대학교 대학원지리학과 박사학위논문. 74 | 동북아역사논총 86호(2024년 12월) 청일전쟁기 일본 제5사단의 한성 집결과 경부 병참선 설치 | 75 위신광, 2024, 「청일전쟁기 일본군의 경인 병참선 구축」, 『동양사학연구』 제168집. 이승희, 2004, 「청일·러일전쟁기 일본군의 군용전신선 강행가설 문제-한국 파견 ‘臨 時憲兵隊’를 중심으로-」, 『일본역사연구』 제21권. 延廣寿一, 2011, 「日清戦争と朝鮮民衆-電線架設支隊長の日記から見た抵抗活 動」, 『日本史研究』 通号584.
국문초록
청일전쟁기 일본 제5사단의 한성 집결과 경부 병참선 설치 위신광(魏晨光) 이 글에서는 청일전쟁 시기 일본 제5사단의 한성 집결을 위한 경부 병참선 설치 과정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청군을 견제하기 위해 제5사 단을 상륙시키고, 이를 위해 세 가지 경로를 활용하여 병력을 집중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해상수송의 위험성으로 인해 대부분 의 병력이 부산에 상륙하게 되었고 경부 간의 병참선 설치가 중요한 과제로 부 각되었다. 경부 병참선은 험난한 지형과 긴 거리로 인해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 으며, 일본군은 중로를 육로 병참선으로 설정하고 수로 병참선도 계획했다. 결 론적으로 경부 병참선은 제5사단의 한성 집결을 위해 필수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부 병력만 통과했다. 또한 병참선의 설치와 운영은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연 결되어 있었으며, 지역주민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아 반감과 저항을 초래 했다. 경부 병참선은 일본군이 청나라와의 전투와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복합적 인 정세 속에서 어떻게 설치되고 운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향후 이와 관련된 심층 연구가 필요하다.
주제어: 청일전쟁, 일본 제5사단, 경부 병참선, 병참부
ABSTRACT
The Japanese Fifth Division’s Assembly in Seoul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Seoul-Pusan Supply Line in the First Sino-Japanese War
Wei Chenguang
This paper analyses in-depth the process of the Japanese Fifth Division’s assembly in Seoul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SeoulPusan (Gyeongbu) supply line during the Sino-Japanese War. The Japanese army aimed to deter the Qing military on the Korean Peninsula by landing the Fifth Division. For this purpose, it utilised three routes to concentrate its forces. However, due to the dangers of maritime transport in the absence of sea control, most troops landed at Pusan, and establishing the Seoul-Pusan supply line became an important task. The Seoul-Pusan supply line faced many difficulties due to the rugged terrain and long distances, so the Japanese established the Middle Road (Jungro) as an overland supply line and also arranged a waterway supply. In conclusion, although the Gyeongbu Line was essential for the Fifth Division’s assembly at Seoul, only a small portion of the troops used it for passage. Furthermore,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the line were closely linked to the local communities, and poor relations with the local populations led to resentment and resistance. The Seoul-Pusan supply line is an important example of how the Japanese military was set up and operated in a complex context of battles with the Qing dynasty and the Donghak peasant movement, and further research is needed.
Keywords: the First Sino-Japanese War, the Japanese Fifth Division, the Seoul-Pusan (Gyeongbu) supply line, Military Station Department
동북아역사논총 86호(2024년 12월)
투고: 2024년 10월 13일, 심사 완료: 2024년 11월 4일, 게재 확정: 2024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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