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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참회의 신학 ― ‘메모리아’와 ‘포살’에 관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신은희.경희大

 

Ⅰ. 시작하며

 

이 글은 참회에 관한 기독교와 불교의 종교 철학적 대화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of Hippo)의 『고백록』(Confessions)에 나타난 ‘메모리아’(memoria) 이론을 중심으로 참회의 기억을 살 펴본다.1)

 

1) 본 논의에서 ‘메모리아’의 라틴어 표현은 일반적 개념의 ‘기억’과 구별하고, ‘컨버시오’(conversio)의 통전적 참회의 기억을 내포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불교의 전통에서는 붓다가 설법한 ‘포살’(uposatha)을 중심으로 초기 불교가 전한 참회의 진정한 의미와 수행 과정을 성찰해 본다.

이 대 화를 통해 참회에 관한 기독교와 불교의 존재론과 인식론의 유사점과 차 이점을 살펴보고, 미래 지향적인 한국적 참회 신학의 지향점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참회를 대화의 주제로 삼은 문제 인식이 있다.

과거의 한국 사회가 ‘야만의 문화’를 겪었다면, 현재의 한국 사회는 ‘아만(我慢)의 문화’를 경험 하고 있다.

아만의 문화란 양극화가 낳은 기형적인 권력 계층의 병리적 자기애로 인해 참회를 상실한 독선의 문화를 의미한다.

참회의 결핍은 사회악을 타자화하고 아상(我相)을 강화한다.

아만의 문화는 주체의 자기 절대성을 공동체의 모든 영역에서 강요하는 무관계(無關係)의 방식을 취 한다.

이러한 현상이 소수 엘리트의 지배 이념과 결합하면 에고의 극단 적인 자아 팽창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희생과 죽음을 가져오게 한다.

현재 한국 사회와 교회는 극심한 양극화 속에서 발생하는 권력형 범 죄와 불법의 은폐로 고통당하고 있다.

무고한 생명은 사회적 부조리와 국가적 관리위기로 인해 희생당하고도 침묵을 강요받는 시대에 살고 있 다.

권력자들의 정치적·사법적 폭거의 악순환은 언론 방송, 사회복지, 법 률 등의 제도적 통제력을 무력화시키며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까지 위협 하고 있다. 공동체의 혐오와 증오를 증폭시키는 사회 분열 현상에는 안 일한 관료주의적 대응으로 희생자들의 고통을 정치적으로 상품화시키고 있다.

사회적 참회가 절실히 요청되는 시기이다. 참회의 부재는 관계성의 단절이며, 악의 사회적 투사이고, 신성함의 상실로 이어진다.

이는 다양한 계층 간의 공동체적 화해와 화합을 불가 능하게 만든다.

참회의 기억은 공동체의 기억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망 각했는지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며 기억의 결핍으로부터 참회의 윤리관 을 모색하도록 돕는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강조한 것처럼, 진정한 기독교적 참회는 ‘자기 상실’(Sichverlieren)에 있지 않고, 숨겨온 죄성의 ‘드러냄’에 있다.2)

 

2) Dietrich Bonhoeffer, Dietrich Bonoeffer Werke 6: Erhik herausgegeben von Ilse Tödt, Heinz Eduard Tödt, Ernst Feil, Clifford Green (Gütersloth: Gütersloher Verlaghaus, 1998, 132; 김성호, “‘부끄러 움’에 관한 기독교 윤리학적 담론 - 디트리히 본회퍼의 ‘부끄러움’에 관한 이해를 중심으로,” 「신학사상」 197 (2022/여름), 238.

 

교회는 ‘죄 고백의 교제’이며 참회를 통 한 부끄러움을 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본래의 성스러움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참회는 부끄러움을 기억하는 새로운 자기 발견이며 신적 관계성의 일치를 이루는 영적인 길이다. 이러한 ‘드러냄의 대화’가 이 글의 기본적인 방법론적 해석학이다.

기독교의 참회와 불교의 포살은 개인과 공동체의 죄성을 기억함으로 새로운 관계성을 모색한다는 면에서 아만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유효 한 신학적 성찰이다.

특히 불교의 포살은 드러냄을 강조하는 의례이다. 포살은 홀로 은둔하여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공동체적 참회를 통해 화합승을 성취하는 전통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참회에 관한 기독교 와 불교의 대화는 참회의 개별성과 공동체의 유기체적 참회를 통해 ‘무쟁 삼매’(無諍三昧)의 화합을 추구하는 종교 간의 만남이 될 것이다.

 

Ⅱ. 아우구스티누의 『고백론』에 나타난 참회의 메모리아

 

기독교 전통에서 ‘참회’의 성서적 의미는 히브리어의 ‘슈브’(תשובה(와 그리스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에 담겨있다.3)

 

3) 기독교 전통에서 ‘참회’와 ‘회개’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나, 연구의 초점에 따라 참회를 광의적 개념으로 표현하는 사례가 있다. 성서에 나타난 참회에 관한 논의는 다음 논문에 수록되어 있다. 박경철, “하나님의 참회(?),” 「세계와 선교」 221(2014/겨울), 21-30; 이윤경, “제2성 전시대 묵시문학 장르에 나타난 참회기도 연구: 이사야 63:7–64:11과 다니엘 9:3–19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99 (2016/1), 5-27; 김영남, “신약성경에 나타난 ‘회개(참회)와 용서’,” 『참회 와 용서』(서울: The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Press, 2002), 44-81.

 

슈브의 어원적 의미는 ‘돌 아오다’, ‘회귀하다’라는 뜻으로,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여 신과 인간을 향 한 성스러운 삶으로의 전환을 표현한다.

메타노이아의 ‘메타’(μετά)는 ‘변 화’를 뜻하고, ‘노이아’(νοια)는 ‘마음’ 혹은 ‘생각’을 뜻한다.

성서적 의미의 참회란 마음을 돌이키는 깊은 내적 변화와 회개를 뜻하며 영적인 참회와 삶의 방향성을 승화시킴으로서 신성의 세계로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나타난 참회의 개념도 기본적으로 ‘돌이 킴’, ‘회귀’, ‘전환 상승’의 컨버시오를 포함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내적 참회와 삶의 근원적 전환을 가져오 는 참회의 시작은 전환의 ‘공적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고백은 홀로 행하는 은밀한 독백이 아니라 신과 사람들 앞에서의 행하는 열린 고백이 다. 그는 고백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을 향한 나의 고백은 육신의 말과 소리가 아니라 내 영혼의 말과 내 생각의 울림으로 이루어 지고 이것을 주님의 귀는 알아들으십니다.”4)

 

신을 향한 수직적 고백은 대중 앞에서의 수평적 고백으로 이어진다.

이는 윤리적 삶의 전환성을 선언하는 참회의 중요한 기능이다.

 

“내가 주님 앞에서 홀로 고백하면서 혼자서 은밀하게 두렵고 떨림으로 크게 기뻐하거나 혼자서 은밀하게 소 망을 가지고 슬퍼하려고 하지 않고 믿는 자들의 귀에 이 고백을 들려주 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5)

 

4)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라틴어 원전』(서울: CH북스, 2017), 181.

5)  Ibid., 183.

 

신과 인간 앞에서의 공적 고 백은 ‘심상’(이미지), ‘지성’, ‘감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메모리아 의 과정을 통해 참회를 완성한다.

참회의 아이콘인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하는 인간의 이데아는 ‘최고 선’(summum bonum)을 상징하는 신성을 향해 도약하고 상승하는 영적 울 림이다.

그는 네오플라토니즘(Neo-platonism)의 ‘조명론’에 기초한 ‘유출 과 회귀’의 원리에 기초하여 인간은 신의 모상(imago Dei)에 따라 ‘그를 추구하도록’ 창조되고 다시 회귀하는 영적인 존재로 이해한다.

신의 세계 로 다시 회귀하는 인식론적 근거는 ‘메모리아’(memoria), ‘지성’(intelligentia), ‘의지’(voluntas)의 내면성의 원리에 있다.

특히 메모리아는 ‘가장 내밀한 곳을 향하여’, 마음을 돌이켜 신적 세계로 상승함으로 ‘그와 결합 하는’ 존재 변화의 근거가 된다.

메모리아는 과거의 정보를 단순히 저장하는 장소 이상의 역할로서 내면의 방대한 저장소를 의미한다.

기억은 인간의 생각, 경험, 감정, 인 식의 내용을 총망라하는 복잡한 정신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어떻게 기억이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의 경험을 현재에 되살릴 수 있는지, 또 한 그 과정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신을 향해 나아가는 데 도움 을 주는지 심층적으로 성찰한다.

기억은 개인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시간을 통한 자기 인식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매개체이다.

그는 ‘메모리아 자체를 영혼’6)으로 인식한다.

그의 신인식은 외부에서 내부로, 감각 차원 에서 정신과 영혼의 차원으로 상승한다.7)

이는 기억의 본질적 양상이다.

메모리아는 인간의 영혼을 반영하여 신에 대한 지식을 얻고 승화된 삶을 위한 참회의 기능을 한다. 그는 『고백록』 10장 「기억와 욕망」에서 참회를 위한 메모리아의 ‘삼중 구조론’을 제시한다.

 

첫째, ‘감각적 심상의 메모리 아’(memoria sebsibilis),

둘째, ‘코기토의 메모리아’(memoria cogito)

셋째, ‘감정의 메모리아’(memoria affectionis)이다.8)

 

6) 아우구스티누스의 메모리아와 영혼의 연결은 영혼의 이중적 차원에 기초한 개념으로 자연계의 영혼인 ‘아니마’(anima)와 영혼의 이성적 측면인 ‘아니무스’(animus)를 구별한다. 인간은 내면의 고유한 기억 능력인 아니무스의 영혼을 통해 신을 향한 존재론적 질문과 그리움을 기억하고 신성으로 나아간다. Carl G. Vaught, Access to God in Augustine’s Confessions: Book X-XIII (NY: SUNY, 2005), 45.

7) 김영원,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0권과 11권에 나타난 기억, 시간과 영원, 그리고 그 기독교 인간록적 함축,” 「종교와 문화」 39 (2020/1), 121.

8)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라틴어 원전』, 188-192.

 

첫째, 감각적 심상의 메모리아란 오감을 통해 인지한 사물과 경험을 기억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몸으로 느끼 며 파생하는 모든 의식을 감각 기관을 통해 경험하고 그 심상을 기억한 다.

경험의 순간들이 소멸한 후 특정한 경험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이 감각적 기억에 저장되는 것이다. 이는 ‘지각된 사물과 존재의 심상이 그 원형을 상기해 내는 기억의 현전’(sed rerum sensarum imagines illic praesto sunt cogitationi reminiscentieas)을 의미한다.

감각적 기억은 단순히 감각 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를 저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서 파생되고 연 상되는 심상들까지도 함께 기억한다.

그는 감각적 오감의 경험과 심상으 로 인한 기억이 죄의 유혹과 거짓 교설들에 노출되어 ‘방황하는 영’으로 살아감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기억으로 인해 ‘영혼의 시각’을 통해 영적 방향성을 돌이키고, 진리를 식별하는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있다고 본 다.

감각적 기억에서 파생되는 심상은 그가 초기에 몰입했던 물질적 감 각의 허상인 ‘판타즈마’(phantasma)와 구별된다.9)

또한 감각적 심상으로 기억된 내용은 의지와 합리성에 의해 재생될 수 있기에 기억의 신비성 혹은 무의식적 ‘절차 기억’(procedual memory)과도 구별된다.10)

감각적 기 억은 인간 경험의 영역 안에서 기억하는 능력이며, 이를 통해 개인은 자 신의 경험을 실행하고 성찰한다.

이는 자기 인식을 깊게 하고, 신으로부 터 유리된 자신을 되돌아보며 기억을 재구성하는 내면성을 심화시킨다.

감각 기억의 재구성은 ‘기억을 기억하는’ 기억에 관한 존재의 연속성을 의미하며 기억의 인식 대상을 고차적인 차원으로 확장한다.

둘째, 코기토의 메모리아는 ‘지성적 기억’을 뜻한다.

이는 감각 경험 을 넘어서는 추상적인 사상과 개념들의 기억을 담당한다.11)

수학의 원리 나 논리적인 덕목, 이성적인 신념들을 기억하는 능력은 코기토의 기억 범주에 속한다. 인간은 코기토의 기억을 통해 언어, 기호, 규칙들을 인식 하고 이를 내면화하는 방법을 터득함으로 합리적 사고를 강화한다.

지성 적 기억은 기억의 선험성을 통해 감각적 기억과 연결하여 심상의 조각들 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과한다.12)

 

9) Carl G. Vaught, Access to God in Augustine’s Confessions: Book X-XIII, 46.

10) 유경동,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기억이론,” 「장신논단」 47/4(2015/12), 209-210; Raymond J. Shaw, “Augustine’s Extraordinary Theory of Memory,” in Augustine and Psychology. eds. Sandra Lee Dixon, John Doody, Kim Paffernroth (New York, Toronto, Plymouth: Lexington Books, 2013), 185-202.

11)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한데 모은다는 것 인데, 여기에서 ‘생각하다’(cogito)라는 말이 유래 되었습니다. ‘모으다’를 뜻하는 라틴어가 ‘cogo’(코고)인 까닭에 생각하다를 뜻하는 ‘cogito’(코기토)는 실제로는 ‘자주 모으다’를 의미하기 때 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라틴어 원전』, 190.

12) Jean-Luc Marion, In the Self ’s Place: The Approach of Saint Augustine. trans. Jeffrey L. Kosky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2), 78.

 

코기토의 기억을 통해 존재는 지성적이고 무형적인 신에 대한 지식, 신의 존재와 본성에 대한 기억을 인식한다.

그는 지성적 기억의 무한한 능력과 그것이 인간 영혼의 근원적인 부분임을 상기시킨다.

또한 정신적 기억을 활용하여 신을 찾고, 신을 사유하며, 신성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기억의 강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성찰하고 참회하며, 승화된 영적 여정을 탐색함으로 신과 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된다.

코기토의 기억은 ‘내적 감각의 시선’으로 비 물질적인 대상의 영역을 인식하는 정신의 지향성을 담아낸다.

이로써 신 을 사유하고 묵상하는 영성과 철학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13)

셋째, 감정의 메모리아이다.

감정의 기억은 기본적으로 욕망, 기쁨, 두려움, 슬픔의 직접적 감정들과 구분된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감정들 을 회상하는 것 이상으로 당시의 감정을 현재의 마음(animus)으로 재생 하는 기억의 힘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직접적 감정의 지각이 감정 의 기억에 어떻게 연동되어 작동하는지 성찰한다. 직접적 감정은 현재의 마음에 감정적 전이를 가능하게 하지만, 감정의 기억은 ‘기억 분석’을 통 해 마음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현전할 수 있다.

예컨대 과거에 발생 했던 육체의 고통이 현재에는 기쁨으로 기억될 수 있으며, 과거의 기쁨 이 현재의 슬픔으로 기억될 수 있다.

그의 고백처럼

 

-“나는 과거에 기뻐 하였던 것을 기억해 내면서도 지금은 전혀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 있고, 지난날에 슬퍼하였던 것을 기억해 내면서도 지금은 슬픔을 전혀 느끼지 않을 수 있으며”14)-

 

감정의 기억에는 과거의 대비되는 직접적 감정들이 ‘존재론적 연대’를 통해 현재에 다르게 공존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비유했 던 ‘되새김질’의 작용처럼, 기억에 남겨진 과거의 행복과 절망의 감정들 이 과거와 동일한 상태로 전달되지 않고, 감정의 기억 속에서 융화되어 새롭게 재생될 수 있음을 뜻한다.15)

 

13) 한병옥, “아우구스티누스의 내적 감각과 기억, 의지의 비교연구,” 「철학논총」 82/4 (2015/10), 585.

14)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라틴어 원전』, 191; ‘기억의 변동성’(malleability)에 관한 복음서의 비유는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제자들의 슬픔이 여인의 해산 고통과 기쁨으로 대비되는 기억과 망각의 ‘기억 소실’에 나타나 있다. 임성욱, “고대 그리스 신화와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요한복 음의 기억론 - 기억(μνήμη)과 상기(ἀνάμνησις)를 중심으로,” 「신학사상」 191 (2020/겨울), 281.

15)  Carl Vaught, Access to God in Augustine’s Confessions: Book X-XIII, 54.

 

감정의 기억은 인간 경험의 모든 측 면을 아우르는 복잡하고 상호 연결된 내적 공간이다.

그는 감정의 기억 을 신적인 진리와 자아 성찰에 깊이 연결된 영혼의 깊이를 탐구하는 창으로 인식한다.

이렇듯 감정의 메모리아는 감각적 심상의 매개체를 통하 거나 내재된 코기토의 지성적 기억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는 과거의 죄성에서 파생된 직접적 감정에서 돌이켜 ‘상승을 향한 부르심’을 기억하 여 진정한 행복을 추구한다.

감정의 메모리아는 초월을 지향하는 ‘위대한 성화’ 과정에서 경험하는 ‘재형성화된’(reformori) 참회의 기억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참회는 ‘영혼의 기억’이다.

기억은 인간 전체의 삶을 조명하며, 존재와 근원성의 관계,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들을 반추하는 영혼의 거울과도 같다.

기억은 내면의 ‘거 대한 보고’(retentio)로서, 신성의 흔적을 발견하고 삶의 질적 변화를 통해 도덕적 승화를 가져오는 근원성을 향한 즉각적인 회귀이다.

참회의 기억 은 인간의 내면성을 상승시켜 내적 윤리성을 강화하며 승화된 참회의 단 계로 전이시킨다.

기억의 ‘자기 회귀성’은 신성을 향해 돌이키는 컨버시오의 과정을 통해 도덕적 완성의 의지적 결단과 실천을 수반하는 성화의 과정 전체를 포함한다.16)

 

16) Hilary Finley, “Memory, Individualism, and the Collected Self,” in Augustine’s Confessions and Contemporary Concerns. ed. David Vincent Meconi. SJ (Minnesota: Saint Paul Seminary Press, 2022), 193.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중 구조적 메모리아의 가시적 주체는 인간이지 만, 기억과 망각을 동시에 기억해 내는 비가시적 주체는 제1원인자인 신 의 근원성에 예속되어 있다.

따라서, 참회의 가능성은 신과의 관계적인 ‘존재 양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신과 인간의 관계론적인 존재 양식의 원리에 따라 기억의 자기 회귀성을 통해 메모리아의 근원성인 신성의 세 계로 복귀하도록 일깨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나타내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오직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것만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모든 지식의 역동적인 원천으로서의 하나님의 조명이 반드시 필요하다.17)

참회의 메모리아는 물질적 분산으로 인해 상실된 감각적 심상의 기 억과 코기토 차원의 불완전한 갈망이 중첩된 기억을 상승시켜 ‘신의 조 명’(lux)을 필요로 한다.

이는 신성의 빛으로 회귀하는 ‘자기 귀환’의 특징 이 있다.18)

이때의 회귀성은 인격적이고 육화된 성육신을 통한 존재의 총 체적 변화를 가져오며 이를 궁극의 행복으로 수용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의 고백 ― “당신은 강한 빛을 나에게 비추어 내 시선의 약함을 물리쳤습 니다”(reverberasti infirmitatem aspectur mei radians in me vehementer)19) ― 처럼 그의 메모리아는 지혜의 빛으로 조명된 마음(nosse)을 통해 영혼 재상승의 회귀성을 강조한 조명론의 메모리아인 것이다.20)

18) 배성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나타난 ‘conversio’의 근본의미: ‘돌아섬-회개’의 존재론 적 차원을 중심으로,” 「신학과 철학」 40 (2022/4), 115.

19) Les Confessions VII 10, 16; 김태규, “아우구스티누스에 나타난 네오플라토니즘: 그의 conversio 와 ictus 개념을 중심으로,” 「중세철학」 13 (2007/1), 22 재인용.

20)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론에 따르면, 신의 조명(divine illumination)은 모든 참된 지식과 이해의 근원이다. 인간의 지성도 신적 조명 없이는 영원한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 신적 조명은 인간의 이 성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고 진리를 인식하도록 돕는다. 그의 조명론은 『고백록』 외 다른 저서 에도 나타난다. 그는 『신국론』(The City of God), 『자유의지론』(On Free Choice of the Will), 『진리 에 대하여』(On Truth)에서 신의 조명과 인간의 정신과 의지의 연관성에 관해 논의한다. 그의 조 명론은 라틴 서방 교부 철학과 중세 스콜라 철학 형성에 영감의 원천이 된다. 보나벤투라 (Bonaventure)는 『이성에 대한 인도』(Itinerarium Mentis in Deum)에서 신의 조명을 통한 인간의 지식 습득에 관한 성찰을 강조한다.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도 ‘신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Credo ut intelligam)임을 강조하며 논리와 신학적 사유에 대한 조명론 을 제시한다.

21) 김태규, “아우구스티누스에 나타난 네오플라토니즘: 그의 conversio와 itus 개념을 중심으로,” 37; 조완형, “어거스틴의 자유의지 개념 성립의 맹아적 배경 연구 - 펠라기우스 논쟁 이전의 개념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188 (2020/봄), 390-419아우구스티 누스는 그가 사상적 영향을 받은 플로티누스(Plotinus)의 철학적 현자가 되기보다는 신성의 빛을 도덕적 삶으로 육화시켜 완성한 그리스도의 사 건에서 빛나는 메모리아의 원형을 찾는다.21)

 

17)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라틴어 원전』, 201.

18) 배성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나타난 ‘conversio’의 근본의미: ‘돌아섬-회개’의 존재론 적 차원을 중심으로,” 「신학과 철학」 40 (2022/4), 115.

19) Les Confessions VII 10, 16; 김태규, “아우구스티누스에 나타난 네오플라토니즘: 그의 conversio 와 ictus 개념을 중심으로,” 「중세철학」 13 (2007/1), 22 재인용.

20)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론에 따르면, 신의 조명(divine illumination)은 모든 참된 지식과 이해의 근원이다. 인간의 지성도 신적 조명 없이는 영원한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 신적 조명은 인간의 이 성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고 진리를 인식하도록 돕는다. 그의 조명론은 『고백록』 외 다른 저서 에도 나타난다. 그는 『신국론』(The City of God), 『자유의지론』(On Free Choice of the Will), 『진리 에 대하여』(On Truth)에서 신의 조명과 인간의 정신과 의지의 연관성에 관해 논의한다. 그의 조 명론은 라틴 서방 교부 철학과 중세 스콜라 철학 형성에 영감의 원천이 된다. 보나벤투라 (Bonaventure)는 『이성에 대한 인도』(Itinerarium Mentis in Deum)에서 신의 조명을 통한 인간의 지식 습득에 관한 성찰을 강조한다.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도 ‘신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Credo ut intelligam)임을 강조하며 논리와 신학적 사유에 대한 조명론 을 제시한다.

21) 김태규, “아우구스티누스에 나타난 네오플라토니즘: 그의 conversio와 itus 개념을 중심으로,” 37; 조완형, “어거스틴의 자유의지 개념 성립의 맹아적 배경 연구 - 펠라기우스 논쟁 이전의 개념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188 (2020/봄), 390-419.

 

Ⅲ. 불교의 포살 ― 참회의 기억과 화합승

 

포살은 붓다가 전수한 대표적인 참회의 형식이다.

포살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의 ‘포사타’(poșadha) 혹은 ‘우뽀사타’(uposatha)의 음역어이다.

포살은 개별적 참회를 통한 공동체의 청정과 화합을 목적으로 한다.

포 살은 고대 인도의 베다 의례인 ‘우파바스타’(upavasatha)에서 유래한 전통 이다.

이는 바라문교의 사제와 제주가 중심이 되어 신에게 바치는 희생 의례로서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신월제’와 ‘만월제’가 있다.22)

의 례의 핵심은 신들과 인간이 화합하기 위해 금식과 절제의 청정한 삶을 지키는 지계(持戒)의 실천에 있다.

불교의 포살은 우파바스타의 신들을 향한 청정의 의무보다는 공동체의 참회와 화합을 위한 실천적 윤리 규범 을 의례로 수용한 것이다.

포살은 수행자 스스로가 자신의 범계 언행을 기억하여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 청정 범행을 회복하는 ‘멸 죄 의례’이다.23)

 

22) 성정환, “한국불교 의례의 인도적 연원의 의의 - 재(齋), 포살(布薩), Upavasatha,” 「인도철학」 54 (2018/1), 79.

23) 이자랑, “포살의 실행 목적에 관한 고찰,” 「한국불교학」 87 (2018/8), 297.

 

포살 전통의 원형은 초기 경전 『숫따니빠따』(Sutta-nipāta)의 「담미까의 경」(Dhammika-sutta)에 나타나 있다.

붓다가 사왓띠의 제따숲의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승원에 있을 때, 재가 신도 담미까가 ‘훌륭 한 제자의 길’에 관해 질문을 한다.

붓다는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 盜), 불사음(不邪婬),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의 오계에 해당하는 내 용과 사치하지 않고 청정한 삶의 유지를 위한 ‘여덟 가지 우뽀사타’를 설 법한다.

 

살생하지 말라, 주지 않은 것을 갖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취하게 하는 술을 마시지 말라. 청정치 못한 성행위를 삼가라. 밤에 때 아닌때에 음식을 먹지 말라. 화환을 걸지 말라. 향수를 쓰지 말라. 침상 에서 또는 땅 위에 깔개를 깔고 자야 한다. … 제14일, 제15일에 그 리고 보름의 8일과 특별한 날에, 깨끗한 마음으로 여덟 가지(계율)로 된 아주 완전한 형태로 우뽀사타를 행하고, 우뽀사타를 행하고 나서, 지혜로운 사람은 깨끗한 마음으로, 기뻐하며 비구 승가에 음식과 음 료를 베풀어야 한다.24)

 

포살 의례는 기본적으로 여덟 가지 우뽀사타를 바탕으로 대승불교의 ‘팔관재계’(八關齋戒)의 전통으로 이어진다.25)

 

24) 일아 옮김, 『숫따니빠따(Sutta-nipāta)』(서울:불광출판사, 2015), 142-143.

25) 붓다 시대의 포살 전통은 대승불교의 발전 과정에서 우바새, 우바이를 위한 ‘재가포살’로 정착하 게 된다. 비구, 비구니와 달리 재가신자는 한 달 동안 여섯 번의 자율적 포살을 행하는 ‘육재 일’(六齋日)의 의례응 행한다. 김도문, “팔재계와 재가불자의 포살,” 「동아시아불교문화」 33 (2018/3), 163.

 

포살은 제8일, 14일, 15일의 정기적인 포살 이외에도 사안에 따른 ‘화합 포살’(和合布薩, sāmaggiuposatha) 이 행해진다.

이는 공동체의 청정을 유지하고 승쟁(僧諍, saṃgharāji)이 발생할 때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한 비정기적인 포살 의례이다.

포살 의례의 성립은 먼저 포살을 ‘고지’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승가 의 모든 구성원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만 한다.

초기 불교 공동체에서는 병든 비구가 있는 경우 그의 처소에서 포살을 행함으로 약자를 배려하는 전원 참석제의 전통이 있다.

포살은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기억하는 ‘자 성의 기억’과 ‘자발적 참회’가 기본이다.

참석자는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 하기 위해 자신의 허물을 기억해야만 한다.

허물이 없는 자는 침묵한다.

이러한 기억을 통한 출죄의 고백은 3회 반복적으로 진행된다.

『위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의 「포살건도」(Vinaya piṭakam)는 죄의 기억을 통한 청정함으로 평안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죄를 지었음을 기억하고 청정을 바라는 비구는 죄가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했을 때 그에 게 평안이 있습니다”(tasmā saramānena bhikkhinā āpannena visuddhā pekkhena santī āpatti āvikātabbā, āvikatā hi’ssa phāsuhotīti).26)

 

26) 이자랑, “빨리율 Mahāvagga 제2장 「포살건도」 (1),” 「불교원전연구」 12 (2009/12), 73.

 

기억의 내재적 고백은 참회의 시작이며 공동체의 청정함을 확증하는 출발점이 다.

그러나 자발적 참회나 공동체의 권고가 있어도 스스로 고백하지 않 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런 경우 그가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공동체로부 터 격리되는 타율적 자성의 시간이 부여된다.

이러한 사례는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의 「포살경」(Uposatha-sutta)에 잘 나타나 있 다.

붓다가 미가라마따(Migaramātā) 승원에서 포살을 거행할 때의 일이 다.

아난다는 포살 의례를 진행하기 위해 고지를 하고 붓다의 동의를 구 하였다.

그러나 붓다는 초경(初更), 이경(二更), 삼경(三更)이 지나도록 침 묵으로 일관했다.

이유는 공동체가 청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붓다는 스스로 허물을 참회하지 않은 구성원이 있음을 암시했다.

붓다의 제자 마하 목갈라나가 대중들의 마음을 통찰한 후, 계를 지키지 않고, 청정범 행을 지키지 않은 ‘범계비구’를 발견하고 그의 자발적 참회를 권고했다.

하지만 해당 비구는 묵언으로 일관하며 앉아있었다.

3번째 공동체의 권 고가 있었으나 그가 반응하지 않자, 마하 목갈라나는 마침내 그의 팔을 잡아 승원 외부로 내보내고 빗장을 잠근 후에 포살의 진행을 청원하게 된다.

붓다는 자발적인 죄의 기억과 참회를 통한 공동체의 청정함이 복 원되었을 때 비로소 ‘빠띠목카’(pātimokkha)를 독송할 수 있음을 강조한 다.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이 포살을 준수하고 빠띠목카를 암송하라. 오늘부터는 나는 빠띠목카를 암송하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청정하지 못한 회중에서 빠띠목카를 암송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이치 에 맞지 않다.”27)

 

27) 대림, 『앙굿따라 니까야: Aṅguttara Nikāya 5』(서울: 초기불전연구원, 2007), 136.

 

포살 의례의 중요 내용인 ‘빠띠목카’란 구족계를 받은 출가자가 지켜 야 하는 계율로서 ‘계경’(戒經) 혹은 ‘계본’(戒本)이라고도 한다.

빨리율 (Mahāvagga)에 따르면 비구는 227계, 비구니는 311계의 계율을 의무적으 로 지켜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28)

공동체의 온전한 청정함을 확인한 후에 비로소 수행자들의 책임 의무를 확인한다. 이는 신(身), 구(口), 의(意)의 불선업을 여법하게 참회하는 지계 수행이야말로 포살의 궁극적인 목적인 화합승(和合僧, samagga-saṃgha)과 선정의 완성을 위한 척도가 되기 때 문이다.

포살의 정점은 ‘자자’(自恣, pavārana)로 이어진다.

자자는 동안거와 하 안거의 마지막 날에 진행하는 상호성을 강조하는 의례이다.

현전 승가(現 前僧伽, sammukhībhūta-saṃgha)의 모든 구성원이 모여 상호 간의 허물 과 부족함을 청원하여 드러내는 공동체의 참회이다.

이는 공동체 생활을 하며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내밀한 부분까지 함께 교정함으로 승가의 높 은 도덕성과 화합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상호적으로 참회 청원을 한다고 해서 주관적 감정이나 사실 왜곡으로 자자를 행한다면 그것은 범 계에 해당한다.

빨리율에는 자자의 조건이 명시되어 있다.

 

“때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진실이면 하되 헛된 것이면 말하지 않는다. 이익이 없으 면 말하지 않는다. 거친 말은 하지 말고 부드러운 말로 한다. 성내는 마 음 없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한다.”29)

 

또한 자자는 화합을 위해 고매한 인 격과 덕성을 갖춘 ‘오덕인’(五德人)을 인도자로 세워야 한다. ‘자자를 받아 주는 사람’은 “편애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겁약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 고, 자자를 할 사람과 자자를 하지 않을 사람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30)

 

28)  이자랑, “빨리율 Mahāvagga 제2장 「포살건도」 (1),” 64.

29)  『四分律』 37, T22, 836a-b; 신순남(적연), “지계명상과 승가의 자정 원칙,” 「불교상담학연구」 14 (2019/12), 90 재인용.

30) Ibid.

 

자자는 법랍이 높은 연장자부터 시작하는데 붓다도 예외 없이 자자 의례를 참여했다.

『쌍윳따 니까야』(Samṃyutta-nikāya)의 「자자(自恣) 경」 (Pavāraṇā-sutta)에 따르면, 붓다는 ‘보름 포살일’에 자자를 행하기 위해 노지에 앉아 제자들에게 자신의 언행에 관해 묻는다.

 

“비구들이여,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청하노라. 혹시 내가 몸이나 말로써 행 한 것들 가운데 그대들이 책망해야 할 것은 없는가?”31)

 

이에 ‘지혜 제일’ 제자였던 사리뿟따가 그에게 허물이 없음을 게송으로 화답하고 순차대로 비구들이 상호 간의 자자를 행하게 된다.

이를 통해 각자의 근기에 따라 삼명(三明), 육신통(六神通), 해탈지견(解脫知見)을 증득하는 화합승의 완성 을 성취한다.

현전 승가의 온전한 청정과 화합이 선행된 이후 비로소 망 자들을 위한 천도재인 ‘우란분절’(盂蘭盆節)32)을 행할 수 있다.

이처럼 포살과 자자를 행한 이후에 비로소 죽은 자들의 유혼을 보살피는 일이 가 능해지는 것이다. 참회를 통한 도덕성의 회복은 산자와 산자, 산자와 죽 은 자 간의 화합승으로 확장된다.

화합승의 의미는 동일계에 속한 ‘현전승가의 수행자들이 여법(如法) 한 방법으로 상호적 포살을 행하는 화합 갈마’를 뜻한다.33)

 

31) 각묵, 『쌍윳따 니까야: Saṃyutta-nikāya 1』(서울: 초기불전연구원, 2009), 617

32)  우란분절은 산스크리트어 ‘울람바나’(Ullambhana)에서 파생한 용어로 ‘거꾸로 매달리다’라는 의 미이다. 부처의 신통 제일의 제자인 마하 목갈라나는 초감지능(超感知能)으로 육도의 세계를 통 찰할 수 있었다. 그는 선정 중에 모친이 아귀도(餓鬼道)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게 된 다. 그가 음식을 제공하자, 모친이 음식을 손에 대는 순간 불타버리는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슬 픔에 잠긴 마하 목갈라나를 발견한 붓다는 고통 속의 망자들을 위한 설법으로 음식이 아닌 공덕 을 나눠주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후 마하 목갈라나는 승려들을 공양하고, 그의 공덕을 모친에 게 회향시켜 깨달음을 얻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승은 우란분절의 기원이 되었고, 매년 음력 7 월 15일은 ‘백중’(百中)의 날로 추념하고 있다. 우란분절은 ‘공덕을 베푸는 날’이다. 영가 천도를 위한 법회와 공양 예식을 통해 과거의 업을 소멸하고 청정한 삶을 결의하는 중요한 의례이다.

33)  이자랑, “화합승(和合僧)의 의미와 실현 방법에 관한 고찰,” 「불교학 연구」 52 (2017/9), 3-4.

 

여기서 ‘갈마’ 란 산스크리트어 ‘카르만’(karman)에서 파생된 용어로 ‘업’(業)을 의미하지 만, 계율용어로는 ‘불교적 합의체’를 뜻하기도 한다.

갈마의 형식은 전원 참석과 만장일치의 수렴 과정이다.

그러나 전원 참석이라 할지라도 범계 비구는 스스로 청정함을 회복할 때까지 참석할 수 없다.

이는 계율 적용 에 있어서 갈마의 공정성, 엄정성, 책임성이 여법화합갈마의 근본 바탕 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살을 통한 여법화합갈마를 인도하는 지도 자의 자격 또한 중요하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의 「고빠까 목갈라나에게 설하는 경」(Gopakamoggallāna-sutta)에 나타난 ‘열 가지 믿음을 주는 법’에 명시되어 있다.

붓다 입멸 후 아난다는 바라문들로부터 세존의 사후에 승가의 귀의처는 무엇 이며, 어떻게 승가가 화합할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이에 아난 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바라문이여, 아시고 보시는 아라한이시며 등정각(等正覺)이신 세존께 서 비구들을 위하여 언명(言明)하신 학계(學戒)와 설하는 계본(戒本)이 있습니다. 우리는 포살일(布薩日)에 한 마을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모 든 비구가 한곳에 함께 모여서 각자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도록 요청합니다. 이야기할 때, 만약에 그 비구가 계를 범했거나 계를 위 반했으면, 우리는 그를 가르침에 따라, 계율에 따라 다스립니다. 결 코 존자들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이 우리를 다스립 니다.34)

 

여기서 가르침이란 다르마에 기초한 정견(正見)으로서 다음 열 가지 법을 증득한 이를 의미한다.

첫째, 계행을 갖춘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의 학계를 지키는 이,

둘째, 정견을 갖추고 청정범행을 행하는 이,

셋째, 최 소한의 물품에 만족하는 이,

넷째, 사선정(四禪定)을 수행하는 이,

다섯 째, 신족통(神足通)을 경험한 이,

여섯째, 천이통(天耳通)을 갖춘 이,

일곱번째, 타심통(他心通)을 갖춘 이,

여덟번째, 숙명통(宿命通)을 얻은 이,

아홉번째, 천안(天眼)을 갖춘 이,

열 번째, 누진통(漏盡通)을 성취한 이가 해 당된다.35)

 

34) 이중표, 『精選 맛지마 니까야: Majjhima-nikāya』(서울: 불광출판사, 2020), 693.

35) Ibid., 694-696.

 

이렇듯 여법화합갈마가 온전히 이루어진 후 승가는 비로소 깊 은 선정에 들 수 있는 삼매 화합승을 성취하게 된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승가 화합의 경」(Sanghasāmaggī)에는 화합의 완성된 상태를 ‘법과 율의 통찰’, ‘여래의 설법과 실천의 확증’이 흩어지거나 상실되지 않고 일상의 승가에서 온전히 성취되는 것을 강조한다.36)

 

36) 이중표, 『精選 앙꿋따라 니까야: Aṅguttara Nikāya』(서울: 불광출판사, 2024), 377-378.

 

포살을 통한 화합승가에서만 진정한 의미의 선정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는 각자의 근기에 따라 천신, 범천, 부동(不動)의 경지, 아라한의 마음을 성취하게 된다.

포살을 완성한 자는 초선에서 사선에 이 르는 사선정(四禪定)과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삶,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의 세 계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를 온전히 깨달아 아라한의 마음 을 비로소 증득하게 된다.

 

Ⅳ. 참회의 메모리아와 포살의 화합승

 

1. 기억의 내향성: 신적 근원성과 자성의 연기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메모리아와 붓다의 포살 전통에 나타나는 공통점 은 참회의 시작이 ‘공적 고백’과 ‘기억의 내향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다.

참회의 열림은 ‘양심의 깊은 심연도 통찰하는 하나님’과 ‘사랑의 줄로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들’37)

앞에서 행해지는 진실한 고백으로만 가능하 다.

 

37)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81.

 

불교의 「포살건도」에 나타난 청정을 위한 자발적 고백도 숲에 홀로 거하는 은둔 상태가 아니라, 반드시 전체 비구가 모인 승가 안에서 공개 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공적 고백과 함께 비로소 ‘빠띠목카’를 독 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적 고백은 각 전통의 근원성을 향한 ‘기억의 내 향성’에 기초한다.

메모리아와 포살은 과거와 현재의 개별적 허물을 적극적으로 기억해 내는 과정으로 이러한 참회의 방향은 철저히 외부에서 내 부로 향하는 내향성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의 기억 속에 계시는 하나님”38)을 고백하며 존재의 기저에 현전하는 심상, 코기토, 감정의 메 모리아를 통해 신성을 기억하여 더 높은 상위적 진리에 접근한다.

내향 성의 결핍은 곧 ‘신성의 결핍’이며 이는 존재의 불안과 공허를 가져온다.

기억의 내향성은 “인간 실존의 공허를 채우는 존재의 충만함”39)이며 내 적인 출현을 실현하는 메모리아의 존재론이다.

 

38) Ibid., 188.

39) 이명곤, “중세철학에서 「내면성」의 의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혼 론』을 중심으로,” 「중세철학」 15 (2007/12), 12. 그는 에미 포레스트(Aimé Forest)의 ‘형이상학적 반성’ 개념에 기초한 ‘내적인 출현’(avènement intérieur)을 실현하는 인간의 지향성을 강조한다. Aimé Forest, L’Avènement de l’Ame (Paris: Beauchesbe, 1973), 62.

 

기억의 내향성은 두 전통의 공통적 지향점이지만, 인식론적 전개 과 정에는 차이점도 공존한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의 메모리아에 나타난 기억의 내향성이 ‘능동 원인’으로서의 신적 근원성으로서의 자기충족 적 특징이 있다면, 붓다의 포살에 나타난 기억의 내향성은 ‘자성의 기억’ 과 연결되는 ‘유기적 연기성’에 기초하고 있다.

자성(自性, svahāva)이란 존재의 고유한 특질을 가진 존재 현상의 기본 단위이다.

존재의 자성은 인지 가능하고 언표 가능한 현상 세계의 단위라는 점에서 영속성을 지닌 서구적 ‘실체’(substance)와는 구분된다.

불교에서 모든 존재는 자성을 지 닌 연기적 현상이다.

자성은 현상적 개별성으로 나타나지만, 근본원리는 존재의 연기성에 있다.

자성의 기억은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더불어 발 생하고 소멸하는 것으로 서로 의존하며 생멸의 존재성을 확보한다.

자성 의 기억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감각적 심상을 통한 기억처럼, 색(色), 수 (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五蘊)의 결합에 기초하여 기억력을 형 성한다.

그러나 이는 메모리아의 영속적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에 의해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소멸하는 무상의 특징이 있다.

이는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 그리고 주의가 결합 되었을 때 생겨나는 조건화된 기억이다.

오온에 기초한 자성의 기억은 분별, 판단, 인식 작용의 토대가 되지만, 기억의 주체로서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연결되는 영속적인 자 기동일성의 아트만(atman)이 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의 유기적 연기성은 모든 존재가 유기적 오온의 결합체이기에 원래부터 ‘자 아’ 혹은 ‘나의 기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아나트만(anatman) 의 ‘무아의 기억’이라는 지향점을 갖는다.

기억의 내향성이 주관성이나 자의성에 의해 굴절되지 않는다.

‘기억의 흐름’이라는 과정 안에서 다양 한 마음의 여러 현상이 하나의 전체성으로 생성되는 상호 의존적인 기억 의 비실체성이 된다.

포살의 절정은 ‘자자’의 전통에서 이루어진다.

기억의 흐름이란 기억 의 가변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기억의 가변성은 마음의 흐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억의 실체는 항상 변화하고 무상하기에 상호 연결된 존재로부 터 내적 성찰이 필요함을 전제한다.

자자는 어떤 존재도 타자와 세계로 부터 완전히 독립해서 살아갈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자아와 타자가 분 리된 존재가 아니라 상호연결된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관계성 속에서 이 루어진다.

이러한 원리는 참회의 개별성과 신 주체적 은총을 강조하는 기독교적 관점을 보완할 수 있다.

포살과 자자의 원리는 더욱 치열한 능 동 주체로서의 윤리적 실천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청정을 위해 자신의 허물을 치유하는 것이 다른 이의 허물을 치유하는 것이며, 자신 의 불선을 제어하는 것이 다른 이의 불선을 제어하는 것이다.

포살과 자 자는 순환적인 동시 발생의 원리로 작동한다.

이 과정에는 독립된 개별 적 자아의 기억이 단독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불가능하다.

마음과 마음, 기억과 기억의 다양한 현상이 동시 발생하여 일어나고 소멸하는 ‘기억의 상응률’이 작동하는 특징이 있다.

매 찰나에 발생하는 마음은 특정한 인연화합이 만들어내는 유기적 연기성의 특징이 된다.

이러한 기억의 상응 률과 자성의 연기성은 한국적 참회 신학의 공동체적 화합을 강화하는데 실천적 원리로 작동할 수 있다.

 

2. 메모리아의 선재성과 포살의 상기설에 관한 대화

 

아우구스티누스의 메모리아와 붓다의 포살에 나타난 기억의 원인론 과 주체에 관한 인식론적 해석은 두 전통 간의 차이점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로티누스의 조명론에 영향을 받아 기억 의 전향과 상승의 힘을 신성한 부동의 빛으로 재해석한다.

플로티누스의 사상에서 신의 빛이 영혼을 비추는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메모리아 에서는 ‘내면의 빛’이 과거와 현재, 잠재적인 미래를 연결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역할을 한다.

 

“… 내 영혼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내 영혼의 눈 갚은 것으로, 내 영혼의 눈 위에 있고, 내 심령 위 에 있는 ‘불변의 빛’을 보았는데 …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 빛을 알고, 그 빛을 아는 사람은 영원을 압니다.”40)

 

40)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30.

 

그는 감정의 메모리아를 통해 과거 의 죄성과 참회, 신의 은총에 대한 감사, 그리고 신성의 빛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한다.

그는 감정의 기억을 통해서 영혼이 자아 인식을 갖게 되 고, 자신의 존재와 신의 존재를 성찰하게 된다고 본다.

기억을 통해 자신 의 내면을 탐구하고 신에 대한 지식을 얻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깊게 하고 영적 성장을 촉진하게 만든다.

기억의 내향성 속에서 만난 ‘신 의 빛’은 신을 향한 영혼의 귀환과 재상승을 가능하게 한다.

내면의 빛은 감각과 정신의 세계를 연결하는 외재적 빛이 아니라, 존재의 영혼에 몰 입하여 영혼 안에 현존하는 신성의 빛이다.

그에게 존재의 기억과 신의 기억은 분리할 수 없는 개념이다.

존재는 자신을 창조한 신의 빛을 기억 하여 신의 ‘원(原)기억’을 향해 재상승해야 한다.

만일 신의 형상이 영혼 에 현전하지 않는다면, 존재의 내면에는 어떠한 기억의 흔적도 존재할 수 없다.

이는 신의 빛은 항상 우리의 감각적 심상과 지성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전일성과 선재성의 인식론을 지니기 때문이다.

메모리아의 자 기 회귀성과 재상승은 바로 존재의 기억 속에 현전하는 ‘이마고 데이’ (Imago Dei)가 ‘메모리아 데이’(Memoria Dei)로 전이되는 것을 뜻한다.41)

 

41) Michael Hanby, “Augustine on Human Being,” in T & T Clark Companion to Augustine and Modern Theology, ed C. C. Pecknold and Tarmo Toon (Bloomsbury T & T Clark, 2013), 30.

 

반면에 불교의 포살은 자성의 청정함을 기억하여 회복하는 불성(佛 性)의 ‘상기설’(想起設)에 기초한다.

공적 고백으로 열린 참회의 과정은 기 억의 내향성을 통해 선정의 세계로 나아간다.

선정의 순간은 내면성에 깃들어 있는 불성을 기억해 내고 상기하는 깨달음의 적정(寂定)의 상태이 다.

이는 아상과 인상(人相)의 현상적 분별식(分別識)을 모두 소멸하고 본 래의 실체 없는 청정한 공(空)의 기억을 복원하는 진여의 상기인 것이다.

진여는 불성의 빛을 성품으로 지니고 있기에 진여 자체가 진실한 식지(眞 如識知)인 것이다.

이 과정에는 외재적인 신성의 개입이나 절대선 혹은 절 대지의 선재성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공간은 없다.

무아, 무상, 공의 기억 은 별해탈율의의 학계와 사선정의 성취, 그리고 육신통의 경험적 진리를 상기시켜 포살의 목적인 화합승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든다.

참회의 기독 교적 인식론이 과도하게 신적 선재성을 강조했다면, 포살의 인식론은 상 실한 내면의 불성을 부활시켜 상기함으로써 참회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합일하는데 필요한 신학적 지향점을 제시한다.

 

Ⅴ. 나가면서 ― 참회의 기억 속으로

 

이 논문은 참회의 신학적 성찰을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메모리아와 포살을 중심으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시도해 본 글이다.

두 전통 모 두 참회의 시작은 공적 고백에 있으며, 이는 각각 신성의 절대성과 불성 의 연기성에 기초한 참회의 ‘자발성’과 ‘개방성’의 특징이 있다.

메모리아 의 삼중 구조론은 심상, 코기토, 감정의 메모리아를 통한 내향성과 회귀 성으로 신적 사랑의 위대한 성화를 강조한다.

메모리아 속에서 재형성화 된 컨버시오의 경험은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도덕적 승화로 나타난다.

불교의 포살 의례 또한 개별적 참회를 포함해서 궁극적으로 화합과 평화 의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는 청정한 화합승을 목표로 한다.

화합승의 온 전한 상태는 다르마와 계율에 기초한 포살과 자자의 의례가 지켜지는 ‘여법화합갈마’를 실현함에 있다.

여법화합갈마는 출죄의 드러냄과 멸죄의 확증이 필수적인 조건이며, 참회의 자발성, 개방성, 여래성의 원리를 강 조한다.

포살과 자자 의례에는 붓다를 포함해서 법랍의 상하와 상관없이 모 든 이들이 자신의 청정함을 공동체로부터 검증받아야 한다.

범계 행위자 의 자발적 참여가 선행되지 않는 경우 구성원들은 공동체로부터 그를 격 리시켜 신·구·의의 업이 청정범행으로 승화되도록 요청할 의무가 있다.

온전한 청정함이 성취된 후에 비로소 우란분절을 행하여 망자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다.

참회의 기억을 통해서만 개인과 공동체, 산 자와 죽은 자, 인간과 신성의 관계성은 회복되며 진정한 화해와 화합이 가능하다.

이러한 포살의 통합 정신과 공동체성은 한국적 참회 신학의 영성에 중요 한 실천적 덕목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와 교회는 아만의 정치와 권력의 사유화로 인해 참회 와 책임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구조적 폭력의 본질을 외면하는 동 안 극단의 고통을 겪는 구성원들은 기억의 침묵 속에서 물리적, 심리적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희생자를 희생제물로 삼지 않기 위해서 교회와 신학은 희생자를 위한 참회의 기억 속으로 다시 나아가야 한다.

참회의 기억은 사회적, 역사적 참회를 위한 공동체의 반성적 기억과 역사적 죄 성으로부터 돌이키는 ‘기억의 정화’를 필요로 한다.

이는 고통의 다층 구 조 속에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는 이들의 비극적 침묵을 공적 고백의 언어로 재생할 것을 촉구한다.

기억의 상응률이 담 보된 여법화합갈마의 원리는 한국적 참회 신학의 윤리적 시민 정신을 강화한다.

참회의 신학은 사라져가는 내면의 빛을 부활시켜 역사의 희생자 들을 치유하고 범계를 범한 권력자들의 공적 참회를 촉구한다.

이러한 참회가 사회와 교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될 때 진정한 화합과 평정이 실현되는 ‘만유 화해의 화합 공동체’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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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이 글은 참회에 관한 기독교와 불교의 종교 철학적 대화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of Hippo)의 『고백록』(Confessions)에 나타난 ‘메모리아’(memoria)의 이론을 중심으로 참회의 기억을 살펴본다. 불교의 전통에서는 붓다가 설법한 ‘포살’(uposatha) 전통을 중 심으로 초기 불교가 전한 참회의 개념을 성찰해 본다. 이 대화를 통해 참 회에 관한 기독교와 불교의 존재론과 인식론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살펴 본다. 두 전통은 각각 ‘신성의 절대성’과 ‘불성의 연기성’에 기초한 참회의 자발성과 개방성의 특징이 있다. 참회의 존재론적인 해석은 ‘기억의 내향 성’이 각각 신적 근원성과 자성의 연기성으로 대조적 특징을 이룬다. 참 회의 인식론적 해석은 ‘메모리아의 선재성’과 ‘포살의 상기설’로 각각의 고유한 관점이 있다. 포살과 자자를 통한 여법화합갈마는 공동체의 청정 함을 위한 윤리적 가치를 강조한다. 참회의 기억을 통해 개인과 사회, 산 자와 죽은 자, 인간과 신성의 관계성은 복원되며 진정한 공동체의 화합 이 가능해진다. 참회의 신학은 기억과 화해를 통한 신적 정의와 선정의 평화가 성취될 수 있도록 잊혀진 공동의 기억에 기초한 참회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한다. 이 글은 아만(我慢)의 문화를 극복하고 개인과 공동체 의 성스러운 내면성의 기억을 회복하기 위한 한국적 참회 신학의 지향점 을 제시한다.

주제어 참회, 메모리아, 포살, 화합승, 대화

 

Abstract

Theology of Penitence — An Inter-religious Dialogue of Christianity and Buddhism on Memoria and Uposatha

Eun-Hee Shin (Professor, Philosophy of Religion Humanitas College Kyung Hee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present the possibility of a Korean theology of penitence through inter-religious dialogue between Christianity and Buddhism. Augustine’s concept of ‘memoria’ and Buddha’s notion of ‘uposatha’ will be examined in a comparative way. The ontological and epistem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concepts shall be discussed in relation to the ethical implications highlighting the religio-philosophical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of each. The two ideas have their own characteristics of ’spontaneity’ and ‘openness’ regarding penitence. The ontological interpretation of penitence commonly exhibits an ‘inwardness of memory,’ which distinctly contrasts divine origins of Christianity with the dependent co-origination of the Buddha-nature. The epistemological interpretation of penitence emphasizes the unique perspectives characterized by the ‘pre-existence of memoria’ and the ‘recollection theory of memory,’ respectively. This paper proposes theological orientations of penitence to sublimate selfishness and cultural narcissism in a way of restoring the sacred interiority of memory towards reconciliation and harmony of the community

Key Word Penitence, Memoria, Uposatha, Reconciliation, Dialogue

 

 

 

논문접수일: 2024년 5월 20일 논문수정일: 2024년 6월 10일 논문게재확정일: 2024년 9월 20일 04

神學思想 206집 · 2024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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