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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이야기

하워드 테르프닝 (Howard Terpning, 1927~ )/받은 글


미국 미술사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과 정신세계를 가장 장엄하고도 사실적으로 담아낸 화가를 꼽는다면 단연 하워드 테르프닝(Howard Terpning)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단순히 서부를 그린 화가가 아니라, 사라져가는 역사와 문화의 기억을 화폭 위에 복원한 시각적 기록자이자 이야기꾼이었습니다.

테르프닝은 미국 일리노이 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특별한 재능과 열정을 보였으며, 일곱 살 무렵 이미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해병대 복무를 마친 후에는 제대군인 원호법(GI Bill)의 지원을 받아 시카고 미술 아카데미의 상업미술 과정을 수학하였고, 이어 미국 미술 아카데미에서 인물 소묘와 회화 기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탄탄한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의 예술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미국의 전설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인 해든 선드블롬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선드블롬은 젊은 테르프닝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스튜디오에 견습생으로 채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심부름과 작업 보조, 도구 관리 등의 일을 맡았지만, 성실함과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점차 독자적인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훗날 그의 정교한 묘사력과 뛰어난 구성 능력을 형성한 중요한 수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테르프닝은 상업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약 25년 동안 그는 <Reader's Digest>, <Time>, <Newsweek>, <Good Housekeeping> 등 미국을 대표하는 주요 잡지의 표지와 삽화를 제작하며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또한 영화 포스터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족적을 남겼습니다. 1961년 영화 'The Guns of Navarone'을 시작으로 80편이 넘는 영화 포스터를 제작했으며, 'Cleopatra', 'Doctor Zhivago', 'The Sound of Music', 'Gone with the Wind' 등 영화사의 고전으로 남은 작품들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켰습니다.

그러나 상업적 성공이 반드시 예술적 만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 그는 반복되는 상업 작업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으로 그리고 싶었던 미국 서부와 평원 원주민의 세계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이 결정은 그의 예술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코네티컷을 떠나 애리조나에 정착하며 미국 서부를 주제로 한 순수회화에 전념하였습니다.

테르프닝의 작품은 단순한 역사화가 아닙니다. 그의 그림 속 원주민들은 낭만적으로 이상화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과 공동체, 전통과 신념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광활한 평원과 변화하는 하늘, 전사의 침묵, 부족 공동체의 일상은 치밀한 고증과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재현됩니다. 그는 역사적 사실성과 예술적 감성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미국 서부의 기억을 살아 숨 쉬는 서사로 되살려 냈습니다.

그의 예술적 성취는 수많은 상과 명예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국립 서부 미술 아카데미와 미국 카우보이 예술가 협회(CAA)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CAA 재임 기간 동안 무려 42개의 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1985년에는 Gilcrease Museum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중국 베이징과 프랑스 파리에서도 전시되어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습니다.

길크리스 박물관의 관장이었던 고(故) 프레드 A. 마이어스는 테르프닝을 두고 “오늘날 서부를 주제로 작업하는 최고의 화가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화가”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찬사가 아니라, 미국 서부미술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가장 설득력 있게 계승한 화가에 대한 미술계의 공통된 인식을 반영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Phoenix Art Museum, National Portrait Gallery, Autry Museum of the American West, Gilcrease Museum, Eiteljorg Museum 등 미국 주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하워드 테르프닝의 예술은 단순한 서부 회화의 범주를 넘어섭니다. 그의 화폭은 한 시대의 풍경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잊혀가는 문화와 인간의 존엄, 그리고 역사의 기억을 보존하는 거대한 서사시가 됩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전하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미국 서부미술의 정전(正典)으로 남아 관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