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
마성/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1. 여래장사상이란 무엇인가?
불성과 여래장의 의미
먼저 불성(佛性)과 여래장(如來藏)의 의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불성(buddha-dhātu)’이란 불(佛)의 본질 혹은 본성과 같은 말입니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과 같은 본성이 있으며, 이것은 중생이 장차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의미로 곧 불(佛)의 인(因), 불(佛)이 되는 인(因)이라고 설명됩니다. 여기서 성(性, dhātu)과 인(因, hetu)은 동의어입니다. 또한 같은 의미에서 ‘여래(如來)의 태아(胎兒)’(tathāgata-garbha)라 불리며.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역되고 있습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如來藏思想』, 宗浩 옮김(서울: 경서원, 1996), pp.16-17]
여래장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여래를 감추고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중생이 여래를 안에 감추고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이 가지고 있는 여래(佛)가 될 수 있는 요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여래가 되지 못한 ‘여래의 태아’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불(佛)의 인(因)’ 곧 불성(佛性)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래장경(如來藏經)』에서 최초로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이 교설을 이어받아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여래장’이라는 말 속에는 여래와 동등한 본질, 불성이 감추어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즉 소유자가 아직 그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중생들은 무지와 번뇌에 덮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현상, 즉 무량한 번뇌에 뒤덮인 여래장을 나타내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습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위의 책, p.17]
이러한 뜻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불성’이라는 말보다는 ‘여래장’이라는 말을 인도인들이 더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용어의 역사적 성립 순서와, 용어가 가지고 있는 내용의 풍부함, 그리고 인도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들도 오늘날 이것을 ‘여래장사상’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래장 사상의 위치: 인도 · 티베트
인도의 대승불교는 중관과 유식의 두 종파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고래로부터의 전통적 견해이며, 이것은 티베트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여래장사상은 중관 · 유가유식 이외에 독립된 학설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위의 책, p.17]
그렇다고 해서 여래장사상이 학설로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능가경(楞伽經)』에서는 ‘여래장설(tathāgatagarbhavāda)’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그 사상의 내용을 간추리고, 그것을 외도(外道)의 교설인 ‘아트만설(ātmavāda)’과 비교하며 그 상위점(相違點)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러한 예를 그 증거로 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여래장경』을 비롯한 몇몇의 대승경전이나 논전(論典) 속에서 우리는 여래장설이 전개되고 있는 계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창자의 인맥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사상을 설한 대표적인 논전으로는 『보성론(寶性論)』이 있으며, 그 저자를 중국에서는 견혜(堅慧, Sāramati)라고 전하고 있지만, 이 사람을 우리는 인도불교사에서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위의 책, pp.18-19]
한편 티베트의 전승에 의하면, 이 『보성론』은 미륵 · 무착에게로 귀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논은 유가행파(瑜伽行派)의 것이 됩니다. 한편 『보성론』과 유사한 내용을 가진 『불성론(佛性論)』이란 저술이 한역되어 있는데, 그 저자가 세친(世親)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여래장연기종(如來藏緣起宗)의 대표적 저술로서 중국에서 인기를 얻었던 『기신론(起信論)』은 마명(馬鳴)의 저술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그것을 2세기 불교시인과 동일인이라고 보는 학자는 거의 없으며, 대체로 가탁(假託)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이외의 인명(人名)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위의 책, p.19]
『보성론』에서 사용하고 있는 술어는 분명히 유가행파의 것이며, 여래장설은 그 경전 작성의 단계는 어떻든지 간에 이미 『보성론』에서 유가행파에 속하는 사람의 손에 의하여 조직화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위의 책, p.19]
유가행파의 중심 학설인 유식설(唯識說)을 조술(祖述)한 논서에 여래장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비중 있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다카사키 지키도(高崎直道)는 『보성론』 이후에 유가행파의 내부에서 이 사상을 존중한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중국에 유식설을 전한 학장(學匠)들 중에서는 진제(眞諦) 등이 이 계통에 속합니다. 한편 『보성론』의 저자는 중앙아시아에서 출토된 8세기 무렵의 범문(梵文) 단편(斷片)에서는 미륵(彌勒)으로 되어 있지만, 현장(玄奘)이 인도에 들어간 8세기 이후의 인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래장사상이 유가행파에 완전히 흡수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학파의 형성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학설로서의 독자성은 역사적으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2. 여래장사상의 기원과 전개
대승이전의 심정설(心淨說)
여래장사상의 기원은 이미 『아함경』에 나타나고 있는 ‘마음의 본래 상태는 깨끗하다(自性淸淨心)’는 사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의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오염되어 있지만, 이 오염은 본래부터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 자체는 청정하다는 것입니다.[이철헌, 『대승불교의 가르침』, 서울, 문중, 2008), pp.134-135]
『앙굴마라경』에는 ‘여래장의 뜻은 마음의 본래 상태는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으며, 모든 중생이 여래장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이철헌, 위의 책, p.153] 또한 『증일아함경』에는 여래장이란 단어가 55회나 등장하고 있어, 『증일아함경』은 대승불교도들이 받아들인 경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이철헌, 위의 책, p.153]
불교의 수행 목표인 ‘마음을 깨끗이 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실례는 이른바 칠불통계(七佛通誡)의 게(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자정기의(自淨其意)’ (sacitta- pariyodapana)[Dhammapada, v.138]는 현실 상황에서는 마음이 오염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화(淨化)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기나 긴 어두운 시간 속에서 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무지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더러워지면 중생은 더러워진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중생은 깨끗해진다.[Saṃyutta-nikāya (=SN), Ⅲ, p.151]
위 인용문에 따르면, 마음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 오랫동안 오염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염은 마음속에 있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마음 자체는 청정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밝게 빛나고 있다. 단지 일시적인 오염(客塵煩惱)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 여기에 대한 가르침을 아직 듣지 못한 범부들은 여실히 알지 못한다. 때문에 그들은 마음의 수련이 없다고 나는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밝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일시적인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여기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여실히 알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마음의 수련을 쌓았다고 말하는 것이다.[Aṅguttara-nikāya (=AN), Ⅰ, p.10]
이 경전에 ‘마음은 본래’라든가 ‘마음의 자성’이라고 하는 표현은 없지만, 오염이 ‘객(客)’이라고 하는 것에서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 점은 아비달마의 해석학을 거쳐 대승에 들어와 명백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청정, 곧 밝게 빛나고 있다고 하는 것은 ‘흰’(백지와 같은), 혹은 ‘완전히 깨끗함’이라고 하는 의미로 그러한 마음이란 ‘유분심(有分心)’이라는 잠재심(潛在心)을 가리킨다고 남방 상좌부의 주석서는 풀이하고 있습니다.[水野弘元 , 「心性本淨의 意味」, 『印度學佛敎學硏究』 20-2, 1972, p.10] 각 순간마다에서 움직이고 있는 표현심(表現心)은 무엇인가에의 오염을 항상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앞의 책, p.32]
이 유분심은 후에 대승의 아뢰야식에 대비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마음의 본성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경문(經文)은 또한 법장부(法藏部)의 소전이라고 하는 『사리불아비담론(舍利佛阿毘曇論)』에도 보이고 있는데,[『大正藏』28, p.697b] 여기에서도 마음은 가심(假心)을 가리킨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청정이라고 해도 아뢰야식과 같이 무복무기(無覆無記)라고 하는 것에 그치고 있습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앞의 책, p.32]
그런데 부파 중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경문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즉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위의 분별론자(分別論者)에 근거한 경문은 “정리(正理)와 다르므로 요의설(了義說)이 아니다. 도대체 어떤 밀의(密意)에 의한 것인가”[『順正理論』 권72 (T29, p.733b-c)]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염된 것은 청정일 수 없으며, 청정한 것은 염오일 이유가 없다고 하는 일종의 성상영별론(性相永別論) 때문입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앞의 책, p.33]
한편 자성청정심을 인정하는 부파로서는 분별론자(남방상좌부) 외에 대중부(大衆部)가 있으며, 법장부(法藏部)도 같은 종류에 속합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앞의 책, p.33]
대승의 심성청정설(心性淸淨說)
대승경전에서는 『반야경』을 비롯하여 『법화경』, 『유마경』 등의 많은 경전에서 자성청정심이 객진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고 하는 교설이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대승의 근본적인 관점 중의 하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平川彰, 『初期大乘佛敎の硏究』, 1966, pp.200-217 참조] 여기에는 ‘마음의 본성’이라든가 ‘제법의 본성’ 등이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 자성(svabhāva)과 같은 의미로 ‘공(空)’이라고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곧 밝게 빛나고 있는 청정이 공이라고 하는 의미로 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앞의 책, pp.33-34]
이러한 관점은 마음의 염정(染淨)에 의해 중생의 염정, 즉 미오(迷悟)가 결정된다고 하는 상관론(相關論)과도 쉽게 연관됩니다. 사실 『유마경』은 「제자품」에서 우바이로 하여금 앞에서 기술한 경문(經文)을 말하도록 하고, 마음의 본성은 전혀 더럽혀진 일이 없으며, 또 무분별(無分別), 무전도(無顚倒)한 무아(無我)야말로 마음의 본성이며, 청정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大正藏』15, p.541b]
더 나아가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의 자상(自相), 마음의 잡염상(雜染相), 마음의 청정상(淸淨相)이라고 하는 세 가지를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유식설의 삼성설(三性說) 쪽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마음의 자상(自相)은 연기(緣起)한 것, 공(空)인 것(무자성인 것)으로서의 아뢰야식(無記心)이고, 마음의 청정상은 공성(空性) 혹은 진여(眞如)․법계(法界)입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앞의 책, p.34]
이에 대해 여래장설에서는 자성청정심은 공성에 해당하며, 그것은 본래적인 것이라고 하는 특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주장이 도입된 근거는 자성청정심을 허공에 비유한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없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근저(根底)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보적경』의 「가섭품」[『大正藏』11, p.635b]에서도 보이고 있으며, 또 『대집경(大集經)』의 모든 품들에서도[『大集經』「「陀羅尼自在王品」(T13, p.11c); 『智光明莊嚴經』(T12, p.245b); 『大集經』「虛空藏菩薩品」(T13, p.98a, p124c)] 빈번하게 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에 『보성론』의 전거로서 인용되고 있습니다.[『寶性論』 제1장 중 여래장의 遍一切處義 및 不淨時의 作頌의 典據가 되고 있다.] 여재장설은 따라서 공(空)이라는 것은 객진번뇌에 한정되며, 그것이 자성청정심이며, 여래장에는 본래 없다고 하는 주장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앞의 책, pp.34-35] 다시 말해서 여래장은 객진에 대하여 공(空)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여래장사상의 의미
여래장사상은 붓다가 주장한 무아(無我)의 사상에 모순이 된다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래장사상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줍니다.[이철헌, 앞의 책, p.147]
첫째,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도록 합니다.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사상입니다.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달려 있다는 사상(神意論)이나, 타고난 숙명에 의해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상(宿命論)이나, 모든 것은 우연에 의해 이루어질 뿐이라는 사상(偶然論)들은 인간의 의지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여래장사상은 인간은 붓다의 성품을 가진 존재로 수행에 의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사상입니다.[이철헌, 앞의 책, p.147]
둘째, 인간은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래장계통의 경전에서는 ‘본래의 성품은 청정한 마음이지만 외부의 번뇌로 더럽혀져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번뇌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손님과 같아서 본래 청정한 마음을 훼손하거나 파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번뇌와 망상에 사로잡힌 중생들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악한 짓을 한 중생이라 할지라도 그는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이철헌, 앞의 책, pp.147-148]
셋째, 모든 중생은 본질적으로 평등함을 일깨워 줍니다. 현실에 있어서는 지위의 높고 낮음, 재산의 많고 적음, 남성과 여성, 어른과 어린이,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별이 있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은 본래 붓다의 성품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이철헌, 앞의 책, p.148]
넷째, 인간은 교정과 지도에 의해 새롭게 탄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나 외부로부터의 번뇌로 인해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나쁜 짓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육과 지도편달로 어리석은 생각과 그릇된 생각을 바꾸게 하면 지혜가 생기고 좋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살의 여러 수행을 하면 본래 내 마음에 간직한 붓다의 성품은 드러납니다. 마치 달이 구름에 가려져 어두우나 구름이 걷히면 달은 다시 밝게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이철헌, 앞의 책, pp.148-149]
끝으로 여래장사상은 여래의 법신이라고 하는 인격적 절대자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의 중생에게 그와 같은 법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단언하는 것이 가능하며, 단순히 객관적 진리의 보편타당성(예를 들면 공성이 허망 분별의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처럼)과는 하나 더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조금만 잘못하면 힌두교에서 이야기하는 브라만의 실재하고 하는 관념과 똑같이 되어 버리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히라카와 아키라 외, 앞의 책, pp.50-51]
- <법회와 설법> 통권 제181호, 2010년 06월호, pp.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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