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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04. 중일전쟁(中日戰爭, 1931~1945)

 

04. 중일전쟁(中日戰爭, 1931~1945)

 

 







 

5. 태평양 전쟁의 시작

 

 

행운은 결코 어떤 사람에게 오랫동안 마냥 미소만 짓는 것이 아니다 - 장제스의 일기에서 발췌.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본 미국 등은 일본을 제재하기로 결정하고, 전략물자의 대일수출을 금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곤란해진 일본은 제재를 가한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중국을 묶어 ABCD(American+British+Chinese+Dutch) 포위망이라고 가칭하며 일종의 배후처럼 선전해댔으며, 말이 씨가 되듯이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이들 국가들과 맞서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1941127일 미국의 진주만 기지를 습격함으로 미국이라는 잠자는 거인을 깨워 전쟁터로 끌고 오는 장대한 대삽질을 저질렀다. 1941128일 미국 의회는 압도적으로 선전포고를 결의했고 그간 영미를 대일전에 참전시키려고 노력하던 장제스는 아베 마리아를 틀어놓고 기뻐 날뛰었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극동 전쟁에 대한 모든 통제를 자신에게 집중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장제스는 일본 군대는 중국 내부에서 소멸시키고 그 동안 미국이 일본 본토를 초토화시키길 원했다. 며칠 후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공통의 적에 대항하는 공동 행동을 취할 방도를 즉각 준비하는 단계를 옹호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루스벨트는 육필로 썼다.

 

저는 당신에게 계속 원조를 제공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고 더불어 되도록이면 원조를 늘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의 편안한 안부를 여쭈며. 루스벨트 친전.”

 

19411231일 장제스는 중국 전구의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명목상 아시아 전역이 그의 지휘권에 속해 있었다. 194211일 워싱턴에서 열린 연합국 26개국 대표들의 연합국 공동선언에서 중국 대표로 파견된 쑹쯔원은 루스벨트, 처칠, 미국 대사 리트비노프에 이어 4번째로 서명했다. 루스벨트는 중국에 5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변담화에서 최종적으로 일본을 격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위대한 저항과 불가피한 반격을 하고 있는 중국을 반드시 돕는 것이라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미국인 참모들은 모든 상황을 삐뚤게 보았다. 그들은 전황을 나쁘게 보았고 중화민국이 정리한 그간의 기록을 믿지 않았다. 반면 미국의 정치가들은 중국에 대해 매우 과대평가했다. 쑹쯔원의 로비로 미국 정계는 중국의 군사능력에 환상을 품었다. 하지만 미국 육군성이 중국에 파견한 참모단은 장제스가 지금까지 거둔 승리를 영리한 속임수라고 주장했고 충칭 정권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열악하여 장제스가 곧 일본 괴뢰정부보다 약화될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일본이 중국을 장악하여 황화의 공포가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고문단의 주장을 물리치고 국민당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장제스는 중미 관계를 강화하여 더 많은 원조를 얻기 위해 미국인을 참모장에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루스벨트는 이것이 국민당 군대를 현대화하여 중국군을 강화할 기회라고 여겼고 참모총장 조지 마셜은 조지프 스틸웰 중장을 파견하기로 했다.

 

조지프 스틸웰의 등장

 

원래 조지 마셜 총장은 과거 퍼싱 장군의 참모였던 휴 드럼 장군을 파견하려 했다. 휴 드럼 장군은 대규모 야전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중국통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경험이 있는 장군이었다. 하지만 드럼은 미국이 중국에 파견할 장군이 자신들이 아시아 전선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이면서 아무 지원도 해주지 않고 버릴 말로 써먹으려는 것임을 간파하고 대규모 대중 지원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중국에 지원을 해줄 생각이 없었던 미국은 그를 후보에서 제외했고 새롭게 뽑힌 인물이 조지프 스틸웰이었다. ‘까다로운 조’, ‘삐딱이 조라고 불리는 58세의 조지프 스틸웰은 퇴역을 앞에 둔 육군 중장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는 톈진의 미국 조계지 파견군, 주중 미국 대사관 군사 무관 등을 지내며 중국에서 13년을 근무했고 중국말에도 능통하여 미 육군 중에서 최고의 중국통이라 할만했다. 하지만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였고 혐중 성향이 짙었다. 그는 자신이 중국에 파견되어야 한다는 말에 매우 불쾌해했다. 그리고 성격도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으며 장제스의 참모장으로써 요구되어야 할 사교성이나 정치적 능력은 전무했다. 스틸웰은 마셜에게 중국군의 전 지휘권을 자신에게 주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이에 헨리 스팀슨 육군 장관이 장제스에게 지휘권을 받기로 했다고 보증했다. 하지만 스틸웰이 수백만명이나 되는 거대한 군대를 지휘한 경험도, 지휘할 능력도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은 둘째치고 장제스가 처음보는 미국인에게 자신의 지휘권을 홀라당 넘겨주길 기대하는 것은 스틸웰 자신조차도 일기에서 회의적으로 보았다. 중국의 외교부장 쑹쯔원은 이미 스틸웰이 중국에 머물렀던 시기는 장제스의 난징 정부 시절로 한창 군벌 간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그가 중국에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그의 우려는 적중했다. 그리고 쑹쯔원은 스틸웰에게 중국 정부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임도 예상했다. 스틸웰은 시어도어 화이트에게 다음과 같이 떠벌리며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문제는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는 무식하고 문맹이고 미신적인 농민 개자식들과 연맹을 맺은 것입니다.”

 

스틸웰은 중국 전구 연합참모장, 충칭연합군군사위원회 미국 대표, 중국, 인도, 버마 전구의 미군 총사령관, 대중 원조 물자 관리통제관, 버마 루트 감독관, 재중 미 공군 지휘관 등 여덟개의 으리으리한 직함을 달고 중국에 도착했다. 스틸웰은 장제스를 땅콩이라 조롱했고 나중에는 방울뱀이라 비하했다. 워싱턴의 선의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장제스는 지금껏 그가 상대했던 소련 고문인 바실리 블류헤르, 바실리 추이코프나 독일 고문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같은 점잖은 고문들을 기대하며 스틸웰을 맞았고 그는 이 거칠고 신경질적인 양키 참모장에게 학을 떼고 만다. 장제스와 스틸웰은 모든 것이 달랐다. 스틸웰은 전우애와 병사들과의 동고동락을 중시하는 일선 지휘관형 타입이었고 중국 병사들과 같은 전투 식량을 먹고 중국 병사들을 칭송하는 연설을 하며 중국 병사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반면 장제스는 충칭의 권좌에 앉은 철권통치자였다. 그리고 장제스의 기존 전략과는 달리 스틸웰은 단기결전을 노래불렀고 대규모 야전에 걸맞지 않는 장군들을 모두 해고하거나 죽일 것을(!) 요구했다. 장제스의 비밀 공작 능력이나 충성심 우선도 스틸웰에겐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스틸웰은 고급 캐딜락을 거부하고 군용 지프를 고집했으며 허름한 군복만 입고 용모를 일부러 볼품없게 만들고 다녔다. 고급 옷을 입고 잘 손질한 외모의 장제스와는 대조적이었다. 심지어 스틸웰은 북경어를 구사했다. 작가 에밀리 한은 스틸웰은 그가 남의 관점이 자신의 것보다 일리가 있을 것이란 가능성이나 미국보다 더 큰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정신병의 수준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의 참모장이 된 미국인 스틸웰은 중국, 버마, 인도의 미군을 지휘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미국에 중국에 무기대여법에 따라 제공하는 모든 무기들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전쟁위원회의 미국 대표 겸 영국과의 연락관도 겸했다. 곧 스틸웰과 장제스의 권력다툼이 시작되었다. 장제스는 중간의 스틸웰을 무시하고 군 지휘관들과 직접 연락하며 그들의 충성심을 재확인했고 이를 스틸웰은 좋아하지 않았다. 스틸웰은 중국군을 통제하고 싶어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미국이 중국정부를 무력화하고 중국을 직접 통치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이 스틸웰을 위해 그런 일을 해줄 리가 없으니 결국 마땅한 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제스도 스틸웰을 비롯한 미국인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까봐 노심초사했고 이후 1949년 대만으로 쫓겨나는 순간까지 미국과의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어쨌거나 스틸웰의 존재는 표면적인 중미관계를 진전시켜주었다. 쑹쯔원은 5억 달러 어치의 차관을 새로 유치했고 미국의 원조를 두배로 늘렸다.

 

일본의 남방작전과 버마 전투

 

영국, 미국, 네덜란드는 참패하여 식민지들을 일본군에 내주었으며 태국은 친일 동맹국이 되었다. 장제스는 버마 방위를 돕기 위해 스틸웰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원정군 10만명을 파견했지만 스틸웰의 졸렬한 지휘와 영국군의 배신으로 전력의 75%를 잃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버마를 내주어야 했다. 스틸웰은 이 모든 것이 중국군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비난했고 장제스는 자신의 정예병력을 날려버린 스틸웰에게 이를 갈았다. 이때부터 스틸웰과 장제스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또한 원조 문제, 연합국 내부의 주도권 문제로 중영, 중미 간의 갈등도 벌어졌다.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전쟁

 

이 시기 일본은 '군벌 장씨'는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 내륙 지방에 숨어버렸고 중국의 요충지가 모두 장악되었으며 왕징웨이 정권의 안정성은 완벽하므로 이제 더 이상 걱정할 것 없다고 허세를 부렸다. 물론 이는 구라였다. 장제스는 내륙 깊은 곳에 있을지언정 중국군은 대륙 전역에 걸쳐 항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1941123차 창사 공략전에서 일본군은 참패하기까지 했다. 영미와 2전선까지 열어버린 일본은 중국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충칭이나 청두까지 전진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일본은 194295호 작전을 수립, 충칭과 청두까지 점령함으로 전쟁을 끝내려고 했지만 태평양에서 미국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어 과달카날에서 수만명의 일본 청년들이 요단강을 건너버리는 참패를 당하게 되자 막대한 병력을 남방으로 빼내야 했고 따라서 중국 내륙에 대한 공세를 수행할 여력이 전혀 남아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선 남은 전력을 보존하여 현명하고 신중한 전략을 짜야 마땅했겠지만 상부의 명령 듣지 않기로 유명한 일본군의 일선 지휘관들은 명예욕을 위해서 헛된 공세를 무리하게 감행했고 아까운 물자와 인명만을 번번이 낭비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전선은 고착화되었는데 일본은 불리해지는 전황을 만회하기 위한 매우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1942418일 제임스 둘리틀 중령 휘하의 폭격기 편대가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으로 도쿄, 오사카 등지를 폭격했다. 일본이 입은 피해 자체는 대단한 것이 없었으나 일본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대본영은 중국 내부의 미국 항공기지들을 파괴할 것을 지시했고 일본군은 절공작전을 수립하여 공세를 준비했다. 하타 슌로쿠 대장이 지휘하는 18만명의 일본군은 5월에 장시, 저장 성의 중국군 3전구를 강타했다. 3전구는 숫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낙후된 약체였고 일본군의 대공세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장제스는 급히 3개 군을 급파하여 맞섰으나 결국 일본군은 7만명의 중국군 피해를 안겨주고 목표한 저장 성과 미군 항공기지를 모두 파괴했다. 허나 일본군 역시 36천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15사단장 사카이 나오지가 전사했다. 이에 일본군의 보복으로 저장 성에서 수십만명의 중국인들을 학살하고 약탈, 강간을 벌였다.

 

일본의 만행은 이걸로 끝나지 않았는데 이름도 유명한 신멸작전이라는 것을 벌인 것이다. 마오쩌둥은 일본군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곳곳에서 해방구를 건설하고 있었고 일본군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곳은 화북의 10%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에 일본군은 공산당 및 국민당 유격대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고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잔혹한 토벌작전을 시행하는 데 그것이 바로 삼광작전 혹은 신멸작전이라 한다. 이로 인해 최소 75천명이 죽었고 100만명이 강제 이주되었다.

 

일본군의 1943년 공세

 

1942년은 절공작전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전투가 없었다 할 수 있었다. 해를 넘겨 1943년에 접어들자 영미의 거센 반격으로 일본의 열세와 불리함은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었고 지나파견군에서도 계속 병력을 차출해서 남방의 구멍을 메워야 했다. 날이 갈수록 전황이 불리해지고 전력이 축소되자 지나 파견군은 상황이 더욱 열악해진 1943년에 들어서서야 허겁지겁 반격을 기획하고 우한의 윟벼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후난과 후베이 지역에 3차례에 걸친 공세를 감행했다.

 

19432월 초에 벌어진 1차 공세로 강북 섬멸작전이 시작되었다. 후베이 성 남부의 웨이저우의 중국군 6전구 소속 2개 사단을 섬멸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는데 중국군 2개 사단을 전멸시키기 위해 일본군 3개 사단이 동원되었다. 질적으론 말할 것도 없고 숫적으로도 일본군의 반 밖에 되지 않던 중국군은 순식간에 참패하였고 중국군 8600명이 전사하고 23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일본군은 254명의 전사자만 발생했다. 정작 일본군은 병참 상의 문제로 많은 병력 손실을 입었다. 작전은 3월에 종료되었고 일본군은 중국군 2개 사단의 반격까지 손쉽게 격퇴한 다음에 퇴각했다.

 

19434월 후베이 성의 6전구 주력을 섬멸하고 후베이의 곡물을 약탈하기 위한 2차 공세인 강남 섬멸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무려 4개 사단과 독립혼성 17여단 및 여러 독립지대들을 동원했고 왕징웨이 괴뢰정부 산하의 병력 1만명까지 차출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고질적인 미숙한 병참으로 인하여 공격은 산발적으로 시작되었다. 49일에 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은 중국군을 격퇴하고 많은 식량을 약탈했다. 5월 중순에 중국군은 쓰촨 성과 후베이 성의 경계인 스파이 요새까지 밀려났는데 이 요새가 뚫린다면 충칭의 숨통에 총구가 겨눠지는 격이었다. 물론 중국군도 그 중요성을 잘 알아 스파이 요새에 최정예 부대인 11사단을 배치한 상태였다. 일본군 13사단이 스파이 요새를 돌파하기 위한 공세에 들어갔으나 중국군은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끝내 격퇴해냈다. 이때 미국 공군과 중국 공군이 일본군의 병참로를 습격하면서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6전구 사령관은 천청은 일본군이 스파이 요새에 발목이 잡힌 틈을 타서 반격을 감행, 일본군 13사단을 포위하려 했다. 자신들이 위기에 처한 것을 깨달은 13사단은 공세를 멈추고 퇴각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전사자가 771명이며 중국군은 3만명 사살,4 천명 포로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으나 중국군은 일본군 25천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일본군은 자기들답게 후베이 성에서 창자오 학살을 감행 3만명의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하고 또 대규모 강간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일부 전술적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전략적으로 얻은 것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태평양 전선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오히려 중국 주둔군을 차출하여 남방에 파견해야하기 위한 감호전용계획이란 것을 짜야 할 지경이었다. 이에 일본군 11군 사령관 요코하마 이사무 장군은 대규모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전선에 차질을 준다면서 병력을 빼내기 전에 중국군에 공세를 가하여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대본영이 이를 승인하면서 이름도 유명한 창더 섬멸작전이 시작되었다.

 

창더 전투(상덕 전투)

 

창더는 중국의 스탈린그라드다.-장제스

 

창더를 공략하기 위해 11군 소속 5개 사단과 13군의 병력, 3비행사단에서 차출된 병력 35개 대대 6만 명이 모였고 112일에 공세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의 공격을 알아차린 6전구 사령관 천청은 3개 집단군을 동원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여 74군을 창더로 급파하고 18군을 예비대로 꾸린 다음에 일본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짰다. 하지만 호우와 장강의 범람으로 10집단군의 전개에 애로사항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창더를 삼면으로 포위했다.

 

장제스는 57사단장 위청완에게 절대사수를 명령하는 한편 천청 이하 지휘관들에게 창더가 중국의 스탈린그라드가 되어야 한다고 훈시했다. 쉐웨가 즉각 증원군을 보내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했고 중미 연합공군도 가세했다. 일본군의 공세도 거셌다. 중국군 신5사단장 펑스량, 150사단장 쉬궈장이 전사했고 중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도 좌관급 장교 수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해 후송되었지만 무장이 빈약한 중국군의 피해가 더 컸고 일본군은 외곽 방어선을 분쇄하고 창더를 완전히 포위할 수 있었다. 창더는 57사단장 위청완 휘하 8천 명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위청완은 황푸군관학교 1기생으로 그간 많은 전투를 치러낸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특히 방어전에 능숙하였고 창더의 지형물을 이용한 튼튼한 방어선을 꾸렸다.

 

1122일 일본군 116사단이 공세에 돌입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중국군의 강한 저항에 많은 피해를 냈으며 109연대장 누노 데이치 대좌가 전사했다. 놀란 일본군 11군 사령관 요코야마 장군이 직접 나섰다. 그는 3사단과 68사단을 증원하여 창더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4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의 일부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너무도 강력한 중국군의 저항에 일본군은 완전히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러자 일본군의 특기가 출동했다. 일본군이 독가스를 살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7천명의 중국군이 사망했고 일본군 역시 1만명이 독가스와 세균 무기의 피해를 입고 후송되었다. 결국 독가스 공격에 90%가 넘는 병력을 상실한 중국군은 무너졌고 위청완 장군은 탈출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중국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곳곳에 숨어 치열한 저항을 전개했다. 중국군 10군이 함락 초읽기에 들어간 창더를 구하기 위해 나섰으나 일본군의 반격에 10예비사단장 쑨밍진을 잃는 등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났다. 결국 12383명의 포로를 잡은 것을 마지막으로 중국의 저항은 종결되었고 일본군은 창더를 장악했다. 위청완은 열심히 싸웠음에도 적전도주했다는 잘못된 보고가 올라가 격분한 장제스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제대로 된 정보가 올라옴에 따라 장제스는 즉각 그를 석방하고 크게 치하했으며 26군 군장으로 승진시켜주었다.

 

한편 창더의 함락으로 전투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천청은 후베이 성 북부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하고 일본군의 인프라를 파괴하였으며 일본군을 포위하는 거대한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요코야마 중장은 중국군의 포위 전선이 펼쳐진 것을 알아차리고 1211일 작전 중지 및 퇴각을 명령했다. 중국군은 잃어버린 모든 영토를 되찾았으며 일본군을 추격해 많은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미국 고문단은 약탈이 목적이었던 일본군은 목적을 달성하여 철수한 것일 뿐 중국의 용전을 폄하, 무시하였고 이러한 왜곡된 정보들을 전달받은 워싱턴에선 장제스가 정말로 일본에 제대로 맞서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갔다. 어쨌거나 일본군은 전사 1274, 부상 2977명에 반해 중국군 29천명을 사살하고 14천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사단장 6명을 전사시켰다고 으스댔다. 반면 중국군은 일본군 4만명을 사상시켰다고 주장했다. 중일전쟁의 저자 권성욱 씨의 경우에는 실제 피해가 발표된 것의 반 정도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대륙타통작전

 

1944년 대륙타통작전(이치고 작전) 지도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중국 등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난국 속에서 일본의 전황은 날이 갈수록 불리해졌다. 미국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거셈과 동시에 일본군은 남방 점령지에서 차례로 밀리고 있었고 병참선도 다 끊어졌다. 일본은 불리한 전황을 타파하기 위해 중국, 인도를 점령한다는 장기적 구상 속에서 중국 대륙의 남과 북을 관통한다는 대륙타통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무려 50만에 달하는 대군이 동원되었으며 스틸웰의 이적행위나 다름 없는 행태로 인하여 전선을 보강할 여력이 전혀 없었던 중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대륙타통작전도 전략적으로 볼때 무리하게 짝이 없는 작전이었고 일본의 전황 회복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버마 탈환전

 

대륙타통작전에서 시간을 약간 거슬러 올라가서 1943년 인도에선 치욕적으로 버마를 걸어서 탈출해야 했던 스틸웰의 버마 탈환 작전이 구상되고 있었다. 스틸웰은 이미 19426월에 장제스에게 버마를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영국과 연합하여 버마를 탈환하겠다는 야심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창설된 것이 5만 명의 중국군으로 구성된 X군인데 장제스는 영국이 지휘권을 가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X군의 창설을 승인했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에선 태평양보다 부차적인 중국 전선에 돌아가는 지원의 양은 극히 적었고 정작 버마의 지배자인 영국인들이 버마 탈환에 시큰둥하면서 버마 탈환은 순조롭지 못했다. 영국은 중국의 아시아에서의 발언권이 세져 영국의 영향력이 축소될 것을 두려워했고 중국군의 도움을 한사코 거부했으며 인도에 들어온 중국군을 내쫓기 위해서도 여러차례 시도했다. 루스벨트가 중재하여 중국군의 인도 주둔은 유지되었으나 미국, 영국, 중국이 모두 반대하면서 난황은 계속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버마를 탈환할 필요성을 느껴 비협조적으로 일관했고 중국은 영미의 협조가 없는 상황에서 중국군만 피를 흘릴 순 없다고 반대했다. 게다가 장제스는 스틸웰이 이미 자신이 준 10만명의 정예부대를 말아먹은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X군도 말아먹지 않을까 매우 우려했다. 이에 따라 스틸웰의 버마 탈환 작전인 애나킴 작전은 진척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42년과 19432월의 영국군의 제한적 반격이 큰 피해만을 남긴체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영국은 더욱 소극적이 되었다. 19435월 트라이던트 회의에서 연합국 수뇌부는 버마 탈환에 손을 떼버리고 중미연합공군의 육성에 지원을 돌렸다. 결국 194211월에 시행 예정인 애나킴 작전은 1943년 말에야 시행될 수 있었다.

 

스틸웰의 버마 전선은 X, 영국군 2개 군단, 미국 메릴 부대 등 상당한 대군을 보유하게 되었고 194310월 스튜어트 전차와 쑨리런 휘하의 38사단을 앞세워 버마로 진공했다. 하지만 스틸웰은 일본군의 수와 전투력을 매우 얕잡아보고 버마에는 일본군 5개 사단만 있으며 버마 북부엔 1개 사단도 없다고 허풍을 쳤지만 실제론 8개 사단+본토에서 2개 사단의 증원이 오고 있었다. 중국군 38사단은 일본군 18사단과 격돌, 공세종말점에 다다랐다. 이에 스틸웰은 22사단을 추가 투입하여 메릴 부대를 후방에 투입시켰는데 이에 일본군은 모두 퇴각했다. 19442월에 영국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일본군 55사단장 하나야 타다시가 영국군의 군수물자를 약탈하겠답시고 하호 작전이란 것을 실시하여 영국군 기관총과 대포 앞에 부하들을 반자이 돌격 시켰다가 박살이 난 통에 일본군의 방어력은 더욱 약해졌다. 그런데 194438일 이젠 한국의 웹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무타구치 렌야가 나섰다! 일찍이 노구교에서 사고를 쳤던 무타구치는 이후 버마에 파견되어 1942년 인도 진공 작전인 21호 작전이 무모하다고 철회시킨 이력이 있었는데 그는 연합국은 더욱 세지고 일본군은 더욱 약해진 19443월에 난데없이 인도를 먹을 절호의 기회랍시고 임팔 작전이란 것을 가동시켰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 참조. 결과적으로 9만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고 연합군의 공세에 죽어갔다. 하지만 일본군을 얕잡아 보던 스틸웰에게 충격을 주긴 충분한 공세긴 했다. 스틸웰은 자신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죽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장제스에게 Y군을 보내달라고 졸라댔다. 장제스는 거부했지만 대륙타통작전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스틸웰은 농간을 부려 결국 Y군을 뺏어온다. 19445Y군은 일본군 56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2년 간 방어선을 구축한 마쓰야마 유조 중장 휘하 56사단은 중국군의 공세를 잘 방어했고 때마침 일본군 2사단과 49사단의 증원으로 버마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한편 무타구치의 파멸적인 임팔 작전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참혹한 결과를 낳은 체 실패로 돌아갔다. 전사자 32천명과 아사자 4만명을 낸 무타구치는 이게 다 정신력 나약한 부하들 때문이라고 정신승리로 점철된 헛소리를 시전했다. 무타구치가 개소리를 지껄이는 동안 영국군과 중국군은 버마 북부의 요충지인 미치나 근처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영국은 지극히 비협조적으로 일관하며 당시 버마 북부가 무주공산이란 사실을 스틸웰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스틸웰도 졸렬한 지휘로 일본군에게 전열을 갖출 시간을 벌어다 주고 말았다. 결국 금방 장악할 수 있던 버마 북부는 8월에서야 겨우 연합군의 손에 들어왔다. 스틸웰은 자신의 공을 열렬히 선전했는데 이 중에 영국군이 점령한 모가웅 시를 자신이 점령했다고 하는 바람에 처칠과 마운트배튼 등이 격노하였고 그들은 스틸웰 해임을 루스벨트에게 요구했다. 때마침 메릴 부대도 스틸웰의 지휘에 반발했다. 스틸웰의 지휘력은 미국 청문회에까지 올라갔고 애꿎은 메릴 부대가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어쨌거나 중국군 38사단은 12월에 버마-중국 국경을 개통했고 Y군도 일본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윈난 성 남부를 점령했다. 결국 일본군은 버마 남쪽으로 계속해서 밀렸고 19451X군과 Y군이 합류하고 레도 공도가 개통되었다. 하지만 스틸웰도 끝났다. 대륙타통작전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던 장제스는 더 이상 스틸웰과 같은 공간에서 숨쉬길 거부했던 것이었다. 장제스는 스틸웰을 해임하지 않을 것이면 미국이 준 물자를 다 가져가라고 배수진을 쳤고 이에 루스벨트도 굴복했다. 스틸웰은 자신이 전쟁 영웅이라 굳게 믿었지만 귀국 후 선거에 방해되지 말란 핀잔을 듣는 굴욕을 겪었고 이후 1946년 미군 6군 사령관의 신분으로 위암으로 죽었다.

 

웨드마이어의 등장과 중국의 반격

 

이치고 작전의 궤멸적 타격으로 중국은 한때 충칭이 함락당할 위기에 놓일 지경이었으나 일본군의 병참 한계와 대본영이 충칭을 점령한다 하더라도 장제스를 굴복시킬 수 있을 지 회의적이라고 판단하여 충칭 공격은 중단되었다. 새롭게 고문으로 부임한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스틸웰보다 훨씬 우호적인 자세로 나가 원조 규모를 늘리고 중국에 물자를 제공함으로 피폐해진 중국군의 전력을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또한 장제스와 스틸웰의 고질적인 마찰거리였던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도 장제스만이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공산당 지원은 있을 수 없다고 장제스를 지원했고 신임 주중 미국대사인 패트릭 헐리도 이 의견에 동조했다.

 

장제스는 194410월 지식청년군을 편성했다. 원래 중국은 고등학생 이상의 인력은 중국 재건의 씨앗으로 보고 징집을 면제해주었는데 이치고 작전으로 중국군 전력이 고갈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한 엘리트 청년층이 필요해지면서 이들에게 손을 내밀게 된 것이었다. 지식청년군의 모집 소식에 무려 12만명이 지원했고 그 중 86천명이 입대시험에 통과했으며 그 중 1만명은 X군에, 나머지는 경기계화부대로 편성되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는 것을 직감한 장제스는 군을 재건하면서 19451월 쿤밍에 육군총사령부를 설치하여 허잉친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허잉친은 국민정부군 재건 계획을 수립하여 65만명의 병력을 미군식으로 편제하여 반격할 계획을 꾸몄다. 허잉친은 4천명의 미군을 중국군에 배치하여 이 과정을 감독했고 중국에 대한 지원도 확대했다. 웨드마이어는 일주일에 한번 미중 참모회의를 열며 미국의 정보를 장제스에게 제공했고 공산당과 협력할 생각도 없다고 확인해주어 장제스를 크게 만족시켰다. 버마의 X군과 Y군까지 돌려받은 장제스는 버마를 통해 물자를 공급받으며 때를 기다렸다.

19455월 드디어 반격이 시작되었다.

 

소련의 참전

 

194588일 소련이 대일 개전을 선고하면서 일본이 믿던 최후의 보루인 관동군도 섬멸되고 만주국이 무너졌다. 일본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 참조.

 

일본의 항복, 피의 승리

 

1945년에 들어서자 태평양 군도에서 미국에 연전연패하여 패전이 기정사실화된 일본군은 중국 전선에서도 역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이 당시 일본 육군 지휘관이 국민당과 협상(!)하고 중국 전선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제출했을 정도로 일본의 패색은 짙었다. 견디다못한 일본은 장제스에게 수차례 휴전을 제안했지만 장제스는 단호히 거부했다. 훼방만 놓던 스틸웰이 원하던 버마 전선이 정리되면서 장제스는 마침내 예비대를 마련하여 일본에 대한 반격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 작전에서 일본군이 알고 있던 허접한 잡병들이 아닌 미제 병기로 무장한 정예 중국군은 일본군 3만여명을 쓸어버리는데 성공했다. 8월에 들어서 일본군은 광시성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소련이 참전하여 만주의 관동군이 괴멸되면서 중국 전선의 일본군은 본토와도 고립될 상황이었다. 국민당은 19461월에 상하이와 남중국 전체를 탈환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지만, 일본이 먼저 항복하여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은 중국전선에서의 상황과는 관계없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덕분에 중국전선의 일본군 사령관이 항복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항복 당시 중국뿐만 아니라 태평양 섬들과 인도차이나에 잔존해있던 일본군 사령관 대부분이 항복에 반대했다는걸 유념해야 한다. 즉 이길 가망이 없는데 정신승리한 것이란 것. 일종의 내부로부터의 중상과 같은 짓거리니 의미를 둘 이유는 없다.

 

물론 이 무렵 중국주둔 일본군의 무장상태는 심히 개판이어서 소총조차 사단배치정수를 다 채운 경우가 드물었다. 게다가 일본군의 정예 병력은 이미 남방으로 돌려졌다가 미군에게 궤멸당하거나 그나마 남아있던 병력도 본토 결전 대비한답시고 본토로 빠져나가던 상황이었다. , 계속 싸웠으면 이번에 일본군이 중국군에게 발릴 차례였던게 19458월의 중국주둔 일본군의 실상이었다. 중국의 자체 역량만으로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면 얼마가 걸릴지 의심스러워도 대세가 바뀔 일은 결코 없었다. 결국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오카무라는 휘하 전군에게 "반드시 장제스의 국민당군에게 항복해야 하며, 공산군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명령하면서 전쟁이 종결된다.

 

8년의 전쟁은 마침내 중국의 승리로 끝났고,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까지 불사할 정도로 집착했던 만주 일대와 대만은 부질없이 도로 중국에게 반환되었다.

 

출처 : 오디오와 컴퓨터
글쓴이 : 관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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