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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03. 중일전쟁(中日戰爭, 1931~1945)

 

03. 중일전쟁(中日戰爭, 1931~1945)

 

 

 

 


 

 

충칭 대공습

 

 

적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야만적이다. 내가 살면서 목격한 가장 참혹한 광경이다.” -장제스

194165일 일본군의 충칭 대공습에 희생당한 시민들

 

1939년 동계 대공세

 

각설하고 193912월 장제스는 전 전선에 걸쳐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규모 반격을 시작했다. 지난 19395월 일본이 할힌골 전투, 흔히 노몬한 사건이라 불리는 소련과의 국경 분쟁에서 소련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소련군에게 처참하게 박살난 것을 목도한 장제스는 소련이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소련이 일본을 공격할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되었다. 더욱이 짜오양, 창사에서의 잇달은 승리로 그는 크게 고무되었다. 장제스는 우한을 비롯한 장강 중류 일대를 탈환하기 위해 2전구, 3전구, 5전구, 9전구의 병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반격을 계획했다. 65개 사단 50만 대군과 전차, 항공기, 함선 등 중국에게 얼마 없는 중화기까지 동원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한편 일본군은 1123,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광시 성의 성도이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경의 난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폭격과 하이난 점령으로도 하노이 루트를 차단하지 못한 일본군이 육상 공세를 취한 것이다. 광저우의 21군 산하 5사단을 주력으로3 만명의 병력이 난닝 작전에 투입되어 중국군 4전구 소속 3만명을 격파하고 26일에 난닝을 점령했다. 중불 국경 지대의 룽저우와 전난관도 일본군 오이카와 지대의 공격으로 차례로 점령되었고 중국군 수비대는 무참히 패배했다. 중국군은 난닝 탈환을 위해 전차 4대와 1500명의 병력을 데리고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룽저우 반격 작전에서도 패배했다. 중국군은 7700명의 전사자와 700명의 포로를 냈고 일본군은 경미한 피해를 입은 반면에 막대한 군수물자까지 노획했다. 이에 4전구 사령관 장파쿠이가 사의를 비치기도 했으나 장제스는 이를 반려했다. 난닝의 패배 때문에 장제스는 동계 공세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공세를 위해 준비되었던 상당수의 병력이 난닝 탈환을 위해 광시로 빠졌고 중앙군, 쓰촨, 구이저우에서 난닝 탈환을 위해 대군을 차출했다. 1217일 난닝 탈환을 위해 15만 대군과 100여대의 항공기, 200대의 전차와 장갑차가 집결했다.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난닝 탈환군은 쿠룬관 공격을 시작으로 난닝 탈환 작전의 서막을 올렸다.

 

중국의 대반격이 준비되는 동안 일본군은 자만심으로 중국군이 더 이상 그들에게 맞설 수 없을 것이라 자만했다. 얼마 전 터진 할힌골 전투의 충격으로 일본군 대본영은 중국이 아니라 소련을 주목하게 되었는데 따라서 그들은 중국 전선을 축소시키고 중국 주둔군을 만주에 보내어 일본의 북방의 방위를 탄탄히 할 생각이었다. 85만 지나 주둔군 중에서 50만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만주에 보낸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12월 초부터 대륙 전역에서 중국군의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반격의 신호탄을 울린 것은 화북의 제1전구였다. 121일부터 3집단군 소속 유격대들이 일본군의 교통망을 교란시켰고 81사단이 카이펑을 공격하여 탈환했다. 5, 936군도 총반격에 들어가 일본군 35사단을 격파하고 안양을 점령했으며 47군이 태행산을 점령했다. 1210일에는 2전구가 반격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중국의 대부대가 집결 중인 것을 눈치 챈 일본군 37사단이 선제공격에 들어갔다. 하지만 중국군을 얕잡아보던 이들은 압도적인 숫자의 중국군 한복판에 뛰어들었다가 처참하게 패배했다. 4, 5, 14집단군과 34, 61군이 일본군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했고 27, 40군도 산시 성 중부를 쳤다. 일본군은 잇달아 패배했고 중국군은 창즈를 점령하는 등 선전했다. 이에 일본군 37사단이 반격에 나서서 양측은 매우 격렬한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일본군은 포병, 항공부대 등을 지원하며 맹공을 퍼부었지만 창즈의 중국군을 몰아내지 못했고 병력을 추가 파병한 후인 19401월에야 겨우 창즈의 중국군을 격퇴했다. 1218일에는 8전구가 쑤이위안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마잔산이 지휘하는 유격대와 연합한 이들은 바오터우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일본군의 증원군들을 차례로 섬멸했다. 일본군은 무리하게 반격하여 중국군 거점 우위안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으나 결국 중국군의 반격으로 전멸당했다. 일본군은 대병력을 투입하여 우위안을 다시 공격했으나 중국의 반격으로 점령지를 포기하고 퇴각길에 올랐다.

 

1216일 구주퉁의 3전구가 화중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난창, 항저우, 장강 하류에 중국군 대부대들이 공세를 펼쳤고 일본군은 장강의 여러 거점들을 손실하였다. 일본군은 1223일에 반격했으나 중국군의 저항에 3일 만에 공격을 중단해야 했다. 일본군은 422일에 본토에서 2개 사단을 증원받아 중국의 공세를 겨우 격퇴할 수 있었다.

 

화중에서 가장 거센 공격을 받은 곳은 바로 우한으로 5전구와 9전구에서 동원된 71개 사단, 50만 대군이 우한을 쳤다. 우한은 일본군 11군 소속 4개 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압도적인 숫자의 중국군에게 밀린 일본군은 곧 전멸 위기에 처했다. 중국군은 일본군을 몇겹으로 포위하고 공세를 퍼부었지만 일본군은 전차, 포병, 항공대를 투입하는 한편 철도로 예비대를 지원받아 우한을 지킬 수 있었고 결국 중국군의 우한 탈환은 실패로 돌아갔다.

 

1217일에는 4전구 소속 중국군 25개 사단이 난닝을 공격했다. 중국군은 일본군 1만명을 사살하고 쿤룬관을 점령했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 나카무라 마사오 소장이 전사하는 등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농락당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일본군 21군 사령관 안도 리키치는 난닝을 포기할 것을 명령했는데 5사단장 이마무라 히토시는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일본군은 난닝을 사수할 수 있었으나 병력이 지극히 부족하여 중국군을 포위 섬멸할 순 없었고 퇴각하는 중국군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장기적인 난닝 사수도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일본군은 194011월에 난닝을 버리고 퇴각했고 중국군은 중불 국경을 탈환하게 된다.

 

중국군은 전 전선에 걸쳐 40여일간 1340회에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을 위협했지만 거기까지가 중국의 한계였다. 19401월부터 전열을 정비한 일본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4051일 우한 지구에서 일본군은 이창 작전을 시작하였다. 소노베 와이치로 중장의 11, 3개 사단과 각 사단에서 차출한 대대들, 독립여단, 전차연대, 중포병, 비행단, 포함된 8만 대군이 이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창은 리쭝런의 5전구 산하 6개 집단군 13개군 50개 사단 35만 대군이 지키고 있었다. 중국군은 짜오양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격퇴하자 반격으로 전환하여 일본군 3사단을 포위하고 병참선을 끊어 한때 일본군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516일 중국군 33집다군 사령부의 위치를 알아낸 일본군 39사단이 반격에 나섬으로 일선에서 직접 싸움을 지휘하던 장쯔중 장군이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5전구의 우익이 통째로 마비되었고 쑨롄중, 탕언보도 패배하였다. 리쭝런은 퇴각 명령을 내렸고 일본군은 중국군을 추격하여 크게 무찔러 리쭝런의 사령부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진군한 일본군은 중국군의 매복에 223 보병연대장이 전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으며 격퇴당했다. 이에 11군 소노베 중장은 더 이상의 작전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공세를 중단하려 했으나 참모들의 반발로 다시 공세를 재개해야 했다. 장쯔중 장군의 전사와 병력 소모로 약화되었던 중국군은 무너졌고 이창이 포위되었다. 장제스는 최측근 심복인 천청에게 직계군 18군을 주어 이창을 방어하게 하였으나 611일의 공세에서 이창은 끝끝내 함락되었다. 이로써 중국군은 거의 파멸상태에 놓였다. 장제스는 항전 이래의 최대의 위기라 불렀다.

 

대공세는 엄밀히 말해서 중국의 힘을 보여주긴 했으나 전략적으론 실패에 가까웠다.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치고는 중국군의 피해가 막심했으며 요충지 탈환은 대부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중국군 전력의 2~3할이 소모되었으리라 평가했다. 장제스는 각 전구의 협력 부재로 인하여 한개 현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질책하며 여러 장군들의 소극성에 대해서 비판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군의 역량 부족에 있었다. 이를 모르지 않았던 장제스는 미국의 힘을 빌려 일본을 몰아내는 장기전을 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은 자꾸 안 좋아졌는데 일본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쓰러뜨리고 비시 프랑스를 수립하자 하노이 루트가 끊기고 말았다. 영국도 일본의 압력 때문에 버마 루트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장강의 요충지인 이창이 함락됨으로 물자 수송이 지극히 어려워졌고 장제스는 수도의 물자 공급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공습은 계속되어 외국인과 내국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한편 장제스는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과의 강화 가능성에 대해서 완전히 포기하진 않은 상태였다. 다이리의 첩보원들이 홍콩을 통해 일본과 접촉했고 충칭 정부의 대표들이 홍콩에서 일본인들과 회담을 열었다. 장제스, 왕징웨이, 일본군 지나 파견군 참모총장이 대면하는 회담을 여는 데에 양국은 합의했지만 일본은 중국의 만주국 승인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다. 장제스는 자신이 일본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미국에 흘리면서 미국의 지원을 얻고자 했고 이를 위해 쑹쯔원을 워싱턴에 파견하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게 했다. 쑹쯔원은 5천만 달러의 통화 안정 협정과 중국에 차관 제공, 중국 원자재 구입을 약속하는 신용 대부를 얻어냈다. 미국의 대중 원조는 24500만 위안에 달했다. 이어 영국도 천만 파운드의 차관을 제공했으며 버마 루트를 다시 열어 물자를 제공했다.

 

한편 일본 대본영은 충칭을 함락하기엔 일본군의 공세 능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자각하고 장기 전략 방침에 따라 현상유지를 목표로 삼고 기존 점령지를 안정화하는 한편 중국 내부엔 폭격을 통한 전력 약화를 꾀했다. 중국의 내륙 오지에는 도로도 철도도 없었고 가뜩이나 병참 능력이 형편없는 일본군으로써는 중국 내륙에서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게다가 그간 입은 손실도 무시할 수준이 못 되었으며 일본군의 자체적인 모순도 심각한 상황이었고 사기 역시 나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장제스도 이러한 점을 눈치채고 일본군의 역량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도 일본군은 수차례 국지적 공세를 펼쳐 중국군에게 많은 손실을 입히고 약탈을 자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으며 중국군의 반격과 유격대의 후방 교란으로 점령지를 유지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상가오 회전에서는 중국이 크게 승리하여 일본군 33사단과 34사단을 궤멸 직전까지 몰고가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 양국은 곳곳에서 치열하게 맞서며 서로의 전력을 깎았고 양측의 전력 공백이 생긴 곳에는 어김없이 공산당이 나타나서 해방구를 만들며 세력을 확장했다.

 

환난 사변

 

중국 공산당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민당에 충성을 맹세했고 국민당은 공산당에 국가 안의 국가와도 같은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는 등 큰 양보를 한 바가 있었지만 양측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애초에 둘은 서로를 믿지 않았는데, 장제스는 여전히 붉은 고질병을 뿌리뽑을 생각을 버리지 않았으며 마오쩌둥 역시 중국의 지배자가 되려는 꿈을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기에 공산당은 화북에서 자꾸만 세력을 확장했다. 마오쩌둥은 군사위원회가 지정한 팔로군의 활동 영역을 무시하고 화북 3성 전체에서 불법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홍군의 활동은 항일 투쟁이 아닌 공산당 통치 지역의 확대였다. 홍군은 전쟁 초기에는 옌시산의 지휘 하에 배속되어 항일 투쟁을 하였고 평형관 등에서 승전보를 올렸지만 거대한 중일전쟁을 돌아보자면 보잘것없는 국지전에 불과했다. 더욱이 공산당은 193711월 타이위안 함락 이후 옌시산 휘하를 무단으로 이탈하여 독자적 행동에 돌입하였다. 앞서 말한 해방구 확대였다. 일본군 점령지 대부분은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틈을 공산당 유격대들이 침투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 그리고 공산당은 당연히 협정에 따라 미리 파견되어 있던 국민당 유격대들을 습격하였고 국민당 유격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 일본이란 적을 앞에 두고 양측은 무력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19402월 옌시산의 산시군 12여단이 팔로군의 습격으로 섬멸당하기도 했고 산둥, 허베이 등지의 국민당 거점은 차례로 공산당의 공격을 받아 점령당했다. 1940년 말까지 공산당은 화북의 국민당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내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공산당은 수만 단위의 소규모 군대에서 140만 대군을 보유하고 1억명의 인구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의 세력은 화북을 넘어 항일과 관계없는 서북 지역으로 뻗어갔고 장강 중, 하류에 미쳤다. 19405월에 이르자 공산당은 공개적으로 항일을 중지하고 국민당의 반공파들을 공격하란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행보에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왕밍이 항전의 실질적 여력은 국민당에 있으며 항일의 역량을 위해 충칭정부에 복종함으로서 통일전선에 모든 일파를 결집시켜야 한다며 반발했지만 마오쩌둥과 류사오치는 그를 우경 투항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그를 실각시켰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힘의 70%를 역량 확대, 20%를 국민당 투쟁, 10%를 항일 투쟁에 쓸 것을 지시했고 홍군은 이에 따라 움직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이미 실각한 왕밍과 주더까지도 크게 반발했지만 마오쩌둥은 반대파들을 잔혹하게 짓밟았고 1942년의 정풍 운동을 통해 자신의 반대파들을 남김없이 숙청함으로 자신의 전제적 권력을 확립했다.

 

항일은 뒷전이고 세력 확장에만 여념이 없는 공산당의 모습에 국민당이 열받는 것은 당연했고 국민당 사무총장이 공식적으로 공산당이 항일 투쟁에서 한 것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공산당은 19408월 백단대전을 통해 자신들의 무력을 보인 바가 있었지만 마오쩌둥은 백단대전이 자신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며 크게 화를 냈고 작전을 주도한 펑더화이 등을 질책했다. 일단 1940년 시점에서 장제스가 가장 눈엣가시로 여겼던 것은 신사군이었다. 수가 장장 10만명으로 불어난 신사군은 국민당의 거점이던 난징, 상하이 등지에서 활개치고 다니며 국민당의 기반을 흔들고 다녔는데 이는 엄연한 협정 위반이었고 엄중한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장제스의 핵심 본거지인 상하이와 난징에서 공산당이 설치고 다닌다는 것은 다른 반장 세력의 반기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런 신사군을 치워버리는 것은 반장세력에 대한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19409월 군사위원회는 신사군을 황하 이북으로 물릴 것을 요구했다. 공산당은 비정규군을 옮길 수 없다고 거부했고 군사위원회는 1231일까지 신사군을 강북으로 옮기고 130일까지 황하 이북으로 옮기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바이충시는 신사군 축출에 무력이 필요하다고 단언했고 장제스는 만약 신사군이 말을 듣지 않으면 섬멸해버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더 이상 신사군이 설치게 놔두는 것은 자존심은 둘째치고 장제스 정권에 위협이 될 판이었다. 장제스가 정말로 열받았다는 것을 안 공산당은 저우언라이를 통해 안전한 퇴로를 보장받았고 이에 주더는 신사군을 철수시켰다. 만약 신사군이 협정을 지키지 않을 시에 즉각 공격하기 위해서 국민당 지휘관들은 눈에 불을 켰다. 그런데 눈바람이 몰아치는 194114일 신사군 사령부의 병력이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발걸음은 장시 성의 옛 공산당 유격 요새로 향하는 듯했으나, 그 와중에 국민당 정찰대을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저우언라이가 즉각 항의했지만 장제스는 자신이 안전을 보장했다는 이유로 공격 보고를 거짓말로 치부했다. 굶주린 신사군 1만명은 스징이란 마을에 포위되었고 신사군 사령관 예팅은 장제스에게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전보를 보냈으며 징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장제스는 두렵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1941112일 국민당 7개 사단의 맹공이 시작되었고 전투가 다 끝난 114일에 마오쩌둥은 장제스와의 휴전이 합의된 것이란 전보를 보냈다. 예팅을 비롯한 3천명이 포로가 되었고 최소 3천에서 최대 7천명이 살해되었으며 2천명만 겨우 도주에 성공했다. 포로들은 가혹하게 대우받았고 예팅은 5년간 수감되어 있다가 1945년에야 석방되었지만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이 참사는 국공합작의 숨통을 끊어놓는 계기가 된다.

 

 

출처 : 오디오와 컴퓨터
글쓴이 : 관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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