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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중일전쟁사 서론

중국 전선은 일본 내부에서 해군과 육군이 대하는 견해가 서로 달랐습니다.

일단 육군은 어디까지나 중국을 주 전장으로 생각하여 이들이 동남아시아에서 행한 모든 작전도 중국의 보급로를 끊는데 그 목표가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반면 해군은 방대한 바다가 펼쳐진 태평양을 주 전장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다와 함께 생활해야 하는 해군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전후에 해군의 생각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전쟁 중 일본군의 주요 권력은 육군이 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본 육군은 1급 부대나, 장비가 충실한 부대는 거의 중국 전선에 파견해 놓고 있었는데 실제로 남방 전선에서 1문의 대포와 1대의 전차가 아쉬운 시점에서도 육군은 중국 전선에만 장비의 공급을 계속합니다.

 

남방전선에는 충실한 장비의 공급이 전쟁기간을 통틀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당시 앞을 내다보는 안목을 지닌 이들이 많았던 해군은 태평양 건너의 미군이 일본의 큰 위협이 될 것을 예상하고 해군의 모든 전력을 태평양에 전개시키고 있었습니다.

 

중국전선은 아직도 전말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노구교 사건으로 시작하여 종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만주에는 관동군이라는 초강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이들은 한때 100만이라는 숫자를 자랑했지만 전쟁이 급박해짐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파견되어 종전시에는 20만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당시의 관동군은 기갑사단을 비롯하여 일본 육군의 최정예 부대가 모여있었고, 악독한 731부대도 관동군에 소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과 중국 파견군은 전혀 다른 부대입니다. 중국 파견군의 병력은 약 30만의 병력으로 이들을 상대한 중국군은 장개석군 300만, 공산군 250만에 달합니다. 이 많은 수의 병력으로도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당하기만 한 것은 장개석이 숙적인 공산군과의 전투를 위해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려고 노력한 것에 원인이 있습니다. 장개석은 일본과의 전투는 둘째로 치고 공산군을 압박하는 것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에 공산군은 공산군대로 장개석군과의 전투에 많은 노력을 쏟습니다. 이들 중국인은 일본의 패망은 연합군에게 맡겨두고 자신들은 중국내에서의 기반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들끼리 전투를 끝없이 벌인 것입니다.

 

또한 일본과의 전투를 벌인 중국군의 장비는 1차대전 당시의 무기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도 못가진 병사가 많았습니다. 장개석이 미국에서 파견한 중국-미얀마 전선의 사령관 스틸웰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일본군 1개사단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평시에 중국군 3개사단이 필요하고 전투시에는 5개사단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도 항상 일본군에게 당하기만 했습니다.

 

장개석군이 일본에게 반격을 한 것은 일본이 거의 패망한 1945년의 일이며, 그나마도 제한적인 지역에서만 벌어집니다. 또한 미국이 제공한 막대한 양의 보급 물자와 최신 무기들을 모두 공산군을 봉쇄 중인 부대에게만 공급하는데, 이 때문에 일본군은 언제나 약체의 중국군과만 전투를 벌였고, 항상 수적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중국군을 얼마나 얕보았는지는 지강전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본군이 유일하게 중국에서 실패한 작전인 이 전투는 당시 200개사단의 중국군에 단 2개사단으로 일본군이 공격해 들어간 전투입니다. 이 전투도 일본군이 거의 승세를 잡았었는데, 보급이 미공군의 폭격으로 끊겨 일본군은 중국군의 추격을 받으며 후퇴하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중국전선에서는 주목할 만한 전투도 벌어지지 않았고, 또한 전사에도 거의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중국 역사는 일본이 패망한 것을 자신들의 영웅적인 전투와 자신들의 끈질긴 저항 때문이라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왜곡된 역사입니다. 중국군은 일본군이 공격해오면 극히 소수의 전투만 빼고 모두 후퇴했습니다. 이때문에 일본 전사에도 중국 전선의 전투가 얼마 없는 것은 중국군의 후퇴로 기록할 만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문으로 중국군에 있던 미군들의 이야기를 보면 일본군이 공격해오자, 자신들의 눈앞에서 1개연대가 삽시간에 도망을 갔다느니, 자고 일어났더니 주위에는 온통 일본군이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중국군은 후퇴를 하면서도 전략물자를 파괴하지 않았는데, 이에 골치를 앓은 미군은 특수 폭파팀을 만들어 중국군이 후퇴한 지역에서 모든 전략물자를 파괴하는 팀을 운용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공산군이 광적으로 선전하는 팔로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것은 극히 소규모의 조우전뿐이었고, 그들이 자랑하는 게릴라 전술은 모두 장개석군을 상대로 행해진 것으로 일본과의 전투에는 장개석군보다 더욱 소극적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의 정세인데, 일본이 흔히 중국의 저항에 막혀 국력을 소비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에 병력을 주둔할 만한 보급력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서 쩔쩔맨다라는 말들이 많습니다만, 그것은 사실과는 크게 틀립니다.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옆의 관동군을 투입해서 중국 전역을 휩쓰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또한 일본 본토에는 100만의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고, 당시 미, 영군을 공격하던 물량과 부대, 항공기로 중국 전역을 휩쓰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중국의 저항이 아닌 연합국의 ABCD(America, Britain, China, Netherlands)라인이라는 4개국에 의한 조건적 해상 봉쇄와 최강을 자랑하던 100만의 관동군 역시 60만의 소련 극동군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 전선에 투입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소련군과 일본군은 국경에서 많은 충돌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노몬한에서 일본 육군은 소련군에게 항공기 120여대와 전차 100여대를 잃는 패배를 당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소련군 역시 일본군 해안 포대와의 교전에서 구축함 2척과 초계정 한척이 격침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관동군은 움직이지 못했고, 소련이 독일과 전쟁을 시작하자 관동군은 그제서야 급박한 남방으로 부대를 파견합니다.


또한 일본은 위에서 언급한 ABCD라인의 경제 봉쇄를 풀기 위해 미, 영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후에는 남방의 전황이 워낙 급박해져 더이상 중국에서 대규모의 군사행동을 일으킬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출처 : 한일역사연구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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