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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제 1차 세계대전/다음백과

제1차 세계대전/다음백과


First World War, Great War라고도 함. 유럽 국가 대부분과 러시아, 미국, 중동 및 그밖의 지역에 있는 나라들이 대거 참여한 국제적인 전쟁(1914~18).

개요
제1차 세계대전중의 유럽과 지중해 동맹국(주도국은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과 연합국(주도국은 프랑스·영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이며 1917년부터 미국도 가담)이 맞서 싸운 이 전쟁은 동맹국의 패배로 끝났고, 4개의 거대한 제국(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결과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고, 유럽의 불안정은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전쟁의 발발
1910년까지 유럽의 주요국가들은 독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3국동맹이나 프랑스·영국·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3국협상에 가맹함으로써, 잠재적 적대관계에 있는 2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났다.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 청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남부 슬라브족의 '해방'을 위해 사라예보를 순방중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것이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을 보내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경우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했다.
이같은 결정의 배후에는 독일이 러시아의 개입을 막아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7월 25일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거의 다 받아들였지만, 2가지만은 거부했다.
세르비아 관리 해임권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넘기라는 요구와 세르비아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反)오스트리아-헝가리 저항조직을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들이 직접 고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가 그것이다. 세르비아는 이 문제를 국제 중재에 맡기자고 제의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부분동원령을 내렸다.

실제로 선전포고가 이루어진 것은 7월 28일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병은 이튿날 베오그라드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항하여 부분동원령을 내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와의 접경 지역에 동원태세를 갖추자 7월 30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7월 31일에 독일은 동원령 중지를 요구하는 24시간 시한의 최후 통첩을 러시아에 보냈고, 프랑스에는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할 것을 요구하는 18시간 시한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예상대로 이 요구를 묵살했다.
8월 1일 독일은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러시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자 프랑스도 총동원령을 내렸다. 8월 3일에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8월 3~4일 밤,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했다. 그러자 영국이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영국은 세르비아와 아무 관계도 없었고 러시아나 프랑스를 위해 싸울 의무도 없었지만, 벨기에를 지키겠다는 뚜렷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8월말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와 일본 및 벨기에에 대한 전쟁 선포를 끝냈고, 세르비아와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며, 프랑스와 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해, 그리고 몬테네그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했다.
루마니아는 중립을 유지했다.
이탈리아는 1912년에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와 3국동맹을 맺었으나 침략전쟁일 경우에는 지원할 의무가 없을 뿐더러, 영국에 대항하는 경우에는 어떤 동맹에도 가담할 의무가 없었다.
1914년 9월 5일 러시아·프랑스·영국은 동맹국과 개별적으로 단독 강화조약을 맺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런던 조약을 체결했다.

1914년 8월에 전쟁이 일어나자, 애국심의 물결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고 또 얼마나 엄청난 재난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다수는 이 전쟁을 국가적 필요성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참여한 방어전으로 생각했거나, 폭력에 맞서서 정의를 지지하고 조약의 신성함과 국제적 도덕성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이상주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연합국은 전체 인구와 산업 및 군사적인 면에서 동맹국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갖고 있었으며, 대서양을 끼고 있어서 중립국(특히 미국)과 교역하는 데도 훨씬 유리했다. 반면에 동맹국은 독일의 우월한 군사기술 덕분에 초반의 수적 열세를 만회했다(연합군 병력은 통틀어 300만 명이 넘었지만, 동맹군의 총병력은 230만 명 정도였음).
따라서 1914년 8월에는 동맹국과 연합국 사이에 거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져 어느 쪽도 신속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해군력에서는 연합국이 동맹국보다 거의 2배나 우세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독일의 우수한 기술 덕분에 영국 해군의 수적 우세를 상쇄할 수 있었다.
독일은 거리측정기와 탄약고 방호물, 탐조등, 어뢰·수뢰 따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우세한 해군력으로 독일을 봉쇄할 수 있었고, 이 봉쇄는 해외물자 수입을 방해하여 독일의 군사력을 차츰 약화시켰다. 전쟁 기술의 발전은 양쪽의 작전 계획과 수행에 영향을 주었다. 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전쟁 기술의 향상으로 개발된 주요무기는 기관총과 속사 야포였다.

 

옮긴자료

 

제 1차 세계대전의 원인

유럽의 국제적인 긴장을 격화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비스마르크 실각후의 독일의 적극적인 세계정책의 추진과 이를 위한 군비확장이었다. 독일은 비스마르크시대에 있어서도 열강의 뒤를 따라 아프리카와 남태평양 그리고 중국 등으로 진출하였으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열강의 세계분할에 한 몫보자는 것이지 열강의 어느 특정 세력권이나 이권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다. 1900년경 열강의 세계분할이 거의 완료되었을 때까지 독일은 계속 강력하게 세계정책을 추구하고 기존 세력권이나 이권을 무시하면서 파고들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은 세계분할이 거의 끝날 무렵 터키 경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직접 그곳을 방문하는 등(1898)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Byzantium과 Bagdad간의 철도 부설권을 따내고 이를 Berlin과 연결하는, 이른 바 3B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려 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세계정책의 기본방향은 영국의 Cape식민지와 Cairo, 그리고 인도의 Calcutta를 연결하는 3C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의 터키 및 지중해로의 진출정책과도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국제적 불안을 세계대전으로까지 몰고 간 중요한 기본적인 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고, 장기간에 걸쳐 대립을 거듭해 오던 영국과 러시아가 서둘러 타협을 모색하고 협상을 맺은 주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아프리카의 남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모로코에는 프랑스의 세력이 침투하고 있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아직 완전히 그 지배하에 들어가지는 않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불협상을 통하여 이곳에서의 우월한 지위와 영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있었는데 바로 그 협상이 맺어진 다음해(1905) 독일 황제 빌헬름은 돌연 모로코의 Tangier항에 상륙하여 모로코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을 주장하였다(1차 모로코사건).
이 사건은 열강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다음해 국제회의에서 프랑스는 영국 등의 지지를 얻어 모로코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확인받고 고립된 독일이 물러섬으로써 일단락을 지었지만, 한때 대전의 발생을 예상시키는 긴장감을 감돌게 하였다. 그러나 독일은 모로코를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1911년 봄 모로코에서 내란이 발생하여 프랑스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하자 독일은 군함을 Agadir에 파견하여 프랑스를 위협하여 다시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전쟁 직전까지 악화하였다(2차 모로코사건). 그러나 영국이 강하게 프랑스를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에 독일은 양보하고 프랑스는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2차 모로코사건을 전후하여 분쟁의 무대는 '유럽의 화약고'라고도 일컬어지는 발칸방면으로 이동하였다.
1908년 터키의 정치적 혼란을 틈탄 오스트리아는 베를린조약으로 관리하고 있던 Bosnia와 Herzegovina를 합병하였다. 이 땅은 전부터 Serbia가 범슬라브주의의 일환이 大세르지아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탐내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대한 세르비아의 증오를 격화시키게 되었다. 1차 모로코사건 때 삼국동맹에 反하여 프랑스를 지지한 바 있는 이탈리아는 2차 모로코사건에 열강의 관심이 쏠려있는 틈을 타서 터키에 開戰하여 Tripoli를 점령하고(伊土戰爭, 1911) 다음 해 열강은 이를 승인하였다(1912). 터키의 약화와 정치적 혼란을 이용한 것은 비단 이탈리아만이 아니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Montenegro는 伊土戰爭 중에 발칸동맹을 결성하여 터키에 싸움을 걸어 1차 발칸전쟁이 발생하였다(1912). 다음해 터키는 런던조약에서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주변의 땅을 제외한 유럽대륙 내의 영토와 크레타섬을 발칸동맹국들에게 양도하였다. 그러나 새로 획득한 영토의 분배과정에서 불가리아 소유가 너무 많다하여 2차 발칸전쟁이 발생하였다(1913). 고립된 불가리아는 크게 패하고 그리스는 크레타를 비롯한 에게해의 여러 섬과 마케도니아의 일부를 얻고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도 그 영토를 확장하였다(Bucharest조약).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영토확장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Albania를 병합하려는 것은 막았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적대감정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한편 열강의 제국주의정책의 추구로 국제관계가 긴장하고 서로 다투어 군비확장에 열중하는 상황이 전쟁의 위기를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1899년 러시아황제의 제창으로 군비제한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헤이그평화회의(Hague Peace Conferecne)가 열렸다. 29개국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 러시아황제가 의도한 자국의 군사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군비제한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국제중재재판소의 설립, 독가스 사용금지, 전쟁포로의 대우문제 등에 관한 법규가 채택되었다. 1907년에 2차 헤이그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주된 의제인 군비제한에는 역시 실패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전개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암살자 프린치프는 세르비아의 테러 조직에 연계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정부가 암살의 배후라고 믿고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전쟁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으로 일어났지만, 근본적으로는 19세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부터 싹텄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난 주요 원인은 민족주의 대두, 군사력 증대, 식민지 경쟁, 군사동맹체재 등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세르비아를 지원해 연합국을 형성했고,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로 구성된 동맹국이 대항했다. 다른 국가들도 잇달아 연합국이나 동맹국에 가담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결과
제1차세계대전으로 인한 피해는 엄청났다.

군인들 가운데 1000만명이 죽고, 2100만명 정도가 부상당했다. 재산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은 프랑스와 벨기에였다. 전쟁으로 공장, 다리, 철로가 파괴되었으며, 서부전선은 탄피, 참호, 화학 물질로 황폐해졌다. 그리고 대전으로 인해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는 급변했다.
(1) 정치
제1차세계대전은 오스만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정부의 토대를 흔들어놓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같은 독립 공화국과 이탈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의 영토 일부로 나누어졌다. 러시아와 독일도 폴란드에 영토를 넘겨주었다.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서 독립했다. 오스만제국의 아랍지역은 프랑스와 영국의 통제를 받고, 나머지 지역에서 터키공화국이 세워졌다.
(2) 경제
유럽 경제는 제1차세계대전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교전국은 3370억 달러 정도의 손해를 보았다. 또한 필수품을 조달하려고 특별 화폐를 찍어내는 등 화폐 공급을 늘려 전후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전쟁부채 문제는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했다. 연합국은 독일에서 전쟁배상금을 받아 부채를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배상금은 패전국의 경제를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승전국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반면 미국은 경제 강국으로 떠올랐다.
(3) 사회
제1차세계대전으로 엄청난 사회변화가 일어났다. 1920年대에 프랑스는 출산율이 낮아 인구가 줄어들었고,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또한 정부와 국경의 변화로 난민이 발생했다. 제1차세계대전 후에 농민이 농토로 돌아가는 대신 도시에 정착해 도시가 팽창했다. 남성이 참전한 뒤에 공장과 사무실에서 일자리를 얻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얻는 새로운 독립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쟁 후에 많은 나라가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었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인한 파괴와 유혈은 유럽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놓았다.

 

출처 : 한일역사연구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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