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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스크랩] 제2차 세계대전(XⅢ) 지중해 전역(下) 전세역전, 미ㆍ영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전역 승리와 이탈리아 침공

출처: http://winlee96.blog.me/220434895890


북아프리카 전역의 전세역전


롬멜의 한계, 알람할파 전투의 패배


AD 1942년 8월 영국의 제8군 사령관으로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부임할 때 즈음 북아프리카의 전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보급 면에서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영국에게 지중해 제해권을 내어주었기 때문에 수송선이 종종 격침되자 멀리 후방의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물자를 수송하고 그곳에서 에르빈 롬멜의 독일 아프리카 기갑군이 진출한 엘 알라메인까지 무려 1,000~1,900km나 육상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영국은 엘 알라메인까지 고작 100km 떨어져 있는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통해 곧바로 보급을 받았다. 더구나 독일이 소련과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보급의 우선 순위를 모두 그쪽으로 돌렸기 때문에 북아프리카로 보내지는 보급품 자체가 현저히 부족해져 항상 탄약과 연료 여유분을 염두에 둬야 했으나 영국은 미국의 무기대여법(랜드리스)을 통해서 각종 장비와 물자를 충족하게 보급받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군과 영국군의 보급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롬멜은 아직까지 아프리카 기갑군 역시 재정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사령관이 교체되는 어수선한 틈을 타고 8월 30일 공격을 감행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 등장한 미국의 M3 그랜트의 모습


롬멜은 연료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이번에도 최대한 신속하게 공격하고자 엘 알라메인 남쪽의 좁은 지역을 단숨에 돌파하여 카이로를 향해 진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영국군이 사전에 매설한 지뢰를 제거하는 데 하루를 꼬박 소비하였고 영국 포병의 포격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더구나 허비한 시간을 만회하고자 당초 계획한 데로 알람 할파 고지를 우회하는 대신에 곧바로 통과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영국의 목고메리가 사전에 예상했던 진로였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 놓은 미국제 M3 그랜트 중전차의 매복공격에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결국 승기를 잃어버린 롬멜은 총 49대의 전차를 상실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비록 손실된 전차의 수는 영국군이 여전히 더 많았지만 롬멜의 진군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몽고메리를 주목받게 만들었다. 또한 이번 전투를 통해서 그동안 신출귀몰하고 대담무쌍한 작전으로 영국군을 항상 궁지로 몰아 넣었던 롬멜이 이제는 보급의 불충분함 때문에 작전의 의외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이에 몽고메리는 장비와 군수품이 충분히 확보된 후 소모전으로 롬멜을 상대하겠다는 자신의 기본 전략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었고 영국 총리 처칠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전차, 공군력의 두세배의 우위를 점할 때까지 방어에만 충실하기로 결정하였다.


몽고메리의 반격,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몽고메리의 예상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영국의 제8군과 독일의 아프리카 기갑군 사이의 전력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롬멜은 독일 본국에 월 3만톤의 물자가 필요하다고 요청하였으나 실제로 보급받은 것은 6천톤에 불과하였다. 이에 반해 영국군은 추가병력이 속속 도착되고 미국으로부터 신형 전차를 비롯한 장비와 물자 보급이 충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AD 1942년 10월이 되자 영국군은 병력 19만5천명, 중형전차 1,029대를 보유한 반면에 독일군은 병력 10만4천명과 중전차 469대에 불과했다. 더구나 영국군이 보유한 전차 중 가장 최신형 중전차인 미국제 M4셔먼과 비슷한 성능을 보유주던 독일의 4호전차는 30대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무모할 정도로 공격적인 성향을 보여 온 롬멜조차도 현실을 인정하고 엘 알라메인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마음먹고 영국군이 진격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길목에 폭 60㎞, 종심 8㎞에 이르는 50만발의 지뢰를 매설하였다. 이 지역은 '악마의 정원'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2 Battle of El Alamein) 직전 양측의 배치현황


롬멜은 악마의 정원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부족한 병력과 물자를 직접 요청하러 독일 본국으로 잠시 귀국했으나 그동안 저혈압과 이질, 위장병으로 건강이 악화되고 피로까지 누적된 상황에서 병환이 발생하면서 반강제적으로 요양을 취하게 된다. 대신하여 북아프리카 전역의 지휘권은 프랑스 전투와 발칸 반도 전역, 소련에 대한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전하였던 게오르그 슈툼메가 잠시 맡기로 하였다. 몽고메리는 자신이 기다리던 기회가 드디어 도래했음을 직감하고 10월 23일 독일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시작하였다.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의 공격은 AD 1942년 10월 23일에 개시되었다. 영국군 폭격기가 폭격을 시작했고 영국의 대포 900문도 포격을 실시하였다. 이 때문에 롬멜이 심혈을 기울여 구축한 악마의 정원도 상당부분 파괴되었다. 그러나 공중 폭격과 대포 포격 만으로는 악마의 정원을 모두 무력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공병들이 투입되어 지뢰제거에 나섰으나 악마의 정원 뒤에 포진한 88mm대공포와 전차포의 포격에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하지만 영국의 공중 폭격과 포병 포격이 독일군의 통신선을 파괴하는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에 독일의 슈툼메가 직접 지휘차에 탑승하여 전선확인에 나서야 했고 롬멜과 달리 슈툼메는 별다른 호위부대를 대동하지 않으면서 오스트레일리아 군의 기관총 공격에 의한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독일군의 지휘권은 빌헬름 리터 폰 토마가 대신 맡았고 독일 본국에서는 서둘러 요양 중이던 롬멜을 북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냈다. 이렇게 독일 아프리카 기갑군의 지휘체계에 문제가 발생했지만 영국의 제8군 역시 악마의 정원을 돌파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10월 24일과 25일에 걸친 전투는 대혼전의 양상이 되어 영국군이 사상자 6천명과 전차 손실 130대의 피해를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승패를 갈음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철수해야 한다는 휘하 참모과 장군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아직도 사용가능한 전차가 900대가 있다. 그것들은 소모품이다"라는 말과 함께 뚝심있게 공격을 밀어붙였다. 10월 25일 롬멜이 전장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독일군의 탄약과 연료 비축분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비록 롬멜은 10월 26일 영국의 오스트레일리아군(제9사단)이 악마의 정원을 북쪽에서 돌파하자 긴급히 예비병력인 제90경기갑사단을 투입하였으나 이들에게 이제 더이상의 연료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AD 1942년 10월 26일 전투 진행모습

 

11월 2일 새벽 영국의 대포 360문의 포격과 함께 제9기계화여단의 전차들이 돌진하면서 보병의 진격로를 개척하였다. 독일군이 대전차포를 이용하여 영국의 제9기계화여단을 막아내었으나 몽고메리는 다시 2개 여단의 전차들을 투입하였다. 롬멜도 2개의 기갑사단을 증원하며 방어에 나섰으나 전투가 거듭될 수록 파괴되는 독일군의 전차가 늘어났고 마침내 35대까지 줄어들었다. 결국 롬멜도 더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고 히틀러의 "무조건 사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총통의 명령보다 병사들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며 더이상의 병사들 희생을 막기위한 퇴각을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서쪽으로 400km 떨어진 샬롬파 할파야 고개까지 후퇴한 후 병력을 매복시켜 영국의 추격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는데 악천후로 영국의 공군 폭격이 제한되는 행운까지 겹쳤기 때문에 롬멜은 잔존 병력을 이끌고 영국군의 추격에서 무사히 벗어났다.

 

AD 1942년 11월 2일 독일의 방어선을 돌파한 영국군의 모습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군은 무려 1만3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특히 악마의 정원을 돌파해야 했던 영국의 전차들의 피해가 매우 극심했는데 상당수 기갑여단이 아예 전멸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어떤 영국군 장교는 "이겼는데도 이겼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의 엘 알라메인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독일의 기갑부대에게 역시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힌 것도 사실이었다. 비록 몽고메리가 롬멜의 매복을 우려하여 잠시 추격을 중단하였지만 병력을 수습한 이후에는 추격을 개시하였다. 


미군의 참전, 횃불 작전


당시 동부전선의 전황이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이어지며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로 이어지자 소련의 스탈린이 연합군에게 동부전선 이외의 제2전선을 구축하도록 거듭 요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미군이 유럽 진출의 발판으로 북아프리카에 병력을 상륙시키기로 결정하였고 영국군이 튀니지를, 미군이 알제리와 모로코를 점령하는 '횃불작전'이 계획되었다. 11월 8일 총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중심으로 조지 S. 패튼의 제2기갑사단과 그 밖에 제3보병사단, 제9보병사단을 포함한 도합 3만 5천명의 미군이 모로코의 사피, 페달라, 케니트라에 상륙하였고 이를 방어해야 하는 비시 프랑스 군은 도합 6만명 정도가 있었으나 미군에 대하여 저항과 항복으로 나뉘며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카사블랑카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의 군함이 모두 파괴되었고 미군은 11월 9일 모로코를 함락시킨 데 이어 11월 10일 알제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비시 프랑스 군은 미군에게 항복을 선언하였다.

 

미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지점


튀니지 전역과 롬멜 신화의 붕괴


롬멜에 대한 추격을 시작한 영국군도 11월 9일 시디 바라니를 탈환하고 리비아로 진격하였고 11월 11일에는 그동안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었던 토브룩의 최종적인 주인이 되었다. 롬멜은 정신없이 후퇴를 거듭하였고 이를 추격하는 영국의 제8군이 11월 20일에는 벵가지를 점령하였다. 모로코와 알제리가 미군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아프리카 기갑군 역시 더이상의 병력과 장비 보충 없이는 리비아를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롬멜이 히틀러에게 튀니지로 후퇴하는 것을 승인하도록 요청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내내 후퇴를 병적으로 싫어하던 히틀러가 이를 승낙할 리 없었다. 12월 8일 그렇게도 롬멜이 바라던 병력 지원을 뒤늦게 결정하였으나 히틀러는 신설된 제5기갑군을 롬멜의 아프리카 기갑군과 합류시키지 않고 튀니지로 파견하여 그곳에 주둔 중인 이탈리아의 제1군과 아프리카 집단군을 이루고 알제리를 점령한 미군으로부터 튀니지를 방어하도록 하였고 그 지휘를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에게 맡겼다. 대신에 롬멜에게는 보유한 병력 만으로 무조건 리비아를 사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롬멜의 튀니지 퇴각 현황


독일 본국으로부터 아무런 증원을 받지 못한 롬멜의 아프리카 기갑군을 상대로 12월 영국의 제8군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영국군은 12월 17일 엘 아게일라 방어선을 돌파했고 12월 25일 시르테가를 점령하였으며 이듬해 1월 23일에는 마침내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에 입성하였다. 결국 롬멜은 2월 4일 리비아를 포기하고 이탈리아 잔존 병력과 함께 튀니지로 후퇴하여 프랑스가 예전에 구축한 마세트 방어선까지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미군과 영국군의 협공 속에서도 튀니지를 지켜내었고 특히 2월 19일에는 훈련과 경험이 부족한 미국의 제2군단을 상대로 카세린 고개 전투에서는 오히려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롬멜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이미 전황을 뒤집기에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3월 6일 3개의 독일 기갑사단과 9개의 이탈리아 보병사단을 투입하여 메드닌에서 영국의 제8군을 몰아내기 위해 펼친 회심의 '카프리 작전'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제 롬멜은 튀니지에서 철수하는 것만이 잔존 병력이라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이에 3월 9일 롬멜이 직접 히틀러를 만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본영까지 히틀러는 찾아갔으나 히틀러는 다시 한번 롬멜의 철군 요청을 거절했고 대신에 롬멜을 그대로 잔류시킨 후 아르님에게 아프리카 집단군의 모든 잔존병력을 지휘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북아프리카에서 선전을 거듭하며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롬멜의 신화가 무너져 내렸다.


미ㆍ영 연합군의 승리


롬멜이 떠난 뒤 영국의 몽고메리는 3월 16일 '퓨질리스트 작전'을 전개하였다. 3월 17일 양동작전으로 미군이 튀니지의 서쪽에서 가프사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3월 23일에는 이제는 조지 S. 패튼으로 지휘관이 바뀐 미국 제2군단의 카세린으로 진격하였다.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 역시 3월 20일부터 튀니지 남쪽에서 마레트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3월 26일에 마레트 방어선의 북쪽 요충지인 테바가 회랑을 장악하고 독일-이탈리아 군을 가베스 만까지 후퇴시켰다. 그리고 4월 6일에 펼쳐진 와디 아카리트 전투에서 다시한번 승리하면서 가베스로부터 엘 함마까지 이어지는 가베스 회랑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 독일-이탈리아군의 패배는 시간문제가 되었고 이제 연합군의 목표는 튀니지에서 독일-이탈리아 군의 철수를 막는 것으로 바뀌었다. 튀니지 북부의 주요 항구를 점령하기 위한 '불칸 작전'이 개시되어 5월 7일 영국군이 튀니스를, 미군이 비제르트를 각각 장악하였고 독일군의 공중보급을 차단하기 위한 '플랙스 작전'이 이어졌다. 그러자 독일의 아프리카 집단군 사령관 아르님도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5월 13일 연합군에게 공식적으로 항복하였다. 이때 총 27만 5천명이 포로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 독일군이 12만 5천명이었는데 독일의 히틀러가 이미 패전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도 철수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북아프리카에서 병력과 물자만 낭비하고 만 것이었다. 

연합군의 튀니지 진격모습


독일의 비시 프랑스 점령, 안톤 작전


한편 AD 1942년 11월 8일 미군이 횃불작전으로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인 모로코와 알제리를 점령하자 독일에서는 미군이 이어서 남프랑스에 상륙하는 것은 아닌 지 우려하게 되었다. 이미 독일은 지난 AD 1940년 프랑스 전투 종료 이후 비시프랑스의 정부 수립을 인정하면서 연합군이 비시 프랑스를 침공하는 경우를 이를 방어하기 위한 '아틸라 작전'을 비밀리에 수립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비시 프랑스의 배신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군의 협조를 얻어 11월 10일 비시 프랑스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안톤 작전을 실시하였다. 대서양 연안을 방어하던 독일의 제1군이 스페인 국경을 따라 이동했고 남서프랑스 해안을 방어하던 독일의 제7군이 비시와 툴롱을 향해 진격하였으며 이탈리아군은 리비에라와 코르시카를 점령하였다. 비록 5만여명의 비시 프랑스군이 툴롱 주변에서 방어선을 펼쳤지만 정작 독일군이 나타나자 그대로 항복하고 말았고 툴롱의 프랑스 해군만은 자신의 함대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 자침시켜버렸다. 이렇게 하여 형식적으로나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했던 비시 프랑스는 이제 독일의 제9군이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탈리아 전역


시칠리아 침공


북아프리카 전역을 마무리한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은 향후 진로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소련의 스탈린이 유럽에서 제2전선을 형성해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측은 독일에 가까운 프랑스 해안에 병력을 상륙하는 방안을 제안하였으나 영국은 프랑스 상륙에 따른 많은 병력 손실을 우려하여 이탈리아 상륙을 주장하였다. 결국 절충안으로서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가까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을 우선 확보하는 방안이 추진되었는데 시칠리아는 지정학적으로 지중해 중간에 위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프랑스 지역과도 가까워 남프랑스 상륙작전을 위한 교두보로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지못해 미국도 시칠리아 침공에 동의하였으나 어디까지나 북아프리카 전역의 연장선임을 강조했다. 연합군의 상륙작전은 '허스키 작전'으로 명명되었고 작전개시일은 AD 1943년 7월 10일 선택되었다. 패튼의 미 제7군과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으로 구성된 해롤드 알렉산더의 연합군 제15집단군이 각각 시칠리아 중남부와 동남쪽 해안에 상륙하는 사이에 아서 테더의 연합군 공군과 앤드류 커닝험의 연합군 해군이 엄호하기로 하였다. 이 중에서 미 제7군은 AD 1943년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미군을 재편하여 만든 부대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미국 역사상 최초의 야전군이었다. 당시 시칠리아 섬에는 이탈리아군 20민명과 독일군 3만2천명, 그리고 독일 공군의 지상참모단 3만명이 주둔해 있었다. 그 중에서 전투의지가 있었던 것은 독일의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과 제15기갑척탄병 사단 뿐이었다.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은 헤르만 괴링이 내무부 장관 시절에 거느리고 있던 경찰 조직을 모태로 설립된 부대로서 헤르만 괴링이 공군 총사령관이 된 후에는 주로 지상 병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군 소속으로 변경된 부대였다. 그리고 제15기갑척탄병사단은 북아프리카 전역에 참전하였던 독일군 중 생존자를 중심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시칠리아(Sicily) 위치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모습


7월 10일 연합군의 140대의 글라이더와 공수부대 3천명의 강하작전으로 허스키 작전이 개시되었다. 비록 강하 작전은 때마 침 불어온 강풍으로 큰 효과를 보이지 못했지만 상륙작전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이 시칠리아 동남부에 상륙하여 메시나를 목표로 북상하였고 페튼의 미 제7군이 남서쪽에서 팔레르모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독일의 해르만 괴링 기갑사단과 이탈리아 군이 상륙한 연합군을 포위하였으나 연합군은 해상의 함포 지원과 상륙시킨 대포의 포격으로 이를 돌파하였다. 이 전투는 독일 전차와 연합군 함대의 함포가 서로 포격을 주고 받는 특이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군이 담당한 섬의 서부지역이 먼저 붕괴하여 패튼의 제7군이 7월 22일 팔레르모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공격방향을 전환하였고 몽고메리의 제8군도 동쪽 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에트나 산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이탈리아-독일 군이 에트나 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펼쳤으나 연합군이 소규모 상륙작전으로 메시나까지 위협하자 퇴각로가 차단되는 것을 우려하여 결국 8월 11일 메시나 해협을 건너 이탈리아 본토로 철군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비록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독일군 10만명과 차량 1만대가 이탈리아 본토로 후퇴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 이렇게 무사히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한 이탈리아-독일 군은 이탈리아 본국의 부대와 합류한 후 메시나 해협 연안에 해안포 수백 대가 설치하고 이어질 연합군의 이탈리아 상륙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무솔리니의 실각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로 이탈리아 군은 졸전을 거듭하면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권위도 점점 떨어졌다. 이미 AD 1942년부터 연합군 공군에 의해 이탈리아 곳곳이 폭격당하고 있었고 연합군이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뒤에는 연합군의 이탈리아 상륙에 전전긍긍하며 독일의 히틀러에게 소련과 강화조약을 맺고 영국-미국 연합군과의 전쟁에 집중해줄 것을 간청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소련과의 전쟁을 포기하지 않고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이 현실로 다가오자 마침내 이탈리아 일각에서 무솔리니의 실각이 추진되었다. 그들 중에는 무솔리니의 거병 때부터 함께한 디노 그란디와 무솔리니의 사위인 갈래아초 치아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7월 24일 파시스트 대의회에서 그란디의 주도로 무솔리니 해임안이 상정되었고 19대 7의 표결로 가결되었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대의회가 단순한 자문기구이므로 자신을 해임할 권한이 없다며 반발하였으나 같은 날 오후 이탈리아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직접 무솔리니를 불러 해임을 통보하고 즉각 근위대를 동원하여 무솔리니를 체포하였다. 그리고 후임 총리로 군부의 동요를 막기위해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의 이탈리아군 총사령관과 이후 참모총장을 역임한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임명하였다. 체포된 무솔리니가 캄포 임페라토레에 구급되었고 신임 총리가 된 바돌리오는 파시스트당을 해산한 후 비밀리에 연합국과의 휴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처형후 거리에 내걸린 무소리니와 그의 아내 클라라 페타치

(후에 관에 넣어졌으나 시민들이 침을 뱉을 수 있도록 관 뚜껑을 닫지않았다고 한다) 


미ㆍ영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


당초 미국은 시칠리아 침공시 단순히 북아프리카 전역의 연장선이며 프랑스 방면의 상륙이 본래의 작전임을 강조하고 있었 다. 그러나 영국의 처칠은 이탈리아를 조기 탈락시켜서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할 경우 중동과 소련으로 이어지는 보급선이 안정화됨을 부각시키며 지속적으로 이탈리아 본토 상륙을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AD 1943년 7월 24일 이탈리아 내부에서 정변이 일어나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7월 25일 새로운 바돌리오 내각이 연합국과의 비밀협상을 요청해오자 이에 고무되어 9월 전격적인 이탈리아 침공이 결정되었다. 사실 미국으로서도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에 투입되는 병력과 물자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AD 1943년 안으로 서유럽에 제2전선을 구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침공작전은 당초 거리가 짧은 메시나 해협을 건너는 것과 타란토 항으로 침공하는 것의 두 가지 방안이 동시에 추진되기로 했지만 이탈리아의 새 정부와 조속한 협상을 위해 나폴리 항을 점령하는 방안이 추가되었고 나폴리 항을 장악하기 위한 상륙지점으로 살레르노가 선택되었다.

AD 1943년 9월 3일 본격적인 이탈리아 침공을 위한 양동작전으로 영국의 제8군 예하 제13군단이 메시나 해협을 건너 레조 디 칼라브리아에 상륙하는 '베이타운 작전'이 실시되었다. 당초 몽고메리는 독일군이 없을 경우 단순한 병력 낭비라며 이 작 전을 반대하였는데 그의 생각이 옳았다. 독일의 케셀링이 이탈리아 남단의 연합군 공격이 주공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하고 그 지역의 독일군을 미리 후퇴시켰기 때문이었다. 워낙 거리가 짧았던 탓에 상륙정으로 곧바로 상륙에 성공하였다. 9월 8일 미군 제82공수사단이 로마에 강하하여 맥스웰 D. 테일러가 바돌리오와 휴전에 합의하는 데 성공했다. 9월 9일 타란토를 침공하는 영국의 제1공수사단에 의한 '슬랩스틱 작전'이 실시되어 타란토 역시 별다른 저항없이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살레르노에 상륙하는 마크 클라크의 미 제5군의 '애벌런치 작전'이 동시에 실시되었으나 이 지역은 로마와 가까웠던 만큼 독 일군의 저항을 만났다. 독일군은 9월 12일부터 9월 14일에 걸쳐 결렬히 저항하였으나 연합군의 돌파을 막지 못할 것으로 판 단하고 지연작전을 펼치며 후퇴하였다. 살레르노의 교두보가 안전하게 확보되자 9월 19일 영국군이 나폴리로 진격하기 시작 했고 새로 상륙한 미 제3보병사단이 9월 22일 아체르노를, 9월 28일 아벨리노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리고 연합군은 10월 1일 나폴리에 입성한 데 이어 10월 6일에는 나폴리 북서쪽의 볼투르노 강 하구를 장악하였다. 이렇게 하여 연합군의 이탈리아 상륙작전은 대성공으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 모습


독일의 무솔리니 구출과 살로 공화국 성립


히틀러는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점령한 이후 연합군의 다음 목표가 이탈리아인지, 그리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양 측을 모두 방어하기 위해 이탈리아에는 8개 사단을 배치하고 공군 지휘관 알베르트 케셀링에게 지휘를 맡겼고 독일 본군에 잔류하였던 롬멜을 다시 기용하여 그리스 방어를 담당하는 E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가 동맹에서 이탈하게 되자 케셀링은 즉각 독일군을 움직였고 만약 케셀링의 작전이 실패하여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국경을 넘어서 독일까지 침공하는 것을 막기 위한 B집단군 지휘관으로 롬멜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케셀링은 육군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대처로 이탈리아 군을 차례로 무장해제 시킨 뒤 이탈리아 중부까지 장악하였다. 비록 파돌리오는 미군의 살레르노 상륙과 동시에 연합군과의 휴전을 발표하였으나 로마를 장악하려는 연합군의 공수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및 왕실을 데리고 독일군을 피해 로마를 떠나야 했다.

무솔리니의 감금된 위치를 독일의 첩보기관이 찾아내자 히틀러는 9월 12일 공수부대와 친위대 72명으로 구성된 오토 스코르체니의 SS특수부대를 파견하여 감금된 무솔리니를 구출하였고 독일군이 장악한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무솔리니를 정부수반으로 하는 위성국인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은 살로를 수도로 하여 '살로 공화국'으로 통칭된다. 이후 무솔리니는 자신을 실각시킨 사위 치아노를 비롯한 정적들을 대거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으나 이제부터는 독일군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로마를 탈출한 파돌리오 정부는 연합군이 장악한 브린디시로 피신하였고 공식적으로 연합군과의 휴전협정을 조인한 후 다시 10월 13일 몰타섬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살로 공화국(Italian Social Republic)의 영토현황
(녹색 부분은 독일군이 직접 통치한 지역)


이제 이탈리아에 들어온 연합군을 막아야하는 입장이 된 독일의 케셀링은 이탈리아의 지형이 강이 많고 산악으로 이루어져 전차 및 차량 기동에 제한이 많은 점을 이용하여 로마 남쪽의 상그로 강과 가리글리아노 강을 이용한 구스타프 방어선을 구 축하였다. 그리고 구스타프 방어선의 전후로 베른하르트 방어선과 히틀러 방어선을 추가로 건설하였고 로마를 방어하는 카 이저 선까지 만들면서 총 4겹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케셀링의 생각은 적중하여 연합군은 포장도로가 없어 진창이 된 지형에 고전하며 이후 3개월 동안 구스타프 선도 돌파하지 못하고 말았고 손쉽게 끝날 것으로 보였던 이탈리아 전역이 점점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케셀링이 연합군의 진격을 잘 막아내자 히틀러는 케셀링을 이탈리아 방어를 위한 C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이탈리아 방어를 전담시켰고 롬멜의 B집단군은 프랑스 북부로 이동시켜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의 휘하에 들어가도록 했다. 룬트슈테트는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남부 집단군을 지휘했지만 소련의 역공에 철군을 요청하다가 히틀러의 분노를 사서 AD 1941년 12월 해임된 후 이듬해 3월부터 다시 서부전선의 지휘를 맡고 있던 상태였다.

독일의 이탈리아 방어선 구축모습


테헤란 회담


AD 1943년말 전쟁이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자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미국의 프랭클 린 D.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소련의 이오시프 스타린 사이의 3거두회담이 열렸다. 테헤란 회담의 목적 은 향후 전쟁 진행방향과 연합군이 승리할 경우의 전후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우선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이 서유럽에서 제2의 전선을 형성할 경우 이와 보조를 맞춰 소련군도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비록 미국과 영국이 이탈리아에 이미 병력을 상륙시켰지만 이탈리아 만으로는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충분히 끌어낼 수 없다는 판단 하에 AD 1944년 5월에 프랑스에 직접 병력을 상륙시키는 '오버로드 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은 오버로드 작전의 총괄로 아이젠하워를 임명하겠다고 영국에게 통보하였다.


전후 처리와 관련해서는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이전에 획득했던 폴란드와 핀란드 영토를 계속 보유하고 추가적으로 발트해 연안의 독일 영토인 동프로이센 지방도 병합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러나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입장을 생각해야 하는 영국의 처칠은 폴란드가 독립국가로 남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대립하였다. 다만 폴란드 문제로 연합군의 공조가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은 영국 실무진들이 폴란드 문제를 꺼내지 않도록 하면서 폴란드의 처리는 미뤄지게 되었다. 이 밖에 소련과 영국이 사실상 분할통치하고 있던 이란의 경우에는 전후 독립시킨 후 경제원조를 제공하기로 하였고 독일과의 전쟁을 마친 후에는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테헤란 회담에서 만난 연합군 세 수장의 모습
(좌측: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 중앙: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 우측: 영국의 윈스턴 처칠)


안치오 상륙작전


이탈리아는 지형적으로 아펜니노 산맥이 종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구축한 구스타프 방어선 역시 아펜니노 산맥에 의해 동서로 나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연합군도 동서 양쪽으로 나뉘어 북쪽으로 진격하였다. 당초 연합군은 9월이면 구스타프 방어선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비포장도로와 악천후, 독일군의 교묘한 지연전에 휘말려 기계화부대로 구성된 연합군의 진군이 더디게 이어졌다. 12월이 되어서야 겨우 구스타프 방어선에 도달하였으나 견고하게 구축된 방어선 앞에 전투는 교착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AD 1944년이 되자 연합군의 서유럽 상륙작전인 '오버로드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의 몽고메리와 미국의 아이젠하워가 영국으로 향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서둘러 이탈리아 전역을 마무리짓기 위한 총공세를 시작했다.


아펜니노 산맥의 서쪽에서 구스타프 방어선에 독일군이 집중하는 사이에 안치오 방면으로 기습상륙하여 로마를 점령함으로 써 독일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하는 '싱글 작전'이 AD 1944년 1월 22일 시작되었다. 처음에 작전이 성공을 거둬 총 3만6 천명의 병력과 3천2백대의 차량이 성공적으로 상륙하였으나 연합군의 상륙한 부대를 지휘하던 미 제4군단장 존 포터 루카스는 곧바로 로마로 진군하지 않고 안치오의 해안교두보를 확보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실책을 범했다. 그 사이 시간을 번 독일의 케셀링은 편성 중이던 제4공수사단과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의 일부를 로마로 향하는 중요지점인 알반 언덕으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시키고 안치오에 상륙한 연합군을 포위하였다.

안치오(Anzio) 상륙작전의 전개모습


케셀링은 안치오에 상륙한 연합군이 바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루카스가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임을 간파하였다. 독일 공군이 안치오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과 해상의 함대에 대한 폭격을 감행했고 1월 23일 영국군 구축함 1척이 폭뢰를 맞고 격 침되자 나머지 연합군 함대도 해안에서 멀리 물러나야 했기 때문에 함포 사격 지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연합군 공군기 역시 투입되면서 독일 공군기의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고 특히 1월 30일 북이탈리아의 공군기지를 강타하면서 독일 공군기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하지만 안치오 해안에 대한 독일군의 지상 포위망이 굳건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오히려 루카스는 안치오의 교두보를 유지하기 위한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결국 루카스는 2월 22일 해임되었고 그 후임으로 미 제3보병사단장 루시안 트러스코트가 임명되었으나 이후에도 전황은 좀처럼 타개되지 않았고 안치오를 둘러싼 한치의 양보없는 전투가 5월까지 전개되었다.


몬테 카시노 전투


아펜니노 산맥의 동쪽에서는 독일군 공수부대가 지형이 험한 몬테카시노에서 저지선을 펼쳤다. 몬데카시노에는 중세부터 자 리한 오래된 베네딕트 수도원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가치있는 고문서가 많아 독일군의 케셀링이 수도원을 군사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연합군에게도 그래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AD 1944년 1월 22일 연합군이 펼친 정면공격이 독일군의 매복공격으로 실패로 돌아간 후 연합군 측에서는 고지대에 위치한 수도원에 독일군 관측병이 있다고 의심했다. 이에 2월 15일 연합군이 수도원 일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명분을 얻은 독일군이 수도원을 방어거점으로 삼았다. 다시 3월 15일 연합군 공군이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여 유서깊은 시설들을 파괴하였으나 오히려 붕괴된 건물 폐허가 독일군에게 엄폐물을 제공하였다. 3월 22일 연합군이 3번째로 공세를 감행하였고 망명정부의 국제사회 발언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폴란드의 제2군단이 많은 피해를 무릅쓰고 큰 활약을 보였으나 엄청난 사상자만 발생시킨 채 또다시 물러나야 했다.

이렇게 독일군은 몬테카시노를 5월까지 지켜냈으나 연합군의 병력이 점점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한계에 이르고 있었 다. 케셀링은 베네딕트 수도원를 포기하고 구스타프 방어선을 포기하고 그 뒤의 히틀러 방어선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5월 18일 다시 폴란드의 제2군단이 선봉에 선 연합군이 다시한번 돌격하여 격렬한 전투 끝에 수도원과 그 주변 지역을 마침내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파괴된 베네딕트 수도원은 나중에 다시 재건되었고 케셀링이 보존하고자 한 고문서들은 미리 바티칸으로 옮겨져서 무사했다고 한다.


몬테 카시노 전투의 전개모습(오른쪽)


로마 점령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이 히틀러 방어선으로 물러났으나 그곳은 구스타프 방어선에 비해 견고하지 못했다. 독일군이 물러난 뒤에도 험난한 지형 때문에 구스타프 방어선을 지나가는데 잠시 지체된 연합군이 5월 23일 히틀러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군이 오른쪽을 공격하고 캐나다 기갑사단이 중앙을 맡았다. 결국 5월 24일 캐나다 기갑사단이 중앙을 관통하고 이튿날 폴란드 군단 역시 방어선 돌파에 성공하면서 이제 로마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안치오의 연합군도 AD 1944년 5월 23일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한 대규모 공세인 "다이아뎀 작전"이 개시하였다. 연합군의 계획은 치스테르나로 진격하여 알바노 언덕의 우측으로 우회하여 로마로 북상하는 것이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로마 근처의 상륙작전과 가짜 셔먼 전차를 엉뚱한 곳에 배치하는 기만 작전이 펼쳐졌다. 연합군의 작전이 성공하여 5월 25일 치스테르나를 함락시켰고 히틀러 방어선을 돌파한 동쪽의 영국군이 먼저 로마를 점령할 것을 우려한 미국의 클라크는 서둘러 로마로 진격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군이 6월 5일 로마에 무혈입성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미국의 클라크가 로마 점령에만 몰두하면서 독일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포위섬멸할 기회를 포기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로마 북쪽의 고딕 방어선으로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

 

로마에 입성한 연합군의 모습





[참고] 위키백과 에르빈 롬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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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일역사연구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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