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inlee96.blog.me/220485965480 일본의 이호작전 실패와 연합함대 사령장관 아마모토의 격추 일본군의 이호작전 파푸아 전역과 과달카날 전역에서 잇달아 패배한 이후 비스마르크 해전마저 참담하게 대패하자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대규모 비행기 공습을 이용한 제공권 장악으로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호(い号 ) 작전'이라고 명명된 이 작전을 위해 야마모토는 AD 1943년 4월초까지 본국에서 신규로 생산된 공군기는 물론 항공모함의 함재기까지 모조리 결집시켰다. 그리고 4월 3일 이호작전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일본군 전진기지인 라바울에 도착하였고 4월 7일 110대의 제로 전투기의 호 위를 받는 99식 함상폭격기 67대가 과달카날로 향했다. 연합군도 그동안 정찰을 통해 일본의 공군기들이 결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4월 7일 일본 공군기들이 일제히 날아오르자 이에 대응하여 과달카날의 핸더슨 비행장에서도 전투기 76대(F4F 와일드캣 36대, P-39 에어코브라 13대, P-38 라이트닝 14대, F4U 커 세어 9대, P-40 워호크 6대)를 출격시켰다.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져 일본은 제로 전투기 9대와 99식 함상폭격기 12대가 격추되었고 미국의 전투기는 7대 만이 격추되었다. 비록 일본의 폭격기 들은 미군 의 구축함 1척과 급유함 1척, 코르벳 1척을 파괴하는 데 그쳤지만 기지로 귀환한 후에는 미군 전투기 41대를 격추 하고 순양함 1척, 구축함 1척, 수송선 10척을 격침시켰다고 성과를 과장보고했다. 일본군의 이호작전 계획 이에 고무된 야마모토는 뉴기니 섬을 향한 2단계 공습을 시작시켰고 4월 11일 제로 전투기 72대의 호 위를 받는 99식 함상 폭격기 22대가 뉴기니 섬으로 향했다. 50대의 연합군 전투기가 급히 출격하여 제 로 전투기 2대와 99식 함상폭격기 4대를 격 추하였으나 수송선 1척과 소해정 1척이 격침되고 수송선 1 척이 대파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일본 조종사들 은 구축함 1척과 수송선 4척을 격침 시키고 연합군 전투기 10대를 격추했다고 과장보고했다. 4월 12일에는 뉴기니의 포트 모 레스비를 공 격하기 위해 제로 전투기 131대가 호위하는 1식 육상공격기 43대가 출격하였다. 연합군 측에서도 44 대의 전투 기가 출격하였으나 일본의 제로 전투기를 상대하는 사이에 포트 모레스비의 여러 건물이 폭 격을 당하고 지상에 있던 전투기 14대가 파괴되었다. 공중전에서는 일본의 제로 전투기 2대와 1식 육 상공격기 3대가 격추된 반면에 연합군 전투기는 14대가 파괴되었다. 4월 14일 제로 전투기 56대의 호위를 받는 1식 육상공격기 37대가 뉴기니의 밀른 만을 향해 마지막 폭 격에 나섰다. 이에 대응하 여 오스트레일리아의 P-0 키티호크 전투기 24대가 출격하였으나 30분 후 제 로 전투기 75대와 99식 함상폭격기 23대로 이루 어진 제2파 공격대가 도착하면서 숫적인 열세 놓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전투기들은 3대가 격추당하는 사이에 제로 전투기 3대와 99식 함상폭격기 4대를 파 괴하였으나 수송선 1척이 격침되고 다른 1척이 대파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번에 도 일본군은 수송선 4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대파하였으며 전투기 14대를 격추했다고 과장해서 보고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격추 AD 1943년 4월 16일 야마모토는 이호 작전의 완료를 선언하였다. 조종사들이 보고한 연합군의 피해 는 순양함 1척, 구축함 1척, 수송선 10척이 격침되고 수송선 2척이 대파되었으며 전투기 41대가 격추 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연합군이 입은 피 해는 구축함 1척, 급유함 1척, 코르벳 1척, 소해정 1척, 수송선 2척이 침몰하고 전투기 25대가 격추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호 작전은 성공했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야마모토는 이호 작전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는 4월 18 일에 라바 울을 출발하여 부겐빌 섬의 부인 비행장과 쇼트란드 군도의 바라래 비행장을 경유하는 시찰에 나섰다. 일부에서 위험하다고 말렸으나 야마모토는 일본군 난수표 암호를 4월초에 교체하여 자신의 시찰 계획 이 세어나갈리 없고 설 령 연합군이 알게 되더라도 연합군의 전투기 중 항속거리가 가장 긴 P-38 라이 트닝도 겨우 정찰만 하고 돌아갈 정도로 떨어 져 있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암호해독능력은 야마모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매직'이라고 불리 는 연합군의 암호 해독기가 전체 암 호 중 15%를 해독해내었는데 그 중에는 야마모토의 방문지와 방문 시각에 포함되어 있 었다. 이 사실 은 알게 된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는 해군성 장관 프랭크 녹스를 통해 미국의 프랭클 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야마모토의 비행기를 격추시키는 '복수 작전(Operation Vengeance)'의 재가 를 받았다.
복수 작전의 진행계획 복수 작전의 실행은 과달나칼에 주둔한 존 미첼의 제339비행대대가 맡았다. 야마모토가 처음에 예상 한 대로 미 전투기 중 가장 긴 항속거리를 자랑하는 P-38 라이트닝조차 보조탱크를 달더라도 야마모 토의 항로에 겨우 10분 밖에 머물지 못했기 때문에 야마모토가 예정대로 지나가지 않으면 모든 작전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미군 전투기 P-38 라이트닝 그러나 야마모토는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성격이라는 사실이 이미 미 정보기관에도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 현지시각으로 4월 18일 오전 7시 40분에 부겐빌 섬의 상공을 지나갈 것으로 예측되었다. 연합군이 사용하는 솔로몬 시간으로는 9시 40분이었다. 이에 미첼은 4월 18 일 오전 7시 20분에 총 16대의 P-38 라이트닝을 이끌고 과달카날의 핸더슨 비행장에서 이륙하 였다. 미첼은 일본군의 해안감 시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뉴조지아 섬의 남쪽 해상을 초저공으로 비행 하다가 부겐빌 남쪽 해상에서 북상하는 항로를 선택 하여 오전 9시 34분에 요격지점에 도착하였다. 4월 18일 예정대로 야마모토는 일부 참모들과 함께 1식 육상공격기에 탑승하여 라바울을 떠났다. 야마 모토와 동행한 참모 장 우가키 마토메도 나머지 참모들과 다른 1식 육상공격기에 탑승했고 6대의 제로 전투기가 호위를 맡았다. 야마모토 일행 의 탑승기들이 9시 35분 부겐빌 상공을 통하면서 매복해 있던 미 전투기를 만나게 되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日本連合艦隊司令長官 山本 五十六, , 1884. 4 4 – 1943. 4. 18) 山本 五十六(やまもと いそろく、1884年(明治17年)4月4日 - 1943年(昭和18年)4月18日)は、日本の海軍軍人。第26、27代連合艦隊司令長官。海軍兵学校32期生。最終階級は元帥海軍大将。栄典は正三位大勲位功一級。1943年に前線視察の際、ブーゲンビル島上空で戦死(海軍甲事件)。旧姓は高野。
미 전투기들은 둘로 나뉘어 1개 편대가 호위 전투기를 상대하는 동안 나머 지 편대가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격추시키기로 사전에 합의된 상태였다. 갑작스런 미 전투기들의 출현 에 놀란 1식 육상공격기가 즉시 급강하하여 공격범위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호위를 맡은 제로 전투기들 이 일제히 미 전투기를 상대하기 위해 나섰으나 속도가 느린 1식 육상공격기로는 미 전투기의 추격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미 전투기의 기총사격에 야마모토의 탑승기가 추락하고 말았다. 최종적으로 미 전투기는 1대가 격추되는 동안 1식 육상공격기 2대와 제로 전투기 3대를 격추시키는 성과를 거두고 귀 환하였다. 야마모토 탑승기 격추장면 동영상(미군과 일본군 자료) 야마모토의 탑승기는 부겔빌의 아코마을 근처에 추락하였다. 이 근처에 주둔 중인 일본의 제22보병연 대 소속 도로보수대의 하마스나 미츠요시 소위가 추락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탑승자 11명이 전원 사망 한 상태였다. 부조종석에 탑승했던 야마모토 는 추락시 비행기 밖으로 튕겨나간 상태였는데 직접적인 사인은 기관총에 의한 총상이었다고 한다. 4월 21일 야마모토를 비 롯한 탑승원들을 화장시킨 후 유골 을 라바울로 이동시켰다가 최종적으로 일본 본국으로 이송시켰다. 일본에서는 야마모토의 죽음을 1개 월 정도 숨기다가 5월 21일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야마모토는 해군 원수로 추서되었고 6 월 5일 국 장으로 장례식이 치뤄졌다. 그리고 야마모토의 후임으로 고가 미네이치가 새로운 연합함 대 사령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야마모토 탑승기의 잔해 한편 야마모토를 격추시키는 데 성공한 미군은 야마모토가 진주만 기습의 원흉이었던 만큼 기쁨을 감추지 못했는데 야마모토 1명의 죽음을 대규모 해전의 승리에 맞먹는 대성과로 평가하였을 정도였다.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격추한 편대의 편대장인 토마스 랜피어는 해군십자훈장과 함께 중위에서 대위로 특진하였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축하 전문까지 받았다. 다만 야마모토의 격추가 일본의 암호문을 해독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야마모토를 격추시킨 사실은 비밀에 붙여졌고 대신에 이후에도 연일 부겐빌 근처를 출격하는 은폐작업을 벌였다. 직접적으로 야마모토를 격추시킨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AD 2003년 조사결과 공식적으로 렉스 비버가 격추시킨 것으로 인정받았다.
야마모토 격추작전에 참여했던 미군조종사들 솔로몬-뉴기니 전역 AD 1943년 연합군의 이중노선 병진전략과 카트휠 작전의 시작 AD 1943년초 과달카날 전역과 파푸아 전역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연합군은 향후 진격 방향을 두고 크게 두 갈래로 대립하였다.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최후방 거점으로 한 뒤 뉴기니 섬의 북부 지역을 거쳐 필리핀 제도의 민다나오 섬과 루손 섬을 차례로 수복하는 뉴 기니-필리핀 축선의 진격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는 지상발진 공군기의 항공지원을 받으며 차근차근 일본 본토로 진격하는 방안으로 맥아더가 속한 미 육군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맥아더의 방안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가 무엇보다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남태평양의 일본군 최대 거점인 뉴브리 튼섬의 라바울의 점령이 필수적이지만 이미 라바울은 견고하게 요새화되어 있어 점령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필리핀에서 어쩔 수 없이 퇴각한 맥아더가 개인의 명예회복(맥아더는 필리핀을 떠나면서 곧 돌아온다는 약속을 했기 떼문에 이를 지키기 위해서)을 위해서 필리핀 방면의 공격을 고집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연합군의 또 다른 진격방향은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가 주장한 미 해군 중심의 중부 태평 양 방면 돌파였다. 이것은 일본군의 방어가 튼튼한 라바울 대신에 중부 태평양의 마셜 제도와 마리아나 제도를 차례로 점령한 후 이를 발판으로 대만에 거점을 마련하고 일본 본토로 향하자는 것으로 미 해군 함대 총사령관 겸 참모총장 어네스트 킹이 지지하고 있었다. 니미츠의 방안은 맥아더의 방안과 달리 단숨에 일본 본토로 진격해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맥아더는 라바울의 일본군을 배후의 위협으로 나둔 채 그대로 일본 본토로 진격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고 비판했다. 더구나 대규모 상륙작전에 투입될 신형 함선들도 AD 1943년 후반기나 되어야 건조가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일본군의 방비도 견고해진다는 문제도 있었다.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한 미군 사령부는 당분간은 두 작 전을 동시에 추진하기로 결정하고는 미해군이 중부 태평양 방면의 돌파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맥아더 역시 자신의 계획대로 라바울 공격에 나서도록 하였다. 맥아더의 라바울 공격은 '카트휠(Cartwheel; 수레바퀴) 작전'이라고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산호해 해전과 과달카날 전역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지휘권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작전지역이 남서태평양해역군 관할이므로 맥아더가 지휘해야 했지만 미 해군은 여전히 육군인 맥아더의 지휘받기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재에 나선 미 합동참모본부에 의해 카트휠 작전 도중 솔로몬 제도에서 펼쳐지는 전 투는 미 태평양함대 예하인 남태평양해역군의 사령관인 윌리엄 홀시가 직접적으로 지휘 하고 맥아더는 전략적인 지침만 내리기로 정리되었다. 맥아더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직접 홀시를 만난 이후 개인적인 호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큰 문제없이 작전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카트휠 작전은 홀시의 남태평양해역군이 솔로몬 제도의 뉴조지아 섬과 부겐빌섬을 차례로 점령하는 사이에 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이 뉴기니 섬의 북부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부다 북서쪽에 위치한 일본군 거점인 라에를 점령한 후 뉴브리튼 섬 서쪽에 상륙하여 양방향에서 라바울을 포위하는 방안이 구체화되었다.
카트휠 작전도 솔로몬 전역 뉴조지아 전투 AD 1943년 6월 30일 카트휠 작전이 솔로몬 제도와 뉴기니 섬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미 남태평양해 역군의 1차 목표는 일본군 비행장이 있는 뉴조지아 섬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과달카날 전역이 진행 중이던 AD 1942년 12월에 뉴조지아 섬 서쪽의 문다에 비행장을 건설하였는데 과달카날 전역에서 철수하기로 결정된 이후에는 이 비행장이 라바울을 방어하는 전진기지로 역할이 바뀐 상태였다. 미군은 문다 비행장을 공격하기 전에 이를 위한 교두보로 삼고자 우선 렌도바 섬에 수송선 6척과 구축함 8척으로 편성된 병력 5천명이 상륙하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라바울에서 일본의 G4M 1식 육상공격기 25대가 출격했지만 실패하였고 연합군은 렌도바 섬에서 문다 비행장 공격을 위한 포대를 건설하였다. 7월 3일 문다 비행장의 일본 육군이 해군에게 증원을 요청하였지만 연료부족을 이유로 일본 해군에서 거절하였다. 일본군 역시 이호작전으로 공군력 소모가 심했기 때문에 지원이 여의치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7월 5일 증원병력과 물자를 탑 재한 일본 구축함 10척이 뉴조지아 섬에 인접한 콜롬방가라 섬으로 향했으나 쿨라 만에서 미 해군에게 저지당했다. 미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좌)와 7월 4일 야간에 뉴조지아 섬의 남부해안 자나나에 미 제43보병사단 예하 제169보병연대와 제172보병 연대가 상륙하였고 이튿날인 5일 새벽에는 뉴조지아 섬의 북부해안 라이스에 미 제1해병침투대대와 제37보병사단 예하 제145보병연대, 제148 보병연대가 상륙하였다. 먼저 북부의 라이스에 상륙한 미 제1 해병침투대대와 제145보병연대, 제148보병연대도 남하를 시작하여 험난한 정글을 겨우 뚫고 7월 10 일 에노가이를 점령한 후 새로운 보급기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편 남쪽의 자나나에 상륙한 미 제169보병연대와 제172보병연대가 육로로 이동을 시작하였으나 정글전에 미숙함을 보이며 일본군에게 막혀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연합군은 추가적인 보급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미 제172보병연대에게 문 다 비행장으로부터 동쪽으로 불과 3km 떨어진 라이아나 해안을 확보하도록 하고 7월 14일 오전 미 제 103보병연대 제3대대를 상륙시켰다. 이때 보급된 식량과 식수로 미군은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고 공병들이 추가로 들어오면서 미 제169보병대대의 주둔지와 연결되는 도 로도 새로 건설되었다. 뉴조지아 섬의 방어를 맡은 사사키 노보루의 일본 동남지대가 틈틈이 미군에 대한 공격을 노렸으나 실 패하였고 뉴조지아섬 해안의 교두보로 미군의 증원병력이 속속 도착하였다. 7월 25일 북쪽의 미 제37 보병사단과 남쪽의 미 제43보병사단이 동시 에 문다 비행장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일본의 제13보 병연대가 결사항전에 나섰지만 M3 스튜어트 경전차까지 앞세운 미군의 육상 협공과 바다의 7척 구축 함의 함포 사격에 대규모 피해를 입자 8월 4일 문다 비행장을 포기하고 인접한 콜롬방 가라 섬으로 퇴 각해야만 했다. 뒤늦게 라바울에서 일본군 증원부대와 물자를 실은 구축함 4척이 출발하였지만 그 중 3척이 8월 6일 벨라만 해전에서 격침되는 피해만 입고 물러서야 했다. 콜롬방가라 섬으로 사사키의 일본 동남지대가 다시 방어선 을 갖추자 연합군에서는 콜롬방가라 섬을 건너뛰고 벨라 라벨라 섬에 상 륙하기로 결심하였다. 뉴조지아 전투 진행도 8월 15일 벨라 라벨라 섬에 미군이 상륙하였고 이곳에는 일본의 수비병력이 불과 600명 밖에 주둔하 고 있지 않아 순식간에 미군이 장악하였다. 본래 일본군 대본영도 뉴조지아 섬을 포기하고 부겔빌 섬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설정하기로 하였으나 다 만 시간을 벌기 위해 10월까지 사사키의 동남지대에게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미군의 진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하도록 명령 한 상태였다. 이에 사사키는 아룬델 섬으로 이동하여 문다 비행장을 탈환할 기회 만을 엿보게 된다. 그러나 벨라 라벨라를 미군이 장악하고 비행장과 항구를 건설하면서 뉴조지아 섬과 콜롬방가라 섬의 일본군의 보급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하게 되 었기 때문에 9월 15일 철수를 명령하였다. 일본군은 구축함 13척, 어뢰정 18척, 대형발동정 138척 을 동원한 철수작전이 성 공하면서 아룬델 섬과 콜롬방가라 섬에 있던 일본군 1만2천명을 모두 부겐빌 섬으로 철수시키게 된다. 부겐빌 전투 뉴조지아 섬을 점령한 연합군의 다음 목표는 부겐빌 섬이었다. AD 1942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부겐빌 섬을 점령하고 5개의 비행장을 건설하였고 당시에는 무려 6만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 본의 비행장은 남쪽과 동쪽 , 북쪽에 치중해 있었고 서쪽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한편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홀시는 뉴조지아 섬의 점령시 일본군의 비행장을 탈취하다가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번 에는 일본군의 방어가 약한 부겐빌의 서쪽 지역에 적당한 지역을 물색 하여 비행장을 새로 건설하는 방 안을 추진하였다. 이런 내용으로 통지하여 맥아더의 승인을 받은 후 AD 1943년 11월 1일 부겐빌 서부 해안에 대한 상륙 작전을 시작하였다.
부겐빌 섬 모습 상륙 지점은 사전에 잠수함으로 정찰한 결과 비행장 건설에 적합한 것으로 알려진 토로키나 곶으로 결 정됐고 상륙 부대는 오스카 그리스올드가 지휘하는 미 해병 제3사단으로 총 병력숫자는 약 7,500명이 었다. 일본군은 미군이 근처의 쇼틀랜드 섬 이나 부겐빌 남쪽의 부인 비행장을 공격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토로키나에는 1개 중대병력 밖에 주둔해 있지 않았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3 일간이나 버텨냈으나 곧 격퇴되었다. 상륙에 성공한 미 해병대는 교두보를 확장하는 한편 계획대로 비 행장 건설에 착수했다. 일본군으로서는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어서 서둘러 미 해병대를 격퇴하기 위한 작 전에 돌입했으나 바다에서는 AD 1943년 11월 2일 자정이 넘은 야간에 벌어진 엠프레스 어거스타 베이 해전에서 패배하고 육지에서도 11월 7일 일본의 제54보병연대의 1개 대대가 역상륙하였으나 패 퇴하였다. 상륙한 미군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된 일본군이 미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본 제23보병연대를 추가로 투 입하였으나 이미 확보 된 교두보를 통해 미 해병 제3사단의 예비 연대와 미 육군 제37사단이 속속 추가 로 상륙하였기 때문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군은 토로키나 강 건너편에 대포를 배치하고 포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으나 미군은 일본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2월에 토로키나 비행장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부겐빌 전역은 물론 라바울까지도 미 공군의 폭격가능거리 에 들어가게 되 었고 미군은 AD 1943년 12월 9일부터 27일까지 토로키나 강 근처의 일본군에 대해서 소탕전을 벌이기 시작 했다. 일본군이 지형을 이용하여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축출되었다. 이렇 게 하여 미군은 부겐빌에 교 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부겐빌의 일본군은 고립된 채 굶주림과 보급 품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비록 부겐빌 전투는 AD 1945년까지 이어지지만 태평양 전쟁의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다. 우들락-키리위나 상륙과 살라모아 점령 홀시의 남태평양해역군이 솔로몬 제도의 뉴조지아 섬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것과 동시에 맥아더의 남 서태평양해역군도 뉴 기니 섬의 라에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첫번째 목표는 우들락 섬과 키 리위나 섬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우들락과 키리위나는 뉴기니 섬과 솔로몬 제도 사이에 위치하여 비행 장을 건설할 경우 뉴기니 섬과 솔로몬 제도를 모두 공군지원이 가능한 것은 물론 최종목표인 라바울까 지 폭격 가능거리에 들어가게 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이 전혀 주둔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AD 1943년 6월 20일 시작된 우들락과 키리위나 상륙작전은 전투부대보다 비 전투부대가 먼저 상륙하는 특이한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7월 중순과 8월 중순에 우들락과 키리위나 에서 비행장이 각각 완 성되었다. 뉴기니 섬의 라에와 살라모아의 위치 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의 두번째 목표는 라에와 함께 일본군의 뉴기니섬 주요거점인 살라모아였 다. 이를 위해 7월초에 미 제43보병사단 제162연대가 살라모아 남쪽의 나소만을 점령하고 보급기지를 건설하였다. 사실 살라모아에 대한 공격은 9 월에 예정된 라에 공격 이전에 라에에 주둔한 일본군을 끌 어내려는 양동작전 성격이 짙었다. 그렇지만 일본군의 주목을 끌 기 위해서라도 살라모아에 대한 공격 자체는 매우 강력하게 시작되었다. 살라모아의 공격을 맡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제3보병 사단이 살라모 아 근처의 봅두비와 무보를 점령했고 나소만를 점령하였던 미 제162보병연대도 북상을 시작했다. 연 합군의 진 격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8월말에 살라모아 근처에 도달하게 되었고 그 사이 오스트레일리 아의 제3보병사단은 사령부가 교체되어 제5보병사단이 되었다. 8월 중순부터는 연합군 공군이 제공권 을 장악하면서 연일 폭격이 이루어지고 9월초 연합군 의 라에 공격이 시작되자 살라모아를 지키던 일본 제18군도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라에로 철수하였다. 이렇게 허여 살라모 아가 연합군의 수중으로 들어 왔고 이제 관심은 라에로 모아졌다. 뉴기니 전역 라에 전투 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은 뉴기니 섬의 일본군 최대거점인 라에 공략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유럽 전쟁과 중태평양 방 면의 작전으로 인하여 상륙 함정이 부족해졌다. 이에 라에의 동쪽 해안에 상륙함과 동시에 라에 서북쪽의 나잡 비행장을 공 수강하로 점령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AD 1943년 9월 1일 작 전을 개시하였다. 이미 뉴기니 섬은 일본군이 이호작전으로 소 모한 공군기가 보충되는 속도보다 미 공 군이 증강되는 속도가 훨씬 앞서면서 제공권을 연합군이 장악한 상태였다. 연합군 공군기의 엄호 속에 오스트레일리아 제9보병사단의 제26보병여단이 밀른만에서 출발하여 부나에서 제2공병특별여단과 합 류한 후 9월 4일 라에로부터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해안에 상륙하였다. 이와 별도로 9월 5일 포트 모레스비에서 수송기 에 탑승한 오스트레일리아 제7보병사단의 제503낙하산보병연대의 공수작전이 성 공하여 나잡 비행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 다. 라에 동쪽에 상륙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제24보병여단이 9월 8일 라에 앞에 놓인 부수 강에서 일본군의 방어 병력을 만났으 나 9월 15일 도강에 성공하여 라에 동쪽의 말라항 비행장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 사이 나잡 비행장에 증강된 오스트레 일리아의 제7보병사단 예하 제25여단이 서쪽에서 라에를 향해 진격하여 9월 15일 라에의 마지막 방어선인 에드워드 농원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9월 16 일 양 방향의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모두 라에 시가지에 입성하였고 살라모아에 이어 라에마저 상실한 일본군이 라에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라에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은 살라모아에서 철수한 일본군 과 함 께 라에 북쪽의 험준한 롤린슨 산맥을 넘어 10월초가 되어야 겨우 라에가 위치한 후온반도 북 쪽 해안에 도착하여 일본 본국 으로 후퇴할 수 있게 된다. 핀샤펜 전투 9월 10일 뉴기니 섬의 살라모아와 라에를 상실하게 된 일본군은 라에 탈환을 위한 교두보 확보를 위해 뉴기니 섬의 서쪽에 위치한 보가짐에서 주둔중이던 일본의 제20보병사단을 후온반도 동쪽 끝에 위치 한 핀샤펜에 상륙시켰다. 라에를 점령한 연 합군은 뉴기니 섬 내륙으로 진격을 시작하여 오스트레일리 아의 제7보병사단이 라무 계곡으로 향했기 때문에 핀샤펜은 오스 트레일리아 제9보병사단의 제20여단 이 맡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제20보병여단은 9월 22일 수송선을 타고 핀샤펜으로부터 북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해안에 상륙하였다. 핀샤펜에는 아직 일본군이 5천여명 정도 밖에 주둔해 있지 않 았기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일본군을 물리치고 10월 2일 핀샤펜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뒤이 어 일본의 제20보병사단의 나머지 부대들이 핀샤펜으로 추가도착하면서 핀샤펜에 대한 탈환을 시도하 였으나 오스트레일리아 군 역시 제9보병사단의 나머지 부대인 제24보병여단까지 상륙을 마친 상태였 기 때문에 결국 2주 가까이 벌어진 격렬한 전투 끝에 10월말에 격퇴되었다. 11월초가 되자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더욱 증강되면서 오히려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대대적인 역습을 시작하여 12월 15일 일본의 제20보병사단을 시오로 후퇴시켰다. 일본군이 시오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펼쳤으나 AD 1944년 1월 2일 미 제32보병 사단 예하 제126연대가 시오 서쪽의 사이도르에 기습적으로 상륙하였다. 이제 포위섬멸될 위기에 처하게 된 일본군이 후퇴를 시작하였으나 이미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내륙의 험난한 피니스터 산맥을 따라 뉴기니 섬의 서쪽에 위치한 마당으로 퇴각하게 된다. 홀시의 남태평양해역군이 부겐빌의 주요 거점을 장악한 데 이어 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도 후 온반도에서 일본군을 대부분 몰아내면서 이제 연합군은 마지막 목표인 라바울 공략은 위한 뉴브리튼 섬 상륙 작전을 검토하 게 된다.
핀샤펜 전투 진행도 맥아더의 라바울 포위망 완성 글로세스터곶 전투 AD 1943년 11월 미 태평양함대 예하로 신설된 중태평양해역군에 의한 중부 태평양 돌파가 시작되면 서 라바울의 함락시킬 필요성이 약화되었으나 맥아더는 뉴브리튼 섬의 동쪽 끝에 위치한 라바울 공략 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맥아더는 설 사 라바울을 점령하지는 않더라도 뉴기니 섬과 뉴브리튼 섬 사이에 놓인 댐피어 해협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뉴브리튼 섬 의 서쪽에 위치한 글로세스터 곶에 상륙 하여 점령하기로 하였다. 일본군은 글로세스터 곶에 비행장은 건설하고 제65보병여 단을 수비병력으로 주둔시켜 놓고 있었는데 연합군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중국에 주둔하던 제17보병사단을 추가로 파견한 상태였다. 맥아더는 글로세스터곶의 상륙임무를 과달카날 전투에서 활약하였고 남서태평양해역군 전 력 상당수가 중태평양 해역군으로 돌려질 때 맥아더가 끝까지 반대하여 지켜낸 미 해병 제1사단에게 맡 겼다. 뉴브리튼 섬의 글로세스터 곶의 위치 미 해병 제1사단의 상륙작전일은 12월 26일로 결정하였으나 그보다 앞선 12월 15일 미 제112기병연 대가 뉴브리튼 섬 남쪽 의 아라웨 반도에 상륙함으로써 뉴브리튼 섬 동쪽 끝에 위치한 라바울과의 연결 고리를 차단시키기로 하였다. 아라웨 반도에 는 별다른 일본군이 없었기 때문에 미 제112기병연대의 상륙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에 라바울의 일본 공군기가 공 습에 나섰으나 부겐빌에 완성된 비 행장에서 라바울 공습에 나서면서 이마저도 뜸해지면서 아라웨 반도는 결국 연합군의 차 지가 되었다. 12월 25일에는 예정대로 글라스터곶에 대한 미 해병 제1사단의 상륙작전이 시작되어 하루만에 글로세 스터 곶 의 비행장을 점령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퇴로를 막기위해 뉴브리튼 섬의 서쪽에 위치한 타우알 리 해변에도 1개대대 병력을 상륙시켰다. 라바울에 대한 연합군의 연일 공습이 진행되고 있고 일본의 연합함대 사령부가 있는 트럭 섬도 대규모 폭격을 당했기 때문에 뉴브리튼 섬의 서쪽에 주둔한 일본군 은 항공지원도 없이 단독으로 싸워야하는 처지였다. 결국 일본군은 치열 하게 저항하기보다는 전력을 보존하면서 라바울로 후퇴하는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연합군의 상륙작전은 무리없이 진행되 었고 AD 1944년 3월 말 경에는 뉴브리튼 섬의 서쪽 절반이 모두 연합군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된다. 뉴브리튼 섬 서부 상륙작전 진행도 글로세스터곶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미 해병 제1사단은 다시 한번 그 능력을 입증해 보였으 나 미 중태평양해역군 의 중태평양돌파가 순조롭게 진행됨에 따라 더이상 라바울 점령은 전략적인 가치 가 없었기 때문에 글로세스터곶 점령은 큰 의미가 없었다. 더구나 글로세스터곶 전투 이후에는 맥아더 의 남서태평양해역군보다는 대규모 상륙작전을 연이어 펼쳐야하 는 중태평양해역군에게 미 제1사단과 같이 잘 훈련되고 경험많은 상륙부대가 더 절실하게 필요해졌기 때문에 결국 맥아더의 반대에도 불구하 고 미 참모총장인 조지 C. 마셜은 AD 1944년 4월 초 미 해병 제1사단을 중태평약해역군으로 보냈다. 대신 하여 뉴브리튼 섬은 미 제40보병사단이 담당하게 되었고 AD 1944년 11월 말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의 제5보병사단에게 임무 를 넘겨주게 된다.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애드미럴티 제도 점령 중태평양해역군의 길버트-마셜 전역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이제 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진격 은 태평양 전쟁 전체로 볼 때 보조적인 성격의 조공에 가깝게 되었다. 그러나 미 합동참모본부에서는 맥아더와 미 육군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한편 일본군에게 어느 공격이 주공인지 혼란시키기 위해 중태평양과 남서태평양의 공격을 병행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라바 울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고 라바울을 우회하여 고립시키도록 하였다. 맥아더는 라바울이 심프슨 항을 보유하 고 있었기 때 문에 라바울을 탐내고 있었으나 라바울 점령을 포기하면서 심프슨 항을 대신할 만한 지역을 물색하였 고 뉴브리 튼 섬 북쪽에 위치한 애드미럴티 제도 중 로스네그로스 섬의 시애들러 항을 최종적으로 낙점 하였다. 시애들러 항은 군항과 비행장을 건설할 만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나 일본군은 이미 라바 울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은 곳이었다. 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은 AD 1944년 2월 29일 애드미럴티 제도에 대한 상륙을 개시하였다. 해안 을 경비하던 일본군이 기관포를 발사하며 대항해왔으나 경순양함과 구축함의 함포로 응사하면서 이를 무력화하였다. 여기에 연합군 폭격기 B-25 미첼도 항공지원에 나서면서 미군의 상륙작전은 이상없이 진행되었다. 야간에 일본군이 반격에 나섰으나 병력을 축차로 투 입하는 실수를 범하면서 실패로 끝났 다. 성공적으로 해안에 교두보가 마련되자 3월 1일부터 미군의 상륙병력은 더욱 늘어났 고 섬의 주요 거점을 장악해 나갔다. 3월 9일에는 로스네그로스 섬을 장악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의 하우웨이 섬과 루 고스 섬도 모두 미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3월 25일 일본군의 마지막 잔당마저 모두 소탕하면 서 애드미럴티 섬은 완전히 미군의 차지가 되었다.이렇게 하여 맥아더는 애드미럴티 제도를 점령하면 서 일본의 라바울을 완전히 고립시켰을 뿐만 아니 라 향후 뉴기니-필리핀 축선의 진격을 지원할 수 있 는 훌륭한 비행장과 항구를 얻게 되었다. 남태평양해역군의 그린아일랜드와 에미라우 섬 점령 카트휠 작전을 시작하면서 당초 라바울을 포위하기 위해 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이 뉴브리튼 섬의 서쪽에 상륙할 때 홀 시의 남태평양해역군은 일본군이 라바울을 보호하기 위하여 라바울 북쪽에 위치한 뉴아일랜드 섬의 요충지인 카비엔을 점 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비엔은 지상발진 항공기의 폭 격가능거리 바깥이므로 항공모함의 지원이 필수적이었으나 AD 1943년 11월 길버트-마셜 전역이 시 작되면서 미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 전력이 모두 길버트-마셜 제도로 집중되었기 때문에 홀시는 충분 한 항공모함을 지원받을 수는 없었다. 이에 홀시는 카비엔의 점령 전단계로서 부겐빌 섬과 뉴아일랜드 섬 사이에 위치한 그린아일랜드를 우선 점령하기로 하고 맥아더의 승인을 받았다. 그린아일랜드 상륙 은 뉴질랜드의 제3보병 사단에 의해 AD 1944년 2월 15일 개시되었고 일본의 소규모 수비병력을 몰아 내고 2월 21일 점령을 마무리하였다. 이제 연 합군은 그린아일랜드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비 행장이 완성되자 뉴아일랜드의 카비엔이 연합군 공군기의 폭격가능 거리로 들어오게 되었다. AD 1944년 3월이 되자 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이 애드미럴티 제도를 장악한 후 사실상 라바울 점 령을 포기하고 서부 뉴 기니 섬의 홀란디아(지금의 자야푸라)로 상륙하여 뉴기니-필리핀 축선으로의 진격을 결정하였다. 이 때문에 홀시의 남태평양 해역군 역시 일본군이 라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요새를 구축한 뉴아일랜드의 카비엔을 무리하게 점령하기 보다는 무방비 상태인 뉴아일랜드 섬 북쪽의 에미라우 섬을 점령하고 비행장을 건설하여 라바울을 고립시키는 방안을 건의하였다. 결국 맥아더의 승인이 이루어지면서 홀시의 남태평양해역군 중미 해병 제3사단의 제4연대가 AD 1944년 3월 20일부 터 상륙 작전을 전개하였다. 에미라우 섬에는 소규모 일본군 수비병력 만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미 해 병 제3사단은 삽시간에 에미 라우 섬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에미라우 섬에는 비행장이 건설되었 고 AD 1944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하며 라바 울에 대한 폭격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애드미럴티 제도(적색), 에미라우 섬(황색), 에미라우 섬(청색)의 위치 미군의 라바울 우회 결정 라바울 고립 애드미럴티 제도와 에미라우 섬이 모두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이제 뉴브리튼섬의 라바울은 완전 히 고립되었다. 특히 육군 소속 공군기들이 뉴기니 섬의 웨와크 비행장으로 이동하였고 AD 1944년 2 월에 벌어진 미 중태평양해역군의 트럭 섬 공습 이후 해군 소속 전투기 마저 트럭 섬 방어를 위해 떠나 면서 라바울은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이제 지상의 대공포만으로 연합군 공군기를 상대하 는 처지가 되자 라바울은 일방적인 폭격을 당하게 되었고 AD 1944년 3월부터는 아예 전투기 호위도 없이 폭격기 단독으로 폭격을 실시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라바울은 연합군 초보 조종사의 폭격훈련 장 소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이렇게 일본의 남태평양 최대거점이었던 라바울은 완전히 고립되었으나 일본의 남태평양 전선을 모두 총괄하는 제8방면군 사령관으로서 라바울에 주둔 중이던 이마무라 히토시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로 이 렇게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상태에서도 대 공포 방어에 심혈을 기울여 예상보다 연합군의 공습효과는 크지 않았다. 특히 이마무라는 과달카날 전역이 식량보급 부족으 로 패배에 이르게 되면서 자체적인 식 량난 해결을 늘 염두에 두었고 라바울 고립이 현실화되기 시작하자 AD 1944년 3월부 터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1인당 200평씩 경작하도록 명령하고 그 자신도 솔선수범하여 200평을 경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바울이 제공권을 상실하면서 연합군 공군기의 폭격이 지속되자 이마무라는 동굴을 파서 식량 창고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마무라 히토시의 모습 이후 라바울의 일본군은 1주일 중 2일은 농사, 2일은 지하동굴 파기, 2일은 군사훈련으로 보내기 시작했 고 마지막 하루는 휴 식일로 정해졌다. 이렇게 식량이 모이면서 라바울은 무려 9만명의 병력이 주둔한 상황에서 보급로가 차단당하는 최악의 상 황 속에서도 무려 2,100평을 경작하면서 대부분의 남서태평 양의 일본군이 굶주림에 시달린 것과 대조적으로 라바울의 일본 군은 식량이 풍족한 상태로 지냈고 지 하동굴에 다량의 식량까지 저장할 정도로 여유가 있을 정도가 되었다. 종전 이후 이 사 실을 알게된 연 합군 측에서는 라바울을 점령하지 않고 우회하기로 결정한 것을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면서 내린 수많 은 결정 중 가장 현명한 결정 중 하나로 손꼽게 된다. 뉴기니 섬의 홀란디아 상륙 당초 맥아더는 일본군이 차지한 라바울을 함락시키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었으나 이제는 라바 울을 고립시키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비록 라바울에는 약 9만명의 일본군은 주둔하고 있었으나 제 공권과 제해권을 모두 상실하면서 라바울의 전략적인 가치를 모두 상실시킨 상태였다. 이에 맥아더는 라바울은 내버려 둔채 필리핀 탈환 작전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일본군은 라바울이 고립되자 그동안 뉴기니 섬을 담당하던 아다치 하치조의 제18군을 라바울의 이마무라 히토시가 지 휘하는 제8방 면군에서 뉴기니-말레이 제도를 담당하는 아나미 고레치카의 제2방면군으로 소속을 전환시킨 상태였 다. 아다 치의 제18군은 서부 뉴기니의 웨와크 비행장에서 이후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맥아더의 진격 을 막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 맥아더는 일본군이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는 웨와크 비행장과 마당 지역을 단숨에 우회하기로 결정하 였다. 이에 따라 미 고속항공모함 기동부대 중 정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렉싱턴, 경항공모함 프링스 턴과 랭글리로 구성된 존 리브스의 제58.3전단(TG 58.3)과 고속전함 7척으로 구성된 윌리스 오거스터스 리의 제58.7전단(TG 58.7)이 홀란디아 상륙작전을 지원 하기 위해 뉴기니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남서태 평양해역군의 제5항공대가 홀란디아 비행장을 폭격하여 여기에 배치된 일본 의 항공기들을 파괴하였고 제58.3전단이 홀란디아 근처의 와크데 섬과 사와르 등지를 폭격하여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 맥아더의 뉴기니 섬 진격 모습 (적색 괄호: 홀란디아) AD 1944년 4월 15일 장악한 제공권을 바탕으로 홀란디아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고속전함으로 구성된 제58.7전단 이 대대적인 함포 포격으로 엄호를 하고 맥아더의 홀란디아 상륙작전이 일본군의 허를 완전히 찔렀기 때문에 상륙작전은 대 성공을 거뒀다. 이 때문에 웨와크 비행장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 던 아다치의 일본 제18군은 아무런 전투도 해보지도 못 한 채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 이후 맥아더는 5월 27일부터 근처의 비약 섬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공격의 부수적인 효과로서 일본군이 이 지역을 연합군의 주공방향으로 생각하고는 잠수함과 항공기를 집중배치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마 리아나 제 도의 방어력이 취약해졌다. 주공방향을 혼란시키기 위해 이중 노선을 선택한 미 합동참모본부의 예상이 적중한 것 이었다. 6월이 되자 중태평양해역군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일본의 마리아나 제도를 향한 공세를 시작하였고 동시에 맥아더도 뉴기니-필리핀 축선의 공격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개구리 뜀뛰기(우회) 작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당시에도 일본의 지각있는 사람들은 현격한 국력차이 때문에 미국과 의 정면대결은 승산이 없 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의 큰 전략은 첫번째 단계로 진주만 기습 을 통해 미 태평양함대의 당장 가용한 군함을 모두 파괴한 후 미군이 전력을 재정비하는 동안 동남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점령하여 비행장과 요새를 건설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다음 단 계로 재정비를 마친 미군이 반격을 시작하는 경우에 최전선의 섬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동안 2선 의 방어선을 강화시키는 지연전을 펼쳐 미군의 피해를 누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것이 성 공할 경우 미군은 전진할 수 록 피해가 누적되는 반면에 일본군은 보급선이 짧아지는 내선의 이점을 살려 점점 더 강력한 저항이 가능할 터였다. 미국은 아시아보다 독일과의 유럽 전선을 더 중요시하 고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기 힘들었으므로 미군의 사상 자가 늘어나면 미국 내 염전 사상이 큰 힘을 얻어 최종적으로는 미국이 일본의 동남아시아 지배를 인정하는 선에서 적당히 강화협상을 맺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전략은 진주만 기습의 대성공으로 1단계는 성공하였으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 여 제해권 장악에 실패하 면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한 과달카날 전역에서 보듯이 미군 역시 초기에는 여러 섬들이 흩어져 있던 남태평양의 섬 들 중 일본군의 먼저 건설한 비행장을 탈취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진행하였으나 이것이 소모전 양상이 되며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자 남태평양 해 역군의 윌리엄 홀시는 과감하게 방어태세가 완비된 거점을 건너뛰고 수비가 약한 섬을 점령하여 새 로운 비행장을 건설하는 이른바 '개구리 뜀뛰기( Leap frog) ' 작전으로 변경하게 된다. 이를 본 더글 라스 맥아더는 홀시의 개 구리 뜀뛰기 전술을 고대로부터 많은 전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오래된 전 술로서 미 해군만의 창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폄하 하였고 미육군 전사에서도 단순히 '우회(bypass)'라고 기록했으나 그 효과는 대단하였다. 일본이 총력을 기울여 구축한 요새 섬이 한순간에 전략적으로 무가치해져 버리면서 가뜩이나 병력과 자원이 부족한 일본에게 엄청난 국력낭비를 강 요하게 된 것이었다. 태평양 전쟁 중 연합군의 진격로 모습 연합군의 개구리 뜀뛰기 작전으로 불리해진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기 동부대를 파견하였으나 미국 역시 엄청난 생산력으로 건조해낸 항공모함을 계속해서 태평양 방면 에 투입하면서 이제는 전력 면에서 큰 열세를 보이 게 된다. 또한 미국이 맥아더의 뉴기니-필리핀 축선 진격과 미 해군의 중부 태평양 돌파라는 두 개의 진격로를 동시에 추진 하자 일본군은 어느 쪽 이 연합군의 주공인 지를 파악할 수가 없어 방어병력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하 여 많은 장비와 물자를 가진 대병력이 오히려 고립된 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는데 대표적인 곳 이 남방작전의 일본 육군 사 령부가 있던 라바울이었다. 그리고 미 해군이 타라와 전투, 이오지마 전 투, 오키나와 전투와 같은 대규모 상륙작전에서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 상륙작전을 포기한 개구리 뜀뛰기 작전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줄여줬는 지를 여실히 입증해주게 된다. [참고] 네이버 캐스트 야마모토 격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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