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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베트남전쟁(99)-시험공격-프옥롱전투

푸옥롱 성은 캄보디아 국경과 접하고 있으며 성도(省都)는 푸옥롱으로 사이공 동북방 약 135㎞ 정도 떨어져 있는 지역이다. 주민은 몽타냐(Montagnards) 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이 대부분이며, 미군이 작전 시에는 그린베레들이 원주민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지역을 방어하였고 당시 방어병력은 800명 수준인 5개 지방군 대대와 48개 소대 1,000여명의 민병대가 전부이고 정규사단에 속하는 부대는 없었다. 그렇게 전략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은 이 성을 공격함으로써 여러 가지를 시험해 볼 수 있었다.

푸옥롱 전투의 개략을 보여주는 지도

 

북베트남군은 1975년도 총공세시에 대하여 1974년 10월부터 논의하고 있었다. 가장 큰 의문사항은 미군의 재개입 여부인 것이다. 푸옥롱 성을 점령함으로써 미국의 반응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베트남군의 대응능력을 평가해 볼 수 있으며 이미 캄보디아에 배치되어 있는 전차와 협동으로 공격을 실시하면서 북베트남군의 능력도 평가해 볼 수 있었다. 적을 분리 및 차단하여 조각을 낸 후 병력을 집중하여 각개격파하려는 그들의 전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승리함으로써 북베트남 노동당 내 온건론자들을 승복시킬 수 있고 전 장병에게 승리가 가능하다는 확신을 줄 수도 있었다.

북베트남군은 7사단과 새로 기존부대를 통합하여 만든 3사단으로 1974년 12월 13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공격목표 지역에 이르는 도로를 먼저 차단하였다. 다음으로 남베트남군의 관측소로 이용될만한 전초기지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일거에 점령해 버렸다. 이렇게 하여 고립된 목표지역에 대하여 130㎜ 야포로 남베트남군의 포병을 제압하면서 전차와 협동으로 병력을 집중하여 점령하였다. 다음 목표도 동일한 수법이었다. 이제 옛날같이 야간공격을 할 필요가 없었다. 여명공격으로 보병, 포병, 기갑의 제병협동작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적의 공격이 심상치 않자 남베트남군은 5사단의 1개 대대를 증원하였다. 항공지원도 계속하였으나 적의 대공사격에 피해가 늘고 제한을 받았다. 12월 26일까지는 성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북베트남군에게 점령당하였고, 12월 30일부터는 성도가 적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남베트남군은 악전고투로 적의 압력에 따라 방어선을 조정해가면서 지탱해나갔다. 1975년 1월 2일에야 티우(Thieu) 대통령은 부통령, 수상, 참모총장, 공군사령관, 제3군단장 등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제3군단장은 1개 사단 규모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가용병력의 부족, 공중기동 능력의 제한, 증원시기의 상실, 전략적으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지역에 과도한 병력소모 방지 등의 이유로 사단규모 부대의 증원은 하지 않기로 하였다.

티우 대통령은 이 성을 포기하려 하였다. 그러나 81공수여단의 1개 대대를 증원 병력으로 투입하도록 명령하였다. 남베트남군의 최정예부대라는 공수부대가 증원되어 시일을 끌면서 처절한 항쟁을 함으로써 남베트남군의 의지를 보여주어 미국의 추가원조와 미군의 개입을 유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북베트남과 마찬가지로 티우도 미국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1975년 푸옥 롱 전투에 투입되는 남베트남 81공수여단. 나름대로 남베트남군의 정예부대였지만 1개 대대로 북베트남군 2개 사단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착륙하기 전까지는 북베트남군의 대공포화에 피해를 입었고, 착륙 후에는 북베트남군의 전차에 압도되었다. 투입된 병력의 10% 미만이 탈출에 성공하였고 그 외 대부분의 병력은 전사, 실종, 포로가 되어 전멸당했다.

 

 

 

 

공수대대의 증원은 악천후로 1월 4일에는 실시하지 못하고 1월 5일 근접항공지원으로 착륙지역을 개척한 후 피해를 입으면서 투입되었으나 푸옥롱은 1월 6일 야간까지 북베트남군에게 피탈되었다.

푸옥롱 전투의 상황도

 

푸옥롱 전투 결과 미국의 반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월 7일 키신저(Kissinger) 미 국무장관이 위기조치반을 소집하여 추가원조를 의회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 침략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인 경고발언이나 미 해, 공군의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북베트남은 이 공격의 성공으로 1975년 총공세계획을 단행하도록 최종적으로 확정시킬 수 있었고 그 무엇보다도 미군의 개입여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남베트남은 최초로 1개 성 전체를 적에게 점령당함으로써 남베트남 국민들은 군의 능력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되었으며 휴전협정을 위반한 북베트남에 대하여 미국의 응징이 없는데에 대하여 실망하였다. 남베트남군 병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1개 공수대대를 아무런 대책 없이 사지에 몰아넣은 데 대하여 티우 대통령을 원망하였고 적의 공격을 받으면 구원해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