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베트남의 사이공 공격계획은 20일 동안 연구, 토의를 거쳐 티우(Thieu)가 사임한 다음 날인 4월 22일 최종 공격계획을 확정하고 노동당 정치국 대표로 레둑토(Le Duc Tho)가, 사령관으로 둥(Dung)이, 정치장교로 팜 훙(Pham Hung)이 서명한 후 주요 지휘관 및 참모가 배석한 가운데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쑤안록(Xuan Loc) 전투를 경험한 둥은 현재 남베트남군이 사이공을 중심으로 30~40㎞의 원형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편성하고 있기 때문에 밀고 밀리는 대접전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어 지금까지 신중하게 계획을 수립하였고 가용한 부대가 모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둥은 정치의 중심부이며 남베트남의 중추신경인 독립궁, 참모본부, 사이공 방위 사령부,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 사이공 경찰국 등의 5대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을 최종목표로 선정하였고, 이를 점령하기 위한 각 군단의 기동계획을 다음과 같이 수립하였다.
• 제1군단 : 제330, 350, 968사단 : 북쪽 13번 도로를 연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남베트남군 참모본부를 점령.
• 제2군단 : 제3, 304, 324, 325사단 : 남동 15번 도로를 연하여 공격, 독립궁을 점령.
• 제3군단 : 제10, 316, 320사단 : 북서 1번 도로를 연하여 공격.
• 제4군단 : 제6, 7, 341사단 : 동에서 1번 도로를 연하여 공격, 탄손누트 비행장 점령.
• 제232군 : 제5, 8, 9사단 및 3개 독립연대 : 남쪽 및 남서에서 4번 도로를 연하여 공격. 사이공 방위사령부와 경찰국 점령.
• 특공사단 : 각 군단에 배속되어 사이공 시내에 사전 침투.
북 베트남군의 야전병원의 모습이다.
둥이 하달한 종합 작전지침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 ‘대담한 돌진’만이 기습을 달성할 수 있고 성공을 보장한다. 대담한 돌진은 혁명과업의 최종 완수에 대한 열정, 과감성, 모험을 할 수 있는 용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각오로써 달성될 수 있다.
• 적의 정규사단이 사이공 내부로 축차 철수하지 못하도록 적을 고착시키면서 배후를 차단하고 고착된 적은 후속부대가 소탕하도록 할 것.
• 병력을 절약, 집중하여 작전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목표를 점령할 수 있도록 할 것.
• 기계화 부대는 특수임무부대로 편성하여 신속히 사이공 시내로 돌진하여 부여된 5대 최종목표를 점령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할 것.
• 특수임무부대의 신속한 돌진을 보장하기 위하여 사전에 투입된 특공사단, 사이공 시의 침투부대, 사이공 정치 공작원들은 중요 교량이나 길목을 사전 점령하여 공격부대를 선도하고 요인 암살 및 민중봉기를 유도할 것.
• 최대한의 화력은 적 참모본부, 탄손누트 공항 등 군사목표에 집중하고 적의 항공지원에 대비하여 가용한 대공화기를 최대로 운용할 것.
• 정치적 과업에 유의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특히 노동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유의할 것.
• 군사목표에 대해서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적의 시내 철수를 최대한 저지하여 시가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특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역사적 유물을 보존하는 데 유의할 것.
• 공격수행 간 책임을 명확히 분담하되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면 타 부대 지역도 과감히 점령하는 등 작전이 유기적으로 협조되도록 할 것.
1975년 4월 북베트남군의 공격루트
전부터 사이공 지역 작전 시 지휘본부였던 벤캇(Ben Cat, 철의 삼각지대 남쪽 지점)에 전방 지휘사령부를 설치하여 둥이 전체 작전을 지휘하고 동부의 제2, 4군단은 레 트롱 탄(Le Trong Tan), 남서, 북서 지역의 제3군단과 제232군은 레둑안(Le Duc Ahn)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총공격은 4월 29일에 개시하기로 하였고, 제2군단과 제4군단은 4월 26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4월 29일 이전에 비엔 호아(Bien Hoa), 롱탄(Long Thanh), 푸옥레(Phuoc Le)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총공격 개시 전에 남베트남군 및 사이공 시민에게 충격을 주기 위하여 트룽(Trung) 중위가 선도하는 A-37의 탄손누트 공격은 4월 28일 오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협상을 기대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통수권자를 계속 교체해 가며 스스로 와해의 길을 재촉하는 사이공 정부의 추태를 보면서 총공세를 준비하는 북베트남군 수뇌들은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연전연승으로서 사기가 충천한 북베트남군 17개 사단에 비하여 남베트남군의 전력은 너무나 열세하였다. 남베트남군에게 가용한 부대는 온전한 사단이 제5, 25사단의 2개 사단뿐이고 제18사단(1개 연대 부족), 제22사단(재편성, 1개 연대 부족), 해병사단(재편성, 1개 여단 부족), 제1공수여단(쑤안록 전투 시에 피해를 입음), 신편부대인 제468해병여단, 2개 레인저단, 제3기갑여단 등이 고작이었다. 계속되었던 패배, 사이공 정부의 혼란, 몰려드는 피난민 등으로 그나마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남베트남군 제3군단장 구엔 반 토안(Nguyen Van Toan) 중장의 방어계획은 사이공 지역 일대를 5개 주요 저항선으로 편성하여 방어한다는 것이었다.
3군단장 구엔 반 토안
• 롱안(Long An) 전선 : 제22사단, 제6레인저단
• 쿠추(Cu Chu) 전선 : 제25사단, 제9레인저단
• 빈두옹(Binh Duong) 전선 : 제5사단
• 비엔 호아(Bien Hoa) 전선 : 제18사단, 제468해병여단, 제3기갑여단
• 15번 국도 전선 : 제1공수여단
• 예비 : 해병사단
1975년 4월 14일 피난민들의 행렬
북베트남군 제2군단의 공격은 4월 26일 17:00에 12개 포병대대의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개시되었다. 사이공에서는 대통령직을 고수하고 싶은 후옹(Huong)에게 사퇴하도록 한참 야단인 때다. 반정부 활동의 본거지로 유명한 안쾅(An Quang)사(寺)의 트리쾅(Tri Quang) 승려, 키(Ky), 노동 지도자 트란 쿠옥 부(Tran Quoc Buu) 등이 후옹 축출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국방장관인 돈(Don)과 참모총장도 후옹에게 사퇴를 권고하고 있었다.
트리 쾅 승려
트란 쿠옥 부
북베트남군 제304사단은 2시간 만에 롱탄(Long Thanh)의 기갑학교를 점령하였으나 보병학교에서는 남베트남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당시 보병학교에는 달라트(Da Lat) 육사생도들이 철수하여 그곳에 있었고 기갑학교에서 철수한 장병들까지 합세하여 방어하였다. 그들은 방어선이 돌파당하면 계속 역습을 가하여 밀고 밀리는 전투가 4월 27일, 28일 내내 계속되었고 4월 29일 12:00까지 버티었다.
1975년 4월 28일 남베트남군이 사이공 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
북베트남군 제325사단은 롱탄 외곽 지역을 점령한 후 공격을 계속하였고, 제3사단도 4월 27일 15:00까지는 푸옥레(Phuoc Le)를 점령하고 붕타우(Vung Tau) 방향으로 공격을 계속하였다.
북베트남군 제2, 4군단은 동나이(Dong Nai) 강과 사이공 강의 두 개의 강을 도하하여야 사이공 시내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에 공격을 서둘러야 했다. 제4군단은 비엔 호아(Bien Hoa) 공군기지를 공격하였으나 남베트남군 제18사단과 제3기갑여단도 만만치는 않았다. 남베트남군은 대전차호까지 구축하여 북베트남군 기계화 부대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4월 28일에는 북베트남군의 포격으로 비엔 호아 공군기지는 운용할 수 없게 되어 항공기를 탄손누트(Tan Son Nhut) 비행장과 제4군단 지역 트라녹(Tra Noc) 기지로 소개시켰다. 강상의 각 교량들을 뺏고 뺏기는 혈전이 계속되었다. 후방에 사전 침투한 적 특수부대들이 점령하면 증원부대가 이를 탈환하고, 증원부대가 돌아가면 다시 뺏는 식이었다. 이런 과정이 수차례 반복된 교량이 동나이 다리였다.
비엔 호아 공군기지를 공격하는 북베트남군
북베트남군 제1군단, 제3군단, 제232군의 진격도 신통치 않았다. 4월 28일까지 남베트남군이 설정한 주 방어선은 그런대로 지켜졌다.
남베트남군 레인저의 15세 소년병
4월 28일 오전 남베트남군 참모총장 카오 반 비엔(Cao Van Vien)은 연립정부의 구성은 곧 자신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에 북베트남과 타협이 가능한 것으로 믿고 사는 사람에 이 땅을 인계하고 떠나는 것이 현명하다는 구실로 미 대사관에 들어서면서 미 해병대 경계병에게 경례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가 별이 4개 달린 전투복을 벗어버리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테니스 코트장에서 헬기로 미 해군 함정으로 탈출하였다. 아직 전장에는 수만 명의 남베트남군이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는데 군의 최고 선임자이며 티우가 사임한 이후 사실상의 군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모든 것을 팽개치고 혼자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일찍 도주를 한 것이다. 군은 제3군단장 토안(Toan) 중장과 사이공 방위사령관 구엔 반 민(Nguyen Van Minh) 소장이 지휘하고 있었고 총사령관은 없어진 것이다.
카오 반 비엔
사이공 방위사령관 구엔 반 민 소장
4월 28일 야간에 탄손누트 공항을 폭격하여 심리적인 충격을 준 후 4월 29일 05:00에 북베트남군 5개 사단은 일제히 치열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1975년 공격받는 탄손누트 공항
북베트남군 제304사단은 오전 내내 혈전으로 보병학교를 3일 만에야 점령하고 롱빈(Long Binh)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제325사단은 동나이 강 나루터에 도착하여 도하를 시작하였다. 제3사단은 오후에 붕타우를 점령하였다. 제324사단의 1개 연대는 1개 기갑연대와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15:00에 출발하였다. 그들은 남베트남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적이 와해될 때에 신속히 전과 확대하여 사이공 시내에 제일 먼저 진입할 부대로서 이미 새 군복을 착용하고 팔에는 붉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북베트남군 제4군단은 비엔 호아 비행장을 3개 방향에서 계속 공격을 하였으나 탈취할 수가 없었다. 방어하고 있던 남베트남군 제18사단은 많은 손실을 입었고 제3기갑여단은 탄약이 부족하였으나 조치해 줄 만한 상급부대 지휘관이나 참모들은 탈출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북베트남군 제1군단이 공격하고 남베트남군 제5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빈두옹(Binh Duong) 전선은 4월 29일은 방어선이 지탱되었다. 북베트남군 제3군단의 공격을 받은 남베트남군 제25사단의 방어선은 무너졌다. 반메투오(Ban Me Tuot)를 점령하고 남베트남군의 중부 고원지대 철수 시 계속 공격하였던 북베트남군 제3군단의 공격을 받은 제25사단은 와해되었고 사단장 리톤바(Ly Ton Ba) 준장은 도주하였으나 후에 체포되었다. 북베트남군 제3군단은 쾅트룽(Quang Trung) 훈련소를 계속 공격하여 남베트남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리톤바 준장
북베트남군 232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롱안(Long An) 전선의 남베트남군 제22사단도 전선을 확보하고 있었고 북베트남군의 일부가 4번 도로를 차단하자 피아 공방전이 벌어졌다. 제22사단도 많은 손실을 입었다.
총공격을 받은 남베트남군의 전선은 4월 29일 밤까지 사이공 외곽 10~20㎞ 지역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5:1 이상의 전투력 차이와 높은 사기는 일거에 남베트남군을 압도할 수 있었는데도 공격은 사실 지지부진이었다. 남베트남군에 부족한 것은 예비부대였고 북베트남군에게 부족한 것은 훈련, 과감성, 독단능력 등이었다. 북베트남군의 신병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남베트남군 제4군단 지역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미국의 철수작전은 4월 19일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심리적 요인을 고려하여 야간에 C-130, C-141 등의 대형 수송기들이 운용되어 임시 캠프인 괌으로 수송되었다. 철수시킬 남베트남인들은 공산화됨으로써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 사람, 각종 미국기관에 근무하였던 고용인, 현지 미국인이 추천하는 인원 등이다.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에서의 철수는 4월 28일로서 끝나고 이후는 헬기에 의해 해상에 대기하고 있는 미군 함정으로 철수시켰다.
4월 29일부터 미 대사관에서 최고 70명까지 탑승시킬 수 있는 CH-53으로 철수를 시작하였으나 연료가 다하여 18:30 이후에는 12명까지 탑승시킬 수 있는 UH-1 헬기로 야간철수를 계속하였다. 북베트남군은 미국의 철수를 방해하지 않았다. 4월 29일만 해도 남베트남 공군기 4대가 북베트남군 대공화기에 의하여 격추되었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 철수를 방해하여 미 제7함대의 공격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며 자기네들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철수시키는 것이 바람직했던 것이다.
후속 헬기들의 착륙을 위해 버려지는 헬기
미국의 철수 인원에 포함되지 못하는 남베트남인들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해안으로 나가 거룻배를 이용하여 미군 함정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여 구조를 요청하였고 미군은 이들을 전부 받아주었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들이 계속 줄을 이었다.
4월 28일 남베트남의 3일 대통령 두옹 반 민(Duong Van Minh)에게 협상이 안 될 경우에 철수할 의향을 묻자,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고 “남베트남 사람들은 내 민족이다. 나는 떠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의 손자, 그의 딸과 대령인 사위, 조카들의 철수를 부탁했다. 그의 오랜 친구였던 해군 참모총장 디에프 쾅 퉁(Diep Quang Thung)이 같이 철수하자고 4월 29일 마지막으로 종용하였을 때도 민은 거절하였다.
해군 참모총장 디에프 쾅 퉁
남베트남군 제2군단장이었던 팜반푸(Pham Van Phu) 소장은 가족들의 철수를 부탁하고 자신은 그대로 남았다가 북베트남군이 점령한 2일 후에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남베트남군 제1군단장 트룽(Truong)은 키(Ky)의 자가용 헬기로 미 함정에 안착하였고, 남베트남군 제3군단장 토안(Toan), 티우(Thieu)의 안보담당 보좌관이었고 부정으로 이름난 당 반 쾅(Dang Van Quang) 중장, 참모총장이었던 비엔(Vien)이 떠난 후옹이 후임으로 임명한 빈록(Vinh Loc) 중장 등도 다 탈출하였다.
팜 반 푸 소장
피난하는 고위인사.. 전투복 차림이 고 쾅 트룽 1군단사령관, 콧수염이 구엔 카오 키 부통령 겸 공군 원수
당 반 쾅 중장
빈 록 중장
병약한 마틴 미 대사는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 4월 28일 부인을 먼저 철수시키자는 직원들의 건의에 남베트남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준다고 거절하고 공관에 사물들은 그대로 놔둔 채 4월 30일 03:45에 마지막 두 번째 헬기로 부인과 같이 철수 헬기에 올랐다.
그래험 마틴 주베트남 미 대사
미 대사관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400여 명도 더 넘었다. 때로는 질서가 흐트러지기도 하였으나 미 해병대가 강권으로 질서를 바로 잡았다. 마틴 대사가 떠나면서 6대를 더 요청한다고 하였으나 미국인 철수완료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미 국무부 상황실에서 작전을 종료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와 마지막 헬기가 05:24에 이륙하고 철수작전은 끝났다. 키신저(Kissinger)는 자랑스럽게 미국의 철수작전이 종료되었다고 기자들에게 발표하였다.
대사관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을 제지하는 미 해병대
주베트남 한국대사 이대용(李大鎔) 외 140명의 한국인이 탑승을 하지 못하였고 이 대사는 이후 5년 동안 북베트남 치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억류생활을 해야 했다.
주베트남 한국공사 이대용
미군들은 4월 29일 23:30부터 장비를 폭파하기 시작하였고 마지막 남은 미 해병대는 폭약에 지연신관을 장착한 후 4월 30일 07:30에 밖에서 철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개스탄을 던지며 문을 폐쇄하고 07:53에 대사관 옥상에서 이륙함으로써 모든 미국인은 이제 사이공을 떠났다. 잠시 후 미 대사관 건물 내부는 폭파되었다.
사이공 함락 직전, 미국 대사관 옥상을 통해 탈출하는 사람들
헬기에 타려는 베트남인을 주먹으로 제지하는 모습
4월 29일, 30일 양일 18시간 동안 헬기 70대, 630쇼티로 미국인 1,373명, 남베트남인 5,595명, 제3국인 83명을 철수시킴으로서 사상 최대 규모의 헬기 철수 작전이 단시간 내에 이루어졌다. 4월 중 미국인 6,763명, 남베트남인과 제3국인을 포함하여 45,125명, 거룻배 어선을 이용하여 미 함정에 탑승한 6,000여 명이 남베트남을 탈출하였다. 기타 민간 항공기를 이용하거나 비밀리에 수송된 인원도 4,000명 가까이 되어 패망 직전까지 남베트남을 탈출한 남베트남 사람들은 65,0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헬기로 철수하는 미국인들
미국의 철수작전은 마틴 대사 지침 하에 미군이 수행하였다. 미 의회는 철수 후에 미군과 군용장비를 운용하여 남베트남인을 철수시킨 것이 못마땅하였다. 대통령이 해외에 주재하는 미국인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는 권리는 인정하나 남베트남인을 철수시키는 데에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 없이 함선, 항공기, 해병대를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논쟁이 의회에서 벌어졌다.
포드(Ford) 대통령은 끝없는 논쟁에 지쳐 백악관 대변인을 통하여 “남베트남인을 철수시키는데 미군을 운용한 것은 합법성을 따져서 운용했던 것이 아니라 도의적인 측면에서 미군을 운용했고 남베트남인들을 철수시켰다. 그들은 공산화 이후 죽을 것이기 때문에 구해주었고 지금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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