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말비나스) 제도를 둘러싼 영유군 다툼을 드디어 군사적으로 해결하려 하는데, 1982년 4월 2일부터 6월 14일까지 남대서양에서 이루어진 치열한 전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이 분쟁에서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눈에 띠는데,
1. 영국 핵잠수함의 아르헨티나 순양함의 격침
2. 엑조세 공대함 미사일의 영국 구축함 세필도호의 격침
3. 시 스쿠아 공대함 미사일의 사용
4. 수직이착륙기인 해리어기의 본격적인 실전투입
5. 장거리 공격함대의 편성과 운용
6. 아르헨티나 항공기와 영국 함선과의 치열한 전투
7. 영국 특수부대의 활약
8. 미국과 소련의 은밀한 지원
9. 이로인한 미국의 남미에 대한 영향력 감소 등등...
과 관련한 포클랜드 분쟁을 차근차근 짚어보고자 합니다..
### 1. 포클랜드 제도란..###
(1) 포클랜드 섬
영국 본토에서 약 13,000km(우리나라에서 이탈리아 정도의 거리), 남대서양 마젤란해엽에서 480km(참고로 동해안에서 독도까지가 250km)떨어진 200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총 면적은 우리나라 전라남도와 비슷한 12,000평방킬로미터이다.
(2) 지형 및 기후
주 섬은 2개의 커다란 섬으로 동포클랜드와 서포클랜드로 이루어져있고, 나무가 자라지 않는 척박한 곳으로 가장 높은 곳이 Mt. Usborne 으로 해발 705 미터이다. 기후는 습하고 바람이 많이 불며 여름에는 10도, 겨울에는 2도 정도이다.
(3) 인구 및 경제
1980년 당시 총 1,813명으로 이중 1,000명이 동포클랜드의 유일한 도시인 포트 스탠리에 살고 있고 나머지는 각지에 흩어져 있다. 대부분이 영국 정착민들로 이들은 60만마리의 양들을 키우며 양가죽을 영국에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80년 기준으로 280만 파운드를 수출하였고 200만 파운드의 식량, 공산품, 기계류 등을 수입하였다.
최근에는 관광수입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사실 이곳의 경관은 다른 곳에서는 볼수 없는 비경들이라 사우스조지아섬들과의 연계 해상 크루즈 여행이 각국의 여행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4) 사우스 조지아섬
포클랜드 섬에서 남동쪽으로 1,450 km 더가면 길이 160km 정도의 섬이 나오는데, 이곳이 사우스 조지아섬이다. 빙하와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섬으로 포클랜드도 그렇지만 펭귄들이 많다. 사람은 살지 못하는 곳으로 주로 연구원들이 기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5) 사우스 샌드위치섬
사우스 조지아섬에서 560km 남쪽으로 더 가면 나오는 섬들로 남극까지 섬들로 이어져 있다. 거의 남극이라고 보면 된다.
첨부파일

- 스탠리 전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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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포클랜드/말비나스 제도의 영유권 다툼의 역사 ###
포클랜드/말비나스 제도에 대한 역사가 참 복잡합니다...제국주의 시대에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하는 시도들과 치열한 경합, 결국 힘없이는 아무것도 안되는 냉엄한 현실을 역사가 반증합니다..
(1) 최초의 발견과 상륙
처음으로 이 무인도를 발견했다고 하는 주장들 중에는 이탈리아인 Amerigo Vespucci가 1502년에, 포루투칼의 마젤란이 1520년에,..이 중에서 대체로 세 가지가 인정되고 있다. 영국의 존 데이비스가 1592년에 발견했다는 것과, 네덜란드의 Sebald de Weert가 1600년에 제이슨 군도를 탐험했다는 것과, 1690년에 영국인 존 스트롱 선장이 북부 해안에 상륙하여 포클랜드경의 이름을 따서 “포클랜드 사운드”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2) 최초의 정착
최초의 정착은 영국도 스페인도 아닌 프랑스 사람이였다. 1764년에 Port Louis에 프랑스 사람 Antoine de Bougainville 이 정착하면서 프랑스 식민지로 주장하는데, 스페인의 거센 반발을 초래한다. 그 후 프랑스의 생 말로 항에서 떠난 어부들이 주로 정착하게 된다.
다음해인 1765년, 영국인 존 바이런은 북쪽 해안을 탐험하며 서포클랜드의 Saunders Island에 상륙한다. 그리고는 바로 Port Egmont로 명명하고 영국 섬이라고 주장한다. 1766년에는 영국인 존 맥브리드가 그곳에 정착하며 식민지를 건설하고 Port Louis에 있던 프랑스 사람들을 몰아내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Bougainville은 스페인에게 그 소유권을 팔아버린 후였다.
(3) 스페인 식민지
De Bougainville는 1767년 정식으로 스페인에 소유권을 팔고, 스페인은 Port Louis를 Puerto Soledad라고 지었다. 스페인 행정관이 부임하였지만 1769년까지 서포클랜드의 영국인들과 동포클랜드의 스페인들 사이에는 서로를 쫒아내려고만 하였다.
다음해, 1,400명의 군대와 함께 5척의 스페인 함선이 도착하였고 Port Egmont의 소규모의 영국군들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치열한 협상끝에 1771년 스페인은 영국인들의 Port Egmont로의 귀환을 허용했다. 그러나 3년후인 1774년에 어쩐 일인지 영국인들은 모두 포클랜드에서 철수한다. 그 후 19세기초까지 포클랜드는 스페인의 식민지 Islas Malvinas 로 남게 된다.
(4) 아르헨티나의 소유권 주장
스페인이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하고 그 힘을 급속하게 잃어버리자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아르헨티나는 전의 스페인 식민지 영토에 대한 원 소유권을 주장하며 1820년에 포클랜드 점령을 위해 한 척의 함선을 보낸다. 그후 1828년에 최초의 아르헨티나 주민들을 보내고 행정관을 임명하며 포클랜드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에 영국은 항의하며 소유권 주장을 다시 하기 시작한다.
(5) 미국과 영국의 개입
1831년, 미국인들이 포클랜드 섬에 상륙하자 이들은 체포되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압송된다. 이에 미국은 전함 렉싱턴호를 Puerto Soledad로 보내어 포격을 가하고 상륙하여 주민들을 체포하고 자기들 맘대로 새 행정관을 임명하나 곧 성난 주민들에게 살해당한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하자, 영국은 1833년 초반 온슬로우 함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함대를 보내어 아르헨티나 주민들을 본토로 내쫓고 영국령 “포클랜드”로 명명한다. 아르헨티나가 강력 항의했지만, 영국은 1770년의 스페인과의 협정에 따른 것이라고 하며 무시한다.
(6) 영국 식민지
영국은 본격적으로 포클랜드를 개발하기 시작하고 1842년, 영국령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1845년 Port Stanley 가 건설되고 이때부터 영국은 오랜 기간의 실효적 지배를 주장하게 된다.
누가 최초로 발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영국인들이 최초로 상륙했고, 프랑스인들이 최초로 거주했으며, 스페인인들이 최초로 식민지화했고, 아르헨티나인들이 최초로 주둔군을 보낸 걸, 영국인들이 자기들이 가장 먼저 밟은 땅이라고 힘으로 밀고 들어와 지금까지 차지하고 있는 섬, 그게 바로 포클랜드다.
(7) 아르헨티나의 주장
아르헨티나의 끈질긴 주장과 유엔의 탈식민지화 정책에 따라 유엔은 1965년 제2065 결의안을 발표하며 포클랜드/말비나스 영유권 분쟁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고, 영국과 아르헨티나에게 평화적 해결방법을 모색토록 한다. 대화는 시작되었고 이후 17년 동안 이어졌다. 영국은 초반에는 매우 유연한 태도를 취하며 대화에 응했고, 아르헨티나도 1971년까지 주로 경제개발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러나 결국 양측은 자신의 주장에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게 된다. 영국은 포클랜드 주민들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아르헨티나는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주장한다.
1980년 포클랜드 주민들(영국인들)은 유일한 해결책인 정해진 기간동안의 임차권 부여에 대한 거부를 하게 된다. 결국 더 이상 대화는 불가능하게 되고 전쟁으로 치닫는데.... -
### 3.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배경 ###
(1) 격변하는 정치와 군부의 등장
아르헨티나는 20세기 들어 정치적 대격변을 겪는데, 1916년부터 1976년 사이에 대통령이 무려 22번이나 바뀐다. 특히, 1930년대부터 등장한 군부 세력은 실권과 재집권을 거듭하다 - 이 사이 유명한 페론과 그의 아내 에비타가 등장한다 - 1976년 각군 사령관으로 이뤄진 구테타 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아예 군부 지들끼리 돌아가며 대통령을 해먹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우선 육군 중장이었던 '비델라'가 76년부터 81년까지 5년간 대통령을 해먹는다. 그를 이어 '비올라'가 대통령에 오르나 그 해 12월을 넘기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내분이 일어나 해군제독과 육군대장의 지지를 받은 '갈티에리' 참모총장이 81년12월 대통령에 오른다.
이들 정치군인집단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구테타로 집권한 군부가 세계 여느 나라에서 으레 그렇게 하듯, 좌익세력을 때려잡는다는 명목으로 무수한 시민들을 잡아 가두고 또 수많은 사람들을 행방불명 시킨다. 이 기간 동안 어떠한 기록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숫자가, 최소한 12,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비옥하고 광대한 토지에서 나는 농축산물을 기반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에 공급하는 식량을 거의 혼자서 감당하며 194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5대 부국 중 하나로 부상하고 있던 이 나라는, 그렇게 반복되는 군부의 구테타와 그로 인한 불안정한 정치, 치솟는 실직율, 이반하는 민심, 인기위주의 경제정책 등으로 인해 1981년에는 이미 인플레이션이 600%에 이르고, GDP는 끊임없이 하향곡선을 그리는 수렁 같은 경기침체를 장기간 겪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나라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 연일 계속되는 시민들의 시위 속에 취임한 '갈티에리' 대통령은 뭔가 강력한 돌파구를 필요로 했다. 충분히 강력해서 내부의 모든 불만을 잊게 만들고, 지금 나라가 희망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할만한 획기적이고 강력한 뭔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2) 전쟁
사실, 갈티에리 대통령의 포클랜드 탈환 계획이 유혈 전쟁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아르헨티나 군부의 여러 가지 판단착오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훗날 각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이 초기 포클랜드에 기습적으로 군대를 보낼 때만 하더라도 그것이 영국과의 전면적인 전투로 발전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군부 내부에 거의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우선 그들 스스로 포클랜드를 되찾아야 한다는 명분이 너무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서, 내부적으로 국민들을 한 번에 통합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이토록 명백한 건은 국제사회의 지지도 아주 수월히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또한, 일단 점령하고 나면 영광의 대영제국 시절을 뒤로한 체 NATO에서의 역할 감소, 군비 축소, 장기적 경기침체와 인기 하락까지 겪고 있던 대처가 설마 그때까지 대부분의 영국 국민들도 잘 모르는 그 머나먼 곳의 작은 섬을 되찾으려고 그 먼 곳까지 엄청난 비용을 써가며 군대를 보내겠냐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일단 점령하고 나면 미국 외교의 기본 기조인 '먼로 독트린' - 미대륙 국가들에 대한 유럽 지배나 그 연장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 과 1947년 미대륙 국가들끼리 체결했던, 외부의 침입이 있을 경우 서로 협력한다는 '리오 조약'에 근거해, 미국이 중간에 나서서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중재를 할 것이고 몇 가지 조건에만 합의하면 아마도 그 땅은 국제적 지지를 받는 아르헨티나 수중으로 손 쉽게 넘어올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비록 급증하는 데모 참여인원 등 급박한 국내 상황때문에 원래 계획보다 몇 달을 앞당기긴 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작전을 생각해 왔고 또한 군사력에 있어서도 결코 불리할 것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특히 공군력에 있어서 마하 2의 초음속 전투기 Mirage III와 Super Etnedard는 음속 이하의 영국 Harrier보다 빨라 공중전에서 훨씬 유리하고, 아르헨티나 쪽에서는 포클랜드가 비행거리 이내에 있었던 반면 영국에게 그 엄청난 거리(우리나라에서 이탈리아의 시실리섬 정도의 거리)는 - 군사작전의 한계로도 작용하겠지만 - 무엇보다 경제침체를 겪는 영국에게 엄청난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 galtieri.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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