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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역사철학과 사회진화론 (박응석/서울대)

역사철학과 사회진화론

 

--- 하버마스의 역사철학 비판을 중심으로

 

 

박 응석 서울대

 

 

I. 들어가며

 

 

하버마스의 이론적 작업은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다. 그의 이론이 여러 영역들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하고 폭넓은 이론을 포괄하는 하버마스의 작업을 몇 가지 틀로 도식화시킨 뒤 그 발달과정을 간단히 정리하기란 매우 힘들다. 그렇지만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려는 문제의식은 비판적 사회이론의 정초가능성 탐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사회비판의 규범성 정초를 일관되게 추구하려는 까닭은 그가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비판이론에 비판의 규범적인 정초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비판이론적 전통에 없는 언어적 전회와 실용주의의 수용을 통해 보편화용론과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러한 전개는 사회 정태적인 측면에서, 비판적 사회이론을 구축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러나 사회를 정태적인 수준에서, 즉 지금 이 사회가 바람직한가라는 물음에서 고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사회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앞으로는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것으로 희망할 수 있겠는가라는 역사적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물론 역사이론으로서 비판이론을 정초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일관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여러 사건들을 하나의 이론이라는 틀로서 만들기 어렵다는 것은 이미 앞서 역사철학의 전개에서 지적했던 바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과거와의 연관이 필요하다. 지금 현재의 문제들이 어떻게 발생하여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지만 비판이 온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사화된 비판은 그 결과 자체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앞으로의 실천적 지향을 요청한다. 물론 이러한 희망이 유토피아적 시각을 갖는 것과는 조심스럽게 구별되어야만 할 것이다. 결국 비판적 사회이론을 기획하려는 하버마스의 작업이 성공하려면 그 기획은 역사이론적 틀과도 관련을 맺어야 한다고 본다.

 

하버마스의 이론이 역사이론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지 살피는 데 있어서 그 고찰지점은 크게 두 방향을 향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역사철학에 대한 그의 입장과 이후 작업에 있어서 관련성이다. 다른 하나는 하버마스 이론의 주된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진화론 및 의사소통행위론과 역사이론과의 관련성 문제이다. 흔히들 하버마스의 이론전개는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과 포기라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언급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앞의 두 지점 중 전자를 중심으로 역사철학과의 관련성을 조심스럽게 논하고자 한다.

 

 

II. 하버마스의 역사철학 비판

 

 

 

역사철학의 극복이 단절이냐 혹은 재구성이 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은 역사철학을 그 핵심요소들로 나누어 이 요소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살필 때 제대로 드러날 수 있다. 이 핵심요소와 관련해서 역사에 대한 의미를 묻는다는 것, 역사를 파악하려고 한다는 것은 역사철학이 역사이론으로서 정립되기 위해 가장 우선시되는 필요조건일 것이다. 즉, 모든 역사이론은 그것이 근대 역사철학이던 아니던간에 상관없이 역사에 대한 파악에 있어서 일관된 설명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역사에 대한 일관된 설명틀이 존재한다면 일단은 역사이론으로서는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하버마스의 역사이론이 역사철학이거나 적어도 역사철학과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이 있는가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反역사철학도 나름대로 역사이론일 수는 있으므로 하버마스의 역사이론이 反역사철학인가 아닌가라는 물음은 역사철학의 중심요소 중 하버마스의 이론에 수용될 부분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탐구와 직결된다. 여기에서는 초기 하버마스의 이론적 작업을 중심으로 그가 행한 역사철학비판을 우선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이 헤겔-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 가지는 일부 요소에 해당함을 밝힐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비판이 전면적인 역사철학에 대한 거부라기 보다는 역사철학의 요소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음을 언급하고자 한다.

 

 

2.1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

 

 

하버마스의 이론이 역사이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만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역사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는 마르크스 역사 철학에 대한 하버마스의 입장을 주목해야 한다.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은 하버마스의 초기 작업부터 바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이론과 실천』에서 「철학과 과학사이 : 비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라는 논문을 통해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관계, 계급투쟁론, 프로레타리아트 등의 개념을 비판하고는 있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순수한 철학도, 순수한 과학도 아닌 비판(Kritik)이라고 보면서 긍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측면도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정치적 의도를 지닌 역사철학"의 관점과 상응한다고 말했을 때, 어느 정도는 초기에 하버마스가 실천적으로 지향된 역사철학 개념을 유지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하버마스의 초기 작품인『이론과 실천』은 1963년에 첫판이 나온 이후 1971년에 다시 신판이 나왔다. 여기에는 첫판에 없었던 신판 서문이 실려 있다. 따라서 60년대 초반부터 71년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와 역사철학에 대한 하버마스의 입장이 조금씩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책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적으로 논구한 문헌보고」라는 논문은 이미 57년에 다른 곳에서 발표했던 글이기에 거의 15년에 해당하는 시기의 사상적 전개를 엿볼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초기 하버마스의 작업을 일단락 짓는 68년에 나온 『인식과 관심』에서도 역사철학에 대한 언급이 일부분 드러나는데 주된 내용은 독일관념론 철학의 전개와 관련하여 다루어지고 있다. 결국 이 시기를 통하여 하버마스가 내린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한 입장은 첫째, 마르크스

 

의 역사철학이 역사신학으로부터 내려오는 구원적, 목적론적 성격을 갖는다는 역사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類의 자기전개를 노동의 변증법으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마르크스 역사철학의 특수성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에서는 이 둘을 중심으로 그러한 비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또 하버마스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하려는 대안적 요소로는 무엇을 언급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2.1.1 『이론과 실천』에 나타난 역사철학 비판

 

 

『이론과 실천』5장에서 하버마스는 쉘링과 마르크스를 비교하면서 마르크스와 쉘링에서 모두 역사의 통일적 주체와 구원사적 맥락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 둘은 "세계의 타락을 역사적 구원에로 돌리려는 욕망을 공유"(『이론과 실천』S 217)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헤겔로부터 노동의 변증법을 받아들인 마르크스에게서는 노동으로의 환원과 구원사적 역사관 모두가 나타나게 된다.

 

 

기술적인 노동 및 노동과정을 유기적인 삶의 과정과 동일시하면서 다시 삶의 과정을 이념의 절대적 삶과 동일시하는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죽음을 택함으로써 악순환 자체에서 구제된다는 식으로 역사에 대해 구원을 보증해 준다. (『이론과 실천』S 221)

 

 

이러한 하버마스의 비판에서 조심스럽게 살필 부분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이 신의 구원을 다시금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려는 부분이 아니라, 도달되고 해방된 상태로서의 자연이 인간에 의해 완전히 합리적으로 규제될 수 있다고 본 것과, 그러한 자연을 목적 행위적 대상으로만 고찰하고 있다고 본 부분이다. 인간에 의해 자연이 통제되고 결국 완벽히 규제된다고 해서 해방된 사회가 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버마스가 보기에 이미 경험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적인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것과는 달리 규범의 발달은 따로 마련되어야 하며 "기아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 반드시 노예상태의 지위 저하로부터 해방으로 수렴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하버마스 비판의 초점은 자연을 인간 노동의 대상으로, 즉 목적행위적 대상으로만 보려는 마르크스의 환원주의적 시도에 가 있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역사철학이 아니라 하버마스가 보기에 노동과 상호작용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인 상호촉진 관계가 없으므로, 노동이 아닌 상호작용에 해당하는 측면이 따로 고찰되어야 한다.

 

노동으로의 환원주의적 속성을 가진 마르크스 역사철학의 특수성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하버마스는『이론과 실천』7장에서 역사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이 부분은 하버마스의 이론틀이 얼마만큼 역사철학의 핵심요소와 관련을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단서를 제시해줄 수 있으므로 주의 깊게 살펴볼 부분이다. 하버마스는 역사철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비코의 역사철학이 역사신학과 마찬가지로 세계사적 통일성을 상정하고 있으며 역사가 총체적 위기의 흐름이라는 데서 종말-구원적 역사관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계몽주의

 

이후 역사는 순환과정이 아니라 진보의 법칙에 따른 직선적인 방향성이라는 개념을 내세우긴 해도 이런 계몽주의적 역사관 역시 역사진보가 자연의 목적에 따라 목적론적으로 실현된다고 보았을 때 여기에는 신학적 목적론, 신의 섭리관이 암묵적으로 내재해 있다고 본다. 이 목적론이 가지는 신학적 성격은 헤겔이 역사의 추진력으로 변증법적 모순개념을 끌어들였을 때 다소나마 해소되는 상황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추진력 전체를 헤겔은 절대적인 자기의식을 통해 정신의 역사 속에 포섭하므로 다분히 사변적(spekulative)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헤겔의 정신에 해당하는 개념이 마르크스에게서는 노동으로 바뀌었을지라도, 그 역시 회고적으로 볼 때에는 역사를 세계사의 총체성―물질적 생산체제 하에서 노동이라는 사회적 실천―으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이 있고, 미래 지향적으로는 소외된 노동을 완전히 극복하는 혁명적 실천을 그려 넣고 있다. 비코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근대 역사철학에서 하버마스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세계사를 총체성의 단일한 틀로 설명하려는 것과, 목적론적 사고, 역사과정이 도달되는 지점에서 엿보여지는 유토피아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는 구원의 계기로서 주어진 신학적 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총체성으로서의 역사 개념에 문제가 있음을 하버마스는 지적한다. 총체성을 향하는 세계사의 통합과정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성의 역사성에서 이러한 역사성은 그 시원에서 결말까지 고정되어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최근에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역사성인 것이다. 즉 "인간이 사회조건을 합리적으로 규제하게 된 게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면, 인간이 역사를 이성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역사 단계 전체에 걸쳐 타당할 수는 없게"(『이론과 실천』S 278)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렇게 역사철학에 있어서 이성의 역사성이 전제하고 있는 총체성이 잘못되어 있음을 비판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역사철학 자체가 당장에 무의미해진다고 보지는 않았다. 더 나아가 역사철학에서 긍정적으로 인정할 부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스스로 역사를 창조하면서 특수한 역사들이 세계사로 포섭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면 역사철학의 전제 자체가 결코 무의미해질 수 없다고 하버마스는 말한다. 그가 보기에 역사철학의 문제 제기 방식이 낡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도피주의적 색채를 띤 것이 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역사철학 전체를 거부했다기 보다는 근대 역사철학이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던 신학적 유산을 비판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 역시 전면적인 거부의 성격을 갖는 그런 비판이 아니었다. 1971년 『이론과 실천』신판 서문에서 그는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 "전통적 정치학과 근대 사회철학의 약점을 모두 보완하면서 실천적 의도를 견지하는 사회이론"(『이론과 실천』S 10)이라고까지 말한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헤겔로부터 빌어 온 변증법의 논리인데, 유적 존재인 인간의 역사가 노동의 과정인 자연사로 환원되고, 소외의 지양이 필연적 과정을 거쳐 해방된 사회로 나아간다는 합법칙적 발전을 말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에 대해 하버마스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부분과 역사철학적 문제제기 맥락에서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엄밀히 나눌 필요가 있다. 이 내용이 분명해진다면 마르크스 역사철학 비판을 거쳐 그가 새로운 이론으로 나아갈 때에도 역사철학적 물음의 지반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이론 작업을 진행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1.2 역사철학과 해방의 문제

 

 

『이론과 실천』을 중심으로 살핀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한 하버마스의 입장은 역사철학적인 문제제기 자체는 일부분 인정하면서도 마르크스 역사철학이 가지고 있는 환원적 성격과 변증법적 발전논리는 비판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바로 역사철학에 대한 재구성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 있어서는 실천적으로 지향된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 바로 비판(Kritik)이라고 하면서 그 핵심을 옹호하고자 하는 편에 가까웠다. 1971년에 이르기까지 하버마스는 독일관념론적 전통에 있어서 반성이 가지는 인식론적 의미를 그 역사적 맥락에 따라 재고찰하려고 하였으며 이는 『이론과 실천』이나『인식과 관심』모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와 관련하여 60년대 행해졌던 실증주의 논쟁과 해석학 논쟁을 거치면서 하버마스가 주되게 추구하였던 작업은 비판적 사회이론에 있어서 비판의 성격을 제대로 갖추는 일이었다. 비판(Kritik)은 순수한 철학도 아니요, 실증주의와 과학주의에 함몰되는 순수한 과학만도 아니었을 때, 이 비판은 자기반성(Selbstreflexion)과 해방적 관심을 지향하는 인식관심이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행해지는 마르크스에 대한 언급도 그것이 자기반성으로서의 비판(Kritik)의 성격을 제대로 갖는가 아닌가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었으며 이러한 커다란 이론적 의도 하에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도 부분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천적 의도를 지닌 비판으로서의 자기반성이 마르크스 역사철학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는 다음의 대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실천적 의도를 지니고 구성된 사회이론의 규범적 기반을 마르크스처럼 변증법적 논리에서 찾을 때는 지났다. 물론 자기반성의 논리는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의 모든 혼란을 통해 자아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적으로 추적함으로써 자아를 각성시키는데... 억압된 대화가 남긴 역사적 흔적에서부터 억압되었던 것을 재구성하는 것이 변증법의 과업이라면 자기반성의 논리를 '변증법적'이라고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변증법적 사고가 억압연관에 흡수되면 그 억압연관만이 변증법적인데 이것이 아도르노의 중심된 통찰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르면 문제가 지연될 따름이다. 왜냐하면 왜곡된 의사소통구조를 확인시켜 줄 궁극적인 논리의 기반은 바로 왜곡되지 않은 대화를 통한 의사소통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천』 S 23)

 

 

결국,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의 역사철학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논리에 따라 역사전개가 필연성을 갖는다는 것을 부인하려 했을 뿐이다. 오히려 역사전개를 필연적으로 보지 않는 대신 실천적 의도와 해방적 관심이라는 자기반성의 논리로 역사유물론이 자리매김되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의 법칙적 전개 대신에 하버마스는 역사철학이 과학적으로 반증가능한 성격을 갖을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 때까지의 역사유물론에 대한 총괄적 평가로서 1971년에 『이론과 실천』신판 서문에서는 역사유물론이 "인간의 類적 역사에 대한 자기반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에서 변증법적 사고가 노동의 소외가 만들어내는 물화현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