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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덕과 실천의 연계성/박병기

덕 윤리학에 있어서 덕()과 실천(實踐)의 연계성

- A. 맥킨타이어의 의존성과 덕의 연계성 논의를 중심으로 -

 

박 병 기*

 

 

 

I. 우리의 윤리적 상황과 규칙주의의 한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즉 현대 한국 사회는 윤리적으로 어떻게 평가받을 수 있는 사회인가 ?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동방예의지국의 전통이 살아있는 영역이 있어서 그다지 수준 낮은 사회라고 보기 어려울 듯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보면 특히 공중 도덕의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보거나 국가적 부패지수 등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구제 받을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자기비하 의식이 일어나기도 한다.

(null) 윤리(倫理)가 인간관계의 바람직한 모형을 모색하는 노력이라는 유교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한편으로 인간들 사이의 정이 살아남아 있는 우리 * 전주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사회가 살기 좋은 곳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지만, 그것도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정되고 그와 관계가 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공정하지 못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본다면 결코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런 점들에 유의한다면, 오히려 각 개인들의 이익 추구의 욕구를 정당하게 인정해 주면서 그들의 이익이 충돌할 때에 공정성(公正性, Fairness)의 원칙을 거의 법적인 수준에서 강제하는 서구의 계약론적 윤리가 더 우리 사회에 적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렵다는 일종의 도덕적 공감대를 우리 사회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고, 그것이 또 다른 우리의 도덕적 상황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도덕을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은 도덕에 대한 이중적인 평가와 관련된 문제이다. 한편으로 도덕을 매우 중시하는 듯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행동에 옮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도덕을 위선으로 간주하면서 경멸하는 이중적 자세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자세는 우리 윤리학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현상일 뿐만 아니라, 특히 도덕교육을 위해서도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겉으로 도덕을 중시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도덕에 대해서 부정적이거나 냉소적인 자세를 취하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행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인 때문인 것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첫째는 도덕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지적인 결손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우리의 행동에서 도덕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고, 그때의 도덕이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도덕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겉으로만 도덕을 중시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주변에서 만나는 일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의 설명으로서의 설득력을 지닌다.

둘째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엄숙주의가 도덕에 대한 이중적 인식을 양산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첫 번째와 유사하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도덕에 대해서 경직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적인 결손과는 차이가 있다. 도덕적 엄숙주의는 삶의 모든 영역에 도덕적 당위를 적용하면서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들을 평가하는 강한 도덕주의에서 파생된 것으로 대체로 도덕이 이데올로기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우리의 경우 고려 말기와 조선 후기의 불교윤리와 유교윤리의 경직화로 인한 도덕적 엄숙주의의 만연을 경험하였고, 현재도 그러한 굴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셋째, 도덕을 지나치게 일종의 규칙(規則, rule)으로만 이해하는 의무론적 윤리설의 잘못된 적용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난 바와 같이 도덕을 일정한 상황 속에서의 규칙 준수와 동일시하는 윤리학적 관점들이 특히 유교윤리와 서구 근대 윤리학에서 강조되고 있고, 이러한 행위 중심의 윤리학은 행위의 주체에 대한 관심을 덜 기울이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물론 유교윤리나 칸트 윤리설과 같은 윤리학설의 출발점은 행위의 주체인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심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구체화되어 실생활에 적용되는 과정에서는 그러한 인간학적 전제를 상당 부분 망각하면서 규칙 그 자체만을 중시하는 한계로 연결되어 오히려 현재와 같은 윤리적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우리 사회의 윤리적 상황을 분석의 출발점으로 하는 이 논문에서는 그 중에서도 세 번째 원인에 주목하고자 한다. 행위의 규칙으로서의 도덕에 대한 관심은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을 강조함으로 인해서 건조한 규칙주의로 전락하였고 그 결과 도덕을 그 주체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다는 것이 우리 논의의 출발점이다. 건조한 규칙주의는 그것이 본래 갖고 있었던 실천적 힘이 거세되면서 법적인 강제 장치만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윤리학적 딜레마 상황을 만들어 냈다. 즉 도덕의 본질적 속성인 자율성을 상실하고 타율적인 장치로 유지하면서도 도덕이라고 강변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은 결국 도덕과 윤리를 도덕적 실천을 담보해내지 못하는 건조하고 공허한 외침으로 머물게 하였고, 그 논리에 충실하다보면 우리는 법과 도덕의 영역을 구분할 수 없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도덕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도덕은 실천을 담보해내야 한다. 즉 도덕은 본질적으로 실천적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실천적 내용을 담보하고 있는 새로운 윤리설을 다시 찾아내야 한다. 그러한 작업의 하나로 이 논문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이다. 그는 ‘70년대 이후 영미윤리학사에서 규범윤리학의 부활을 주도한 대표적인 윤리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 중의 하나인 롤즈(John Rawls)가 규칙주의 윤리설의 현대적 변용을 시도했다면, 그는 덕윤리학(Virtue Ethics)의 새로운 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적인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최소한 그가 윤리학의 실천적 영역, 특히 도덕적 행위 주체의 덕성을 통한 실천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현대 서구의 윤리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작업을 덕과 실천의 연계성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재검토해 보고, 그것이 우리의 상황과 어떤 의미 관련을 지니는지를 분석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II. 왜 덕 윤리학(德 倫理學)인가?

 

1. 다시 개인에서 공동체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는 윤리학의 주된 관심사의 하나이다. 개인이 우선인지, 아니면 공동체가 우선인지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과 공동체가 모두 인간의 삶에 관한 논의에서 빠지기 어려운 주제라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피상적으로 서양 사상과 우리의 전통을 대비시키면서 우리는 공동체적이고 서양은 개인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식적인 견해를 일면 수용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에서 엄밀히 검토해 보면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견해임이 쉽게 드러난다. 서양윤리사상사에서도 이미 그 출발점부터 정치적 공동체인 국가(폴리스)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고 중세는 기독교 공동체를 근간으로 해서 이어져온 시기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만 시기를 서구의 근대 이후로 한정지으면 그러한 대비는 설득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공동체와 개인이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정치공동체와 동일시되거나 그 영향 아래에 들어가고 나면, 개인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당하거나 심한 경우 착취당하는 역사적 사례들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각 개인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과 욕구는 커지게 되고 일정한 시점을 넘어서면 폭발하는 사례들을 우리의 민중운동사 속에서도 잘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말의 동학 혁명을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보편성의 영역과 함께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개념 규정이 서구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되어야 한다. 즉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자유와 권리는 민중운동사에서 표출되었던 그것과 유사성을 지니는 것이지만, 그것 자체는 서구의 같은 개념의 번역어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의 층위는 현재 우리들의 가치 판단 과정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면서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혼란을 극복하는 시작은 그 차이에 유의하면서 현상을 분석하는 일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철학적 바탕 위에서 부르죠아로 대표되는 서구의 새로운 주도 세력과 기존의 귀족들 사이의 투쟁과 계약의 산물로 등장했던 제한적 의미의 자유주의(liberalism)’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제한적인 정의를 시도했다. 즉 인간은 이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주로 자신의 본능적 이익 충족의 욕구에 기여하는 수단적인 이성일 뿐이라는 정의를 바탕으로 해서, 그 개인들의 이익의 극대화에 모든 목표를 집중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는 긍정과 부정의 두 측면으로 나뉘어 나타난다. 긍정적인 측면은 각 개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적 영역의 자율성 확대와 자본주의적 생산력으로 절대 빈곤의 상당한 부분을 극복한 점이고, 부정적인 측면은 개인들 간의 분배 문제와 함께 국가간, 지역간의 불평등 문제, 그리고 좀 더 본질적인 측면에서 공동체의 와해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와해는 인간의 공동체성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우리의 경우에도 도시 지역에서의 마을 공동체는 거의 무너져 버렸고, 더 중요한 사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인간 실존의 마지막 울타리라고 할 수 있는 가족 공동체의 붕괴 현상도 점차 심화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전통적인 공동체의 와해 또는 붕괴가 윤리적 차원에서 곧바로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민족국가 단위의 공동체가 완화되면서 지구적 차원의 공동체 개념이 발달하고 있다든지, 정보기술을 매개로 하는 가상공동체의 등장 가능성 등이 또 다른 공동체적 대안으로 모색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로의 전환이 가져온 윤리학적 혼란은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다. 그것은 윤리의 보편적 기준에 대한 합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윤리적 상대주의의 중요한 배경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맥킨타이어도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그는 현대의 도덕적 논의들이 보여주고 있는 가장 충격적인 특징으로 도덕적 불일치를 들면서 우리 문화 속에서 도덕적 일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어떤 합리적인 방법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하고 있다. 도덕적 일치 또는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합리적 방법의 부재는 극단적인 도덕 상대주의를 확산시킨다. 모든 것이 개인적 수준에서 판단될 수 있을 뿐 어떤 보편적인 도덕 규범도 있을 수 없다는 도덕 상대주의는 이미 우리들에게도 상당 부분 확산되어 있는 현상이다.

도덕 상대주의의 확산은 한편으로 기존의 억압적 규범들을 반성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도 했지만, 보다 일반적으로는 모든 도덕 규범에 대한 의구심의 확산, 더 나아가 도덕 영역 자체의 축소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윤리사상사에서 인간의 본능을 중시하는 프로이드적 관점의 확산과도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기 보다는 본능적 존재이고 도덕은 그러한 자연스런 본능을 억압하는 기제라는 주장이 자연론적 인간관과 연결되면서 주된 패러다임으로 정착했고, 거기에 사회구조적 관점에 근거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 더해지면서 현대는 도덕 영역에 대한 총체적 공격의 시대로 규정될 만 했다.

이러한 경향은 대체로 ‘70년대를 기점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더 이상 자유지상주의의 확산을 방치할 수 없는 여러 징후들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개인주의화가 모든 공동체적 기제들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우려와 함께, 그것은 곧 인간성 자체의 파괴를 의미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우려들은 주로 응용윤리적 논의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의사와 같은 전문 직업인들에 의해 제기되는 윤리적 쟁점들에 대해서 윤리학자들은 메타윤리적 언급을 제외하고는 거의 도움을 주지 못했고, 그 결과 윤리학계 밖에서 오히려 규범윤리학이 부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인류 공동의 위기라는 환경 위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보다 일반화된다.

환경이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인류 공동체 전체의 문제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높아지면서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환경 문제를 불러온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과학기술과 제국주의적 침략에 바탕을 두고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서구 문명에 비판적 인식은 20세기 초반부터 있었지만, 그다지 관심을 모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환경 문제에 대한 자각은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적 가치의 추구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의 이념 자체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윤리학에 있어서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도덕교육에서 인격(人格, character)에 대한 관심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따르면, 도덕교육은 불필요하게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을 억압하는 기제에 불과하거나, 필요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각 개인의 도덕 판단 능력을 키워주는 목표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 결과 실제로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 사회의 도덕교육은 그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필요성을 인정받았다고 해도 도덕판단 능력의 함양에 한정지어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 결과 현재의 서구 도덕교육은 무시되고 있거나 무능력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 인격교육론자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도덕교육에서의 공동체성의 회복, 보다 구체적으로는 공동체적 덕목교육으로의 전환이라고 것이 인격교육론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2. 행위 중심에서 행위자 중심으로

 

덕 윤리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배경으로 우선 윤리학적 논의의 출발점이 개인에서 공동체로 변화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학적 논의의 초점이 도덕적 행위 자체에서 행위자로 전환되었다는 사실도 빠뜨릴 수 없다. 물론 윤리학에서 도덕적 행위가 문제될 경우에 당연히 그 행위의 주체인 행위자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지만, 행위의 규칙에 초점을 맞출 경우 그 행위자는 일반적 상황에 놓인 모든 사람으로 전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각 개개인의 특성은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경시되는 경향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규범윤리학은 인간학적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왔다. 특히 동아시아 윤리 사상의 경우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규정을 바탕으로 해서 윤리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이러한 윤리학의 인간학적 전제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과 과학적 지식들이 쏟아지고 있는 현재적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의 적합성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인간학적 전제들이 윤리의 토대를 보다 굳건하게 해주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공리주의 윤리설과 칸트 윤리설 이후의 서양 근대 윤리학은 대체로 인간학적 전제를 약화시키면서 인간의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공리주의는 인간을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고 그 관점에서 공리성(公利性, utility)을 계산할 수 있는 합리성을 지닌 존재라고 정의하면서 출발하였고, 칸트는 '악한 경향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선의지도 갖고 있어서 자율적인 도덕성을 갖출 수 있는 존엄한 존재라는 인간학적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윤리학은 대체로 이러한 이성 또는 합리성을 각 개인들로부터 분리시켜서 하나의 독자적인 공리인 것처럼 다루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 결과 행위로부터 행위자가 분리되고, 합리성은 공허한 구호로 전락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제한된 정의에 바탕을 두고, 그 이성에 기반한 윤리를 논하는 대표적인 윤리학이 계약론적 윤리학이다.

계약론적 윤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 도덕을 각 개인들 간의 합의의 산물로 보고자하며, 그 바탕에는 인간의 이기성을 인정하면서 그 각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합리성이 도덕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제가 된다고 보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인간의 이성(理性, reason, vernunft)에 관한 정의는 다양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플라톤에게서는 두 가치 차원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첫째는 이데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즉 이상향을 근사하게 계산해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이고, 둘째는 그것을 바탕으로 이데아의 세계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는 실천 능력으로서의 이성이다. 이러한 이성 개념 중에서 계약론적 윤리설은 첫 번째 의미를 보다 제한시켜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플라톤의 첫 번째 차원의 이성 개념은 기본적으로 기하학적이다. 기하학은 계산 기능을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온전한 도형의 모형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계약론적 윤리학의 이성 개념은 그러한 맥락에서도 일정하게 벗어나 있다. 인간의 이기성을 기본적인 명제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이익을 계산해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이성 개념을 보편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롤즈와 같은 경우에는 근본적으로 플라톤의 이성 개념 중 첫 번째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는 반성적 평형 상태(reflective equilibrium)’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보편적인 도덕감 개념을 살려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킴리카처럼 칸트 윤리설도 계약론이라고 볼 정도로 넓게 정의한다면, 자신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계약론적 윤리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한다. 즉 논자는 계약론적 윤리학의 주된 흐름은 홉스적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고, 그것이 현대의 합의 도덕론에서 보다 완전한 모형을 갖게 되었다는 분석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볼 때 현대 서양윤리학의 주된 흐름은 계약론적 윤리학과 담화윤리학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이성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행위 주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도덕적 행위 자체의 이성에의 부합 정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행위 중심의 윤리학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어떤 원칙을 찾아내서 따라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행위의 원칙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고 가정해도 그것이 윤리적인지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추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본질적 차원의 윤리 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해 볼 수 있다.

덕 윤리학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윤리학의 본질이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행위 주체의 덕성(德性)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인식의 공유가 덕 윤리학의 부활을 가져오는 두 번째 계기라는 것이다. 서양 윤리학이 전통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도덕적 개념은 옳음(right)과 좋음(good), 그리고 그 개념들을 포괄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도덕적 인격(moral character)이다. 그 중에서 근대 이후의 윤리학은 가장 중요한 개념인 인격이 옳음과 좋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규명을 통해서 저절로 밝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한계에 직면하면서 다시 도덕적 행위의 주체에 대한 관심으로 돌아서는 과정에서 덕(, virtue)에 초점을 맞춘 덕 윤리학이 다시 윤리학 논의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III. 의존성(Dependence)으로 덕의 필요성을 설명할 수 있는가 ?

 

1. 현대 서양윤리학의 전개 과정에서의 맥킨타이어

(A. MacIntyre)의 위상

 

덕 윤리학은 매우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현대적 형태로 살아나는 과정에서 역시 그 전통만큼이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서구 윤리학사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덕 윤리학의 원조로 꼽지만, 그의 이론이 현대의 덕 윤리학에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럼에도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현대의 덕 윤리학자를 발견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서양윤리학의 역사에 주목했던 맥킨타이어에 따르면, 현대의 도덕철학 또는 윤리학은 그 도덕심리학적 뿌리와 결별하면서부터 덕을 그 주요한 논의의 주제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늘날 윤리학적 논의 속에서 선에 관한 불일치는 말할 것도 없고 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광범위한 불일치를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일치는 서구인들이 오랜 기간 동안 공유하고 있었던 최고선에 대한 신념이라는 전통을 부정하는 데서 비롯되었고, 이 신념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동시에 성서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서양 사상의 두 뿌리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닿아 있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서양 윤리학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뿌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서구적 전통이 급속하게 와해되기 시작하는 것은 대체로 계몽주의의 출현과 맥을 함께 하고 맥킨타이어는 이 계몽의 기획이 가져온 도덕적 불일치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택한다. 물론 계몽주의가 윤리학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주로 원리 또는 규칙에 근거하여 윤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공리주의와 칸트주의라는 윤리학사의 두 산맥이 완성되기도 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맥킨타이어의 지적이 옳다면, 바로 그러한 계몽의 기획이 보편적 원칙에 대한 공유된 신념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 왔고, 그 이후의 서양 현대 윤리학이 자신의 영역을 메타 윤리학이나 정의주의 윤리설 정도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윤리학사의 흐름에 주목하면서 맥킨타이어의 덕론이 지니는 의미와 위상을 정리해 본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첫째는 현대 서양윤리학의 역사 속에서 규범 윤리학에 대한 새로운 주목은 주로 의무론적 윤리설의 입장에서 이루어졌는데, 맥킨타이어는 그러한 흐름과는 다르게 덕 윤리학에 주목하면서 규범 윤리학의 부활을 시도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규범 윤리학에서 덕 윤리학적 부활은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주목일 뿐만 아니라, 법규범과 차별화된 윤리의 자율성이 강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규칙주의는 그것이 규범성과 자율성을 상실할 경우에 대체로 법을 통한 외적인 제재라는 형식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고, 실제 서구 사회의 상당한 영역이 도덕보다는 법에 의해 지배되고 있기도 하다.

둘째는 전통에 대한 새로운 주목과 해석이 가져다주는 의미이다. 계몽적 기획 속에서 전통은 대체로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위협하는 굴레로서의 전통이라는 해석을 통해서 계몽주의가 이루어낸 성과가 분명히 있지만, 최소한 정신적 영역에서는 많은 혼란과 정체성의 위기를 조성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사태들이 관행(practices)과 전통에 의해 야기되고, 특히 우리의 행동의 상당 부분은 그것에 의해 결정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극복의 대상으로만 보는 자세는 필연적으로 일상에서의 가치 판단의 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맥킨타이어는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면서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함께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맥킨타이어의 시도는 강한 지지만큼이나 많은 반론에 직면하고 있기도 하다. 그에 관한 반론들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지만, 가장 많은 것들은 과연 그의 시도들이 현재의 우리들에게 덕이 필요한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 주었는지의 여부와 근거에 관련된 반론과, 그가 말하는 전통이 갖고 있는 개념적 모호성과 정치적 오용의 가능성에 대한 우려이다. 이러한 반론들에 대해서 맥킨타이어는 현재까지도 지속적인 재반론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 중 첫 번째 반론과 관련된 재반론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최근에 출간하기도 했다. 이제 그의 주장의 구체적 내용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덕이 왜 필요하고, 그 설명이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내려볼 차례이다.

 

 

2. 도덕적 관행(practices), 담론적 자아(narrative self),

그리고 전통

 

맥킨타이어는 현대 윤리학이 본래적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자기 전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첫째는 우리들로 하여금 사실과 당위의 구분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목적주의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목적이 사회적이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중에서 먼저 두 번째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의 시작을 탈맥락화되고 고립된 개인 또는 자아의 전제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었던 강한 목적 지향성이 계몽주의자들에게서는 공통적으로 지양되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결과 각 개인들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왜곡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맥킨타이어가 비판하는 계몽주의적 자아관은 곧 자유주의적 자아관이기도 하다. 자유주의에서는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규정을 각 개인들의 선택의 문제로 남겨둔다. 또한 당위(當爲)의 근거를 보편화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이 사실로부터 추론 가능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당위와 사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는 자연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맥킨타이어가 내세우는 자아관은 담론적 자아(the narrative self)’이다. 담론적 자아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야기하는 동물(story-telling animal)’로 규정하는 데서 나온 인간관이다. 이야기하는 존재란 이야기의 맥락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을 맥킨타이어는 개인 삶의 담론적 질서(the narrative order of a single human life)’라고 표현하고 있다. 내가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로 이어지는 담론 구조를 포함하는 내 삶의 이야기를 인지하고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당위와 사실의 구분이 모호해져 버린 계몽주의 이후의 서양 윤리학에서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목적론의 재설정이고, 이 목적론이 다시 세워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덕이라는 개념과 만나게 된다. 덕을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할 것인가는 그 자체로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지만, 맥킨타이어는 이 논의를 이야기 구조 속에 존재하는 개인이라는 설정과 함께 그 선행하는 배경 요건으로 도덕적 관행(practice)’에 대한 이해를 들고 있다. 도덕적 관행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확립된 협동적 인간 행위의 일관되고 복합적인 형식으로 인간의 목적에 적합한 탁월성의 기준을 성취하고자 노력하면서 성립된다.

맥킨타이어에 있어서 덕은 바로 한 개인이 그의 삶을 다양한 도덕적 관행과 연계시키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또한 어떤 행위를 잘 했는가를 결정하는 요인도 바로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도덕적 관행이 된다. 도덕적 관행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을 보다 실천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관행과 일치시키고자 노력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데 이 도덕적 관행들은 다시 보다 광범위한 맥락 속에 위치하게 되는데, 그 광범위한 맥락이 바로 전통이다.

한 전통은 일련의 도덕적 관행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그 관행의 중요성과 가치를 이해하는 한 양식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 전통이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도덕적으로 평가받기만 하는 것이 아님을 맥킨타이어는 인정하고 있다. 먼저 전통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고 또한 그것에 비판적 인식과 함께 수정을 가하는 노력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전통이 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과정을 이룬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다 보니 그러한 전통에 대한 강조가 도덕적 상대주의를 용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전통의 상대주의화 위험성에 대한 비판을 맥킨타이어는 전통 속에서도 도덕에 관한 합리적 주장이 가능하고 또한 전통들 사이에서도 가능하다는 말로 대응하고자 한다. 모든 전통이 내적인 모순과 긴장에 직면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경우에는 다른 전통에의 비판적 참여를 통해서 극복과 진보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통 개념이 여전히 모호하고 그러다 보니 전통에 관한 논의들도 그다지 명료하지 못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맥킨타이어의 주장에 대한 입장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그가 계몽주의 이후의 서양 윤리학의 위기를 목적론의 상실과 그로 인한 도덕 영역의 자율성 왜곡 등에서 찾으면서 그 극복 방안으로 도덕적 관행의 존중과 그 관행에 자신을 연계시키고자 노력하는 담론적 자아관의 확립, 그리고 도덕적 관행의 배경이 되는 전통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인지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이러한 연계된 과정 속에서 덕은 인간의 고유한 목적(telos)을 전제로 하는 실천적 노력을 가능하게 하는 후천적 성품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것은 도덕적 관행과 전통 속에서 구체화된다고 그는 보고 있다.

’80년대 초반에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로 평가받고 있는 덕 이후에(After Virtue)를 출간하면서 이러한 담론적 자아관과 도덕적 관행, 전통이라는 일련의 개념들을 활용하여 덕 윤리학의 새로운 부활을 주장했던 맥킨타이어는 그 후 많은 지지와 함께 반론에도 직면해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두 가지 문제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그의 덕론이 도덕적 상대주의를 피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과연 그가 덕이 왜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 중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맥킨타이어가 적극적인 답을 시도해왔고, 일정한 영역 안에서는 설득력을 얻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두 번째 문제, 즉 왜 현재의 우리에게 덕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가 주목하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의 답을 제외하고 보다 본질적인 답을 제공하는데는 소홀히 해왔거나 실패했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적극적인 답안 모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논문에서 주된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는 바로 두 번째 문제이다. 물론 위의 두 문제가 논리적으로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어서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첫 번째 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각각의 질문은 각각 독립된 배경을 지니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왜 덕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가? 인간의 본성 속에 덕을 지향하는 기본적 성향이 내재되어 있는가 ? 이런 질문들은 서양 윤리학사뿐만 아니라, 동양윤리학사의 오래된 관심사를 이루었던 것들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이 질문을 화두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최후의 질문으로 항상 불완전한 답을 찾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3. 인간의 의존성과 덕의 요청

 

1) (, Virtue)이 왜 필요한가 ?

현대 도덕철학에서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화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배경을 지닌 규범 윤리학에 대한 일반화된 의구심이 자연과학의 지배와 함께 확산되었다. 그 결과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 또는 근거에 대한 윤리학적 합의의 가능성이 줄어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거의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던 이 질문이 윤리학적 논의의 중심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통일 신라 이후로 불교윤리 또는 유교윤리를 기반으로 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존재해 왔던 보편적 규범에 대한 합의가 현실 생활 속에서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윤리학적 논의의 장에서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윤리학자들이 그러한 전통적 기반에서 윤리학적 논의를 시작하기보다는, 서구 계몽주의적 인간관, 즉 도구적 이성을 지닌 존재 또는 합리적 이기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 논의의 출발점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은 나름대로의 적실성을 갖는다. 우선 우리 스스로가 그런 질문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즉 긍정적 차원에서든지 아니면 부정적인 차원에서든지 가끔씩 떠올릴 수밖에 없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우리 윤리학계의 전체적인 흐름을 감안해도 이런 질문은 던지는 일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적실성과 함께 상당한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메타윤리학적 차원의 논의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설령 그것의 불가피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윤리적 문제를 제기할 때 주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윤리적 규칙을 준수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덕성을 지닌 인간인지의 여부이다.

덕스러운 행동이란 그 자체로 덕을 내포하고 있는 행동이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먼저 덕 있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동어반복의 위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온전한 동어반복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덕 있는 사람에 대한 정의가 먼저 필요하고 이러한 정의를 덕에 관한 정의 자체에서 끌어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덕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은 가능하지 않다. 맥킨타이어도 유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덕에 관한 정의는 매우 다양하고 그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덕 있는 사람에 대한 정의를 시도해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최소한 유교윤리와 불교윤리적 배경의 논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덕 있는 사람을 정의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첫째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인간학적 정의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것을 미완성의 상태로 보고 덕을 완성하기 위한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특성들 때문에 덕이 왜 필요한가를 묻는 것은 그다지 주된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유교의 경우 그 본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와 관련된 인성론(人性論), 불교의 경우 어떻게 하면 불성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와 관련된 수행론(修行論)이 주된 관심사로 자리잡았고, 이것은 논의의 전개상, 또 현실적 상황과 관련지어볼 때 당연한 귀결이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윤리적 전통 속에서 갑자기 왜 도덕적이어야 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은 그것이 왜 덕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라는 질문과 일맥상통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낯설은 것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현재의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서구적 가치관 체계가 우리 삶 속에 뿌리를 내리면서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가치관이 전통적인 공동체주의적 가치관 체계와 상당 부분에서 직접적인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다른 사회역사적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맥킨타이어의 문제 제기, 즉 인간에게 덕이 왜 필요한가 라는 문제 제기는 우리의 현재적 상황에 대한 윤리학적 분석과 도덕교육적 처방을 모색해 보는 과정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믿어진다.

2) 덕의 요청에 대한 정당화와 공동체

맥킨타이어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덕이 필요함을 역설하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 그런 그에게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덕의 필요성과 요청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어느 정도 설득력과 적실성을 갖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일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구도를 짜면서 우리를 설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선 인간이 동물과 무엇을 공유하고 있고 어떤 점에서 차별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시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 후에 인간이 언어와 지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동물과 완전히 구별될 수 있다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부정하면서, 오히려 인간의 동물적 위약성 때문에 덕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요소라고 강변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논지를 따라가 보자. 그는 자신의 최근 저서 서문에서 자신의 덕론이 토마스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입장을 택하고 있기 때문에 비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것과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른 유형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도 차별화 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 차별성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로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해서 윤리학과 정치학을 전개한 것과는 달리 그러한 이성과 함께 인간의 동물적인 무능력과 그로 인한 의존(dependence)을 중심으로 해서 도덕적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정체성을 이성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선적으로는 육체적이고 동물적인 정체성과 그것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로 정의되는 정체성으로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그를 제외한 다른 지적인 동물을 구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준거가 있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맥킨타이어는 돌고래 등의 고등 동물의 본능과 생활을 비교적 자세하게 인간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즉 인간이 단지 이성과 언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언어가 인간의 사회적 관행 속에서 구체화되고 따라서 관련된 사회적 관행의 형식에 맞게 참여하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만 상대적인 차별화가 가능하다. 인간들 속에서 사회화되고 교육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맥락과 관행이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지적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의 지적과 같이 우리 인간들의 어린 아이들은 돌고래와 같은 동물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보유하고 있고, 어른이 되어서도 육체를 그대로 가지고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결코 동물성과 사회적 관행으로 내려오는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인간의 특징을 맥킨타이어는 우리는 우선적으로 동물성을 가진 존재이고, 이에 덧붙여 차별화가 가능한 이차적인 인간성을 갖는다고 요약해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을 보는 맥킨타이어의 관점은 조금 독특한 면이 있다. 물론 이전의 어떤 인간학자도 이러한 두 가지 차원, 또는 측면을 인지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지만 대체로 전자와 후자 사이의 구별에 초점을 맞추고 후자를 독립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맥킨타이어는 오히려 인간의 동물성으로부터 출발해서 이성과 언어의 문제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물론 인간의 절대적인 약함 또는 원죄를 문제삼는 그리스도교적 관점, 좀 더 좁혀서 말한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을 상당 부분 수용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와 연계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제 우리는 인간이 자신의 동물성에서 비롯되는 위약성(Vulnerability)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맥킨타이어의 답을 요구할 차례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삶을 영위해갈 수 있는 존재라는 비교적 상식적인 답을 내놓고 있다. 이때의 교육의 핵심은 당연히 덕교육(德敎育)일 것이다. 자신의 동물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갈 수 있는 교육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의 발달은 다음과 같은 두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육체적 욕구 충족에 의해 획득된 좋은 것을 우선적인 선으로 수용하는 단계이고, 둘째는 그것으로부터 독립된, 또는 그 이상의 선이 있음을 인지하는 단계이다.

이러한 발달의 단계를 전제로 하면서 우리는 덕교육을 통해서 몇 번의 전환을 거쳐 완성된 덕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첫 번째 전환은 자신이 추구하는 욕구의 충족을 좋고 나쁘다는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단계로의 전환이고, 두 번째는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욕구 자체로부터 거리를 두는 단계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현재로부터 상상할 수 있는 미래에 관한 정보를 인지하여 판단할 수 있는 단계로의 전환인데, 이 마지막 단계에서 언어의 폭넓은 사용 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일련의 설명 속에서 우리는 맥킨타이어가 덕의 필요성에 대해 어떤 답변을 할 것인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결국 인간에게 덕이 필요한 이유는 동물적 위약성을 갖고 태어나서 그것에 그치지 않고, 자율적인 이성을 지닌 존재로 살 수 있는 요건을 갖추는 전환 과정에서 덕은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동물성은 필연적으로 의존을 요구하고, 이 의존성에 대한 인정을 바탕으로 해서 보다 독립적이고 실천적인 이성인(practical reasoner)으로 살아가기 위한 요건으로 덕의 함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덕이 없이는 실천적 이성인의 활동을 성취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고 역으로 덕 없이는 어린아이들을 실천적 이성인이 되도록 가르칠 수도 없다.

인간은 덕을 통해서 실천적 이성인이 될 수 있고, 도덕 교사도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실제로 맥킨타이어는 자신의 욕구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이 덕에 입문하는 핵심적 과제라고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 과정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어느 정도 이와 관련된 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도 강조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그는 그동안 현대 서구 도덕교육의 주된 흐름을 형성해왔던 규칙 준수 위주의 교육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특정 상황에서의 결함 때문에 그 자체로 올바른 덕교육적 접근이라고는 보기 어렵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즉 덕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 항상 규칙 준수보다는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맥킨타이어는 이러한 덕의 요청을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정당화하려고도 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 관계는 이해관계를 전제로 하는 형식적 관계와 공감과 동정심을 전제로 해서 성립되는 정서적 관계의 두 유형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 그 중에서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지만, 덕의 요청은 주로 두 번째 유형의 관계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본질적 결함과 그것에 근거한 의존성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할 때 정서적 공감과 의존이 가능해진다.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출발해서 독립적인 실천적 이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도와주는 사람과 덕이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요소들이 작동할 수 있는 공동체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렇게 덕이 전제되고 통용되는 공동체 사회는 맥킨타이어가 스스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의 소비사회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인 사회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의 결함을 수용하면서 의존하고, 더 나아가 각 개인적 차원에서는 실천적 이성인(理性人)이 되고자 노력하면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는 분명 유토피아적이다. 그렇지만 유토피아적 기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는 유토피아가 아니다.’라고 그는 강조한다.

 

 

IV. 의존성(Dependence)과 인연(因緣), 그리고 실천적 지향

 

인간은 의존적 존재이다.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어린 아이 때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생존을 위한 의존관계를 맺는다. 어떤 부모, 또는 어떤 존재에 의해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면 현재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분명히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이다. 누군가에게 부당하게 구속받지 않고 싶어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여 그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 또한 어떤 판단을 내릴 때에도 자신의 지식과 양심, 그리고 판단력에 의지하여 독자적인 판단을 내린 후에 그 결과에 대해 기꺼이 책임을 지는 것을 이상적인 현대적 시민상으로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의존성과 독립성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들인가? 당위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 중의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둘을 모두 살리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하고 그러한 시도들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서도 다양한 방향에서 모색되기도 했다. 독립성과 의존성의 조화는 각각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으로 나누어 모색될 수 있는데, 전자가 주로 사회의 구조와 이념을 문제삼는다면 후자는 한 개인이 갖고 있어야 하는 덕성을 문제삼는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도덕적 분위기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간의 운명적인 위약성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존재와의 의존을 가져오고, 그것에 기반해서 다른 사람의 덕과 공동체 자체의 도덕적 분위기에 힘입어 독립적인 실천적 이성인으로 자리잡아 가는 것을 삶의 이상적 과정으로 그리고 있는 맥킨타이어에게서 우리는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그 친근감의 원천 중의 하나는 아마도 그의 주장이 갖는 불교적 인연설과의 유사성일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의존(dependence)과 불교의 인연은 엄밀히 말해 구별되어야 하는 개념임에 유의해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因緣)은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들에 초점을 맞춘 개념으로 당사자들 사이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임에 비해, 맥킨타이어의 의존은 당사자들 사이의 차별이 일정하게 전제되어 있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주장이 그동안 자기 계산 능력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이기적 인간으로서의 시민(市民, 부르죠아)’을 주체와 대상으로 삼아온 서양 근대 이후 윤리학의 전형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누구나 장애인이 될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늘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며, 그들과 동일한 공동체 안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 목적을 달성하는 길과 통할 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덕이라는 것이다.

이제 남는 것은 이러한 덕이 곧바로 실천을 담보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맥킨타이어의 주장에 따르면, 덕은 그 자체로 실천적 지향을 가진 개념이다. 덕을 자신의 본래적 목적을 정확히 인지하고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열망으로 정의할 경우에 그렇게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남는 문제는 그 덕을 어떻게 하면 갖출 수 있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는 덕 교육과 공동선을 지향하는 공동체를 들고 있다. 덕을 가진 부모와 교사가 주체가 되는 덕 교육을 통해서 덕 있는 독립적이고 실천적인 이성인으로 자랄 수 있고, 그러한 부모와 교사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울타리로서의 공동체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아직도 추상적 수준에 머무는 한계를 노정시키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덕 교육을 해야 하며, 어떤 공동체를 지향하는지를 밝혀야 하는 과제가 맥킨타이어에게는 남아 있다. 한편 그러한 주장에 접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차별이 없는 인연과 그것에 근거한 동체자비(同體慈悲)의 전통을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구현해낼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내야 한다는 과제가 부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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