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물론 강의
제1강 역사유물론의 성립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이번에 역사유물론 강의를 맡은 문성원입니다. 앞으로 네 번 정도의 강의를 통해 여러분을 만날 예정입니다. 모쪼록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먼저 역사유물론이 뭔가에 대해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이걸 '역사'할 때의 '사'(史)자를 써서 '사적(史的) 유물론'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아마 일본사람들의 번역용어를 그대로 들여온 것일 겁니다. '사적유물론'보다는 '역사유물론'이 알아듣기도 쉽고 그래도 우리말답지요. 물론 이건 historical materialism이라는 서양어의 번역입니다. 유물론은 유물론인데, 역사를 설명하는 유물론이라는 말이지요. 그럼 다른 유물론도 있느냐? 물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역사유물론과 쌍을 이루는 것은 이른바 변증법적 유물론, dialectical materialism입니다. 이건 역사만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까지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유물론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역사유물론보다 그 적용 범위가 더 넓은 셈이고, 역사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한 부분을 더 상세히 전개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과거 공산권의 공식 이데올로기이기도 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이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만, 맑스나 엥겔스가 직접 이런 식의 명칭을 쓴 적은 없지요. 후에 맑스-엥겔스의 사상을 추종하는 이들이 맑스-엥겔스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보급하고 선전하기 위하여 만든 말입니다. 플레하노프라는 러시아 공산주의자--이 사람은 레닌보다도 선배 격이지요--가 이런 명칭을 처음 썼다고 하지요. 그 이후에 소련의 이데올로기 담당자들에 의해 굳어진 것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그래서 사실, 과거에 유포되었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에는 공산권 체제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사상이든 체제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되고 일정한 틀로 굳어지기 시작하면 그 생명력을 많이 잃어버리기 마련이지요. 이런 점은 이전에도 많이 비판되었지요. 특히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는 이 같은 공식 이데올로기가 거의 폐기 처분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내세우는 사람이나 집단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보다는 덜하다고 하겠지만 역사 유물론도 비슷하지요. 이제 과거 소련에서 선전하던 형태의 역사 유물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왜 또 역사유물론을 얘기하느냐? 다 버릴 수 없어서죠. 왜냐? 그 속에는 중요한 사상이 들어 있거든요.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틀렸다고 아직도 우리에게 필요한 맑스의 중요한 사상까지 버려서야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흔히 하는 말로, 목욕물을 버리려다 목욕통 속에 든 아이까지 함께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 강의에서 다루는 것은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였던 역사 유물론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맑스의 사상인 역사 유물론, 다시 말해 체제 이데올로기로 굳어지기 전의 역사 유물론입니다. 맑스는 역사유물론이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요. 우리가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와 혼동만 하지 않는다면 이런 맑스의 파악 방식을 간단히 줄여 역사유물론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 이거 너무 길지 않습니까. 역사 유물론의 말 뜻을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지요.
그렇다면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이, 곧 역사유물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순서대로 나눠서 생각해 보지요. 먼저 '역사'에 대해. 그리고 '유물론'에 대해.
역사란 일반적으로 이전에 있었던 인간의 행위들과 사건들을 일컫는 말이지요. 또 이런 행위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역사라고 하기도 하구요. 어찌되었건 역사는 과거이고 과거의 이야기지요. 그러니까 지나가 버린 일, 또는 지나가 버린 일에 대한 이야기가 역삽니다. 그렇다면 지나가 버린 것을 왜 굳이 문제삼습니까? 지나가 버린 건 이제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현재의 일, 코앞의 일에 대처하기도 바쁜 세상에 구태여 지금은 있지도 않은 옛 일을 들추어낼 필요가 있을까요? 지나가 버린 과거를 문제삼아 봤자 괜히 속이나 상하고 골치만 아프지 않나요? 게다가 도대체 지금 있지도 않은 지나간 일을 문제삼는다는 게 가능하기조차 한가요?
만일 과거가 완전히 없어진 거라면 그걸 문제삼기 곤란할 겁니다. 없는 걸 어떻게 문제삼습니까? 하지만 과거는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죠. 최소한 옛 일의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이 현재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죠. 과거의 임금 인상 투쟁이 성공했건 실패했건 그 흔적이 현재에 남아 있습니다. 현재의 임금 수준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죠. 과거에 사랑했던 연인이 떠나갔더라도 그 흔적은 나에게 남아 있습니다. 정말 사랑했던 거라면 그 경험은 나의 인생관에, 나의 됨됨이에 큰 영향을 미쳤겠고 지금도 미치고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현재에도 살아 있습니다. 물론 과거의 모습대로 살아 있는 건 아니고 기억이라는 방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죠. 기억, 이거 인간에게 무지무지 중요한 겁니다. 내가 어떤 인간이냐 하는 게 이 기억에 의해 좌우됩니다. 왜, 사고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을 다룬 영화나 소설 같은 거 많잖아요. 거기서 보면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 줄을 모르죠.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니 자신의 현재 처지도 모르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겁니다. 황당하지요. 그런데 사회에도 이 기억에 해당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게 곧 역삽니다. 지나간 일들의 흔적으로서의 역사, 지나간 일들에 대한 기록이고 평가로서의 역삽니다. 그 사회가 어떤 사회냐 하는 것은 바로 이 역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 사회가 어떻게 굴러온 사회고 그래서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알아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섭니다. 기억이 없는 인간에게 미래가 캄캄한 것이듯이,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회에 미래의 전망이 밝을 리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오늘에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파악이 무디고 짧은 사회는 그 미래도 불투명하고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를, 역사를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사실 이것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과거는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흔적으로만, 기억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을 되살리고 다시 구성해보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점 때문에 유물이나 사료 따위가 커다란 가치를 갖는 것이지요. 그깟 옛날 그릇이나 책자 따위가 무어 그렇게 중요한가 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데 과거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흩어진 과거의 흔적들을 끌어 모으는 일도 퍽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흔적들을 끌어모아 봐야 과거가 제대로 복원되는 것은 아니지요. 요즘 TV에서 『역사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을 하지요. 유인촌씨가 해설을 맡던가요. 아무튼 그 프로에서는 제법 컴퓨터 그래픽까지 동원해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과거의 모습을 복원하려고 합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여전히 확실하지 않은 구석이 많고 또 이런저런 의견이 엇갈릴 여지가 남아 있지요. 더군다나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느냐, 역사의 방향을 이끄는 주요한 요인이
뭐냐 하는 문제에 이르면, 논란의 여지는 아주 커집니다. 여기서 역사에 대한 철학적 해석의 문제가 나오는 것이지요. 한 개인의 기억을 정리하고 추스르기도 어려운 판에, 또 그 기억의 길을 따라 인생의 방향이나 의미를 세우기도 어려운 판에, 한 사회의 기억을, 그것도 각 집단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달리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한데 엮어내기란, 그리고 거기에서 의미와 방향을 잡아내기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또 이런 작업이 그 사회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이냐 하는 미래의 구상과 맞닿아 있는 이상, 서로 다른 의견들이 부딪히고 충돌할 여지는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역사에 대한 이런 해석 가운데 크게 부딪히는 두 줄기가 바로 관념론과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이해--이것을 '역사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는 역사를 끌어온 힘과 방향을 관념적인 원리에서 찾습니다. 이를테면 '정신' 같은 데서 찾는 것이지요. 관념이란 게 무엇입니까? 우리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이거든요. '아이디어'(idea)를 관념이라고 번역하지요. 관념론적 원리란 이런 관념과 연결되어 있는 원리예요. 정신이란 것도 이 관념들의 체계거나 관념들이 담고 엮어내는 어떤 것이라고 볼 때, 정신은 관념과 유관한 것, 관념적인 것이 되지요. 정신을 역사의 원리로 파악하는 예를 들어볼까요? 가령 '홍익인간'의 정신이 우리나라 역사를 이끌어 왔다, 우리의 역사 전개 과정, 발전 과정을 지배했던 것은 홍익인간이라는 정신이요, 이념이다, 이렇게 파악하는 게 관념론적 역사 파악의 한 예가 되겠지요. 그럼 그건 나쁜 게 아니지 않느냐구요? 아, 예, 물론 때로 필요한 파악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그런 식의 이해가 있었던 것이겠구요. 하지만 그게 얼마나 정확한 것이냐, 사실에 가까운 것이냐는 문제삼아 봐야 되겠죠. 정말 우리의 역사가 홍익인간의 이념에 따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정신에 따라 전개된 것이냐, 그게 사실에 부합하는 얘기냐가 문제가 된다는 말씀이죠. 그게 아니다, 홍인인간이니 뭐니 하는 건 겉으로 내세우는 간판일 뿐이고, 사실 역사를 이끌어 온 건 서로 자기네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집단들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이렇게 파악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겠죠. 근데, '홍익인간'을 내세우는 건 우리가 목표로 하는 이념으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실제 역사 과정을 설명하는 데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보이지만, 꽤 그럴 듯 해 보이는 관념론적 역사 파악도 있어요. 이를테면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이성적인 원리다' 하는 따위가 그렇죠. 이건 한 동안 서양의 역사 이론을, 그리고 일반 사람들의 상식까지 지배해 온 상당히 강력한 이해방식이고 사고방식이었어요. 왜, 계몽주의라고 아시죠.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등장해 발전해 나갈 무렵 그걸 강력하게 지원해 주던 사고방식. 거기서 주로 내세웠던 게 이성이고 합리성이죠. 이성이란 따져 생각하는 능력,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거예요. 합리성이란 물론 거기에 맞는 성질을 뜻하는 것이구요. 그러니까 계몽주의에서 역사가 이성적 원리에 따라 진행된다고 주장했을 때 나타내고자 했던 게 뭔가 하면, 역사란 이제 신의 섭리나 인간을 뛰어넘는 어떤 신비한 힘에 의해 이끌려 나가는 게 아니고, 인간의 사고 능력과 비슷한 원리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다, 더욱이 세상살이가 우리가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힘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발전하고 있다, 뭐 이런 것이었죠. 여기에는 또 역사가 그런 방향으로, 말하자면 더욱 이성적이고 합리적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깔려 있었던 셈이구요. 세상이 합리적으로 되어간다, 이거 좋은 얘기 아닙니까? 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세상사가 합리적인 쪽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도 일리 있는 주장 아닐까요? 하긴, 예나 지금이나 다 힘있는 놈들이 해 처먹는 세상이지 합리는 무슨 개뼉다귀 같은 소리냐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만, 그래도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옛날보다는 이
치에 맞게 돌아가는 구석이 조금이라도 더 늘어나 온 게 근대 이후의 역사가 아닐까요? 우리 사회만 하더라도 지금이 군사독재하에 있던 십년 이십년 전보다, 또 일본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던 20세기 초반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크게 봐서 계몽주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류의 역사를 '자유의식의 진보의 역사'라는 식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 이 헤겔의 주장을 보았을 때 꽤 그럴 듯 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과거 동양의 전제군주 시대에는 전제 군주 한 사람만이 자유롭다는 의식을 가졌고,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와서는 노예가 아닌 자유민과 귀족들만이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여겼고, 근대의 게르만 민족에 와서야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거지요. 말하자면 자유 또는 자유에 대한 생각이 확장되는 방향으로 역사가 진전되었다는 겁니다. 헤겔은 이런 방향이 이성적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지요. 역사는 이 이성적 원리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헤겔의 유명한 언급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이게 무슨 뜻이냐? 간단합니다. 이성적인 원리는 현실에 실현되지 않을 수 없고, 현실에 나타난 것도 그 속에 이성적인 원리를 담고 있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죠. 그런데 이 이성적인 원리는 단번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순서대로 차례를 밟아 실현된다는 거예요. 따라서 지금 실현되고 있지 않은 이성적인 원리도 앞으로 실현될 것이고--실현될 수밖에 없고, 현재 현실인 것은 비록 이성적인 원리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더 나은 단계의 이성적 원리가 전개되도록 하기 위해 자기의 임무를 다하고는 소멸되기 마련이라는--소멸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예컨대 김영삼씨나 김대중씨가 대통령을 하고 있는 이른바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시대는 군사독재 시대를 마감시켰다는 점에서 자유의 확장이라는 이성적 원리를 담고 있지만, 부패와 독단과 착취가 없는 더 나은 자유의 실현을 위해, 즉 다음 단계의 이성적 원리 실현을 위해 소멸하고 더 발전된 사회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하는 식의 파악이 있을 수 있겠죠. 아무튼 그래서 이런 방식의 역사에서는 역사 발전의 원리인 이성의 내용을 어떤 것으로 놓느냐가 중요해지죠. 지금 말씀 드린 것처럼 자유나 합리성 따위가 대종이지만 주장하는 사람이나 집단에 따라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가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관념론적 역사 파악에서의 큰 문제점은 도대체 그런 원리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그 조건에 대해서는, 특히 물질적 조건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는 점이죠. 그래서 때로 그러한 원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누군가의 머리 속에 있는 희망 사항을 이렇게저렇게 치장해서 내놓은 듯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 바람에 이런 원리는 자칫 믿음의 대상처럼 취급되고, 노동자들을 비롯해서 일반 대중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는 역할, 근대 이전의 종교에서 주로 나타나던 부정적인 역할을 떠맡게 되기도 하지요.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이와 같은 관념론적 역사 이해에 반대하고 이것을 극복하고자 등장한 것입니다. 맑스도 처음에는 위에서 말씀드린 헤겔 철학의 영향을 꽤 많이 받았습니다. 맑스는 1818년생인데요--아마 5월 5일날 태어났을 겁니다. 어린이날이라서 제가 기억하지요-- 유태계 법률가의 집에서 출생했고,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하다가 철학으로 전공을 옮겼죠. 그때 독일--통일되기 전에 여러 나라들로 나뉘어 있었으니까 오늘날의 독일하고는 다릅니다만, 그래도 그 중심이었던 프로이센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 헤겔 철학이었어요. 맑스가 공부할 당시 헤겔은 이미 죽었고(1831년에 죽었죠), 헤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 좀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이른바 '헤겔 좌파'('청년 헤겔학파'라고도 합니다)라는 것을
이루고 있었는데,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책을 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도 여기에 속해 있었고, 맑스가 『신성가족』이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공격하고 있는 여러 인물들이 그 일원이었지요. 이 사람들은 보수적인 헤겔주의자와는 달리 현실 속에 이미 이성적인 것이 있다는 걸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더 이성적인 것을 현실 속에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었지요. 말하자면 보수적인 헤겔의 제자들--이 사람들을 헤겔 우파라고 하지요('노년 헤겔학파'라고도 해요)--은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를 강조한 진영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반면에 진보적인 헤겔 좌파들은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를, 즉 '이성적인 것을 현실에 실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앞세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헤겔 좌파들도 이성적인 원리를 머리 속에서 찾는 데만 골몰해 있었던 셈이지요. 맑스는 당시의 현실 문제들과 대결하면서 1840년대 초중반에 이미 헤겔 좌파 진영에서 벗어납니다. 그때 맑스는 라인 신문이라는 조그만 지방 신문 편집장을 하다가 민감한 사회 문제들을 건드리는 바람에 쫓겨나고 프랑스 빠리에 가서 거기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던 공산주의 운동과 접촉하는데요, 이 과정 중에 헤겔의 『법철학』을 비판하는 책을 쓰고 사회의 물질적 토대 문제로 관심을 돌리게 되죠. 그래서 아담 스미스니, 리카아도니 하는 당시의 경제학자들 저술을 연구하고 빠리에서도 추방당해 벨기에의 브뤼셀로 갔다가 결국 영국으로 건너가서 런던에서 본격적으로 경제학 연구를 하게 되죠. 그 결과물이 1850년대말에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으로, 마침내 1867년에 『자본론』으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만, 하여튼 맑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은 이러한 작업들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성숙해 갑니다. 그러니까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맑스가 관념이나 이성적 원리, 또 법적 제도 등의 문제로부터 경제적 기반의 문제로 관심을 옮겨가는 가운데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맑스가 관념이나 이념 또는 제도 따위에서 찾지 못하던 해결책, 즉 근대 사회의 근본 구조와 그 발전 방향을 파헤쳐 보겠다는 문제의식이 그 답을 찾은 곳이 주로 경제 영역에 대한 탐구에서였다고 해도 되겠죠. 그렇다면 경제 영역이 왜 그렇게 중요한 걸까요? 그리고 경제 영역에 대한 관심과 유물론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요? 경제의 중요성이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절감하고 있는 밥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곧잘 경제의 중요성을 떠들고 일반 생활인이야 그 중요성을 생활로 체험하고 있지요. 헌데 이런 면이야 옛날엔들 왜 안 그랬겠습니까? 먼 옛날에도 백성들을 배부르고 등 따시게 하는 것이 정치의 목표였고, 뭇 백성들이야 안정된 생활과 경제적 풍요를 항상 꿈꿔 왔던 거지요. 문제는 이런 식의 경제의 중요성이 아니라, 역사의 변화 발전에서 경제 영역이 담당하는 역할과 비중입니다. 사회가 변하고 발전하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하느냐, 어떤 영역이 중심적 역할을 하느냐 하는 인식이 문제지요. 사회 발전에, 역사 발전에 경제 영역이 중심 역할을 한다는 것, 그리고 이 경제 영역을 담당하는 생산자들, 곧 노동자들이 중심 역할을 한다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관념이나 원리 따위가 아니라 물질적인 생산이, 그 생산을 담당하는 민중이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처럼 물질적 생산 영역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곧 유물론적 발상입니다. 물질은, 우리가 생산하는 경제적 대상은 머리 속의 관념처럼 마음대로 지우고 바꾸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물질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 나름의 법칙과 존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물질을 파악하고자 할 때 우리는 제멋대로 생각을 바꾸기 어렵습니다. 허튼 상상으로 물질의 자리를 메울 수는 없는 법이지요. 우리가 어떤 물건이건 제대로 만들어 내기 위해선 재료가 가진 특질과 물리적 법칙에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자동차를 만든다면 자동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공정과 절차를, 자동차 부품을 구성하는 재료의 특성을, 부품들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물리적 법칙들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특성과 법칙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물질이며, 이런 물질을 우선적인 것으로 보고 세계를 파악하는 견해가 바로 유물론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유물론이란 역사 세계를 이 같은 물질과 물질적 특성을 바탕으로 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시각인 셈이지요. 맑스에 따르면 역사 세계에서 경제 영역이 바로 그런 물질 영역입니다. 우리가 제멋대로 바꾸거나 무시하거나 할 수 없는, 그 나름의 법칙을 가진 세계지요. 물론 이 때의 법칙은 수요 공급의 법칙이나 경기 변동의 법칙과 같은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발전을 규제하고 지배하는 법칙, 역사 변화와 발전의 법칙이지요. 맑스는 그런 식의 법칙이, 또는 법칙이라는 말이 너무 강하다면 적어도 그런 발전의 추이를 보여주는 경향이 역사 속에, 경제 영역에, 생산 영역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질적인 발전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를 이해해야만 우리의 현재를 제대로 보고 또 미래에 대한 전망을 올바르게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역사유물론의 주요한 내용들, 즉 이른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 계급투쟁론, 역사법칙 5단계설 등은 이런 관점하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맑스의 이러한 역사유물론의 내용이 단번에 갖추어진 것은 아닙니다. 보통 그 대체적 얼개가 마련된 것은 1845년도에 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여기에서는 여러 중요 개념들 가운데 완성된 모습을 갖추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생산관계' 개념은 아직 등장하지 못하고 그 싹이 되는 내용이 '교통관계'라는 용어로 표현되고 있지요. 워낙 초고의 형태로 씌어진 것이라서 체계성이 좀 떨어지는 면도 있습니다. 이 독일 이데올로기는 맑스 생전에는 출판되지 않았지요. 나중에, 1932년에 이르러서야 유고 형태로 출판됩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는 독일 이데올로기보다는 더 체계적이고 더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 나오는 얘기들을 중심으로 역사유물론의 내용을 다루어볼까 합니다. 이 짧막한 글은 1959년에 쓴 것이기에 흔히 '59년 서문'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지요. 다음 번 강의부터 이 글의 중심 내용을 직접 읽어가면서 설명해볼 생각입니다. 어, 그럼 오늘 강의에서는 무얼 하느냐구요? 아,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지요? 걱정 마십시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나머지 시간에 간단히 소개할 부분으로는 맑스의 '소외론'이 있습니다. 사실 이 소외론도 상당히 중요하고 또 이걸 제대로 다룰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어쨌든 요령껏 해 보기로 합시다. 그런데 왜 소외론이냐구요? 아, 이 소외론이 나온 시기가 역사유물론의 형성기 직전이라고 보여섭니다. 오늘 다루는 게 역사유물론의 성립 아닙니까. 그러니 역사유물론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지금 문제삼는 게 맞는 일이겠지요. 이 소외론은 『독일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1930년대 초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맑스의 저작 『경제학-철학 초고』(손수(手)자를 써서 '수고'라고도 합니다)에 나와 있어요. 이건 1844년에 썼다고 해서 '1844년 초고'라고도 하고, 빠리에 있던 시절에 썼다고 해서 '빠리 초고'라고도 하지요. 우리말 번역본도 두 종륜가가 있습니다. 박종철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 꽤 자세하고 공을 많이 들인 번역이지요. 작년에 나온 『맑스주의의 향연』이라는 책을 보니까('이후'라는 출판사에서 나왔군요), 그 책을 지은 마샬 버먼이라는 미국 사람은 맑스의 이 『경제학-철학 초고』를 젊은 시절에 읽곤 너무너무 맘에 들어서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죄 이 책을 선물했다고 하더군요. 소련이 선전하던 맑스와는 다른 맑스, 너무나 인간적이고 인간주의적인 맑스를 발견하곤 무지무지 흥분했다는 거지요.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이 처음 출판되고 난 다음에 이른바 휴머니스트 맑스를 내세우는 많은 논의들이 나왔었지요. 이 휴머니즘의 주요 내용이 소외론인 셈이구요. 하지만 역사유물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경제학-철학 초고』(줄여서 '경철 초고'라고 합시다)는 아직 역사유물론의 틀이 갖추어지
기 전의 사고방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소외'라는 건 아까 헤겔 좌파 얘기할 때 나왔던 포이어바흐가 당시의 기독교를 비판할 때 주로 써먹었던 개념 틀이죠. 맑스는 이 틀을 경제 영역에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헤겔 좌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파악방식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좋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외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외론이 담고 있는 통찰에는 오늘날에도 의미있는 부분이,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도 잘 들어맞는 측면이 많이 있습니다.
'소외'(疏外)라는 건 '낯설어짐'이라는 뜻이죠. 내가 어떤 집단에서 '소외'됐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내가 그 집단에서 따돌림당한다, 그 집단이 내게 낯설고 거리감 있는 게 되었다는 뜻 아닙니까. 우리가 직장에서 소외됐다, 작업장에서 소외됐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큰 일이죠. 괴롭고 피곤합니다. 제대로 살기 힘들지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맑스는 근대인들에게, 특히 노동자들에게 이런 소외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도 동료들에게 소외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낯설어지고, 인간이 낯설어지고, 자기 자신까지 낯설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죠. 이런 일이 왜 나타나느냐, 어떻게 나타나느냐, 또 이런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를 다루는 것이 소외론입니다. 혹 여러분도 이런 소외 현상을 체험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저는 현대인들은 다 정도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얼마간 이 같은 현상을 겪고 있다고 봅니다만. 아무튼 맑스는 이 소외가 생겨나는 원인이 노동자가 자기가 만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낯설어지는 데 있다고 봅니다. 자기가 만든 것에서 멀어지고 낯설어진다--이것은 사실 맑스만의 통찰이 아닙니다. 이미 헤겔에서도 나타나고 포이어바흐에서는 종교 현상의 본질로 취급되는 것이죠. 헤겔 얘기를 하려면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까 포이어바흐만 살펴봅시다.
간단히 말하면 종교의 '신'은 사실 인간이 만든 건데, 이 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낯선 힘으로 나타나는 게 종교의 소외라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만든 것에 지배당하고 낯설음을 느낀다는 데 이 소외의 비극이, 아이러니가 있습니니다. 그럼 대체 그런 신은 왜 만드느냐구요? 인간이 하고는 싶은데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그런 일을 상상 속에서라도 해결하고 위안받기 위해서 만든다는 겁니다. 왜, 여러분도 정말 어렵고 답답한 일이 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신을,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습니까. 아이구, 하나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잖아요. 위기에 부딪히게 되면, 도저히 제 힘으로 풀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자기보다 더 큰 무언가에 기대고자 합니다. 아이들이 엄마를 찾듯이, 그렇게 자기를 보호해주고 돌봐주고 도와줄 무언가를 찾지요. 그런 게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만들어야 합니다. 조직 같은 것을 만들어야지요. 노동조합도 그런 게 아닙니까.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할 수 있게 해 주는 나보다 큰 어떤 것인 셈이지요. 근데, 이런 것을 현실 속에서 만들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상상 속에서라도, 머리 속에서라도 만든다 이겁니다. 그래야 현실의 어려움에서 오는 간절한 갈망을 상상 속에서나마 해결할 수 있지요. 종교에서 다루는 인간의 어려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두려운 것 아닙니까. 사실 이걸 피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은 없지요. 그러나 이게 종교를 통하면 가능해집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존재, 말하자면 불사(不死)의 존재, 그리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존재에게, 곧 신에게 기대는 것이죠. 이런 신을 믿습니다. 그러면 이 신의 우리를 죽음과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줍니다. 당장은 아니죠.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죽고 나서 우린 다시 살아 하나님 곁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걸 누가 보장하느냐구요? 하나님이 보장
하지요. 그런 걸 보장하는 게 하나님이니까요. 왜 그렇게 되느냐구요? 그거야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만들었으니까죠. 적어도 포이어바흐 식으로 생각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신은 인간이 바라는 바가 모여서, 말하자면 인간의 원(願)이 쌓이고 투영되어서 만들어진 것이죠.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신의 본질은 사실상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신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다 인간의 바램에서 온 것이라는 얘기죠. 그래서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따 인간을 만든 게 아니고 거꾸로가 맞습니다. 즉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본따고 뒤집어서 신을 만든 거죠. 아닌 게 아니라 이집트의 신상들은 이집트인을 닮았고, 서양인이 그린 신의 모습은 서양인을 닮지 않았습니까. 예수는 중동의 아랍 지역 사람인데도 서양 교회의 예수상은, 또 그 영향을 받은 우리 교회의 예수상도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잖아요. 포이어바흐는 만약 코끼리가 신을 만들었다면 그 신은 코끼리를 닮았을 거다, 이렇게도 말하지요. 아무튼 신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 때문에 만든 거라는 게 포이어바흐 생각이죠.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설사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만든 것이 신이라고 하더라도, 그 신을 통해서 위안을 얻으면 되잖아요. 이 험난한 세상살이 뒤에 복된 삶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사는 게 왜 나쁩니까. 아무런 희망도 없이 찌푸리고 사는 것보다 낫잖아요. 아, 물론 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건 스스로 속는 것이고, 또 그런 거짓 위안 때문에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된다면 그게 결국 우리 삶에 도움이 되진 않겠죠. 이게 흔히들 얘기하는 종교의 폐해이긴 합니다. 종교의 거짓 위안 때문에 현실 문제를 외면하게 된다는 거죠. 헌데,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이것 말고도 종교의 폐해가 또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보다 뛰어난 존재인 신을 상상해 놓고 거기에다 자기 생각에 좋은 건 다 가져다 쏟아붓죠. 그래서 신은 선하고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는 존재, 지선(至善)의 존재에다 전지전능(全知全能)의 존재가 됩니다. 엄청난 존재가 되는 것이죠. 거기에 비해 인간은 점점 더 초라해집니다. 뭐 좋은 걸 전부 신에게 가져다주다 보니 그렇게 될 수밖에요. 인간은 신에게 기대지 않으면 안 되는 무력한 존재가 되고, 게다가 죄인이 됩니다. 이제 인간은 신의 구원에 의하지 않으면 구원의 약속을 믿지 않으면 머리를 들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은 위안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신은 인간에게 점점 낯선 존재, 인간과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포이어바흐는 19세기 당시의 독일에서 기독교가 이런 모습으로 일반 민중들을 압박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뒤에는 보수적인 사회의 지배계급이 숨어있는 것이구요. 그래서 종교와 지배층이 연합해서 민중을 무력하게 만들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았죠. 그래서 기독교를 비판한 겁니다. 사실 그렇게 보지 않았다면 뭣 때문에 혹 있을 지도 모를 하나님한테 대들겠습니까. 잘못하면 벼락맞을 짓인데요.
맑스는 포이어바흐의 이런 생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맑스는 종교 비판으로는 독일 사회를, 나아가 당시의 자본주의 사회를 개선하고 발전시킬 수 없다고 보았죠. 그래서 이 소외의 틀을 종교가 아닌 경제 문제에, 자본주의적 생산에 적용해 본 겁니다. 그게 맑스의 소외론이죠. 자, 그럼 어떻게 됩니까. 종교 영역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게 신이라면 경제 영역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뭐지요? 예, 그렇습니다. 자본주의하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상품이지요. 그런데 이 상품들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팔리면 돈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 돈은 다시 이윤을 벌어들이는 자본이 되지요. 이 자본이 생산을 지배하고 이렇게 지배되는 생산을 통해 또 상품이 만들어집니다. 결국 이런 순환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은 자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신에 해당하는 것은 돈이고 자본이 되
지요. 일을 하는 것은 노동자입니다만, 그래서 상품을 만드는 것은 노동자입니다만, 그 상품은 노동자의 손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손을 벗어난 상품은 자본가의 수중에서 돈으로 바뀌고 노동자에게 낯선 자본, 노동자를 지배하는 자본이 됩니다. 포이어바흐에게서 인간이 신에게 엄청난 특성들을 부여하고 그 자신은 초라해지듯이, 맑스에게서 노동자는 자본에 엄청난 위력을 더해 주고 그 자신은 점점 더 빈한해집니다. 그래서 맑스는 말합니다. 노동자가 더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더 가난해진다고 말이지요. 그 대신 자신이 만들어내는 자본은 점점 더 커가는 것이구요. 어떻습니까. 맞는 말인가요? 여러분들이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더욱 더 강력해지는 것은 자본이고 그에 비해 여러분들은 더욱 더 약하고 초라해집니까? 그렇다면 맑스의 소외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효력이 있는 것이지요. 그게 아니라 열심히 일함에 따라 노동자들의 힘이 점점 커지고 거기에 비례해서 여러분들이 더욱 더 큰 자부심을 갖게 된다면 여러분은 맑스가 말한 소외의 상황을 극복한 것일 테구요. 아마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하긴 힘들겠죠? 열심히 일을 하면 노동자가 그만큼 더 큰 힘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세상, 이런 게 소외가 없는 세상일 겁니다만, 오늘날의 세계는 그런 세상과 꽤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오히려 국경을 넘나들며 무지막지한 규모를 키워가는 세계화된 자본의 힘은 괴물처럼 더욱 낯설고 강력해 보이고, 그 앞에서 끊임없이 정리해고의 위협을 받고 있는 노동자들은 신앞에서 떨고 있는 죄인인양 초라해 보이지는 않는지요. 이런 상황에선 사실 노동 활동에서 보람을 느끼기도 어렵지요. 맑스는 노동자가 노동 활동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을 노동 활동으로부터의 소외라고 표현했습니다. 노동하는 시간이 지겹고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처지, 일이 자기 것이 아닌 낯선 것으로 느껴지는 처지가 바로 노동 활동으로부터의 소외가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죠. 이럴 때 노동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돈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고 노동은 마치 물질적 신처럼--이걸 물신(物神)이라고 하지요-- 숭배받는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맑스는 노동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해주는 인간적 활동이라고 보고 있어요. 그러므로 이렇게 노동이 단지 수단에 불과한 것, 그 자체로는 기피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면, 노동자는 인간적인 모습에서도 멀어지는 것이죠. 맑스의 표현에 따르면, 이런 노동자는 가장 인간적인 활동을, 즉 노동을 비인간적인 것이라 느끼고, 먹고 마시고 싸고 하는 동물적인 활동을 오히려 인간적인 것이라 느끼게 됩니다. 일할 때는 지겹고 괴로우며 마치 동물인 된 것처럼 생각하다가, 술이나 한잔하고 소비적 향락 속에 빠질 때에야 비로소 인간적인 삶을 산다고 여기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삶의 창조적인 활력을 잃어버리고 기껏해야 동물적인 소비와 향략 속에 구겨져 버린다는 겁니다. 이렇게 왜곡된 삶을 사는 인간이 제대로 된 인간 관계인들 맺을 수 있겠습니까.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노동 과정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는 그런 목적 속에서 조작될 뿐 그들 사이에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협력 관계가 생겨나긴 어렵죠. 게다가 자본의 막강한 위력을 누리고 있는 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가 대등하고 인간적인 것일 수 있을까요. 노동자들 눈에는 자본가가 자기네들과 같은 종류의 인간으로 보이기보다는 낯선 존재로 여겨지기 쉬울 겁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겠죠. 여기서 맑스가 말하는 인간들 사이의 소외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해서 맑스는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노동활동으로부터의 소외, 인간의 본질로부터의 소외, 다른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를 순차적으로 이야기하죠. 결국 노동자들이 놓인 상황 전체가 소외로 꽉 차는 겁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 자신의 삶 자체가 삭막하고 낯선 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지경에 이르면 자기 자신마저도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하죠. 자신의 생활과 됨됨이 자체가 도무지 정이 안 가고 어색하고 낯설
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분열 같은 것도 생겨나게 되죠. 현대인들에게 정신병이 많아지는 이유도 맑스 같으면 자본주의하의 이런 소외 현상에서 찾을지 모릅니다. 노동자가 만든 것이 노동자에게 낯설어지다 보니 결국 노동자 스스로의 삶이 총체적으로 전부 낯설어지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얘기죠.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외를 극복해야죠. 그런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선 신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죠. 신이란 게 사람이 만든 거라면, 사람이 그걸 없앨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힘든 삶에서 위안을 얻고자 만들었지만 이제 그 신이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를 소외시킨다면 아예 없애버리자는 거죠. 그리고 부족하나마 서로서로 어깨를 겯고 서로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살아가자는 겁니다. 인류애의 공동체로 종교를 대신하자는 제안이죠. 근데 이게 잘 안 됩니다. 왜 안 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포이어바흐의 제안이 관념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이죠. 종교란 것도 그게 생겨나는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기반이 있는 거니까요. 그런 걸 그대로 놔 두고 종교를 없애자 해서 종교가 없어지나요. 아까도 제가 삶이 어렵고 힘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 마련이라고 그랬잖아요. 어렵고 힘들다는 게 꼭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겠지만, 우리 생활에선 그 비중이 정말 크죠. 이런 문제가 좀 해결되면 하나님을 찾는 절박성도 좀 줄어듭니다. 잘 사는 사람들 중에 독실한 종교인이 그다지 많지 않은 건 이런 데 이유가 있지 싶어요.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 중에 광신적이라 할 정도의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그런 데 있지 않을까요. 물론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서도 인간은 약하고 결함이 많은 존재니까, 결정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도 종교가 설 자리는 언제나 있겠죠. 하지만 서구를 좀 보세요. 거기 종교는 이제 옛날과 많이 다르잖아요. 스스로 기독교 신자라 한다 해도 교회엔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나 가는 사람들이 많죠. 이제 절박함이 없는 거예요. 오히려 과거에 반강제적으로 기독교를 억압했던 동구권 여러 나라들에선 종교가 성하죠. 살기 힘들고 기댈 곳이 마땅히 없으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아무튼 포이어바흐는 이런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어요. 그래서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었다는 평을 듣는 거겠죠. 그럼 맑스는 어땠을까요? 소외의 주 무대를 생산 영역으로 잡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발전이 있었죠. 그렇지만 그 해결책은 포이어바흐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왜 포이어바흐의 신에 해당하는 것이 맑스에게선 자본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니 신을 없애야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 것에 대응하는 건 자본을 없애야 된다는 생각이겠죠. 우리에게 낯설고 우리를 억압하는 자본이 없는 세상--이게 소외가 극복된 세상입니다. 그게 맑스가 말하는 공산주의죠. 그럼 자본을 어떻게 없애느냐?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죠. 만든 사람이 없애야 합니다. 자본을 누가 만들었죠? 자본가? 아니 노동잡니다. 자본이라는 게 결국 노동생산물의 변형태니까요. 자본가는 자본의 소유자인 것이죠.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뙤놈이 벌 듯이, 자본을 만든 건 노동자지만 소유하고 있는 건 자본가죠. 그러나 아무튼 자본을 만든 게 노동자니까, 사실 노동자는 그런 힘이 있는 존재니까, 자본을 없앨 수도 있겠죠. 그래서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건 프롤레타리아트 곧 노동자가 되는 겁니다. 자본가들이 스스로 자본을 없앨 리가 있겠어요. 자본에 의해 피해를 받는 노동자들이 없애야죠. 아, 그런데 물론 자본을 없앤다는 게 공장이나 기계를 부신다는 건 아니에요. 그걸 왜 부숩니까.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건데, 아깝게 말이죠. 자본을 없앤다는 건 다만 그 생산물들이 자본이라는 형태로, 자본의 이름 아래 기능하지 못하게 한다는 얘기죠. 이윤을 위한 생산, 자본의 자기 증식을 위한 생산을 그만둔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자본이라는 게
이윤을 얻기 위해 굴러가는 돈덩어리잖아요. 그러니까 자본을 없앤다는 건 노동생산물이 노동자로부터 독립해서 자기 덩치를 불려나가지 못하게 하고, 노동자들에게 사회의 민중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쓰이게 한다는 얘깁니다. 노동생산물이 낯설고 억압하는 힘이 아니는 우리 삶에 봉사하는 것이 되게 하자는 거지요. 헌데 노동자들이 그렇게 하자고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되나요? 또 어떻게 해야 노동자들이 그런 마음을 먹게 되죠? 『경철 초고』엔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선 충분한 답변이 나와 있질 않아요. 이런 문제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선 역사가 어떻게 진전되고 굴러가느냐에 대한 생각이 분명해져야 하니까요. 맑스 소외론의 문제점은 아마 여기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겁니다. 이 같은 문제점을 보완하고 넘어서는 게 역사에 대한 맑스의 유물론적 파악, 즉 역사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므로 다음 시간에는 본격적으로 이 역사유물론을 다루어 보도록 합시다.
역사유물론 강의2
2강 역사유물론의 사회관
여러분, 안녕하세요? 추석은 잘 보내셨지요? 자, 오늘은 역사유물론 강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엔 역사유물론의 배경에 대해 잠깐 말씀드렸고, 맑스의 소외론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드렸죠.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역사유물론의 내용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 서문」을 주 텍스트로 삼아서 이야기를 해 나가고자 합니다.
맑스가 어떤 일을 했느냐를 두고 명칭을 붙인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사회혁명가, 노동운동가,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뭐, 많겠지요. 그런데, 맑스가 남긴 업적으로 따진다면 어떤 학자에게도 뒤지지 않겠지만 맑스를 단순히 학자라고 규정하긴 좀 어렵죠. 어떤 한 분야에 관심이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어떤 제도에 얽매인 것도 아니었구요--말하자면 어디 교수를 했다든지 한 적이 없죠, 당시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밝히고 그 폐해를 극복하겠다는 뚜렷한 목적하에서 연구를 했을 뿐이니까요. 그 때문에 고생도 무척 했지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맑스는 돈벌이에 신경을 거의 못 썼습니다. 간간히 신문에 기고도 하곤 했지만, 그것으로 어디 밥벌이가 되겠습니까. 하루 종일 도서관에 파묻혀 있는 일이 많았구요, 건강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죠. 딸 아이가 영양실조 비슷한 병으로 죽기도 했다고 하지요. 친구인 엥겔스가 돌봐주지 않았다면 그나마 생활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정한 남편이고 아빠였다고는 합니다만, 어떤 면에선 무능하고 무책임한 가장이기도 했던 셈이죠. 사회에 큰 기여를 하는 것과 좋은 아빠와 남편이 되는 일은 함께 하기 어려운 일일까요? 어떻든 맑스는 치열한 연구 끝에 역사에 대한 나름의 뚜렷한 관점을 갖게 되었지요. 그걸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분명해진, 그리고 일단 얻고 나자 내 연구에 길잡이가 되었던 일반적인 결과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식화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삶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정한 필연적 관계에, 즉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상응하는 생산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생산 관계의 총체가 한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현실적 토대인데, 이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세워지고, 다시 여기에 일정한 사회적 의식의 형태들이 상응한다. 물질적 삶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삶 일반을 제약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규정한다."
일단 여기까지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지난 시간에 맑스가 헤겔 철학을 비판적인 눈으로 보게 되고, 헤겔처럼 정신이나 이성 따위를 역사를 보아선 그 본모습을 제대로 알 수 없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는 말씀을 드렸죠. '나에게 분명해진 일반적 결과'라는 건 그 공부를 통해 얻은 일반적 결과라는 얘깁니다. 사회, 역사에 대한 분명한 어떤 얼개를 얻었다는 거죠. 그리고 그걸 길잡이로 삼아 그 이후의 연구를 진행해 나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맑스의 탐구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그게 역사유물론의 관점입니다. 이런 결과 또는 관점을 맑스 스스로 간단히 요약하고 일종의 정식(定式)으로 표현하고 있는 게 이 「1859년 서문」의 내용이죠. 그런데 여기에 쓰이는 용어들
이나 그 용어들 사이의 연결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우선 '자기 삶을 사회적으로 생산'한다는 표현부터 좀 낯설지 않습니까? 인간은 삶을 생산한다, 그것도 사회적으로 생산한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요? 맑스에게서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주요한 면이 되니까요. 그렇담 인간은 삶을 생산하고 동물은 삶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얘길까요? 그렇습니다. 동물은 삶을 생산하지 않습니다. 자연적 삶을 살아나갈 뿐이지요. 생산이란 자연적인 재료를 의도적으로 변형하는 걸 말하는 것이니까요. 왜, 생산에는 꼭 필요한 게 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생산의 삼요소라고 해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 있잖아요. 그게 뭐죠? 원료, 노동력, 그리구 나머지 하나는요? 자본이요? 아, 예, 그렇지요. 자본주의하에서는 자본이 중요하죠.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 환경에서의 생산까지 생각한다면 그냥 생산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주요한 생산수단이 자본이니까요. 아무튼 생산이란 주어진 원료에 생산수단을 통해 노동을 가해서 욕구 충족에 필요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맑스는 이런 방식으로 자연을 변형시키는 활동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짓는 특징이라고 보는 겁니다. 동물도 더러 자연을 변형시키기는 하지만, 이건 본능적인 거지요. 그래서 자신의 삶을 '생산'하는 데 이르지 못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신의 삶을 변형시키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거지요. 맑스는 노동에 대해 설명하는 『자본론』의 유명한 구절에서 인간만이 자연을 변형시키는 게 아니라 이를테면 비버나 거미도 그런 활동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비버는 서툰 목수보다 더 정교하게 집을 짓지요. 거미는 서툰 방직공보다 더 능숙하게 그물을 짠다고 할 수 있구요. 그러나 비버나 거미는 본능에 따를 뿐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없지요. 100년전의 비버나 1000년 전의 비버나 다 똑같은 방식으로 집을 짓습니다. 거미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에게는 의도가, 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에 똑같은 생산이 단순히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산에 의한 결과가 그 다음 생산의 새로운 환경이 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생산을 통해 변화된 환경 속에서 다시 생산에 임합니다.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요? 아니지요. 변화된 환경에 맞추어섭니다. 그래서 변화가 있고 발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있습니다. 맑스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만이 고유한 역사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동물에게도, 자연에게도 물론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본능이나 본성에 따른다고 해서 그 본능이나 본성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른바 자연의 역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가 다른 점은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인데 반해서 자연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라고 맑스는 얘기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환경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변형시킵니다. 인간은 생산 활동을 하고 그 생산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간접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생산 과정은 인간 사회 속에서 사회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인간은 '사회적으로' 자신의 삶을 생산하는 것이 되는 셈이지요. 이렇듯 생산은 그 이전의 인간 활동이 낳은 결과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또 자기 혼자서가 아니라 사회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제멋대로 행해질 수 없는 것이죠. 역사적인 제약과 사회적인 제약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맑스는 인간이 이러한 생산 과정에서 '자기 의지와는 무관한 일정한 필연적 관계'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의지와 무관하다'는 것은 내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얘기겠지요. 설령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라는 의미에서 '필연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일 테구요. 그러니까 이 제약은 몹시 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맑스는 그런 관계로서 '생산관계'를 얘기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 '생산관계'로 초점을 옮겨 봅
시다.
이 말 자체가 보여주는 것처럼 '생산관계'는 생산과 관련해서 맺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는 겁니다만--이 '생산관계'라는 말을 쓰기 전에는 맑스가 '교통관계'(Verkehrs-verhaltnisse)라는 용어를 썼다는 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적이 있죠--,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한정이 붙어 있습니다. 뭐죠? 그렇습니다.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상응하는'이라는 구절이 바로 그거죠. 그러니까 결국 생산관계가 어떤 것인지 얘기하기 위해선 생산력이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생산력은 무엇이죠? 쉽게 생각하십시다. 생산력이란 말 그대로 생산을 하는 힘입니다. 얼마나 생산을 잘 해내느냐에 따라 생산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죠. 생산력이 크면 생산력이 작은 경우보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생산을 해 낼 수 있겠죠. 그러나 이 생산력을 단순히 양적인 것으로만 보면 곤란합니다. 힘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칼의 힘과 총의 힘, 핵폭탄의 힘을 양적으로만 비교하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는 양적인 것보다는 질적인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생산력에도 그런 차이가 있지요. 돌도끼와 돌낫으로 농사를 짓던 시절과 트랙터 콤바인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오늘을 양적인 차이만으로 비교하긴 어렵겠지요. 질적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산력의 발전 수준이라는 말을 쓰고, 생산력이 크다, 작다보다는 생산력이 높다, 낮다라는 표현을 주로 씁니다. 생산력이 높다는 것은 양적인 우월만이 아니라 질적 수준의 우월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더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산력이 개인의 힘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사회의 힘을 나타낸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개인들 사이의 생산력이 아니라 한 사회와 다른 사회, 한 시대와 다른 시대의 생산력을 비교하지요. 남한은 북한보다 생산력 수준이 월등하다든가, 19세기초의 영국은 18세기초에 비해 엄청나게 높아진 생산력을 갖게 되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왜, 우리가 흔히 쓰는 생산성이라는 말은 개별 기업체나 개개인에 대해서도 많이 쓰잖아요? 그런 점에서 생산성과 생산력은 대비됩니다. 맑스의 관심은 개별 기업이나 생산자 개인에게 있었던 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발전에 있었으니까, 생산력이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사용된 거죠. 이런 점에서 이 생산력이 계속 발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방식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생산력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이 연계되니까요. 그런데 맑스는 생산력이 왜 계속 발전한다고 보았을까요? 간단히 표현하면 인간의 욕구와 환경 사이의 거리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생산력이란 크게 보면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맞게 변형하는 힘이 생산력이라는 얘기죠. 그런데 인간이 자연을 변형하려고 하는 이유는, 즉 생산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한테 주어진 자연이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살려고 하는데 주어진 환경이 그렇게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면이 많으니까 그걸 바꾸어보려고 계속 노력하는 것이다, 뭐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거죠. 이런 노력이 생산력 발전 경향을 만들어내는 것이겠죠. 물론 여기에 인간 집단들 사이의 경쟁도 한 몫을 할 겁니다. 그런데 이 경쟁은 자본주의 이후의 환경에서나 눈에 띄게 부각된 것이지 않을까요. 그 이전 옛날에야 경쟁이란 게 사람들 생각에 잘 떠오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자연을 변형시키려는 노력은 자연을 인간화하려는 노력이다, 이렇게 맑스는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노력이 요즘 나타나는 환경 오염을 만들어내서는 안 되겠죠. 그건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를 파괴하고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맑스는 '자연의 인간화'는 '인간의 자연화'와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지요. 이런 생각은 지난 번에 다룬 『경
제학 철학 초고』에 이미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과 자연은 상호 영향을 주면서 변화한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를 이룰 수 있는 힘이 생산력이고, 자연과 인간의 이런 상호 관계가 생산력의 계속되는 발전을 낳는다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포괄적으로 해석하면 이 생산력에는 상당히 많은 요소들이 들어갑니다. 일반적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 즉 무언가 물건을 만들어낼 때 직접 필요한 기술과 기계나 도구의 수준을 비롯해서 그걸 뒷받침하는 여러 과학들, 생산 공정의 조직 방식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들을 포괄하지요. 사실 이 생산력에 어떤 요소들이 들어가고 어떤 요소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느냐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자연 과학을 생산력에 집어넣어 생각해야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따위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지요. 이건 사실 노동자의 지위나 노동자의 범위 설정 따위와 관계 있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과학이 생산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면 공장에서 직접 작업하는 노동자들보다 과학자들이 생산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다면 과학자들을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자들 못지 않은 노동자로 볼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과학 수준이 생산에 미치는 영향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비록 과학의 성과와 그걸 응용하는 기술을 구별해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과학을 생산력의 요소로 놓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싶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렇다면 과학에 종사하는 과학자가 노동자냐 하는 문제는 좀 복잡합니다. 그건 자본주의의 운영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니까요.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만일 과학자가 자본에 종속되어 연구 활동을 노동력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해 나가고 그 이해관계가 자본 내지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대립된다면 그 과학자는 노동자라고 보아야 하겠죠. 그게 아니고 과학자의 이해관계가 자본가들과 일치하고 일반 노동자들과 대치된다면 그 경운 노동자 취급을 받을 수 없겠죠. 사실 이건 나중에 생산관계, 그리고 계급을 다룰 때 이야기해야 하는 문제겠지만요. 어쨌든 한 사회의 생산력에는 과학-기술이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이런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생산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가 크게 좁아질 위험이 있습니다. 저야 뭐 생산 현장에 직접 있질 않으니까 생산력 수준이라는 걸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어서 적절한 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근래에 체험한 일상적인 사례를 하나 들겠습니다. 저희 집이 최근에 이사를 했는데요, 저는 이삿짐 센터에서 일하는 분들을 보면서 야, 여기에도 생산력이라는 게 작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사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낄까하고 제 처가 견적을 좀 싸게 낸 이삿짐 센타에 부탁을 한 모양인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교수도 노동자입니다. '교수노조'라는 거 들어 보셨죠? 교수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종의 노동 활동을 하고 월급을 받는 임금노동자인 셈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형편이 매우 좋은 노동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그래서 일부 경우들을 빼놓고는 함부로 돈을 쓸 여건이 못되지요) 나중에는 얼마간 후회를 했습니다. 이삿짐을 나르는 분들이 열심히 일을 하시는 건 알겠는데, 장비가 별로 좋질 않은 거예요. 왜, 사다리차 같은 것도 쓰지 않고 짐을 나르는 데다가 이삿짐을 쌓는 트럭도 뚜껑이 없는 거라서 고무 밧줄로 짐을 묶을 수밖에 없고, 물건이 놓여 있던 장소를 기록하는 방식도 영 시원찮고, 컴퓨터 같은 것도 제대로 다룰 줄 몰라서 바르게 연결해 놓지도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도 땀을 뻘뻘 흘리면 열심히는 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일이 서툴고...이래서 결국 매우 불안하게 이사를 마쳤는데, 뭐 그리 값나가는 세간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더러 손상이 간 곳이 있더라구요. 그러니 열심히 일한 분들 보기가 좀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개개인이 열심히만 한다고 일이 다 잘 되는 것은 아니지요. 적절한 장비와 숙련된 기술 수준, 일하는 방식 따위가 중요한 것이지요.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생산력
을 이루는 것이겠습니다. 그러니까 생산력이 노동자 개인의 자질이나 노력만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장비와 수단을, 어떤 방식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것들을 뒷받침하는 지식도 큰 역할을 하는 것이구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생산력은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산력 수준이 생산을 둘러싼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즉 생산관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아까 읽은 맑스의 표현을 다시 기억해 봅시다.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상응하는 생산관계'라고 했지요. '물질적'이라는 말은 지난 번에 말씀드렸듯이 우리 생각에 의해 멋대로 바꿀 수 없는 제약을 지닌 영역에 속한다는 뜻을 강조하는 것이겠구요, 여기서 중요한 건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상응한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맑스는 생산력은 계속 발전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단계들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구요, 이 단계들에 따라 생산과 관련하여 맺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다고 본 것이죠.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시 이삿짐 센터를 예로 들어봅시다. 요새는 너도나도 다 포장이사란 것을 합니다만 한 십오년, 이십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그런 게 없었죠. 이사를 한다고 하면 용달차를 한 두 대 빌리고 아는 친지들이 모여 짐을 날라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아파트라는 주거형태도 일반적이 아니었고, 사다리차 같은 것도 없었지 싶어요. 그래서 이삿짐 센터라고 해 봤자, 대개 그저 작은 트럭 한 두 대에다 힘 좀 쓰는 사람들 몇이 모여 있는 데 불과했지요. 제가 결혼하고 처음 이사했던 때만 해도 사층으로 장롱을 올리는데 밧줄을 사용하더군요. 장롱을 밧줄로 묶어 사층 창문으로 끌어올리는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원시적이지요.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하다 보니까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지금처럼 조직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이야 큰 이삿짐 센터를 보면 업무 분담이 확실하잖아요. 예약을 받고 견적을 내 주는 사람도 있고, 장비 관리하는 사람에, 노동력 배분하는 사람, 실제로 나가서 이삿짐을 싸고푸는 사람들도 담당하는 영역이 나눠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무엇보다 과거의 영세한 업체와 다른 건 고가의 여러 장비를 사용하고 인원도 많이 쓰다 보니까 자본을 대는 업주의 힘이 커진다는 겁니다. 용달차나 빌리고 밧줄이나 사용하던 예전의 방식과, 뚜껑 덮힌 대형 트럭과 사다리차를 사용하고 가구 배치 상태를 비디오 카메라로 기록하는 요즘의 방식을 비교해 보세요. 두 방식은 생산력 면에서 큰 차이가 나는 건 물론이지만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그 속에서 맺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곕니다. 생산력 수준이 낮았을 땐 실제 이삿짐 나르는 사람들의 노동력이 중요했을 겁니다. 용달차 정도야 어디서건 빌리면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삿짐 센터의 주인이라도 인부들과 같이 짐을 나르고 같이 어울려 소주도 먹고 뭐 이러지 않았습니까. 반면에 고가의 장비를 많이 사용해서 생산력을 높힌 업체의 경우는 그 장비를 갖추고 운영하는 게 중요하겠죠. 그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장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식으로 짜여질 겁니다. 일정한 전문성이 필요하구요, 그걸 위한 훈련과 조직성도 필요하겠죠. 무엇보다 여기서는 고용과 피고용의 구분이 확실할 겁니다. 이전처럼 업주와 인부가 같이 일하면서 일종의 동업자 의식을 갖기는 어렵겠죠. 이건 물론 많은 자본을 들인 대형 업체와 그렇지 못한 영세 업체 사이의 차이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생산력의 차이에 따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 방식이 달라지는 예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역사유물론에서 다루는 생산관계는 한 업체나 한 생산 부문에서 나타나는 인간관계라기보다는 한 사회 전체를 통털어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관계지요. 또 이 생산관계에서 중요한 면은 주요한 생산수단을 둘러싸고 인간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즉 그 생산수단을 누가 어떤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느냐 하는 문젭니다. 생산관계가 사회 전반의 관계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신다면, 이삿짐 센터
예를 또 들어도 괜찮겠지요. 영세한 이삿짐 센터의 주요 생산수단은 아마 노동력 자체일 겁니다만, 많은 장비를 사용하는 이삿짐 센터의 주요 생산수단은 그 장비들일 겁니다. 그리고 앞의 경우에 주요 생산수단인 노동력을 장악하고 있는 건 간단히 업주라고 할 수 없는 데 반해--노동자들 자신도 스스로의 노동력에 대해 발언권이 있으니까요. 이삿짐 일을 업주가 마련해 준다 하더라도 업주가 일방적으로 노동력을 제멋대로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죠. 이런
점 때문에 그런 영세 업체에서는 인간관계가 더더구나 중요할 겁니다--, 뒤의 경우엔 주요한 생산수단인 장비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업주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차이는 아주 크고 중요합니다. 맑스에 따르면, 한 사회가 어떤 생산수단을 중심으로 생산을 하고 또 그 생산수단을 어떤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느냐가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를 규정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맑스는 뭐라고 합니까, "바로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체가 한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현실적 토대"라고 말을 하지요. 한 사회의 생산관계들 전체가 어떤 모습이냐가 곧 그 사회의 경제적 구조가 어떤 것이냐와 같은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그 사회의 현실적 토대, 말하자면 실제로 그 사회를 떠받치는 기초라는 거구요. 그런데 이런 생산관계가 그 사회의 생산력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맑스가 생산력을 얼마나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생산력 발전 단계에 상응하는 생산관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뒤에 생산양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맑스는 대체로 아시아적 생산관계, 노예제적 생산관계, 봉건제적 생산관계, 자본제적 생산관계, 공산제적 생산관계 따위를 크게 구별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아적'이라는 건 사실 기분 안 좋은 표현일 수도 있는데요, 왜냐하면 아시아 전반이 상당히 발전 수준이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아시아적 생산관계란 대규모 관개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관계를 말합니다. 왜, 대표적으로 예전의 중국에는 치수(治水), 즉 물을 다스리는 일이 임금의 중요한 임무였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물을 다스리려면,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가뭄을 이기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고 이러려면 대규모 토목 공사가 필요하지요. 요즘처럼 포크레인이나 불도저가 있는 것도 아니니, 사람들을 엄청난 규모로 동원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임금이나 황제는 엄청난 권력을 지녀야 했고 종교적 힘을 빌리는 경우도 많았죠. 중국의 황제도 명칭부터 천자(天子)였잖습니까.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헤겔은 동양 사회를 한 사람만이 자유롭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 단계로 보았어요. 맑스는 헤겔과는 달리 이런 양상을 경제적 생산이라는 각도에서 조망한 겁니다만, 아무튼 대규모 관개 농업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그럴 수 있는 생산력과 거기에 적합한 생산관계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 생산관계라는 것이 노동통제권을 한곳으로 몰아주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좋게 보면 강한 공동체성이, 나쁘게 보면 강력한 권위에 의한 통제가 나타나게 되죠. 하지만 이런 대규모 농업 지역의 생산력 수준이 꽤 높았다는 점도 지적해 줘야 옳을 것 같습니다. 이런 곳은 인구부양력이 상당히 높은 게 이런 지역이지요. 지금도 중국이나 인도의 인구는 대단히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시아적'이라고 해서 낮은 수준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건 따지고 보면 산업화 이후의 시각에서 바라본 짧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한편 노예제 생산관계는 그 명칭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노예와 노예주의 관계가 중심을 이루는 생산관계지요.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가 모델입니다. 노예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만, 전쟁 노예가 대표적이지요. 이 경우에는 노예가 주요한 생산수단이 됩니다. 물론 이 노예라는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것은 노예주들, 대체로 귀족들이지요. 당시에도 손수 일을 하는 평민들이 있었지만, 노예 노동이 생산에서 더 두드러진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같은 노예 노동이라도 근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졌던 노예 노동, 이를테면 미국 남부 면화 농장이나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노예 노동은 근대 사회를 대표할 만한 노동이 못되었고 자본-노동 관계라는 당시의 주된 생산관계에 종속되었죠. 그래서 한 사회의 생산관계를 얘기할 때는 무엇이 중심이 되느냐, 무엇이 다른 생산관계들을 포섭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봉건제 생산관계. 이건 보통 토지를 중심으로 한 생산관계, 즉 토지가 주된 생산수단이 되는 생산관계라고 얘기하지요. 토지를 장악한 토지의 소유자가 있고 또 토지의 경작자가 있습니다. 경작자는 말하자면 땅을 빌려서 경작하는 셈이죠. 그래서 자신이 생산물을 거둬가는 땅만이 아니라 다른 땅도 경작해 주거나 아니면 일정 비율의 생산물을 땅 소유자에게 가져다 바칩니다. 그런데 이 땅 소유관계라는 것이 좀 복잡하지요. 이른바 봉토(封土)라고 해서 왕이 귀족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그 귀족들은 또 하위의 귀족들에게 그 땅을 나눠주는 방식이 일반적이죠. 아무튼 그래서 땅을 장악한 이들이 영주인고 결국 땅을 경작하는 직접 노동자가 농노인 것인데요, 이런 영주-농노 관계가 봉건제적 생산관계의 중심이 되겠습니다. 자본제적 생산관계야 뭐 여러분들이 잘 아시죠. 자본가-노동자의 관계가 그 중심입니다. 자본이 주요한 생산수단이구요. 이 자본제에 대해선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이행 문제를 설명할 때 필요한 부분을 언급해 보기로 하지요.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에 대해서도 좀 나중으로 미룹시다. 다만, 맑스는 이 공산제적 생산관계는 이전의 생산관계들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는 점만 말씀드리고 넘어가도록 합시다. 이전의 생산관계들은 생산수단을 장악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에 뚜렷한 대비가 이루어졌잖습니까. 그런데 공산제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사회전체가, 그러니까 사회구성원 모두가 생산수단에 대해서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모두가 주인인 셈이지요. 현실에 존재했던 공산주의 사회, 예컨대 소련 같은 경우가 과연 그러했느냐는 좀 다른 문젭니다. 거기에서는 여전히 소수가, 이를테면 당간부나 관료들이 실질적으로 생산수단을 장악했었다는 지적이 일반적이니까요. 그래서 과거의 소련사회가 이른바 '국가 자본주의'사회였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요. 아무튼 지금 맥락에서 역사유물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맑스가 이런 생산관계들이 다 일정한 생산력 수준에 상응하여 존재한다고 보았다는 점입니다. 제멋대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 수준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가령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노그리스, 로마 사회의 생산력 수준에서는 들어설 수 없었다는 얘깁니다. 생산력의 뒷받침이 안 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또 거꾸로 노예제적 생산관계가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 수준에서 주된 생산관계가 될 수도 없어요. 그런 생산관계로는 도저히 자본제 사회의 생산력 수준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맑스에 의하면, 생산력 수준과 생산관계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토대'와 '상부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 봅시다. 아까 읽은 문장의 뒷부분까지를 마저 보면, "생산관계의 총체가 한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현실적 토대인데, 이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다시 여기에 일정한 사회적 의식의 형태들이 상응한다"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 '토대'라는 말은 '하부구조'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부구조-상부구조'의 쌍으로 사회의 얼개를 표현하는 것이죠. 아다시피 이건 건축물의 구조에서 따온 비유입니다. 토대나 하부구조는 주춧돌과 기둥 따위를 말하는 것이겠죠. 상부구조는 서까래나 지붕 따위일 겁니다. 이런 비유가 노리는 바는 쉽게 짐작할 수 있지요. 하부구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상부구조가 어떤 것일 수 있느냐가 정해집니다. 가령 나무기둥 위에 돌로 된 지붕을 얹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물론 나무기둥 위에도 기와지붕을 얹느냐 초가지붕을 얹느냐는 선택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어떤 나무기둥이냐에 따라 어떤 규모의
주춧돌과 기둥을 세웠느냐에 따라 거기에 어울리는 지붕형태가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의미에서 토대나 하부구조는 상부구조의 형태를 규정한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리고 아무래도 집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생산관계의 총체인 경제적 구조가 기본이 되고 여기에 어울리는 법적, 정치적 제도가 들어선다는 얘깁니다. 법적, 정치적 제도가 우선하고 거기에 경제 구조가 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경제적 구조가 그 사회에 맞는 법적, 정치적 제도가 어떤 것인지를 규정한다는 말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법적 정치적 제도가 경제적인 구조로 환원될 수 있다든지, 법적 정치적 제도가 실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든지 하는 뜻은 아닙니다. 서까래와 지붕이 하부구조 위에 놓인다고 해서 하는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만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더 기본적이고 우선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관념론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한 사회에서 경제적 구조가, 생산관계가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맑스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이죠. 법적, 정치적 제도나 여러 사회적 의식 형태들, 이를테면, 종교적, 예술적, 철학적, 법률적, 정치적 의식형태들은 다 여기에 상응하는 모습으로 이 위에 자리잡는다는 겁니다. 이 사회적 의식 형태들을 한데 묶어 표현하는 말이 있지요. 그게 뭡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데올로기'죠. 이데올로기란 이처럼 생산관계에 상응하는 사회적 의식 형태들을 일컫습니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는 자립적 의식이 아니지요. 혹자는 '여기에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들이 상응한다'고 할 때의 '여기'를 정치적, 법률적 상부구조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상부구조 역시 생산관계인 하부구조에 상응하니까, 결국 이데올로기는 생산관계에 상응하는 셈이죠. 때로 '상부구조'라는 말이 제도뿐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이데올로기'라는 용어가 제도들을 포함하는 '상부구조'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럴 수 있는 바탕은 그 두 가지가 다 생산관계에 상응하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들을 도식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이 되겠죠.
사회적 의식형태들 - 이데올로기
▲▽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
▲▽
생산관계 - 토대
▲▽
생산력
여기서 '▲▽'는 아래쪽에서 위쪽을 규정하는 힘이 강한 상응관계를 나타냅니다. 왜, 건물에서도 아래쪽의 규정력이 강하잖아요. 건물이란 것이 주춧돌, 기둥, 서까래, 지붕...이런 식으로 아래에서 위로 지어 올라가는 것이고 위에 놓인 것이 아랫부분에 의존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듯 사회의 여러 층위도 '생산력-생산관계-상부구조-이데올로기'의 순서로 아래에서 위로 상응관계를 맺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이런 구도에서 맨 아래 층위는 생산력이지만 상부구조와 쌍을 이루는 하부구조 내지 토대에 해당하는 것은 생산관곕니다. 이전에 이 하부구조가 생산관계만을 가리키는 것이냐 아니면 생산력까지 포함하는 것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기도 했는데요, 우리가 읽은 구절로 본다면 맑스가 생산관계를 토대라고 한 게 분명하죠. 그래야 상부구조하고도 잘 대비가 될 겁니다. 물론 생산관계는 일정한 생산력 수준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했으니까 생산관계의 아래에는 언제나 생산력이 깔려 있는 겁니다
만, 즉 일정한 생산력과 결합되지 않은 생산관계란 없는 것입니다만, 사회구조에 기초 형태를 부여하는 구체적인 층위는 생산관계라고 해야 되겠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결합체를 일컫는 말로는 바로 다음에 나오는 '생산양식'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그 구절을 볼까요. 이 대목은 설명 드린 것 같은 사회구조의 얼개를 맑스가 제시해 놓고 거기서 일종의 귀결을 끌어내고 있는 부분이죠. "물질적 삶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삶 일반을 제약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규정한다." 이것 역시 굉장히 유명한 구절이지요. 뒤의 문장은 이미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도 그대로 나옵니다. 그럼, 이 문장들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 봅시다. 생산양식은 방금 말씀드렸듯이 일정 수준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결합체지요. 물질적 욕구 충족과 관계하는 경제적인 삶의 생산 방식에는 생산과 관련된 인간관계만이 아니라 자연을 변형하는 힘인 생산력이 포함되는 게 당연한 일이겠죠. 그런데 여기서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이런 생산양식이, 즉 경제 영역의 구조가 다른 영역의 삶, 즉 물질보다는 의식과 관계하는 영역을 제약하고 조건짓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의식이나 관념이 우리의 물질적 삶을 좌우한다기보다는 그 반대가 맞다는 거죠. 즉 물질적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느냐가 우리의 의식이나 관념을 좌우한다는 얘깁니다. 이건 관념론자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관념론자들은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고 보니까요. 사람은 물질적 조건과 관계없이 얼마든지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 모든 게 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어디 그렇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어디 물질적 조건과 물질적 삶의 방식에서 자유로운가요? 오히려 어떤 물질적 조건에서 어떤 물질적 삶을 살아나가느냐에 따라 생각과 의식이 많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자본가와 노동자의 생각이 다른 것, 농사짓는 사람과 장사하는 사람의 생각이 다른 것,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생각이 다른 것은 다 생활 방식과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면이 크지 않을까요? 맑스는 바로 이런 점을 사회 전체의 구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사회 전반을 볼 때 사회 속에 사는 사람의 의식이 그 사람들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사회적 처지가, 그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먹고살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의식을, 즉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를 규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적 처지가 우리의 삶과 의식을 조건짓거나 규정한다는 말이 우리의 생각이 사회적 조건이나 물질적 삶의 방식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는 뜻은 아니지요. 만일 우리가 물질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는 아무런 자유도 없이 외부의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 될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만, 맑스가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기계적 유물론자들은 인간도 하나의 정교한 기계고, 그래서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전부 내외적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맑스는 오히려 이런 종류의 유물론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인간의 능동적이고 활동적인 면을 보지 못한다고 말이지요. 특히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던 포이어바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맑스는 이런 점을 강조해서 지적합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라고 하는 짧지만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글에서 맑스는 포이어바흐가 이런 '실천적이고 혁명적인 활동의 면'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거듭 비판하고 있지요. (이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가 역사유물론의 기초적 틀을 잡은 『독일 이데올로기』를 쓸 무렵에 같이 씌어졌다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니까 맑스는 물질적 삶의 생산방식이 우리의 생각을 규정짓는 조건이 된다고 본 것이지, 우리가 어떤 물질적 조건의 노예라거나 자동기계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능동적 활동이나 혁명적 실천도
그 조건에 맞아야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또 성공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만--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좀더 살펴보기로 하지요-- 그 조건의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완전히 결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조건짓는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상부구조나 이데올로기가 하부구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수동적인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영향과 규정력에서 차이가 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상호관계를 '▲▽'라는 식으로 표시를 해 본 겁니다.
자, 이제 정리를 해 볼까요. 맑스는 인간의 삶에서 우리가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물질적 조건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했지요. 이 점이 사회구조를 통해서 생산력-생산관계의 규정력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상응하는 생산관계가 사회의 토대를 이루고, 그 위에 거기에 걸맞는 방식으로 제도적 상부구조와 각종 사회적 의식들이 자리잡는 것이죠. 맑스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이런 구조에 의해 제약을 받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파악이야 오늘날의 세계에도 여전히 잘 들어맞지 않을까요?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것이 우리의 의식이라기보다는 물질적 삶의 방식 아닙니까? 물론 우리는 우리의 물질적 조건을 능동적으로 변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변혁하고자 하는 의지나 생각을 조건짓는 것도 물질적 삶의 방식이고 조건이라는 점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맑스가 말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개인의 의식이나 의지가 아니고 사회 전반의 의식 형태들이지요. 혹 어떤 특출한 개인은 자신의 물질적 조건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점을 사회 전반에 기대하기는 힘들지요. 따라서 우리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개혁과 변화를 바란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물질적 조건들을 파악하는 데 힘을 쏟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오늘 말씀 드린 사회의 기본 구조가 사회 혁명 시기에는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가에 대한 맑스의 설명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다룬 것이 사회의 정적(靜的) 구조라면, 다음에 다룰 것은 사회의 동적(動的) 구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역사유물론 강의 3
제3강 사회혁명과 진보
안녕하십니까? 역사유물론 강의를 맡고 있는 문성원입니다. 이제 3번째 시간이군요. 오늘도 지난번에 이어 「1859년 서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역사유물론의 기본 틀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지난번에는 맑스가 사회의 기본구조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주로 다루었지요. 생산력과 생산관계, 상부구조 따위가 그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맑스가 그러한 구조를 지닌 사회는 어떻게 변화해 나간다고 생각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맑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지요.
"한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일정한 발전 단계에 도달하면, 이제까지 자신이 그 속에서 운동해 왔던 기존의 생산관계와, 혹은 그 법률적 표현일 따름인 소유 관계와 모순 관계에 들어선다. 이제 이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족쇄로 변한다. 바로 이 때 사회적 혁명의 시기가 시작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함께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다소간 급속하게 변혁된다."
여러분은 '혁명'이란 게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 그대로 명(命)을, 우리가 살아가는 길을 확 바꾸는 게 혁명이겠지요. 4.19의거를 혁명이라고 한다면 그건 우리 사회의 운영 방식을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확 바꾸게 했다는 의미에서일 겁니다. 그러나 바꿔도 좋은 방향으로, 발전적인 방향으로 바꿔야 혁명이죠. 5.16쿠데타를 혁명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을 겁니다. 단순히 정권을 바꾼다거나 겉모습만 바꾸는 것으로는 혁명이라고 할 수 없죠. 특히 '사회 혁명'이라고 할 때에는 사회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면이 바뀌어야 하는 겁니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 사회 혁명일 수 있는 이유는 이 사태를 통해 프랑스 사회의 기본적인 면이 확 바뀌었기 때문이죠. 단지 왕정이 공화정으로 바뀌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절대권을 쥔 왕의 통치 방식이 사라졌다는 것이 중요한 변화이긴 하죠.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그 뒤에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어떻습니까.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가 되어 다시 제정 시대를 열었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유럽에 전파했다는 평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왜일까요? 프랑스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지요. 봉건적 영주-농노 관계가 해체되고 근대적 사회 관계가 마련되었거든요. 자영농 중심의 농업과 개인주의적 질서가 들어선 거지요. 나폴레옹의 군대가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새로운 사회 질서 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폴레옹이 편찬하도록 한 나폴레옹 법전은 이런 변화를 반영한 것이구요. 이 같은 근본적인 변화와 견주어 보면, 나폴레옹이 황제 노릇을 한 것은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결국 나폴레옹은 몰락하고 말잖아요. 그 뒤에도 나폴레옹의 조카가 나폴레옹 3센가 하는 이름으로 잠시 왕 노릇을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합니다. 사회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뀐 다음에는 이전의 왕정과 같은 통치 형태가 유지되기는 어려워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근본적으로 바뀌는 사회 관계란 어떤 것이고 또 그 관계는 왜 바뀌는 것일까요?
앞에서 읽은 맑스의 말에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맑스의 답을 들어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맑스의 생각에 따를 때 사회 혁명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지요? 그렇습니다. 생산 관계입니다. 생산관계의 변
화가 맑스가 보는 사회 혁명의 핵입니다. 맑스는 '사회 혁명의 시기'에는 '경제적 기초'가 변화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제적 기초란 바로 생산관계입니다. 왜, 지난 시간에 우리는 맑스가 생산관계의 총체를 한 사회의 '경제적 구조'요, '현실적 토대'라고 부르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곧 '경제적 기초'입니요. 그러니까 경제적 기초가 변화한다는 말은 생산관계가 변화한다는 말이지요. 맑스가 볼 때 사회 혁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생산관계의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산관계는 왜 변화하는 것일까요? 그렇죠, '생산력과의 모순' 때문입니다. 생산력은 발전하려고 하는데, 생산관계가 이걸 도와주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즉 발전하는 생산력과 그걸 오히려 억누르는 생산관계, 이 둘은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관계, 곧 둘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관계,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모순이지요. 모든 방패를 뚫는 창-이게 모(矛)죠-과 모든 창을 막는 방패-이게 순(循)입니다-는 동시에 같이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한 쪽이 날라가야죠. 변화해야 됩니다. 그런데 생산력과 생산관계에서는 어느 쪽이 변합니까? 어느 쪽이 날라가죠? 맞습니다. 당연히 생산관계가 날라갑니다. 왜냐?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역사유물론에서 생산력은 지속적으로 커지고 발전하는 것이거든요. 이게 줄어들거나 계속 멈춰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반면에 생산관계는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차적으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바뀌어야 하는 겁니다. 저는 이 생산력-생산관계의 모순을 설명할 때 곧잘 뱀의 몸뚱이와 뱀의 껍질 사이의 관계에 비유하곤 합니다. 생산력이 뱀의 몸뚱이라면 생산관계가 뱀의 껍데기라는 얘기죠. 뱀의 껍데기는 뱀 몸뚱와 달리 자라지 못 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뱀은 커가면서 일정 기간마다 껍데기를 벗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더 이상 자랄 수 없으니까요. 껍질은 뱀의 몸뚱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껍질이 없으면 뱀은 살아갈 수가 없죠. 몸뚱이가 자라는 것도 다 이 껍질 속에섭니다. 이건 맑스가 생산력은 언제나 생산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커간다고 보는 것과 유사하지요. 위에서 읽은 대목에도 그런 표현이 있죠. '생산력 자신이 이제까지 운동해 왔던 생산관계'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생산관계가 없으면 생산력은 작용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발전해 나갈 수도 없지요. 하지만 일정 단계에 이르면, 마치 뱀의 몸뚱이가 자라 이제 더 이상 이전의 껍질 속에서는 성장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처럼, 생산력은 이전의 생산관계 속에서는 더 이상 커갈 수 없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성장을 보호해 왔던 껍질이 이제는 성장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뱀이 낡은 껍질을 벗어던지고 더 큰 새 껍질을 마련하듯 낡은 생산관계를 새로운 생산관계로 바꾸게 된다는 얘깁니다. 물론 이런 비유는 모든 비유가 그렇듯 정확한 묘사가 못 됩니다. 생산관계가 '껍질'에 불과한 것은 아니니까요. 역사유물론의 사회구조에서 생산관계는 '실질적 기초'입니다. 매우 중요한 핵심 부분이지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제가 이 뱀 껍질의 비유로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잘 아실 겁니다. 계속 성장하려는 생산력과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생산관계, 이 둘의 모순 관계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해소되느냐, 이것을 비유를 통해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결국, 이런 식으로 보면 생산관계가 변하는 이유는 무엇 뭐냐? 이전의 생산관계로는 더 이상 생산력의 발전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요컨대, 맑스에 따르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생산관계가 바뀌는 것, 이것이 사회 혁명의 요체입니다.
그렇지만 생산관계만 바뀐다고 해서 사회 혁명이 완수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산관계 위에 자리잡는 사회의 구성 부분, 즉 상부구조도 변화되어야죠. 하부구조인 생산관계가 법이나 정치 제도 따위인 상부구조의 조건인 한, 생산관계가 바뀌면 상부구조도 바뀌는 게 당연하겠
죠. 여러 사회적 의식형태들인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구요. 그래서 맑스는 '경제적 기초와 함께 상부구조 전체가' 변혁된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다소간 급속하게' 변혁된다고 하는 표현은 왜 들어갔을까요? 사실 이 부분은 '때로는 보다 천천히, 때로는 보다 빠르게'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 그 속도에 차이가 있지만 좌우간 변혁이 이루어진다는 뜻이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구의 시민 혁명만 보더라도 영국의 경우에는 그 변혁이 청교도 혁명, 명예 혁명 따위를 거치면서 천천히 이루어졌고, 프랑스의 경우에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폭발적 사건을 통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지요. 어느 쪽이 더 낫다 못하다를 따지기는 어렵습니다. 각 사회의 사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까요.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그만큼 철저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 과다한 파괴나 희생이 뒤따르기도 하고, 천천히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과거의 유산이 보존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보수적 사회 계층이 남아서 개혁의 발목을 잡는 모습도 많이 보이지요. 그러나 어쨌든 생산관계의 변혁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상부구조의 변혁도 불가피하다는 것이 맑스의 생각이지요. 사회 혁명은 사회 발전에서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과정, 그런 의미에서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겁니다. 사실 사회혁명 과정을 생각하면서 맑스가 주로 염두에 두었던 것은 근대 시민 혁명 과정, 즉 부르주아 혁명 과정이었지요. 이 혁명이라는 게 17, 18세기에 주로 일어난 것이다 보니 맑스에게는 가장 두드러진 혁명의 자료가 되었겠지요. 맑스 자신이 이 근대 혁명의 연장선 위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겠고, 그 자신이 이 혁명 과정, 특히 프랑스 혁명의 진행 과정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기도 했으니까요. 다른 사회 혁명, 이를테면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중세 봉건제 사회로의 이행이라든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의 이행 등에 대한 생각은 다 이 근대 혁명을 고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마련되었다고 보아 좋을 겁니다. 누구나 자신의 시대 경험을 바탕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맑스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맑스도, 맑스의 사상도 다 '시대의 자식'인 셈이지요. 그리고 이런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는 것이 맑스의 탁월함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다음 구절을 읽어볼까요.
"이러한 변혁을 고찰하는 데 있어, 자연과학적으로 엄밀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경제적 생산 조건의 물질적 변혁과, 법, 정치, 종교, 예술, 철학의 제 형태 즉 이데올로기의 제 형태--인간이 갈등을 의식하고 그 갈등과 싸우는 것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의 제 형태를 통해서이다--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한 개인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의거하여 판단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변혁기를 그 시대의 의식으로부터 판단할 수는 없다. 반대로 이 의식은 물질적 삶의 모순으로부터,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관계간에 존재하는 갈등으로부터 설명되어야 한다."
여기에선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생산 조건이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맑스가 이데올로기를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느냐도 잘 드러나지요. 즉 법, 정치, 종교, 예술, 철학 등을 이데올로기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건 사회적 존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존재가, 특히 경제적 존재 조건이, 생산관계와 그 생산관계에서의 위치가 바뀌면, 이데올로기도 따라서 바뀌는 것이지요. 예전엔 이 이데올로기에 무엇이 속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꽤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의 언어가 상부구조에, 이데올로기에 속하느냐 아니냐 등이 문제가 되었지요. 어떻습니까? 언어는 이데올로기에 속하는 것일까요, 아닐까요? 언어가 하부구조에 속한다고 보긴 어려우니까 상부구조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하지요. 그런데 또 언어가 상부구조나 이
데올로기다, 이렇게 생각하기는 어쩐지 마땅찮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문제를 푸는 좋은 방법은 도대체 상부구조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 왜 나오게 되었나를 생각해 보는 겁니다. 맑스가 그 개념들을 통해 무엇을 포착하고자 했나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래야 거기에 뭘 빼고 뭘 넣을지가 분명해지지 않겠습니까. 자, 그럽 봅시다. 맑스가 상부구조니 하부구조니, 생산력과 생산관계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용어들을 사용한 것은, 사회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 사회구조의 고정되어 상태를 보고자 하는 게 맑스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맑스의 주된 관심은 사회혁명에,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에 있었거든요. 따라서 사회구조가 문제되는 것도 사회혁명을 파악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한에서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이데올로기니, 상부구조니 하는 용어 자체가 이런 사회 변혁 내지 변동을 염두에 두고 마련된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사실 사회 변동과 직접 관계없는 것들은 맑스의 관심 밖에 있었다고 보아 좋을 겁니다. 그런데 언어는 어떻습니까. 언어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사회 혁명이나 사회 변동에 직접 관련이 있어 보이진 않지요. 사회적 존재가 바뀔 때 따라 바뀐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언어란 게 대단히 큰 폭을 갖는 것이어서 사회 변동에 따른 변화가 있다 해도 그 변화는 언어 전체에 비추어 보면 미미한 것이기 쉽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언어를 이데올로기나 상부구조라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무리라고 보입니다. 맑스가 상부구조, 하부구조를 구분할 때, 이런 틀로 사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괄하려고 했다고 볼 필요는 없지요. 되풀이되는 얘깁니다만, 사회 변동의 주요한 요소들을 포착하는 게 맑스의 목적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괜히 쓸데없는 논란에 정신을 빼앗기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이데올로기나 상부구조 따위만이 아니라 어떤 개념이든지 그 내용을 파악하고자 할 때는, 그 개념이 노리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게 크게 도움이 됩니다. 아무튼 상대적으로 잘 변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자립적인 의식형태들은 이데올로기나 상부구조에서 제외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맑스에게서 사회 혁명의 핵심은 무엇보다 생산관계의 변혁이고 여기에 따라 상부구조나 이데올로기가 변혁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한편, 우리가 앞서 읽은 대목에는 "인간이 갈등을 의식하고 그 갈등과 싸우는 것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의 제 형태를 통해서이다"라는 구절이 있지요. 이것도 중요한 얘깁니다. 사회혁명에서 생산관계의 변혁이 핵심이지만, 사람들이 혁명 과정에서 이 점을 직접 의식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건 근대 시민혁명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시민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를테면 프랑스대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야, 지금 생산관계가 바뀌고 있으니까 사회혁명의 시기구나'라고 생각해서 혁명적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그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들에 따라, '자유, 평등, 박애'라는 '보편적' 기치에 따라 행동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사실 이런 것들이 시민계급의 이데올로기였지요. 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당시의 시민계급은 왕이나 귀족들과 싸운 겁니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라고 해서 부정적인 역할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시민계급의 이데올로기는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근대사회를 여는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그런 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지요. 물론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는 보수적인 역할을 했을 겁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봅시다. 왜, 여러분 '왕권신수설'이라고 아시죠. 왕권이란 신에게서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래서 왕권은 신성한 것이고, 따라서 왕이 부여한 귀족들의 권한도 정당성을 가진다, 하는 게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 왕과 귀족들은 이런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당시 사회를 지배해왔고 또 지배해나가려 했을 겁니다. 반면에, 이제 새롭게 힘을 키워가고 있던 시민계급은 사회계약론을 주장했죠. 정치적 권력이란 게 신에게서 뚝 떨어진 게 아니
라 자연적인 권리를 지닌 사람들이 서로 약속을 통해 만든 거다, 그러니까 모든 권력의 원천은 국민들에게, 사회구성원들 모두에게 있다, 이런 주장을 했던 겁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정면에서 맞부딪히지요. 실제로 대립하는 투쟁은 이런 주장의 차이, 신념의 차이에서 빚어집니다. 이런 게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지요. 이 이데올로기의 대립 때문에 서로 죽이고 살리고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혁명 당시에 사람들은 생산관계의 변화 때문에 서로 싸운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고, 우리 생각이 정의롭고 옳은데 저놈들은 우리랑 생각이 정반대니까 저놈들과 싸워야한다, 보통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사회의 갈등과 충돌을 의식하고 또 이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그 갈등을 둘러싼 싸움을 해나가는 것이죠. 이런 것이 사실 이데올로기의 역할입니다. 이라크와 미국의 대립, 갈등의 경우에도 이런 이데올로기가 큰 역할을 하죠. 미국의 부시가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세요. 무엇보다도 중동의 석유 자원 때문에 미국이 중동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게 미국의 이익, 아니, 미국 지배층의 이익에 긴요한데, 이라크가 거기 걸림돌이 되니까, 또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미국 방위 산업체의 이익이 되니까, 이라크와 전쟁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얘기합니까. 그렇지 않죠. 미국은 정의의 세력인데, 이라크는 여기에 도전하는 악의 집단이다, 그러니까 '정의의 전쟁'을 통해 이들 악을 뿌리뽑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지요. 그럼 이라크는 어떻습니까. 이라크는 이라크대로 자신들을 신의 편이자 정의의 편으로, 미국을 악의 집단으로 규정하지요. 비록 그 바탕에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의식하는 건 이런 이데올로기를 통해섭니다. 그럼, 어느 쪽이 맞습니까? 이건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느냐와는 조금 다른 문젭니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이라크가 악의 화신도 아니고 또 정의의 화신도 아니겠죠. 미국도 마찬가집니다.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데, 그래 나는 악의 편이다, 부정의의 편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다 정의를 위해, 선을 위해 싸우는 것이죠. 그러나 이건 대체로 자기네들 나름의 정의이고 선입니다. 자기네들의 처지와 이해관계 등에 바탕을 둔 가치들이란 말이지요. 물론 여기서도 진보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볼 수는 있습니다. 쇠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자기네들의 가치를 움켜잡고 있는 건 보수적인 거고, 새롭게 등장해서 확산되어 나가는 질서에 바탕을 둔 가치를 내세우는 건 진보적인 것이겠죠. 앞서 말했듯, 근대 시민혁명 과정에서 부딪힌 이데올로기 가운데 구 귀족들의 이데올로기는 보수적인 거고 시민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진보적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다면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라고 해서 반드시 객관적인 거다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근대 혁명 당시 진보적인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는 사회계약론의 내용 가운데에도 사실 허구적인 면들이 있거든요.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가 정말 개개인들이 모여 계약을 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현대 사회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죠. 하지만 당시의 사회는 안 그렇거든요. 오히려 그렇게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정당하니까 그렇게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사회계약론을 내세운 사람들의 기본 생각이었겠죠. 그러나 어떻든 사회계약론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허구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데올로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당시 사회에 대해 판단을 하면 정확하고 객관적인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겠죠. 그래서 맑스는 이데올로기가 '갈등을 의식하고 그 갈등과 싸우는' 통로가 된다고 보면서도, 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사회를, 특히 변혁기의 사회를 판단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그 사회를 판단하는 건 한 개인이 자신에 대해 하고 있는 생각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거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처지에서 자기에 대해 생각하기 마련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속이려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걸 제대
로 알려면, 그 사람이 놓여있는 자리와 객관적인 조건들을 우선 고려해야 하는 겁니다. 아무리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조건들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거든요. 실제로 한 개인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사람들이 의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조건들입니다. 가령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고 해 봅시다. 은행이 그 사람의 생각이나 말만 믿고 돈을 빌려주나요? 그렇지 않죠.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직장에 다니고 있으며 재산은 어느 정도인가 따위가 중요합니다. 또 어디 취직을 하려고 해도 그 사람의 생각이나 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일을 해 왔느냐 따위가 결정적인 판단 기준이 됩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객관적인 조건에 바탕을 두고 그 사람의 생각에 대해 평가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왜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는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객관적인 처지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맑스는 변혁기의 사회도 이데올로기로부터 판단할 게 아니고 물질적 조건에서부터 판단해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사회 변화를 파악하는 기본이 된다는 거구요, 변혁기에 나타나는 이데올로기들은 이런 모순과 갈등을 바탕으로 설명해야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들은 사회 변혁의 결정적인 요인들이라기보다는 파생적인 것들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주어지는 지평이 물질적 조건 위에 있다는 얘기지요. 우리의 경우는 '반공 이데올로기'도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예가 되겠지요. 한 십년, 이십년 전만 해도 이거 정말 굉장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고, 고문당하고...정말 심각했지요. 지금도 '반공 이데올로기'가 완전히 힘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많이 수그러들었습니다. 근데 그 주요 원인은 이데올로기 자체에 있지 않지요. 그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던 사회적 조건이 변화된 데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남한 경제의 괄목할 만한 성장, 반면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의 처지,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몰락 등이 그 원인이고 배경이 될 겁니다. 이렇듯 이데올로기의 의미와 역할은 사회의 물질적 조건과 관련하여 조망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조망되어야 한다는 것이 맑스의 생각입니다. 자, 그럼 이제 다음 구절을 읽어볼까요.
"한 사회구성체는 그의 모든 생산력이 완전히 전개되기 전에는 즉 생산력에 있어서 아직 발전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그리고 보다 높은 새로운 생산관계는 그 물질적 존재 조건이 이전 사회의 태내에서 부화되기 전에는 결코 자리잡지 못한다. 따라서 인류는 항상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자세히 고찰해 볼 때 과제라는 것은 항상 그 해결의 물질적 조건이 이미 존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형성 중인 때에만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건 보기에 따라 문제가 많은 구절입니다. 대단히 경제 결정론적인 문장들로 읽힐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사실 맑스의 역사관은 경제 결정론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관점이 크게 잘못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아무튼 이 내용을 검토해 봅시다. '사회구성체'라는 건 말 그대로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층위의 결합체, 그러니까 생산양식과 이데올로기의 결합체, 생산력과 생산관계(하부구조) 및 상부구조의 결합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따라서 하나의 '사회구성체'하면 특정한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그 생산관계의 바탕이 되는 생산력과 그 생산관계에 상응하는 상부구조가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사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말하자면 봉건적 사회구성체, 자본제적 사회
구성체 따위가 있는 것이죠. 사회 혁명기란 이 사회구성체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시기구요. 그런데 맑스는 이 사회구성체는 그 속에서 발전할 수 있는 생산력이 다 발전하고 나서야 소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봉건적 사회구성체는 그 안에서,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봉건적 생산관계 안에서 발전 가능한 생산력이 다 발전될 때까지는 망하지 않고, 그 생산력의 발전 여지가 다 소진되어야만, 그래서 더 이상 생산력이 발전할 수 없게 되어야만 망하게 된다는 것이죠. 뱀 껍질이 바뀌는 것은 그 껍질 속에서 자랄 수 있는 한도까지 몸뚱이가 다 자라고 난 후이다 라는 식의 이야깁니다. 꽉 차야 터지는 거라고 할까요. 그 다음 문장도 같은 맥락이죠. 한 사회구성체가 다른 사회구성체로 바뀌려면 새로운 생산관계, 보다 높은 생산관계가 나타나야 하는데,--'보다 높은'이라는 건 보다 높은 생산력을 담을 수 있는'이라는 뜻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기존의 생산관계를 대체하는 건 '보다 높은' 생산관계라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생산관계가 바뀔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 새로운 생산관계가 등장하는 것은 그 물질적 존재 조건이 바로 그 사회 속에 마련될 때에 이르러서다 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생산관계의 물질적 존재 조건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기존의 생산관계에서 장애에 부딪힌 생산력, 그러나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안고 있는 생산력이라고 보아야 되겠죠. 이런 생산력이 새로운 생산관계를 요구하고 또 이 생산관계가 이 생산력의 발전 가능성을 실현시켜 줌으로써 새로운 생산관계가 이전의 생산관계를 대체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식의 설정은 여러 사회들 사이의 상호관계는 일단 접어둔 채로 한 사회의 발전만을 문제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실제 세계에 이런 이야기를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을 겁니다. 하나의 사회만을 염두에 두는 단순화와 추상화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니까요. 가령 이런 수준에선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와 그렇지 못한 봉건 사회의 충돌, 예컨대 19세기에 나타났던 유럽세계와 중국의 충돌 따위는 직접 문제삼기가 어렵죠. 물론 사회 외부의 영향도 사회 내부를 통해서 작용한다든가 하는 설명이 더해지면 한 사회 중심의 틀을 통해 이런 종류의 충돌에 따른 사회 변화를 설명해 나갈 수도 있겠습니다만--모택동의 모순론 같은 게 이런 예가 되겠죠--, 그러나 어떻든 맑스가 일단 서유럽 사회를 모델로 해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뭐, 맑스 자신이 유럽인이고, 또 그가 해결해야 했던 당면한 문제가 유럽의 혁명이었으니까, 이런 식의 일반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죠. 그리고 사회 발전의 경향성이나 법칙성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선 여러 사회들 사이의 관계를 일단 접어두고 한 사회의 변화를 다루는 게 사실상 불가피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 얘기가 더 재미있지요. "인류는 항상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제기한다". 이건 또 굉장히 낙관론적인 선언으로 들립니다. 이걸 뒤집어 읽으면, 일단 과제로 제기된 문제는 항상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 되니까요. 이 점 때문에 이 구절은 오늘날 흔히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요. 인류는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제기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환경 문제나 핵 문제 같은 것들이 그것이죠. 인류는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 스스로에 의해 망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그러한 위험을 정말 새롭게 인식해야 된다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항상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제기한다는 식의 낙관론은 용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옳은 얘깁니다. 그렇지요. 오늘날의 견지에서 보면 인류는 항상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맑스가 이런 말을 할 때의 맥락을 생각해 보면 그 말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을 겁니다. 지금의 맥락은 사회 혁명 내지 사회 변화를 다루는 대목입니다. 생산력 발전이 남김 없이 이루어져서 그 사회가 한계에 부딪혀야 그 사회가 변화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맥락이지요. 이렇게 사회 혁명의 시기가 다가오면 그때서야 사람들은 이런 변화의 조짐을 의식하게 됩니다. 무엇을 통해서?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사회적 의식을 통해서. 이게 중요합니다. 이데올로기 또는 사회적 의식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아무때나 과제가 제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한 물질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을 때에만 과제가 과제로서 제기되는 것이죠. 그런 게 어디 있느냐, 해결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과제를 제기하면 되는 거 아니냐구요? 그렇진 않죠. 이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 과제의 문제죠.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과제를 제시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만, 그게 현실에서 해결될 가능성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걸 과제로 받아들이질 않죠. 사회적 과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가령 지금 상황에서 태양계 밖에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그걸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그걸 과제로 받아들이겠습니까? 하지만 태양계 외부로 자유롭게 여행하고 이동할 수 있는 물질적 여건이 마련된 상태라고 하면 사정은 다르겠지요. 사회 변혁의 문제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지요. 가령 고려 시대에 '모든 인간은 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가졌으니 우리 개인의 권리에 바탕을 둔 시민 민주주의를 하자'라고 외치는 것이 가능할까요? 또 비록 이런 '선각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생각이 사회의 과제로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어림없는 일이지요. 우리는 고려 시대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보다 못나서, 또는 우리보다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열등해서 왕권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여건이, 무엇보다도 물질적 여건이 달랐던 것이지요. 농업 중심의 사회, 변화가 느린 사회에서는 정치적 권력이 세습 왕권을 통해 작용하는 것이 큰 무리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가 빠른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는 세습 왕권은 고사하고 한 개인이 수십 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는 것조차 용납되기 곤란합니다. 그래서는 아무래도 변화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우니까요. 독재자들이 군림하는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 이런 점을 말해 줍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시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매우 강력한 것이 될 수 있죠.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특별한 조건--예컨대 그 사회가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여 내부의 결속에 과도한 신경을 써야 한다든지 하는 조건--이 없다면, 이러한 과제는 조만간 실현될 겁니다. 사회 혁명과 관련된 과제, 즉 맑스의 견지에서 볼 때 생산관계의 변혁과 관련된 과제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지요. 도대체 실현될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과제라는 것이 과제로 떠오를 수 없다는 것이 맑스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생각이 현실의 다른 많은 조건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대단히 낙관적인 견해라는 점을 부정할 의도는 없습니다. 실제로 맑스의 견지에 따라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던 많은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간 역사를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인류는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제기한다는 맑스의 주장은 단순화되어 있고 과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점은 맑스가 사회적 과제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그 해결의 물질적 조건을 연계하여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것도 물질적 조건의 바탕 위에서 사회적 의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 이제 오늘 강의의 마지막 대목을 보도록 합시다.
"크게 보아서 아시아적 생산양식, 고대적 생산양식, 봉건적 생산양식,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을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단계적 제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는 최후의 적대적인 형태의 사회적 생산 과정이다. 적대적이라 함은 개인적 적대라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들의 사회적 삶의 조건에서 발생하는 적대를 의미한다. 한편 부르주아 사회의 태내에서 발전하고 있는 생산력은 이 적대의 해결을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창출해낸다. 그
러므로 이 사회구성체를 끝으로 인류 사회의 전사(前史)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근대 부르주아적'에 대해서는 지난 강의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죠. 그때는 생산관계의 종류들로 소개했지만, 여기서는 생산양식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예요. 생산양식이라는 게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결합체니까요. 또 경제적 사회구성체과 생산양식이 같은 걸 가리킨다는 점도 분명하죠. 대체로 보아서 이런 생산양식들이 연속되는 발전 단계를 이룬다는 게 맑스의 생각입니다. '크게 보아서'라고만 번역을 했습니다만, '큰 윤곽으로 보아'라는 뜻이니까 대체적인 얼개가 그렇다는 겁니다. 이 부분에서 특징적인 것은 '적대'라는 말인데요, 지금까지 있어 왔던 생산양식과 생산양식들이 다 적대적인 형태라고 규정되고 있죠. 이 적대는 개인적인 적대가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서 생겨나는 적대라고 하는데, 이건 곧 계급적 적대를 뜻하는 것입니다. 계급이라는 게 개인에 해당되는 규정이 아니잖아요. 생산관계에서의 위치에 따른 사회적 규정입니다. 계급적 적대라는 건 생산관계에서의 이해관계가 상반될 때 생기죠. 이른바 착취 관계가 성립할 때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사이의 관계가 여기서 말하는 적대에 해당하죠. 이 관계는 지배관계로, 즉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관계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이 지배계급이고 착취계급이죠. 이들이 생산수단을 장악하지 못한 생산자들로부터 잉여생산물을 착취합니다. 이렇게 착취를 당하는 계급이 피착취계급이고 피지배계급이죠. 노예나 농노 노동자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노예나 농노에 대한 착취는 바로 눈에 보이는 데 반해, 즉 노예와 농노의 생산물이 노예주나 영주의 몫이 된다는 것이 드러나고 이것이 이른바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뒷받침되는 데 반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임금노동이라는 껍데기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맑스의 생각이죠. 그러나 직접 생산자는 노동자이고 그 생산물의 상당 부분이 노동하지 않는 자본가의 손으로 들어가는 이상, 착취가 있는 건 분명하다고 맑스는 주장합니다. 맑스는 이 메커니즘을 『자본론』에서 상세히 구명하고자 하죠. 아무튼 이런 착취가 있는 한, 이들 사이의 관계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맑스는 봅니다. 이해관계가 상반되니까요. 착취계급이 많이 가져가면 피착취계급은 그만큼 덜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요새 흔히 말하는 '윈-윈' 게임이 될 수 없는 거죠. 물론 많이 생산하면 전체 총량은 늘어나겠습니다만, 그런다고 해서 착취-피착취 관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많이 생산했다 하더라도 덜 뺏기면 그만큼 더 가질 수 있습니다. 더 뺏기면 그만큼 덜 가질 수밖에 없구요. 이런 관계가 존재하는 한, 상대방이 인간적으로 미워서가 아니라 그 사회적 조건 때문에 노동자와 자본가는 적대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투쟁이, 이른바 계급투쟁이 불가피합니다. 물론 이런 계급투쟁은 언제나 같은 강도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생산관계 내지 생산양식이 안정되어 있는 때에는, 즉 그 생산관계 하에서 생산력의 발전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때에는 계급관계도 안정된 모습을 보입니다. 계급투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격화되진 않죠. 그러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심해지는 시기가 오면 계급투쟁도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생산관계의 변혁에 따라 그 계급관계가 와해되고 다른 관계로 대체되는 것이죠. 이때 대체로 이전의 지배계급은 몰락하고 이전의 피지배계급이 새로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눠진다고 얘기됩니다. 물론 이전의 봉건 영주에서 자본가로 변신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죠. 하지만 이전의 농노에서 자영농민이나 수공업자로 성장해 나온 사람들이 분화해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는 겁니다. 새로운 착취관계, 새로운 지배관계가 들어서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이 발전된 생산력에 상응하는 발전된
생산관계와 결합된 것인 한, 이 같은 변화를 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적대'의 관계가 다른 방식으로 유지되지만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포함해서 이제까지의 역사가 적대의 역사,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죠. 이 적대와 계급투쟁을 통해서 역사는 진보해 왔습니다. 생산력의 발전이, 그리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사회 변혁과 진보의 조건이고 원인이기는 합니다만, 이러한 변화는 계급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고 계급투쟁에 의한 진보입니다. 하지만 맑스는 이런 방식의 역사는 자본주의 사회까지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후에는 이 '적대'가, 계급투쟁이 사라진다는 것이죠. 자본주의 다음에 오는 사회,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에는 적대가, 계급투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다음의 역사는 자본주의까지의 역사와 아주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는 자본주의까지의 역사를 인류 사회의 '전사(前史)', 그러니까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기 전의 역사라고 부르는 겁니다. 공산주의 이후의 역사야말로 적대관계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인류의 역사, 본격적인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본격적인 역사는 이미 자본주의 사회 속에 준비되고 있다는 것이 맑스의 생각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을 발전적으로 무너뜨릴 준비를 자기 속에서 이미 하고 있다는 것이죠. '부르주아 사회--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은 자본가, 즉 부르주아이므로 자본주의 사회는 곧 부르주아 사회입니다--의 태내에서 발전하고 있는 생산력', 이것이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발전하는 생산력이 더 이상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 발전할 수 없게 되면, 자본주의하에서의 계급투쟁은 격화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는 새로운 사회로, 더 이상 적대적이지 않은 사회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하에서의 계급투쟁은 거의 마지막 계급투쟁이 되는 셈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맑스의 생각은 과연 맞는 것일까요?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 같은 맑스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맑스의 역사관이, 곧 역사유물론이 갖는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런 문제는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맑스의 관점과 더불어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줄이지요. 안녕히 계세요.
역사유물론 강의 4
제4강 역사유물론과 현대
안녕하십니까? 역사유물론 강의를 맡고 있는 문성원입니다. 이제 네 번째 시간입니다. 벌써 마지막 시간이군요. 그래서 오늘은 아직 미처 다루지 못한 맑스의 공산주의 사회관을 살펴보고, 부족한 감이 있긴 합니다만, 이제껏 말씀드린 역사유물론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이러한 관점이 오늘날 어떠한 의의를 갖는지를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유물론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들, 그리고 그에 따른 역사유물론의 변화 등을 다뤄 보기로 하지요.
우선 제가 소개드린 「1859년 서문」의 내용은 어떤 확정된 공식이나 법칙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맑스가 자신의 연구를 진행해 나가기 위한 대체적인 관점으로 제시한 것이지요. 따라서 이 얼개는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더 풍부해지고 때로 수정되는 것으로 봐야 할 겁니다.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맑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으니까요.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고 그 속에서 어떤 방향성을 잡아내려 할 때, 그 연구에 적용하고 검증해 볼 어떤 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맑스는 그런 틀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지요.
그런데, 미래에 대한 연구는 지나간 역사에 대한 연구와 또 좀 종류가 다릅니다. 지나간 역사야 그 역사가 남긴 흔적, 즉 사료(史料)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사료에 비추어 자신의 관점과 가설, 주장 등을 검증해 볼 수 있지요. 반면에 미래(未來)는 말 그대로 '아직 오직 않은'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검증해 볼 도리가 없지요. 자연과학에서야 실험 같은 걸 통해 가설을 확인해 본다고 하지만, 사회 역사 영역에서 미래에 대한 예측은 미리 확인해 볼 방도가 없습니다. 그 미래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래서 미래에 대해서는 온갖 불확실한 예측이 난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미래에 대해 책임 있게 얘기하기란 무척 어렵고 조심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신뢰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얘기해야 하니까요. 신뢰할 만한 근거, 이런 것이 있기는 한가요?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미래는 지금 존재하는 세계가 운동해간 것일 테고 그런 한에서 현재와 인과적 연관을 가진 것일 테니까요. 그리고 현재의 세계는 과거 세계와 또 그런 연관을 갖는 것인 만큼, 미래는 과거와도 연관을 갖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과거의 역사에 대해 잘 알면 알수록, 그래서 현재 세계의 됨됨이를 더 잘 파악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미래에 대해 더 믿을만한 예상이나 예측을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정말 많은 변수와 원인들이 작용하고 있지요. 그나마 몇몇 요인들만 추려내서 예측을 할 수 있는 자연 영역과는 달리--자연에 대한 예측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가령 일기예보를 보세요. 고려해야 할 요인들이 많기 때문에 그 정확성엔 뚜렷한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사회 역사 영역에는 인간의 의지나 의식 같은 요소들도 작용하기 때문에 미래를 정확하게 알기란 정말 어려운 일일 겁니다. 대체적인 윤곽이나마 그리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이런 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기를 꺼립니다.
맑스도 그렇습니다. 맑스도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아니, 맑스는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 확실한 주장을, 단언적인 주장들을 하지 않았냐구요? 글쎄요, 그런 면도 있지요. 지난번에 보았듯이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멸망이나 비적대적인 공산 사회의 도래에 대해 강한 어조로 얘기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상 공산주의 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산주의 사회의 상을 함부로 그려내는 사
람들을 비판하곤 했지요. 『경제학 철학초고』를 쓸 무렵부터, 이른바 '조야한 공산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했지요. 당시의 자본주의 사회 모습에서 못마땅한 부분만을 단순히 역전시켜 놓고 그걸 공산주의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맑스는 공산주의란 어떤 고정된 '상태'나 '이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지요.(『독일 이데올로기』) 공산주의란 하늘에서 떨어지듯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극복하면서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 따라서 공산주의의 생명은 현실의 운동 속에 있다는 것--이런 점을 맑스는 강조하고자 한 것이겠지요.
물론 때로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묘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묘사들은 대개 뚜렷한 맥락이 있는 것들이지요.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오전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때는 시를 쓰고 비평을 할 수 있다는 식의 묘산데요(이런 이야기는 『독일 이데올로기』에 나오고 『자본론』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죠), 이건 분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분업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 즉 어느 사회에서나 우리가 하나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은 아니고,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분업이 폐지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러니까 이 구절만을 문제 삼아서 맑스가 공산주의 사회를 아주 목가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사회로 보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그다지 공평하지 못해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생산력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 여가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오늘날처럼 경쟁에 시달리면서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 있다면 자유롭게 일과 여가를 결합시킬 수 있겠죠. 그래서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충분하고 자유로운 발전이 근본 원리가 된다고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자본론』).
그리고 또 유명한 것이 분배 문제와 관련되는 공산주의의 원칙에 대한 맑스의 언급이지요. 왜, 아시죠?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라는 원칙 말이에요. 이걸 풀어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식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회의 특성이다 라고들 하죠. 그런데 이런 얘기도 상당히 구체적인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이 대목은 「고타 강령 비판」이라는 글에 등장합니다. 1875년에 '고타'라는 지역에서 독일 노동자 정당의 통합 당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거기에 제출된 강령을 비판하기 위해서 씌여진 것이 바로 이 「고타 강령 비판」이죠. 그러니까 이건 맑스가 공산주의 사회의 청사진을 그리겠다는 목표하에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잘못된 강령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일환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맥락을 무시하고 무조건 맑스가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원칙, 따라서 공상적인 원칙을 제시했다고 평하는 것 또한 잘못일 겁니다. 맑스는 이러한 원칙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얘기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높은 단계가 있고 낮은 단계가 있느냐구요? 있죠. 있습니다. 보통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그럼,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낮은 단계는 이제 막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생겨난 사회이고 그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와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논의한 분배 면에서 보자면 '필요에 따른' 분배가 아니라 '성과에 따른' 분배, 말하자면 각자가 제공한 노동에 비례해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죠. 맑스는 이걸 여전히 부르주아적 권리가 지배하고 있는 사태라고 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잔재라는 것이죠. 그렇지만, 각자가 제공한 노동에 따라 분
배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구요? 그렇죠. 생산물이 제한되어 있고,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존재하는 한 그렇습니다. 생산에 기여한 바가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덜 가져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되니까요. 그러나 맑스는 이런 사태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타 강령 비판」에 나오는 유명한 맑스의 말을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가 되면, 즉 개인이 노예처럼 분업에 예속되는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도 사라지고 나면,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제1차적인 욕구가 되고 나면,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여 집단적인 부의 모든 원천이 흘러넘치고 나면-- 그때 이후에야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좁은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다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여기에서 보듯,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는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여 생산물에 부족함이 없고 개개인이 어떤 특정한 직업에 묶임이 없이 자신들의 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입니다. 에이, 그런 사회가 어떻게 가능하냐구요? 글쎄요, 오늘날의 견지에서는 이와 같은 사회가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묘사라는 점을 염두에 둡시다. 맑스도 이런 사회를 당장 이루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요. 제가 이 대목을 인용한 이유는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야 어쨌건 맑스의 역사유물론적 관점이 일관된 방식으로 공산주의 사회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낮은 단계건 높은 단계건 적대적인 생산관계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공산주의 사회는 다 같지요.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이루어져 있는 상탭니다. 그러나 낮은 단계는 이제 막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온 만큼 생산력 수준이 낮구요, 그래서 분업을 해소할 정도에 이르지 못하죠. 적대적인 관계는 사라졌지만, 여러 직업들과 부문들 간의 상이한 이해관계는 존재합니다. 아직도 '결핍'이 있고 또 그에 따른 갈등이 있는 사회인 것이죠. '성과에 따른 분배'라는 원칙은 이러한 이해관계의 차이와 갈등을 해결하는 방편인 셈입니다. 반면에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이르면 이러한 갈등조차가 사라집니다. 왜냐? 분업이 사라지고 따라서 이해관계의 충돌이 사라지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렇게 분업이 사라질 수 있는 조건, 즉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일하고 스스로를 개발할 수 있는 조건은 뭡니까? 그렇습니다. 고도의 생산력 수준입니다.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그것을 딛고 발전한 매우 높은 수준의 생산력이지요.
그러니까 맑스는 공산주의의 발전 역시 '생산력-생산관계-상부구조'라는 기본틀에 따라서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공산주의에서는 적대적이지 않은 생산관계 하에서 생산력이 발전합니다. 그러니까 적대적 이해관계로 연결되는 이전 생산관계에서와는 달리 더 이상의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으면서도 변화되지 않으려고 버티는 힘이 없거나 매우 약하겠지요. 그래서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에 맞추어 변화해나가는 데 큰 어려움을 없을 겁니다. 이런 변화를 통해 결국 분업을 극복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게 맑스의 생각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의 제도나 법도 이러한 생산력이나 생산관계의 발전에 맞추어 바뀌어나가겠지요. 분배를 규정하는 원칙들은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아직 분업이 필요하고 직업에 따라, 그리고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내부에서도 능력이나 기타 조건에 따라 이해관계를 조정할 필요가 있을 때는, 거기에 맞는 원칙이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이해관계의 조정이 거의 필요 없
을 정도로 여건이 발전되면 또 거기에 맞춰 제도나 원칙 등이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필요에 따라' 분배를 한다는 얘기는 분배의 제도가 아예 필요 없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분배를 한다는 것은 각자가 필요한 만큼 가져다 써도 충분할 정도로 사회의 부가 넘친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것이고, 이런 처지에서야 누가 얼마만큼을 가져가야 한다는 등의 문제로 갈등이 생겨날 여지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어떤 방식의 분배를 강제하거나 관철시키려 할 필요도, 거기에 맞는 제도가 있어야 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니까 사실 '필요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말은 분배의 문제가 사라졌다는 얘기로 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선 유토피아적 상태, 매우 이상적이만 현실화하기는 어려운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발상에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러한 발상 자체도 사회구조와 사회발전에 대한 역사유물론의 기본 틀에서 끌려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이죠.
그러나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까 이런 유토피아적 측면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을 한 가지만 짚어 보기로 하지요.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지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맑스는 인간의 욕구를 잘못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인간의 물질적 욕구는 끝이 없는 것인데, 즉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더 나은 대상을, 새로운 대상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인데, 맑스는 이러한 인간 욕구의 본성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 때문에 인간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를 생각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게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거죠. 어느 정도까지 생산력이 발전해야, 어느 정도까지 사회적 부가 늘어나야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게 도대체 가능하냐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그게 불가능하다면 맑스가 말하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란 그야말로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걸 정점으로 하는 맑스의 역사유물론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현실적 발상이다라는 의견이 나오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에 대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맑스가 인간의 욕구를 완전히 충족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욕구는 계속 변화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점에 인간 욕구의 특성이 있다고 생각했죠. 다만 맑스는 인간 삶에 기초적으로 필요한 물품의 경우에 거기에 대한 욕구가 무한하게 생겨나리라곤 본 것 같지 않습니다. 예컨대 먹는 문제만을 생각해 봅시다. 아마 대개의 사람들은 기왕이면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할 겁니다. 이런 욕구를 다 충족시켜 주는 건 힘들겠죠. 그리고 공산주의라고 해서 그런 욕구를 다 충족시켜 주어야 할 까닭도 없어요. 모든 사람에게 풍족한 정도의 먹을거리만 있으면 되는 것이죠. 가령 모두가 자신이 필요한 만큼 가져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쌀이 풍부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쌀을 '필요에 따라' 분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다른 필수품들도 마찬가집니다. 언제라도 필요한 만큼 취할 수 있다면 구태여 누가 필요 이상으로 가져가려 하겠습니까. 실상 맑스는 이런 필수품의 분배 문제를 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모두가 최고급 음식을 먹고 모두가 최고급 자동차를 타고 모두가 호화 주택에서 사는 사태를 염두에 둔 것은 결코 아니죠. 맑스는 오히려 기초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인간의 욕구는 자기 실현의 욕구 쪽으로 변화하고 발전한다고 보았죠. 그러니까 일도 하고 시도 쓰고 연극도 하는 공산주의하의 인간을 생각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걸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맑스가 잘못 생각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더 좋은 물건, 더 새로운 물건에 대한 끝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사태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우리의 욕구를 한 쪽 방향으로 부추기고 조작한 결과라는 점도 분명하죠. 더 좋은
자동차에 대한 욕구, 더 좋은 핸드폰에 대한 욕구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운동과 무관하게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맑스가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의 양상과 욕구의 양상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맑스는 자본주의가 이렇게 길게 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적어도 서유럽의 몇몇 나라들에서는 맑스 당시에 이미 자본주의의 붕괴와 공산주의 사회로의 발전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고 보았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이미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더 이상의 생산력 발전을 이루기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것이죠. 사실, 오늘날의 견지에서 역사유물론을 생각할 때 더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는 것은 공산주의의 유토피아적 성격 문제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생명력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맑스의 예측은 틀렸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 이후의 실제 역사 과정은 맑스의 역사유물론과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 이제 이 같은 문제와 관련해서 역사유물론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논의해 보기로 합시다.
아닌 게 아니라, 19세기말 이후의 현실은 맑스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죠.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은 듯이 보였던 적은 많았고, 또 그에 따라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려는 시도가 계속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아다시피 자본주의는 주기적인 공황을 겪으면서, 또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한편에서는 탄압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체제 내로 끌어들이면서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나갔죠. 맑스 이후의 맑스주의자들은 역사유물론의 틀을 가지고 이런 사태를 해명해야 했습니다.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이유, 이제 낡아버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여전히 유지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했죠.
여기에서 나온 가장 대표적인 답안이 제국주의론입니니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는 제국주의 정책을 통해 식민지에서 초과 이윤을 달성하고 그걸로 해서 국내의 모순을 완화하고 피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자본주의의 생명이 연장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선진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는 이미 한계에 부딪혔지만, 다시 말해 더 이상 생산력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지도 않고 그래서 자체로는 더욱 격렬해지는 계급 투쟁을 막을 길도 없지만, 식민지나 후진국을 착취해서 가져오는 잉여물들을 통해 계급 대립을 완화하고 생산력의 정체로 자꾸 줄어드는 이윤을 보충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러한 제국주의적 착취가 없어지면 자본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결론이 나오겠죠? 그리고 제국주의적 착취를 당하는 나라들은 선진 자본주의의 모순까지 떠맡고 있으니까 얼마나 살기 힘들겠습니까. 따라서 이런 나라들에서 우선 모순이 폭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국주의적 환경에서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이 아니라 그들의 착취를 받는 나라들에서 먼저 혁명이 시작될 수 있다, 하는 결론이 나올 겁니다. 사실 이런 것이 당시 레닌을 비롯해서 많은 맑스주의 혁명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습니다. 최초의 성공한 공산주의 혁명이 선진 자본주의가 아닌 러시아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설명되었죠.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그람시의 표현대로 '자본론에 거스르는' 혁명입니다만, 그런 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적 단계에 들어섰다는 데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레닌은 이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발전 단계라고 불렀죠. 최고 발전 단계라는 얘기는 곧 마지막 단계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발전될 여지가 없고 곧 몰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거죠. 그래서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많은 맑스주의자들은 유럽과 미국 등지의 선진 자본주의가 곧 공산주의 혁명을 경험하게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에야 진정으로 역사유물론의 내용에 걸맞는 자본주의의 극복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던 거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생명도 꽤 오래 갔습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나왔구요, 다른 한편에서는 제국주의가 착취한 잉여로 회유된 노동자들의 의식이나 부르주아화한 문화에 대한 분석이 나왔죠. 먼저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해 간단히 살펴볼까요. 따지고 보면 일국 사회주의라는 말 자체가 맑스주의 전통 내에서는 모순입니다. 사회주의라는 건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고, 따라서 무계급 사회이니까, 이 사회주의 사회에 '국가'란 필요 없거든요. 왜냐, 맑스에 따르면 국가란 기본적으로 계급 지배의 도구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국가에는 항상 무장한 공권력이 뒤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국가 규정이 얼마나 타당한가는 일단 젖혀놓읍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국 사회주의라는 규정이 국가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 충돌한다는 점이죠. 맑스주의의 견지에서 볼 때 원칙적으로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계급 사회까지,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해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해당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기까지입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기의 사회는 프롤레타리아트, 즉 노동자 계급이 지배계급이고 부르주아지, 즉 자본가 계급이 피지배계급이기 때문에, 여전히 계급 사회고 그러한 한에서 국가가 필요합니다. 물론 이 경우의 계급지배는 다수가 소수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해 왔던 이제까지의 계급 지배와 다르고, 또 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자체가 계급의 소멸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그래서 스스로를 지양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끝까지 유지하려고 했던 과거의 계급 지배와 다르다고 하지요. 그러나 어떻든 계급이 존재하는 한, 국가가--비록 점차 소멸해가는 방식으로이기는 하지만-- 존재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보면 잘 나와 있어요.
그런데 스탈린은 1937년 무렵 소련에 사회주의 헌법을 발표하면서 소련 사회는 이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기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했다고 이야기합니다. 1917년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으니까 약 20년간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기를 거쳐서 사회주의로 이행했다는 말이 되겠지요. 하지만 알다시피 그 이후에도 소련에는 국가가, 그것도 매우 강력한 국가가 존재했습니다. 스탈린은 그 이유를 주변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요. 원래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전세계의 역사 발전과 전세계의 혁명을 염두에 두고 내세운 단계입니다. 맑스주의자들은 대개 국제주의자들이였지요. 공산주의 혁명은 한 국가내에서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일어날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그러한 정신을 잘 표현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막상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소련에서 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소련은 말하자면 고립되어 있었고, 끊임없는 반혁명의 위협 밑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스탈린은 이렇게 소련이 주위의 자본주의 나라들과 대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부르주아 세력이 내부에도 침투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소련 사회가 적대적인 계급 사회를 넘어섰을 경우에도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소련은 이제 세계 혁명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한 국가 내에서라도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원래의 역사유물론에 일정한 수정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한편, 서구 유럽의 맑스주의자들은 도대체 왜 사회주의 혁명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일어나지 않는지, 또 어떻게 해야 그런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밝혀야 했습니다. 루카치(Gyorgy Luk s)의 계급의식에 대한 관심이나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헤게모니론 따위는 다 이런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특징적인 점은 문제의 초점이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나 하부구조의 문제에서 상부구조나 이데올로
기의 문제로 옮겨간다는 점이지요.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사회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상부구조나 이데올로기 영역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 원인을 구명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자기 계급의 위치에 걸맞는 전투적 이데올로기를 갖추지 못한 까닭에 혁명이 늦어지고 있다고 보았고,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노동자 계급의 의식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물화(事物化)한 데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의식의 각성을 이룰 수 있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의 싸움과 노력이 중요해지겠지요. 그래서 루카치는 부르주아적 '허위의식'에 물든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제대로 돌려놓는 것이 혁명의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람시의 경우도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상부구조와 이데올로기의 힘에 주목합니다. 그람시는 지배계급의 사회 지배가 단순히 강제력이나 착취 따위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동의를 일정 정도 이상 얻어냄으로써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동의를 확보함으로써 지배계급은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사회의 혁명적 변화는 생산관계의 차원이나 적나라한 계급투쟁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이런 헤게모니 지형에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이룩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대항 헤게모니'가 중요해지는 것이죠. 여기에 따라 일상적이고 문화적인 투쟁과 그러한 싸움을 통한 세력 확대 등의 전략이 크게 부각됩니다. 이런 식으로 서구 맑스주의자들은 상부구조와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역사유물론을 변화, 수정해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유물론에서 더 본격적인 문제 제기는 생산력주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제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첫머리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역사유물론 자체가 어떤 법칙이나 확정된 이론이라기보다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인 다음에야, 현실의 상황에 비추어 그 내용을 구체화하고 수정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되겠죠. 하지만 수정이 그 관점에 아주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요구된다면 역사유물론 자체의 타당성에 심각한 손상이 올 수도 있을 겁니다. 생산력주의라는 것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생산력의 발전에서 찾는 입장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사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맑스의 기본 관점은 이런 견지에 서 있습니다. 물론 생산력만으로 모든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사회의 다른 구성부분들도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산력도 존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산력만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다른 부문들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은 맑스의 견지에서도 옳지 못합니다. 계급투쟁이나 이데올로기 투쟁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맑스가 생산력-생산관계의 모순이 이런 투쟁들의 근본 조건이라고 생각한 것은 분명합니다. 또 생산력의 발전 수준이 여러 사회구성체의 발전 단계를 규정짓는다고 본 것도 분명하구요. 따라서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발전된 생산양식 내지 사회구성체의 생산력 수준은 그 이전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의 생산력 수준보다 높아야 합니다. 즉 공산주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의 다음 단계라면, 공산주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보다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이 봉건주의 사회의 생산력보다 높아야 하듯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실제로 그런가 하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되겠죠. 대표적으로 소련을 예로 들어 봅시다. 소련이 비록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공산주의 생산양식을 가진 나라라면, 과연 소련이 현실의 자본주의 사회보다 높은 생산력 수준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겁니다.
물론 소련은 한때 대단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 당시에는 후진국이었던 나라가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과 겨룰 수 있을 만한 강대국의 수준에 올라섰으니 말이지요. 그래서 1950년대 후반에만 해도 후르시초프는 소련이 곧 생산력 면에서 미국을
따라잡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고 큰 소리를 칠 수 있었지요. 자본주의 세력과 평화 공존을 해가면서도 생산력 경쟁에서 이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전 세계가 사회주의 체제로 따라오지 않겠느냐 하는 자신만만한 주장이 나왔던 거죠. 아닌 게 아니라 1960년대초 유인 우주선을 최초로 쏘아올린 나라가 소련이었을 정도로 소련의 기술 수준은 대단한 것이었죠. 하지만 이후의 사태는 후르시초프의 말처럼 전개되지 못했습니다. 6, 70년대부터 소련은 상대적으로 정체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전반적으로 볼 때 사회주의권이 자본주의권보다 높은 생산력 수준에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현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나타나겠죠. 소련이 정말 사회주의 사회라면 자본주의보다 높은 생산력을 갖춰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지 못하다면 소련을 과연 사회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사회주의 사회라고 한다면 사회주의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따위가 문제가 될 겁니다. 게다가 이런 문제는 과거 동구권의 여러 국가들, 그리고 중국과 베트남, 북한, 쿠바 등 제3세계권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생각해 볼 때 더 복잡하고 심각해지죠.
이 같은 점에서 보면 사회주의의 중심 특징이 생산력 수준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나오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생산관계의 변혁을 이룬 점이 사회주의의 더 본질적 특징이라고 보아야 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만들어내는 힘도 생산력의 발전보다는 계급 투쟁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주장이 힘을 얻게 되는 것이죠. 또 이렇게 가다 보면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 자체도 달라집니다. 주변에 자본주의 나라들이 존재하고 있고 사회주의가 압도적 우세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유지 발전시키려면 끝임없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하는 생각이 등장합니다. 이건 물론 스탈린 때에도 있었던 생각입니다만, 5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중소논쟁을 거치면서 마오쩌뚱(毛澤東)의 중국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죠. 당시 소련이 여전히 생산력을 중시하는 생각을 내세웠다면, 중국 측은 지속적인 계급투쟁을 앞세웠던 셈이죠. 이런 발상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이고, 소련에 실망하고 소련과는 다른 길을 찾던 서구의 지식인, 학생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생산력주의에 대한 비판, 계급투쟁 역사동력론 등은 이렇게 해서 상당한 세력을 얻습니다.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은 생산력의 성장이라기보다는 계급투쟁이고 이 계급투쟁은 혁명이 성공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와의 투쟁이 이어지는 한 계속된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계급투쟁은 생산력의 발전과 같은 경제적 차원에 종속되거나 경제적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 계급투쟁 자체가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 하는 식의 주장도 따라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또는 노동자 농민의 연합에 의한 '인민의 독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같은 맥락에서 도출되죠. 이렇게 되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기'가 '사회주의'로까지 연장되어 버립니다.
사회주의는 계급 투쟁이 아직 중요하게 작용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기다'라는 이런 생각은 분명 맑스의 생각과, 그리고 레닌의 생각과도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보자면 역사유물론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런 규정은 현실의 사회주의 사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80년대 후반 무렵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생각이 한때 주목을 받았지요. 당시에 소개되었던 엔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하여』(우리나라에는 『민주주의와 독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지요.)라는 책이 이런 생각을 잘 담고 있습니다. 이 발리바르라는 사람은 알튀세르의 제자인데, 알튀세르(Louis Althusser) 학파가 60년대 후반부터 서구에서 이런 사고방식을 내세웠던
대표적인 지식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사람들의 생각에 의하면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적 세력과 프롤레타리아적 세력의 계급투쟁이 지속되고 있는 장이니까, 하기에 따라 사회주의의 발전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자본주의로 후퇴할 수도 있죠. 이런 생각은 1980년대 후반기에 개혁된 사회주의로 나아가느냐 다시 자본주의로 복귀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으로 보였던 소련과 동구권 사회에 잘 적용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는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사고방식이 급속하게 힘을 잃었죠. 하지만 비슷한 발상은 현재 중국의 헌법에도 남아 있습니다. 중국은 93년도 신헌법에서 자신들의 국가가 '노동 연맹에 기초한 인민 민주주의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라고 규정하고 있거든요. 노동자 농민의 동맹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인민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씁니다만, 인민 민주주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변형판이라고 할 수 있죠. (아, 맑스주의에서는 프롤레타아트 독재도 일종의 민주주의, 그것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진보된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의 원리가 다수결인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경우 사실상 부르주아 독재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보다 이 원칙을 적용하기가 훨씬 쉽거든요. 이 점에 대해선 시간 관계상 자세한 설명을 드리기 어렵겠군요. 혹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아까 말씀드린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보세요.) 그러니까 현재 중국은 스스로를 무계급 사회가 아니라 계급 갈등과 계급 투쟁이 존재하는 사회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이렇게 보는 것이 무계급사회라는 고전적인 사회주의 규정보다,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상당 부분 도입하고 있는 오늘날의 중국 현실에 잘 들어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현재의 중국도 과거 소련이 그랬듯이 자본주의로 복귀하느냐, 아니면 자본주의적 요소를 이용하면서 새로운 사회주의의 유형을 건설해 나가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1859년 서문」을 중심으로 공부한 맑스 역사유물론의 관점은 이제 무너진 것 아니냐구요? 글쎄요, 그렇다고 단언하긴 어렵죠.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하는 데 부적합한 면이 더러 드러났다고 해서 그 틀이나 시각 자체가 완전히 폐기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중국의 경우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여러분이 알다시피 중국도 문화혁명기를 거치고 나서는 생산력의 중요성을 다시 부각시키고 이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사회 발전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비록 맑스를 비롯해서 고전적 맑스주의 이론가들이 자본주의의 생명력을 실제보다 과소 평가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발전의 메커니즘을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력-생산관계의 모순에서 찾는 관점이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거꾸로, 맑스의 예상과는 달리 자본주의가 멸망하지 않은 것은 자본주의 내에 아직도 생산력을 발전시킬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즉 오늘날의 사태는 오히려 '생산력에 발전의 여지가 있는 한 그 사회구성체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맑스의 명제를 입증해 주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현재까지 자본주의가 위세를 떨치고 있다고 해서 이 자본주의가 영원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위르겐 쿠친스키라는 옛 동독의 역사학자가 한 말이 생각나는군요. 이 사람은 자신이 평생 맑스주의 역사학자로 일해 온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하면서, 봉건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데 200년 이상이 걸렸는데,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데에도 그 정도 또는 그 이상이 걸린다고 한들 무엇이 이상한 일이겠느냐고 반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껏 있었던 사회주의 운동과 현실에 존재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모두 이 장기적 과정 가운데 나타난 현상들이고 계기들인 것으로 취급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계기들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완결짓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현실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자본주의의 변형태로 규정하는 것도 가능
할 겁니다. 지난번에도 잠시 말씀드렸던 것처럼 '국가 자본주의로서의 현실 사회주의'라는 규정도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즉 현실에 존재한 사회주의 국가는 국가나 일부 관료들이 자본가 역할을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도입한 데에 불과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으로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런 문제의식 하에서, 오늘날 크게 번져가고 있는 정보화의 물결이 새로운 생산관계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나아가 생태계와 환경에 대한 관심이 새로운 생산관계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만일 우리가 '생산력-생산관계'의 틀을 유지하려면, '생산력'을 인류의 생존과 행복에 관련된 가치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으로 다시 규정해야 되겠지만요.)
자, 오늘은 매우 복잡하고 논란이 많은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다루어 보았습니다.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우리는 이렇게 한 시간에 정리를 해 보았지만, 사실 이런 문제들을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논란과 투쟁과 노력과 희생이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나타난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역사는 진보해나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이제 제 강의를 정리해 볼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통해서 판단해 볼 때, 저는 역사유물론의 본질적 특징이 다음과 같은 인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인류의 역사는 어떤 관념적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물질적 삶을 생산해내는 방식에 의해 진보해 왔다는 것. 둘째, 이 물질적 생산양식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내부의 모순에 의해 변화, 발전한다는 것. 맑스는 이러한 인식을 통해 과거를 연구하고 미래를 조망하고자 했습니다. '생산력-생산관계-상부구조'의 틀은 주로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모색하는 데에도 일관되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맑스를 비롯하여 고전적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생명력과 적응력을 과소 평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맑스의 인식틀을 오늘날의 현실에 그대로 맞추어 볼 수는 없겠습니다. 변형과 창조적 적용이 불가피하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역사유물론의 기본 인식은 아직도 우리에게 우리의 삶과 역사의 근본 조건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역사유물론의 생명력은 우리가 이러한 통찰에 바탕을 두고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과 대결하고자 하는 한,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철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역의 시간과 우주론-비교철학적 관점(장원석/성균관대) (0) | 2016.06.15 |
---|---|
지각의 현상학과 회화/김융희 (0) | 2016.06.07 |
마음과 자연(H.Putnam/하버드대) (0) | 2016.06.07 |
덕과 실천의 연계성/박병기 (0) | 2016.06.07 |
역사철학과 사회진화론 (박응석/서울대) (0) | 2016.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