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군 출동하다
베이징은 그야말로 폭풍 직전의 고요였다. 안후이파와 즈리파가 서로 대치한 채 일촉즉발인 가운데, 6월 19일 장쭤린은 대총통의 요청에 따라 정예 병력을 이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베이징으로 들어왔다. 동삼성 순열사로서 막강한 군사력과 기반을 갖춘 그가 과연 어느 쪽의 편을 드는가에 따라 천하의 패권 또한 정해질 참이었다. 5억 중국인들은 물론, 세계 각국이 숨을 죽이며 정세를 지켜 보았다.
장쭤린의 특별 열차가 베이징에 들어오자, 서북변방군 총사령관이자 안후이파의 2인자인 쉬수청을 비롯해 각부의 장관과 정치가, 고위 관료, 군 지휘관들이 모두 나와서 그를 열렬하게 환영하였다. 그러나 교활한 장쭤린은 자신의 주가를 더욱 올릴 생각이었다. 그는 쉬수청이 마련한 호화로운 숙소를 거부하고 일부러 준량청(軍糧城)에 있는 펑톈군 사령부에 머물렀다. 이미 즈리파에 가담키로 약속했던 그였지만 이를 숨긴 채 돤치루이와 차오쿤을 차례로 만난 다음 중립적인 입장에서 양측의 주장을 들으면서 중재하는 척 했다.
그리고 6월 23일 밤, 돤치루이를 다시 만나서 쉬수청을 파면할 것과 재정, 교통, 사법, 농상, 외교, 교육 등 5명의 안후이파 장관들의 교체, 변방군의 폐지 및 육군부 산하로 돌릴 것을 중재안으로 내놓았다. 이것은 안후이파를 해체하라는 최후 통첩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미 즈리파와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었던 돤치루이가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비록 쉬수청이 이런저런 잘못이 있다는 점은 알지만, 외몽골의 독립을 저지하는 등 공이 매우 크다. 그를 쫓아낼 수는 없다."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6월 29일 대총통 쉬스창이 돤치루이와 장쭤린을 총통부로 불렀다. 그는 내각을 개조하되, 대신 쉬수청을 그대로 유임시키고 변방군 역시 돤치루이의 휘하에 두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즈리파가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장쭤린 역시 즈리파의 편을 들어 쉬스창에게 유혈충돌을 피하는 방안은 오직 쉬수청을 파면하는 것 밖에 없다고 건의하였다. 결국 7월 4일 쉬스창은 고심 끝에 쉬수청에게 "위원 장군(威遠 將軍)"이라는 이름뿐인 칭호를 내리되 실권을 빼앗고 변방군의 지휘권을 육군부로 넘기기로 결정하였다. 즈리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노기 충천한 돤치루이와 쉬수청은 대총통이 즈리파에 붙어서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비밀리에 휘하의 안후이파 군대에 동원명령을 내렸다. 쿠테타를 일으킬 셈이었던 것이다. 7월 6일 마지막 조정 차 자신을 방문한 장쭤린에게 돤치루이는 강경한 태도로 "우페이푸는 국가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를 파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라며 엄포를 놓았다. 물론 이를 즈리파가 받아들일 리는 없다. 결국 일전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장쭤린이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자 돤치루이는 당장 만주로 돌아가라고 호통을 쳤다.
이날 저녁 쉬수청이 장쭤린을 찾아가 사과하면서 좀 더 논의할 것이 있으니 돤치루이의 관저를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그의 속셈은 그 자리에서 장쭤린을 체포한 후 살해할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돤치루이의 관저를 방문한 장쭤린은 돤치루이의 환대를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낮의 일은 완전히 잊은 듯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지만 본능적으로 낌새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장쭤린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재빨리 빠져나와 자신의 사령부로 도주하였다. 이로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다음날 장쭤린은 톈진에서 차오쿤과 우페이푸를 만나 긴급회의를 가진 다음, 그대로 자신의 본거지인 펑톈으로 돌아갔다.
7월 8일 돤치루이는 드디어 칼을 뽑았다. 그는 베이징 정부의 안후이파 정치가들과 관료, 군 지휘관, 베이징 위수사령관, 경찰총감 등 주요 인사들을 모두 소집하여 회의를 열고 즈리파 토벌을 정식으로 결의하였다. "제3사단장 우페이푸는 몰래 적과 내통했고 60만원의 공금을 횡령했으며 맡은 임무를 방기하였다. 국가의 기강과 위신을 바로잡기 위하여 우페이푸를 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또한 즈리 독군 차오쿤 역시 같은 책임을 물어 면직한다." 또한 쿠테타를 일으켜 대총통 관저를 포위한 후 쉬스창을 협박하여 차오쿤, 우페이푸 등 즈리파들에 대한 파면을 요구하였다. 아무런 힘이 없는 쉬스창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즈리파 토벌의 기치를 올린 돤치루이는 베이징 주변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동원 부대는 변방군 제1사단과 제3사단, 제2혼성 여단, 제5혼성 여단, 북양군 제9사단, 제13사단, 제15사단 등 5천 5천여명에 달했다. 돤치루이는 "정국군(定國軍)"이라고 칭하고 쉬수청을 참모장 겸 전선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또한 산둥성 지난에 주둔하고 있는 변방군 제2사단도 북상하여 즈리군의 후방을 협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즈리파 역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차오쿤은 톈진에 사령부를 두고 우페이푸를 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전권을 맡겼다. 그는 자신들의 군대를 역적을 토벌하는 군대, "토역군(討逆軍)"이라고 칭하였다. 돤치루이를 "역적"이라고 한 것이다. "베이징으로 가서 돤치루이를 몰아내고 쉬수청을 주살하자!" 우페이푸 또한 돤치루이를 일본과 결탁한 한간(漢奸=매국노)로 부르면서 "이번 싸움은 중국 민족을 위해 도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전쟁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동원 부대는 제3사단과 4개 혼성여단, 4개 보충여단 등 5만 5천여명 정도였다. 숫적으로 본다면 양측의 전력은 대등했다. 하지만 돤치루이 휘하의 변방군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최신 무기로 무장하여 그야말로 막강하였다. 장쉰의 오합지졸 복벽 군대와는 다르다. 군비와 무기가 빈약한 즈리군이 과연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우페이푸의 자신감은 넘쳤다. 앞에서는 큰소리쳤던 차오쿤이 군사회의에서 "만약 이 싸움에서 진다면 우리 즈리파는 끝장이다."라고 우는 소리를 하자 우페이푸는 웃었다. "돤치루이가 믿는 것은 오직 변방군 뿐입니다. 하지만 이 군대는 무기만 좋을 뿐 실전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저 혼자서도 돤치루이의 군대 전부를 상대해 보겠습니다." 그 말에 차오쿤도 힘을 얻어 "우페이푸가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싸운다!"라고 외쳤다.
7월 13일, 장쭤린도 펑톈군에 출동 명령을 하달하였다. 출동 부대는 주력인 제27사단, 제28사단 등 약 7만명에 달했다. 이른바 "안-즈전쟁"이 그 막을 연 것이다.
* 양측의 병력 배치와 전략
돤치루이는 베이징 남쪽 교외에 있는 돤허(團河)에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정국군(안후이군)의 주력은 베이징에서 바오딩으로 향하는 징한철도(베이징↔한커우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철도)의 선로를 따라 배치된 서로군(西路軍)이었다. 서로군의 지휘는 돤치루이의 최측근인 돤즈구이(段芝貴)였다.
돤즈구이는 돤치루이와 마찬가지로 안후이성 허페이 출신이었다. 그는 톈진무비학당을 졸업한 후 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에 입대하였다. 중국인들은 동향 출신이라면 일단 덮어놓고 중용하는 경향이 있다. 배신과 음모가 판을 치는 역사이다보니 속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돤치루이 역시 같은 고향인 그를 매우 신뢰하면서 육군 총장과 베이징위수사령관 등 요직을 맡겼다.
그러나 돤즈구이는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그야말로 형편없는데다 스스로 "풍류장군"이라 칭할 만큼 평소 사치향락과 마작에만 빠져 사는 위인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안후이파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이번 전쟁에서 그는 중책을 맡았음에도 자신의 전용열차 안에 들어박혀 값비싼 외국술을 마시며 마작 친구들과 함께 마작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북양의 호랑이"라며 천하에 명성을 떨치던 돤치루이도 사람 보는 수준은 이 정도였던 것이다. 이런 능력보다 사사로운 정을 더 중시하는 봉건적인 습성은 뒷날 장제스 역시 버리지 못하여 "삐딱이 조(Vinegar Joe)"라 불리던 그의 까다로운 미국인 참모장 스틸웰 장군은 몇번이나 불만을 터뜨렸다.
서로군은 변방군 제1사단과 제3사단, 제15사단, 제5혼성여단으로 편성되었다. 변방군 제1사단의 사단장은 돤치루이의 "사대금강(四大金刚)" 중 한 사람인 취둥펑(曲同豊)이었다. 그는 일본 육사를 졸업하였고 바오딩 군관학교 교장을 지냈을 만큼 엘리트 출신의 유능한 군인이었다. 변방군 제3사단장 진원윈(陳文運) 역시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돤즈구이는 이들만 믿고 마음을 푹 놓고 있었다.
문제는 리우쑨(劉詢)이 지휘하는 제15사단이었다. 이 부대는 원래 청조시절의 황제 친위대인 금군이었다. 신해혁명 이후 펑궈장이 신식부대로 재편성했지만 대부분 팔기군 출신인 이들은 무위도식하는 집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청 황실에 대한 우대조약에 따라 이들을 해체할 수 없어서 돤치루이도 그대로 둔 채 베이징의 치안 유지와 자금성의 경비를 맡겨 놓았지만 싸울 의지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들을 먹이고 입혀준 펑궈장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돤치루이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었다.
동로군(東路軍)의 지휘는 쉬수청이 맡았다. 변방군 제3사단 일부, 제9사단, 제2혼성여단 등으로 편성되었다. 돤치루이의 작전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주력인 서로군이 즈리파의 주요 거점인 바오딩을 공략하고, 동로군은 즈리군의 사령부가 있는 톈진을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산둥성 지난에 있는 변방군 제2사단과 후베이성 이창에 주둔한 우광신의 부대 역시 북상하여 즈리군을 남북으로 협격할 참이었다.
한편, 즈리군은 제3사단 등 주력부대를 바오딩 방면에 배치하여 돤즈구이의 서로군과 대치하였다. 또한 차오쿤의 동생 차오루이(曺鋭)가 지휘하는 2개 혼성여단이 톈진 방면에서 쉬수청의 동로군과 대치하였다. 양군은 베이징과 톈진, 바오딩을 각각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형태로 융딩허(永定河)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쌍방의 전력은 비등했다. 무기와 장비에서는 일본의 군사 원조를 받은 안후이군이 우세했지만 우페이푸의 말대로 실전 경험이 없는데다 훈련도 부족했고 사기 또한 낮았다. 돤치루이의 군사고문인 사카니시 도시하지로(板西利八郞) 소장조차 "즈리군과 정면에서 부딪친다면 과연 승산이 있을 지 의문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반면, 즈리군은 무기와 장비는 열세했지만 대신 우페이푸를 비롯하여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고 병사들 역시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여기다 돤치루이로서는 미처 예상치 못한 불리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최대의 후원자인 일본이 영국과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중립을 선언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의 후원이 없다면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군비와 탄약의 보급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장쭤린의 태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장쭤린 역시 돤치루이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일본이 돤치루이를 지지하는 한, 장쭤린으로서도 함부로 돤치루이를 적대할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이 중립을 지키는 이상 장쭤린은 눈치 볼 것 없이 "징펑철도(베이징↔펑톈을 연결하는 철도)을 보호한다"라는 명목으로 병력을 산하이관으로 출동시킨 후 결정적인 순간에 돤치루이의 뒷통수를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후방의 장쭤린에 대해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고 일본이 장쭤린을 견제토록 요청하지도 않았다. 장쭤린은 이미 즈리파와 결탁하고 있는데다, 쉬수청의 계략으로 죽을 뻔했던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이를 갈고 있을지는 돤치루이라고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무대책이었던 것은 돤치루이가 상황을 안이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의 모든 관심은 오직 우페이푸에게만 쏠려 있었다.
* 돤치루이 공격에 나서다
7월 14일 오후 3시, 돤치루이는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밤 8시, 안후이군의 동로군과 서로군이 일제히 룽딩허를 도하하여 양쪽에서 가오안(高安)과 추저우(逐州), 양춘(楊村)의 즈리군 최일선 진지를 공격하였다.
우페이푸의 계획은 쉬수청이 지휘하는 동로군에 대해서는 수세를 고수하면서 교착상태로 만들고, 그 사이 단즈구이의 서로군을 격파하여 한축을 무너뜨리고 베이징으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작전의 승패는 전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가오안을 지켜내는가에 달려 있었다. 만약 이곳이 돌파된다면 바오딩과 톈진으로 나누어진 즈리군은 두쪽으로 분단되어 각개격파될 것이었다. 따라서 즈리군 최정예부대인 자신의 제3사단과 제3혼성여단에 가오안의 수비를 맡기고 "절대 사수하라!"라고 지시하였다.
우페이푸 휘하의 3명의 여단장들인 펑소우선(彭壽莘), 시아오야요난(蕭耀南), 둥정궈(董政國) 등은 하나같이 신해혁명 이래 그동안 우페이푸와 함께 후난성과 쓰촨성 등지를 전전했던 백전연마의 지휘관들이었으며 특히 제5혼성여단장 펑소우선은 방어전의 달인이었다. 그는 안후이군 최강 부대인 변방군 제1사단과 제3사단의 맹렬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단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버텼다.
양군의 주력부대가 부딪친 추저우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즈리군의 저항이 완강하자 변방군 제5혼성여단이 투입되었다. 제5혼성여단장 장푸라이(張褔來)는 일본으로부터 구입한 105mm, 150mm 유탄포를 끌어와 즈리군의 진지를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중포의 사격이 끝난 뒤 안후이군이 공격하자 즈리군의 제1선은 무너졌다. 그 여세를 몰아 안후이군 병사들이 즈리군 진지를 향해 돌격하였다. 하지만 함성은 곧 비명으로 바뀌었다. 토치카 뒤에서 즈리군의 중기관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 이래 '준비포격 후 일제 돌격'이라는 구태의연한 일본식 전술을 교육받은 안후이군 병사들은 수수다발처럼 쓰러져 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하지 않은 일본 군사고문단의 한계였다. 무수한 시체의 산을 쌓은 안후이군은 붕괴되어 패주하였다.
15일 새벽 6시, 변방군 제1사단 주력과 제15사단이 우세한 포병화력의 지원 아래 추저우를 재차 공격하여 결국 점령하였다. 즈리군은 가오베이뎬(高碑店)으로 퇴각하였다. 즈리군이 후퇴하자 취둥펑은 기병대를 투입해 추격하였다. 하지만 이는 함정이었고 이들은 매복하고 있던 즈리군의 십자화망에 걸려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채 무너졌다.
한편, 쉬수청의 동로군이 맡은 베이징-톈진 방면의 전투도 점차 격화되었다. 쉬수청은 휘하 병력 1만 5천명을 셋으로 나누어 톈진 18km 북쪽에 있는 양춘을 공격했다. 차오루이가 지휘하는 즈리군은 약 1만2천명이었다. 숫적으로 안후이군이 우세했지만 야포의 지원을 받는 즈리군의 방어도 만만치 않아 쉬수청은 도저히 돌파할 수 없었다. 쉬수청은 결사대 300명을 조직하여 양춘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결사대는 필사적으로 즈리군의 방어선을 뚫고 양춘에 돌입하는데 성공했지만 즈리군의 포위망에 걸려 전멸하고 말았다. 쉬수청의 무리한 작전의 결과였다. 쌍방은 피해만 늘어날 뿐 승패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쉬수청에게는 천우신조의 기회가 내려왔다. 톈진의 지나주둔군 사령부가 의화단의 난 이후 청일간 체결된 조약을 내세워서 차오루이에게 "징진철도(京津鐵道, 베이징↔톈진을 연결하는 철도) 주변 2마일 내에는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다"라며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요구한 것이다. 즈리군 입장에서는 부당한 요구였다. 만약 조약대로라면 안후이군 역시 철수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은 즈리군에게만 철수를 요구한 것이다. 명백한 내정간섭이었다. 이는 당초 중립을 선언했던 일본 본국 정부의 방침이 바뀐 것이 아니라 현지의 지나주둔군이 쉬수청과 결탁하여 월권을 행사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차오루이는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만약 거부한다면 일본군이 이를 빌미로 무력 개입할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차오루이는 징진철도 주변의 병력을 철수시켰고 이로 인해 양춘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게 되면서 즈리군 방어선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쉬수청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양춘은 16일 함락되었다. 즈리군의 한쪽이 무너진 셈이었다. 차이쿤의 사령부가 있는 톈진도 위기에 빠졌다.
* 전세 역전되다
같은 시간 바오딩 방면에서도 취둥펑의 변방군 제1사단이 즈리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가오베이뎬을 점령하였다. 즈리군의 강력한 방어에 부딪치면서 전진은 느렸지만 어쨌든 주도권은 안후이군에 있었다. 이대로라면 돤치루이의 승리는 시간문제였다. 이 와중에 즈리군의 소규모 별동대가 안후이군의 전선을 몰래 돌파한 후 후방으로 우회하여 돤즈구이의 사령부가 있는 열차를 습격했다. 열차 안에서 태평하게 마작이나 두고 있던 돤즈구이는 혼비백산했다. 일시적으로 서로군의 지휘계통이 마비되자 우페이푸는 즉시 공격으로 전환했다. 예상치 못한 역습에 변방군 제3사단이 일시에 무너졌고 제3사단장 진원인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16일 밤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홍수가 안후이군의 진영을 덮쳤다. 이로 인해 많은 물자와 장비, 탄약을 상실하였고 중포 또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우페이푸는 드디어 전세를 뒤집을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악천우에서의 전투라면 실전 경험이 없는 안후이군보다 온갖 험난한 전장을 누볐던 즈리군이 유리하였다. 또한 준량청의 펑톈군 사령부에 남아 있던 펑톈군 2개 여단이 즈리군에 가세하였다. 우페이푸는 이들을 가오안에 배치하는 한편, 시아오야요난의 제3혼성여단을 비바람과 야음을 이용해 은밀하게 안후이군 서로군의 후방인 쑹린뎬(松林店)으로 진출시켰다. 이로 인하여 가오베이뎬에 있던 변방군 제1사단의 후방이 차단되었다. 또한 우페이푸는 2개 여단을 추가로 쑹린뎬으로 보내어 가오베이뎬으로 이동하고 있던 안후이군 제15사단의 측면을 기습했다.
후방에 적군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취둥펑은 당황했다. 그는 당장 쑹린뎬을 향해 포격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한밤중에, 그것도 비바람 속에서 관측장교도 없이 아무렇게나 쏘아댄 포탄은 엉뚱하게도 우군인 제15사단에 떨어졌다. 난데없는 포격을 받은 제15사단은 그들 역시 포탄이 날아온 쪽으로 포격을 가했고 변방군 제1사단에 떨어졌다. 게다가 제15사단장 류쑨은 홍수로 떠내려갔다가 겨우 구조되어 후송되는 등 그야말로 혼란의 극치였다. 지휘계통이 마비되자 제15사단은 반란을 일으킨 후 그대로 즈리군에게 투항하였다. 이 때문에 변방군 제1사단은 최일선에서 고립되었다. 즈리군의 위기는 우페이푸의 기지와 돤즈구이의 졸렬한 지휘 덕분에 지나갔다.
돤치루이에게는 또 한번의 뼈아픈 보고가 들어왔다. 즈리군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상중이던 우광신이 우한에서 양호 순무사 겸 호베이성 독군인 왕좐위안(王占元)을 회견했다가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왕좐위안은 이전부터 즈리파로 분류된 자였다. 원래라면 대화가 아니라 당연히 일전을 벌여야 할 상대이지만 이 때만 해도 적과 아군의 구분이 불분명했기에 우광신은 그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가급적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후베이성을 통과할 생각으로 태평스레 왕좐위안의 사령부를 찾아갔다. 하지만 왕좐위안은 그가 멋대로 군대를 끌고 왔다며 꾸짖고는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돤치루이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우광신의 군대는 왕좐위안에게 무장해제되어 일부는 그의 휘하에 들어갔고 일부는 흩어져 토비가 되었다. 또한 우광신은 후베이성 군사법정에서 징역 15년형을 받았으나 다음해 10월에 석방되어 장쭤린의 휘하에 들어간다.
17일 아침. 변방군 제1사단은 즈리군의 포위망을 겨우 돌파하여 추저우로 후퇴하였다. 손실은 컸지만 취둥펑은 아직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변방군 제1사단이 재차 공세에 나서자 우페이푸는 일단 병력을 후퇴시켰다. 즈리군이 퇴각하자 취둥펑은 다시 승기를 잡았다며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뢰였다. 즈리군이 철수하면서 지뢰를 매설한 것이다. 안후이군으로서는 여지껏 당해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우페이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방군 제1사단의 측면을 기습하였다. 변방군 제1사단 제1여단장이 전사하고 제2여단장은 도망치면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취둥펑은 포로가 되었다. 이로서 서로군은 완전히 괴멸이나 다름없었다. 승패는 결정났다.
* 돤치루이 몰락하다
돤치루이는 서로군이 위기에 빠졌다는 보고를 받자 그제서야 무능한 돤즈구이를 파면하고 취둥펑을 서로군 사령관에 임명한다는 전보를 보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 시간 취둥펑은 포로가 된데다 서로군은 이미 무너졌다. 게다가 자신의 열차에서 해임 통보를 받은 돤즈구이는 그대로 열차를 돌려 베이징으로 달아난 후 뻔뻔하게도 돤치루이 앞에 나타나 "이미 싸움은 끝났습니다. 이제는 대총통에게 휴전을 건의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쉬수청의 동로군에서도 급보가 들어왔다. 산하이관에 있던 장쭤린의 펑톈군이 총부리를 돌려 베이징으로 진군 중이라는 것이었다. 여기다 서로군의 참패가 동로군에게도 알려지면서 안후이군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탈주병들이 꼬리를 물었다. 안후이군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우페이푸는 총공격에 나섰다. 전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쉬수청은 부하들을 버리고 베이징으로 달아나 그대로 일본 대사관에 몸을 숨겼다. 사령관을 잃은 동로군은 즈리군에게 투항하였다. 소수만이 베이징 교외의 난웨이(南宛)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돤치루이도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7월 18일 돤치루이는 대총통 쉬스창에게 정전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국무총리에서 사직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쿠테타를 일으켜 베이징을 장악한지 꼭 12일 만이었다. 예전에 복벽을 일으켰다가 돤치루이에게 진압당했던 장쉰 역시 12일 천하였으니 실로 아이러니하다.
7월 23일 즈리군과 펑톈군이 나란이 베이징에 입성하였다. 이와 함께 돤치루이, 쉬수청을 비롯한 안후이파 주요인물 10명에 대한 체포령이 내렸다. 안복국회 역시 해산되었다. 돤치루이는 변장하여 베이징을 빠져나온 후 톈진의 일본조계로 도망쳤다. 쉬수청 역시 일본 대사관에서 한동안 숨어지내며 재기를 노리렸으나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25년 12월 30일 상하이에서 즈리파 군벌 펑위샹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의 총에 맞아 살해당했다. 쉬수청에게 살해당한 루지안장(陸建章)이 펑위샹의 처삼촌이었기 때문에 복수한 것이다. 몰락한 군벌의 전형적인 최후였다.
돤치루이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던 우페이푸는 돤치루이를 엄중하게 처벌할 생각이었지만 뜻밖에도 장쭤린이 돤치루이를 옹호하고 나섰다. 장쭤린은 즈리파와 손을 잡아 돤치루이를 몰락시키고 베이징을 장악했지만 그의 야심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를 기회삼아 즈리파까지 끝장내어 대권을 차지하겠다는 심보였다. 이를 위해서는 돤치루이를 살려두고 즈리파와 펑톈파, 안후이파가 세발솥의 형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산동성 지난에서 북상 중이던 마량(馬良)의 변방군 제2사단은 즈리성 남부의 더저우(德州)를 점령했다. 하지만 그 직후 돤치루이가 이미 패배하여 하야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부득이 즈리군에게 항복하였다. 그 외에도 즈리군은 허난성, 산시성, 간쑤성, 안후이성, 산둥성 등 안후이파의 세력권으로 진군하여 항복을 받았고 안후이파 독군들을 모조리 쫓아내었다. 장쭤린 역시 이에 질세라 러허성과 내몽골을 장악했다. 안후이파로서 유일하게 지위를 보존한 사람은 저장독군 루융상(盧永祥)이었다.
14일부터 18일까지 약 나흘간 벌어진 안-즈전쟁에서 쌍방의 손실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워낙 짧게 끝난데다, 중앙의 혼란으로 인해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쌍방 합해 10만명 이상이 동원되었지만 적게는 겨우 수십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주장부터, 안후이군만 해도 최소 2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었다고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돤치루이의 무모한 야심이 불러온 안-즈전쟁은 청조 멸망 이래 베이징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첫번째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로서 돤치루이는 몰락했지만 실상 앞으로 시작될 더 큰 혼란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