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돤치루이 몰락하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4년 동안 베이징을 좌지우지하며 권력을 전횡했던 돤치루이의 천하는 하루 아침에 무너졌다. 단 한번의 패전으로 끝장날 만큼 돤치루이 정권은 모래위의 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돤치루이의 패배는 군사력에서 열세해서가 아니라 그의 리더쉽 부재와 쉬수청의 무리한 책략, 그리고 안후이파 지휘관들의 무능함 탓이었다. 또한 그는 신중한 준비 없이 성급하게 즈리파와의 결전을 강행하면서 다른 안후이파 독군들의 무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따라서 후난성에 있던 우페이푸가 "돤치루이 토벌"의 기치를 올리고 즈리성까지 북상하는 동안 돤치루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데다, 북경 코앞까지 적군이 와서야 부랴부랴 베이징 주변의 군대와 변방군의 일부만을 동원했을 뿐이었다.
또한 사전에 일본과의 협의를 소홀히 하면서 장쭤린에게도 뒷통수를 맞았다. 일본은 열강들과의 견제와 국내 여론 때문에 중국 내전에 직접 개입할 입장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장쭤린에게 중립을 지키라고 언질을 주었다면 제아무리 야심만만한 장쭤린이라도 쉽사리 움직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장쭤린의 개입은 쌍방의 팽팽하던 전세를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고 돤치루이에게 결정타가 되었다. 결국 돤치루이는 권력욕만 있을 뿐,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청말의 구식 관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돤치루이가 "북양의 호랑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형편없었다면 우페이푸의 지휘는 북양군 제일의 명장답게 실로 눈부셨다. 그는 즈리파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신속하게 북상하여 돤치루이의 허를 찔렀다. 또한 안후이파였던 허난 독군 자오티를 이해관계로 설득하여 중립을 지키게 했으며, 후베이 독군 왕좐위안을 시켜 돤치루이의 사위이자 2개 사단을 가진 창장 상류 총사령관 우광신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체포하여 돤치루이의 한축을 무너뜨렸다. 또한 돤치루이와의 결전에서도 우세한 적군에 밀려 한때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냉정한 지휘로 적을 격퇴하였고 역습하여 전세를 단숨에 뒤엎고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돤치루이 한 사람이 몰락했을 뿐, 전란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북양 군벌들의 대립으로 중앙이 혼란에 빠지면서 중국은 한층 혼돈으로 빠져들어갔다. 베이징은 장쭤린의 펑톈군과 차이쿤-오페이푸의 즈리군으로 넘쳐났다. 이들은 전리품 챙기기 경쟁에만 혈안이 되었다. 변방군을 비롯하여 투항한 안후이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자군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무기고와 군수품 창고, 관청, 은행을 마구잡이로 약탈하였다. 약탈에 광분한 모습은 정규 군대라기보다 비적 떼나 다름없었다. 장쭤린이 난위안(南宛, 베이징 동남쪽 교외의 마을)의 안후이군 병영을 약탈하고 복엽기 12대와 수십문의 중포, 소총, 기관총, 막대한 군수품을 가져갔다는 보고를 받은 차오쿤과 오페이푸는 격분했다. "장쭤린 그 놈은 정말로 마적 출신이군."
안-즈 전쟁이 끝난 지 보름 뒤인 1920년 8월 4일. 베이징 역의 플랫폼에는 수많은 황기가 펄럭였다. 원래 황기(黃旗)는 황제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기차가 멈추자 차오쿤과 장쭤린이 마치 황제라도 된 양 으스대면서 내렸다. 대총통부에서 차오쿤, 장쭤린, 쉬스청 세 사람의 회견이 열렸다. 즈리파와 펑톈파에 대한 본격적인 논공행상이었다.
1. 차오쿤을 즈리성, 산둥성, 허난성의 행정, 사법, 군정을 총괄하는 직노예3성순열사에 임명하고 우페이푸를 부순열사에 임명한다.
2. 즈리파인 장쑤 독군 리순은 장쑤성, 장시성, 후베이성을 총괄하는 창장 3성순열사에 임명한다.
3. 펑톈군 부사령관 장징후이(張景恵)를 차하르성 독군 겸 제16사단장에 임명한다
4. 장쭤린에게 진위상장군(鎭威上將軍)의 칭호를 내린다.
5. 국가의 대계와 관련된 모든 사안은 차오쿤, 장쭤린의 동의를 얻어 행한다.
6. 동3성과 직노예 3성의 인사, 행정, 군정, 예산 등에 대해 중앙정부는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7. 그 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차오쿤, 장쭤린은 관여하지 않는다.
8. 중앙정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차오쿤과 장쭤린이 권고한다.
안-즈 전쟁이 끝난 직후만 해도 대총통 쉬스청은 돤치루이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국가 원수로서의 대권을 휘두를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순진한 착각이었다. 실상 돤치루이라는 호랑이 한마리가 장쭤린과 차오쿤 두마리의 늑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쉬스청은 이전의 리위안홍과 다를 바 없는 허수아비 대총통였고 차오쿤과 장쭤린 두 사람이 대등한 위치에서 "상황(上皇)"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총 앞에서는 헌법도 무용지물인 것이 민국 초기의 현실이었다.
8월 9일에는 육군총장 진윈펑(靳雲鵬)이 국무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는 톈진무비학당 출신으로 위안스카이 시절 북양군 제5사단장과 육군부 차장을 역임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에는 돤치루이의 총애를 받으며 이른바 "4대 금강"의 하나로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쉬수청과 대립하면서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상전이었던 돤치루이가 안-즈 전쟁에서 패하자 당장 즈리파로 전환하여 차오쿤의 수하가 되었다. 동생 진윈어(靳雲鶚) 역시 북양군 제8혼성여단장을 맡았으나 안-즈 전쟁 이후 우페이푸의 휘하로 들어갔다. 아무런 충성심도, 지조도 없이 이리 저리 붙어다니는 것이 당대 군벌들의 전형적인 행태였다.
안-즈 전쟁으로 중국의 세력 균형은 재편되었다. 안후이파로 분류된 독군들은 대부분 돤치루이와 함께 몰락하였다. 이들은 부귀영화에나 관심이 있을 뿐 정권 기반이 매우 취약하여 중앙에서 독립하여 자립할 역량도 야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산둥 독군 티엔위쭝(田中玉)은 즈리파로 전향하였고 산시 독군 진쉬판(陳樹藩)은 반란을 일으켜 우페이푸에 대항했지만 패퇴하여 쓰촨성으로 도망쳤다. 창장순열사 겸 안후이 독군 니시충(倪嗣冲) 역시 자리에서 쫓겨나 톈진에서 은거하였다. 그나마 안후이파 세력으로 남은 사람은 저장 독군 루융샹(盧永祥)과 복젠 독군 리후지(李厚基) 뿐이었다. 직예파의 영향력이 장강 이남까지 미치지 않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차오쿤과 장쭤린은 돤치루이 타도를 위하여 잠시 합종연횡했을 뿐. 오월동주의 관계였기에 권력을 공평하게 나눠가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늘에 두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다는 말대로, 베이징에 들어오자 말자 논공행상과 영토 분할을 놓고 서로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첫번째는 니스충이 면직된 안후이 독군의 자리였다. 차오쿤은 장원성(張文生)을, 장쭤린은 이전에 '복벽사건'을 일으켜 푸이를 복위시키려고 했던 장쉰을 추천하였다. 장원성은 이전에는 장쉰의 부하로 무위군의 통령(여단장)과 쉬저우 진수사(徐州鎮守使)를 지냈지만 복벽 사건이 실패하자 안후이파로 전향하여 니스충의 휘하에 들어갔고 안-즈 전쟁 뒤에는 즈리파로 전향하여 차오쿤의 부하가 되는 등, 그야말로 철새같은 위인이었다. 장쭤린이 장쉰을 추천한 이유는 자신과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옛 상사와 부하가 서로 실세를 등에 엎고 독군 자리를 놓고 경합한 셈이지만, 쉬스청은 즈리파의 손을 들어 장원성을 안후이 독군에 임명하였다.
두번째는 장쑤 독군과 창장순열사였다. 장쑤 독군 리순(李純)은 안-즈전쟁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즈리파의 오랜 원로였다. 따라서 차오쿤은 쉬스청에게 건의하여 창장 순열사를 겸임케 하였다. 창장 순열사는 장쑤성과 장시성 등 양쯔강 중하류의 여러 성들을 총괄하는 요직이었다. 그런데 장쑤성에서 그동안 리순의 혹독한 통치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면서 내란에 직면하였고 본인 또한 극도의 우울증과 정신 착란 증세로 결국 10월 12일 난징의 집무실에서 자살해 버렸다.
차오쿤으로서는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빈 자리가 된 창장 순열사와 장쑤 도독을 놓고 다시 양측의 경합이 벌어졌다. 차오쿤은 창장 순열사에 북양군벌의 원로이자 前 육군총장 왕스진을, 장쑤 독군에는 즈리파인 제섭원(齊爕元)을 각각 추천하였다. 이번에도 장쭤린은 장쉰을 추천하였다. 하지만 쉬스청은 다시 즈리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실 장쭤린의 요구는 애초에 무리한 것이었다. 복벽사건을 일으켜 공화정을 뒤엎고 청조를 부활시키려고 했던 장쉰에게 어떻게 중책을 맡긴다는 것인가. 마적 출신으로 일자무식이었던 장쭤린은 단순히 자신의 지위만 믿고 밀어붙인 셈이지만, 어쨌거나 두번이나 묵살되자 체면이 실추되었다면서 앙심을 품었다.
또한 돤치루이와 안후이파의 처리를 놓고도 양자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돤치루이는 권력을 남용하고 두번의 "부원지쟁"을 일으켜 국정을 혼란시켰다. 또한 쿠테타를 일으켜 대총통 쉬스청을 감금하고 협박했으며 즈리파 토벌을 주도하여 내란을 조장하였다. 즈리파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였다. 우페이푸는 회의 석상에서 돤치루이를 반역자로서 단연코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쭤린은 우페이푸에게 "일개 사단장 따위가 감히 이 자리에 나오는가! 나에게도 사단장은 얼마든지 있다."라며 호통을 쳤다. 차오쿤의 오른팔로서 즈리파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라고 자부하던 우페이푸로서는 그야말로 면전에서 치욕을 당한 셈이었다. 장쭤린은 차오쿤에게도 고작 부하에게 휘둘리냐고 거친 목소리로 따졌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조곤은 난처한 표정으로 어물거렸다. "나는 단지 그의 의견을 들어볼 따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뒤 우페이푸에게 "이제 전쟁이 끝난 참이다. 또다시 일전을 벌일 수는 없지 않느냐."라며 다독거렸다. 다음 날 장쭤린은 차오쿤의 집을 찾아가서 예전에 의형제를 맺었던 관계를 들먹이며 "형님은 부하가 중요합니까, 형제가 중요합니까?"라고 말했다. 우페이푸에게 휘둘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장쭤린의 질책에 차오쿤은 그렇다고 오랜 심복인 우페이푸를 멀리할 수도 없어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장쭤린이 돤치루이의 편을 든 것은 비록 즈리파와 손을 잡기는 했으되 돤치루이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심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에게는 즈리파를 누르고 중앙을 장악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어쨌든 돤치루이가 필요하였다. 쉬스청 역시 돤치루이 처벌을 반대하였다. 불쾌한 감정은 있지만 과거 위안스카이 밑에서 같은 북양 군벌로서 한솥밥을 먹은 처지가 아니던가. 또한 그로서는 장쭤린과 차오쿤을 견제하려면 돤치루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족 정립(三足鼎立)이라 하여, 솥에 달린 세개의 발이 균형을 이루어야만 솥을 지탱할 수 있듯 정치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중국인들의 오랜 사고방식이다. 덕분에 돤치루이는 목숨을 부지하였다. 쉬수청 등 몇몇 안후이파 간부들만이 직위에서 쫓겨난 채 수배당했지만 실제로 군법에 의해 체포되어 처벌받은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장쭤린에게 물먹은 꼴이 된 우페이푸는 이를 갈았다. 그에게는 이전에 과거에 합격하여 "수재(秀才, 생원)"가 되었을 만큼 뛰어난 소양을 가진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다. 한낱 시운으로 출세한 마적 따위에게 굴복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군대의 훈련을 명목으로 휘하의 제3사단을 비롯한 즈리군의 주력을 이끌고 베이징을 출발하여 허난성의 성도 뤄양에 주둔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물었다. "왜 중앙을 떠나 뤄양으로 갑니까?" 우페이푸는 그냥 웃었다.
뤄양은 동주 시대 이래 후한과 조비의 위나라 등 몇번이나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으며 인구와 산물이 풍부한 곳이었다. 특히 중원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지이자 룽하이철도(장시성에서 허난성, 산시성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동서로 관통하는 철도)와 징한철도(베이징과 우한을 연결하는 철도)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중국 군수공업의 중심지인 우한과도 연결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기와 물자를 얼마든지 확보하고 병력을 확충할 수 있는, 그야말로 천하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10만명의 병력으로 주둔하는 이상 두려워 할 것은 없었다. 그는 뤼양에서 군대를 맹렬하게 훈련시키며 때를 기다렸다.
우페이푸가 베이징을 떠난 뒤, 9월 4일 차오쿤과 장쭤린은 사돈을 맺었다. 톈진에 있는 차오쿤의 저택에서 화려한 결혼식이 열었다. 신랑은 장작림의 넷째 아들 장쉐시(張學思), 신부는 차오쿤의 여섯째 딸 차오치잉(曹士英)이었다. 중매는 진윈펑이었으며 베이징 정부의 내노라 하는 고관들이 하객으로 모였다. 하지만 8살짜리 신랑과 7살짜리 신부의 결혼식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속셈이 뻔한 정략 결혼이었다. 장쭤린이 차오쿤과 사돈을 맺은 속셈은 차오쿤으로부터 우페이푸를 떼어놓기 위함이었다. 용렬한 차오쿤은 다루기 쉽다. 하지만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장작림에게도 우페이푸는 결코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우페이푸만 없다면 즈리파의 군대가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교활한 장쭤린은 즈리파를 무너뜨리기 위한 포석을 하나씩 마련해 나갔다. 첫번째는 안후이파의 잔존세력과의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우페이푸의 반발을 무시하고 돤치루이의 사면에 앞장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장쭤린이 손을 내밀자 돤치루이 역시 원한을 풀었고 두 사람은 몰래 反즈리 동맹을 맺었다. 또한 즈장 독군 루융샹과 푸젠 독군 리후지과도 손을 잡았다. 루융샹은 상하이와 난징 등 중국의 알짜배기 지역인 저장성을 쥐고 있었다. 또한 휘하에는 북양군 제4사단과 제10사단이 있어 만만찮은 전력이었다. 리후지는 푸젠성을 지키면서 쑨원의 북상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차오쿤도 이 두개의 성만은 손을 대지 못한 것이었다. 만약 펑톈파와 안후이파가 손을 잡는다면 즈리파는 남북으로 협공받는 형세였다.
두번째는, 광저우 군정부의 대원수 쑨원과의 동맹이었다. 쑨원과의 중재에 나선 사람은 안후이파의 책략가 쉬수청이었다. 안-즈전쟁 이후 지명수배당한 쉬수청은 북경의 일본 공사관에 숨어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은 차오쿤도, 우페이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보호를 받는 이상 손 댈 수는 없었다. 장쭤린의 보호 아래 그는 11월 14일 밤 일본 공사관을 몰래 나와서 톈진의 일본 조계로 탈출했다. 그리고 상하이를 거쳐 일본으로 갔다가 다음해 1월 18일 광저우를 거쳐 광시성의 구이린으로 갔다. 그곳에는 3만명의 병력으로 북벌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쑨원의 대본영이 있었다. 쉬수청을 보자 쑨원은 반겼다. "당신이 오기를 오래 기다렸습니다."
쉬수청은 쑨원에게 이해득실을 들어서 서로의 해묵은 감정을 일단 접어두고 쑨원과 돤치루이, 장쭤린이 삼각동맹을 맺어 즈리파를 협공하자고 제안하였다. 쑨원은 즉석에서 동의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나의 참모장으로 삼고 싶으니 여기에 남아주시오." 쑨원의 쉬수청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다. 하지만 쉬수청은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저는 북방으로 돌아가 손선생님을 돕겠습니다." 이렇게 의기투합하면서 장쭤린이 꿈꾸는 反즈리 삼각동맹은 완성되었다.
사실 장쭤린이나 돤치루이나 위안스카이나 차오쿤과 다를 바 없는 봉건 군벌일 뿐이었다. 이들은 개인적인 권력욕만 있을 뿐 중국을 근대화하겠다는 명확한 비전도, 통치철학도 없었다. 하물며 쑨원이 외치는 공화제의 이상이나 삼민주의에 대한 이해가 있을 리 없었다. 쑨원의 입장에서 본다면 타도의 대상이지 손을 잡을 상대가 아니다. 실제로 쑨원은 몇년 전 돤치루이가 공화제를 파괴한다고 하여 "호법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만약 삼각동맹이 즈리파를 격파하고 정권을 차지한다고 해도 결국 총부리는 다시 서로에게 돌릴 것이었다.
그럼에도 당장의 이익과 노선을 위한 방편으로 합종연횡하는 것이 중국의 전통적인 책략이기 때문이었다. 무경십서(武經十書)에서 말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적으로 적을 제압한다)"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칼을 빌려서 적을 죽인다)"가 바로 그것이다. 양립할 수 없는 적과 손을 잡는 것이 결코 모순이 아닌 것이다. 훗날 마오쩌둥이 철천지 원수였던 장제스와의 합작에 합의했던 것도 바로 이런 논리이다.
* 즈리파와 펑톈파의 반목
진윈펑은 머리가 아팠다. 명색이 베이징 정부를 이끄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민총리지만, 차오쿤과 장쭤린 두 사람 사이에 끼인 채 아무런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들의 요구 사항은 나날이 늘어났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갈수록 중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못하여 세수가 점점 격감하였다. 중앙에서 지방에 대해 세금을 올려보내라고 아무리 닥달해도 성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군벌들은 자신들이 쓸 돈도 부족하다며 오히려 중앙에 손을 벌리는 판이었다.
베이징 정부의 월 수입은 고작 20여만원에 불과한 반면, 세출은 920만원에 달했다. 나머지는 공채를 발행하거나 외국에서 빌리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전의 연속에 걸핏하면 정권이 바뀌는 판에 신용이 담보되지 않는데 어디서 빌릴 것인가. 북경 정부가 발행하는 공채의 할인율은 80%에 달하기도 했다. 100원짜리 공채가 고작 20원에 팔린다는 의미다. 교육부같은 제일 힘없는 정부 부처부터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육군부와 참모본부의 군인, 관료들 역시 월급이 몇달씩 체불되는 실정이었다. 공무원들이 동맹 파업에 들어갔다. 안-즈 전쟁 이후 베이징 정부는 사실상 올스톱 상태였다. 장관들은 직원들의 불만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사직서를 내놓았다. 군대도 아우성이었다. 게다가 근운붕이 장작림에게 우선적으로 군비를 주자 직예파의 불만이 폭발했다.
1921년 4월 27일, 톈진의 차오쿤 저택에서 이른바 "4거두회의"가 열렸다. 네명의 거두란 동3성 순열사 장쭤린과 직노예 순열사 차오쿤, 국무총리 진윈펑, 그리고 후베이 독군 겸 양호순열사인 왕좐위안 등 베이징 정부의 실세라 할 만한 자들이었다.
첫번째 안건은 외몽골에 대한 것이었다. 쉬수청이 정벌했던 외몽골은 안-즈 전쟁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1920년 10월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Roman von UngernSternberg) 남작이라는 정신병자가 천여명의 백군 패잔병들을 이끌고 외몽골의 국경을 넘어왔다. 그는 외몽골의 수도 후레(현재의 울란바토르)에서 중국군을 격파하고 몽골 칸 보그드를 체포한 후 폐위시켰다. 그의 군대는 지나는 곳마다 광기에 가까울 만큼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베이징 정부로서는 러시아 백군의 패잔병들이 들어와 중국군을 몰아내고 수도 후레를 점령한 이상 당연히 이들을 몰아내고 외몽골을 다시 되찾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의 관심사는 외몽골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본격적으로 네 사람의 입에서 돈 문제가 거론되었다. 제일 먼저 차오쿤의 동생인 즈리성장 차오루이(曹銳)가 진윈펑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즈리군의 군비지급은 반년이상 밀려 있는데 펑톈군은 겨우 2개월치만 밀려 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펑톈군은 구호금 명목으로 200만원에다 군대의 이동 경비로 100만원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즈리군은 겨우 50만원만 받았다." 진윈펑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신은 도무지 사람의 고생을 모르는군. 국세는 안 들어오는데 죄다 입만 열면 군비 타령이다. 당신이 직접 살림살이를 해 보면 어떤가. 쌀이 없는데 밥을 지을 수 없는 법이다."
"이 병신새끼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차오루이는 마시고 있던 찻잔을 진윈펑의 머리에 던졌다. 진윈펑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누가 총리냐! 너희도 죄다 병신새끼다!" 유치한 애들 싸움을 하는 꼴을 보면서 장쭤린은 웃음을 참으며 부관에게 말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차를 가져와라. 나는 돌아가는게 좋겠다." 4거두 회의는 그렇게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격분한 진윈핑이 사직서를 던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베이징 정부가 완전히 무너질 판이라고 생각한 장쭤린이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4거두가 모여서 며칠에 걸쳐 흥청망청 술파티를 벌였다. 진윈펑은 3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작에서 일부러 져 주었다. 유흥에 들어가는 돈은 모두 정부의 금고에서 나왔다. 그런 곳에 쓸 돈은 있었던 것이다. 5월 5일 진윈펑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 장쭤린과 차오쿤, 왕좐위안은 진윈펑 내각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 이번에는 대총통 쉬스청이 차오쿤과 장쭤린, 왕좐위안을 베이징으로 불러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대총통도 국무총리도 이들의 환심을 사기에만 급급한 것이 현실이었다. 5월 25일에는 장쭤린을 몽강 경략사(蒙疆經略使)"에 임명하고 내몽골을 안정시킬 것과 외몽골에서 러시아 마적떼를 몰아내어 중국으로 다시 복속시키라고 명을 내렸다. 장쭤린으로서는 "동북왕"에서 "만몽왕"이 되어 동삼성 순열사 외에 내, 외몽골까지 장악할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그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또한 즈리파에 대해서는 제23사단장 왕청빈(王承斌)을 허난 독군에, 제28사단장 옌씨앙원(閻相文)을 산시(陝西) 독군에 각각 임명하여 차오쿤을 흡족하게 하는 한편 두 세력의 균형을 맞추었다.
억울하게 된 것은 허난 독군 자오티(趙倜)이었다. 자오티는 안-즈 전쟁 중에 정저우와 신양에 주둔한 안후이군을 무장해제시키는 등 즈리파의 승리에 일조한 바 있었다. 하지만 즈리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런 공도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우페이푸는 자오티를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자오티가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자신의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페이푸군을 실은 기차가 허난성에 정차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자오티로서는 허난성이 전장터가 되거나 우페이푸의 세력이 자신의 영토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함이었지만 우페이푸는 자오티를 기회주의자라고 여겼다. 또한 우페이푸에게는 이전부터 허난성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안-즈 전쟁에 승리한 그가 즈리파의 군대를 이끌고 허난성에 들어와 뤼양에 주둔하자 자오티의 지위가 흔들렸다. 더욱이 허난 독군 자리까지 왕청빈에게 빼앗기면서 자오티는 허울뿐인 하남 성장만 차지했을 뿐이었다.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거대한 즈리파에 맞설 수는 없으므로 즈리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장쭤린에게 몰래 접근하여 즈리파와 펑톈파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적극적으로 가세하겠다고 밀약을 맺었다. 장쭤린도 중원 진출의 야심이 있는 이상 그야말로 호기였다.
* 중원의 혼전
베이징에서 북양 군벌들이 서로 치고박는 동안, 남방의 정세는 더욱 혼전의 상황이었다. 시간을 조금 앞으로 당겨 본다면, 쑨원은 호법전쟁 중 양광 순열사 루룽팅(陸榮廷)의 배신으로 광저우에서 쫓겨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광둥성과 푸젠성에는 여전히 그를 따르는 세력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광둥 성장 천중밍(陳炯明), 북벌군 참모장 겸 제2군 군장 쉬충즈(許崇智) 등은 광둥성에서 루룽팅의 세력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이들은 푸젠 독군 리후지와 비밀리에 화의를 맺고 군대를 푸젠성에서 광둥성으로 철수시켰다. 그리고 천중밍과 쑨원, 윈난 독군 탕지야요가 삼자 동맹을 맺고 1920년 8월 루룽팅의 토벌에 나섰다. 이른바 "월계전쟁(粵桂戰爭, 월은 광둥성, 계는 광시성을 가리킨다)"의 발발이었다.
11월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루룽팅의 광시군은 연전연패하여 광둥성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루룽팅은 전열을 정비한 후 前 광둥 독군 천빙쿤(陳炳焜)을 앞세워 재차 광둥성을 침공할 생각이었으나 천중밍이 선수를 쳐서 1921년 6월 광시성을 침공하였다. 루롱팅은 광시 변방군 제1로군 사령관에 처남인 탄하오밍(譚浩明)을, 제2로군 사령관에 선홍잉(沈鴻英)을 임명하여 반격에 나섰다. 또한 천빙쿤이 우저우(梧州, 광시성과 광둥성 경계에 있는 도시)에서 천중밍의 군대를 막았다.
그런데 류전환(劉震寰)의 광시군 제1사단이 반란을 일으켜 천중밍의 광둥군과 함께 천빙쿤을 협공하였고 천빙쿤은 대패를 했다. 이로 인해 루룽팅의 최일선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광둥군이 광시성에 침입하였다.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선홍잉 역시 배신하여 천중밍에게 화의를 요청하는 한편 루룽팅에게 전문을 보내어 하야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천중밍은 방심하고 있던 선홍잉을 기습하여 격파했고 선홍잉은 후난성으로 도망쳐 후난 독군 자오헝티에게 의탁했다. 루룽팅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그는 잔존부대를 이끌고 난닝으로 물러나 계속 싸웠으나 9월 30일 중월국경의 융저우(龍州)에서 참패하고 수비대장인 마지(馬濟)가 항복하였다. 결국 루룽팅은 하야를 선언한 후 상하이로 도망쳤다. 광시성은 광둥군의 손에 넘어갔다. 11월 28일 쑨원이 광저우로 복귀하였다. 그는 호법 군정부를 재건하고 스스로 중화민국 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에는 다시 두개의 정부가 생겨났다.
쓰촨성은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 군벌들 간의 항쟁으로 내란 상태였다. 북양 군벌의 후원을 받는 쓰촨 독군 류쩐호우(劉存厚)와 反북양파인 쓰촨군 제1군 군장 겸 충칭 진수사 슝커우(熊克武)가 쓰촨성의 지배권을 놓고 싸움을 벌였다. 결국 슝커우가 류쩐호우를 쫓아내고 쓰촨성을 차지했지만 1920년 5월에는 윈난 독군 탕지야요가 슝커우를 격파하고 청두를 점령하였다. 슝커우는 산시성(陝西省)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윈난군에 맞서 쓰촨 육군 제2군 군장 류상(劉湘)이 쓰촨 군벌들의 추대를 받아 쓰촨성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슝커우와 손을 잡고 1920년 8월 윈난군을 격파하고 청두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류상은 쓰촨성장 겸 충칭 진수사에 임명되어 쓰촨성의 군정 대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여세를 몰아 후난성과 후베이성까지 노렸으나 이번에는 슝커우와 대립하였다. 쓰촨성은 여러 군벌들이 난립한 채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등 중국 여러 성 중에서도 가장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전란을 겪지 않는 곳은 옌시산이 통치하는 산시성(山西省)이었다. 타이항 산맥 서쪽에 위치하여 "산시(山西)"라고 불리는 산시성은 춘추시대 5패의 하나였던 진(晋)나라가 있었던 곳으로 황허 중류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만리장성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70% 정도인 15만7천k㎡에 달한다. 주로 해발 1~2천m의 험준한 산악지대와 구릉과 분지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철광석과 석탄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고대 중국에는 관중(關中)이라 불리며 한족의 주된 발흥지이기도 하다.
일본 육사 출신인 옌시산은 신해혁명 직후 산시성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산시 독군이 되었다. 이후 중앙의 혼란을 이용해 산시성을 자신의 봉건왕국으로 만들었다. 옌시산 역시 장쭤린처럼 대표적인 친일군벌이면서도 다른 군벌들과 달리 허황된 야심을 품는 대신 오직 내치에만 힘을 기울였다. 외국 언론들은 산시성의 독립과 상호 불간섭주의를 제창하는 옌시산에 대하여 미국의 제5대 대통령 J.먼로(James Monroe)에 빗대어 이른바 "산시 먼로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광공업 진흥을 위해 일본의 후원을 받아 성도인 타이위안에 대규모 근대 산업과 군수공장, 발전시설을 건설하고 조세제도와 은행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교육과 산업 진흥에 힘을 쏟았다. 덕분에 청조 시절만 해도 가난하고 낙후된 농촌에 불과했던 산시성은 옌시산의 통치 아래 톈진, 상하이, 우한, 광저우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 근대공업이 집중된 지역의 하나로 발달하였다.
옌시산의 통치는 여러 군벌들이 내전에만 광분하던 당시에는 보기 드문 사례였으며 무정부 상태의 혼란과 토비가 횡행하는 여타 성과는 달리 민중의 삶 또한 비교적 안정되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굉장히 가혹했고 가렴주구와 높은 세금으로 원성이 자자했으며 자신에게 대적하는 세력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등 잔혹한 독재자이기도 했다. 1930년대에 와서 장제스의 토벌에 쫓긴 마오쩌둥의 중공 세력이 옌안으로 이동한 뒤 산시성 주변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1949년 4월 공산군의 공격으로 쫓겨날 때까지 약 40여년 동안 산시성의 "토황제"로서 군림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각지에 군벌들이 준동하는데도 돤치루이가 몰락한 베이징 정부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베이징 정부의 명목상 수장은 대총통 쉬스청과 국무총리 진윈펑이었지만 이들은 차오쿤과 장쭤린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베이징 정부는 즈리파와 펑톈파의 연합정권이었다. 즈리파의 세력은 베이징과 텐진을 비롯하여 화북과 화중 7개의 성(직예성, 산동성, 강소성, 강서성, 안휘성, 호북성, 하남성)에 걸쳐 있었다. 또한 장쭤린은 산하이관 이북의 동3성과 러허성, 차하르성을 차지하였고 몽골 동부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한 절강성과 복건성에는 안휘파가 버티고 있었고 호남성과 사천성, 운남성, 광서성, 광동성, 귀주성 등 서남부의 6개 성은 여러 군벌들이 혼재한 채 자기들끼리 치고박는 형편이었다. 그 외에 염석산이 산서성을 통치하였고, 영하성과 감숙성, 청해성, 신강성 등 서북은 중원의 혼란과 상관없이 이른바 "마씨일족"으로 통칭되는 회교도 군벌들이 자신들의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신해혁명 직후 독립을 선포했던 티베트는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영국의 후원을 받아 사실상 독립한 실정이었다. 물론 베이징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1918년 쓰촨 군벌 류존후이(劉存厚)를 시켜 약 3만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티베트 동부지역을 침공케 했지만 험난한 지형과 1만명의 티베트군의 반격 아래 여지없이 패퇴하였다. 티베트군은 여세를 몰아 국경을 돌파하여 창도(昌都)를 비롯한 쓰촨 서북부 일부지역까지 점령하였다. 천하 동란의 상황에서 중국이 미처 변경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덕분에 티베트는 마오쩌둥에 의해 도로 병합되는 1951년 5월까지 약 40년간 독립을 누릴 수 있었다.
산시성(陝西省)은 그동안 안휘파인 천수판(陳樹藩)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즈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음에도 결국 안후이파라는 이유로 즈리파 군벌 염상문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되자 휘하의 군대를 모아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우페이푸는 펑위샹의 제16혼성여단을 급파하여 염산문의 제28사단과 함께 천수판의 군대를 단숨에 격파하였다. 근거지를 잃은 패잔병들은 토비가 되어 산시성과 쓰촨성, 후베이성을 떠돌다가 결국 쓰촨 군벌 슝커우의 공격을 받아 괴멸하였다. 천수판 역시 빈털털이가 된 채 톈진으로 도주했다. 천수판을 격파한 공으로 펑위샹의 제16혼성여단은 제11사단으로 확대 개편되어 허난성 신양에 주둔하였다.
허난성에 이어, 산시성을 자신의 세력권에 넣은 우페이푸는 다음으로 후베이성을 노렸다. 후베이 독군 왕좐위안은 안-즈 전쟁 중 안후이파의 우광신을 체포하여 큰 공을 세워 양호 순열사가 되었지만 매우 가혹한 수탈을 거듭하여 민심이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봉급이 밀린 병사들의 병변이 반복되고 도처에서 토비가 준동하는 등 후베이성은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왕좐위안은 6월 3일 베이징에서 우한으로 급히 돌아왔다. 그런데 6월 4일 이창(宜昌)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7일에는 우한삼진의 하나인 우창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왕좐위안 직계부대인 제2사단 제7연대가 체불된 월급을 달라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우창은 폭병들에 의해 불바다가 되어 왕좐위안의 사령부까지 공격을 받았다. 왕좐위안은 이들을 부랴부랴 달래고 밀린 봉급에다 퇴직금까지 주어 고향으로 가는 특별열차에 실었다.
1천8백여명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잊은 듯 나는 기분으로 북쪽으로 가는 고향열차에 탔다. 우한을 출발한 열차는 50km 간 후 정차했다. 그런데 열차의 주변에는 수천명의 군인들이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대학살극이 벌어졌다. 반란군은 모조리 사살당한 채 현장에는 무수한 시체만이 남았다. 게다가 왕좐위안은 사체를 뒤져서 나누어 주었던 돈을 모두 되찾아 오라고 명령했다. 이 사건으로 왕좐위안에 대한 후베이인들의 적개심은 완전히 폭발하였다.
쑨원파 호북성 정치인 리슈청(李書城)이 反 왕좐위안 관료들과 향신 세력들을 규합하여 후베이성 자치운동과 왕좐위안 추방운동을 벌였다. 참고로, 1921년 7월 23일 중국공산당의 창당대회가 열린 상하이 망지로 108호가 바로 그의 별장이다. 리슈청 자신은 공산주의에 관심이 없었으나 그의 동생인 리한쥔(李漢俊)이 중국 공산당 상하이 대표였기 때문이었다. 이 날 코민테른 극동지부 대표 마린(Hendricus Maring)과 천두슈, 장궈타오, 천공보 등 전국 대표 13명이 모였다. 그 중에는 후난성 대표로 온 마오쩌둥도 있었다. 리슈청은 동생을 위해 집을 빌려주었을 뿐이지만 이날의 작은 모임이 앞으로 중국의 역사를 얼마나 좌우하는 사건이 되는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리슈청의 배후에는 후난 독군 자오헝티(趙恒惕)가 있었다. 일본 육사 출신의 유능한 군인인 그는 쑨원의 호법전쟁에 편승하여 후난성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자 후베이성까지 차지하여 "양호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리슈청이 왕좐위완 타도의 기치를 올리자 이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출동 병력은 호북 제1사단, 제2사단, 제1혼성여단 등 병력은 8만명에 달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왕좐위완은 급히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뤼양의 우페이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안-즈 전쟁 이래 또 한번의 혈전이 후베이성에서 벌어질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