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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중국의 티벳 병합" - 中/blog.naver.com/atena

14대 달라이 라마. 어릴 적의 이름은 라모 돈두룹(Lhamo Dondrub)이며 법명은 텐진 가초(Tenzin Gyatso)다. 1935년 7월 6일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때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받아 1940년 2월 22일 5살의 나이로 제14대 달라이 라마에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는 격동의 시대에 휘말려 마지막 황제 푸이만큼이나 비운의 인물이 되었다.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창설 초기만 해도 "민족 자결의 원칙"을 주장하였다. 즉, 중국내 모든 소수 민족은 완전한 분리 독립과 자치를 자유 의사에 따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1931년 11월 중화소비에트 헌법대강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었다. "중국 소비에트 정권은 중국경내의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하고 각 약소 민족들이 중국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된 나라를 세울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묘족, 광서장족, 고려인 등 중국경내의 모든 소수 민족은 중국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하든지, 벗어나든지, 아니면 자신들만의 자치 구역을 건설하던지는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에 달려 있다." 1937년 10월 중공중앙 당서기였던 류사오치(劉少奇)는 "소수민족이 스스로 무장할 권리와 독립자치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자치권은 인정하되, 자결권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위안스카이나 돤루이치, 장제스 정권에 비해 훨씬 전향적인 주장이었다. 하지만 중공은 정말 그럴 의사가 있었던가. 어차피 중앙정부는 장제스 정권이지 그들이 아니다. 중공에게는 소수민족들에게 자결권을 보장할 어떤 책임이나 권리도 없었다. 중공은 소수민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책으로 마치 자결권을 인정하는 양 선전했을 따름이었다. 중공은 세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독립"이니 "자결권"이니 하는 단어는 온대간대 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마오쩌둥은 "중국내 각 소수민족은 단결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전세가 불리했던 국공내전 초기에는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언행을 하다가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자 태도는 다시 돌변했다. 그때그때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말을 마음대로 바꾸는 식이었다. 1945년 6월에는 "여러 민족들이 연합하는 연방국가"를 제창했던 마오쩌둥은 1949년에 오면 중국 인민정부의 통일된 지도를 강조하면서 "소련식의 연방제는 중국의 상황에 맞지 않다"라고 바꾸었다.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입으로 내밷은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공은 "자결권"을 명확히 부정했으며 중국 내 모든 소수 민족은 "중국민족"으로 규정되었다. 그들의 정체성이나 문화, 의식, 의사는 깡그리 무시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외몽골이었다. 1921년 소련의 원조를 받는 인민정부가 수립된 외몽골은 사실상 소련의 괴뢰정권으로서 완충지 역할을 하였다. 철저한 "중화주의자"였던 장제스 정권은 외몽골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괴뢰정권이었던 신강성을 교묘한 모략과 무력으로 회복하고 1945년 8월 14일 중소우호조약에서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외몽골의 독립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소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마오쩌둥은 소련의 원조를 얻기 위해 1950년 2월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중소상호원조조약에서 외몽골에 대한 독립을 승인했다. 이로서 외몽골은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지금도 타이완은 외몽골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티벳은 여기에 포함되지 못했다. 미국은 장제스 정권과의 관계를 고려해 티벳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거부하였다. 또한 미 국무성은 "미국은 티벳에 대한 중국의 적법한 주권을 침해할 의사가 없다"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유일한 후견국은 영국이었다. 영국에게 티벳은 중국과 인도 사이의 중요한 완충구역이었다. 따라서 장제스 정권에 티벳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한편, 티벳 정부를 후원하였다. 1948년 11월 런던에 도착한 티벳 사절단은 영국 정부로부터 독립국가로서 대우받았다. 인도 델리에서 열린 범아시아 대회에서도 티벳 국기는 중국 국기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국가와 나란히 게양되었다. 그러나 티벳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추진했음에도 영국과 인도, 네팔 등을 제외하고는 인정받지 못했다.

​더욱이 국공내전에서 중공이 점점 승기를 굳혀 나가자 티벳의 미래는 어두워졌다. 사실 어느 쪽이 이겼다고 해도 티벳 입장에서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동안 중국이 티벳에 대해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못한 것은 내전과 일본의 침략 때문이었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면 당연히 다음 수순은 "건방지게" 주권국 행세를 하고 있는 티벳을 응징하는 것이었다. 티벳도 모를 리 없었다. 티벳은 자신들이 중국과는 별개의 국가임을 미국과 국제사회에 지속적으로 호소하였다. 승려들은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지 않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런 노력도 소용​없었다. 국공내전 말기인 1949년 3월 중공은 티벳의 해방을 잠정 결정하였다. 그 역할은 중공 중앙 서북국과 펑더화이(彭德懷)가 지휘하는 제1야전군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이를 공식화한 것은 9월이었다. "시짱성(西藏省, 티베트)는 중국 고유의 영토이다. 그 어떤 외국에 의한 분할도 인정할 수 없다. 시짱민족과 한족의 우의는 영국과 인도의 침략자들과 반동분자들에 의해 해를 입은 바가 있다. 그러나 시짱민족의 애국인민들은 소수민족을 도우려는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와 중공, 인민해방군의 정책이 시짱인민들의 구세주임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내부적으로 시짱성은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매우 중요하니 반드시 점령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국공내전 직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각 지방국 군정 관할도. 신강성을 포함한 서북지방은 서북국의 담당이었다. 하지만 서남국이 편성되면서 스촨성과 윈난성, 구이저우성에다 티벳까지도 서남국이 관할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식 이른바 "개국대전(开国大典)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날 마오쩌둥은 티벳를 중국의 영토로서 해방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티벳정부는 반발했다. 라샤의 라디오 방송에서는 "티벳과 중국은 서로 독립된 관계이며 어떠한 외세의 정치적 통치를 받은 적이 없다. 또한 티벳에는 어떤 제국주의 군대도 없고 외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데 있지도 않은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라는 반박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서한을 미국과 영국, 인도로 보내어 "중국이 침략했을 때 티벳은 끝까지 싸울 것이며 귀국의 가능한 모든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하였다. 중국은 서방 제국주의의 위협과 낡은 봉건제와 농노제라는 반동세력의 압제에 시달리는 민중을 해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 말은 티벳의 정교일치사회의 전통 문화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중공이 티벳을 점령했을 때 어떤 정책을 펼칠지를 예견하는 셈이었다.

1949년 7월 8일, ​티벳 정부는 난징의 국민정부에서 파견된 관료들을 비롯해 라샤에 있는 모든 중국인들을 인도로 추방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라사 주재 영국 대표이자 티벳 정부의 정치 고문인 리차드슨(H.E.Rinchardson)이 관여하였다. ​마오쩌둥은 이것이 영국의 획책이라며 티벳 정부가 외세와 결탁하여 분리독립을 꾀하는 "비애국적인 행동"이라고 분개하였다.

중공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티벳은 ​유엔에 호소하는 한편 미국과 영국, 인도 등으로부터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약소국의 간절한 요청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중국의 세력이 강화되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를 위해 군사적 모험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의 대답은 그야말로 애매모호하였다.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티벳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는다는 원론적인 내용이었다. 게다가 친중파인 네루는 중국이 티벳을 점령해도 인도와 상관없다고 여겼다. 아마 10년 뒤에 중국과 대규모 국경분쟁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그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 역시 인도의 입장을 존중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이었다.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 역시 10억 달러의 원조 요청을 거부하였다. 어디에서도 실질적인 도움은 없었다.

1950년 1월 1일 베이징은 라디오를 통해 "1950년 중에 하이난과 타이완, 티벳을 해방시킨다"라고 천명하였다. 마오쩌둥은 제1야전군 사령관이자 서북국의 수장인 펑더화이에게 티벳 해방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의 수립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병참의 문제를 내세워 칭하이성과 신강성에서 티벳을 침공하는 것은 무리라고 대답하였다. 공격 준비를 마치려면 적어도 2년은 걸린다는 말에 마오쩌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침공하겠다는 생각을 바꾸어 티벳 해방의 임무를 시캉성과 쓰촨성에 주둔한 덩사오핑의 서남국과 류보청(劉伯承)의 제2야전군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극복할 수 없는 곤란이 없는 한, 금년 5월에 티벳으로 진군하여 10월까지 해방하라" 장궈화(張國華)가 지휘하는 제18군단이 주력으로 시캉성에서, 윈난군구의 제62군단이 윈난성에서 진격하고 서북국도 칭하이성에서 칭하이기병지대를, 신강성에서 신강독립기병사단을 투입하여 삼방향에서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동원병력은 약 4만명에 달했다.

반면, 티벳의 군사력은 형편없었다. 제13대 달라이 라마는 영국의 도움을 받아 티벳군을 서구식으로 근대화하는 노력을 하였다. 티벳의 부대단위는 갸뽄(甲本)으로 1개 갸뽄은 500~1천명이었다. 1950년 초 티벳의 정규군은 1개 근위 가뽄과 10개 가뽄, 2개 포병대로 구성되어 약 8500명 정도였다. 그 외에도 라마승으로 조직된 승병들과 민병대가 있었다. 실제로는 4천명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다. 군복부터 무기도 모두 영국식이었다. 인도와 네팔을 통해 수입한 구식 엔필드 소총과 브렌 경기관총, 약간의 박격포로 무장하였다. 그러나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죽은 뒤 20여년간 티벳의 군사력 증강은 지지부진했다. 티벳 정부는 군사력 증강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티벳군의 총사령관은 케메 자사 소남 왕귀에(Kheme Dzasa Sonam Wanggue)였다.

티벳의 인구는 300만명 밖에 되지 않는데다, 군대의 확충은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계율에 어긋났다. 이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무기와 장비도 형편없는데다 군복만 서구식의 복장을 흉내냈을 뿐, 근대적인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전술을 가르칠 사관학교도 없었고 장교들을 외국으로 유학보내지도 않았다. 무기의 사용에도 익숙치 못했다. 심지어 참호를 팔 줄도 몰랐다. 근대적 징병제가 아닌, 세습적 직업군인제에 의해 군인이 된 병사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다. 게다가 정찰을 통한 작전 수립 대신 점을 치고 길일을 선택해 출전하였다. 병사들은 군사훈련 대신 주술을 외웠다. 이기면 추격하고 지면 흩어졌다. 전쟁터로 갈 때에는 가족들을 동반하였다. 한마디로 티벳군은 15세기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이런 군대가 과연 숫적으로 압도적으로 우세하고 풍부한 야전경험을 가진 중공군을 상대로 어떤 싸움을 할 것인가.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오직 믿을 것은 티벳의 험한 지형과 외부의 지원뿐이었다.

1950년 1월말부터 중국은 본격적으로 티벳 침공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티벳 동부를 먼저 점령한 후 그 여세를 몰아 티벳 서부로 진격하여 라샤를 "해방"할 계획이었다. 변경의 국민정부군 잔당을 토벌하는 한편, 티벳으로 향하는 군용 도로가 건설되었다. 티벳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