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군은 서남국 산하의 제18군단을 주력으로, 제14군단과 제62군단이 조공을 맡았고 북쪽에서도 서북국 산하의 2개 군단이 투입되어 5개의 공격로를 통해 삼면에서 포위 공격할 예정이었다. 첫번째 공격목표는 동쪽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티벳군 사령부가 있는 참도였다. 이 곳을 함락시킨다는 것은 "티벳의 목구멍"을 점령하는 것과 같았으며 라쌰까지 단숨에 밀어붙일 수 있었다.
또한 병참지원을 위해 충칭에 후방지원사령부를 설치하였고 점령지의 정치, 행정, 사법 등을 전담할 "중국시짱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현지 정찰과 현지민들에 대한 정치공작을 위해 각 부대는 티벳인을 포함하는 중대규모의 선견대를 조직하였다. 공자로서의 불리함을 고려해 병력에서도 5배 이상의 우위를 확보하였고 티벳군이 기병으로 유격전을 펼칠 것을 대비해 개전 초기에 압도적인 전력으로 포위섬멸하여 티벳군의 저항 의지를 꺾는데 목표를 두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의 경험을 토대로 한 중국의 티벳공격계획은 그야말로 치밀했으며 속전속결전이었다. 국제사회가 개입할 여지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
티벳 역시 병력의 대부분을 참도와 진사강 주변에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최일선이 될 진사강 서안에 배치된 병력은 전체 병력의 2/3에 달하는 정규군 5천명에 민병대 3천명 등 총 8천여명이었다. 또한 윈난성과의 접경지대에도 약간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티벳 병사들은 중국군의 서진을 막기 위해 산악지대의 입구와 도로에 지뢰를 매설하고 교량을 폭파시켰다. 그러나 이런 국경을 따라 전진배치하는 전략은 한치의 땅도 내주지 않겠다는 티벳의 열의는 보여줄지언정, 병력과 장비, 화력, 통신 등 모든 열세한 상황에서 주력부대를 초기에 적의 공격에 노출시켜 소멸시키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티벳군으로서는 차라리 동부지역을 그냥 내주더라도 광대한 영토와 산악지대를 활용해 치고 빠지는 식의 유격전을 펼치며 중국군의 진격을 둔화시키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산전수전의 달인이었던 마오쩌둥은 군사적 압박 이외에도 정치적, 외교적 압박까지 병행하여 티벳을 농락하였다. 미국, 일본 등지에서 티벳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티벳의 풍습, 문화, 정치, 종교, 언어 등을 철저하게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를 현지 부대에 전달하여 교육시켰다. 또한 티벳과 칭하이성 국경에 있는 암도(安多)에서 몽골인, 티벳인 등 약 2만여명이 모인 대규모 종교행사를 실시하여 중국이 티벳에 적의가 없음을 선전하고 이들을 회유하였다. 이를 통해 티벳인들이 중국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희석시켜 국론을 분열시키고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겠다는 의도였다.
1950년 3월 티벳정부는 7명의 고위 인사로 구성된 평화사절단을 중립지대인 홍콩으로 파견하여 중국과 협상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영국 정부가 티벳 대표단에게 홍콩 입국 비자 발급을 거부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3월 18일 중국군 제18군단 산하 선견대가 북쪽과 남쪽 두갈래로 참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또한 14군단 125연대와 126연대 역시 윈난성에서 북상을 시작했다.
5월 초가 되자 참도의 티벳군 사령부에는 중국군 선견대가 이미 국경을 돌파하여 이동중이라는 보고가 뻔질나게 올라왔다. 중국군의 본격적인 공격은 시간문제였다. 베이징에서는 중국의 사주를 받은 티벳인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중국군이 티벳을 공격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며 어떤 장애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또한 제국주의자들은 티벳을 도와주지 않는다. 중국은 티벳인들의 권리와 종교적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5월 27일 중국 서남국은 "티벳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10개 조항"을 제시하였다. 주요 내용은 티벳은 영, 미와의 일체의 외교 관계를 끊고 티벳내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추방할 것,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각급 관료들의 지위를 보장한다, 종교의 자유와 티벳인들의 생활, 풍습을 보장한다, 티벳군을 중국군에 편입한다 등이었다. 과연 이런 약속이 얼마나 지켜질지는 전적으로 중국의 의지에 달린 문제였지만, 실상 티벳정부를 분열시키고 주화파들을 회유하여 티벳이 중국군의 공격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고도의 술수였다.
중국이 예상했던 대로, 티벳 지도부는 주화파와 주전파로 갈라져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주화파는 중국과 싸운다면 많은 사찰이 파괴되고 수많은 무고한 티벳 민중만 희생될 것이니 중국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주전파는 티벳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용해 꾸준히 저항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문관들은 대부분 주화파였고 군부는 주전파였다. 달라이 라마의 섭정이자 티벳의 실권자인 타탁 린포체는 주전파의 손을 들었다.

중국과 싸우기로 결정한 티벳은 국고를 열어 영국과 인도로부터 2인치 박격포 38문, 3인치 박격포 63문, 294정의 브렌 경기관총, 1260정의 구식 리-엔필드 소총, 168정의 스텐 기관단총 등을 급히 구입했다. 하지만 대부분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와 같은 경화기에 국한되었고 중화기는 없었다. 게다가 티벳의 가난한 재정 여건상 많은 무기를 살 여유가 없었으며 영국과 인도는 중국을 자극할까 우려해 더 이상의 무기 판매를 거부하였다.
중국군의 공격이 임박하자 티벳군 사령부는 점술가를 통해 점을 쳐본 결과 7월 초에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이에 따라 참도에 무기를 수송하는 한편, 진사강의 일선 부대에 전투 준비 명령을 내렸다. 중국군이 서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7월부터 9월까지 진사강부터 참도까지 티벳 수비대와의 국지적인 충돌이 거듭 벌어졌다. 중국군은 적극적인 정치공작을 통해 현지 촌장들을 회유하여 저항을 최소화하고 이들로 하여금 중국측에 서서 티벳에 대항하게 하였다. 주된 목표는 티벳군의 주력이 모여 있는 참도를 포위한 후 섬멸시켜 이들이 라쌰로 퇴각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티벳은 한번의 전투만으로 괴멸될 참이었다.
7월 초, 중국군 제18군단 예하 제52사단이 참도 동북쪽 161km 지점의 교통의 요충지인 뎅코(Tongkhor, 登柯)를 공격해 점령했다. 이것이 티벳군과 중국군 간에 벌어진 첫 전투였다. 참도 총독이자 수비 대장인 르하루(Lhalu Shape)는 700명의 병력으로 뎅코를 재탈환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중국군을 선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중국군을 두려워한 티벳 정부에 의해 거부되어 수비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르하루를 임기가 만료되었다는 이유로 면직시키고 고위 귀족인 아페 아왕 직메(Ngapoi Ngawang Jigme)를 신임 참도 총독에 임명하였다. 그는 참도 외곽의 방어선을 강화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병력을 대폭 늘려 참도에 집결한 병력은 17개 가뽄 1만 7500명에 달했다. 그는 진사강에서 참도에 이르는 연선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였다. 그 중의 약 절반 정도인 8천여명을 참도에 배치하였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중국이 바라는 바였다. 중국군은 진사강 서안을 점령하고 병참을 위한 군용도로를 건설하는 한편, 약 320km에 걸쳐 참도를 삼면에서 포위하는 형세를 취하였다.
티벳정부는 독립을 선포하는 한편, 미국과 영국, 인도, 네팔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티벳 사절단의 접견 자체를 거절했으며 영국은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한국전쟁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미국은 티벳 문제로 중국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중국은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할 경우 참전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었지만 적어도 아직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미국은 허세라고만 여겼다. 게다가 한반도와 달리, 티벳은 중국의 영토이며 미국이 관여할 명분도 없는데다 전략적 가치도 낮아보였다. 설령 개입하려고 했어도 약간의 무기와 자금을 주는 것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약소국에 불과한 네팔은 끼어들 입장이 되지 못했다. 친중파였던 인도의 네루수상은 오히려 티벳 정부에게 무력 저항을 하지말고 독립을 포기하되 자치권을 인정받는 형태의 협상을 종용하였다. 티벳은 완전히 고립무원이었다.
9월 16일 인도에서 주인 중국대사와 티벳 대표단이 만나서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협박과 함께. 물론 티벳 대표단은 이를 거부하였지만 막상 라쌰로 돌아가서는 중국의 요구를 부분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현실적으로 주변국의 지원을 받을 길이 없는데다 무력으로 저항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이상 협상을 하면서 국제 정세가 유리해 질 때까지 시간을 끌어보자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런 상투적인 전략에 말려들어갈 마오쩌둥이 아니었다.
이미 마오쩌둥은 8월 23일에 티벳이 협상 테이블에 나오도록 10월까지 참도를 점령하라고 예하 부대를 닥달하고 있었다. 9월 15일 제52사단 제60연대가 뎅코를 공격해 재차 점령하였다. 티벳군은 중국군이 서쪽으로 공격해 오리라 예상하고 병력의 대부분을 배치했는데 뜻밖에도 참도 북쪽으로 진격해 오자 이 방면의 부대가 지레 겁을 먹고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이 때문에 참도 북쪽은 텅 비게 되었다.
10월 1일 한국에서는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였다. 마오쩌둥과 중공 지도부는 한국전쟁 참전을 놓고 심각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티벳 "해방"은 그것과는 별개였다. 오히려 미국과 국제사회의 시선이 한국전쟁에 집중된 덕분에 중국은 마음놓고 티벳을 공격할 수 있었다.
류보청, 덩사오핑의 총지휘 아래, 장궈화의 제18군단 주력 4만명이 진사강을 건너 참도로 진격하였다. 중국군은 참도를 공격하기전 철저한 사전 정찰을 실시하여 티벳군의 병력 배치 상황과 훈련, 사기 수준, 무기 실태까지 모두 파악하였다. 티벳군은 참도 전면에만 병력을 배치했을 뿐 남쪽은 취약했다. 무기도 낡은데다 병력은 광범위한 지역에 분산배치되어 있었으며 방어 태세도 형편없었다. 전쟁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장궈화는 참도를 정면공격하는 한편, 배후로 우회하여 세방향에서 포위섬멸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중국군의 본격적인 공격은 10월 5일부터 시작되었다. 각 부대가 차례로 진사강을 도하하여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하지만 티벳군은 중국군의 도강을 저지할 수 없었다. 병사들은 구식 소총 1정이 가진 무기의 전부였고 1천명의 가뽄 전체의 중화기는 경기관총 몇정과 박격포 2, 3문이 전부였다. 게다가 태반이 40대 이상의 노인인데다 가족들까지 데리고 다녔기에 기동력도 형편없었다. 중국군의 공격을 받자말자 최일선의 티벳군은 순식간에 무너져 뿔뿔히 흩어졌고 대부분은 항복하였다.
중국군은 변변한 지도도 없었고 산소도 희박한 4천m의 고산지대를 행군하면서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럼에도 티벳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은 채 일일 진격속도는 무려 40km에 달했다. 도보만으로 광대한 중국 대륙 전체를 2년만에 정복한 이들답게 티벳의 험난한 지형과 기후도 장애가 되지 못했다.
삼방향에서 중국군이 빠르게 포위해 오는데도 참도의 티벳 사령부는 10월 11일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들은 변변한 통신 장비도 없는데다, 정찰도 게을리 했을 뿐더러 이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도 없었다. 지난 수백년간 제대로 실전을 경험해 보지 못한 구식 군대와 내전으로 단련된 군대와 싸움이 될 리 없었던 것이다. 10월 16일에는 참도 북쪽의 리웨체가 함락되었다. 이런데도 참도의 주요 관료들은 린카절(林卡節, 봄이 왔다는 것을 즐기는 티벳 전통 명절)이나 즐기고 있었다. 10월 17일, 참도 총독 아페 아왕 직메는 참도를 버리고 후퇴를 결정했다. 그는 중국군에게 전령을 보내어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과 안전한 철수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18일 새벽, 2천여명의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참도의 관료들과 수행원, 가솔들을 데리고 후퇴에 나섰다. 하지만 이미 퇴로는 차단되어 있었고 얼마가지도 못한 채 모조리 포로가 되었다.
게다가 이날 참도 외곽을 지키고 있던 제9가뽄이 반란을 일으켜 중국군에게 투항했다. 이들은 "티벳 민족자치정부의 수립"을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류보청은 "중국의 대가정으로 들어오는 모범적인 행동"이라며 치켜세워줬다. 10월 19일 4시, 참도는 함락되었다. 티벳은 6개 가뽄이 섬멸되었고 3개 가뽄이 큰 손실을 입었고 1개 가뽄이 투항했다. 참도전투에서 티벳군은 18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6천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사실상 괴멸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중국군의 손실은 고작 114명에 불과했다. 티벳군이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은 것에는 그들의 무능함도 있었지만, 티벳 정부내에 만연한 패배주의 탓도 있었다. 어차피 티벳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현실에서 중국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을 때 호된 보복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 그 책임은 지휘관들이 져야 한다는 식으로 지휘관들에게 극도의 부담을 주었다. 그러니 누가 열심히 싸우려 들 것인가. 결국 가장 큰 패인은 지도부의 어정쩡한 자세와 리더쉽의 부재,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 부족이었다.
인도 뉴델리에서는 티벳 대표부가 주인 중국대사에게 중국군의 침공을 항의했다. 주인 중국대사인 위안중센(袁仲賢)은 "중국의 평화회담 요청에 티벳이 빨리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책임은 티벳에게 있다고 대답했다. 티벳정부는 독립을 포기하되 명목상으로만 중국에 복속되는 방안이라도 희망했지만 한낱 잠꼬대같은 소리에 불과했다. 중국은 티벳 전체를 원했다.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달라이 라마가 할 수 있는 것은 신탁에 물어보는 것이었다. 신탁은 대답했다. 중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불경을 외워라, 더욱 신앙심을 가지고 기도를 열심히 올려라. 실상 15살 짜리 어린 달라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에게 기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참도를 점령한 중국군은 파죽지세로 라쌰를 향해 진군하였다. 포로가 된 티벳 병사들에게는 여비를 지급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귀족들 역시 그들의 지위에 맞게 대우하였고 특히 참도 총독 아페 아왕 직메에게 높은 자리를 주겠다는 약속으로 회유하였다. 그는 중국에 투항하라는 서한을 라쌰로 보냈다. 덕분에 참도인민해방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참도총독이자 티벳 동부사령관이었던 아페 아왕 직메. 참도 함락 후 나라를 배반하고 중공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그는 티벳 "해방"의 공을 인정받아 인민해방군 중장과 1급해방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시짱자치구 인민위원회 주석, 전인대 민족위원회 주임위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 부주석 등 고위 직책을 두루 맡았다. 티벳의 고관들 대부분은 달라이 라마를 배신하고 중공에 결탁하여 호위호식을 누렸다. 이런 식으로 싸우기 전에 적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손자병법을 신봉하는 마오쩌둥의 방식이었다.
티벳군의 주력이 한방에 섬멸당했지만 티벳은 항복을 거부했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은 라쌰 "해방"을 결정하였다. 인도가 반발했다. 부수상 사르다르 파텔((SardarPat)이 중국의 티벳 침공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주인 중국 대사를 불러 항의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중국이 초강경으로 나서는 이상 이를 저지하려면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인도는 티벳을 위해 그렇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네루는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경우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분쟁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네루에게 중국은 친구였다. 티벳 문제에서 양보한다면 카슈미르에서 중국의 양보를 얻을지 모른다, 네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중국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환상이었지만, 인도는 중립을 지키기로 했다.
11월 7일 티벳정부는 유엔에 중국 침략을 제소하고 국제사회의 도움을 호소하였다. 티벳은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엔이 무력으로 개입해 주기를 원했다. 엘살바도르가 의제 상정에 찬성했지만, 안전보장이사회 상임국가 중 하나인 영국의 반대에 부딪쳤다.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경우 홍콩이 위협받지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동맹국들도 나섰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은 티벳은 유엔 회원국이 아닐뿐더러 중국의 영토라는 사실은 세계가 다 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유엔은 "티벳은 중국의 소관"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1월 17일, 섭정 타탁 린포체가 물러나고 티벳 의회는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친정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티벳 정부는 이미 붕괴되고 있었다. 귀족들은 인도와 네팔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과의 협상을 진행하되 만약 결렬되었을 때를 대비해 부탄 국경에 있는 작은 마을 드로모(Dromo)로 탈출하기로 하였다. 달라이 라마가 중국군의 포로가 된다면 티벳은 저항을 이끌 정신적 지주를 잃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포탈라 궁전의 지하금고에서 수백만달러의 금은을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였다. 이 돈은 나중에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탈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정치적 자금으로 활용된다. 12월 16일 달라이 라마가 티벳 국새를 들고 라쌰를 탈출하자 티벳 정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중국과의 협상은 사실상 중국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락하는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1951년 4월 29일부터 5월 22일까지 베이징에서 양국의 협상이 개최되었다. 티벳 대표단은 티벳에 제국주의 군대가 없으니 중국군이 주둔할 이유가 없으며 만약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중국군의 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씨알도 먹힐리 없었다. 중국은 협상이 결렬되면 곧장 라쌰를 공격하겠다고 협박했다. 티벳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또 한가지 첨예한 대립은 선대 달라이 라마와의 갈등으로 중국에 망명해 있던 판첸 라마의 승인이었다. 달라이 라마 다음의 서열 2위인 판첸 라마는 세속 권력은 없지만 종교적으로 달라이 라마와 맞먹는 위치에 있었다. 더욱이 달라이 라마가 죽었을 경우, 다음 달라이 라마를 찾아서 달라이 라마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판첸 라마의 역할이었다. 즉, 달라이 라마의 권위는 판첸 라마를 통해 나온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런데 세속 권력을 놓고 제13대 달라이 라마와 제9대 판첸 라마가 대립하면서 1925년 판첸 라마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돤루이치 정권의 보호를 받으며 티벳이 중국의 일부라고 인정하였다. 제9대 판첸 라마는 1937년 칭하이성에서 죽었다. 새로운 판첸 라마가 중국에 의해 칭하이성의 한 티벳 농가에서 발견되었다. 물론 티벳은 인정하지 않았다. 적합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데다 중국의 괴뢰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판첸 라마를 승인하라고 압박을 가하자 티벳 대표단은 그럴 권한이 없다며 반발했다. 결국 라쌰를 거쳐 드로모에 문의하여 달라이 라마의 승인을 받음으로서 해결되었다.
중국과 티벳의 협정 조인식.
5월 23일, 중국 부주석 주더와 티벳 대표단, 판첸 라마 사이에 중국과 티벳의 관계를 규정하는 "17개조 협정"의 조인식이 열렸다. 티벳의 주권은 중국에게 넘어갔다. 티벳군은 해체되었다. 5월 25일 마오쩌둥은 제18군단에 라쌰로 진격할 것과 함께 비행장과 도로의 건설을 명령했다. 라쌰 진격의 임무는 제18군단 산하 제52사단의 몫이었다.

1951년 10월 26일 라쌰에서 사열식을 거행하고 있는 중국군 제18군단.
참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티벳은 아직 9천명 이상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항복한 이상 저항할 생각은 없었다. 9월 9일 제52사단 선견대가 라쌰에 진입하였다. 10월 26일에는 장궈화의 제18군단 사령부가 라쌰에 들어왔다. 당, 정, 군 요원 합해 약 2만명에 달했다. 티벳군은 단지 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이로서 라쌰는 중국에 점령되었고 주권국으로서의 티벳은 사라졌다. 중국군은 12월말까지 티벳 전역을 점령하였다.
티벳의 군사력은 변변치 않았고 별다른 전투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손쉽게 정복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혹독한 기후와 4~5천m가 넘는 험준한 고산지대, 산소부족과 열악한 병참으로 병사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약 티벳정부가 무작정 외부의 개입에만 기대기보다 사생결단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명확한 결의를 가지고 중국군을 괴롭히는 전술로 맞섰다면 중국군은 심한 애로를 겪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티벳정부는 협상도, 항전도 아닌 애매모호한 입장을 고수할 뿐이었고, 이런 유격 전술은 15세기에 머물러 있었던 티벳군에게는 능력 밖이었다.
반면, 중국은 무작정 무력으로 정복하는 식이 아니라 티벳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많은 관료들에게 달콤한 먹잇감을 내밀어 매수하여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렸다. 고위 귀족들과 군지휘관들은 모두 중국의 통치 아래 고관 대작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 이들에게 나라의 독립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하물며 전투에서는 감히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위대한 영적인 나라 티벳이 몰락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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