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12일 아민이 CIA의 끄나풀이라는 보고를 받은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그 사실의 진위 여부를 제대로 가리지도 않은 채 더 이상 믿을 수 없고 야만스럽기 짝이 없는 아민 정권을 그대로 놔둘 수 없으며 완전히 박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동안의 불개입 방침을 180도 뒤엎은 그의 결정은 거의 충동적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참모총장이 무력으로 아프간을 안정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은 오가르코프에게 윽박질렀다. "당신이 지금 정치국을 가르치려는 것인가? 당신의 유일한 임무는 정치국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몇년 뒤 브레즈네프는 자신이 군부의 몇몇 강경파들에게 속았다면서 아프간에 발을 담군 것을 크게 후회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과 인접한 투르키스탄 군관구는 국경지대에 4개 차량화 보병사단(제 5, 제68, 제108, 제201 사단)을 집결시켰다. 또한 제345 근위공수연대 2개 대대와 GRU 소속의 특수부대가 수십여대의 An-22 대형 수송기를 타고 바그람 공항에 도착하였다. 카불에는 KGB와 GRU의 요원팀들이 속속 침투하였다. 아프간 침공의 총지휘를 위하여 제40군이 창설되었고 Yuri Vladimirovich Tukharinov 소장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상황은 급박했지만 정작 아민은 안이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소련군 공수부대와 특수요원들이 아프간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보고에 기뻐하면서 박장대소하는 판이었다. 바그람 공군 기지 사령관이 소련인들의 동태가 수상하다고 보고했지만 묵살하였다. 이전부터 북부의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모스크바에 전투부대의 파병을 꾸준히 요구해 왔던 그로서는 어떠한 경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22일에는 바실리 사프론추크 소련 대사가 모스크바로 돌아가기 전 아민을 방문하자 아민은 소련이 병력을 파견하는데 감사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가 그토록 소련군을 간절히 바랬던 것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경호을 맡기기 위함이었다. 아프간 정국은 매우 복잡하였고 아프간 군부 내에는 여전히 아민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이 잔존하고 있었다. 실제로 17일에 카불의 대통령궁에서 총격 사건이 있었다. 아민은 무사했지만 그의 동생이자 비밀경찰의 총수인 아사둘라 아민이 중상을 입고 치료차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이렇다보니 그는 자국 군대를 신뢰할 수 없었고 차라리 소련군에게 기대려 하였다. 설마하니 소련이 배신하여 비수를 들이대리라고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생각하지 못했다.
1979년 12월 25일 소련군 참모총장 오가르코프는 제40군에 아프간 침공을 하달하였다. 이날 새벽 제5 차량화 보병사단과 제108 차량화 보병사단이 전차부대를 앞세워 아프간 국경을 일제히 넘었다. 또한 300여대에 달하는 대규모 수송기 편대가 제105 근위 공수사단의 강하병들을 태우고 카불과 바그람 공군기지에 착륙하였다. 그러나 작전 개시 전날인 26일 밤 공정대원들을 태우고 바그람으로 향하던 수송기 한대가 추락하여 37명 전원이 사망하였다. 소련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비보였지만 25일부터 27일까지 3일 동안 아프간에 들어온 소련군의 병력은 2만5천명에 달하였다. 아민과 아프간 군 수뇌부는 소련군의 진입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자신들을 돕기 위한 우군이라고만 여겼다. 따라서 아무런 저항도 충돌도 없었다. 이 점에서 과거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의 반소 민주화 운동 당시 소련군의 침공이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시작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소련의 개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나. 헝가리나 체코의 경우에는 소련 입장에서 훨씬 명확한 명분이 있었다. 이들은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 탈퇴하여 서방쪽에 붙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련군을 막기 위하여 UN과 나토의 개입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헝가리, 체코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진영 전체를 위협하는 일이므로 소련 지도부가 묵과하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하였다.
반면, 소련과 아프간의 관계는 전혀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군에게 점령된 후 패전국으로서 강제로 친소 정권이 수립된 동유럽과는 달리 아프간은 소련의 동맹국이지 위성국이 아니었다.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 동안 아프간은 외부 세계의 갈등과는 무관하게 중립을 지키면서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1978년 4월 공산주의자들의 쿠테타로 공화정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친서방에서 친소로 넘어오면서 소련의 영향력이 강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독립적이고 자주적이었고 양국의 관계는 지배-피지배가 아니라 우호와 선린의 관계였다.
또한 소련과 아민 사이가 아주 매끄럽지는 않다고 해도 아민은 엄연한 친소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소련을 적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의 더 많은 도움을 바라는 쪽이었다. 아민이 소련과 서방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채 "자주 노선"을 추구함으로서 소련 지도부를 자극했다고 하지만 당시 이런 식의 외교술은 흔한 일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집트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사다트는 1972년 10월 소련의 원조가 자신의 눈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천여명의 소련 고문단을 한꺼번에 추방하고 소련에서 미국으로 갈아타려는 시늉을 하였다. 소련 지도부는 굴복하여 이집트에게 더 많은 최신 무기와 원조물자를 제공하였다.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만큼 얻어낸 사다트는 1년 뒤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그간의 패배를 어느 정도나마 설복할 수 있었다.
또한 소련은 유고의 티토와도 대립하고 있었고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는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노선을 걷고 있었다. 심지어 중국과는 대규모 무력 충돌을 벌인 바 있었다. 북한의 김일성 역시 소련과 중국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하나라도 더 얻으려내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여기에 비하면 아민의 행보는 대수롭지 않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소련이 뒷통수를 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채 무방비로 당한 것만 보더라도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아민의 반소 자주 노선이 소련군의 침공을 불러왔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
소련 개입의 또 한가지 이유로 꼽는 것은 아프간 내전의 격화였다. 아민 집권후 아프간의 정국이 진정되지 못한 채 이슬람 반정부 세력이 갈수록 강화되자 아민의 무능함을 절감한 소련은 아프간 주변의 소련 공화국들까지 혼란이 전파되기전에 무력개입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민족간의 뿌리깊은 갈등으로 반란군이 일정한 지역을 점령한 채 수십년 째 정부군과 투쟁을 벌였던 남미나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등과는 달리 아프간에서 반란은 간헐적인 것이었다. 일부 지방 부족장들이 정부의 개혁정책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경우는 있어도 체제 그 자체에 도전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일시적이었고 조직력과 상호 연계가 결여되어 있어 쉽게 진압되었다. 따라서 아민 정권이 아무리 취약했다고 해도 지방의 반란군이 카불을 점령하여 정권을 와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소련 지도부가 아민의 제거를 결정했을 때 그는 북부의 반란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만약 가만히 나두었더라면 아프간은 스스로의 역량으로 안정을 찾았을 것이며 소련을 위협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전략적으로 본다면 아프간이 지정학적으로 이란이나 인도양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과거 러시아가 아프간을 놓고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였던 것처럼 소련에게는 여전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굳이 아민 정권을 무너뜨려야만 가능한 일인가. 오히려 정권의 교체는 아프간의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으며 미국의 반발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중국이나 유고, 루마니아와 달리 아프간의 군사력은 소련군에게 맞서기에는 그야말로 형편없었지만 아프간의 가혹한 환경과 현지 주민들의 저항 의식은 자칫 소련군을 수렁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련 지도부는 리스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신들은 베트남의 수렁에 빠졌던 미국의 멍청한 정치가들과는 다르며 아프간을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정권 교체가 끝나면 신속하게 발을 뺄 것이니 상황이 장기화될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경직된 관료주의, 막연한 우월 의식, 상대에 대한 과소평가가 초래한 결과였다.
작전이 개시되기 직전인 19일 그동안 여러 차례 암살과 쿠테타의 위협을 받았던 아민은 카불에서 도시 외곽에 있는 타지벡 궁전(Tajbeg Palace)으로 은신처를 옮겼다. 카불 시내에서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타지벡 궁전은 1920년대 왕정 시절에 독일 건축 기술자들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도로 주변에는 지뢰가 깔렸고 아민에게 충성하는 400명의 국가 경비대 소속 경비병들과 대통령 경호요원들이 기관총과 박격포로 사방을 엄중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또한 다수의 방공포와 8대의 소련제 T-54 중전차까지 배치되어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만약 아민이 만의 하나에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했다면 제아무리 소련군 특수부대라도 쉽게 접근할 수 없었거나 막대한 희생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민이 은신처를 옮긴 것은 소련군 때문이 아니었기에 KGB가 시찰을 명목으로 내부 구조와 방어 실태의 조사를 요구했을 때 거리낌없이 정보를 제공하였다.
아민 제거를 위하여 KGB와 GRU, 공수부대의 혼성팀이 결성되었다. 총 660여명의 참여 병력 중에서 KGB의 대테러 부대인 알파 부대 소속의 그롬(Grom)팀 24명, 납치와 요인 암살이 주특기인 빔펠(Vympel) 소속의 제니트(Zenit)팀 30명은 소련의 여러 특수 부대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기로 이름난 특수 부대로 고도로 훈련된 최정예팀이었다. 그 외에 소련 내무군(USSR Ministry of Defence) 산하 제154 스페츠나츠 독립 대대 소속의 "무슬리만스키" 대원 520명과 제345 근위공수연대 소속의 제9중대 87명이 가세하였다. 12월 27일 오후 6시 작전 지휘관 보야리노프(Grigoriy Boyarinov) 대령은 타지백 궁전의 점령과 아민 일당의 제거를 하달받았다. 작전명은 "폭풍-333(Operation Storm-333)"
한편, 소련 군사고문단은 소련군의 진주를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카불의 주요 지휘관들을 모두 초청하여 연회를 연 후 이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무장해제시킴으로서 아프간군을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저녁 7시 30분, 카불 시내 중앙전신전화국의 폭발을 신호로 작전이 시작되었다. 소련 특수부대원들은 모두 아프간 군복을 입었다. 아프간군의 반란으로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제일 먼저 저격수들이 경비병들을 신속하게 사살하고 대전차팀은 T-54 전차를 무력화하였다. 그리고 보야리노프 대령의 지휘 아래 공수 중대와 알파, 제니트팀은 9대의 BMP 병력수송장갑차에 나눠 타고 궁전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엄호를 맡은 ZSU-23 대공장갑차가 궁전을 향하여 23mm 기관포를 퍼부었지만 그 정도로는 수비대를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방에서 기관총탄과 박격포가 쏟아지면서 BMP 몇대가 불길에 휩싸였고 6명의 대원이 죽었다. 하지만 BMP는 궁전 입구까지 진입하는데 성공하였고 특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버리고 자동소총과 수류탄을 든 채 궁전 내부로 돌입하였다. 이미 해가 진데다 전기마저 끊어지면서 건물 안은 피아 식별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들은 일일이 층과 방을 돌면서 경비병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민은 처음에 침입자들을 반란군이라고 여기고 소련군에게 지원을 요청하려 했으나 이미 외부로 통하는 모든 통신은 차단되어 있었다. 또한 침입자들이 러시아어를 사용하자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가 소련군 특수부대라는 사실을 안 수비대는 전의를 상실한 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다. 전투는 1시간만에 끝이 났다. 아민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투항하려 했으나 그롬팀 요원들에게 그 자리에서 사살당하였다. 소련 지도부는 아민을 제거하기로 하였고 굳이 살려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동유럽에서 소련에 대항하려다 체포된 지도자들의 공통된 말로이기도 하였다.
소련측의 손실은 전사 20명, 부상 30명으로 도합 50여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 KGB 소속 특수부대원의 손실은 전사 5명, 부상 10명에 불과하였는데 전사자 중에는 작전을 지휘했던 보야리노프 대령도 있었다. 아프간 측은 120여명이 사살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가 되었다. 쌍방 합하여 적어도 200여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것은 전투가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쨌거나 이 작전은 소련 특수부대 역사에서는 가장 성공적인 작전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아이러니한 일은 수비대 중에는 GRU소속의 소련군 특수부대원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아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침입자들과 싸웠는데 설마하니 상대가 같은 소련군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련 지도부는 아민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였고 이들조차 사전에 작전을 통보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다음날 아침까지 카불 시내를 점령하고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을 수장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는 대통령과 수상, 인민민주당 당수라는 세가지 직함을 혼자 독차지하였다. 이 날 카불의 라디오에서는 혁명과 정권 교체를 알리는 뉴스가 전국으로 방송되었다. 아프간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카불의 아프간 참모본부에서 짧은 충돌이 있었지만 쉽게 진압되었다. 또한 제40군 주력이 아프간의 국경을 넘어 주요 도시의 장악에 나섰다. 공중에서는 공수 부대를 태운 수송기들이 끊임없이 날아왔고 지상에서는 수백여대의 전차와 보병을 실은 트럭, 장갑차들이 고속도로를 따라서 내달렸다. 1980년 1월 말까지 아프간에 전개한 소련군은 총 4개 차량화 사단과 1개 공수 사단, 1개 독립 보병 연대, 1개 공수 저격 대대 등 전차 1800대, 장갑차 2천대, 약 8만명에 달하였다.
소련 지도부는 경제적인 부담을 고려하여 아프간에서 최소한의 병력으로 최소한의 기간 동안 주둔할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카르말은 아민보다 훨씬 무능하면서 취약하였다. 게다가 소련군의 침공은 그동안 반군에 우호적이지 않은 채 방관하던 아프간 주민들을 오히려 적으로 돌리게 하였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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