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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소련의 아프간 전쟁(3)

아민 정권의 제거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았다. 고작 몇 시간 만에 모든 상황은 정리되었다. 카불의 아프간군 참모본부를 비롯하여 정부 청사와 군 기지, 비행장, 방송국 등 주요 타겟 또한 소련군 공정부대와 특수부대에 의하여 모조리 제압되었다. 소련군은 카불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하루 밤 사이에 세상은 바뀌었다. 다음날인 12월 27일 아침 전 부수상이자 체코 대사였던 바브라크 카르말(Babrak Karmal)은 소련 대사관 직원들과 KGB의 호위를 받으며 카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모든 일이 다 정리된 뒤였다. 그는 아프간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라디오를 통하여 전국에 신정권의 수립을 알렸다. "오늘 아민과 그의 야만적인 도살자들, 우리의 수만 애국자들을 죽인 살인자들의 고문 기계는 박살났다. 폭정의 성채는 파괴되었고 돌맹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쿠테타 직후 카불 라디오를 통하여 연설 중인 카르말.

하지만 정권을 교체한 것은 카르말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카르말은 그저 소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카불을 점령하고 아민을 제거한 것도 모두 소련군 특수부대의 몫이었고 아프간 내부에서는 아무런 동조세력도 없었다. 우리로 치면 구한말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했던 을미 사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침략과 무엇이 다른가. 아무리 아민 정권이 인기가 없었다고 한들, 단 한번도 외세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고 소련의 위성국도 아니며 독립 성향이 강한 아프간 사람들이 외국군이 자국 수도를 점령한 것을 아무런 저항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소련이 아민 정권더러 무능하고 취약하여 아프간을 통치할 역량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런 아민에게 패배하여 쫓겨난 카르말은 더 무능하고 취약하다는 얘기였다.

또한 서방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체코나 헝가리 침공과는 엄연히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와 처칠, 스탈린은 밀실에서 야합하여 각지의 세력권을 정하고 서로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여기에 아프간은 포함되지 않았다. 즉, 소련은 그동안의 암묵적인 룰을 스스로 깨겠다는 얘기였다. 미국이 그저 지켜보지 않을 것은 불보듯 뻔했다. 백여년전의 "그레이트 게임"이 다시 시작될 참이었다.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의 가장 큰 실수는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했다는 것이다. 아프간은 이미 소련의 세력권이었고 미국이 뭐라고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신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권 교체이지 아프간을 병합하려는 것은 아니므로 아프간 현지인들의 저항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마음을 놓았다. 계획은 허술했고 준비도 불충분했다. 소련군 특수부대가 카불을 점령했을 때 막상 주력 부대인 제40군의 선두부대는 여전히 소련 국경에서 카불로 이어지는 해발 4천m가 넘는 살랑 패스(Salang pass)의 좁은 산길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날씨는 한겨울이었고 중앙 아시아 특유의 혹독한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꼭 37년 전 우라누스 작전에 참여했던 제40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도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결국 독일군 제6군을 격멸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그 때에는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명확한 당위성이 있었다. 지금은 자신들이 국경을 넘으면서도 누구를 상대로 무엇 때문에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앞으로 내달릴 뿐이었다. 소련군 병사들은 아프간의 자연환경이 얼마나 가혹한지 절감하면서 국경을 출발한 지 나흘만인 12월 29일에야 겨우 카불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완전히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어쨌거나 소련군은 카불을 비롯하여 주요 간선 도로를 순조롭게 장악하여 소련과의 병참선을 확보하였다. 헤라트, 칸다하르, 샤리프, 바그람, 쿤두즈 등 비교적 큰 도시와 요충지마다 병력이 배치되었다. 아프간에 전개된 병력은 제103 근위 공수사단 'Vitebsk'을 비롯하여 4개 차량화 보병사단(제5, 제58, 제108, 제201사단), 제860 독립 소총연대, 제56 독립 공수저격대대, 제36 혼성항공군단 등 약 8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모두 기계화되어 있었고 강력한 화력을 갖춘 정예 부대였다. 1300만명에 불과한 소국을 장악하기에는 충분한 것처럼 보였다.

아프간 남부의 요충지 칸다하르 비행장에 배치된 미그-17 전투기. 아프간의 주요 군 기지는 소련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은 아프간 점령이 "3~4주면 끝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오가르코프 참모총장을 비롯하여 풍부한 전쟁 경험을 가진 군인들이 제아무리 아프간의 상황이 장기화될 수 있음을 경고해도 지도부에게는 쇠귀의 경읽기였다. 냉전이 시작된 이래 '말 안 듣는 아이'를 혼내주는 것은 사회주의의 큰 형님으로서 당연한 것이었고 여지껏 실패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프간이 "소련판 베트남"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미국은 소련군의 아프간 침공이 임박했다는 정보는 입수하고 있었지만 카불과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되어 있었고 따라서 아민 정권에게 경고하지도, 소련을 견제하지도 못했다. 아프간 북부에서 활동 중인 반군과의 연결 고리 또한 없었다. 한마디로 이 시기의 미국은 아프간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1950년 6월 25일의 한반도와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때처럼 미국이 직접 개입할 여건은 아니었다. 베트남에서 겨우 철수한 상황에서 아프간에 발을 들이는 것은 정치 경제적인 부담이 클 뿐더러 소련과의 정면 대결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야 미국은 모든 수단을 다하여 소련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편,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논의하였다. 과연 아프간이 소련의 수렁이 될 것인가. 아프간 사람들의 저항 의지는 어느 정도인가. 소련의 의지는 또 어느 정도인가. 반전 여론에 발목이 잡혀서 전투에 이기고도 전쟁에 패배했던 미국과 달리 소련은 사정없이 저항을 분쇄할 수 있었다. 미국의 실패를 소련이 반드시 재현하리라는 근거는 없었다. 워싱턴 백악관에서 대소 정책을 맡고 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카터 대통령에게 소련이 미국처럼 반전 여론에 발목을 잡혀서 머뭇거릴 가능성은 없다면서 상황을 낙관해서는 안된다고 조언하였다. 대신 소련이 아프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소련의 적대국인 중국과 파키스탄을 통하여 아프간 저항세력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아프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키스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때마침 파키스탄은 인도에 대항하기 위하여 압둘 카디르 칸 박사의 주도로 비밀리에 핵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것은 엄연히 NPT(핵확산금지조약)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파키스탄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핵개발을 묵인할 것과 필요하다면 미국이 돕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동안 미국은 친미 국가인 인도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파키스탄이 핵개발을 하지 못하도록 전방위적인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1976년 8월 키신저 국무장관이 직접 부토 대통령을 방문하여 프랑스로부터 핵 재처리 시스템의 도입을 포기하라고 으름짱을 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계기로 미국의 정책은 180도 선회하였고 덕분에 파키스탄의 핵개발은 빠르게 진척되어 1998년 5월 28일 첫번째 핵실험에 성공하게 된다. 이것은 NPT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인 잣대를 보여주는 선례가 되었고 이란, 북한 등 여러 반미국가들이 미국의 제재를 무시하고 핵개발을 강행하는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었음에도 파키스탄을 통하여 농축 플로토늄과 핵기술을 비밀리에 습득하여 오늘날 한반도 긴장을 초래하였다.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같은 지구 반대편의 사건이 어떠한 나비 효과를 일으키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소련 지도부는 자신들이 상황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80년 1월 4일 카터 대통령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SALT(전략무기제한협정, 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2단계 협정의 비준을 거부하고 소련에 대한 곡물 수출을 중지하였다. 농업의 실패로 식량의 약 30%를 미국과 서방에 의존하고 있던 소련으로서는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소련과 대립각을 세우던 중국 역시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라면서 비난에 가세하였다. 1월 15일에는 UN 긴급총회에서 열렸다. 이날 열린 투표에서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찬성 104, 반대 18로 통과되었다.

물론 그 정도로 소련 지도부가 눈하나 깜짝 할 리는 없었다. 1월 17일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브레즈네프는 우스티노프를 비롯하여 아프간 침공을 주도한 사람들에게 "매우 훌륭하게 처리했다"라면서 크게 칭찬하였다. 또한 카불에 주둔한 제103 공정사단에 대해서는 철수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하달하기도 했다. 점령 초기에 현지의 저항은 거의 없었고 카르말 정권은 빠르게 자리를 잡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사가 소련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같았다. 카르말은 아민 정권 시절 구금된 수천명에 달하는 정치범들을 석방하였다. 또한 타라키와 아민 시절에 사회주의 혁명을 앞세워 혹독하게 탄압했던 이슬람에 대한 화해 제스쳐를 취하였고 부족장과 성직자들에게 몰수한 재산을 돌려주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도 보장하였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문제는 아프간 지도부 내부의 고질적인 파벌 투쟁이었다. 카르말은 정권을 잡자말자 정부와 군 내부의 대대적인 아민파 숙청에 착수하였다. 또한 정부 요직은 모두 카르말의 파르참파가 독식하였다. 이것은 아프간의 봉건적인 정치 구조에서는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다른 정파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게다가 소련군의 진주는 아프간 사람들의 민족주의 정서에 불을 붙였다. 1980년 1월 새해 벽두부터 아프간 북부의 나프린에서 아프간 제4포병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련군 진주 후 첫번째 무장 반란이었다. 즉시 카불과 바그람에서 소련군이 출동하여 반란군을 여지없이 박살내었다.  

카불 교외를 경비 중인 소련군 전차부대.

소련군은 원래 아프간에서 "방어적인" 임무만을 맡으려 하였다. 반란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는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거대한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현지인들을 위압하여 아프간의 상황을 평정하는데 충분하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르말 정권이 군부를 장악하는데 실패하고 민심을 얻지 못는 상황에서 아프간군은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존재였다. 2월 초 카불에서 카르말과 소련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시위는 곧 폭동으로 확산되었다. 소련군은 탱크를 동원하여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300명이 죽었다. 이 사건은 아프간의 민심을 극도로 악화시켜 그동안 관망하거나 친소적인 지식인, 정부 공무원, 군인들까지도 반군 측에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아프간군은 대부분 징집으로 입대한 청년들이었고 이슬람의 전통적인 문화에서 자랐기에 여전히 왕정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반면,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충성심은 거의 없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마치 괴뢰군대로 취급하면서 반군과의 싸움에 강압적으로 내모는 소련군에 반감을 품었다. 탈영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1980년 1월에 약 10만명에 달했던 군대는 6월이 되면 겨우 3만명이 남았을 정도였다. 소련군은 아프간군을 통제할 수 없었다.

소련군의 등장은 그동안 미약하기 짝이 없었던 반란의 불씨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반군은 주로 파키스탄 국경지대의 난민캠프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숫자가 적고 무장도 빈약하여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지하 운동같은 수동적인 투쟁에 매달리고 있었다. 또한 봉건적인 부족 국가라는 아프간의 특성상 연계 또한 거의 없어 여러 반군 조직들은 서로 개별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소련군은 고사하고 아프간 정부군을 상대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카불 봉기 이후 많은 사람들이 반군에 가담하면서 반란은 금새 아프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아프간 게릴라 오토바이 부대. 소련군의 침공 이후 이들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자신들에게 익숙한 산악지대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소련군에게 엄청난 출혈을 강요하게 된다.

침공 3개월 만에 소련군은 철수는 고사하고 수도 카불을 비롯한 몇몇 도시와 간선 도로만을 점과 선으로 간신히 통제할 수 있었다. 국토의 80%는 반란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당초 "3~4주면 충분하다"고 했던 소련 국방장관 우스티노프는 "아프간의 상황이 안정되려면 적어도 1년에서 1년 반이 필요하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브레즈네프 역시 "병력을 어느 정도 더 늘려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오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여전히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이미 발을 뺄 수도, 그렇다고 더 깊숙이 담굴 수도 없는 처지에서 소련은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게다가 미국 CIA는 소련을 더욱 시궁창에 깊숙이 집어넣을 생각으로 반군과의 접촉에 나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