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헬레네스(Hellenes)라고 칭하고 로마인에 의해 그라시아(Graecia)인이라고 불린 그리스인은 인도ㆍ유럽어계 인종의 한 분파이다. 그들의 조상이 원주지를 떠나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사이에 여러 차례 이동하여 현재의 그리스 반도에 도착했을 때 여기에는 이미 에게 문화를 보유한 원주민족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인의 조상은 그리스 반도의 원주민을 정복해서 지배계급의 지위를 차지했지만, 다른 한편 해상에 진출하여 에게해의 섬들을 점령하고 또 소아시아를 위시하여 지중해의 동단부터 서단에 이르기까지의 연안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들은 에게 문화의 모든 요소를 흡수함으로써 종래의 원시적 문화상태에서 벗어나 서아시아 및 북아프리카의 여러 문화에 접촉함으로써 점차로 그리스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그리스인의 조상이 그리스 반도로부터 에게해지방에 이주했을 때에는 씨족제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정주생활을 한 결과 점차 씨족제 질서가 붕괴되어 기원전 7세기부터 6세기 사이에는 다수의 폴리스(도시국가)가 도처에 형성되었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농업을 중심으로 경작 및 목축을 기본적 산업으로 하였지만, 여러 도시국가가 형성되고 상업 및 식민지 활동을 활발히 시작하게 되면서 여러 공업도 급격히 발달하였다. 이와 같은 경제생활에서의 현저한 변동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이오니아 지방에서 전해진 주조화폐의 사용이며, 이것은 신속히 그리스 여러 지방에 유통되어 사회에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씨족제 사회의 시대에서는 사회의 구성원은 대체로 평등한 지위에 있었고 전체의 농지가 추첨에 의해 모든 구성원들에게 분배되었지만 클레로스(Kleros)라고 불리는 이 분할지가 그 후 점차로 사유지화되었다. 클레로스의 소유주라는 것이 자유시민이 되기 위한 조건이었는데, 민회에 출석해서 정치적 문제의 결정에 참여하고 또 무장해서 전쟁에 참가한 것도 이 자유시민이었다. 이 시대에도 노예는 존재했지만, 주로 전쟁포로였고 그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대개 가부장제 가족에 있어서의 농업적 가내경제를 위해 사역되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 원격지와의 무역이 성행하고 그리스 제 도시의 상공업이 급속히 발달함에 따라 수공업적 작업장에서의 상품의 제조, 운수업, 광산업, 그밖에 상업에 있어서도 노예노동이 많이 이용됨에 따라 노예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노예상인이 흑해연안지방, 발칸반도 북부, 기타 여러 지방으로부터 다량의 노예를 유입한 결과 상공업이 번성한 도시에서는 노예인구가 시민인구와 대등할 정도에 이르렀다.
인종적 동질성, 언어, 전설, 종교적 신앙, 생활, 관습 등의 공통성, 상업이나 무역상의 밀접한 관계, 외적에 대한 공동방위 등의 여러 조건으로 인해 그리스인들은 민족적 통일성을 의식하게 되었지만, 각 도시는 자체의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데에만 노력하여 단일의 민족국가로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그리스 본토에 있는 그리스인이 모두 도시국가를 형성해서 생활한 것이 아니고, 기원전 4세기 말 경에도 아직 부족적 집단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지역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도시국가가 바로 고대 그리스의 일반적인 생활형태라고 할 수 있다.
폴리스의 인구는 10만을 초과하는 예는 드물었고 수천 또는 수만의 인구를 가진 것이 많았다. 언덕 위 또는 언덕가에 설치된 아크로폴리스 아래에 시가지가 있고 그 주위에 성벽을 쌓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래 폴리스는 자급자족의 경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영역은 도시적 부분만이 아니라 그 외곽에 있는 농촌적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상기한 바와 같이 도시의 내부에는 자유인인 시민 외에 다수의 노예가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 자유인인 이방인도 상당수 있었다. 다만 정식으로 혼인한 시민에게서 출생한 자에게만 시민권이 주어지고 이방인은 노예와 같이 법적 인격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도시의 거주민 중 자유시민은 특권계급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씨족제적 공동사회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았고 종교적 제사 등에서 씨족제의 유산이 남아 있었으며, 도시의 성격은 지역적 자치제를 기초로 해서 존립하는 정치사회였다. 다만 혈연적 사회질서는 전시대보다 그 중요성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도시는 동일한 혈통에 의한 시민의 공동체로서 혈연적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시민권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되었으며, 도시는 단순한 정치적 공동체가 아니라 종교와 정치가 복합된 공동체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각각의 폴리스에서는 처음에는 왕정이 행해졌으나 곧 귀족정치가 뒤따랐다. 그러나 고대의 아시아 제국과 같은 전제정치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은 처음부터 결여되어 있었고 각각의 폴리스를 통해서 민주주의적 경향을 점차 강화하고 또는 철저화하는 것과 귀족주의적 경향을 고집했던 것과의 차이는 있었다. 아테네는 전자의 전형이고 스파르타는 후자의 전형이었지만, 그리스 사회를 전체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민주정치의 점차적인 실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아테네의 정치사는 전(全)그리스 정치사의 주축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테네의 정치사를 보면 선사시대에는 왕정이 행해진 것 같지만 역사시대의 초기에는 왕정의 유제가 잔존하는 귀족정치가 행해지고 부농으로 구성된 귀족계급이 아레이오 파고스(Areios Pagos)라고 하는 합의체를 통해서 주로 중소농으로 구성된 평민계급을 지배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아티카 지방은 인접지역에 비해 상공업의 발전이 늦어 장기간 귀족정치가 유지되었지만, 기원전 7세기 후반에 화폐가 유통됨에 따라 상공업이 급격히 발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편으로는 빚을 갚지 못해 자유농민이 노예로 전락하는 자가 속출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상공업계급이 귀족의 전제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어 솔론(Solon ; 기원전 630~550 경)의 입법이나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의 개혁에 의해 민주정치가 수립되었다. 이어 페르시아에 승전한 이후 페리클레스(Perikles ; 기원전 490~429)의 시대였던 기원전 449~429년에는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절정에 달하여 모든 시민이 민회 및 중의법정을 통해 평등하게 입법 및 사법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고도의 전문적 능력을 필요로 하는 약간의 요직을 제외하고는 추첨에 의해 모든 관직, 공직에 취임하는 권리를 향유하게 되었다.
한편 페르시아 전쟁 중에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여 결성된 델로스(Delos)동맹에 의해 초래된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하여 아테네의 발전은 최고조에 도달했지만, 페리클레스의 만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어 아테네를 중심으로한 도시국(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도시군(도리아 동맹)이 27년간(기원전 431~404)에 걸쳐서 치열한 무력적ㆍ정치적 투쟁을 계속한 결과, 아테네의 국력은 현저하게 쇠퇴하여 민주정치는 황폐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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