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들어가는 말
2. 格物의 내용
1) 格物의 주체 : 心統性情
2) 格物의 대상 : 物과 理, 情
3. 致知의 내용
1) 理氣 不相離․不相雜
2) 性(情)卽理
4. 나오는 말
<국문초록>
본 논문은 주희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관한 철학적 이론을 체계적으로 설명
하고 그 철학적 특성과 의의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격물치지’란 ‘감정의
자기이해’로써 이를 통해 주체와 대상, 공(公)과 사(私), 사실과 가치가 분리되지
않은 철학적 이론이며, 서양의 인식론(epistemology)이 이에 해당되는 주제이다.
본 논문에서는 격물치지의 체계를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허령
지각(虛靈知覺)의 마음(心)은 기(氣)로 되어 있으며, 성(性)의 리(理)를 운용하
여 감정(情)을 일으키는 기능을 가진다. 이를 통해 격물치지의 주체와 대상은 情
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만물은 합리기(合理氣)이므로 이기 불상리․불상잡(理氣
不相離․不相雜)의 구조이며, 성리학의 기본 명제인 성즉리(性卽理)에서 성발
위정(性發爲情)으로 인해 정즉리(情卽理)가 가능함이 증명된다.
주희의 격물치지의 의의는 인식의 문제를 다루되 사실과 가치가 통합된다는 점
에 있다. 표상세계에서는 오감(視․廳․嗅․味․觸)이 작동하지만, ‘나’와 ‘너’가
분리된다는 오해에서 참된 자기이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감각은
‘나’라는 개인(私)이 무시되지 않으면서도, 자기에게 있는 보편성(公)을 보장해
준다. 나의 감정이 지닌 논리는 사실과 가치의 단절로 인한 소외와 괴리 현상을
치유하기 위한 대안의 모색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 격물치지(格物致知), 물(物), 감정(情), 자기이해
1. 들어가는 말
주희(朱熹, 1130~1200)에게 있어서 대학에 대한 사랑은 그의 수많은
저작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순희(淳熙) 원년(1174) 여조겸(呂祖
謙, 1137∼1181)에게 보낸 편지에, “대학장구도 함께 보냅니다. 또한 상세
히 풀이한 글이 있는데 다음에 보내겠습니다. ‘이것을 일러 앎이 지극하다’는
한 구절은 다섯 번째 장 빠진 문장의 남은 글임이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상세히 묻고 경문의 아래에 이었으니, 아마도 논란거리는 없을 것입니다.”1)
라고 한다. 순희 12년(1185) 56세의 나이에 문인 반단숙(潘端叔)에게 보낸
글에는 “금년에 여러 책들의 잘못을 수정하였는데, 대학에 고친 부분이
가장 많았다. 예전에 비해 훨씬 정밀하고 상세하지만, 장차 봤을 때 또한
어떨 런지 알지 못하겠다.”2)고 말하고 있다. 이는 주희가 45세에 대학장구
의 초고(草稿)를 완성하였고, 이후 서문과 함께 출판할 때까지 끊임없는 고민
1) 朱熹集卷36, 「答呂伯恭」: 大學章句幷往, 亦有詳說, 后便寄也. 此謂知之至也一
句, 爲五章闕文之余簡無疑, 更告詳之, 系于經文之下, 卻無說也.
2) 朱熹集卷50, 「答潘端叔」: 今年諸都書修得一過, 大学所改尤多, 比舊已極密詳,
但未知將來看得又如何耳.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11
을 통해 수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희의 대학에 대한 사랑
은 순희 16년(1189, 주희 60세) 에 출판한 대학장구에 대해 “사마광(司馬
光, 1019~1086)이 통감을 지으면서 ‘평생의 정력을 다함이 이 책에 있다’고
하였는데, 나는 대학에 또한 그러하다.”3)고 스스로 평가한다.
주희의 대학장구에 대한 많은 비판이 제기되어왔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은 바로 대학장구의 전5장, 즉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
한 부분이다. 문제가 되기 때문에 연구도 상당히 많지만, 대부분의 연구들
은 격물치지의 물(物)을 외물(外物)로 보고, 이 외물의 이치, 즉 리(理)를
깨달아 사물의 보편적인 본질과 규율인 所以然과 사회의 윤리 원칙과 규
범인 所當然을 이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4) 한편 格物致知는 자아 외부
에 있는 사물의 理를 깨닫는 일을 실천하는 것으로 보면서도 學에 있어서
또 다른 방법인 자아 외부에 있는 사물의 理를 깨닫는 일과 동시에 자아
내부, 즉 마음의 理를 자각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學에는 두 가
지 방향이 있게 되는데, 하나는 외면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내면
적인 것은 그저 理를 파악하기 위하여 마음을 고요한․주의 깊은․집중
된․공정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면적인 것으로부터 시작
하는 것으로 외면적인 것은 그저 제대로 반응하기 위하여 외부세계에서 일
어나는 일을 의식하는 문제이다.5) 이와 같은 격물치지에 대한 이해는 일종
의 唯理論적인 선험론과 인식 과정에 관한 경험론이 동시에 포함되는 것
으로 이해되며, 주체와 객체의 분리와 선험과 후험의 분리, 또한 公과 私의
분리가 전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여 두 가지
가 각자 충족되어야 학문이 가능한 구조가 된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최
근 연구에서 이성과 감정이라는 이원적 구조를 탈피하여 소위 심층 마음의
3) 大學章句序: 溫公作通鑑, 言臣平生精力, 盡在此書, 某於大學亦然.
4) 陳來, 송명성리학, 안재호 옮김, 예문서원, 1997, 262~266면.
5) Peter K. Bol, Neo-Confucianism in history, (London :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8), pp.172~174.
312 인문학연구 제50집
허령성, 즉 분별적 경계를 넘어선 영성의 영역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구조 역시 미발과 이발의 이분법적 구조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6)
격물치지는 분명히 수신(修身)의 조목 가운데 가장 처음에 자리하고 있
다. 이는 유학의 기본 개념인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바탕으로 보았을 때,
‘어떻게 하면 내가 나 자신을 돌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하
는 것이다. 즉 ‘나’라는 주체가 ‘나 자신’이라는 주체를 돌보는 것이라고 할
때, ‘나’라는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것을 ‘물’(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는 ‘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철학적 과제인 자
기 인식과도 같은 문제이다.
2. 格物의 내용
격물(格物)을 하는 데에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있다. ‘나의 앎을 이루
고자한 하는 것은 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하는데 있다.’(欲致吾之知
在卽物而窮其理也)고 하듯이 격물의 주체는 ‘내’가 될 것이고, 대상은 ‘物’
이 될 것이다. 그런데 격물의 주체가 되는 ‘나’는 心이며, 다시 말하면 ‘허령
지각’(虛靈知覺)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1) 格物의 주체 : 心統性情
주희는 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心은 사람의 몸을 주재하는 것이고, 하나이면서 둘이 아니요, 주체가 되지
객체가 되지 않으며, 사물에 명령을 내리지 사물에게 명령을 받지 않는 것이다.7)
6) 한자경, 「주희의 감정론」, 철학논집, Vol.39, 2014, 9~35면.
7) 朱熹集卷67, 「觀心說」: 夫心者, 人之所以主乎身者也, 一而不二者也, 爲主而不
爲客者也, 命物而不命于物者也.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13
즉 주희가 이해한 心은 절대 주체이다. 그래서 “무릇 천하가 모름지기 크
다고 하더라도 내 心의 體는 갖추지 않음이 없고, 사물이 모름지기 많다고
하더라도 내 心의 用은 관통하지 않음이 없다.”8)고 말한다. 따라서 주희는
“心은 사람의 지각(知覺)인데, (자기의) 몸을 주재하고 만물에 응(應)하는
것이다.”9)라고 하여 心을 외부 사물에 대해 인식하고 반응하는 주체로 본
다. 그리고 이러한 心을 허령지각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虛靈은 자체가 心의 본체이지, 내가 비게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귀와
눈의 보고 들음은 보고 들을 수 있는 까닭이 바로 그 心 때문이니, 어찌 형
상이 있겠는가? 그러나 눈과 귀가 있어서 보고 들으니 곧 형상이 있는 것과
같다. 虛靈한 心 같은 것이 어찌 사물처럼 있겠는가?”10)라고 말하였다. 즉
心은 텅 비어 있고 신령하여 사물과 같은 형체가 없다. 그러나 心은 形氣
의 감각기관을 통해 외물을 감응한다는 점에서 형태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知覺에 대해서는 “性은 단지 이 理이고 情은 그 理가 유출하여
운용된 곳이며, 心의 知覺은 곧 이 理를 갖추어 이 情을 행하는 것이다.
智로써 말하면, 옮고 그름을 아는 까닭의 理는 智이고 性이다. 옳고 그름을
알아서 옮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情이다. 이 理를 갖추어 그것이 옮고 그름
을 깨닫는 것은 心이다. 이곳의 분별은 아주 작은 차이에 불과하니 정말하게
살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공경, 마땅함과 구별, 기뻐하고 성냄, 슬퍼
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모두 情이다.”11)라고 말한다. 즉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이 知覺이라는 사려는 情과 결코 분리되지도 않으며, 서로 상충되지도 않는
8) 大學或問 : 夫天下, 雖大, 而吾心之體, 無不該, 事物, 雖多, 而吾心之用, 無不貫.
9) 朱熹集卷65 「雜著」: 心者, 人之知覺, 主於身而應事物者也.
10) 朱子語類卷5 「性理二」: 虛靈自是心之本體, 非我所能虛也. 耳目之視聽, 所以視
聽者卽其心也, 豈有形象. 然有耳目以視聽之, 則猶有形象也. 若心之虛靈, 何嘗有物.
11) 朱熹集卷55 「答潘謙之」: 性只是理, 情是流出運用處, 心之知覺卽所以具此理而
行此情者也. 以智言之, 所以知是非之理則智也, 性也. 所以知是非, 而是非之者, 情
也. 具此理而覺其爲是非者, 心也. 此處分別, 只在毫釐之間, 精以察之, 乃可見耳.
愛恭宜別, 喜怒哀樂, 皆情也.
314 인문학연구 제50집
다. 따라서 맹자(孟子)의 是非之心이 바로 이러한 知覺의 情이라는 것을
주희는 밝히고 있다. 또한 “知와 意는 모두 心에서 나온다. 知는 別識을
담당하고, 意는 營爲를 담당한다. 知는 性과 體에 가깝고, 意는 情과 用에
가깝다.”12)고 하여 心은 知와 意의 근원이 된다. 여기에서 別識은 是非를
구별하는 판단이고 營爲는 이를 바탕으로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心은 곧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생각으로서 기능을 삼는다.”13)
주희는 이 知覺의 情이 언제나 있음을 말한다. “앎은 앞서 스스로 존재
한다. 이해하려고 하자마자 곧 이 앎은 싹터서 드러난다. 만약 어둡게 전혀
향하지 않는다면, 곧 앎의 단초는 통하지 못한다. 생각하자마자 곧 이 骨子
는 투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일을 잘못했을 때, 잘못됐음을 알자마자
곧 좋은 진로를 향하게 되지만, 도리어 비로소 지식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지금 그 단초로 말미암아 그것을 지극히 추리하여 사방팔면
천 가지 만 가지를 알지 못함이 없고 조금의 막힘도 없도록 해야 한다.”14)
다시 말하면 대상을 향하지 않은 未發의 상태에도 心에는 이미 지각의 情
이 있다. 그리고 사유는 心의 주재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혹자가 ‘앎과
사유는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물음에, “(앎과 사유) 두 가지
는 단지 하나의 일이다. 앎은 손과 같고, 사유는 저 손으로 일을 하는 것이
니, 사유는 저 앎을 사용하는 것이다.”15)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心은 人心과 道心으로 구분하여 설명되기도 한다. 주희는 「中
12) 朱子語類卷15 「大學二」: 知與意皆從心出來. 知則主於別識, 意則主於營爲. 知
近性近體, 意近情近用.
13) 孟子集註 「告子上」15 : 心則能思, 而以思爲職.
14) 朱子語類卷16 「大學三」: 知先自有. 才要去理會, 便是這些知萌露. 若懵然全不
向着, 便是知之端未曾通. 才思量着, 便這箇骨子透出來. 且如做些事錯, 才知道錯,
便是向好門路, 却不是方始去理會箇知. 只是如今須着因其端而推致之, 使四方八
面, 千頭萬緖, 無有些不知, 無有毫髮窒礙.
15) 朱子語類卷17 「大學四」: 問知與思, 於人身最緊要. 曰然二者也只是一事. 知與
手相似, 思是交這手去做事也, 思所以用夫知也.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15
庸章句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心의 허령지각은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
은, 어떤 것은 形氣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고 어떤 것은 性命의 바름에서 근원하
여서 지각하는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어떤 것은 위태롭고 불안하
며, 어떤 것은 미묘하고 알기 어려울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 形氣를 갖지 않
은 사람이 없으므로 비록 上智라 하더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으며, 또한 이 性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으므로 비록 下愚라 하더라도 도심이 없을 수 없다. 두 가지
는 方寸之間에 섞여 있는데,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위태로운 것
은 더욱 위태롭고 미묘한 것은 더욱 미묘하니, 天理의 공변됨은 마침내 人欲의
사사로움을 이길 수 없다.16)
이는 心의 所從來에 따른 知覺, 즉 생각하기에 따라 心을 인심과 도심으
로 한 구분이다. 그런데 인심과 도심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다. 즉 생각하기 나름이라서 나의 心이 性命의 바름에서 나온줄 알면 인심
이더라도 도심과 다르지 않지만, 생각하기에 나의 心이 形氣의 사사로움으
로 나온 것으로 착각하게 되면 그만 인심은 도심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인
양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의 주체는 ‘나’이므로 아무
리 天理의 공변됨이라 하더라도 내가 하고자하는 주관을 이길 수 없는 것
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에 天理의 공변됨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나의
생각이 性命의 바름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안다면 나라는 사사로움, 즉 인
심이 도심이라는 말이다.
인심과 도심은 感通과도 관계가 있다. “心은 단지 動靜하고 感應하는
것일 뿐이다. 이른바 寂然不動하다가 感而遂通하는 것이 이것이다.”17) 즉
16) 中庸章句序: 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
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 是以或危殆而不安, 或微妙而
難見耳. 然人莫不有是形, 故雖上智不能無人心, 亦莫不有是性 故雖下愚不能無道
心. 二者雜於方寸之間, 而不知所以治之, 則危者愈危, 微者愈微, 而天理之公, 卒無
以勝夫人欲之私矣.
316 인문학연구 제50집
寂然不動은 모든 사람이 지니는 虛靈知覺이고, 感而遂通은 中庸에서
말하는 中節한 和와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대상에 대한 반응으
로 感情이 나타나는 것이다. “喜怒哀樂은 곧 物을 感하여 있는 것이니, 거
울 안의 그림자와 같다. 거울이 物을 비추지 않았는데 어찌 영상이 있겠는
가?”18) 心은 거울과 같고 비춰진 物의 그림자는 情에 해당한다. 사람이 物
에 대면하면, 거울이 대상을 비추는 것처럼 반응하는데, 이때의 情이 바로
感而遂通이다. “道心은 道理의 바닥을 知覺하는 것이요, 人心은 소리․
색․냄새․맛(과 같은 감각)을 知覺하는 것이다.”19) 그런데 “道心과 人心
은 본래 하나 일 뿐이다.”20)
주희는 이러한 心․性․情의 관계를 中和新說에서부터 心統性情으로
정리한다. 이것은 未發․已發과 관련되어 있는데 미발은 대상에 대한 知
覺 작용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인 性과 理를 가리키고, 이발은 대상에 대해
知覺 작용이 일어난 상태인 情을 의미한다. 그리고 心은 未發과 已發을
통괄하여 주재하는 주체이다. 주희는 장재(張載, 1020~1077)에게서 心統
性情이라는 명제를 가져와서 性卽理와 함께 자신의 사상의 기초를 성립한
다.21) 주희는 心統性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心의 전체는 맑고 텅 비어 있고 밝아서 모든 이치를 담고 있으며, 사사로운
욕심이 조금도 끼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두루 유행하여 動할 때와 靜할 때를 관통
하며, 또 모든 곳에 오며하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미발과 全體로 말하면 性이고,
이발과 妙用으로 말하면 情이다. 그러나 심통성정은 단지 渾淪하여 한 物 가운
17) 朱子語類卷65 「易一」: 心只是箇動靜感應而已. 所謂寂然不動,感而遂通者, 是也.
18) 朱子語類卷96 「程子之書二」: 喜怒哀樂乃是感物而有, 猶鏡中之影. 鏡未照物, 安
得有影.
19) 朱子語類卷78 「尙書一」: 道心是知覺得道理底, 人心是知覺得聲色臭味底.
20) 朱子語類卷78 「尙書一」: 人心․道心, 元來只是一箇.
21) 朱子語類卷5 「性理二」: 伊川, 性卽理也, 橫渠, 心統性情, 二句, 顚撲不破. (伊川
의 性卽理와 橫渠의 心統性情, 두 구절은 절대 뒤집어 깰 수 없다.)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17
데 있으니 이발과 미발을 가리켜 말한 것뿐이다. 이 性은 어디까지이고, 心은
어디까지이며, 情은 또 어디까지라고 그렇게 분명히 갈라지는 것은 아니다.22)
주희는 心이 虛靈하여 天理인 性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心은
體로써의 性과 用으로써의 情을 포함하고 있어서, 이 性․情은 미발과 이
발의 시간과 논리 안에서 구분하여 말하는 것일 뿐, 결코 다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드러난 情은 性이 아닐 수 없다. 즉 주희의 말을 들
여다보면 격물의 주체는 心인데 이것의 작용은 情으로써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지각은 곧 神이다. 그 손을 부딪치면 손이 아픔을 알고, 그 다리를
부딪치면 다리가 아픔을 안다. 이것이 곧 神이다.”23)
2) 格物의 대상 : 物과 理, 情
주희에게서 학문, 즉 앎의 궁극은 ‘격물’이다. 주희는 격물을 ‘사물에 즉하
는 것’(卽物), ‘지극한 데까지 이르는 것’(至極), ‘理를 궁구하는 것’(窮理)
등의 의미로 해석하였는데, 한편으로는 “格이란 盡이라는 뜻으로서 격물은
모름지기 사물의 이치를 窮盡하는 것이다.”24)라고 하여 格을 盡으로 해석
하기도 한다. 즉 “사물의 이치에 끝까지 이르러서 그 極處에 이르지 않음이
없고자 하는 것”25)이며, 또한 “나의 앎을 이루기 원한다면 사물에 나아가
그 理를 궁구해야 한다.”26)고 말한다. 따라서 窮理라는 것은 구체적인 사
22) 朱子語類卷5 「性理二」: 心之全體湛然虛明, 萬理具足, 無一毫私欲之間, 其流行
該遍, 貫乎動靜, 而妙用又無不在焉. 故以其未發而全體者言之, 則性也, 以其已發
而妙用者言之, 則情也. 然心統性情, 只就渾淪一物之中, 指其已發未發而爲言爾,
非是性是一箇地頭, 心是一箇地頭, 情又是一箇地頭, 如此懸隔也.
23) 朱子語類卷94 「周子之書」: 知覺便是神. 觸其手則手知痛, 觸其足則足知痛, 便
是神.
24) 朱子語類卷15 「大學二」: 格物者, 格, 盡也. 須是窮盡事物之理.
25) 大學章句經1章: 窮至事物之理, 欲其極處無不到也.
26) 大學章句傳5章: 致吾之知, 在卽物而窮其理也.
318 인문학연구 제50집
물을 떠날 수 없다는 뜻에서 卽物의 의미와 함께, 또한 窮理를 하면 반드
시 그 지극한 데까지 이른다는 의미에서의 至極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27) 즉 격물치지에 대한 연구는 바로 物의 근거와 본질에 대한 이해에
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物이란 무엇일까? “무릇 物이라 하는 것은 形器에 定體가 있는
것을 말한다.”28) “形이 있고 象이 있는 것은 모두 器이다.”29)는 말로 볼 때,
‘形器’란 形과 象을 지닌 것이고, ‘定體’란 구체적인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中이란 定體가 없이 때에 따라 존재한다.”30) “소리․색깔․모
양․형상이 있으면서 천지 사이에 가득 찬 것은 모두 物이다.”31) ‘物은 모든
현상을 의미하는 事와 같다.’는 의미를 지니는 한, 주희에게 있어서 物이란
天地 사이에 존재하여 감각 기관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事物뿐만 아니라
現像까지도 함께 일컫는다고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주희는 ‘物은 事와 같
다.’고 하여 일체의 자연 현상뿐만 아니라 도덕규범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시켜 해석한다. 그는 모든 事物과 現像이 格의 대상이 된다고 보아서,
格物이 공허하고 무용한 것을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理는
관념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32) 이미 周敦頤
의 太極圖說에서 확인된 것이지만, “太極은 단지 天地萬物의 理이다.
天地를 말하면, 天地 사이에 太極이 있고, 萬物을 말하면 萬物에 각각 太
極이 있다.”33), “사람마다 하나의 太極을 가지고 있으며, 事物 마다 하나의
太極을 갖는다.”34)고 주희는 말한다. 그런데 이 太極이 萬物에 제각기 稟受
27) 홍원식, 「程朱學의 居敬窮理說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73면.
28) 朱子語類卷94 「周子之書」: 凡言物者, 指形器有定體而言.
29) 朱熹集卷36 : 凡有形有象者, 皆器也.
30) 中庸章句第2章: 中無定體, 隨時而在.
31) 大學或問 : 凡有聲色貌象, 而盈於天地之間者, 皆物也.
32) 이강대, 주자학의 인간학적 이해, 예문서원, 2000, 148~149면.
33) 朱子語類卷1 「理氣上」: 太極只是天地萬物之理. 在天地言, 則天地中有太極, 在
萬物言, 則萬物中各有太極.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19
한 것35)을 알려는 작업이 주희의 格物致知이다.36) 즉 주희에게 있어서 理
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의 경험적 사물에 있는 실체이다.
그런데 “格物은 事物마다 그 지극한 理를 窮究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서 알 수 있듯이, 物을 格한다는 것은 대상 事物 자체에 대한 연구가 곧
각각의 事物이 그러한 모습을 가지도록 규정한 근거, 즉 사물의 존재 근거
인 理에 대한 이해이다. 그런데 이 理란 별도로 있는 다른 사물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기에37) “사람은 모름지기 이 사물을 몸소 省察하여
성실하게 나에게 있게 하면 된다.”38)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미 갖추
어져 있는 理는 무엇일까? 주희는 격물치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34) 朱子語類卷94 「周子之書」: 人人有一太極, 物物有一太極.
35) 朱子語類卷94 「周子之書」: 本只是一太極, 而萬物各有稟受, 又自各全具一太極
爾. 如月在天, 只一而已, 及散在江湖, 則隨處而見, 不可謂月已分也.(본래 단지 하나
의 太極이다. 그런데 萬物이 제각기 稟受한 것이 있으니 또 가자가 전부 하나의 太極
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마치 하늘에 있는 달은 단지 하나일 뿐이지만, 그것이 강과 호수
에 흩어져 있어 가는 곳마다 보이는 것과 같다. 달을 나뉘어졌다고 일컬을 수는 없는
것이다.)
36) 朱子語類卷23 「論語五」: 知事物當然之理矣. 然此事此物當然之理, 必有所從
來. 知天命, 是知其所從來也.
37) 맹자는 “萬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孟子 「盡心上」4章)라고 말한다.
즉 나에게는 萬物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돌아보아서 성실
하면 이보다 큰 즐거움이 없다. 이에 대해서 주희는 이렇게 말한다. “此, 言理之本然也.
大則君臣父子, 小則事物細微. 其當然之理無一不具於性分之內也. 誠實也 言反諸
身而所備之理, 皆如惡惡臭, 好好色之實然, 則其行之不待勉強而無不利矣. 其爲樂,
孰大於是.”(이는 理의 本然을 말한 것이다. 크게는 君臣사이와 父子사이요 작게는 事物
의 細微한 것이 그 當然한 理致가 한 가지도 性分의 안에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誠은 성실함이다. 자기 몸에 돌이켜 갖추어져 있는 바의 理가 다 惡臭를 싫어하고
好色을 좋아하는 실제와 같이 그러하다면, 그 행함이 억지로 힘쓰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을 말한 것이다. 그 즐거움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朱子語類卷14 「大學一」: 蓋人心至靈, 有什麽事不知, 有什麽事不曉, 有什麽道
理不具在這裏.(사람의 心은 지극히 靈明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모든 도리가 그 안에 다 구비되어 있다.)
38) 朱子語類卷9 「學三」: 人須是體察得此物誠實在我, 方可.
320 인문학연구 제50집
心이란 사람의 神明이므로, 衆理를 갖추어서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 性은 心
에 갖추어져 있는 理이며, 天은 또 理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 心은 전체가 아님이 없으나, 理를 궁구하지 않으면 가리어지는 바가 있
어서 이 心의 헤아림을 다하지 못한다. 그 心의 전체를 지극히 하여 다하지 않음
이 없는 자는 반드시 理를 궁구하여 알지 못함이 없는 자이니, 이미 理를 알았다
면, 그 나오는 것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학의 순서로써 말하
면, 知性이 곧 格物을 이르는 것이고, 盡心이 곧 致知를 이르는 것이다.39)
性을 안 뒤에 능히 그 心을 다할 수 있다. 먼저 안 뒤에 능히 다할 수 있다.
아직 먼저 다한 뒤에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대개 먼저 안 뒤에 다함을
볼 수 있다.40)
다시 말하면 性은 體이고, 心은 用이다. 또한 格物致知에서는 안과 밖의
구분이 사라진다.41) 즉 心 속의 理와 외계 事物의 理는 본래 하나인 것이
다. 이렇게 안과 밖의 理가 합쳐지지 않은 적이 없으니 “스스로 事物의 理
가 이러하다는 것을 알아 理의 자연스러움에 근거하여 응한다면 안팎의 理
가 합해짐을 볼 수 있다.”42)는 것이다. 주희는 계속해서 말한다. “格物은
39) 孟子集註 「盡心上」1章: 心者人之神明, 所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性則心之所
具之理, 而天又理之所從以出者也. 人有是心, 莫非全體, 然不窮理, 則有所蔽而無
以盡乎此心之量. 故能極其心之全體而無不盡者, 必其能窮夫理而無不知者也, 旣
知其理, 則其所從出, 亦不外是矣. 以大學之序言之, 知性則物格之謂, 盡心則知至
之謂也.
40) 朱子語類卷60 「孟子十」: 知性, 然後能盡心. 先知, 然後能盡. 未有先盡而後方能
知者. 蓋先知得, 然後見得盡.
41) 그런데 주희에게서 心은 物이지만, 心과 物을 구별하기도 한다. 주희는 “感於物者,
心也.”(朱熹集卷32「問張敬夫」, 物에서 감응하는 것은 心이다.)라고 하였고, “大其
心, 則能體天下之物.”(朱子語類卷98 「張子之書一」, 心이 物에서 감응하는 한 心
과 物은 主客의 구별이 있다. 그 心을 확대하면 천하의 모든 物을 체득할 수 있다.)이라
고 하였는데, 이 말은 心이 外物과 함께 物이라고하는 類가 같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서로 알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42) 朱子語類卷15 「大學二」: 自家知得物之理如此, 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 便見合
內外之理.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21
모름지기 자기에게 절실한 곳으로부터 이해해 가야 한다. 자기의 것이 이미
확정되기를 기다린 연후에 점차적으로 미루어 나가는 것이 능히 格物하는
것이다.”43) 또한 “배우는 자는 반드시 먼저 달통한 사람의 말에 의지하여
성인의 뜻을 구하고, 성인의 뜻에 의지하여 天地의 理에 달통해야 한다. 얕
은 데서부터 깊은 데로 구하고 가까운 데서 먼 곳으로 이루기를 순수에 따
라서 해야지, 빨리 이르려는 급한 마음으로 구해서는 안 된다.”44) 그렇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吾之知로부터 시작을 할 때, 가장 잘 알고 있는 天
理는 性인데 그 性이 發한 것이 바로 情이니, 이미 알고 있는 나의 앎(吾之
知)은 情이 된다. 다시 말하면 格物의 物은 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情은 理의 이발이므로 能然, 必然, 當然, 自然이다.45) 먼저 能然에 대해
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어, 惻隱함은 氣이고 惻隱함이 될 수 있는
까닭은 理이다. 안에 이 理가 있은 이후에 밖으로 드러나서 이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밖으로 이 일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이 理가 없는 것이
다. 이것이 能然處이다.”46) 즉 惻隱之心이라는 四端의 情이 일어나는 까
닭은 心에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원리인 仁이라는 性이 있기 때문이다.
“또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갈 때 그것을 본 자는 반드시 惻隱
해 할 것이다. 사람의 心은 살아있는 것이고, 그 感應의 원리는 반드시 이
와 같아서 비록 참으려 해도 그 안에서 두려워함은 자연히 그칠 수 없는
43) 朱子語類卷15 「大學二」: 格物須是從切己處理會去, 待自家者已定疊, 然後漸漸
推去, 這便是能格物.
44) 朱熹集卷42 「答石子重」: 學者,必因先達之言以求聖人之意, 因聖人之意以達天
地之理, 求之自淺以及深, 至之自近以及遠, 循循有序, 而不可以欲速迫切之心求也.
45) 理를 能然, 必然, 當然, 自然으로 설명하는 것은 진순(陳淳, 1153~1217)이다. 朱熹
集卷57 「答陳安卿」에서 “理有能然, 有必然, 有當然, 有自然處. 皆須兼之, 方於理
字訓義爲備否.”(理에는 能然, 必然, 當然, 自然이 있으니, 모두 겸해야만 비로소 理자
의 의미가 갖추어지는 것은 아닙니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진순은 이에 대해 스스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주희의 견해에 의거한 것이다.
46) 朱熹集卷57 「答陳安卿」: 如惻隱者氣也, 其所以能是惻隱者理也. 蓋在中有是理,
然后能形諸外爲是事, 外不能爲是事, 則是其中無是理矣. 此能然處也.
322 인문학연구 제50집
것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마른나무와 타버린 재이니, 理는 때때로 멈
추게 될 것이다. 이것이 必然處이다.”47) 사람은 感應의 원리에 의해서 어
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놀랍고 두려워하는 情이 생긴다. 이것
은 情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즉 必然을 규명한 것이다. “또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우물에 들어갈 때 마땅히 그를 측은히 여겨야 한다. 인간이 사람들
과 상대하는 이치는 이러해야 하니, 그러므로 이렇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되
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天理에 어긋나고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當然處이다.”48) 이는 한 사람의 情이 결코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상대하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므로 보편성을 띄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물에 빠짐을 측은해 하는 까닭은 모두 天理됨이 流
行하고 發見하여 자연히 그러한 것이지 조금의 人爲도 그 사이에 간여한
것이 아니니, 이는 自然處이다.”49) 다시 말하면 惻隱之心이라는 情은 天
理의 자연스러운 發見이다. 孟子 역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禽獸와 다
른 것이 얼마 안 되니, 庶民들은 이것을 버리고 君子는 이것을 보존한다.
舜임금은 여러 사물의 이치에 밝으시며 人倫에 특히 상세하셨으니, 仁義
로 말미암아 행하신 것이요 仁義를 행하신 것이 아니시다.”50) 이미 우리에
게 仁이라는 性이 있으니 이것의 자연스레 發하여 惻隱之心의 情이 나오
는 것은 舜임금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自然스러울 뿐이다.
47) 朱熹集卷57 「答陳安卿」: 又如赤子之入井, 見之者必惻隱. 蓋人心是個活底, 然
其感應之理必如是, 雖欲忍之, 而其中惕然自有所不能以已也. 不然, 則是槁木死灰,
理爲有時而息矣. 此必然處也.
48) 朱熹集卷57 「答陳安卿」: 又如赤子入井, 則合當爲之惻隱. 蓋人與人類, 其待之
理當如此而不容以不如此也. 不然, 則是爲悖天理而非人類矣. 此當然處也.
49) 朱熹集卷57 「答陳安卿」: 又如所以入井而惻隱者, 皆天理之眞, 流行發見, 自然
而然, 非有一毫人爲預乎其間, 此自然處也.
50) 孟子 「離婁下」19 : 人之所以異於禽獸者, 幾希, 庶民去之, 君子存之. 舜明於庶
物, 察於人倫, 由仁義行, 非行仁義也.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23
주희에게 있어서 격물의 주체와 대상은 心統性情의 명제를 통하여 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나의 앎51)이 情인데 이 情은 쉬지 않고
늘 發하기 때문에 이 情이 情을 格하는 것이 바로 格物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온전히 아는 것이 致知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늘 부딪히는 문제는 情이 과연
理를 담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와 情이 發할 때에 理를 온전히 드러내는가에 대한
것이다. 과연 情이면 되는지에 대한 논의는 致知를 다루면서 보도록 하겠다.
3. 致知의 내용
情에 대한 논란은 理氣論의 이해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보통 理에 대
해서는 “그 理로 말하면 萬物의 根源은 하나이므로 본래 人物 貴賤의 차
이가 없다.”52)고 하여 완전성․통일성으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氣는 “그
51) 朱子語類卷15 「大學二」: 物莫不有理, 人莫不有知. 如孩提之童, 知愛其親, 及其
長也, 知敬其兄, 以至於飢則知求食, 渴則知求飮, 是莫不有知也. 但所知者止於大
略, 而不能推致其知以至於極耳. 致之爲義, 如以手推送去之義. 凡經傳中云致者,
其義皆如此.(物에는 理가 있지 않음이 없고, 사람에게는 知가 있지 않음이 없다. 예컨
대 어린아이는 그 父母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자라서는 그 兄을 恭敬하는 것을 알며
굶주리면 먹기를 구할 줄 알고 목마르면 마시기를 구할 줄 아니 이는 知가 있지 않음이
없다. 다만 알고 있는 것이 대략적인데 그쳐서, 그 앎을 미루어 窮極에까지 이를 수 없
을 뿐이다. 致한다는 것의 뜻은 손으로 밀어서 보낸다는 뜻과 같다. 經과 傳 중에서
致라고 한 것은 그 뜻이 모두 이와 같다.)
朱子語類卷15 「大學二」: 知者, 吾自有此知. 此心虛明廣大, 無所不知, 要當極
其至耳. 今學者豈無一斑半點, 只是爲利欲所昏, 不曾致其知. 孟子所謂四端, 此四
者在人心, 發見於外. 吾友還曾平日的見其有此心, 須是見得分明, 則知可致. 今有
此心而不能致, 臨事則昏惑, 有事則膠擾, 百種病根皆自此生.(知라는 것은 나에게 스
스로 이 知가 있다. 이 心은 虛明하고 廣大하여 알지 못하는 바가 없으니, 다만 마땅히
그 지극한 데까지 極處까지 이르러야 할 뿐이다. 지금 배우는 자가 어찌 더러운 얼룩이
없겠는가만, 다만 利欲에 의해 어두워져서, 일찍이 그 앎을 미루어 넓히지 못한 것일
뿐이다. 孟子의 이른바 四端, 이 네 가지는 사람의 心에 있으며, 밖으로 發見한다. 너희
들이 또한 일찍이 平日에 이 心이 있음을 과녁에 맞듯이 제대로 보아서, 모름지기 分明
하게 깨닫는다면, 知가 지극해 질 수 있다. 이제 이 心이 있으나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일에 임하면 어둡고 미혹되며, 일에 있으면 어지러운 것이니, 백가지 병의 근원이 모두
이것으로부터 생긴다.)
324 인문학연구 제50집
通에 있어도 혹 淸․濁이 다르지 않을 수 없고, 그 올바름에 있어도 혹
美․惡이 다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품부 받은 바의 質이 맑은 것은 智
이고 탁한 것은 愚이며, 아름다운 것은 賢이고 나쁜 것은 不肖이므로 같을
수 없다.”53)고 하여 아무리 올바름을 받는다 하더라도 잘못될 가능성을 가
진 것으로 보게 된다. 또한 性에 대해서도 理氣論을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므로, 이것이 정리가 된
다면 致知와 情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1) 理氣 不相離․不相雜
理와 氣, 즉 本과 具는 항상 서로 결합되어 하나의 사물을 이루는 관계
이다. 理는 形而上者로서 형체도 없고 작위도 없지만(無形無爲), 氣는 形
而下者로서 형체도 있고 작위도 있다(有形有爲). 氣의 有形有爲는 결국
無形無爲한 理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또 本과 具는 事實的으로 서로 결합
되어 하나의 사물을 이루는 것이기에, 同時共存하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
이다(理氣不相離). 그러나 論理的으로는 形而上者와 形而下者가 구분되
는 것이며, 形而上者가 形而下者의 根據이기 때문에 形而上者가 우선한
다고 말할 수 있다(理氣不相雜).54)
주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氣는 능히 凝結造作하지만 理는 情意도
없고 造作도 없다. 다만 이 氣가 凝聚하는 곳에 理가 문득 그 가운데 있다.
… 理는 다만 淨潔空闊한 세계에서 形迹이 없으며, 造作하지 못한다. 氣는
능히 醞釀凝聚하여 物을 낳는다. 다만 이 氣가 있으면 理가 문득 그 안에
있다.”55) 다시 말하면 理는 형체도 없고 작위도 없으나 氣는 형체도 있고
52) 大學或問 : 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53) 大學或問 : 然其通也, 或不能無清濁之異, 其正也, 或不能無美惡之殊, 故其所賦
之質, 清者智而濁者愚, 美者賢而惡者不肖, 又有不能同者.
54) 이상익, 朱子學의 길, 심산, 2007, 68~69면.
55) 朱子語類卷1「理氣上」: 蓋氣則能凝結造作, 理卻無情意, 無計度, 無造作. 只此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25
작위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理는 有形한 氣가 운동 변화하는 가운데에 內
在함을 강조한다. “理는 또한 별도의 一物이 아니라, 氣 가운데 있는 것이
다. 이 氣가 없으면 理는 또한 掛塔處가 없다.”56) 또한 “천하에는 理 없는
氣도 없고, 氣 없는 理도 없다.”57) 心의 知覺을 말할 때도 주희는 心의 合理
氣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知覺은 본래부터 心의 기능인가 아니면 氣의
작용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氣의 작용만은 아니다. 최초
에 知覺의 理가 존재하지만 理만으로는 知覺할 수 없다. 氣가 모여서 形體
를 이루고 理와 氣가 합쳐져야 知覺할 수 있다.”58) 또한 知覺이 心의 신령
함이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氣가 그런 것인지에 대해 묻자, “오로지 氣만
이 아니라, 먼저 知覺의 理가 있다. 理는 知覺할 수 없지만, 氣가 모여서
形象을 이루고, 理와 氣가 합해지면 곧 知覺할 수 있다. 비유하면 이 등잔불
은 이 기름이 있는 것으로 인하여 곧 밝은 불꽃이 생기는 것이다.”59)고 대답
한다. 즉 知覺은 心의 기능으로써, 心에서 理와 氣는 떨어질 수 없는데, 이
렇게 理가 氣에 內在한다는 것을 ‘理氣不相離’이라고 한다.
이렇게 理와 氣는 사실상 서로 분리될 수 없는 一體이다. 그러나 理는
形而上者이고 氣는 形而下者로서 서로 섞일 수 없다. “이 氣가 있지 않을
때에도 이미 이 性은 존재하며, 氣가 없어져도 性은 도리어 항상 존재한다.
비록 性이 모름지기 氣 가운데 있더라도, 그러나 氣는 스스로 氣이고 性은
氣凝聚處, 理便在其中. …… 若理則只是箇淨潔空闊底世界, 無形跡, 他卻不會造作,
氣則能醞釀凝聚生物也. 但有此氣, 則理便在其中.
56) 朱子語類卷1 「理氣上」: 理又非別爲一物, 卽存乎是氣之中, 無是氣, 則是理亦無
掛搭處.
57) 朱子語類卷1 「理氣上」: 天下未有無理之氣, 亦未有無氣之理.
58) 朱子語類卷5 「性理二」: 問知覺是心之靈固如此, 抑氣之爲邪. 曰不專是氣, 是先
有知覺之理. 理未知覺, 氣聚成形, 理與氣合, 便能知覺.
59) 朱子語類卷5 「性理二」: 問知覺是心之靈固如此, 抑氣之爲邪. 曰不專是氣, 是
先有知覺之理. 理未知覺, 氣聚成形, 理與氣合, 便能知覺. 譬如這燭火, 是因得
這脂膏, 便有許多光燄.
326 인문학연구 제50집
스스로 性이어서, 또한 서로 挾雜하지 않는다.”60) 또한 “이른바 理와 氣는
결단코 二物이다. 다만 物에 있어 본다면 理와 氣가 섞여있어, 각각 한 곳
에 있는 것으로 分開할 수 없다. 그러나 理氣가 각각 一物이 됨을 방해하
지 않는다. 만약 理에 있어 본다면 비록 사물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
라도 사물의 理는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또한 그 사물의 理가 존재할 뿐이
요, 일찍이 실제로 이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무릇 이러한 것들을
살필 때에는 모름지기 시종일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니, 그래야만 착오가
없게 된다.”61) 이는 理와 氣의 관계가 因果 관계이기 때문에 원인을 가지
고 결과를 아는 것이지,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아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
이다.62) 이것을 ‘理氣不相雜’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희는 格物과 致知에 대해서도 별개가 아니라고 말한다. “格
物은 하나의 物에 나아가 그 物의 理를 완전하게 궁구하는 것이고, 致知는
物의 理를 다 窮究한 후에 나의 앎도 완전해지지 않은 곳이 없게 되는 것
이니, 이 앎을 미루어 그것을 지극히 하는 것과 같다. 그 문장의 의미는 이
60) 朱熹集卷46 「答劉叔文」: 未有此氣, 已有此性, 氣有不存, 性卻常在, 雖其方在氣
中, 然氣自氣, 性自性, 亦自不相夾雜.
61) 朱熹集卷46 「答劉叔文」: 所謂理與氣此決是二物, 但在物上看, 則二物渾淪, 不
可分開各在一處, 然不害二物之各爲一物也. 若在理上看, 則雖未有物, 而已有物之
理, 然亦但有其理而已, 未嘗實有是物也. 大凡看此等處, 須認得分明, 又兼始終, 方
是不錯.
62) 이러한 因果관계로서 理氣의 先後를 말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朱子語類卷1 「理氣上」: 問先有理, 抑先有氣. 曰理未嘗離乎氣. 然理形而上者,
氣形而下者. 自形而上下言, 豈無先後.(묻기를, “理가 먼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氣
가 먼저 있는 것입니까?” 답하기를, “理는 일찍이 氣와 分離 된 것이 없다. 그러나 理는
形而上者이고 氣는 形而下者이니, 形而上․形而下의 관점에서 말하면 어지 先後가
없겠는가?”)
朱子語類卷1 「理氣上」: 或問 必有是理, 然後有是氣, 如何. 曰此本無先後之可
言. 然必欲推其所從來, 則須說先有是理.(혹자가 묻기를, “반드시 먼저 이 理가 있고
난 다음에 이 氣가 있는 것입니까?” 대답하기를, “이것은 본래 先後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 所從來를 推論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이 理가 있다.’
고 말해야 한다.”)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27
와 같을 뿐이다. 그런 사실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곧 바로 이에 의거해서
힘쓰기 바란다. 다만 格物을 잘 할 수만 있다면, 앎은 저절로 지극해질 것
이니, 별개의 일이 아니다.”63) 다시 말하면 致知는 格物에 있다는 말로, 物
의 理를 완전히 궁구하면 나의 知가 완전해진다는 이 설명 속에도 이미 物
은 理氣의 合이기에 理氣不相離인데, 知는 理에 대한 앎이므로 理氣不相
雜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앎의 문제는 人間의 문제이기에
理氣論을 확장하여 性情論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2) 性(情)卽理
주희가 “性은 太極과 같고, 心은 陰陽과 같다.”64)고 하였듯이, 주자학에
있어 기본적으로 性은 理이고, 心은 氣이다. 따라서 주희의 心性論은 理氣
論의 연장선 위에 있다. 中庸에서 “하늘이 命한 것을 性이라 이른다.”65)
고 하였고, 孟子는 本性의 구체적인 내용을 仁義禮智로 설명하며 性善을
주장한다.66) 정이(程頤, 1033~1107)는 이 두 내용을 종합하여 ‘性卽理’라
63) 朱熹集卷51 「答黃子耕」: 格物只是就一物上窮盡一物之理, 致知便只是窮得物
理盡后, 我之知識亦無不盡處, 若推此知識而致之也. 此其文義只是如此, 才認得定,
便請依此用功. 但能格物, 則知自至, 不是別一事也.
64) 朱子語類卷5 「性理二」: 性猶太極也, 心猶陰陽也.
65) 中庸經1章: 天命之謂性.
66) 孟子 「告子上」6 : 公都子曰, 告子曰, 性無善無不善也. 或曰性可以爲善, 可以爲
不善, 是故文武興則民好善, 幽厲興則民, 好暴. 或曰有性善, 有性不善, 是故以堯爲
君而有象, 以瞽瞍爲父而有舜, 以紂爲兄之子, 且以爲君而有微子啓王子比干. 今曰
性善, 然則彼皆非與. 孟子曰, 乃若其情則可以爲善矣, 乃所謂善也. 若夫爲不善, 非
才之罪也. 惻隱之心, 人皆有之, 羞惡之心, 人皆有之, 恭敬之心, 人皆有之, 是非之
心, 人皆有之. 惻隱之心仁也, 羞惡之心義也, 恭敬之心禮也, 是非之心智也, 仁義禮
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故曰求則得之, 舍則失之, 或相倍蓰而無
算者, 不能盡其才者也. 詩曰天生蒸民, 有物有則, 民之秉夷, 好是懿德. 孔子曰, 爲
此詩者, 其知道乎. 故有物必有則, 民之秉夷也. 故好是懿德.(公都子가 말하기를 告
子는 性은 善함도 없고 不善함도 없다하고, 혹자는 性은 善할 수도 있고, 不善할 수도
있으니 그러므로 文王과 武王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善을 좋아하고 幽와 厲가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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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규정한다.67) 주희는 정이의 性卽理를 本性論으로 삼고, 仁義禮智를 本
性의 내용으로 한다. 즉 性卽理라는 것은 인간 또는 만물은 모두 理를 자
신의 本性으로 지니고 태어났다는 말이다.68) 이를 중용에서는 “天命之
謂性”이라고 했는데, 주희는 “天이 陰陽五行으로 만물을 化生함에, 氣로
써 형체를 이루고 理 또한 부여하였으니, 명령한 것과 같다. 이에 인간과
만물이 태어남에 각각 부여받은 理에 따라 健順과 五常의 德을 삼으니, 이
른바 性이다.”69)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세계에서 만물은 陰陽
면 백성들이 포악함을 좋아한다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性이 善한 이도 있고 性이 不善
한 이도 있으니 그러므로 堯를 군주로 삼았는데도 象이 있었으며, 瞽瞍를 아비로 삼았
는데도 舜 임금이 있었으며 紂를 형의 아들로 삼고 또 군주로 삼았는데도 微子 啓와
王子 比干이 있었다고 하니, 지금 性이 善하다고 말씀하시니 그렇다면 저들은 모두
틀린 것입니까? 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情으로 말하면 善하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
이 내가 말하는 善하다는 것이다. 不善을 하는 것으로 말하면 타고난 才質의 罪가 아니
다. 惻隱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羞惡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恭敬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是非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니, 惻隱
之心은 仁이요, 羞惡之心은 義요, 恭敬之心은 禮요, 是非之心은 智이니, 仁義禮智가
밖으로부터 나를 녹여 들어오는 것이 아니요, 내가 본래 소유하고 있건만 사람들이 생각
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구하고 얻고 버리면 잃는다라고 한 것이니 혹은
(善惡의) 차이가 서로 배가 되고 다섯 배가 되어서 계산 할 수 없는 것은 그 才質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여러 백성을 내시니 事物이 있으면
法이 있도다. 사람들이 마음에 떳떳한 本性을 가지고 있는지라. 이 아름다운 德을 좋아
한다. 孔子께서 이르시기를, 이 詩를 지은 자는 그 道를 알 것이다. 그러므로 事物이
있으면 반드시 그 法이 있으니 백성들이 떳떳한 本性을 가지고 있는지라 이 때문에
이 아름다운 德을 좋아한다 하셨다.)
67) 二程遺書卷22 : 性卽理也, 所謂理, 性是也. 天下之理, 原其所自, 未有不善. 喜怒
哀樂未發, 何嘗不善. 發而中節, 則無往而不善. 凡言善惡, 皆先善而後惡, 言吉凶,
皆先吉而後凶, 言是非, 皆先是而後非.(性은 곧 理이다. 소위 理는 性 이것이라는 것
이다. 天下의 理는 스스로인 바를 근원할 때, 不善함이 있지 않다. 喜怒哀樂의 情이
발하지 않을 때, 어찌 不善이 있겠는가? 발하여서 중절하면 不善함에 가지 않는 것이
다. 무릇 善惡을 말함에 모두 먼저 善이 있은 이후에 惡이 있고, 吉凶을 말함에, 모두
먼저 吉함이 있은 이후에 凶함이 있는 것이다.)
68) 이것은 周敦頤의 太極圖說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69) 中庸章句1 : 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 而理亦賦焉, 猶命令也. 於是人
物之生, 因各得, 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29
五行으로 형체를 이루고, 또한 동시에 健順五常이라는 本性을 지니게 되
는데, ‘本性을 지니게 됨’을 天命으로 설명한 것이다.
주희는 이러한 本性에 대한 논의는 心 혹은 氣質에 대한 논의와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性은 다만 理일 뿐이다. 그러나 저 天地의 氣質이 없다면 이 理는 安頓處가
없게 된다. 淸明한 氣質을 얻으면, (理를) 가리거나 가두지 않아, 이 理가 순조
롭게 발현된다. 가리고 가둠이 적은 경우에는 발할 때에 天理가 이기고, 가리고
가둠이 많으면 私欲이 이긴다. 이로써 本原의 性은 純善하다는 것을 알 수 있
는데, 孟子가 말한 性善이나, 周子가 말한 純粹至善, 그리고 程子가 性의 근원
이 反本窮源의 性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만 氣質의 昏濁으로 인해 (本
然之性이) 가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氣質之性은 君子가 性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학문을 통해 본원으로 돌이킨다면 天地之性이 보존된다. 그러므로 性
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氣質과 함께 논해야 바야흐로 갖추어지는 것이다.70)
性을 말할 때 반드시 氣質을 고려해야 하는 까닭은 理氣 不相離․不相
雜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문제 되는 것은 性이 氣質에 가려서 發하여
情이 될 때에는 天理로 드러날 수도 있고, 私欲으로 드러날 수 있는 두 가
지 가능성을 갖게 된다. 그 말은 氣質에는 淸明한 氣質과 昏濁한 氣質,
이렇게 두 가지가 있어서 稟受받은 氣質의 차이로 말미암아 本然之性은
온데간데없고, 단지 氣質之性만이 존재하는 꼴이 된다. 주희는 이런 오해
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稟受받은 氣質에는 비록 不善이 있으
나, 性의 본래 善함을 해치지 않는다. 性은 비록 오직 善하니 (氣質을) 省
察하고 바로잡는 노력이 없을 수 없다.”71) “性을 논하고 氣를 논하지 않으
70) 朱子語類卷4 「性理一」: 性只是理. 然無那天氣地質, 則此理沒安頓處. 但得氣之
淸明則不蔽錮, 此理順發出來. 蔽錮少者, 發出來天理勝, 蔽錮多者, 則私欲勝, 便見
得本原之性無有不善. 孟子所謂性善, 周子所謂純粹至善, 程子所謂性之本, 與夫反
本窮源之性, 是也. 只被氣質有昏濁, 則隔了. 故氣質之性, 君子有弗性者焉. 學以反
之, 則天地之性存矣. 故說性, 須兼氣質說方備.
330 인문학연구 제50집
면 타고난 氣質의 차이를 알 수 없으며, 氣를 논하고 性을 논하지 않으면
義理의 같음을 알 수 없다.”72) “本然之性은 다만 至善하나, 氣質을 함께
논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昏明開塞과 剛柔强弱이 있음을 알 수 없기 때
문에 不備한 것이다. 한갓 氣質之性만을 논하고 本原으로부터 살피지 않
는다면, 비록 昏明開塞과 剛柔强弱의 차이가 있음을 알더라도 至善의 근
원은 일찍이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不明한 것이다.”73) 本然之
性은 만물이 같고 純善하나, 氣質之性은 만물이 마냥 다르고, 善惡이 있
다. 그런데 氣質之性이 만물이 서로 다르고 善惡이 있는 것은 本性 때문
이 아니라 氣質로 인함이다. 그런데 여기서 善惡을 말하는 것은 善한 것과
惡한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좋게 여겨서 善하다고 하는 것과 싫게 여겨
서 惡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因果에 의해 理가 純善한데 氣가 나쁠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氣質을 배제하고 性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해서
本性이 氣質의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 즉
현상계에서 善惡의 구별이 필요할 때에는 이것의 所從來가 理인지 氣質
인지의 구별이 중요하고, 이러한 구별을 하는 것이 바로 學問이다. 또한 이
學問을 통해 아는 것을 주희는 致知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本性이란
본디 善하기에, 理致를 따라 행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그 앎이
지극하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로 이를 하려고하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고생
으로 느끼게 되고 따라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게 된다. 앎이 지극하면 이치
를 따라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이치에 따르지 않으면 즐거움을 느끼지 못
할 것이다.”74) 다시 말하면 性卽理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인간의 本性은 善
71) 孟子集註 「告子上」6 : 蓋氣質所禀, 雖有不善, 而不害性之本善. 性雖本善. 而不
可以無省察矯揉之功.
72) 孟子集註大全 「告子上」6 : 論性不論氣, 則無以見其生質之理. 論氣不論性, 則無
以見義理之同.
73) 孟子集註大全 「告子上」6 : 本然之性, 只是至善, 然不以氣質論之, 則莫知其有昏
明開塞剛柔强弱, 故有所不備, 徒論氣質之性, 而不自本原言之, 則雖知有昏明開塞
剛柔强弱之不同, 而不知至善之原, 未嘗有異, 故有所不明.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31
하므로 本性대로 살 때는, 즉 致知로써 생활 할 때(中節)에는 즐거움의 情
(和, 心統性情)을 느낄 수 있으나, 致知가 아닌 상태에서는(不中節) 즐거
움의 情은 사라지고 만다(不和, 心不統性情).
4. 나오는 말
본 논고는 인류에게 의식을 하고, 또 말을 하면서 발생한,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세상에 ‘나’라는 하나의 존재만이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지만, ‘감각’을 통해 보이는 ‘나’와 다른 ‘너’가 있고,
또 ‘나’와 ‘너’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기에 발생되는 ‘싫은 것’을 어떻게 보아
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해결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감각’ 제거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의 감각(視․
廳․嗅․味․觸)이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다섯 가지 감각이 없다하
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감각이 있다. 그것이 바로 情이다. 두 번째는 ‘싫은
너’ 혹은 ‘싫은 세상’을 없애는 것이다.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내가 안 보면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너를 안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
나 역시 문제는 있다. ‘감각’과 같은 이유로,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역시 情에
는 그 ‘너’ 혹은 ‘세상’이 남아 있다. 또한 안보이게 없애는 여러 방법을 내가
정말 ‘싫어’하는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 없애는 방법을 내가 ‘싫어’
한다면 나 역시 내가 ‘싫어’하는 그 무엇과 같은 ‘싫은’ 존재가 되며 ‘나’ 역시
없앨 존재가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본 논고를 통해 ‘나’와 ‘너’,
그리고 ‘세상’, 즉 ‘우리’에게는 보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나의 情이 지닌
논리 안에서 살 때에 우리의 영원한 숙제는 문제꺼리에서 즐길만한 행복으
74) 大學或問 : 夫人之性, 本無不善, 循理而行, 宜無難者. 惟其知之不至, 而但欲以
力為之, 是以苦其難, 而不知其樂耳. 知之而至, 則循理為樂, 不循理為不樂.
332 인문학연구 제50집
로 다가 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자기이해’이다.
본 논고는 ‘감정의 자기이해’라는 표현에 대한 주자학적 이해의 첫 시작
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자학을 이렇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남아
있다. 달리 말하면 주희가 퇴계(退溪, 1501~1570)처럼 情을 純善無惡한
것으로 보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大學에서 ‘格物致知’에 대한 傳의 앞
에는 本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爭訟을 다
스림은 내 남과 같으나 반드시 백성들로 하여금 爭訟이 없게 하겠다.’하셨
으니, 情이 없는 자도 그 말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크게 두
려워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일러 本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75) 아무리 情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백성들의 뜻을 두려워하는 情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物의 本이 바로 明德이며 이 明德이 실제로 드러나는 것이 情이라
는 뜻이다.76) 이렇게 해석을 하고나면 物의 本末과 事의 終始77)에 있어서
先後를 알아 道에 가깝게 되는데 三綱領과 八條目의 간격이 사라지게 되
며, 明德의 실제가 情이라면 情의 純善無惡함을 증명할 수 있다.
이렇게 본 논고를 통해 ‘감정의 자기이해’에 대한 주자학적 이해를 시작
으로 모든 학문에 있어 ‘감정의 자기이해’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여 증명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나의 이해가 바로 서게 되면 그 나머
지, ‘너’를 포함한 ‘세상’의 이해는 어려울 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주자는
豁然貫通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75) 大學章句傳4 : 子曰, 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無情者不得盡其辭, 大畏民
志. 此謂知本.
76) 大學章句傳4 : 猶人, 不異於人也. 情, 實也. 引夫子之言, 而言聖人能使無實之人,
不敢盡其虛誕之辭. 蓋我之明德既明, 自然有以畏服民之心志, 故訟不待聽而自無
也. 觀於此言, 可以知本末之先後矣.(猶人은 남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情은 실제이
다. 夫子의 말씀을 인용하여 聖人이 능히 實情이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그 虛誕
한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나의 明德이 이미 밝아져서 자연히 백성들의 심사를
두려워하고 복종시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爭訟을 다스릴 필요없이 爭訟이 저절
로 없어짐을 말한 것이다. 이 말씀을 본다면 本末의 先後를 알 수 있을 것이다.)
77) 事의 終始는 知止가 始이고 能得이 終인데, 知止가 바로 格物致知와 다르지 않다.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33
주희는 格物致知를 설명하면서 ‘힘쓰기를 오래 한다’(用力之久)는 말과
함께 累積이라는 표현이 강조된다. 분명히 물리적인 시간과 나뉘지 않는
學에 대한 말이다. 이것은 스피노자(Spinoza, 1632~1677)가 에티카를 마
무리하면서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기 때문에 힘들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
하면 어떨까? 즉 바로 알았다면 그렇게 살아 볼 때에 알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표현이다. 孔子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文武의 정치는 그 방책이 다 기록되어 있지만, 그 (文武의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文武의) 정치가 실행되고, 그 (文武의 정치를 할 수 있는) 사
람이 없으면 그 (文武의) 정치는 실행되지 않는다.78)
참고문헌
1. 원전
大學章句.
大學或問.
孟子集註大全.
中庸章句.
朱熹集.
朱子語類.
二程遺書.
2. 논문 및 단행본
이강대, 주자학의 인간학적 이해, 예문서원, 2000.
이상익, 주자학의 길, 심산, 2007.
陳來, 송명성리학, 안재호 옮김, 예문서원, 1997.
한자경, 「주희의 감정론」, 철학논집 39권,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4.
78) 中庸20 : 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334 인문학연구 제50집
홍원식, 「程朱學의 居敬窮理說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Peter K. Bol, Neo-Confucianism in history, London :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8.
인식 주체로서의 감정에 관한 연구 335
Abstract
A study on the feelings as cognitive subject
- Mainly Zhu Xi's Theory of Gewuzhizhi(格物致知) -
Han, Seung-Il*
79)
This dissertation aims to explain Zhu xi’s(朱熹: 1130~1200) theory of
‘Gewuzhizhi(格物致知)’ in a systematic manner and to show its distinctive
character and significance. ‘Gewuzhizhi’ is about ‘Self-understanding of
feelings’. This is a philosophical theory without separation between a
subject and an object, public and private, fact and value, and may belong
to an epistemological theory in the Western philosophical tradition.
This dissertation analyzes the subject and the object of Gewuzhizhi. That
mind(心) is ‘empty, spiritual, and apprehensive(虛靈知覺)’ means two things
: the mind consists of material force(氣) and that brings about feelings(情)
by using delicately the principles(理) of the nature(性). Therefore, the subject
and the object of Gewuzhizhi can be seen as the feelings. All things are
composed of the structure of ‘uniting li and material force(合理氣)’ those
are never separated each other and never mixed each other. And it is
possible to prove the concept of ch’ing ji li(情卽理) through the elementary
proposition of xing ji li(性卽理).
The significance of Zhu xi’s theory of Gewuzhizhi is that it combines
fact with value when it deals with epistemological issues. In phenomenal
world five senses(sight, hearing, smell, taste, touch) is working, but only
through five senses true self-understanding is impossible because of the
separation between ‘I’ and ‘you’. But feeling helps ensure a public without
ignoring a private. We can also conceive of feelings’ logic that can cure
the phenomena of alienation and estrangement brought about by the
severance between fact and value.
* University of SungKyunKwan, Ph.D. candidate.
Key Words : Gewuzhizhi(格物致知), thing(物), feelings(情), self-understa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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