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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싱가포르 함락(4)-짙어가는 전운/http://pacificwar.tistory.com/198?category=657089

4. 짙어가는 전운

 

1939년 9월에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기세등등하게 중국에서 활동 중이던 연합군의 강상포함과 중국 주둔 수비대의 철수를 요구했던 일본은 일단 폴란드가 붕괴하고 겨울로 접어들면서 가짜 전쟁이 이어지자 관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40년 5월 10일에 독일이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영국의 주의가 온통 유럽에 붙잡히게 되자 행동을 재개했다. 5월 15일에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해 앞으로 어떤 상황 변화가 있더라도 석유, 고무, 주석, 보크사이트, 그리고 여러 광물들을 자신이 요구하는 양만큼 수출하라고 강요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6월 6일에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고 기존 규모의 거래를 유지했다.

 

1940년 6월에 일어난 프랑스의 붕괴는 일본 내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가 몰락하고 영국도 뒤를 따를 것으로 보이자 연합국과의 충돌을 두려워하던 신중파들은 설 곳을 잃었다. 일본이 전체주의로 줄달음치면서 대외 정책은 강경해졌다. 1940년 6월 20일에 일본은 영국에게 버마 로드를 폐쇄하고 텐진과 상하이의 영국수비대를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7월 16일에는 육군에 의하여 요나이 내각이 붕괴하고 22일에 제2차 고노에 내각이 들어섰다. 서방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지닌 마츠오카요스케가 외상이 되었고 도조 히데키 중장이 육상이 되었다. 고노에 내각은 국내의 모든 정당을 합쳐 대정익찬회로 통합함으로써 이미 군부에 눌려 숨만 붙어있던 일본의 정당 정치를 끝장내었다. 외부적으로는 유럽의 정세가 독일에게 기운 틈을 타서 중일전쟁을 마무리하고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에 걸쳐 소위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고자 했다. 고노에 자신은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위하여 미국 및 영국과 전쟁까지 치를 생각은 없었으나 삼국동맹을 체결하고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강행하여 미국의 석유금수조치를 불러옴으로써 미국 및 영국과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1940년 8월 6일에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북부 지역에 일본군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독일의 압박을 받은 비시 정부가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일본군은 1940년 9월 23일에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했다.

 

영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접근하여 일본에게 저항하도록 부추기려 했다. 중국 총사령관(Commander-in-Chief, China) 퍼시 노블 해군대장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민간행정기구와 접촉하여 홍콩과 싱가포르에 대한 쌀 수출을 계속하도록 합의했다. 또한 군정장관 드쿠 제독과 접촉하여 휘하 함정들을 싱가포르로 보내도록 권고했으나 거절당했다. 비시 정부는 드쿠 제독 후임으로 카트로 장군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군정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비시 정부의 통제가 심해지면서 영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자유 프랑스 세력을 심거나 반일 세력을 키우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1941년 1월에 중국 총사령관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협약을 맺어 홍콩과 싱가포르에 대한 쌀 수출을 보장받는 대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목표로 한 반일 선전을 중단하기로 약속했다.

 

영국본토가 독일의 침공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일본이 요구한 버마로드 폐쇄와 중국 주둔 영국군의 철수를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버마로드 폐쇄 요구를 거절하려면 영국을 지지한다는 미국의 명확한 입장 표명이 필요했으나 루스벨트 행정부는 그런 보증을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영연방 국가들과의 회의를 거쳐 7월 18일에 3개월간 버마로드를 폐쇄하기로 결정했으며 8월 초에는 중국 주둔 영국군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일본군이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4일 후인 1940년 9월 27일에 일본은 독일 및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조약(Tripartite Pact)을 체결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우월한 지위를 서로에게 인정받았다. 또한 세나라 중 어느 나라든지 유럽 전쟁이나 중일전쟁에 참가하고 있지 않은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정치, 경제, 군사적 방법으로 돕기로 했다. 이는 명백히 미국을 겨냥한 것으로 일본은 미국에게 양면 전쟁의 위협을 가하여 자신들의 앞길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눌러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삼국동맹조약을 일본이 추축국에 합류한 증거로 간주하고 이때부터 일본을 확실하게 적으로 인식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10월 16일에 모든 철강 제품과 고철의 수출을 통제하여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영국에 대한 물자 지원을 늘렸다.

 

일본은 1940년 9월 초에 각료인 고바야시가 이끄는 대규모 구매 사절단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파견하여 매년 300만톤의 석유를 향후 5년간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수출하라고 강요했다. 이는 일본에 대한 기존 수출량의 5배에 달하는 물량이며 일본의 평시 석유 소비량의 60% 에 해당하는 물량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석유 수입에서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자 했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굴복하지 않았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가 끝까지 버티자 아직 무력을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일본은 11월 12일에 이를 갈면서 계약서에 서명했다. 석유 수출에 할인은 없었으며 물량 또한 평소보다 조금 늘어난 정도였고 5년 계약이 아닌 6개월 계약이었다. 수출 물량은 원유 형태였고 항공유를 비롯한 정제유는 없었다. 일본은 고무, 주석, 보크사이트의 수입량이 조금 늘어난 것으로 위안을 삼는 수 밖에 없었다.

 

1940년 10월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영국에게 유리해졌다. 공군이 영국본토 항공전에서 승리하면서 적어도 1940년 내에 본토침공의 위협은 사라졌다. 말레이의 상황도 호전되었다. 9월에 상하이에서 철수한 영국군 2개 대대가 싱가포르에 도착했으며 10월 12일부터는 인도로부터 제11인도사단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삼국동맹조약에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으며 미해군성은 유사시 싱가포르가 어느 정도로 미국 함대를 지원해 줄 수 있는지 문의했다. 용기를 얻은 영국은 폐쇄한 지 3달 만인 10월 18일에 버마 로드를 재개통했다.

 

1940년 10월 16일에 극동 지역의 해군, 육군 및 공군을 대표하는 제프리 레이튼 해군중장, 본드 중장 그리고 바빙턴 공군소장이 싱가포르에서 회의를 열었다.(레이튼 중장은 1940년 9월 12일에 퍼시 노블 대장을 이어 중국총사령관이 되었다. 말레이 사령관 본드 장군은 1940년 10월 1일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일본이 태국의 비행장을 사용하면 싱가포르 폭격이 가능하므로 일본군의 태국 진입을 전쟁으로 간주해야 하며 그럴 경우 태국 남부 지역에 진입하여 비행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함대가 없는 상황에서 일본의 침공을 막으려면 공군이 전면에 나서야 하며 이를 위하여 31개 비행대대, 총 566대의 일선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럴 경우 육군의 임무는 비행장 및 해군기지의 보호이며 이를 위하여 26개 보병대대, 야포 14개 대대, 1개 차량화 기관총 대대, 3개 경전차 중대, 그리고 1개 장갑차 중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보병대대 26개 중 23개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에 배치하고 3개는 영령 보르네오, 브루네이 및 사라왁에 배치할 것이었다. 일본의 공습에 대비하여 중대공포 176문, 경대공포 100문, 탐조등 186개도 요청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소규모로 말레이 해안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해군에 어뢰정 3개 전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40년 10월 말에 중국 총사령관 레이턴 중장은 영국 참모본부의 권고에 따라 본드 중장, 바빙턴 소장 뿐 아니라 호주, 뉴질랜드, 인도, 버마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대표들을 모아 극동 방어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미국은 방콕 주재 무관을 옵저버로 파견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강력한 함대가 빠진 상황에서 극동 지역의 군사력이 일본의 위협에 대처하기에는 미흡하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했으나 미국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는 한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결국 회의는 랭군에 주둔시킬 항공기를 포함하여 극동 방어에 필요한 항공기의 숫자를 566대에서 다소 늘어난 일선기 582대로 결정하고 호주, 뉴질랜드 및 인도가 극동 방어에 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도록 노력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폐회했다.

 

영국 참모본부는 극동 지역의 방어에서 3군 사이의 협력 및 버마, 말레이 그리고 벵골 등 지역 간의 유기적인 통합 방어 계획이 미흡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참모본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0년 10월 13일에 처칠 수상의 재가를 얻어 극동 총사령관(Commander-in-Chief, Far East)직을 새로 만들고 나흘 후에 케냐 총독을 지냈던 로버트 브룩포팸 공군대장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브룩포팸이 이끄는 극동 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 Far Eat)는 1940년 11월 18일에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극동 총사령관은 말레이, 버마, 영령 보르네오 및 홍콩의 육군 및 공군 병력을 지휘했으나 해군은 공군의 지휘를 받기 싫어했다. 따라서 극동 지역의 해군에 대한 지휘권은 여전히 해군인 중국 총사령관이 행사했다.

 

(극동 총사령관 로버트 브룩포팸 장군.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rigadier-General_H_R_M_Brooke-Popham.jpg)

 

이렇듯 극동 총사령관의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극동 지역의 영국해군은 극동총사령관이 아니라 해군인 중국 총사령관의 지휘를 받았고 민간인인 해협 식민지, 버마 및 홍콩 총독은 식민성의 지휘를 받았다. 극동 총사령관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말레이, 버마 및 홍콩 사령관이나 극동 공군 사령관도 막상 재정 지원은 전쟁성이나 항공성에서 받았다. 결론적으로 극동 총사령관의 임명은 실패작이었으며 당초 목적인 3군 사이의 협력을 촉진하고 극동에서 지역 간의 방어 태세를 효과적으로 조율하는 효과는 내지 못하고 가뜩이나 복잡한 극동 방어 체계에 사령부를 하나 추가시킨 결과만 낳았다.

 

영국 정부와 네덜란드 망명 정부는 1940년 12월에 런던에서 극동 방어에 대한 협정을 맺었다. 양국은 서로 연락장교를 파견하고 공동 암호를 사용하며 비행장을 상호 개방하고 필요시 영국이 네덜란드 군에게 탄약을 공급하기로 했다. 또한 극동의 영국령과 네덜란드령에 대한 일본의 위협에 공동 대처하기로 했으나 일본의 특정한 행동을 전쟁 행위로 볼 것인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영국 정부가 판단하기로 했다. 영국으로서는 미국의 참전 보장도 없이 네덜란드의 요청에 따라 일본과의 전쟁에 끌려들어가는 사태를 원하지 않았다.

 

1941년 1월 8일에 영국 참모본부는 1940년 10월의 회의에서 요청한 항공기 및 병력의 배치에 대해 극동 총사령부에 회답했다. 참모본부는 일선기 582대가 있으면 이상적이지만 실제 임무 수행에는 336대로 가능할 것이라고 밝히고 1941년 말까지 배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육군 병력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았으며 26개 대대를 1941년 중반까지 배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참모본부의 계획은 처칠 수상에 의하여 제동이 걸렸다. 처칠은 1월 13일 참모본부에 각서를 보내어 극동 정세는 수비대를 그만큼 증강해야 할 정도로 급박하지 않다면서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참모본부는 극동 방어를 위하여 그 정도 병력은 꼭 필요하다며 맞섰다.

 

그동안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압박했다. 1941년 1월에 일본은 각료인 요시자와가 이끄는 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절단은 일본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내에서 석유와 광물을 탐사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해안에 어업 기지를 건설할 자유를 인정하고 연안 항로에 일본 회사가 운영하는 여객선을 취항시키라고 요구했다. 또한 앞으로 석유를 비롯한 전략 물자들을 일본이 원하는 양만큼 판매하라고 강요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거부했고 일본은 2월에 석유의 추가 수입을 위한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다시금 만족해야 했다.

 

1941년 2월 22일에 극동 총사령관은 호주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대표와 함께 극동 방어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의 결론은 ADA 협약(Anglo-Dutch-Australian Agreement)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ADA 협약은 유사시 3국 사이의 공군 협조에 대하여 상당 수준의 합의를 담고 있었으며 일본의 어떤 행동을 전쟁 행위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ADA 협약에서 합의한 일본의 전쟁 행위는 다음과 같다.

 

1. 세 국가의 영역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공격

2. 일본군이 동경 100도 이서 또는 북위 10도 이남의 태국 영역에 진입하는 경우

3. 일본함정 다수 또는 전투함에 호위받는 일본선단이 명백하게 크라 지협이나 말레이 동해안으로 향하는 것이 확인되거나 남중국해에서 북위 6도 이남으로 내려오는 경우

4. 필리핀을 공격하는 경우

 

영국 참모본부는 ADA 협약을 대체로 받아들였으나 일본의 어떠한 행동을 전쟁 행위로 판단할 것인가는 영국 정부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했다. 반면 호주는 ADA 협약에서 해군 협조에 대한 내용이 빠졌다면서 빠른 시일 내에 미국도 참여시켜 회의를 다시 열자고 요구했다.

 

(제8호주사단장 고든 베넷 소장. https://en.wikipedia.org/wiki/Gordon_Bennett_(general)

 

그동안 말레이에는 병력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1941년 2월에 고든 베넷 소장의 제8호주사단 사령부와 제22여단(해럴드 테일러 준장)이 도착했고, 3월에는 제15인도보병여단( 케네스 가렛 준장)과 제22인도보병여단(조지 페인터 준장)으로 이루어진 아서 바스토우 소장의 제9인도사단이 도착했다.

4월 말에 콘웨이 펄포드 공군소장이 바빙턴 소장을 이어 극동 공군사령관이 되었도 5월 중순에는 말레이 사령관 도비 소장 아래에서 참모장을 지냈던 아서 퍼시발 중장이 본드 중장을 이어 말레이 사령관이 되었다. 

 

(말레이 사령관 아서 퍼시발 중장.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https://en.wikipedia.org/wiki/Arthur_Percival)

 

동시에 루이스 히스 중장이 지휘하는 제3인도군단이 만들어져 말라카 및 조호르 이북의 방어를 담당했다.

 

(제3인도군단장 루이스 히스 중장. http://www.unithistories.com/officers/indianarmy_officers_h01.html)

 

1941년 3월에 미국과 영국의 참모본부는 독일우선 원칙에 합의했다. 극동 방어는 미해군이 대서양과 지중해에 진출하여 영국 해군의 짐을 덜어주면 여유가 생긴  영국해군이 함대를 극동에 파견하기로 했다. 함대가 파견되어도 영국은 극동 지역에서는 수세적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반면 미태평양 함대는 동쪽에서 일본을 공격하여 일본해군을 끌어냄으로써 영국의 극동 방어를 돕기로 했다. 이 합의에 따라 미해군은 1941년 봄부터 서부 대서양에서 중립 초계(Neutrality Patrol)를 시작했다.

 

일본도 남방 진출을 위하여 정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선 미국과 협상을 통하여 자신들을 방해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희망을 품고 1941년 2월 11일에 노무라 기치사부로를 주미대사로 임명하여 미국과 협상을 벌이게 했으며 4월 13일에는 소련과 5년 기한의 일소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 국경에서의 위협을 줄였다. 

 

일소불가침 조약의 체결을 본 영국은 극동방어를 위한 회담을 제의했다. 1941년 4월 22일부터 26일까지 싱가포르에서 미국, 영국,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호주, 뉴질랜드 및 인도 자치정부 사이에 회담이 열렸다. 회담의 결과는 ADB 협약(America-Dutch-British Agreement)으로 불렸다. ADB 협약은 주로 해군의 공조에 초점을 맞추어 상당 수준의 합의를 이끌어 내었고 ADA 협약에서 정했던 일본의 전쟁 행위를 재확인했다. 불행하게도 영국과 미국 정부 모두 ADB 협약을 거부했다. 영국은 ADA 협약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특정한 행동을 전쟁 행위로 볼 것인가의 판단은 영국 정부의 고유 권한이라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은 아시아 함대가 영국 해군인 극동함대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ADB 협약도 실효성있는 공동 계획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일본은 다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앞으로 무제한의 기간 동안 일본이 원하는 양의 석유를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라고 강요했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가 다시 일본의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6월 17일에 협상이 결렬되었다.

 

1941년 6월 22일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북방의 위협이 사라지자 일본은 노골적으로 남방 진출을 꾀했다. 6월 25일의 정부-대본영 연락회의에서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가 결정되었고 7월 2일의 어전회의에서 확정되었다. 남방으로 내려가 미국과 충돌하는 대신 독일을 도와 소련을 공격하자고 주장하던 외상 마츠오카는 7월 18일 제3차 고노에 내각의 성립과 함께 도요다 데이지로로 교체되었다. 고노에 수상은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에 대해 미국이 반발하리라는 사실 자체는 예상했으나 강도를 과소평가했다. 반발의 강도는 예상을 뛰어넘어 일본을 전쟁이냐 굴복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만들었고 굴복의 치욕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결정한 7월 2일의 어전회의는 결국 5개월 후의 대미 개전을 결정한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