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싱가포르 방어문제
1940년 9월 27일에 체결된 삼국동맹 조약으로 독일과 일본은 동맹국이 되었다.
삼국동맹 조약은 일본이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미국과 충돌할 경우 독일의 지원을 기대한다고 전 세계에 공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동맹국으로서 독일과 일본은 손발이 맞지 않았다.
독일은 1940년 7월에 영본토항공전을 치르면서 영국의 뒤통수를 치기 위하여 일본에게 영령 말레이 침공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1941년에 들어서면서 소련 침공을 계획하던 독일은 마음이 바뀌어 일본이 시베리아를 공격해 주길 바랐으나 남방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일본은 반대로 1941년 4월 13일에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어 버렸다.
1941년 6월 22일에 소련을 침공한 독일은 일본에게 시베리아를 침공해달라고 미친듯이 요청했으나 일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후 히틀러는 일본의 정책에 대해 관심을 끊었다.
도쿄의 독일대사관은 1941년 후반기 미국과 일본의 교섭 과정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독일은 미국만큼이나 놀랐다.
일본의 남방 진출에 대응하기 위하여 연합국이 협의를 시작한 것은 실제로 독일에 대응하기 위하여 협의를 시작한 것보다 더 빨랐으나 진전이 느렸다.
대서양에서는 미해군과 영국해군이 독일의 대미선전포고 이전부터 이미 사실상의 동맹군으로서 긴밀하게 협력한 반면 태평양에서는 진주만 기습 때까지 실효성있는 협력 방안이 마련되지 않았다.
1937년에 7월에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0월에 독일, 이탈리아 및 일본사이에 방공협정이 체결되자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은 앞으로 미국이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동시에 싸워야 할 것으로 보고 해군참모총장 레이히 대장에게 대책마련을 지시했다.
레이히 제독은 미국이 일본 및 독일과 싸우려면 반드시 영국과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인식 하에서 미국의 전쟁계획국장 로열 잉거솔 대령이 영국해군의 톰 필립스 대령과 1938년 1월에 런던에서 만났다.
여기서 양국은 만일 일본이 남방으로 진출할 경우 영국함대를 싱가포르에 , 미함대를 진주만에 전개하여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유럽의 전운이 짙어가던 1939년 5월에 영국은 전쟁계획국에 장교를 파견하여 지중해 문제 때문에 싱가포르에 함대를 파견할 수 없다고 통보하면서 미해군이 영령 말레이 방어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은 확답을 하지 않았다.
이후 미육군과 해군의 합동계획위원회는 일본과의 개전시 태평양에 영국해군이 없다는 전제 하에 레인보우1 작전을 짰다.
1940년 9월과 1941년 1월-3월에 걸친 미국과 영국 간의 군사회담에서 양국은 싱가포르 문제를 두고 격돌했다.
영국은 싱가포르가 영령 말레이의 방어와 인도양을 거쳐 호주로 연결되는 연락선을 확보하는데 필수적인데 영국해군이 함대를 투입할 여력이 없으므로 미태평양함대가 싱가포르에 강력한 분견대를 파견하든지 아니면 아시아 함대를 크게 증강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대해 미국은 일본이 싱가포르를 폭격할 수 있는 거리에 비행장을 확보하면 함대를 가지고 싱가포르 방어가 불가능하며 태평양함대를 분산시켰다가는 일본에게 각개격파될 뿐이라고 반박했다.
미해군의 입장을 대변하는 리치먼드 켈리 터너 소장은 영국해군이 1939년 말과 40년 초반에 독일공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전함 바함과 워스파이트, 그리고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의 수리를 미국에 요청한데 대해 왜 그 함정들을 싱가포르로 보내어 수리하지 않는지 물었다.
영국 측은 싱가포르에는 주력함의 수리에 필요한 인력, 예비 부품 및 수리 설비가 없다고 대답했고, 터너 소장은 그렇다면 미해군이 무엇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싱가포르를 지켜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리치먼드 켈리 터너 제독. https://en.wikipedia.org/wiki/Richmond_Kelly_Turner)
교섭에 참가했던 호주 대표단은 자국의 미미한 해군 세력에서 일부라도 싱가포르 방어에 차출하는 것을 거부하고 태즈매니아 해 방어에 전념하게다는 뜻을 피력했다.
실제로 영국을 따라 대독 전쟁에 참가하고 있던 호주는 독일 통상파괴함의 공격을 막는데 진력하고 있었다.
독일의 통상파괴함 쉬프45호는 소련 북해안을 따라 항해한 다음 1940년 9월 5일에 베링해를 통하여 태평양에 진입한 후 호주 근해에서 60,000톤의 선박을 격침하고는 아프리카를 돌아 독일로 돌아갔다.
쉬프16호는 1940년과 41년에 걸쳐 인도양에서 145,000 톤의 선박을 격침했으며 쉬프41호(코모란)는 동인도양에서 호주해군의 경순양함 시드니와 싸워 격침되었으나 전투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시드니도 호주도 돌아가는 도중 침몰했다.
교섭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41년 2월 10일에 양국 대표단의 보고서에서 영국은 싱가포르의 확보를, 미국은 태평양함대를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입장 차이를 확인했다.
교섭이 결렬될 위기에 빠지자 결국 영국이 물러섰다.
영국은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면 미해군이 지중해 방면에서 도와주는 것을 전제로 최소한 6척의 주력함을 싱가포르에 파견하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은 이 모든 것을 다 헝클어뜨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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