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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14. ADB 계획/http://pacificwar.tistory.com/87?category=648786

14. ADB 계획

 

1941년 1월 29일부터 3월 27일까지 워싱턴에서 미해군, 미육군, 그리고 영국군의 대표들이 모여 매일 비밀 회의를 가졌다.

그 결과는 1941년 3월 27일에 "ABC-1 참모 동의안"(ABC-1 Staff Agreement)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미국이 참전할 경우 기본 전략에 대한 합의사항이 담겼다.

보고서에서는 대서양 및 유럽 전역이 결정적인 전역이며 다른 전역에서 미국의 노력은 이 전역의 승리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하여 독일우선원칙을 확정했다.

극동 방면에서는 방어 전략을 취하여 일본이 남진하더라도 미국은 태평양에 전력을 추가배치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물론 이 합의가 태평양 전역에서 미군의 역할을 전적으로 현상유지에만 한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합의에 따르면 태평양 해역(The Pacific Ocean Area)에서 미태평양함대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태평양 해역은 적도 이북에서 동경 180도의 동쪽, 적도 이남은 동경 140도의 동쪽, 그리고 일본을 의미한다.)

 

1. 일본의 해상교통로와 마셜 제도를 비롯한 거점들을 공격하여 적의 전력을 분산시킴으로써 말레이를 방어하는 연합군의 작전을 지원한다.

2. 적도 이남, 동경 155도 동쪽의 영국함대를 지원한다.

3. 태평양의 연합군 지역과 해상교통로를 방어한다.

4. 마셜 제도와 캐롤라인 제도 점령을 준비한다.

 

미육군은 해군 및 육군항공대와 협력하여 다음의 임무를 맡았다.

 

1. 오아후 섬을 방어한다.

2. 파나마 운하, 미국 및 캐나다의 서해안과 알래스카를 방어한다.

3. 남아메리카 서해안에 인접한 국가들을 지원한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태평양 해역에서 영국과 협의를 거칠 필요가 없었다.

미육군과 해군의 합동위원회는 레인보우5 작전을 짜면서 개전과 동시에 마셜 제도를 점령할 계획이었으나 진주만 기습으로 무산되었다.

 

참모 동의안은 또한 극동 지역(Far East Area)에서 연합군의 작전을 다음과 같이 명문화했다.

(극동 지역이란 동쪽으로는 동경 141도, 서쪽으로는 버마의 아이카브를 지나는 동경 92도, 북쪽으로는 양쯔강 하구인 북위 30도, 남쪽으로는 남위 13도를 경계로 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이로써 인도와 호주는 제외되었는데 미국은 인도 방어에 개입하기 싫어했고 호주는 싱가포르를 제외한 말레이 전투에 병력 파견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1. 전략 수립에 각국이 협조한다.

2. 각국은 자국 영토 방어에 대한 책임을 진다.

3. 영국군인 중국 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 China)이 지역 내의 영국, 미국 및 네덜란드 해군의 전략 수립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러나 미해군은 7월에 이 조항에서 미국아시아함대를 빼달라고 영국에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따라서 아시아함대 총사령관은 독자적으로 필리핀 방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동남아시아 지도. http://harunarcom.blogspot.kr/2011/04/perpisahan-2008.html)

 

이어서 극동 방어를 위한 회의가 1941년 4월 21일 - 27일에 걸쳐 1주일간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회의는 영국극동총사령관(British Commander of Chief Far East)인 로버트 브룩포팸 공군대장이 주재했는데 그는 명목상 중국총사령관인 제프리 레이턴 해군중장의 직속상관이었다.

참석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참모총장인 하인 텔 푸어텐 소장과 호주, 뉴질랜드, 인도군 대표 등이었다.

미국에서는 아시아함대 참모장인 윌리엄 퍼넬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소규모 대표단을 파견했다.

 

회의는 난항을 거듭했다.

대서양 및 유럽 방면에서는 미국의 참전 여부를 제외한 모든 상황이 명확했다.

영국은 18개월째 독일과 이탈리아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며 미국은 사실상 준전시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따라서 명확한 계획 수립이 가능했다.

 

극동의 상황은 복잡하고 유동적이었다.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뿐 싱가포르 회의에 참가한 어느 나라와도 전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회의 참가국들 모두 전쟁은 일본의 선공으로 시작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꿍꿍이는 알 수 없었다.

 

일본은 지금처럼 중국과의 전쟁만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중국과의 전쟁을 마무리짓지 않은 채 남진할 것인가?

만일 남진한다면 어디를 가장 먼저 공격할 것인가?

마닐라? 홍콩? 말레이 반도? 태국? 아니면 보르네오를 비롯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포르투갈령 티모르?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

(회의 참가자 중 누구도 진주만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참가국들은 일본이 한번에 1곳, 또는 잘해야 2곳을 공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문제의 복잡성은 선전포고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만일 일본이 영령 말레이 반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하면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해야 할 것인가?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말레이 반도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침공하면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일본이 이들 지역을 점령하여 주석, 고무 및 원유와 같은 전략물자를 얻게 되면 엄청나게 강력해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의회의 선전포고를 이끌어 낼 확신이 없었다.

당장 평화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나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를 지켜주기 위하여 미국의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끌고 간다고 비난할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반대로 필리핀이 공격당할 경우 영국과 네덜란드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미국을 돕는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은 의회를 설득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었으나 브룩포팸 대장이나 텔 푸어텐 소장은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싱가포르는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영국은 미태평양함대를 분리하려는 시도는 포기했지만 여전히 싱가포르에 집착했다.

그들은 영국극동함대, 네덜란드 해군, 그리고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미국함정들을 모아 인도양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항해하는 수송선 호위 임무에 투입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호주와 뉴질랜드는 자국 근해 방어에 전념하고 싶다는 뜻을 명확히 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또한 연합 사령부에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 및 잠수함 2척 이외에는 내놓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 대표인 퍼넬 대령은 영국의 수송선 호위 전략이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자국 근해 방어 전략이 모두 패배주의에서 나온 소극적인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이 말레이 방어에 기여하는 가장 좋은 전략은 태평양함대를 동원하여 마셜 제도를 공격함으로써 일본 해군을 말레이 부근에서 끌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확실히 좋은 전략이긴 했으나 일본은 12월 7일 아침에 이 전략을 무력화시켰다. 

 

싱가포르 회의는 1주일 간의 격론 끝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경우 취할 연합방어계획을 힘들게 타결짓고 1941년 4월 27일에 'ADB 계획'('ADB Plan') 이라고 불리는 합의에 도달했다.

ADB 는 미국(America), 네덜란드(Dutch), 그리고 영국(British)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이 계획에서는 각국 정부에 다음과 같은 경우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도록 요청했다.

 

1. 일본군이 미국, 영국 및 네덜란드 영토에 대하여 직접적인 전쟁행위("the direct act of war")를 취할 때

2. 일본군이 태국에 진입하여 방콕 서쪽이나 크라 지협 이남으로 진출할 때

3. 일본군이 포르투갈령 티모르나 연합국에 충성하는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를 점령할 때

 

미군 수뇌부는 ADB 계획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해군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과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은 1941년 7월 3일에 공식적으로 ADB 계획을 거부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나치게 싱가포르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스타크 대장은 영국참모본부에 요구하여 아시아 함대를 영국군의 지휘에서 빼내었다.

 

그래도 미국은 ADB 계획이 권고한 선전포고를 위한 3가지 요건은 받아들였다.

1941년 11월 5일에 미국참모본부는 3가지 경우에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한다는 방안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올려 재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