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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과달카날 전투 (27) - 타심보코 공격 /blog.naver.com/imkcs0425/60109873997


27. 타심보코 공격(Tasimboko Raid)

도쿄특급이 부지런히 다니면서 과달카날로 가와구치 지대를 실어 나르는 동안 해병제 1 사단장 반데그리프트 소장도 교두보의 방어를 강화하고 있었다.
툴라기 지역의 침공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8 월 21 일에 툴라기 지역을 방어하던 제 2/5 대대를 과달카날로 불러 들였고 , 31 일에는 툴라기에서 휴식과 재정비를 마친 기습대대와 낙하산대대도 과달카날로 들어왔다.
9월초에 제 3해병방어대대의 일부가 툴라기에 상륙함에 따라 90mm 대공포를 보유한 제 5해병방어대대의 대공포대들이 헨더슨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제 2/5 대대가 증강됨에 따라 병력의 여유가 생긴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8 월 27 일에 교두보의 서쪽을 다시 한번 청소하기로 결심했다.
포병연대인 제 11 대대의 제 2 대대와 제 5 대대가 마타니카우 마을에 포격을 가하여 일본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윌리엄 맥스웰 중령의 제 1/5대대가 상륙주정을 타고 27 일 오전 7시 30 분에 코컴보나 마을 부근에 무사히 상륙하여 동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일본군들이 해안의 좁은 평지에 참호를 파고 기다리는 방어선에 부딪혔다.
야포의 사정거리 밖이었으므로 맥스웰 중령은 박격포로 포격을 가한 다음 1 개 중대를 정글 쪽으로 우회시켜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가했으나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실패했다.
그러자 맥스웰 중령은 공격을 포기하고 제 5해병연대장 헌트 대령에게 무전을 보내어 해상철수를 위하여 상륙주정들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헌트 대령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즉석에서 맥스웰 중령을 대대장 직에서 해임하고 , 부대대장이던 밀턴 오코넬 소령을 후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는 오후 늦게 본인이 직접 상륙하여 제 1/5 대대에 도착했다.
이미 날이 어두었으므로 공격은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 다음날인 28 일 아침에 일본군 방어선을 정찰한 정찰대는 밤새 일본군이 철수했다고 보고해 왔다.
제 1/5 대대는 그날 거의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마타니카우 마을까지 동진하여 상륙주정을 타고 교두보로 돌아왔다.
9 월 1 일에 사보 섬에서 일본군이 목격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과달카날에 들어와 있던 제 1 기습대대의 2개 중대가 고속수송함 리틀과 그레고리에 실려 사보 섬에 상륙한 다음 하루종일 수색했으나 , 일본군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 그날 저녁에 다시 과달카날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제 1 기습대대와 제 1 낙하산 대대는 제 1 기습대대장 에드슨 대령의 지휘 하에 임시로 통합되어 취약한 남쪽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 에드슨 중령은 오히려 국지적인 공세를 주장하고 나섰다.
9 월 초부터 원주민 정찰대원들로부터 해병대의 교두보에서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타심보코 마을에 일본군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원주민 정찰대원들이 보고하는 일본군의 숫자는 처음에는 약 300 - 400 명 수준이었으나 매일같이 크게 증가하여 곧 4,000 명 정도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러나 , 해병대는 원주민들이 많은 숫자를 다루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멋대로 단정하고 실제 일본군의 숫자를 약 500 명 정도로 추정했다.
이러한 상황판단 하에서 에드슨 중령은 약 850 명 규모인 에드슨 대대를 이끌고 타심보코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겠다고 제안하여 반데그리프트 소장의 허가를 받았다.


( 타심보코 공격작전 상황도Tasimboko Raid )

1942 년 9 월 8 일 오전 6시 30 분부터 칵터스 항공대의 돈트레스 6 대가 타심보코를 폭격하기 시작했고 , 곧이어 기습대대원 500 명이 고속수송함 2척 ( 맨리 , 맥킨 ) 과 잡용정 2척에 타고 타심보코 서쪽해안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않고 무사히 상륙했다.
낙하산대대는 예비대로서 룽가 곶에서 여차하면 승선할 준비를 모두 갖추고 대기했다.
기습대대를 상륙시킨 맨리와 맥킨은 타심보코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기습대대의 상륙은 완전히 일본군의 허를 찌른 것으로서 미군은 상륙하자마자 일본군 야포 2 문을 파괴했으나 , 타심보코에 점차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일본군의 저항도 강해졌다.
에드슨 중령은 오전 8시 30 분에 타심보코 마을을 폭격해 주도록 요청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즉시 돈틀레스 10 대를 출격시켜 타심보코를 폭격하는 한편 에드슨 대령의 요청이 있으면 언제든지 출격할 수 있도록 돈틀레스 10 대를 따로 대기시켰다.
돈틀레스의 화력지원에도 불구하고 적의 저항이 점차 강해지자 오전 10시 30 분에 에드슨 대령은 다시 반데그리프트 소장에게 증원요청을 했다.
당시 일본군 병력을 약 1,000 명으로 추산하고 있던 에드슨 대령은 반데그리프트 소장에게 예비대인 낙하산대대 뿐만 아니라 1 개 대대를 추가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낙하산대대 투입요청은 당장 승락했으나 추가대대의 파견요청은 단호히 거부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에게는 교두보 방어 , 특히 헨더슨 비행장의 방어가 우선이었다.
그는 에드슨 중령에게 만일 낙하산대대를 투입하고도 전투에서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에드슨 중령은 낙하산대대가 도착하자 전 병력을 투입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일본군들은 그만 전의를 잃고 일제히 정글로 빠져나갔다.
타심보코를 점령하고 일본군의 야영지를 둘러본 에드슨 중령은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깨달았다.
야영지의 규모로 보아 타심보코의 일본군이 4,000 명 이상이라는 원주민 정찰대원들의 보고는 정확했으며 , 자신의 부대는 그중의 극히 일부와만 교전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에드슨 대대와 교전한 일본군은 타심보코 방어 명령을 받은 수비대로서 병력은 약 300 명 정도였다.
타심보코 전투에서 일본군은 27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고 , 에드슨 대대는 2 명의 전사자와 6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타심보코의 일본군들은 급히 후퇴하느라고 대부분의 보급품을 그대로 남겨 놓고 갔다.
에드슨 대대는 각종 탄약 50 만발 및 75mm 야포 4 문과 남은 식량들을 모두 파괴하고 , 귀중한 서류들과 가와구치 소장의 예복을 비롯한 몇가지 물품들을 노획하여 교두보로 돌아왔다.
일본군의 서류를 검토한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일본군의 주공이 방어가 허술한 남쪽에서부터 올 것임을 알았다.
그는 이 지역에 믿음직한 에드슨 대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일본군이 남쪽에서부터 온다면 실제로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 통과할 수 있는 통로는 교두보의 남쪽에 마치 지네처럼 남북으로 뻗은 능선 밖에 없었다.
이 능선은 곧 피투성이 능선 ( Bloody Ridge) 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세계 전사에 남게된다. 에드슨 대대는 9 월 10 일에 피투성이 능선에 전개하여 참호를 파고 방어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