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 (2) - 가와구치 지대의 패배
1942 년 9 월 12 일 오후 9시 30 분에 일본해군의 순양함을 떠난 수상정찰기 1 대가 피투성이 능선(Bloody Edge) 상공에 조명탄을 투하했다. 그와 동시에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들어와 있던 일본 해군의 경순양함 1 척과 구축함 3척이 20 분간 피투성이 능선을 향하여 함포사격을 가했다.
일본함대의 포탄들은 대부분 능선의 동쪽에 떨어졌으나 일부는 능선에 명중했다.
포격이 멈추자 제 1 기습대대 B 중대의 정면에서 일본군의 조명탄이 솟아오르더니 곧 일본군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이때 돌격에 참가한 병력은 대부분 제 124 연대 제 3 대대 병력이었으며 , 다른 대대의 병력들은 도착이 늦어져서 일부만이 돌격에 참가할 수 있었다. 처음에 B 중대의 정면으로 돌격했던 일본군들은 B 중대의 방어가 강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능선의 서쪽을 지키는 C 중대의 1 개 소대 정면에 공격력을 집중시켰다.
2 번의 강력한 돌격에 의하여 C 중대의 1 개 소대는 방어선을 내주고 밀려나고 말았다. 일본군들은 여세를 몰아 다시 B 중대를 공격했으나, B 중대는 밤새도록 방어선을 유지했다.
아이언바텀사운드에 있던 일본함대는 12 일 자정부터 45분간 헨더슨 비행장과 교두보의 동쪽 방어선에 함포사격을 가하고는 철수했다.
13 일 날이 밝자 에드슨 대령은 예비대인 A 중대를 투입하여 밤새 일본군이 차지한 능선의 서쪽 지역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실패했다. 할수 없이 에드슨 대령은 B 중대장 스위니 대위에게 기존 방어선으로부터 450m 쯤 북상하여 피투성이 능선의 중앙부에 다시 방어선을 편성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제 1 공병대대 B 중대에서 일부 병력이 기습대대의 B 중대에 증원되었다.
13 일에 일본군은 오전 9시 50 분과 오후 1 시 , 그리고 오후 5시 30 분에 3 번 공습을 가해왔다.
전날 새러토가에서 도착한 와일드캣들이 기존의 해병대 와일드캣들과 함께 일본기 11 대를 격추하고 , 자신들은 5 대를 상실했다.
오후 늦게 호넷과 와스프의 와일드캣 18 대와 함께 새러토가의 제 3 정찰비행대대장인 루이스 컨 소령이 지휘하는 돈틀레스 12 대 , 그리고 제 뇌격비행대대장인 해럴드 라슨 중령의 아벤저 6 대가 추가로 도착했다.
이리하여 9 월 11 일에서 13 일 사이에 헨더슨 비행장에 증원된 항공기는 60 대에 달했으나 같은 기간 동안 라바울의 일본군은 140 대의 항공기를 증원받았다.
과달카날 전투의 전망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던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은 과달카날에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다 쏟아부으려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발적으로 모함을 떠나게 된 해군 함재기들만 헨더슨 비행장에 파견할 뿐 후방에 보유한 육군항공대의 항공기들은 가급적 증원하지 않으려고 했다.
한편, 전날 과달카날에 도착했던 터너 제독과 맥케인 제독은 정오경에 과달카날 섬을 떠났다.
에드슨 대대는 13 일 하루종일 개인호를 파면서 새로 형성한 방어선을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사단예비대인 제 2/5 대대가 헨더슨 비행장의 남쪽에 전개했고 , 제 2/5 대대의 장교들이 방어선에 와서 주변지형을 숙지했다. 105mm 곡사포를 장비한 제 5/11 대대도 비행장 남쪽에 방열을 마치고 , 관측초소를 능선에 설치했다.
( 제 5/11 대대의 105mm 곡사포)
새로 형성한 방어선의 동쪽은 낙하산 대대 소속의 인원 미달인 2개 중대를 배치했고 , 중앙에는 기습대대의 B 중대 , 서쪽에는 A 중대가 포진했다.
에드슨 대대의 예비대인 C 중대는 B 중대 후방에 있는 능선 북쪽의 높은 언덕에 자리잡았다.
저녁이 되자 일본정찰기들이 나타났고 , 일본구축함 7척이 아이언바텀사운드에 진입했다.
9 월 14 일 저녁 9시에 일본정찰기가 투하한 조명탄을 신호로 일본구축함들이 피투성이 능선의 에드슨 대대 방어선에 포격을 가해왔다.
구축함의 포격이 끝나자 9시 30 분부터 가와구치 지대의 2개 대대가 함성을 지르면서 돌격해왔다.
(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 상황도)
서쪽에서 돌격한 고쿠쇼 소좌의 제 124 연대 제 1 대대는 A 중대의 정면에 맹공을 퍼부어서 30 분 만에 A 중대를 방어선 뒷쪽으로 밀어내었다.
동시에 서쪽에서는 와타나베 중좌의 제 124 연대 제 3 대대가 낙하산 대대의 방어선에 돌격해야 했으나 , 대대장 와타나베 중좌가 중국에서 얻은 상처가 도지면서 정글에 숨어 전투지휘를 포기했고 , 그 결과 제 3 대대의 일부 병력만이 돌격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원래 제 2선에서 돌격하기로 되어있던 다무라 소좌의 제 4 연대 제 2 대대가 10시부터 동쪽을 지키던 낙하산 대대의 정면에 돌격했다.
14 일 저녁 10 시 30 분이 되자 다무라 대대의 돌격을 견디지 못한 동쪽의 낙하산 대대가 후퇴함으로써 방어선에는 B 중대만 남게 되었다.
B 중대는 105mm 곡사포의 화력지원과 함께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지리적 잇점을 활용하여 일본군의 거듭되는 돌격을 계속해서 물리치고 있었으나 방어선의 양쪽이 비어버려 언제든지 포위될 수 있는 위험에 처했다.
결국 일본군의 박격포탄이 B 중대의 방어진지에 날아들기 시작하자 에드슨 중령은 B 중대에게 후퇴하여 후방 C 중대의 방어선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105mm 곡사포들이 B 중대의 방어선 바로 180m 전방까지 포격을 가하면서 B 중대의 후퇴를 엄호했다. 낙하산 대대와 A 중대는 이미 C 중대의 방어선에 도착해 있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유일한 사단 예비대인 제 2/5 대대를 남하시켜 에드슨 대대를 증원했다.
제 2/5 대대의 G 중대는 기습대대의 C 중대 동쪽에 방어선을 폈고 , 나머지 중대들은 모두 C 중대의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곧이어 능선 중앙부에서 후퇴한 기습대대의 B 중대가 C 중대 방어선에 도착함으로써 피투성이 능선의 북쪽 끝에 있는 높은 언덕을 중심으로 에드슨 대대와 제 2/5 대대가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했다. 사단의 유일한 예비대인 제 2/5 대대까지 투입된 C 중대의 방어선은 이제 헨더슨 비행장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 되었다. 방어선 뒷쪽에는 바로 사단본부가 있었으며 , 사단본부와 헨더슨 비행장 사이에는 포병대대인 제 5/11 대대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일본군들은 젖먹던 힘을 다 짜내어 이 최후의 방어선에 대단한 기세로 공격을 가해왔다.
일본군의 돌격은 날이 밝을 때까지 무려 12 회나 반복되었고 해병대원들은 105mm 곡사포 및 박격포의 화력지원을 받아가며, 기관총과 소총의 화력을 집중시켜 거듭되는 일본군의 돌격을 물리쳤다.
밤새 제 5/11 대대의 105mm 곡사포들은 1,992 발의 포탄을 발사하면서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방어선의 서쪽에서 돌격했던 제 124 연대 제 1 대대장 고쿠쇼 소좌는 대대의 돌격을 선두에서 이끌다가 전사했다. 방어선의 동쪽에서 돌격했던 제 4 연대 제 2 대대의 병력 30 여명이 서쪽 방어선을 돌파하여 제 1 공병대대 막사를 점령하고 일부는 제 5/11 대대본부까지 접근했으나 곧제 1 공병대대 A 중대의 반격을 받고 10 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되밀려 나왔다.
A 공병중대는 이 과정에서 4 명이 전사하고 14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 5 명이 사단본부까지 접근했다가 보초병에게 사살되기도 했다.
15 일 아침이 되자 다무라 대대가 서쪽 방어선의 일부를 점령했을 뿐 일본군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가와구치 소장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명령을 내렸다.
헨더슨 비행장을 이륙한 미군기들이 후퇴하는 일본군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했고 , 에드슨 대대와 제 2/5 대대 병력들이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능선에서 완전히 쫓아내 버리고 다시 능선 전체를 차지했다.
( 피투성이 능선 )
한편 , 미즈노 대대는 교두보 동쪽을 지키는 맥켈비 중령의 제 3/1 대대를 공격해 왔다.
이치기 지대의 제 2진과 제 1 진의 생존병력으로 이루어진 미즈노 대대는 제 3/1 대대의 방어선에 돌격을 감행했으나 , 75mm 곡사포의 지원을 받은 제 3/1 대대의 방어선을 뚫지 못한 채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14 일 날이 밝자 미 해병대는 미즈노 대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경전차 6 대를 투입했는데 제대로 정찰도 안 된 상황에서 보병의 지원없이 전차만 투입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하여 투입된 전차 6 대중 3 대는 일본군의 47mm 대전차포에 의하여 격파당했고 , 1 대는 대전차함정에 빠져서 승무원 전원이 사살되었으며 , 1 대는 무한궤도가 끊어졌다.
살아남은 1 대는 혼비백산하여 교두보로 도망쳐 들어왔다.
비록 경전차 투입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지만 테나루 전투에서 미군 전차에게 호되게 당한 이치기 지대의 잔존병력들은 전차를 보고는 그 만 움츠러들어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15 일이 되자 해병대는 미즈노 대대의 주둔지역에 소규모 정찰대를 내보내어 위치를 확인하고는 75mm 및 105mm 곡사포로 포격을 퍼붓는 방식으로 피해를 입혔다.
결국 누적되는 피해를 견디지 못한 미즈노 대대는 16 일 아침에 대대장 미즈노 소좌를 포함한 200 여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철수해 버렸다.
교두보의 서쪽에서는 제 124 연대 제 2 대대를 기간으로 한 오카 대대가 제 3/5 대대의 방어선에 공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 제 3/5 대대는 75mm 곡사포의 화력지원을 받아가며 박격포와 기관총 , 소총으로 반격하여 오카 대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면 서 방어선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에서 해병대는 전사 및 실종 69 명 , 부상 194 명의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훨씬 컸다. 피투성이 능선을 공격한 주력 3개 대대에서만 장교 28 명을 포함하여 633 명이 전사하고 , 505 명이 부상을 입었다.
교두보의 동쪽과 서쪽을 공격헀던 미즈노 대대와 오카 대대에서도 최소한 200 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또한 식량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패배한 가와구치 지대의 주력이 1 주일에 걸쳐 정글을 통과하여 교두보 서쪽의 코컴보나까지 퇴각하는 과정에서 굶주림과 말라리아로 부상자 대부분을 포함하여 많은 병력이 정글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리하여 가와구치 지대의 병력 손실은 전체적으로 약 1,500 명에 달했다.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는 과달카날 전투 기간 중에 일본육군이 실시한 가장 위협적인 공격이었으며 , 또한 이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야말로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사흘 후인 1942 년 9 월 18 일에 4,000 여명의 병력을 보유한 제 7해병연대가 대량의 보급품과 함께 과달카날에 상륙한 시점에서 일본육군이 해병대를 제압하고 헨더슨 비행장을 차지할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으며 , 헨더슨 비행장을 차지하지 못하는 쪽은 과달카날 전투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피투성이 능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제 1 기습대대장 메릿 에드슨 대령은 이 전투의 공로로 의회명예훈장을 받았다.
( 제 1 기습대대장 메릿 에드슨 대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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