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제 7 해병연대
원래 해병제 1 사단 소속이었던 제 7 해병연대는 호주와 하와이 및 미서해안을 연결하는 보급로를 방어할 임무를 띠고 1942 년 1 월 6 일에 샌디에고를 출발하여 23 일에 사모아에 상륙하면서 제 1 사단 소속에서 벗어났다. 이후 제 7 해병연대는 사모아를 방어하면서 과달카날 상륙작전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 대신 제 2 해병연대가 제 1 사단 에 배속되어 과달카날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과달카날 상륙작전이 실시되기 전인 1942 년 6 월 20 일에 킹 제독은 니미츠 제독에게 9 월 1 일을 기하여 제 7 해병연대를 다시 해병제 1 사단 휘하로 돌려 놓으라고 권고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해병제 1 사단장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내심 9 월 이후 제 7 해병연대를 증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현실은 그리 만만치않았다.
( 해병제 1 사단장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장군.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48301861)
과달카날에 상륙한지 3 주 후인 1942 년 8 월 28 일에 터너 제독은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곰리 제독에게 제 7 해병연대를 사모아에서 빼내어 산타크루즈 제도의 은데니 섬에 상륙시키겠다는 계획을 제출했다.
원래 은데니 상륙작전은 제 2 해병연대가 실시하게 되어 있었으나 , 과달카날 상륙 당시 툴라기 방면의 저항이 예상밖으로 거세지자 반데그리프트 장군 휘하로 들어간 이후 그대로 툴라기 지역에 눌러앉아 있었다.
터너 제독의 의도를 알게 된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지휘관들 사이에 이런 갑론을박이 오가는 가운데서도 어쨌든 제 7 해병연대를 수송하기 위한 선단이 1942 년 8 월 28 일에 미서해안을 떠나 9 월 2 일에 사모아에 도착하여 제 7 해병연대와 75mm 곡사포를 장비한 제 1/11 대대 , 그리고 에스피리투산토를 방어할 제 5 해병방어대대의 일부 병력을 싣고 9 월 5 일에 피지에 도착했다.
그때 의외의 사건이 터졌다. 남서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차기 작전을 위하여 수륙양용부대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이미 남태평양해역군이 해병연대를 3 개나 사용하고 있으니 제 7 해병연대는 남서태평양해역군 휘하로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참고: 해군과 육군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어 해군은 육군지휘관 아래에서 작전을 수행하지 않으려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은 거의 원수지간과 같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태평양전쟁 기간동안 일본 육군과 해군은 내내 갈등이 심해 이것이 태평양전쟁의 패전의 원인을 일부 제공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미군 역시 육군과 해군 사이에 관계가 일본처럼 심하지는 않았으나 육군과 해군 사이가 매우 껄끄러웠다)
딱히 반박할 논리가 궁해진 킹 제독은 마셜 장군에게 일단 맥아더 장군의 주장에 원칙적으로는 찬성한다는 어중간 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졸지에 제 7 해병연대를 빼앗길 위기에 놓이게 되자 터너 제독은 당장 태도를 바꾸어 9 월 9 일에 은데니 상륙작전을 무기한 연기하고 , 반데그리프트 장군의 주장대로 제 7 해병연대를 과달카날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와 동시에 터너 제독과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입을 맞추어 제 7 해병연대는 과달카날에서 꼭 필요하며 , 아직 실시 되지도 않은 남서태평양해역군의 작전에 사용하기 위하여 당장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서 꼭 필요로 하는 병력을 빼낸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않는 억지라고 주장했다.
반격의 기회를 잡은 킹 제독도 재빨리 말을 바꾸어 터너 제독과 같은 논리로 제 7 해병연대를 보내달라는 남서태평 양해역군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 미함대 총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 어네스트 킹 제독.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48569069 )
이제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자신의 계획대로 제 7 해병연대를 교두보 강화에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터너 제독은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좁은 교두보내에 틀어박혀 방어에 전념하는 반데그리프트 장군의 방침에 반대하여 제 7 해병연대를 교두보 동쪽의 타이부 곶에 상륙시켜 교두보 내의 병력들과 함께 과달카날 섬의 일본군들을 과감하게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헨더슨 비행장이야말로 과달카날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열쇠이며 , 따라서 공세로 나아갈 충분한 병력이 확보되기 전에는 헨더슨 비행장 방어에 전념해야 한다고 믿고 있던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또다시 터너 제독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 리치먼드 켈리 터너 제독 )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터너 제독이 과달카날의 실상을 잘 모른다면서 직접 방문할 것을 제안했고 , 터너 제독은 9 월 12 일에 남태평양해역군 항공사령관인 맥케인 해군소장과 함께 과달카날로 날아갔다. 그날은 하필이면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가 시작된 날이었다.
터너 제독은 헨더슨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연속해서 날아드는 일본기들과 해가 지기 무섭게 아이언바텀사운드에 당당히 들어와서 함포사격을 가하는 일본함정들 , 그리고 모자라는 병력을 짜내어서 일본군의 맹공을 겨우겨우 막아내는 해병대의 고충을 직접 보면서 과달카날의 해병대가 결코 공세에 나설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절감했다.
교두보의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터너 제독은 결국 반데그리프트 장군의 주장대로 제 7 해병연대를 교두보 내에 상륙시키는데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 터너 제독은 이후로도 자주 과달카날에서의 공세적인 방침을 주장하여 반데그리프트 장군과 마찰을 빚었다. 지상군 사령관이 해군제독에게 자신의 전술에 대하여 설명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한 원인은 상륙작전에서 지휘권이양문제가 명확하지 않아서였다.
상륙작전시에 수송함에 탑승한 상태의 지상군이 함대 지휘관인 해군제독의 명령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 과달카날 상륙작전 당시에는 해군제독이 지상군에 대한 지휘권을 언제 지상부대 사령관에게 넘긴다는 조항이 없었다.
따라서 상륙한지 1 달이 더 지난 이 시점까지도 터너 제독은 공식적으로 엄연히 반데그리프트 장군의 직속 상관이었다.
1942 년 10 월 말에 남태평양 지역을 시찰하던 중에 이러한 지휘권의 난맥상을 목격한 토머스 홀콤 해병대 사령관이 킹 제독에게 상륙작전시의 지휘권 문제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여 양보를 얻어내었다.
그 결과 이후로는 상륙작전시 일단 공격개시선을 통과한 상륙부대의 지휘권은 자동적으로 해군제독에게서 지상군사령관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제 7 해병연대는 교두보 내에 상륙하여 교두보 강화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42 년 9 월 14 일에 에스피리투산토에 도착한 수송선단은 제 5 해병방어대대를 내려주고 , 과달카날로 향했다. 제 7 해병연대와 제 1/11 대대의 과달카날 상륙예정일은 9 월 18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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