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교두보 강화
1942 년 9 월 18 일 오전 5 시 50 분 , 제 65 임무부대는 과달카날의 쿠쿰에 무사히 도착하여 하역을 시작했다. 오전 10시에는 제 65 임무부대와 별도로 항공유를 싣고 온 구축함형 수상기모함 (AVD) 맥팔랜드와 경량 기뢰부설함 ( DM) 트레이시가 , 오후 1 시에는 수송함 벨라트릭스가 도착했다.
터너 제독의 기함인 맥콜리와 이 3 척의 함정이 양륙한 항공유는 합계 3,823 드럼이었다. 터너 제독은 수송함들의 안전을 위하여 12시간 동안 하역을 실시한 후 오후 6시에는 무조건 출항할 예정이었다.
이날은 일본군의 공습이 없어서 양륙작업이 12시간 동안 꾸준히 실시되었다. 제 7 해병연대 4,262 명이 무사히 상륙했고 , 각종 차량 147 대 , 37mm 산탄 10,000 발과 수류탄 10,000 발을 비롯한 각종 탄약 3 일치 , B 레이션 82 톤 , C 레이션 및 D 레이션 930 톤 , 싣고 온 공병장비의 90% 및 예비 부품 대부분 , 그리고 텐트의 60% 등이 양륙을 마쳤다.
( C- ration. 전투식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glob.egloos.com/2615128 )
저녁 6시에 출항할 때 수송함에는 병력 257 명 , 전차 15 대 , 전투식량 8,825 톤및 차량 73 대가 남아 있었다. 오후 6시가 되자 제 65 임무부대는 부상자 186 명과 일본군 포로 8 명을 싣고 , 나중에 도착한 3 척의 수송함과 함께 과달카날을 떠나 에스피리투산토로 향했다.
전력이 급감한 낙하산 대대도 이때 수송함들을 타고 과달카날을 떠났다. 밤이 되자 어김없이 도쿄특급이 도착했으나 , 일본함정들은 이미 떠나간 제 65 임무부대를 추격하지는 않았다.
제 65 임무부대가 싣고 온 전투식량의 10% 밖에 양륙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볼수 있듯이 당시 언제든지 적의 공격을 받을수 있는 전투지역에서의 양륙은 싣고 온 물자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양륙하느냐가 문제였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 미해군은 적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전투지역에 대한 보급은 아무리 길어도 12시간 내에 양륙을 마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따라서 보급품을 미리 트럭이나 트레일러에 적재한 채로 수송함에 싣는 방식으로 양륙속도를 높였다.
이런 방식으로 화물을 실을 경우 수송함의 적재량이 크게 줄어들지만 어차피 12시간 내에 양륙하지 못하는 보급품은 의미가 없었다. 나중에는 보급품들을 미리 규정된 크기의 화물용 나무받침대인 팔레트에 적재함으로써 양륙속도를 크게 높였다.
( 팔레트 )
또한 양륙속도를 올리려면 소수의 대형수송함보다는 소형수송함 여러 척이 훨씬 더 유리했다. 게다가 수송함이 작아지면 만일 1 척이 격침당하더라도 병력이나 장비 , 보급품의 상실량도 줄어들었다.
따라서 ,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미해군의 병력수송함 (AP 또는 APA) 이나 화물수송함 (AK 또는 AKA) 의 크기는 다소 줄어 들었다. 태평양전쟁 초기의 수송함들 중에는 배수량이 10,000 톤을 넘는 배들이 많았으나 , 1944 년부터 대량배치되기 시작한 주력 병력수송함인 해스켈 급의 배수량은 6,800 톤 정도였다.
물론 14,000 톤급 수송함 1 척이 건조비 , 연료 사용량을 비롯한 운용비 및 선원 수까지 모든 면에서 7,000 톤급 수송함 2 척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었다.
그러나 , 당시 미국의 조선 능력과 유류 사정 , 그리고 인력 충원 시스템은 다소의 비효율성을 감수하고라도 전술적 잇점 을 위하여 수송함의 크기를 줄이는 과감한 선택을 할수 있을만큼 충분한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 65 임무부대의 보급 성공으로 해병대원들의 처지는 한결 나아졌다. 무엇보다도 8 월 15 일부터 1 달 이상 하루 2끼로 버티던 해병대원들은 이때부터 하루 3 끼 식사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군 전사가들은 대부분 제 65 임무부대가 제 7 해병연대를 상륙시키는 동시에 대량의 보급품 양륙에 성공한 1942 년 9 월 18 일을 과달카날 전투의 실질적 분기점으로 평가한다.
과달카날 전투의 승부를 최종적으로 확정지은 것은 1942 년 11 월 15 일 새벽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이었지만 9 월 18 일에 제 7해병연대가 상륙하고 , 대량의 보급품이 무사히 양륙된 이후에는 일본육군이 헨더슨 비행장을 탈취할 기회는 사살상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다.
제 7 해병연대는 해병제 1 사단에서 최초로 해외에 파견된 연대였다.
그런만큼 당시 해병제 1 사단에서 가장 뛰어나고 고도로 훈련된 병력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해병대에 복무해 온 고참병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 7 연대는 실전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달카날에서 이미 치열한 실전을 경험한 제 1 연대 및 제 5 연대에 비하여 전투력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툴라기의 제 3/2 대대가 9 월 14 일에 과달카날 교두보로 들어온 데 이어 제 7 해병연대가 상륙함으로서 이제 교두보의 병력은 19,200 여명으로 늘어났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과달카날에만 보병대대 10개 , 인원 미달의 기습대대 1 개 , 거의 완편된 방어대대 1 개 , 75mm 및 105mm 곡사포를 가진 포병대대 4 개 , 그리고 전투공병대대 및 공병대대와 트랙터 대대 각 1 개씩을 보유하게 되었고 , 칵터스 항공대도 60 대 이상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942 년 9 월 19 일에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작전명령 11 - 42 호를 발령하여 교두보의 방어태세를 전면 개편했다.
우선 칵터스 항공대의 세력이 늘어나고 블랙캣 야간 정찰비행정이 활동을 늘림에 따라 교두보 해안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상륙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 테나루 전투와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에서 보듯이 일본군은 교두보의 북해안에 기습상륙하는 방식보다는 육로를 통하여 교두보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전투방식을 선호했다.
따라서 ,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해안선보다는 교두보 주변 , 특히 방어가 취약했던 교두보 남쪽의 방어선을 크게 강화했다.
( 교두보 방어 상황도. 원본은 여기로)
교두보는 룽가 강 하구 지역을 1 번으로 하여 반시계 방향으로 10 개의 방어구역으로 나누어졌다.
이들 중 해안선에 면한 1 번 , 2 번및 10 번 구역은 제 3 해병방어대대와 사단의 특별화기대대가 방어를 맡았고 , 야간에는 제 1 수륙양용트랙터대대가 1 번 구역 , 제 1 전투공병대대가 2 번 구역 , 제 1 공병대대가 10 번 구역의 방어를 지원했다.
해안선 방어 지원 임무는 교두보 남쪽 방어임무보다 인원 소요가 훨씬 적었기 때문에 전투공병대대 , 공병대대 및 수륙양 용트랙터대대의 병사들은 이제 낮에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좀더 많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제 3 방어대대와 특수화기대대는 교두보의 대공방어도 전담했고 , 2 번 구역과 10 번 구역의 해안선에는 5 인치 해안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 1 번 구역과 2 번 구역의 경계면 후방에는 사단예비대인 기습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나머지 7 개 구역은 각각 1 개 대대가 담당했으며 , 각 연대는 1 개 대대씩을 예비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교두보의 서남쪽인 3 번과 4 번 구역은 제 1 연대가 담당했고 , 룽가 강 서쪽의 5 번 구역은 9 월 14 일에 툴라기에서 건너온 제 3/2 대대가 방어했다.
피투성이 능선을 포함하는 룽가 강 동쪽의 6 번및 7 번 구역은 새로 상륙한 제 7 연대가 담당했고 , 일루 강을 따라 늘어선교두보의 동쪽 방어선인 8 번및 9 번 구역은 제 5 연대가 담당했다.
각 연대마다 보유한 예비대인 1 개 대대는 필요시에는 언제든지 사단예비대로 전용될 수 있었는데 , 통상적으로 매일 1 개연대의 예비대가 돌아가면서 사단예비대로 지정되어 대기했다.
해가 지면 사단예비대로 지정된 대대의 야영지에는 트럭들이 몰려와서 언제라도 신속하게 이동할수 있도록 밤새 대기했다.
9 월 18 일에 많은 차량이 양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병제 1 사단은 차량이 많이 모자랐다.
특히 후방의 참모들이 과달카날에서는 대형트럭의 운용이 어렵다는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1.5 톤 이상의 대형트럭들은 정수의 30% 만 보유한 상황이었다.
같은 이유로 155mm 곡사포를 보유한 제 4/11 대대도 과달카날 상륙작전 당시 뉴질랜드에 남겨졌다.
포병대대 4 개는 교두보의 중앙에 자리잡고 교두보 부근의 어느 지역이든지 즉각 사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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