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일본군의 절치부심
이치기 지대에 이어 가와구치 지대도 과달카날에서 참패를 당하자 라바울의 제 17 군 사령부는 대본영에 과달카날의 포기를 건의했다. 대본영 육군부의 반응은 격렬했다. 해군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과달카날에 병력들을 축차투입했다가 참패를 당하면서 완전히 체면을 구긴 육군부는 어떠한 댓가를 치르는 한이 있어도 과달카날 만큼은 반드시 점령하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육군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주둔하고 있던 제 2 사단의 2 개 연대와 제 38 사단을 라바울로 파견하여 제 17 군 지휘 하에 넣었으며 , 불과 3 명이던 제 17 군의 참모진에다가 8 명의 영관급 참모들을 새로 파견하여 제 17 군은 11 명의 참모진을 가지게 되었다.
대본영에서 파견된 참모 중에는 남방작전의 입안에 깊숙이 관여하고 , 일본군의 정글전투 전술의 발달에 큰 기여를 했으며 , 말레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서 작전의 신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츠지 마사노부 중좌도 포함되어 있었다.
( 츠지 마사노부(辻 政信) 중좌.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mirejet/110045541877 )
제 2 사단 제 4 연대는 이미 제 17 군 지휘 하에 있었고 ,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 패배 이후 과달카날에 수송되고 있었다. 대본영 육군부는 제 17 군 사령부에 2 개 사단을 모두 투입하여 단번에 과달카날의 해병대를 쓸어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 이번에는 제 17 군사령관 햐쿠다케 중장이 엉뚱한 실수를 저질렀다.
과달카날의 해병대 병력이 1 개 사단이라는 해군부의 주장을 받아들인 대본영 육군부와 달리 9 월 중순 현재 과달 카날의 해병대 병력이 7,500 명 수준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햐쿠다케 중장은 과달카날을 점령하는데 2 개 사단을 모두 투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제 2 사단은 모두 투입하되 제 38 사단은 2 개 대대만 투입하고 , 제 38 사단의 주력은 차후 뉴기니 작전에 대비하여 라바울에 남겨 놓기로 했다.
그래도 새로 투입되는 병력은 17,500 명에 달했으며 , 이미 상륙해 있는 병력을 합치면 과달카날에서 운용가능한 병력은 20,000 명에 달하는 것이었다.
햐쿠다케 중장은 이 정도의 병력이면 7,500 명에 불과한 과달카날의 미군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로 야습으로 승부를 걸던 지난 전투와 달리 이번에는 강력한 포병화력을 앞세워서 정공법으로 해병대의 방어선을 뚫을 생각이었다.
따라서 야포 176 문과 2 개월간 작전 가능한 포탄 , 그리고 , 25,000 명의 1 달치 식량 등을 4,000 명의 병력과 함께 수송선 6척을 동원하여 수송할 계획이었다. 나머지 병력들은 주로 구축함을 이용한 도쿄 특급으로 실어나를 예정이었다.
일본해군도 육군의 공세에 발맞추어 칵터스 항공대의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하여 공습을 강화하고 , 10 월 12 일 , 14 일 , 그리고 15 일 새벽에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할 예정이었다.
특히 14 일 새벽에는 전함 공고와 하루나를 동원하여 헨더슨 비행장에 치명타를 가할 생각이었다.
한편 제 17 군 참모장 후타미 아키사부로 소장은 과달카날의 미군 병력이 햐쿠다케 중장의 판단보다 훨씬 많다면서 최소한 완편 2 개 사단의 병력과 야전 중포 5 개 연대 , 충분한 탄약 보급 , 그리고 항공지원이 없이는 과달카날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고 끝까지 주장하다가 그만 경질되고 말았다.
일본군에게는 불행하게도 후타미 참모장이 옳았다. 교두보 내의 미군은 햐쿠다케 장군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일본제 2 사단이 상륙을 완료한 10 월 15 일에는 이미 미육군제 164 보병연대가 상륙한 이후라서 교두보 내의 미군 병력만 23.088 명에 달했고 , 툴라기 주둔 병력을 합치면 과달카날 지역의 미군병력은 27,727 명에 달했다.
제 3 차 공세를 위하여 도쿄 특급이 부지런히 병력들을 실어나르고 있던 1942 년 9 월 30 일에 교두보 내로 중요한 손님이 찾아왔다. 9 월 20 일에 진주만을 떠나 남태평양해역군을 시찰하고 있던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대장이 과달카날에 시찰을 온 것이었다.
니미츠 제독은 과달카날에서 해병대원들을 격려하고 , 훌륭한 전공을 세운 병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했으며 , 사단본부에서 하룻밤 머물면서 반데그리프트 장군과 과달카날을 둘러싼 정세와 앞으로의 대응 방향에 대하여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 기회에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니미츠 제독에게 헨더슨 비행장의 확보야말로 과달카날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이며 따라서 헨더슨 비행장의 안전을 위태롭게 할수 있는 대규모의 공세는 충분한 병력상의 우위를 달성한 이후에나 실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록 그 자리에서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지만 니미츠 제독은 그날 이후로 반데그리프트 장군의 방침을 적극 지지했다.
니미츠 제독은 다음날 반데그리프트 장군에게 과달카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과달카날 전투의 승리를 위하여 자신이 할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제 2 기습대대장 에반스 칼슨 중령에게 훈장을 달아주고 있는 니미츠 제독.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해병제 1 사단장 반데그리프트 소장. 칼슨 중령의 뒤에 선 사람들은 왼쪽부터 부사단장 윌리엄 루퍼투스 준 장 , 제 5 해병연대장 메릿 에드슨 대령 , 제 2/1 대대장 에드윈 폴록 중령 , 제 223 해병전투비행대대장 존 스미스 소 령. 1942 년 9 월 30 일에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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