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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과달카날 전투 (35) -제 2 차 마타니카우 전투 /blog.naver.com/imkcs0425/60111482021


35. 제 2 차 마타니카우 전투

제 1 차 마타니카우 전투에서 일본제 4 연대에게 참패한 해병대는 열흘 후에 몇 배로 설욕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9 월 말에 진주만의 암호 해독반은 일본군이 과달카날 섬에 150mm 곡사포를 양륙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사정거리가 11,900m 에 달하는 150mm 곡사포가 코컴보나에 배치되면 헨더슨 비행장을 타격할 수 있었다.
당시 해병대는 75mm 와 105mm 곡사포 밖에 없었으므로 일본군의 150mm 곡사포와 정면대결하기는 어려웠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즉시 155mm 곡사포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 교두보 서쪽의 일본군을 몰아내고 , 일본군의 150mm 곡사포가 헨더슨 비행장을 사정거리에 넣지 못하도록 코컴보나를 점령하는 대규모 공격작전을 계획했다.

( 일본군의 96식 150mm 곡사포 )
The Type 96 15 cm howitzer (九六式十五糎榴弾砲, Kyūroku-shiki Jyūgo-senchi Ryūdanhō) was a 149.1 mm calibre howitzer used by the Imperial Japanese Army during World War II. It was intended to replace the Type 4 15 cm howitzer in front line combat units from 1937, although it fired the same ammunition.[2] The Type 96 designation was given to this gun as it was accepted in the year 2596 of the Japanese calendar (1936).[3]

이번 공격은 모두 6개의 보병대대가 참가하는 대규모 공세가 될 것이었다. 먼저 제 5 연대의 2개 대대가 마타니카우 강 東岸에 진출하여 마타니카우 강 서안에 주둔한 일본육군 제 4 연대의 주력을 고착견제하는 동안 주력인 3개 대대 ( 활링부대 및 제 7 연대의 2개 대대 ) 가 마타니카우 강 상류에서 강을 건너 남쪽으로부터 일본군을 포위한 다음 공격할 예정이었다. 1 개 대대는 교두보에서 예비대로 대기했다.
만일 만사가 제대로 된다면 일본군의 주력을 크루즈 곶 동쪽 지역에서 포위섬멸하고 그 여세를 몰아 바로 코컴보나까지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이 직접 전투를 지휘할 예정이었다.
윌리엄 활링 대령은 과달카날 상륙 직후 대령으로 승진했다. 해병제 1 사단에는 더 이상 대령에 맞는 보직이 없었으나 , 그는 자신에게 맞는 보직을 찾아 과달카날 섬을 떠나지 않고 교두보 내에서 정찰 및 저격학교를 운영했다.
이 학교에서는 각 중대마다 사격실력이 뛰어난 병사를 한 기수 당 2 명씩 받아들여 약 10 일에서 2 주에 걸쳐 정찰 및 저격 훈련을 실시했는데 이론 및 교두보 내에서의 실습과 더불어 자주 활링 대령과 함께 실제로 교두보 밖으로 정찰을 다니면서 실전기술을 익혔다.
이 방면에 상당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활링 대령으로부터 집중적인 교육을 받은 병사들은 정찰 및 저격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각 중대로 돌아가서는 정찰 및 저격활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활링 대령은 제 2 차 마타니카우 전투에서 제 2/3 대대에다가 자신이 훈련시키던 1 개 소대 규모의 정찰 및 저격학교 학생들을 증원한 활링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다.
정찰 및 저격학교 학생들의 정찰활동이 성공적이고 효율이 좋았으므로 미해병대는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이후 1943 년 4 월부터 각 연대의 본부 및 지원중대 내에 43 명으로 이루어진 전문적인 정찰 및 저격소대를 운용했다.
각 공격부대는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았다. 제 1/11 연대가 제 7 연대를 , 제 2/11 대대가 제 5 연대를 지원할 것이었으며 , 105mm 곡사포를 장비한 제 5/11 연대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띈 활링 부대를 지원할 예정이었고 , 제 3/11 대대는 예비대로서 필요한 지역에 추가로 화력지원을 얹어 줄것이었다.
칵터스 항공대는 공중정찰 및 야포의 탄착관측과 함께 근접항공지원임무를 담당했다. 공격개시일은 10 월 7 일로 결정했다.

( 제 2 차 마타니카우 전투상황도. 사람 모양 아이콘은 제 1/7 대대에게 포착될 당시 일본제 1/4 대대의 위치 )

한편 , 일본육군 제 4 연대장 나카구마 대좌도 해병대를 공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 1 차 마타니카우 전투의 승리로 콧대가 한껏 높아진 나카구마 대좌는 일본군의 제 3 차 공세를 앞두고 해병대 교두보의 서쪽을 공격하여 해병대의 기세를 꺾어두고 , 주력이 공격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겠다고 라바울에 제안하여 허가를 얻었다.
나카구마 대좌는 공격개시일을 해병대보다 하루 늦은 10 월 8 일로 정하고 , 1 개 중대 병력을 마타니카우 강 동안으로 보내어서 하구 쪽에 미리 교두보를 만들었다.
해병대와 일본제 4 연대가 동시에 공세적으로 나오기 시작함에 따라 10 월 초부터 마타니카우 강의 동안에서는 양측의 정찰대가 충돌하여 소규모 총격전이 벌어지는 빈도가 점점 많아졌다.
1942 년 10 월 7 일 오전 7시가 되자 해병대의 공격대대들이 교두보를 출발했다. 선두부터 차례로 제 3/5 대대 , 제 2/5 대대 , 활링부대 , 제 2/7 대대 ,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1/7 대대가 뒤따랐다.
예비대인 맥켈비 중령의 제 3/1 대대는 출동명령이 내리면 30 분 이내에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고 교두보 내에서 대기했다. 활링부대를 선두로 한 주력부대가 도중에 제 5 연대와 헤어져 남쪽으로 내려가자 소수의 일본군들이 사격을 가해왔다.
활링부대와 제 7 연대는 소규모의 일본군들을 일일이 상대하지 않고 빨리 전진하는데 주력하여 그날 저녁에 동서로 흐르는 마타니카우 강의 지류를 건넌 지점에서 야영했다.
한편 해안쪽으로 진격한 제 3/5 대대는 10 월 7 일 오전 10시부터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 후속하던 제 2/5 대대가 남쪽으로 빠져나가 먼저 마타니카우 강의 동안에 도달한 다음 일본군의 측면을 위협했다.
그러자 일본군들은 마타니카우 강의 하구로 물러나서 미리 만들어 둔 진지에 틀어박혔다.
제 3/5 대대는 제 2/5 대대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들을 공격했으나 해가 질 때까지 마타니카우 강 동안의 일본군 진지를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제 3/5 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제 1 기습대대를 보냈으나 상륙 이래 치열한 격전을 계속 치르면서도 전혀 보충을 받지 못한 제 1 기습대대의 병력은 이제 200 명 정도로 줄어들어 1 개 중대 수준이었다.
제 1 기습대대는 마타니카우 강 하구의 모래사장을 방어했다.
만일 일본군이 탈출하려면 이 모래사장을 통하여 마타니카우 강 서안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이 지역은 포위망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곳이었다.
그날밤 , 제 5 연대의 전선에서는 밤새도록 해병대원들이 소란스럽게 LVT 에 탔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마치 금방이라도 강을 건너 공격해 올것처럼 마타니카우 강 서안의 일본군들을 압박하여 남쪽으로 우회한 주력부대로부터 일본군의 관심을 떼어 놓으려고 했다.
다음날인 10 월 8 일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는데 어찌나 심하게 퍼붓는지 헨더슨 비행장에서 항공기가 이륙을 할수 없었다.
할수 없이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는 공격은 9 일로 연기되었다.
그동안 마타니카우 강 하구에서는 제 5 연대가 마타니카우 강 동안의 일본군 진지를 계속하여 압박하고 있었다.
10 월 8 일 하루 종일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제 5 연대의 압박에 시달리던 일본군은 오후 6시 30 분에 최후의 탈출을 감행했다.
일본군들은 갑자기 방어진지를 뛰쳐나와 남쪽 모래사장에 자리한 제 1 기습대대의 방어선으로 돌격했다.
곧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 양측 다큰 피해를 입었다.
제 1 기습대대에서 12 명이 전사하고 , 22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 일본군은 59 명이 전사했다.
제 1 기습대대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한 소수의 일본군들은 모래사장을 건너 마타니카우 강 서안으로 탈출했다.
그날 오후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남태평양해역군사령부로부터 조만간 일본군의 대공세가 예상된다는 경고를 받았다.
통신감청 결과와 더불어 항공정찰 및 해안감시대원들의 보고가 모두 최소한 1 개 사단에 해당하는 대규모의 일본군이 과달카날로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병력들을 교두보에서 하루 이상 걸리는 거리까지 보낼 수는 없었다.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어쩔 수 없이 코컴보나를 점령하기로 한 작전의 제 2 단계를 포기해야만 했다.
한편 , 일본제 4 연대장 나카구마 대좌는 10 월 8 일 오후가 되자 마타니카우 강 동안에 전개한 미해병대의 행동으로부터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어젯밤만 해도 당장이라도 강을 건널 것 같이 설쳐대던 해병대가 오후가 되도록 강을 건너려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던 나카구마 대좌는 밤늦게야 1 개 연대 규모의 해병대가 남쪽으로 향한다고 전해온 정찰대의 보고를 생각해 내었다.
마타니카우 강 동안의 해병대가 자신의 연대를 고착견제하는 동안 해병대의 주력이 마타니카우 강 상류를 건너 후방으로부터 자신의 연대를 포위하려는 속셈임을 알아챈 나카구마 대좌는 즉시 부하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제 4 연대는 강 건너편의 해병대에게 들키지 않게 천천히 질서정연하게 철수를 시작했다.
10 월 9 일 아침이 되자 활링부대를 선두로 한 해병대의 주력이 마타니카우 강의 상류를 건너 쾌속으로 북상했다.
활링부대는 마타니카우 강을 따라 솟아있는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신속하게 북상했고 , 하네켄 중령의 제 2/7 대대는 활링부대의 약 900m 서쪽에서 두번째 능선을 따라 북상했다.
가장 서쪽에서는 풀러 중령의 제 1/7 대대가 세번째 능선을 따라 북상했다.
활링부대와 제 2/7 대대는 이미 빠져나가 버린 일본군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 가장 서쪽에서 북상한 제 1/7 대대장 풀러 중령은 대대가 진격하던 능선의 좌측 계곡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의 후미인 일본제 4 연대 제 1 대대를 발견했다.
일본군들은 이미 포위망을 빠져나간 상태이므로 뒤늦게 능선을 뛰어내려가 추격한다고 해도 별로 큰 전과를 얻을 수 없었다.
풀러 중령은 순식간에 훌륭한 판단을 내렸다.
그는 포병대에 연락하여 계곡에 포격을 요청하고는 대대의 박격포들을 총동원하여 계곡에 포격을 퍼부었다.
그 동안 대대의 기관총들은 주변의 고지에 자리잡고 계곡을 빠져나가려는 일본군들을 사살할 준비를 갖추었다.
철수하던 일본군들은 좁은 계곡에서 우박같이 쏟아지는 미군의 105mm 및 75mm 곡사포탄과 제 1/7 대대의 박격포탄을 얻어맞아 치명적 인 피해를 입었다.
죽음의 계곡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서쪽의 능선을 기어올라갔던 일본군들은 동쪽 능선에 자리잡은 제 1/7 대대의 기관총들로부터 소나기같 은 총탄세례를 받았다.
풀러 중령은 대대가 보유한 박격포의 포탄이 완전히 떨어진 후에야 포격을 중지시켰다.
해병대는 제 2 차 마타니카우 전투가 진행된 3 일 동안 75mm 포탄 2,188 발과 105mm 포탄 1,063 발을 발사했는데 대부분의 포탄을 마지 막날 일본제 4 연대 제 1 대대를 포격할 때 사용했다. 이러한 집중포격의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일본군들은 이 계곡에서만 약 690 명의 전사자를 기록함으로써 제 4 연대 제 1 대대는 사실상 전멸했으며 , 3 일 동안 일본군의 전사자 수는 최소한 700 명이 넘었다.
해병대의 전사자는 65 명 , 부상자는 125 명이었다.
10 월 9 일 오후 2시 , 활링대대와 제 7 연대는 마타니카우 강의 서쪽 해안에서 합류한 다음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 교두보로 철수했고 , 해병대는 마타니카우 강의 동안을 따라 강력한 방어선을 만들었다.
이로써 제 2 차 마타니카우 전투가 끝났다. 비록 처음 목적인 코컴보나를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제 1 차 마타니카우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면서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인 제 3 차 공세를 앞두고 적의 기선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 마타니카우 강 부근에서 일본군을 일소하여 마타니카우 강의 동안을 따라 강력한 전진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Dead soldiers from the Japanese 2nd Battalion, 4th Infantry Regiment lie piled in a ravine after being killed by mortar and small arms fire from U.S. Marines on 9 October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