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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과달카날 전투 (33) -제 1 차 마타니카우 전투 /blog.naver.com/imkcs0425/60111346211



33. 제 1 차 마타니카우 전투

제 7해병연대의 상륙으로 과달카날에서 활용가능한 병력이 19,200 여명으로 늘어나자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교두보를 확장시키고 싶어했다. 그첫 단계로 1 개 대대를 마타니카우 강 너머로 진출시켜 그곳의 일본군들을 일소한 다음 제 1 기습대대를 마타니카우 강 동안에 주둔시켜 강력한 전진방어기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 일본군을 공격하는 임무는 교두보에 막 도착하여 원기가 넘치는 루이스 풀러 중령의 제 1/7 대대가 맡게 되었다. 제 1/7 대대는 교두보에서 오스텐 산 기슭까지 남하한 다음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마타니카우 강의 상류지점까지 서진하여 강을 건널 계획이었다. 강을 건넌 다음에는 북상하면서 일본군을 섬멸한다는 구상이었다.
이 계획을 짜는 과정에서 반데그리프트 장군을 포함한 해병대 지휘관들은 일본군 지휘관들과 똑같은 실수를 범했다. 즉 상대해야 할 적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라바울의 일본제 17 군 사령부에서는 에드슨 대대의 타심보코 습격 소식을 듣고는 가와구치 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9 월 11 일 밤에 일본 제 2사단 소속인 제 4 연대 제 2 대대를 교두보 서쪽의 카밈보에 상륙시켰다. 제 2/4 대대보다 먼저 카밈보에 상륙했던 오카 부대는 이미 동쪽으로 떠난 이후였으므로 제 2/4 대대는 오카 부대와 접촉하지 못하고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후 9 월 말까지 제 4 연대의 제 1 대대 및제 3 대대도 잇따라 상륙함으로써 크루즈 곶과 마타니카우 강 서안에 걸쳐 약 1,800 명에 달하는 일본군들이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 악천후로 인하여 제대로 항공정찰을 하지 못한 해병대는 마타니카우 강 부근과 교두보 남쪽의 오스텐 산에 걸친 지역에는 상륙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고 또다시 피투성이 능선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 오카 부대의 잔존병력만이 남아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1942 년 9 월 23 일 , 제 1/7 대대는 교두보를 떠나 오스텐 산 방면으로 남하했다.
두꺼운 열대우림으로 뒤덮힌 지형은 마치 종이를 구겨놓은 듯 몹시 울퉁불퉁하여 행군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다음날인 24 일에 제 1/7 대대는 오스텐 산 기슭에서 오카부대의 기습을 받아서 7 명이 전사하고 , 25 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18 명은 걸을 수가 없어서 들것이 필요했다.
풀러 중령은 사단본부에 들것 18개를 요청했는데 , 풀러 중령의 요청을 받은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걱정이 되었다.
험한 정글지형에서는 들것 하나당 최소한 6 명이 필요하므로 들것 18개를 후송하려면 100 명 이상의 병력이 전열에서 탈락한다는 걸 뜻했다.
풀러 중령의 병력이 모자랄 것을 걱정한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로제크란 중령의 제 2/5 대대에게 들것 18개를 들려서 풀러 중령에게 증원군으로 파견했다.
뜻밖에 부하들이 많이 생기자 풀러 중령은 제 1/7 대대의 A 중대 및 C 중대에게 들것을 들려서 교두보로 돌려보냈다. 제 1/7 대대의 B 중대 및 화기중대인 D 중대 , 그리고 제 2/5 대대는 교두보의 남쪽 방어선과 평행하게 정글을 가로질러 26 일 아침에 마타니카우 강의 상류에 도달했다.

( 제 1 차 마타니카우 공격 상황도)

그런데 막상 마타니카우 강의 상류에 도착해보니 강 건너편에 자리한 일본군 진지로부터 총탄이 쏟아져서 도저히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할수 없이 제 1/7 대대와 제 2/5 대대는 마타니카우 강의 서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강을 건널 기회를 노렸으나 강 건너편에는 일본군의 진지가 연속되어 있어서 강을 건널 장소가 없었다.
결국 26 일 오후 2시에 해안에 도달한 풀러 중령은 제 2/5 대대에게 강을 건너라고 명령했다.
제 2/5 대대의 E 중대 및 G 중대가 우격다짐으로 강을 건너려고 했으나 일본군 진지에서 쏟아지는 치명적인 기관총 사격을 받아 25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실패했다.

Matanikau 강을 건너는 미해병대원들

오후 4 시에 풀러 중령의 요청에 따라 포병대가 일본군 진지에 야포 사격을 가하였고 , 칵터스 항공대가 폭격을 가했지만 여전히 일본군 방어선은 건재했다.
저녁이 되자 교두보를 출발한 제 1 기습대대가 제 5 연대장 에드슨 대령과 함께 풀러 부대에 합류했다.
들것을 들고 교두보로 철수했던 제 1/7 대대의 A 중대도 이때 다시 제 1/7 대대에 복귀했다.
제 1 기습대대장이었던 에드슨 중령은 1942 년 9 월 20 일에 대령으로 승진했다.
에드슨 대령은 미본토로 돌아간 헌트 대령의 후임으로 제 5 연대장이 되었고 , 제 1 기습대대장직은 부대대장이었던 그리피스 중령이 이어받았다.
에드슨 대령은 도착하자 곧제 1/7 대대 , 제 2/5 대대 , 그리고 제 1 기습대대로 이루어진 임시연대를 지휘했고 , 제 1/7 대대장 풀러 중령은 부연대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에드슨 대령은 교착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3 면에서 동시에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즉 27 일 날이 밝으면 제 1 기습대대가 남쪽으로 출발하여 마타니카우 강 상류를 건너 일본군을 남쪽에서 공격하고 , 제 1/7 대대는 상륙주정을 타고 크루즈 곶 너머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동쪽에서 협격하기로 했다.
그동안 제 2/5 대대는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 일본군을 동쪽에서부터 압박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 계획은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26 일 밤에 일부 병력을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 동쪽으로 진출시켜 마타니카우 강 동쪽의 야트막한 언덕에 매복시켜 두었다.
27 일 아침에 남쪽으로 진출하던 제 1 기습대대는 해안에서 남쪽으로 약 1,400m 떨어진 지점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렸다.
야트막한 언덕 2 곳에서 쏘아대는 치명적인 십자포화와 척탄통의 사격에 의하여 대대장 그리피스 중령이 부상을 입고 , 피투성이 능선 전투의 영웅으로 명예훈장이 수여될 예정이었던 부대대장 베일리 소령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전진이 중단되었다.
갑자기 대대장직을 수행하게 된 어윈 대위가 에드슨 대령에게 상황보고를 했는데 너무나 당황한 상태에서 감도가 안 좋은 무전기로 보고하다보니 내용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에드슨 대령은 기습대대가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착각했다. 에드슨 대령은 계획대로 제 1/7 대대의 A 중대 , B 중대 및 D 중대에게 크루즈 곶 너머에 상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9척의 상륙주정에 분승한 3 개 중대는 구축함 벨라드의 호위 하에 마타니카우 강 앞바다를 가로질러 29 일 오후 1 시에 크루즈 곶 너머 서쪽해안에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상륙했다.
그동안 제 2/5 대대는 오후 1 시 30 분부터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려고 했으나 또다시 일본군의 치열한 사격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제 1/7 대대의 3개 중대를 이끌고 크루즈 곶 너머의 서쪽 해안에 상륙한 부대대장 로저스 소령은 즉시 내륙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 해안에서 약 500m 정도 내륙으로 진격했을 때제 1/7 대대는 가공할만한 박격포와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부대대장 로저스 소령이 박격포탄에 맞아 전사하고 , B 중대장 자츠 칵스 대위가 부상을 입었다.
제 1/7 대대가 제 자리에 꼼짝 못하고 못박혀 있는 동안 일본군의 일부 병력이 해안선과 제 1/7 대대 사이에 끼어들어서 대대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졸지에 완전 포위된 상황에서 대대를 지휘하게 된 찰스 켈리 대위는 부하들에게 원형으로 방어선을 형성하라고 명령한 다음 무전기로 미친듯이 구원요청을 했으나 , 일본군 폭격의 여파로 통신이 되지 않았다. 오후 1 시에 일본군 폭격기 18 대가 헨더슨 비행장을 노리고 내습해 왔다.
이때 구축함 발라드는 깜짝 놀라서 해안선에서 물러났고 , 헨더슨 비행장을 노린 폭탄은 대부분 빗나갔으나 그중의 1 발이 하필이면 사단 통신소에 떨어졌다. 그리하여 상당시간 동안 사단의 통신이 불능이 되었다.
켈리 대위의 구원요청은 에드슨 대령의 무전기로는 수신되지 않았고 , 이럴 경우 일반적으로 사단 통신소에서 중계를 해주는데 마침 사단통신소가 그 모양이 되었으니 구원요청을 받아 줄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나마 켈리 대위의 무전기도 잠시 후 일본군의 박격포탄에 맞아 부서져 버렸고 , D 중대의 81mm 박격포탄도 50 발 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제 1/7 대대의 3개 중대는 꼼짝없이 일본군에게 포위된 채로 전멸할 운명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구원은 하늘에서 왔다.  데일 레슬리 소위가 조종하는 돈틀레스 1 대가 해안선을 따라 정찰을 하고 있다가 해병대와 교전 중인 일본군들을 발견하자 저공으로 내려와서 일본군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돈틀레스를 발견한 제 1/7 대대원들이 재빨리 러닝셔츠를 벗어서 원형방어진의 가운데에다가 커다랗게 ' HELP' 라고 표시했다. 이 글자를 발견한 레슬리 소위가 즉시 마타니카우 강 하구에 있는 에드슨 대령에게 무전기로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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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D 돈틀레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blog.naver.com/rectek2/10031674207)

자신의 대대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풀러 중령은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풀러 중령은 마타니카우 강 주변에 있던 해군주정들을 닥치는 대로 불러모아서는 모두 이끌고 앞바다에 떠있던 구축함 발라드로 갔다.
발라드의 함장은 풀러 중령의 요구에 따라 즉시 제 1/7 대대를 구하러 크루즈 곶으로 접근했고 , 그 뒤를 상륙주정들이 허둥지둥 따라갔다. 제 1/7 대대원들은 발라드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풀러 중령은 발라드 함상에서 제 1/7 대대에게 해안가로 후퇴하라고 명령했고 , 발라드가 발광신호로 이 명령을 전달했다.  그러나 , 완전히 포위된 제 1/7 대대가 해안으로 후퇴하려면 발라드가 함포사격으로 해안과 제 1/7 대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일본군들을 몰아내 주어야 했는데 무전기가 없는 켈리 대위는 이 요청을 발라드에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로버트 레이스브룩 병장이 나섰다.  그는 일본군의 총탄이 빗발치는 곳에서 잘 보이는 높은 바위에 올라가서 수기 신호로 켈리 대위의 요청을 발라드에 전달했다.  곧 발라드의 5 인치 함포가 불을 뿜기 시작하자 해안과 제 1/7 대대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일본군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면서 해안으로의 퇴로가 열렸다.
레이스브룩 병장은 대대를 구한 이 용감한 행위로 해군십자훈장 ( Navy Cross) 을 받았다.

( 해군 십자훈장 Navy Cross)

이때쯤 통신기능을 회복한 사단본부에서는 포병대인 제 2/11 대대에게 지원사격을 명령했다. 제 2/11 대대는 제 1/7 대대의 동쪽에 집중적으로 포탄을 쏟아부어서 마타니카우 강 하구 지역에 있던 일본군 주력이 제 1/7 대대를 공격하러 서진하지 못하도록 봉쇄했다.
철수는 가장 심한 피해를 입은 A 중대부터 시작하여 B 중대 , 마지막이 D 중대의 차례였다. A 중대의 앤토니 말리노프스키 하사는 후퇴 도중 BAR 사수가 전사하자 자신이 대신 BAR 를 집어들고는 A중대의 최후미에서 거의 혼자서 중대의 철수를 엄호다가 결국 전사했다.
말리노프스키 하사에게도 해군십자훈장이 추서되었다.

제 1/7 대대가 해안에 도착하여 방어진을 형성하자 발라드를 뒤따르던 상륙주정들이 해안에 다가갔다. 그때 크루즈 곶과 해병대 앞쪽의 능선에 있던 일본군의 기관총탄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상륙주정들은 도저히 진입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발라드는 해안의 제 1/7 중대를 지원하느라고 크루즈 곶과 해안선에서 상륙주정들을 공격하는 일본군에게까지 미처 손이 닿지 않았다. 그때까지 상공에 떠있던 레슬리 소위가 위험을 무릅쓰고 저공비행하여 크루즈 곶의 일본군들을 기총소사했으나 일본군의 기관총은 건재했다.
이때 상륙주정의 정장이던 해안경비대의 더글러스 먼로 하사가 나머지 상륙주정들을 설득하여 비오듯이 쏟아지는 일본군의 십자포화를 뚫고 해안에 진입했다. 먼로 하사의 상륙주정은 가장 심하게 사격을 받는 가장 동쪽에서 진입하여 나머지 주정들이 제 1/7 대대원들을 태우는 동안 총알막이 역할을 했다.
스스로 상륙주정의 기관총을 잡고 일본군과 교전하던 먼로 하사는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먼로 하사에게는 미군 최고의 영예인 의회명예훈장 ( Congressional Medal of Honor) 이 추서되었고 , 상륙주정의 승무원들 중 부상을 입은 월터 베넷과 새뮤얼 로버츠는 해군십자훈장을 받았다. 제 1/7 대대를 수용한 상륙주정들은 구축함 발라드의 호위를 받으면서 교두보로 돌아왔다.

( 의회명예훈장 Congressional Medal of Honor)

제 1/7 대대는 24 명의 전사자와 23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기습대대와 제 2/5 대대도 제 1/7 대대가 무사히 탈출한 후 곧 후퇴했는데 , 기습대대와 제 2/5 대대는 36 명의 전사자와 77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그리하여 비참한 실패로 끝난 제 1 차 마타니카우 전투에서 해병대는 60 명의 전사자와 100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정확하게 알수 없으나 해병대보다 훨씬 가벼운 피해를 입은 것은 확실하다.
일본제 4 연대는 해병대의 강력한 공격을 물리치면서 사기가 크게 올랐다. 한편 , 해병대는 교두보 서쪽의 방어선에 철조망을 늘리고 지뢰를 심어 방어를 강화하면서 설욕할 기회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