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에스퍼란스 해전 (2) - 아쉬운 승리
제 64 기동부대는 1942 년 10 월 11 일밤 9시경에 과달카날 근해에 도달하여 섬의 서해안을 따라 북상했다. 9시 30 분에 스코트 제독은 함대 속력을 20 노트로 줄이면서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와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각각 2 대씩의 킹피셔 정찰기를 사출했다.
그런데 이 정찰기 중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발진한 1 대의 정찰기가 적재한 조명탄이 발화하는 바람에 기체가 화염에 휩싸이면서 해상에 추락하고 말았다. 당시 미함대에서 북서쪽으로 80km 떨어져 있던 고토 제독의 포격부대가 이 화염을 보고 과달카날의 일본군이 보낸 신호라고 생각하고 발광신호로 답신했다. 이 발광신호는 너무 약해서 제 64 기동부대가 볼 수는 없었다.
고토 제독의 부하 장교들 중 일부는 과달카날까지의 거리가 아직 너무 멀고 , 자신들의 신호에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방금 본 불빛이 적의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보 섬 해전에서 그토록 혼이 난 미함대가 감히 야간에 활동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고토 제독은 부하들의 의견을 간단히 묵살했다.
마치 사보 섬 해전의 양상이 거꾸로 재현된 듯한 모습이었다. 10 월 11 일 오후 10시 35분부터 제 64 기동부대는 전투에 대비하여 단종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선두에는 구축함 파렌홀트 , 던칸 , 라피가 나란히 서고 , 그 뒤로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 , 경순양함 보이스 , 중순양함 솔트레이크시티 , 경순양함 헬레나의 순서였고 , 뒷쪽에는 구축함 뷰캐넌과 맥칼라가 위치했다.
구축함 사이의 간격은 약 450m, 순양함 사이의 간격은 약 540m, 구축함열과 순양함열 사이의 간격은 약 630m 정도였다. 오후 11 시 25 분 , 제 64 기동부대에서 유일하게 SG 레이더를 장비한 헬레나가 북서쪽으로 25,000m 떨어진 해상에서 20 노트의 속력으로 남하중이던 고토 제독의 포격부대를 발견했는데 , 일본함대는 레이더 화면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 확신을 가지지 못한 헬레나의 함장 길버트 후버 대령은 이 접촉사실을 스코트 소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11 시 32 분에 스코트 소장은 제 64 기동부대에 180 도 선회를 명했다. 그런데 스코트 소장은 훈련할 때 180 도 선회시 선두의 구축함열과 순양함열이 분리하여 동시에 선회하고 , 구축함들은 선회시 순양함의 외곽을 보호하면서 선회가 끝나면 다시 선두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선회했다.
( 제 64 기동부대가 훈련한 선회방식 )
이 방식은 일견 일리가 있었으나 , 문제는 캄캄한 밤에 특히 적함대가 근접한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선회하다가는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많았다. 그리고 실제로 혼란이 발생했다.
11 시 32 분에 선회를 실시하는 순간 두번째로 항진하던 구축함 던칸의 사격통제레이더가 북서쪽에서 접근하던 일본함대를 포착했다.
던칸은 선회하다 말고 , 레이더에 나타난 희미한 음영을 쫓아서 속력을 30 노트까지 올리면서 서쪽으로 직진했다. 던칸의 뒤를 따르던 라피는 선회를 계속하여 속력을 올리면서 파렌홀트의 뒤에 따라붙었다.
( 에스퍼란스 해전 상황도 )
선회를 실시한 지 10 분 후인 오후 11 시 42 분에 헬레나의 SG 레이더가 북서쪽 거리 9,600m 에서 다시 일본함대를 포착하고 , 즉시 샌프란시스코 함상의 스코트 소장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의 구형 SC 레이더에는 아군인 구축함들 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스코트 제독은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 파렌홀트에 승좌한 제 12 구축함전대장 로버트 토빈 대령에게 선두 구축함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토빈 대령은 그때서야 자신이 승좌한 파렌홀트의 뒤를 따라야 할 던칸이 없어진 걸 알아차렸고 , 이 사실을 알게 된 스코트 제독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 헬레나의 함장 후버대령에게는 모든 상황이 명확했다. 일본함대와의 거리가 4,500m 까지 줄어들자 후버 대령은 함포 사격을 가하겠다고 스코트 제독에게 보고했고 , 별도의 금지명령이 없자 11 시 46 분부터 6 인치 주포로 사격을 시작했다.
스코트 제독은 훈련시에 항상 함장들에게 야간전투에서 함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별도의 명령을기다리지 말고 사격을 개시하라고 명령해 놓은 상태였다.
헬레나의 사격은 정확하여 첫번째 일제사격이 순양함열의 선두에서 있던 고토 제독의 기함 아오바에 명중했다. 이어서 제 64 기동부대의 순양함들이 모두 사격을 시작했다.
구축함 파렌홀트도 사격을 개시했고 , 파렌홀트를 따르던 라피는 양 함대 사이에 끼는 것이 두려워서 사격을 가하면서 왼쪽으로 급히 방향을 틀어 헬레나의 뒷쪽으로 달라붙었다.
홀로 함열에서 떨어져 있던 던칸도 즉시 후루다카에게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함대로서는 완전히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었다.
고토 제독의 포격부대는 중순양함 아오바 , 후루다카 , 기누가사의 순으로 단종진을 형성하고 , 구축함 후부키가 아오바의 우현 전방에 , 구축함 하츠유키가 좌현 전방에 위치한 대형으로 항진하고 있었다.
일본함대는 헬레나의 첫번째 일제사격이 아오바를 맞출 때까지 미함대와의 수상전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 모든 함포는 앞뒤쪽을 향한 채였다.
게다가 고토 제독은 기습에 당황한 나머지 일본함대를 미함대가 항진 중인 오른쪽으로 선회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고토 제독은 아군인 일본군의 증원부대가 오인사격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제 64 기동부대에게는 모든 상황이 완벽했다.
기본 세력에서 우세한 제 64 기동부대는 완벽한 T -자 대형으로 일본함대의 머리를 누르면서 완전한 기습에 성공했다. 이대로 포격이 지속되면 일본함대는 전멸을 면할 길이 없었다.
바야흐로 사보 섬 해전의 치욕을 완벽하게 설욕할 다시 없을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 이 순간 스코트 제독은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일본함대가 1 분 간이나 아무 저항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고만 있자 혹시 아군구축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 것이었다.
결국 스코트 제독은 사격이 시작된 지 1 분 만인 11 시 47 분에 사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하고 , 보이스 라디오로 일일이 구축함들의 위치와 현재 상황을 물었다.
그동안 천금같은 시간 4 분이 흘러갔다.
모든 대답을 다 듣고 난후 비로소 안심이 된 스코트 제독은 11 시 51 분에 다시 사격명령을 내렸다. 다시 시작된 헬레나의 일제사격이 아오바의 함교를 정확하게 명중시켜서 많은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때 고토 제독도 치명상을 입고 , 몇 시간 후 아오바 함상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 맹렬한 훈련으로 단련되고 오랜 야전경험을 가진 노련한 일본해군의 승무원들은 4 분의 여유를 얻게 되자 최초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는 회복되어 산발적이나마 반격을 가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고토 제독의 명령에 따라 제 64 기동부대가 항진하던 방향인 오른쪽으로 선회한 구축함 후부키 , 중순양함 아오바와 후루다카는 선회하는 도중에 제 64 기동부대에게 그야말로 집중적으로 얻어맞았다.
맷집이 약한 구축함 후부키는 일찌감치 모든 기능을 상실하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아오바는 운이 좋게도 제 64 기동부대가 포격을 멈춘 동안에 회전의 대부분을 실시하여 침몰만은 면하고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 다음에 회전한 후루다카는 다시 포격을 개시한 제 64 기동부대에게 집중적으로 얻어맞고는 10 월 12 일 0시 40 분에 침몰했다. 한편 아오바의 좌현 앞쪽에서 항진하던 구축함 하츠유키는 미함대의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 고토 제독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미 함대의 주포들이 무서운 불길을 뿜어내는 오른쪽을 피하여 왼쪽으로 선회했다. 중순양함 기누가사도 얼떨결에 하츠유키를 따라 왼쪽으로 선회했다.
고토 제독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이 실수가 하츠유키와 기누가사를 구했다.
왼쪽으로 선회한 이 2척은 구축함 던칸과 교전하면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180 도 선회하여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일본함대가 도망치자 제 64 기동부대도 11 시 55분부터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일본함대를 추격했다. 일본함정들은 간간히 반격을 가하면서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10 월 12 일 새벽 0시 12 분 , 일본함대가 발사한 8 인치 포탄 2 발이 경순양함 보이스에 명중했다. 1 발은 1 번 포탑을 뚫고 들어가 폭발했고 , 1 발은 수선하 3m 지점에서 함체를 뚫고 들어와 6 인치 포탄 탄약고 전방에서 폭발하여 화재를 일으켰다.
보이스의 함장 모란 대령은 즉시 탄약고를 침수시키라고 명령했으나 , 탄약고 주변의 승무원들은 이미 다 사망한 후였다. 보이스는 운이 좋았다. 일본포탄이 뚫고 들어온 구멍으로 바닷물이 밀어닥쳐 탄약고 부근의 화재를 끄고 탄약고를 침수시킴으로써 보이스를 후드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보이스는 107 명의 전사자와 35 명의 부상자를 기록하는 큰 피해를 입으면서 침몰만은 간신히 면하고 전열을 이탈하여 후퇴했다. 통신시설이 고장나 버린 보이스는 이탈 사실을 알리지도 못했다.
중순양함 솔트레이크시티도 추격 과정에서 2 발의 8 인치 포탄을 얻어맞았으나 치명타는 아니었다.
보이스가 피격된 지 8 분 후인 12 일 0시 20 분에 스코트 제독은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 28 분에는 추격을 중단했다.
제 64 기동부대는 침로를 왼쪽으로 크게 꺾어서 귀환경로에 올랐다. 이로써 에스퍼란스 해전이 끝났다.
교전 초기에 함열에서 이탈했던 구축함 던칸은 이때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자신쪽으로 선회해 오는 구축함 하츠유키 및 중순양함 기누가사와 주로 교전하던 던칸은 일본군의 포탄 뿐만 아니라 아군의 포탄도 얻어맞아서 치명적인 화재가 발생했다.
던칸의 승무원들은 최선을 다해서 화재와 싸웠으나 , 12 일 새벽 2시에 탄약이 유폭하면서 폭발이 배를 뒤흔들자 함장 에드먼드 테일러 소령은 퇴함명령을 내렸다.
이미 통신시설도 부서져 버려 구조신호를 보낼 수도 없었다. 앞다투어 바다로 뛰어든 던칸의 승무원들은 잠시 후 상어들의 습격을 받았다.
1 시간 후인 오전 3시에 사라진 경순양함 보이스를 찾아 헤매던 구축함 맥칼라가 불타는 던칸의 화염을 보고 조사하러 다가왔다가 부근 바다에서 던칸의 승무원들을 발견하고 즉시 구조에 착수했다.
맥칼라의 승무원들은 바다에 떠있는 던칸의 승무원들을 습격하는 상어를 물리치기 위하여 탐조등으로 해면을 비추면서 상어의 등지느러미가 보이는대로 소총으로 사격을 가했다.
맥칼라는 아침까지 던칸의 승무원 195 명을 구조했다. 던칸의 전사자는 48 명이었다. 살아남은 3척의 일본함정은 12 일 오전에 쇼틀랜드에 도착했다.
40 발 이상의 명중탄을 얻어맞고 대파된 중순양함 아오바는 수리를 위하여 일본본토까지 가야만 했다. 피해가 가벼운 중순양함 기누가사와 구축함 하츠유키는 24 시간 이내로 다시 작전이 가능해졌다.
한편 , 조시마 다카지 소장의 증원부대는 에스퍼란스 해전이 벌어지는 동안 과달카날의 코컴보나에 도착하여 150mm 곡사포 4 문을 포함한 야포들과 병력 , 그리고 보급품들을 무사히 양륙시켰다. 에스퍼란스 해전의 소식을 들은 조시마 소장은 호위를 맡은 구축함들 중 시라유키와 무라구모에게 일본군 생존자를 구조하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시라유키와 무라구모는 아침까지 일본군 생존자 400 명을 구조했다. 그러나 , 철수하는 도중 칵터스 항공대의 폭격을 받아서 무라구모가 격침되었고 , 12 일 오후에 무라구모의 생존자를 구하려고 파견된 나츠구모 역시 폭격을 받아 격침되었다.
던칸의 생존자를 툴라기 섬에 내려주고 다시 생존자를 찾아 해면을 수색하던 미구축함 맥칼라는 12 일 오후 2시 30 분경에 200 명 가까운 일본군 생존자들이 해면에 한데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 이들은 맥칼라가 던져준 밧줄을 잡지 않았다. 결국 맥칼라는 저항도 못할만큼 지쳐버린 일본군 3 명만 구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인 13 일에 다시 기뢰부설함인 호비와 트레버에게 발견된 일본군 생존자들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밤새 상어에게 시달리면서 끔찍한 공포를 겪은 일본군 생존자들은 순순히 구조에 응하여 포로가 되었다. 호비와 트레버가 구조한 일본군은 108 명이었다.
에스퍼란스 해전은 어느모로 보나 확실한 미해군의 승리였다. 일본해군은 중순양함 후루다카와 구축함 후부키가 격침되고 , 중순양함 아오바가 대파되는 큰 피해를 입었고 , 사령관 고토 제독까지 전사했다.
또한 12 일 날이 밝은 후에 칵터스 항공대에 의하여 구축함 무라구모와 나츠구모가 추가로 격침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에 비하여 미해군의 피해는 구축함 던칸이 격침되고 , 경순양함 보이스가 대파 , 중순양함 솔트레이크시티가 중파되는 피해에 그쳤다.
진주만과 미서해안에 위치한 조선소들이 도크가 꽉 차서 경순양함 보이스는 수리를 하러 미동부의 필라델피아까지 가야만 했다. 솔트레이크시티는 진주만에 가서 수리를 받았다. 에스퍼란스 해전은 미해군의 승리였지만 아쉬움 역시 많이 남긴 해전이었다.
1942 년까지 미해군의 많은 제독들은 SC 레이더와 SG 레이더의 성능 차이를 잘 모르는 등 전반적으로 레이더에 대하여 무지한 편이었는데 스코트 제독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스코트 제독이 레이더에 정통했다면 SG 레이더를 장비한 헬레나를 기함으로 삼아 순양함열의 가장 앞쪽에 배치했을 것이고 , 그랬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을 그르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SG 레이더의 정보를 직접 보고받은 헬레나의 함장 후버 대령은 순양함열의 가장 뒤에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함대를 식별하는데 어려움을 전혀 겪지 않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에스퍼란스 해전에서는 구축함의 역할이 미미했으며 , 구축함의 가장 중요란 무기인 어뢰를 활용하는데 실패했다. 또한 , 해전 자체가 워낙 기습적인 공격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미함대는 어뢰를 사용한 일본해군의 반격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제 64 기동부대는 어뢰를 회피하기 위한 별도의 기동을 실시하지 않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 사실은 일본어뢰에 대한 경각심을 무디게 만드는 결과가 되어 미함대는 일본어뢰에 취약한 함대 전술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다가 결국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미해군이 일본어뢰의 무서움에 대하여 제대로 배우려면 아직 더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사보 섬 해전이 미군 선단의 보급품 양륙을 저지하지 못했듯이 에스퍼란스 해전도 일본군의 중포와 병력 , 보급품의 양륙을 막지 못했다.
또한 이틀 후에 전함 공고와 하루나가 헨더슨 비행장에 무시무시한 포격을 가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결과적으로 에스퍼란스 해전은 헨더슨 비행장이 받을 야간포격을 1 번 줄여주고 , 미군의 사기를 높였으며 , 야간전투에 대한 일본해군의 절대적인 자신감을 흔들어 놓았으나 과달카날 전투의 향방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과달카날 전투의 승패를 가를 결정적인 해전이 벌어지려면 아직도 1 달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