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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슈바이처의 神學과 그 批判/https://cafe.naver.com/modernth/377

슈바이처의 神學과 그 批判


 

Ⅰ. 序論

 

대개가 그러하듯이 한 사람의 평가는 그 사람의 업적이나 그 사람의 행위에 촛점이 맞추어지고 그에 따라 그 사람을 이해하고는 한다. 20세기에 들어서 많은 세계사적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세계가 여러 경로를 통해 서로에게 알려지면서 또한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들이 있어지게 되었다. 슈바이쳐에 대한 이해는 음악, 의학, 철학 그리고 신학 4개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이며 천재적인 이로 대개는 금세기의 위인으로 평가된다. 신학의 자유주의 진영이나 심지어는 보수주의 일부 진영에서조차 그에 대한 비판은 삼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고는 신학적 입장에서 그가 많은 업적이 있음에도 성경에 근거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고찰해 보고자 하는 것이며 신학의 분야로만 한정하도록 한다.


Ⅱ. 슈바이처의 生涯와 思想

  1. 그의 생애

알버트 슈바이처는 1875년 1월 14일 알사스(Alsace)지방의 카이라스벨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 후 얼마되지 않아서 집안이 균스 바하에 이사하여 그곳이 고향이 되었다. 그가 자라난 알사스는 독일과 불란서 사이에 계속적으로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어서 그는 두가지 문화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이 곳은 新舊 兩 기독교의 갈등을 비교적 조용히 보내는 곳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思考를 갖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유년시절은 행복하게 보내었고 18세에  불란서의 스트라스부르(Strasburg)대학의 학생이 되었다.  그가 연구한 기간에 그 학교의 주도적인 교수는 홀쯔만(H.J. Holtzmann) 교수였다. 그 당시 그 학교에는 유명한 철학자 빈델반트(Windelband)도 있었다. 그는 베르린과 파리에서도 얼마간 지난적이 있다.
그의 저술 생애는 나이 젊었을때부터 시작되었다. 1899년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학위논문은 "칸트의 종교철학"( Die Religions Philosophie Kants )이었고 그 논문은 출판되었다. 그로써 스트랏스부르의 성 니꼴라이 교회의 부목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1901년에 그는 목사고시와 관련해서 "주님의 만찬"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였다.  1901년  메시아의 비밀에 관한 브레데의 저서도 역시 출판되었다. 또한 흥미있는 것은 바로 이 해에 슈바이처가 "Das Messianitats und Leidensgeheimnis"(메시아의 비밀과 수난의 비밀)이란 저서를 출판하였다. 그후 1914년에  이 저서는 "The Mystery of the Kingdom of God"(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란 표제 하에 英譯 出版되었다.
슈바이처는 1904년 파리 선교사협의회가 매월 발행하고 있는 사업보고서에서 아프리카 콩고 지방의 선교 사업과 사회 구제 사업이 사람 부족으로 흑인 구제 사업이 정지 상태에 있다는 글을 보고서 그의 一生을 奉仕의 생활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이를 위해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905년 그는 그의 나이 30세에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 1905년에서 1912년까지 그는 의학을 연구하였다. 이 준비 기간 동안, 그는 그의  저서 중 가장 유명한 저서 몇 권을 저술하였다. "Von Reimarus zu Wrede"(1906)가 그중 한 권이며, 영역판은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역사적 예수의 탐구)란 표제로 출판되었다. 1913년에 중보 재판이 나왔다. 1911년에 그는 "Qeschichte der Paulinischen Forschung"(바울연구에 관한 역사)란 저서를 출판하였다. 이 저서는 그 다음 해에 "Paul and His Interpreters"(바울과 그의 해석자들)이란 영역판이 나왔다.
여러해 후인 1929년에 그는 "The Mysticism of Paul"(바울의 신비주의)란 대작을 내었다. 1913년에는 그의 의학박사 논문이 출판되었다. 이 논문은 "The Psychiatric Estimate of Jesus"(예수에 대한 정신병학적 평가)라는 제목이다.
1912년 헤레네 브레스라우 양과 결혼하고 아프리카 행 준비를 하다가 1913년 3월 24일 아프리카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선교 본부로부터 아프리카의 佛英 적도 지대를 다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고, 그는 수년 전 그가 작고할 때까지 비교적 계속하여 거기서 일을 하였다. 1913-1917년까지 그는 세계 제 1차 대전으로 인해 구속을 당했다. 2차 대전시에도 이와 비슷한 형편이 일어났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유럽에서 지내면서 선교 활동을 위한 모금을 하였다. 그는 주로 올갠 연주회를 가짐으로서 이 모금 운동을 하였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올갠니스트 중의 한 분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또한 그는 바하(Johann Sebastian Bach)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1905년 그는 바하의 생애에 관한 저서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는 올갠 구조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였다. 그것은 유럽의 올갠들을 근거로 한 연구였다.
그의 저술은 그의 선교활동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그의 선교경험으로 부터 "From the Edge of the Primeval Forest"(원시림의 끝에서, 1925)란 저서를 저술하였다. 이 기간에 자서전 "Out of my Life and Thought"(나의 생애와 사상으로부터)라는 저서도 저술하였다.
1952년 노벨평화상을 받고 1951년에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1957년에는 원폭 실험 금지를 호소하는 일로써 전 정력을 바치기도 하였다. 1965년 그의 나이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슈바이처는 철학도 무시하지 않았다. 1923년 그는 "The Decay and Restoration of Civilization"(문화의 몰락과 회복)이란 대작을 출판했다.
이 저서에 뒤이어 제 2권인 "Civilization and Ethics"(문화와 윤리)라는 저서를 내어 놓았다. 그의 철학은 때때로 "生命의 敬畏(Ehrfurcht vor Leben; Reverrance for life)"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입장은 윤리적 신비 주의와 같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종교란 강력한 윤리의 배음과 저음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종교란 사람들과 사회 안에서 그 자체를 어떤 사회적인 관심사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생에 대한 외경,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 등 이러한 것들은 예수의 정신과 동일시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음악, 의학, 철학 그리고 신학 4개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분야에서 대단히 훌륭하고 탁월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어떤 학파를 이루고자 출발하지는 않았으나, 신약분야에 끼친 그의 영향은 금세기에 어떤 사람도 따라 갈 자가 없다.

  2. 슈바이처의 神學

    1) 예수와 王國 設立

보스(Geerhardus Vos)는 메시아직에 관한 슈바이처의 견해를 "장래의 메시아직을 믿는 신앙"이라고 분류하였다.
슈바이처와 브레데는 다 맹열한 방법으로 마태복음 우선설을 공격한다. 또한 그들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비난한다. 슈바이처는 브레데가 말한 은밀한 현상들을 역시 일반적으로 훌륭한 강조라고 생각하였다. 슈바이처가 브레데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즉 브레데가 말하는 마가의 敎理를 슈바이처는 예수의 敎理라고 한다. 슈바이처는 말하기를 "敎理的 要素는 분명히 歷史的 要素"라고 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는 복음 증거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마가복음 저자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은밀한 메시아직이란 신학사상은 예수님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사상이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단순히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을 위한  장래 나라의 반포자였다고 하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위한 준비를 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어떤 격변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그 나라가 이룩되면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대리로서 다스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비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면 시작될 장래의 메시아직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로 하여금 모든 것을 종말론적으로 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가 자기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던 해, 즉 추수 때에 이 나라가 임할 줄로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는 그 나라가 임하시기 전에 그들이 돌아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마10:23은 슈바이처가 주장하는 학설의 요절이다). 그러나 그가 기다리던 격변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로 부터 그의 계획들은 변화를 일으켰다.         (오심)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았으며, 또한 마태복음 10장의 수난의 예언도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인자의 오심을 위하여 박해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전연 오지를 않았다. 예수님의 계시적 고대에 의하면 이 수난들을 그 나라가 임하심에 필연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이런 것들이 강제적으로 오도록 하는 일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이제" 그것들이 자신 속에서 成就시켜, 그 나라를 세상에 나타낼 것으로 결심하였다. 예수님은 자기가 죽어야만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자기가 죽자마자 곧 승리가 따를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나라는 임할 것이고 역사는 끝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는 종말도 오지 않았다. 역사를 예수의 목적으로 왜곡하려는 놀라운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목적대로 왜곡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슈바이처는 예수님이 임박한 王國이 설립되면 자신이 메시야로 나타날 것을 믿고 그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2) 메시아의 비밀

자기가 메시아였다는 예수님의  이 미혹은 비밀이었다. 그는 장차 그 나라가 갑자기 임하실 때 나타날 메시아로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드러내놓고 자신이 메시아로서 행동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는 이 비밀을 세사람(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나타내었다. 그 후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열 두 제자들에게 공개했다. 이 비밀의 세번째 폭로는 12제자 중 하나였던 가롯 유다가 배신함으로 대제사장에게 이 비밀을 제공할 때 일어났다. 심문에서 대제사장은 무지한 군중들에게 예수님의 주장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 주장으로 인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슈바이처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그의 메시아직 주장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다.

    3) 일시적 윤리

슈바이처는 예수님께서 윤리적인 교훈을 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그러나 이 윤리적인 교훈은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사상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고 한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예수님의 윤리는 어떤 일시적 윤리였다. 즉, 그 나라가 임박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윤리적 교훈은 그 나라가 임하기 까지의 짧은 기간에만 유효한 것이다. 이 일시적 윤리교훈은 회개라는 한 마디로 간추릴 수가 있다. 회개란 그 나라의 임하심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슈바이처의 未來的 終末論

슈바이처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메세지를 철저히 '終末'이란 배경 아래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바울의 종말론은 유대의 默示文學의 종말론의 線上에 놓여 있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 나라는 모두 종말론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 나라는 현재의 靈的  實在가 아니다.
슈바이처의 종말론은 소위 "철저한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이라고도 한다. 그에 의하면, 그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적 개입으로 올 미래의 實在였다. 슈바이처에게는 '역사적 예수'가 1세기의 默示文學者처럼 생각되었다.

    5) 슈바이처의 제자들

슈바이처는 슈바이처 이후의 思想界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튜빙겐 학파나 리출을 중심하여 일어난 것과 같은 그러한 실재적 사상학파를 이룩하지는 않았다. 사실은 슈바이처의 노선에서 論文들이 더러 나왔다. 독일에서는 미가엘리스(Wilhelm Michaelis)가 어떤 수정된 형식으로 주장하기를, 예수님의 교훈은 한가지의 견해점, 즉 하나님의 나라는 묵시적이요, 임박한 것이었다는 견해점에서 시종 해석되어야한다고 하였다.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와 볼트만(Rudolf Bultmann)도 어느 정도까지 슈바이처(Schweitzer)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불트만(Bultmann)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을 선포하는 유대인의 묵시적 예언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뷰르킷(F.C. Burkitt)이 슈바이처를 대변하였다. 미국에서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교수였던 스콧트(Ernst.F.Scott)와 이스톤(B.S.Easton) 두 사람이 손꼽히는 슈바이처 해석자였다. 스콧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묵시적 나라의 임박한 임하심을 준비케하는 것이 예수님의사명이었다는 슈바이처의 근본적인 사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슈바이처와는 달리 스콧트는 예수님은 그의 인격 안에서 오실 나라의 법을 이미 실현시켰었다고 주장한다. 그 나라는 너무나 임박하였기  때문에 그 권세들은 이미 예수님의 사명 안에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면, 슈바이처의 학파가 없었음은 무슨 이유가 있었던가? 그의 사상의 바탕에는 아무런 특수한 철학적 혹은 신학적 운동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당시 신약 비평의 동향은 다른 방향을 지향하였으며, 또한 지향하고 있었다. 그리스도 보다는 오히려단체를 강조하고 있으며,한 개인보다 기독교를 강조하고 있었다. 이것이바로 양식사 학파이다. 심지어 자유주의자들까지 그 나라에 관한 슈바이처의 편견된 성격을 인정하였다. 슈바이처가 제시하는 역사적인 예수는 결국은 매우 부당한 모습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신정통주의 즉 빨트(Barth) 신학의 등장으로 인해 신학계의 초점은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 예수의 의의를 탐구하는 면으로 바꾸어지고 말았다.


Ⅲ. 그의 神學에 대한 批判

슈바이처는 자유주의자들의 예수의 가르침에서 종말론적인 요소를 무시하였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역사적 예수"를 파괴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어떤 면에서는 슈바이처의 성경해석은 자유주의적 해석에 상당한 진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진보와 함께, 그는 복음서들에 현저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다. 이 實例로 슈바이처는 브레데의 견해에 반대하고 예수의 메시아 의식은 인정한다. 그는 우리도 종말론과 예수님의 교훈 사이에 있는 놀라운 관계를 고려하도록 강요하였다. 이 분야에 그가 끼친 영향은 아마 앞으로 얼마 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보수주의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유주의 학파들에게까지 비난받는 바 있는 슈바이처의 사상에는 곤란한 문제들이 있다.

  1. 方法論의 오류

슈바이처의 방법론은 몇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임박한 종말에 대한 확신이 정당한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께서 확신은 가지셨지만 그가 환상 속에 빠져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슈바이처는 신약 본문을 다루면서 증빙자료의 증거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보다 자신의 철저한 종말론을 전개시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자기 편견은 그의 방법론에 있어서 제한점을 분명하게 했고 많은 문제점을 낳게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철저한 종말론 체계에 성경의 내용을 맞추려고 하는 입장 때문에 예수님의 교훈을 임시윤리로 취급한다. 예수님을 1세기의 역사적 배경 안에서 이해하려고 한 슈바이처의 시도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는 한 종교로 전락시키는 종교사학파를 낳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슈바이처의 [예수전 연구사]에 나타난 그의 주장은 신약성경에 충실했다기 보다는 당시의 연구된 많은 예수전 연구에서 그 자료를 얻었기에 문제점이 없을 수 없었다.

  2. 예수님의 인격에 큰 손상

그의 입장은 예수님의 인격에 가장 큰 손상을 입힌다. 그는 그리스도에게도 과오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 나라는 전파를 위해 제자들을 파송한 직후에도 임하지 않앗으며, 그 자신이 죽은 직후에도 임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 과오들이 똑똑한 정신으로 저지른 것이라면, 이야말로 정말 잘못이라고 한다. 그러나 슈바이처가 예수님을 묘사하는 것은 사실은 예수님은 착각을 일으킨 狂信者로서 실현 불가능한 광적인 계시 환상에다 그의 일생을 맹목적인 헌신으로 헛되이 바쳐버렸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주장하기를, 예수님은 시종일관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생애에 대한 의미에 관하여 어떤 공상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이 그의 계시적 꿈에 열광적인 헌신을 했다는 슈바이처의 강력한 강조는 우리가 그의 재해석과 예수님의 올바른 정신을 조화시키기에 곤란하다. 슈바이처의 "The Psychiatric Estimate of Jesus"(예수에 대한 정신병학적 평가)란 논문을 쓴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도 그 자신이 이 어려움을 느꼈으리라는 것을 알수 있다. 스톤하우스(N.B. Stonehouse)는 "한 전문 의원이 슈바이처의 예수님은 건전한 정신이 있다는 말에는 의견을 같이 할런지는 몰라도,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주장한 역할을 생각해 볼 때 전 역사상에서 가장 터무니 없고 착각을 일으킨 사람 중의 하나로 인정받을 수 밖에 없도록 슈바이처는 묘사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슈바이처가 말하는 예수는, 기껏 해야 과거에 있던 이상하고 기괴한 종교적 열광자 중의 한 자리에 끼기에 알맞은 것으로 하고 있다. 슈바이처가 말하는 예수님의 재해석은 예수님의 정신적 안정상태에 관한 커다란 심리학적인 난제들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그는 예수님을 그의 동기로 부터 가장 극심한 과대망상가로 만들고 있다.

  3. 독단적이고 주관적인 해석

슈바이처의 해석은 독단적이고 주관적이다. 그의 성경해석은 자기의 학설에 맞추기 위하여 본문을 마구 왜곡시키고 있음을 언제나 볼 수 있다. 그의 성경 본문 취급은 그가 주장하는 학설로 지배되어 있다. 그 실례를 들자면, 마가복음 8:34-9:30에 기록된 변화 산상의 이야기는 결코 거기에 속할 것이 아니고, 그 기사는 5000명을 먹이신 다음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 앞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변화산상 사건을 가이사랴 빌립리보 사건 전에 놓을 수 있게 되고, 또한 이렇게 되는 경우 그는 메시아의 비밀이 가까이 지내는 세 제자에게 맨 먼저 계시되었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말하기를, 그 후,베드로는 침묵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명을 어기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12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메시아 의식을 그만 폭로해 버렸다는 것이다. 슈바이처가 본문 재배열을 하는 것은 그가 복음서 기록들을 마음대로 꾸며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4. 자유주의적 해석

여러 본문에서 슈바이처가 자유주의를 공격하고 있기는 하나, 그러나 그의 근본적인 견해는 역시 자유주의이다. 스톤하우스(N.B. Stonehouse)는 말하기를, "거기엔 자유주의와 현저히 닮은 요소가 있다"고 하였다.
슈바이처 자신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자유적이며 인도주의적인 견해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개념을 반영하여 준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쳤나 하는 문제는 역사적 해석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신학은 예수님의 견해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다. 역사적 예수란 슈바이처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 역사적 예수란 염두에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세대에 의의를 주며 또한 도움이 될수 있는 분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예수가 아니라, 인간들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예수님 안에 있는 영속성은 역사적 지식과는 절대적으로 별개의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슈바이처가 말하는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성과 영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도덕 교훈이라고 한다. "윤리가 종교의 본질이라는 진리는 예수의 권위 위에 확고부동하게 세워진 것이다"라고 한다.
 
  5. 종말론적 편견

그 나라와 메시아는 순전히 장래에 나타날 것이라고 해석하는 슈바이처의 해석은 편파적인 것이요, 그러기에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메시아직이 순전히 미래적이라는 것은 사실과 상반된다.
슈바이처는 그 나라의 現在的 顯現과 메시아職의 現在的 顯現을 제거해 버린다. 미래적 메시아설의 공적인 면에 어떤 진리의 요소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메시아직을 미래의 것으로 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때때로 자기가 권세와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하나님 나라에 임하심"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이 명칭에 합당한 나라가 그 전에는 존재한 일이 없었던 것 같이 보인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 하리라"(눅22:16-18)고 하셨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와같은 방법으로 자기의 메시아적 顯現을 미래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 "그의          즉 그의 "임하심"을 말하고 있다(막 13:26, 14:62, 마 24:30, 25:6, 눅 12:37-45, 21:27). 물론 이 구절이 뜻하는 사상은 그리스도의 再臨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가 본문을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        "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재림"이 아니고 그저 "오심"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은 인자를 3인칭으로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 자신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면서 나라는 대명사로 말하고 있지 않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아마 그 이유로는, 이 언급들의 많은 경우가 장차 나타날 메시아의 초월적인 영광과 존귀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들은 주님의 낮아지신 상태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자"란 어떤 미래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막8:38에서 예수님은 선언하시기를,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눅12:8도 참조)고 하였다. 이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이 "나"혹은 "나를"이란 말씀을 하실 때는, 겸손하고 낮아지신 분 즉 부끄러워 하기 알맞은 그 분이요, 그에게 대한 신앙 고백을 하기엔 여간한 용기가 필요한 그 분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자라는 말을 사용하실 때는 그가 영광과 권세 가운데서 심판주로 오시는 그의 장래의 품위에 대해 말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이 비록 메시아직을 어떤 미래적인 의미에서 말하고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것이 단순히 미래적인 것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그의 지상 생애를 비메시아적이라고는 결코 보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의 미래적 임하심을 말씀하심과 동시에 과거의 임하심도 말씀하시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과거의 임하심을 특별히 메시아 사명과 연관을 맺고 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2: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려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이로다"(마10:34).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눅12:49).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등의 말씀이 있다. 불을 던지고 구하고, 완전케 하며, 섬기고 또 그의 생명을 주시는 것, 이러한 행위들이 메시아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미래적인 메시아직과 그 나라만을 말하는 슈바이처의 일방적인 강조는 성경 교훈의 전체적인 면에서 올바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견해는 메시아적 권위의 계속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聖役을 전체적으로 볼 때 두가지 단계 혹은 구분이 있다. 그의 성역을 전체적으로 볼때 두가지 단계 혹은 구분이 있다. 그의 성역에 있어 첫 단계는 우리 인간과 함께 한 것이요, 둘째 단계는 부활로 그 날짜를 꼽는다(마 28:18, 행 2:36, 롬 1:4). 이 둘째는 처음 단계를 완성시켜 준다. 그러나 이 본질적인 성격에 있어, 이 둘은 꼭 같은 하나의 성격이요, 꼭 같은 메시아 사역이다. 그런데 슈바이처는 처음 단계를 무시하고 있다.


Ⅳ. 結論

세기의 위인이라 할지라도 성경에 대한 오해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신학의 근거가 성경이며 또한 신앙의 準據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적 자유주의가 복음 역사에 있어서 교회를 생동감을 상실하게한 폐혜가 있었다 하더라도 本人은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적그리스도로까지는 볼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지켜야 할 복음적 입장에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실제적인 상황에서의 자유주의는 성경적인 것들을 철학적인 사상으로 대체시켜버리는 근본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성경은 어떠한 철학 서적이나 사상으로 대치시킬 수 있는 체계가 아닌 信仰의 體系이고 또한 啓示 그 자체인 것이다.
슈바이처의 [나의 생애와 사상]에는 그의 선교사업의 동기에 관한 매우 흥미있는 이론이 있다. 그는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이나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사명에 관한 아무런 느낌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 속에는 선교사로 나가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는 위선자는 아니었다.
앞의 그에 대한 비판에서도 그에 대한 신학적인 오류들을 지적했거니와 그가 행한 놀라운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적 사상은 성경적 오류가 많이 있다. 그가 비록 자유주의의 색채 속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그의 행동적 지성은 이 혼탁한 사회 속에 빛이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성경적 교훈을 중시한다고 하는 우리가 실제의 삶에서는 어떠한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진실로 우리의 전부를 투여하고 있는가! 개혁주의자들 가운데 이러한 이들이 출현하지 못하는 것은 다시 한번 우리의 신학을 냉철히 고찰해 볼 점이다. 개혁주의가 끊임없이 개혁해 나아가야 함에도 현실적인 문제에는 너무 등한시해 온것은 아닌가하는 반성도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