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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고건호.한국종교문화연구소

1. 머리말
종교는 특정의 사회에서 그 자신의 고유한 동력과 활동의 영역을
가지는 사회적 실체로 존재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종교를 구성하는
교리, 의례, 조직 등은 창교주의 카리스마나 단순한 체계의 교조적敎
條的 준수만으로 이해되거나 신앙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의 종교제도
가 처한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그리고 특정의 교리체
계를 신앙하고 있는 집단의 종교적 열망들을 반영하면서 적극적으로
해석, 적용, 실행되는 ‘과정’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과정’
으로서의 종교가 강조되는 이유는 종교의 교리적 지향이나 실천이 단
순히 경전이나 창도주의 교리적 권위에 의해 이미 고정되어 있는 선
험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의 종교가 처하고 있는 시대의 정치적, 사
회적 질서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지극히 역사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모두 그러하겠지만 특히 동학과 같이 특정의 역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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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서 대중을 결집하여 자발적으로 종교적 혁신운동에 참여하고,
다시 변혁 지향의 사회운동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동인은 교권의
중심과 주변 사이, 교단의 지도부와 신앙인 대중 사이, 그리고 신앙
인 집단을 통해서 매개되는 종교의 외부와 내부 사이의 소통을 통해
서 종교경험 혹은 경전적 선포에 대한 창조적인 해석과 적용이 지속
적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1860년의 최제우의 신비적 종교 경험에 바탕하여 성립한 동학은
여러 단계의 격절점을 거치면서 교단 내의 종교적 열망과 교단 바깥
으로부터 주어지는 요구에 부응하여 지속적으로 자기 혁신의 과정을
수행하였다. 동학의 교단사에서 ‘갑자참화’, ‘신미사변’, ‘교조신원운동’
과 ‘동학농민전쟁’과 같은 ‘사건’들은 한편으로는 이들 ‘사건’에서 비롯
된 지목과 탄압으로 말미암아 교단의 존립 자체에 심각한 위기를 초
래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단이 처한 위기상황을 극복하
고자 하는 시도가 오히려 대중들에게 동학의 세계관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교단활동의 범위가 넓어지는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물론 이 과정은 지도부와 신앙인 대중 사이에 열린 소통의
장으로 기능하였고, 신앙인 대중을 매개로 하여 교단 내부뿐만 아니
라 교단의 안과 바깥 사이를 넘나드는 소통의 장치이기도 하였다.
이 글은 동학의 초기 활동이 이루어진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창교주
최제우의 종교경험으로부터 ‘교단종교’로서의 동학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동학의 종교사적 위상과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창교주 최제우의 종교경험으로부터 동학이라고 하는 ‘종
교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동학의 기본적인 교리, 의례, 조직의
틀을 체계화해 내는 과정과 논리에 주목하여 살펴본다. 다음으로 세
습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교단 활동의 범위가 확산되면서 창교주의
종교경험이 창조적으로 해석, 적용되는 과정을 교리, 의례, 조직의 ‘합
리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 특히 이 부분은 창교주의 카리스마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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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339


습교주의 카리스마 사이의 연속과 단절, 재해석과 적용의 측면에 집
중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동학운동의 종교사적 의
미를 해명해 보고자 한다.
성립 초기 동학의 전개과정은 내적 혁신의 중요한 계기를 이루는 이들
사건을 중심으로 네 시기로 구분하여 창교주 최제우가 활동하던 시기(창도기;
1860~1864)와, 세습교주 최시형이 주도한 시기(발전기; 1864~1898)로
나누고, 발전기를 다시 신미 신원운동(1871)과 신원운동의 발발(1892)을
획으로 하여 모색기(1864~1871), 정비기(1871~1892), 신원운동기
(1892~1898)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2. 창교주와 초기 신앙공동체의 형성
1) 최제우의 종교경험과 포교
성립 초기 동학이라는 종교공동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신대각
庚申大覺’이라는 최제우의 신비경험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 포교를 실
행하고 교단의 체제를 갖추어 나가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교주의 종교경험과 그 종교경험이 대중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로
선포되는 과정에 주목해 보면 동학은 이른바 ‘경신대각’이라고 일컬어
지는 최제우의 신비적 종교체험에서 비롯되고 창도되었다.1) 그런데
최제우의 종교경험 그 자체가 곧바로 교단의 성립과 포교[布德]의
실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덕문」에서 보면, 경신대각으로부터


1) 「용담가」 “천은이 망극하여 경신 사월 초오일에 /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 형언할까 / 만고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득도로다 … 구미산수 좋은
승지 무극대도 닦아내니 / 오만년지운수로다.”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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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 후인 신유년에 이르러서야 포교를 결심하고 이를 위한 본격적
인 준비를 시작하였다고 적고 있다.2) 즉 최제우 개인의 신비경험과
달리 교단으로서의 동학이 성립하고 포교를 시작하는 것은 경신년의
종교 경험 직후가 아니라 그 다음해 봄부터이다.
창교주의 종교경험과 포교의 실행 사이의 이 간극은 ‘교단종교’로서
의 동학의 정체성 형성에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이 기간은 단지 시
간적인 간극을 넘어서는데, 왜냐하면 우선 최제우의 종교경험 자체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경신대각 이후 1년여 동안 지속된 것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모여든 사람들은 조직적 측면에서도 초기 신앙공
동체가 형성되는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최제우와 한울
님과의 이른바 ‘강화降話’와 ‘상제문답上帝問答’이 지속되고, ‘세 가지
시험’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신이 조우한 한울님이 누구인지, 그 강화
의 의미가 무엇인지 의미를 되묻는 과정이 계속되었다. 이와 함께 이
러한 신비경험과 수행을 지속하는 동시에 주변에서 찾아오는 선비들
과의 토론을 통해 공감대를 확산하면서 자신의 신비경험을 객관화,
‘합리화’할 수 있었다. ?東經大全?(이하 ?대전?)과 ?龍潭遺詞?(이
하 ?유사?)와 같은 동학의 경전에 담겨진 교리적 선포와 함께 의례와
조직의 체계가 마련된 것도 이 기간이었다.3)


2) 경전의 성립
?대전?과 ?유사?는 애초부터 일관된 체제를 갖추어 저술된 것이 아니라,


2) 「수덕문」 “不意布德之心 極念致誠之端, 然而彌留 更逢辛酉時維六月
序屬三夏良朋滿座 先定其法 賢士問我 又勤布德”
3) 본격적인 포교가 시작되기 이전인 이 시기에 이미 「呪文」과 「祝文」, 「劍訣」,
「處士歌」 등이 만들어졌고, 布德式, 入道式, 致祭式과 같은 의례체계가 마련
되었으며, ?東經大全?과 ?龍潭遺詞?에 편제되는 경전이 저술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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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341


포덕을 행하면서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수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저술의 동기나 주된 대상이 서로 다르다. 따라서 동학의 경전은 특정의
경전이나 ‘법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4) 이러한 사정은 경전의 성립과정을 살펴보면 드러나는데,
경전의 각 장은 경신년의 신비경험 직후에 「용담가」, 포덕 초기인 신
유년 6~7월에 「포덕문」과 「안심가」의 순서로 저술되며, 이후에도
각 시기의 상황적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추가되고 있다.
?대전?과 ?유사?에서 드러나는 동학 창도와 포덕의 배경은 당대 사
회의 ‘위기적 상황’이다. 여러 자료에서 보이는 ‘상해지수傷害之數’,
‘효박淆薄한 세상인심世上人心’, ‘말세末世’, ‘하원갑下元甲’과 같은
표현들과 함께 당대의 위기 상황을 나타내는 ‘인위人爲에 의한 불평등
의 사회’, ‘유.불.도의 운이 다하여 사회규범이 타락한 사회’, ‘서양세력
이 침략하면서 사악한 종교인 서학西學이 판을 치는 사회’와 같은 서
술의 태도는 당대의 운수運數와 도道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함께 새
로운 운수, 새로운 학/도[종교]의 필요성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또한 ‘세계적인 질병상태’라 할 수 있는 그러한 위기를 낳은 요인으로
불순천리不順天理, 불고천명不顧天命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들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도, 불도나 서도가 아니라 오로지 동학을
통해서 상해지수를 후천운수로 바꾸어 내야 한다는 후천개벽後天開
闢의 세계관이 등장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신년의 신비경험의 절
정인 ‘한울님’과의 직접적인 만남과 그로부터 받은 운수와 도는 ‘오만
년지운수五萬年之運數’이자, “포덕천하布德天下를 통해서 후천개벽을
이루어낼 천명天命을 받은 무극대도无極大道”라는 선포가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다시 개벽’을 통한 천도天道의 선포, 천도의 구현이 동학
이라는 종교의 정체성의 핵심이자, 경신년의 신비경험이 동학이라는


4) 표영삼, 「동학경전의 편제와 내용」 1-19 (?신인간? 422-441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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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교의 성립으로 나아가게 만든 결정적인 동인이 되고 있다. 곧 무
극대도로서의 천도라는 자의식은 더 이상 수행자 최제우 한 개인의
신비경험에 머물 수가 없으며 동학이라는 교단종교로 성립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대전?과 ?유사?에서 정리하고 있는 경신대각을 통해서 조
우한 한울님, 그로부터 받은 무극대도, 후천개벽의 세계관, ‘염천송주
念天誦呪’와 시천주侍天主를 중심으로 하는 수행의 체계, 그리고 광
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실천적 지향과 같은 교리의
대강大綱을 포교를 통해 세인들에게 내놓자마자 부닥치게 된 것은 대
중과의 자유로운 소통과 공감의 확산이 아니라 뜻밖에도 이 관이나
세인의 오해로 인한 핍박이었다.
이런 사정에서 포교 이후에 이루어진 설법이나 저술들은 주로 이와
같은 관과 세인의 오해를 해소하고, 신앙 대중에게 동학의 뜻을 올바
로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 내용은 시천주와 무극대도, 후천
개벽에 대한 자세한 해설과 함께 “동학은 서학이 아니며, 유학과는 다
르지 않다는 점”, 그리고 “물위심급勿爲心急하고 열심히 수행할 것”
을 강조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즉 포교 초기의 주요 법
설이나 경전의 구절들은 동학의 진면목을 세상에 제대로 알리고자 하
는 변증론辨證論으로 전개되었다.
변증론의 측면에서 주목되는 것은 단연 「논학문」이다. 임술년 초에
은적암 도피기를 정리하면서 저술된 「논학문」은 동학의 교리와 그 종
교적 메시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전까지의
‘천도’, ‘무극대도’, ‘차도此道’, ‘오도吾道’ 등으로 필요에 따라 번잡하
게 불리어졌던 도의 명칭을 서학과의 차별성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한
의도에서 ‘동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5) 동학 경전과 저술의


5) 「논학문」 “曰同道言之 則名其西學也 曰不然 吾亦生於東 受於東 進雖
天道 學則東學 況地分東西 西何謂東 東何謂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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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343


체계에서 동학의 세계관을 가장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논학문」
이 사실은 동학 변증론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서 읽을 때 그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해명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이 시기의 중요한 설법은 대부분 ?대전?과 ?유사?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데,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지벌과 문벌보다는 도덕이
귀한 것”6)이라 하여 반상, 적서의 차별을 철폐하고 무차별평등을 구
현하려는 도의 대의大義를 천명한 것, 이를 위한 현실적인 방편으로
한울님에 대한 경외지심과 주문을 중심으로 한 수행을 강조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7)


3) 조직과 의례
‘창도시대’로 일컬어지는 최제우 당시의 교단조직의 근간은 ‘접接’과
‘접소接所’였다. 접은 포덕 당시부터 이미 존재했었으나, 접소의 설치
와 접주接主의 임명은 포덕후 일년반 뒤인 1862년 말경에 설치된
것이다. 접은 상설적 기구 내지 교단 조직이라기보다는 수운의 카리
스마에 직접적으로 규정되는 자발적인 신앙공동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8) 즉 수운이 수시로 순회하면서 포덕을 행할 때 인근의 사람
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토론하던 장소이자 의례가 수행되는 공간
이었다. 이와 달리 접소는 도인수가 증가하면서 이의 효과적 통제를


6) ‘평등무차별’의 설법은 「도덕가」, 1절에 수록되어 있다.
7) ?천도교백년약사?, 90-91쪽.
8) 이 接은 천주교 도입 초기의 강학 모임과 마찬가지로 포덕 초기부터 지속
되는 교리강습 모임을 지칭한다. 이 시기의 接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보여
주는 것은 1878년에 해월이 접소를 열면서 “吾道에서 開接이라 함은 결
코 儒家의 式과 달너 詩賦등 文字로써 토론함이 아니오 오직 도를 연구하
며 수련함에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동학사?, 5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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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위해서 중간 책임자인 접주를 임명한 본격적인 교단조직이었다.9) 즉
접주제는 “각지에 접소를 설치하고 접소에 접주를 두어 그 관내 도인
을 통할 교화케 하는 제도”로,10) 초기에 수운이 전담하던 신앙공동
체로서의 접을 교세의 확장에 따라 지역별로 접소를 설치하고 그 책
임자인 접주를 임명하여 상설적인 교단 조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동학의 의례는 ‘시천주’를 위한 방편으로, 한
울님에 대한 경외지심에 바탕해 있다. 즉 신앙대중의 수행태도에서는
한울님에 대한 믿음의 근거 위에[信] 실심으로 수행을 하고[誠] 이
를 통해서 실천의 영역[敬]에까지 이르는 자력적 수행 체계가 요구되
는 것이고,11) 여기에 초학주문, 강령주문, 평생주문이 각각 연관되어
있다. ‘염천송주’를 기본으로 한 동학의 의례에는 영부靈符와 주문呪
文이 필수적 구성요소인데, 영부와 주문은 사람들을 교화하고 포덕천
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제로 제시되어 있다. 영부는 “한울님으
로부터 분부를 받아서 그린 부符를 불에 태워서 그 재를 물에 타서
먹음”으로서 한울님의 영기가 미치게 된다는 것으로, 특히 포덕 초기
에 교세 확산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치병을 비롯한 이적異蹟의 매개로
기능했다.12) 또한 주문은 “천주를 지극히 위하는 글”13)로, 도를 닦
는 순서와 방법은 오로지 ‘주문 이십일자’에 있다고 가르쳐졌다. 즉
입도자는 먼저 초학주문을 읽어 지기기접자에 힘쓰고, 다음은 강령주
문을 읽어 한울님의 영기와 기화하도록 하며, 본주문을 평생토록 읽


9) ?東學史?에서는 “신유년 이후에 … 사람이 많음으로써 그 다수를 접제코자 하여
각지에 接을 설하고 接主와 接司를 두게 하였다”고 한다.(?동학사?, 31쪽)
10) ?천도교백년약사?, 96쪽.
11) 「교훈가」 “운수야 좋거니와 닦아야 도덕이라 / 너희라 무슨 팔자 불로자득
되단 말가.”
12) “大低 其道始學之時 必先精潔身口 乃授十三字 次授八字 次授十三字
而願學之人 則必以免禍 去病接神等說 (鄭雲龜書啓:承政院日記 癸
亥 十二月 二十日.”
13) 「논학문」 “至爲天主之字 故以呪言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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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345


어 마음공부를 하여 도성입덕道成立德하게 하는 것이 중심적인 수도
절차였다.14)


3. 교권 전수와 세습교주 시대의 동학
동학의 교단사에서 ‘은도시대’로 불리어지는 발전기는 수운 최제우
가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참형을 당한 이후 교문의 전반적인 침체를
극복하고, 포덕과 조직의 복구에 힘쓰는 과정이었다. 또한 도통道統
의 관점에서 보면 해월 최시형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도통의 정통
성과 세습교주로서의 카리스마를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다시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수운 최제우의 죽음
이후 계속되는 지목과 탄압, 그리고 카리스마가 상실된 상태에서 은
둔과 피신을 통해서 암암리에 새로운 교문의 진로를 모색하면서 널리
포덕을 행하던 모색기를 거치고(모색기), 일정 기간의 과도기를 경과
하여 신미사건 이후 해월 최시형이 실질적으로 교권을 장악할 수 있
게 되어서 교리적 세련화, 의례의 정교화, 조직의 강화 등 본격적인
제도화 과정을 경과하며(정비기), 이러한 결집된 역량을 바탕으로 본
격적인 신원운동을 전개해나가기에 이른다(신원운동기).


1) 모색기(1864~1871)
세습교주 최시형의 시기는 창교주 최제우가 ‘갑자참형’을 당한 이후
14) 표영삼, 「동학경전의 편제와 내용」 5(?신인간? 426, 1985. 2),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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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교단 지도부가 해산하여 각지로 도망, 피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다. 주목할 점은 이들의 피신 경로는 결과적으로 교세가 널리 확산되
는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최제우의 참형 이후 최시형을 비롯
한 접주들이 이거, 이접하는데 따라 동학의 교세도 이들의 동선을 따
라 경주 일원으로부터 북상하는 경로를 따라 경상도 전역으로 확산되
었으며, 전라도, 충청도 일부, 그리고 강원도 일부까지 확장되었다.
이렇게 보면 은둔의 기간 동안 교세는 위축되고 가시적인 활동도 줄
어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피신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레
‘순회포덕’이 이루어졌다. 즉 교단의 지도부와 신앙인 대중이 직접적
인 만남을 통해서 소통하는 것이 가능해져서 오히려 지목으로 인한
피신의 과정이 곧 포덕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운 이래의 포덕과 조직의 원리였던 ‘연원제淵源
制’의 원리가 보다 부각되고 있다. 연원제의 원리는 연원제 자체의 지
방분권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조직
에는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접주제 조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연
원제는 지역적인 편제를 넘어서 인적 관계로 구성된다는 특성으로 인
해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에 유용한 조직방식이었다. 비록 최제우
생존 당시와 비교해서는 설득력이나 권위의 정도가 약화되었다고 하
지만, 여전히 최제우의 카리스마적 권위가 교단의 구심점 역할을 하
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원제 원리에 기반한 접주제를 통한 설
법과 의례의 재전파 통로를 유지, 확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합법적인
신앙활동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교리 강습과 수행을 통해
서 교단결집력을 유지,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를 확보하고 있었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 최시형의 설법이나 의례 개혁과 같은
내용들은 대체로 수운의 득도일, 순도일, 생일 등을 기념하는 향례享
禮와 수시로 열리는 기도회를 통해서 접주제라는 중간통로를 거쳐 일
반 신앙대중에게까지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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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347


이 시기에 이루어진 설법은 ‘평등’과 ‘양천주養天主’로 정리된다.15)
양천주는 시천주를 풀어서 수행에 힘쓰기를 강조한 법설이라면, 평등
의 법설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기초한 전통적인 사민체체의 타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귀천, 반상, 적서의 차별을 비롯하여 사회 제
영역에서 천도에 어긋나는 인위적인 불평등의 사회상에 대한 거부였
다. 이것은 무극대도를 세상에 펴기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 시천주를
제시했던 최제우의 문제의식이 세습교주 최시형에게도 그대로 이어졌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최제우의 죽음 이후 교단의 전반적인 재정비의 책임을 지니고
있던 최시형에게는 신앙을 보다 확고히 함으로써 창교주의 종지를 계
승하고, 나아가 포덕천하, 후천개벽을 ‘지속’시켜 나가는 것이 중심적
인 과제였다. 그래서 최시형의 법설은 창교주의 교리적 선포를 신앙
인 대중에게 해설하고, 수행을 강조하는 신앙활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이 동학 창도의 당위성이나 교리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에 치중했던 창교주의 설법과 다른 점이었다.
의례에 있어서도, 수운시기의 ‘염천송주’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주
문 중심의 의례가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단지 최제우의 득도기념일
과 순도기념일 등 창교주의 카리스마에 기초한 기념 향례가 부가되어
교단의 중심적인 의례로 자리잡았다는 점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2) 정비기(1871~1892)
동학의 교단 자료에서 보이는 신미사변에 대한 평가는 이중적이다.


15) 교단 자료에서 보이는 해월의 최초의 설법은 1865년 10월에 수운의 생일을
기념하는 향례에서 행한 ‘人卽天’과 ‘平等無差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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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한편으로는 이필제의 ‘동학을 모칭한’ 거사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동학
교문에 지목이 미치게 되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시각과,16)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불순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신미사변’ 자체
는 분명히 교조신원운동이었다는 입장으로 대별된다.17)
그러나 ?교남공적嶠南公蹟?을 통해서 이필제가 동학에 관련되었다
는 점, 거사에 동학교도가 다수 참여하였다는 점, 그리고 최시형이
이필제와 함께 모의하고 주도했으며 실패후 같이 도망한 사실 등이
밝혀지면서 1871년의 ‘영해·문경 이필제란’은 교조신원운동의 맥락에
서 새롭게 조명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신미신원운동의 결과로 관에서 ‘동학당 진멸’의 기치로 대대적인 토
벌에 나서게 되자, 최시형을 비롯한 주요 접주들도 다시 피신과 은둔
생활로 들어가면서 창교주의 참형 이후 어렵사리 복구된 교단활동은
다시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신미사
변과 같은 ‘난법난도’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교문의 지도력
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지목과 탄압이라고 하는 외
부적 강제에 대응하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내적
혁신을 수행하게 된다.
신미사건 이후에도 법설은 “난법난도하지말고 은인자중할 것”을 강
조하는 내용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별다른 차이
가 없었다. 하지만 1878년에 이르러서 한동안 중지되었던 접을 다시


16) 이필제가 수차례에 걸쳐 거사를 종용함에도 불구하고 해월은 완강히 이를
거절하였으나, 결국 해월과 강수는 거사를 함께 할 것을 동의할 수밖에 없
었으며, 거사 당일에야 이필제의 ‘불순한 의도’를 알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휘말리게 되었다고 하여, 결국 “해월은 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도원기서?, 218-220쪽.
17) 그 근거는 비록 편법으로 거사한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해월 명의의 通
文을 통해서 도인을 회집시켰으며, 회집한 도인들도 各接 단위로 起包하였
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사의 기치가 교조신원에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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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349


열고18) 시천주, 향아설위向我設位 등 주요 교리에 대한 토론을 전
개하면서부터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때부터 최시형 자신의
종교경험에 기초한 독자적인 재해석과 현실적인 의례체계를 갖추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주문呪文을 바꾸거
나 새로 만든 것이다. ‘천주天主’라는 글자로 인하여 천주교와 동일하
다는 오해와 탄압을 받는다는 판단에 따라 교단에 대한 관의 지목을
벗어나기 위해서 주문에서 ‘천주’라는 글자를 ‘상제上帝’로 바꾸고,19)
나아가 세 가지 주문을 새로 만들었다.20) 동학의 의례에서 주문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절대적인 권위를 고려할 때, 세습교주 최시형이
주문을 새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창교주의 카리스마로부터 자유로
운 세습교주의 독자적 리더십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 즉 창교주나 경
전의 카리스마에 대한 교조적인 준수에만 얽매이지 않는 창조적인 재
해석의 의지를 드러내준 상징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와 함께 ‘어육주초魚肉酒草’ 대신에 ‘청수일기淸水一器’만을 사
용하게 한다거나21) 춘추로 각 49일씩의 기도식과 같은 새로운 의례
체계를 갖추거나22) 조직에 있어서도 ‘육임’을 정하는 등 변화를 도모
하였다. 더욱이 1879년 말에 이르러《대전》과 《유사》를 최시형 주도
로 간행, 배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최시형의 교단내 위상이 확고해졌


18) 이때 開接의 뜻으로 發文한 내용을 보면, 최제우의 참형 이후 接을 통한 교
리모임은 상당 기간 중지된 것으로 보인다. ?천도교백년약사?, 136-138쪽.
19) 奉(天)事上帝 一片心造化定 萬事知 (?천도교백년약사?, 145쪽).
20) 侍天主造化定 脫塵無窮萬事知, 侍天主造化定 壽命長生萬事知, 侍天
主令我長生 無窮無窮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등의 세가지 주문이다.
(?동학․천도교약사?, 199쪽).
21) ?천도교백년약사?, 135쪽.
22) 一, 沐浴齋戒 二, 禮服換着 三, 告天(心告) 四, 初學呪文 三回朗誦
降靈呪文 三回 朗誦 五, 本呪文 三回 朗誦 六, 祝文 朗誦 七, 告天
(心告) 閉式의 순으로 祭次를 체계화하였다. 이 祭次에서 새로 지은 ‘參
處薰陶之列’의 祝文이 낭송되었다. ?천도교백년약사?, 147-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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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다는 의미 이외에도 창교주의 카리스마를 객관화함으로써 본격적인 세
습교주 시대를 선포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즉 창교주의
카리스마에 기대지 않는 세습교주의 카리스마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
하였던 것이다.


3) 신원운동기(1892~1898)
동학 교단의 본격적인 교조신원운동은 교문 지도부의 반대 속에 몇
몇 접주들의 주도로, 시위示威와 정소呈訴의 형식으로 촉발되고, 이
를 통해서 전교단 차원의 논의와 참여를 이끌어내면서 본격화되었다.
1892년 7월에 서인주, 서병학 양인 접주가 독자적으로 자기 휘하의
도인들을 공주에 회집시키고 ‘장사狀辭’를 충청감사에게 보내는 것으
로 촉발된 신원운동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1892년 11월의 삼례취
회와 조가회통朝家回通, 1893년 2월의 서울복합상소를 거쳐, 보은
취회로 발전하며, 1894년에는 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정월에
고부민란을 거쳐서 제 1차, 제 2차 동학농민전쟁으로 전개되었다.
신원운동으로부터 농민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특징적인 양상들
을 이 글의 논지와 관계되는 부분에 집중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운동의 형식부터 보면, 시위와 정소의 운동형식은 유지하면서 1892
년 11월의 삼례취회로부터 서울복합상소까지 창의倡義의 기치는 교
조신원, 동학금령해제, 관리탐학중지로 발전하였고, 그 대상도 지방
관[監使]으로부터 중앙정부, 그리고 왕에게 직접 상소하는 식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또한 삼례취회23)를 통해서 동학도인들이 도중회집


23) 삼례취회에서 전라감사에게 보낸 義文[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에서는 첫
째, 東學은 上帝의 命을 직접 받은 天人合一의 道로써 西學과는 전혀 다
른 것이며, 둘째, 孔學이 아닌 道는 동학만이 아닌데 유독 동학만을 탄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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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351


의 위력에 크게 고무되었고, 복합상소24)를 거치면서 일반
농민들이 동학에 대거 참여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여 각지에서 교세
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지역에서 크게 일어나게 되었
다. 이러한 농민층의 대거 참여와 관의 가중되는 탐학은 앞으로의 교
단 차원의 신원운동을 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1893년 3월의 보은취회에서부터는 운동의 형식과 내용에 있
어서 한 단계 진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조직적으로는 몇 개의 접을
묶어서 대규모의 ‘포包’로 편제하여 포명을 주고 대접주를 임명하였
고, 이 과정에서 신원의 대의[東學의 禁令 解除]와 함께 관리의 탐
학 금지, 척양척왜斥洋斥倭가 중요한 창의의 대의로 자리잡게 되면
서 1894년의 농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4. 동학의 종교사적 위상과 의미
중세적 사회구조의 해체기에 직면한 19세기 조선사회에서 신종교로
성립한 동학이 이 시기 종교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무엇인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최제우가 경신년의 종교경험으로부터 동학이라고


는가, 그리고 셋째, 동학 禁壓을 빙자하여 道人의 생명, 재산을 토색하는

이유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다. ?동학․천도교약사?, 42-43쪽.

24) 그 상소문에서는, “… 경주 고학생 최제우가 天主의 降話를 受하사 敎人
布德하니 가히 此世의 眞儒오 創覩의 宗學이라 謂할지라. 行道布德한
지 오년에 西學의 名으로써 誣蔑의 禍를 橫被하여 嶺營에서 受命하니 …
서교의 행세가 만연하는지라 故로 東學으로써 名하여 其實理의 不同함을
판명함이어늘 … 선사의 至寃을 伸케 하시며 臣等의 死命을 濟하소서”라
고 하여 敎祖伸寃과 東學禁令解除를 요구하였다. ?동학․천도교약사?,
49-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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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하는 신종교를 창도하게 된 종교사 영역의 상황은 어떠했으며, 그 혁
신의 초점은 무엇인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유교와 민간신앙
의 종교적 혁신운동의 연속선상에서 유지되거나 단절되는 고리는 어
떤 것일까?
동학사상 내지 수운 사상에 대한 연구에서는 동학이라는 신종교의
태동을 ‘유불선 삼교의 합일’, 기왕의 ‘민간신앙의 종합적 집대성’, 혹
은 ‘체제종교화’의 단초를 연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또한 외연을 확
대하여 근대사회에서 일어난 ‘민족종교’ 일반을 통칭하여 삼교합일로
특징짓기도 한다. 동학의 사상적 특성은 ?대전?과 ?유사?에서 스스로
삼교의 교리적 핵심을 수용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듯이, 분명히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동학의 종교사적 위상과 교리적 맥락을 해명하
기에는 부족하다. 단순히 삼교합일의 내용뿐만 아니라 당시의 종교사
적 상황을 주목해 보면, 동학의 창도 자체가 유교와 천주교 그리고
제반의 민간신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유교와
민간신앙, 그리고 천주교가 만나게 되는 접점에 동학이 서있었다는
당시의 종교사적 상황이 동학이 교단종교로 성립하게 되는 직접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다.
동학이 성립할 당시 조선의 종교사 영역은 체제종교體制宗敎 즉
유교와 확산종교擴散宗敎 즉 민간신앙이 공존하고 있었다.25) 이러한


25) 지배종교로서 종교영역 내에서 확고한 자리를 갖고 있던 유교를 체제종교
로, 그 외의 불교, 도교를 비롯하여 감결류, 미륵신앙과 천주교까지 모두
민간신앙으로 설정하였다. 왜냐하면 각 전통마다의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
만, 조선 사회에서 지배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던 종교인 유교와의 관련성
을 중심으로 종교영역 내에서의 존재방식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정통과
이단의 변별과 이에 근거한 대칭구조로 정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義理
論的 正統主義에 입각한 吾道와 左道, 正統과 異端이라는 범주로 변별
되고 있으며, 특히 이 시기에 있어서 이들 민간신앙은 이러한 유교의 일방
적인 斥邪의 논리에 대응한 開闢의 논리를 공통적인 특성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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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353


공존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교의 명분론적인 배척에도 불구하고,
유교가 담당해 내지 못하는 종교영역의 역할 내지 기능을 불교나 민
간신앙이 대신 수행하는 것을 용인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26) 즉 민
간신앙은 유교이데올로기의 중압성에 눌러 확산종교의 형식으로 존재
할 수밖에 없었으나, 체험적 신앙이라는 면에서는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는 민간신앙의 특성으로 인하여 꾸준히 피지배 대중의 민중적 열망
을 반영하는 세계관으로 현실적인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렇게
존재하던 민간신앙은 조선 후기 들어 유교의 퇴조와 함께 급격히 표면
으로 분출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정감록과 같은 비결신앙이나
미륵신앙이었다. 동학이라는 종교의 성립은 이러한 민간신앙이 지니고
있던 세계관적 지향을 교단종교의 체제로 제도화한 것이다.
천주교와 관련해서는, 천주교의 창궐 자체가 세계적인 질병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사회가 노정
하고 있던 중세사회의 말기적 폐해와 함께 서양적의 침략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운수를 지닌 도가 반드시
요청된다고 보았다. 즉 서학을 현실적 위기의 주범인 ‘서양적西洋敵’
이라는 막강한 세력의 앞잡이로 인식함으로써, ‘서학과는 다른 동학’을
창도할 필요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동학의 경전에는 이들 서양적을
구축驅逐하고자 하는 의도가 가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이 동학
성립의 동기이기도 하고, 교의 명칭을 동학으로 지은 이유이기도 하다.
유교에 대해서는 내적 혁신운동의 역동성을 상실함으로써, 총체적
인 변동기를 맞았으나 전혀 이러한 토대로부터의 변화의 요구들을 수
용하거나 또는 종교적 매개로 해소해낼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상실
했으며, 이미 그 운이 다하였다고 보았다. 결국 이러한 말기적 상황


황선명, ?근세한국종교문화와 후천개벽사상에 대한 연구?, 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7, 참조.
26) 황선명, 앞의 책, 192-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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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에 이르른 유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오만년운수를 가진 무극대도로 대
체함으로써 혁신해낼 수밖에 없고, 그 혁신이 곧 동학이라는 종교의
성립으로 귀결되었다는 논리가 동학 변증론의 핵심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동학은 유교와 서학, 민간신앙이 공존하고 있던 19
세기 조선사회의 종교사 영역 전반을 혁신하고자 했던 신종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은 창도와 포덕 초기부터 유교에 의해서는 오
히려 서학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 좌도左道, 사설邪說로 지목되
는 현실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한편으로 동학과 유교는 다른
것이 아니며, 동학과 서학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방식으
로 적극적인 변증의 논의를 전개해 나가기도 하였다.27) 이미 창교주
당시부터 탄압이 가해진 탓으로 동학의 경전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그
대로 반영되어 있다.
최제우의 종교경험에서 비롯된 동학의 성립과 전개과정은 이러한
종교사적 상황에 근본적으로 규정되어 유․불․도의 삼교합일뿐만 아
니라, 이전의 민중운동의 배경에서 작용하고 있던 종교적 상징과 확
산종교의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던 제반 민간신앙의 세계관을 시천주
로부터 후천개벽에 이르는 일관된 논리로 체계화하고 조직화해내고자
한 종교적 혁신운동이었다.


5. 맺음말
이 글은 동학의 초기 활동이 이루어진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창교주


27) 특히 서학과의 관련성을 설명할 때에는 유교의 의리론적 정통주의에서 동
학을 규정하고 있는 吾道/左道의 관점에 기초한 闢異端과 斥邪의 논리가
그대로 원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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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355


최제우의 종교경험으로부터 ‘교단 종교’로서의 동학의 정체성이 형성
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동학의 종교사적 위상과 의미를 짚어보고
자 하였다. 이를 위해 창교주 최제우의 종교경험으로부터 포교를 준
비하면서 종교로서의 자의식을 갖추어 나가는 과정, 동학의 기본적인
교리, 의례, 조직의 틀이 체계화되는 과정을 검토하였다. 다음으로
세습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교단 활동의 범위가 확산되면서 창교주
의 종교경험이 창조적으로 해석, 적용되는 과정을 교리, 의례, 조직
의 ‘합리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분석을 바
탕으로 동학운동의 종교사적 위상과 의미를 해명해 보았다.
동학은 조선 후기 들어 분출하기 시작한 민간신앙의 개벽지향적 세
계관을 시천주, 무극대도, 후천개벽을 근간으로 하는 교단종교로 제
도화한 신종교였다.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종교사 영역에서 주도
적 역할을 했던 유교가 역동성을 상실함으로써 야기된 세계관 차원에
서의 공백을 민간신앙이 지니고 있던 개벽지향적인 운수관에 기초해
서 혁신해낸 종교적 혁신운동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종교사적 상황에서 신종교운동으로 발생한 동학운동의
전개과정은 창교주 수운 최제우에 의해서 경전을 비롯해서 의례, 조
직의 기본적인 체계가 형성되지만, 세습교주 해월 최시형에 의해서
민중 계층으로 널리 확산되면서 이를 토대로 본격적인 제도종교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동학은 성립과 포교의 초창기부터 줄곧 관의 지
목과 탄압에 직면하였기 때문에 교조신원과 동학 금령의 해제를 통해
서 신앙, 포덕의 합법성을 쟁취하는 문제는 교단사의 전개과정에서
줄곧 현안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외부적 강제에 대처하는 동학 교단
의 대응 방식과 그 내용에 대한 교리적 정당화가 동학이 수행한 종교
적 혁신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동학은 이와 같은 내적 혁신의 과정을 통해서 시천주, 무극대도,
후천개벽을 핵심으로 하는 교리체계를 동학 교단이 처하고 있던 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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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적인 상황과 신앙인 집단의 요구에 기초하여 동학 교단의 종교적 전
망과 실천에 적용하고, 의미를 부여해내는 능동적인 해석과 적용의
과정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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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357


<국문초록>
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고건호
이 글은 동학의 초기 활동이 이루어진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창교주
최제우의 종교경험으로부터 ‘교단 종교’로서의 동학의 정체성이 형성
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동학의 종교사적 위상과 의미를 짚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창교주 최제우의 종교경험으로부터 포교를 준비
하면서 종교로서의 자의식을 갖추어 나가는 과정, 동학의 기본적인
교리, 의례, 조직의 틀이 체계화되는 과정을 검토하였다. 다음으로
세습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교단 활동의 범위가 확산되면서 창교주의
종교경험이 창조적으로 해석, 적용되는 과정을 교리, 의례, 조직의
‘합리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 시기는 동학이 민중 계층으로
널리 확산되면서 이를 토대로 본격적인 제도종교로의 발전이 이루어
졌던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동학운동의 종교
사적 위상과 의미를 해명해 보았다.
동학은 유교와 민간신앙이 공존하고 있던 조선후기의 종교사 영역
에서 신종교로 성립한 종교적 혁신운동이었다. 즉 동학이라고 하는
신종교는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종교사 영역을 전반적으로 지배
하고 있던 체제종교였던 유교가 그 내적 혁신의 역동성을 상실함으
로써 야기된 세계관 차원에서의 공백을, 민간신앙이 지니고 있던 개
벽지향적인 운수관에 기초해서 혁신해낸 것이었다.
동학은 창도와 포덕 초기부터 줄곧 관의 지목과 탄압에 직면하였기
때문에 교조신원과 동학 금령의 해제를 통해서 신앙, 포덕의 합법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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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쟁취하는 문제는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중심적인 혁신의 과제였다.
그래서 이러한 외부적 강제에 대처하는 동학 교단의 대응 방식과 그
내용에 대한 교리적 정당화가 내적 혁신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동학은 이와 같은 내적 혁신의 과정을 통해서 시천주, 무극대도,
후천개벽을 핵심으로 하는 교리체계를 동학 교단이 처하고 있던 구
체적인 상황과 신앙인 집단의 요구에 기초하여 동학 교단의 종교적
전망과 실천에 적용하고, 의미를 부여해내는 능동적인 해석과 적용의
과정을 수행하였다.
주제어: 동학, 종교, 정체성,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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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359
<Abstract>
Religious Identity in the Formative
Years of Donghak
Ko Gunho
This thesis aims to elucidate the position of Donghak(東學), and
its implication in the history of korean religions by concentrating on
its development from the religious experience of the its founder to
its formation into a religious organization. The founder of Donghak,
Su-un(水雲) formed its sacred books, its rituals and organization
and the second leader, Haewol(海月), spread the message of its
doctrine to the people so that Donghak developed into an institutionalized
religion.
Donghak was one of the new religions that originated in Korea
and formed during the Chosun Dynasty when Confucianism and
other folk religions coexisted. The belief system of Donghak was
based on innovation-oriented worldview of folk religions of that
time. Donghak was able to fill the gap in the world-view that
arose from the lack of inner innovative dynamics in Chosun
Confucianism.
As Donghak, from the beginning, was suppressed by the state,
the problem of legitimacy was a central innovative task during
its formative years. Therefore, both its reaction against this outer
suppression and its doctrinal justification was the source of 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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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동학학보 제10권 2호(통권 12호)
inner innovations.
Its main hermeneutical innovations were centered on Sicheonju(侍
天主), Mugeukdaedo(无極大道), Hucheongaebyuk(後天開闢), which had
to be grounded on the concrete situations of that time and on the
needs of the believers. Such inner innovations of interpretation and
application resulted in a unique but syncretic philosophy and doctrine
of Donghak.
Key Words: Donghak(東學), Religion, Identity, Inno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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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성립 초기의 종교적 정체성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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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서? (?아세아연구? 9-11 所收).
?천도교창건사? (이돈화: ?동학사상자료집? 所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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