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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朴晋弘/고려대)



■ 요약
조선 내 일본의 군용 전신선 가설 강행 과정은 일본이 조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외교적 방법으로는 한계에 직면했고, 이를 전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사례였
다. 청일전쟁 직전 조선과 주변의 전신선은 조선과 청, 일본의 이권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일본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조선을 자국의 전신망에 편입시키지 못했지
만, 청일전쟁을 계기로 공병대를 파견하여 직접 군용 전신선을 가설하는 것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일본은 기존 조선 정부의 전신선까지 군용 전신선으로 전용하
여 실질적으로 조선의 모든 전신선을 일본이 독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존 조약이
도리어 일본의 조선 내 전신선 독점을 제한하는 원인이 되어 일본 육군은 군용
전신선 관리를 체신성으로 이관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이 군용 전신선 관리를
육군에서 체신성으로 이관한 것은 당시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대립에 서구열강
이 개입했던 동아시아 국제상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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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청일전쟁, 전신선, 일본 육군, 동아시아 전신망, 군용 전신선, 이권
1. 머리말
19세기 초에 발명된 전신은 19세기 후반에는 단순한 ‘이권’을 넘어 국가전략
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로 발전하였다. 서구열강들의 세력 확장과
함께 전신망은 전 세계로 확장되었고, 자국의 이익과 관련된 지역이면 반드시
전신선을 가설했다. 19세기 중후반 서구열강의 압력을 받던 동아시아에서도
처음에는 전신은 침략의 상징이었지만, 동아시아 각국이 서구열강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근대화사업을 진행하면서 전신 역시 중요한 근대화사업 중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조선은 청과 일본에 비해 서구열강의 관심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었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늦게 전신선이 가설된 지역이었
다. 1880년대까지 세계 전신망의 ‘공백지’로 인식되었던 조선의 전신망 가설에
관심을 보인 것은 주변 동아시아 국가인 청과 일본으로, 서로 조선을 자국의
전신망에 편입시키려 했다.
조선은 비록 동아시아에서 가장 늦게 전신망이 구축된 지역이긴 했지만
한성과 의주를 연결한 서로전신선, 한성과 부산을 연결한 남로전신선, 한성과
원산을 연결한 북로전신선 등 전신망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남로전
신선과 북로전신선을 직접 관리하고, 청은 서로전신선을, 일본은 조선과 외부를
연결하는 해저전신선을 가설하여 관리하여 조선과 그 주변의 전신망은 이러한
국제정세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1)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1) 청일전쟁 당시까지 조선과 외부를 유일하게 연결한 해저전신선인 부산-나가사키
전신선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조약으로 가설된 것이지만, 당시 일본은 해저전신선
을 가설할 자본과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덴마크 국적의 국제통신회사인 대북전신
회사(大北電信會社, The Great Northern Telegraph Company Ltd.)를 통해 해저
전신선을 가설하고 독점권을 인정했다. 당시 대북전신회사의 동아시아 해저전신
선 가설 및 일본의 해저전신선 가설 상황에 대해서는 Jorma Ahvenainen, The
Far Eastern Telegraphs, Suomalainen Tiedeakatemia, 1981; 有山輝雄, ?情報覇権と
帝国日本 1: 海底ケーブルと通信社の誕生?, 吉川弘文館, 201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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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이 강화되자 조선의 전신망이 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는 것을 경계하여,
조선 내의 전신선까지 자국의 영향 아래 두려고 했다. 그러나 일찍부터 전신선
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조선은 일본의 시도를 거부하고 전신선에 대한
자주권을 주장하였다. 일본은 1880년대 조선 전신선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지만
1894년 청일전쟁을 기회로 삼아 군사적 점령을 통해 조선 내 전신선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전신선 가설에 대한 국내 연구는 청일전쟁 당시 조선인이 일본군의
전신선을 대상으로 반감을 표출하고 일본군이 이를 진압했다는 사실을 지적하
거나,2) 지역의 관점에서 초기 조선 침략의 구체적 사례로 제시하는 등3) 전신선
에 대한 침략적 성격을 강조했다. 조선의 근대화사업이라는 관점 역시 청일전쟁
기간 중에는 이미 가설된 조선의 전신선을 일본에서 강압적으로 빼앗아서 이용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자주적 근대화를 방해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4) 한편
일본에서는 청일전쟁 기간 중 전신선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본
육군의 조선 내 전신선 가설 노력에 주목한 연구가 있다.5) 이 연구는 조선에서
일본 육군의 전신선 가설이 청일전쟁의 일부로, 청일전쟁 이전부터 계획되었던
사실을 밝혔다. 또 제국 일본이 동아시아 정보 패권을 위해 동아시아의 전신망
을 장악해 나가는 관점의 연구도 있다.6) 여기서는 일본과 청의 해저전신선
가설 등 동아시아 전신망 구축 과정에서 일본 육군뿐만 아니라 외무성, 체신성
등 일본의 다양한 정부 기관이 당시 ‘공백지’로 남아있던 조선을 자국의 전신망
으로 편입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조선과 그 주변의 전신선은 조선과 청, 일본의 전신선이 서로 얽혀 있는
2) 박찬승, 「동학농민전쟁기 일본군·조선군의 동학도(東學徒) 학살」, ≪역사와 현
실≫ 54, 2004; 이승희, 「청일, 러일전쟁기 일본군의 군용전신선 강행가설 문
제」, ≪日本歷史硏究≫ 21, 2004.
3) 김경남, 「1894~1930년 ‘전통도시’ 전주의 식민지적 도시개발과 사회경제구조
변용」, ≪한일관계사연구≫ 51, 2015.
4) 김연희, 「고종 시대 근대 통신망 구축 사업」,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2006.
5) 斎藤聖二, ?日清戦争の軍事戦略?, 芙蓉書房出版, 2003.
6) 有山輝雄, ?情報覇権と帝国日本 3: 東アジア電信網と朝鮮通信支配?, 吉川弘文館,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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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관계에 있었으며, 여기에 당시 동아시아의 복잡한 국제상황이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 조선과 청, 일본, 그리고 서구열강의 이권이 공존하던 조선의
전신선 문제를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일본의 군용 전신선
가설이 이후 어떠한 외교적 문제로 이어지는지를 통해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상
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청일전쟁은 일본 제국주의가 팽창하는 결정적
계기로,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게 된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청일전쟁 당시의
보급로와 전신선, 철도부설계획 등은 이후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군사인프라
구축 과정의 원형을 보여준다. 청일전쟁 당시 계획으로 그쳤던 철도와는 달리
전신선은 일본군 공병대를 통해 조선 내에 실제로 가설되었고 필요에 따라
확장되었다. 일본이 조선 내 전신선을 장악하는 과정을 추적하여 일본 조선
침략정책의 원형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우선 일본 육군이 전신선 가설 과정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확인하
기 위해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防衛研究所) 사료 및 외무성 외교사료관(外交
史料館) 소장자료를 주로 활용하여 연구에 이용하였다.7) 특히 일본군 자료
중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 이 시기의 ?戦役日記? 및 각종 관련 문서, 그리고
해군성 자료로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에서 전신 관련 기록인 「軍用
及通常電信」를 통해 조선에 공병이 파견되고 실제로 전신선이 연결되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戦役日記?는 일본 육군에서 전쟁경과를 매일 기록한 것으로, 이
중 군용 전신선의 가설 계획과 과정에 관련된 기록, 관련 기관과 주고받은
문서에 대한 내용을 이용하였다.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는 일본 해군
이 청일전쟁 전사를 편찬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모아둔 것으로, 이 중 「軍用及通
常電信」는 전신에 관련된 자료를 시기별로 정리한 내용이다. 일본 측의 전신선
가설에 대한 조선 측의 반응에 대해서는 ?舊韓國外交文書?과 ?駐韓日本公使館
記錄?, 그리고 일본 신문의 기사를 활용하였다.
7)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에 공개된 자료를 주로 활용하
였다. 아시아역사자료센터는 논문에 인용한 자료를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
ター)”를 병기하여 표기할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본 논문에서 “Ref.”가 표기
된 자료는 모두 해당기관에서 확인한 자료이기 때문에 해당 표기를 생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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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 내 일본 군용 전신선 가설 과정
1) 일본 군용 전신선 가설 이전의 조선 내 전신 상황
청일전쟁 직전 조선과 그 주변의 전신선은 조선과 청, 일본이 서로 전신선에
대한 이권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서구열강이 이에 개입하는 복잡한 상황 속에
있었다. 당시 조선과 그 주변을 연결하는 전신선은 한성과 의주를 연결하는
서로전신선, 한성과 부산을 연결하는 남로전신선, 그리고 한성과 원산을 연결하
는 북로전신선, 그리고 부산-나가사키 해저전신선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조선과 외부를 연결하는 전신선은 1885년 체결한 「해저전선설치조
약속약(海底電線設置條約續約)」에 따라 해저전신선은 부산-나가사키 간 해저
전신선만이 인정되었다.8)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조선과 청의 국경인 의주에서
조선과 청 사이에 육로전신선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 외부를 연결하
는 전신선은 서로전신선과 부산-나가사키 해저전신선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1884년 이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한 청은 한성과 의주 사이에 자국의
자본과 기술자로 전신선을 가설하여 이 선로를 군사 및 경제적 목적으로 이용하
고 있었다.9) 그러나 표면상으로 서로전신선은 조선 정부가 청의 차관을 받아
가설한 것으로 조선 정부에 소유권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해저전선설치조약
속약」을 근거로 조선과 청의 육로전신선 연결에 대해 항의했지만 서로전신선
가설을 막지 못했다. 대신 한성-부산의 전신선(남로전신선)은 조선 정부가 직접
가설하고 관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쳐야 했다.
본래 일본은 조선과 타국을 연결하는 전신선을 해저전신선으로 제한하고
이를 독점하여 인접국으로 연결되는 전신선을 전부 독점하고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의 서로전신선이 청의 전신선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해저전
8) 1885년 조선과 일본 사이의 「해저전선설치조약속약」 교섭과정에 대해서는 이수
지(李穂枝), ?朝鮮の対日外交戦略?, 法政大学出版局, 2016의 제5장 「日朝海底電線
設置条約続約の締結」을 참고.
9) 김연희, 「고종 시대 근대 통신망 구축 사업」,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2006,
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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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 서로전신선(경의선)10)
신선에 대해서만 독점권을 가질 수 있었다. 이는 일본과 교섭했던 조선의 의도
가 관철된 것이기도 했지만, 당시 해저전신선을 가설할 수 있는 기술과 자금이
없었던 일본이 덴마크 국적의 국제통신회사인 대북전신회사(大北電信會社, The
Great Northern Telegraph Company Ltd.)를 통해 해저전신선을 가설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에 있었기 때문이다.11) 청과 일본 양쪽 모두에 이권을 가지고 있던
대북전신회사는 일본의 의도를 관철하기보다는 청을 자극하지 않는 쪽을 선택
한 것이다. 또 당시 일본에 있던 영국 총영사 아스톤(William George Aston)은
조선의 ‘균점주의’를 지적하며 청의 전신선이 조선의 전신선과 연결되는 것을
10) 체신부, ?電氣通信事業 八十年史?, 1966, 51쪽.
11) 有山輝雄, ?情報覇権と帝国日本 3: 東アジア電信網と朝鮮通信支配?, 吉川弘文館,
2016, 83~84쪽.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47
<지도 2> 남로전신선(경부선)14)
일본 측에서 막을 수 없도록 했다.12) 동아시아에 들어온 서구열강은 조선에서
일본이 독점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했던 것이다.
남로전신선은 1888년 7월에 조선 정부가 가설한 것이다. 조선 정부는 한성과
부산을 연결하는 남로전신선을 지방행정을 위한 목적으로 가설한 것으로 보인
다.13) 조선 정부는 남로전신선을 한성 남부의 주요 지역인 삼남지방(경상도,
12) 有山輝雄, ?情報覇権と帝国日本 3: 東アジア電信網と朝鮮通信支配?, 吉川弘文館,
2016, 64~65쪽.
13) 김연희, 「고종 시대 근대 통신망 구축 사업」,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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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충청도)을 통과하는 경로로 가설하였다. 이 경로는 한성-부산 사이의
최단거리가 아니라 경상도 대구에서 전라도 전주까지 연결된 뒤 공주를 거쳐
다시 한성으로 북상하는 경로로 가설되었다.
이후 1891년 6월 한선과 원산을 연결하는 북로전신선이 가설되면서, 조선과
그 주변의 전신선은 조선이 관리하는 남로전신선과 북로전신선, 청의 영향
아래에 있는 서로전신선, 그리고 일본이 독점하는 부산-나가사키 해저전신선으
로 구분되어 있었다. 조선을 둘러싼 청일 간의 대립과 조선의 전신 자주권
확보 과정 속에서 나타난 복잡한 상황이 조선과 주변 전신선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여기에 앞서 서술했듯이 덴마크 전신회사와 영국 등 서구열강도 조선의
전신선 가설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조선의 전신선을 청의 영향에서 독립시키려 했다. 조선 정부와 교섭
하는 과정에서도 조청관계를 종속관계로 인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청과 직접
교섭을 거부했다.15) 1888년 9월 조선 정부와 일본 체신성은 「판리통련만국전보
약정서(辦理通聯萬國電報約定書)」를 체결하여 부산과 일본 사이의 전신 이용에
대한 규약을 확정하였다.16) 조선의 남로전신선은 조선 정부가 관리해야 하는
전신선이었고, 일본도 조선 내 전신선을 청에서 독립시키기 위해 이를 인정했
다. 이러한 관계는 1894년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자 조선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 역시 조선
내 상황 변화를 주시하고 본국에 보고했다. 한성에 있는 일본 공사관의 보고는
남로전신선을 거쳐 일본에 전달되어야 했는데, 이 시기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함께 남로전신선이 자주 불통되는 일이 일어났다. 일본은 남로전신선이 여러
차례 불통되자 조선의 전신선 관리 능력을 불신하고 이를 이유로 조선의 전신선
을 직접 관리하려 했다.17) 그러나 실제로는 이 시기 일본 정부가 조선 정부에
요구했던 ‘내정개혁’ 요구처럼 일본군의 철수 시기를 미루고 조선 문제에 개입
70~71쪽.
14) 체신부, 1966, ?電氣通信事業 八十年史?, 91쪽
15) 山村義照, 「朝鮮電信線架設問題と日朝清関係」, ≪日本歴史≫ 587, 1997.
16) ?고종실록? 1888.9.23(고종25.8.18.음).
17) 斎藤聖二, ?日清戦争の軍事戦略?, 芙蓉書房出版, 2003, 84~88쪽.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49
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陸奥宗光)는 혼성여단 파병의 명분이었던 조선의
동학농민군 문제가 해결되고 청군이 철수할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군 부대를
철수시킬 것인가 다른 명분을 찾아 억지로 주둔시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무쓰가 착안한 명분 중 하나가 전신선 문제였다. 무쓰는
6월 1일 오토리에게 보낸 문서에서 “일한교섭을 일체 정리하듯이 담판하면서
약간 강경자세(强ハモテ)를 가지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내훈하고, “본문 안의
강경자세론을 제출할 경우에는 예의 철도론 또는 경부전신론 기타 조선개항론
등을 제시하는 것이 일책이다”고 했다.18) 무쓰가 오토리의 한성 복귀 전에
보낸 내훈에는 전신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무쓰는 「무쓰 무네미쓰 문서(陸
奥宗光文書)」에 조선 전신선 문제와 관련된 문서가 정리되어 있고 오토리에게
보낸 문서에서도 “예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이전부터 조선 전신선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9)
한성의 일본공사 오토리는 6월 23일 부산과 한성 간 전신선 수리를 위해
일본 정부에 기사(技師)를 요청했다.20) 오토리의 요청에 대해 참모본부는 곧바
로 전신선 수리에 필요한 기사를 보내겠다고 답변했다.21) 한성에서 청주까지
“전신선을 가설할 전선직원(架設スヘキ電線職員)”들은 7월 4일에 인천에 도착
했다.22) 이들은 공병 1중대와 인부 6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수리’가 아니라
‘가설’할 인원이라는 사실에서 이들이 조선 내에 전신선을 가설할 목적으로
파견된 인원임을 알 수 있다. 또 오토리가 요청한 것은 ‘기사’였지만 실제로는
공병이 파견된 사실에서 이 전신선이 일본 육군에 의해 가설되는 군용 전신선이
18) ?明治27年6月 「完 27 8年戦役日記」?, 「内閣訓令 出兵に関する任務の件」, 1894.
6. (Ref.C06021837400, 防衛省防衛研究所)
19) 有山輝雄, ?情報覇権と帝国日本 3: 東アジア電信網と朝鮮通信支配?, 吉川弘文館,
2016, 122~123쪽.
20)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釜仁間電信線修繕> 大鳥
公使 발신. 1894.6.23. (Ref.C08040475400, 防衛省防衛研究所)
21)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京釜間ノ電信線修繕>
1894.6.24. (Ref.C08040475400, 防衛省防衛研究所)
22)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京城ヨリ淸州ニ架設スヘ
キ電線職員着仁> 1894.7.4. (Ref.C08040475400, 防衛省防衛研究所)
50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라는 사실도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 공병대가 인천에 도착하기 이전에 부산에도 공병대가 상륙했으
며, 이들은 전신 가설 임무를 명령받고 대기하고 있었다.
… 본함은 요시미(吉見) 공병소좌, 공병 200여 명, 역부(役夫) 170명을 싣고 7
월 3일 부산에 상륙하였으며 지금 막(역주: 7월 8일) 도착했다고 이상과 같이
보고합니다.
이어서 전달하는 바에 따라 일단 담판이 파열(破裂)되면 곧바로 이 공병들은
부산에서, 또 경성(京城)에 있는 공병들은 경성에서 전신가설에 착임(着任)하라는
것에 따르겠습니다.23)
여기서 언급된 ‘담판’이란 7월 10일 오토리가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전신선
보수 및 가설에 대한 담판이다. 이 담판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경성 부산 간의 전선을 수선(修繕) 또는 신축(新築)하는 것에 관한 우리 제의
에 대해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역주: 조병직)가 단연(斷然)히 거절
하며 이 공사(工事)는 일국의 주권에 속하여 외국에서 이를 시행 할 수 없다고
주장함에 따라, 이 일을 본 공사는 6월 21일부 기밀 제35호 귀 대신의 훈령 제3
항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본 공사는 호기를 보아 이에 착수하
겠습니다.24)
오토리가 7월 10일 보고에서 언급한 6월 21일 외무대신의 훈령은 한성과
일본 사이의 전신이 끊길 경우 육군과 상의하여 임의로 처리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으로 “경부선로 수복의 건을 충분히 진력했으면 한다(釜山線路修復ノ件ハ
23)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朝鮮ニ於テ電線架設ノ計
畫> 1894.7.8. 平山八重山艦長→ 海軍大臣. (Ref.C08040475400, 防衛省防衛研
究所)
24)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京城間ノ電線ニ關スル談
判> 1894.7.10. 京城大鳥公使→ 外務大臣. (Ref.C08040475400, 防衛省防衛研
究所)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51
十分御盡力相成度候)”고 지시한 내용이다.25) 이 훈령에 따라 오토리는 6월 24
일 “남부 지역에 민변소요(民變騷擾)가 있어 조선 정부가 신경 쓸 여유가 없으
니 수리가 지연되고 문제가 있다”면서 일본 정부에서 전기공 몇 명을 파견하여
(한성과 부산) 양쪽에서 동시에 수리하면 공사가 빨리 끝날 것이라고 조선
정부에 제의했다.26) 이어서 7월 7일에도 전신선 문제의 긴급성을 강조하며
이 문제가 빨리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일본에서 직접 기사를 파견하여 전신선을
가설할 것이라고 알렸다.27) 이처럼 무쓰의 훈령 이후 오토리의 태도가 점차
강경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토리가 6월에 전신선이 불통되는 상황을
경험하자 조선의 전신선 관리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일본이 직접
수리하겠다고 조선 정부에 요청했던 사실에는 이와 같은 외무성의 훈령이 있
었다.
조선 외무독판 조병직은 조선의 전신선을 장악하고자 하는 오토리의 전신선
수리 및 가설 요청을 일관되게 거절했다.28)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의 전신선
수리는 내정간섭이었으며 특히 수리뿐만 아니라 조선 내에서 일본이 직접 전신
선을 가설하겠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6월 24일과 7월 7일 일본 공사관의 전신선 수리 및 가설 요청을 분명하게
거절했음에도 일본 정부 내에서는 이미 전신선 가설을 확정하고 전신선 가설을
위한 공병대 파견이 결정되어 있었다.
오토리가 조선 정부에 일본의 전신선 수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 것은
무쓰의 6월 21일 내훈을 받은 후인 6월 24일이었으며, 7월 7일에 전신선을
새로 가설하겠다는 주장 뒤에는 7월 3일과 8일에 각각 부산과 인천에 상륙한
25) ?駐韓日本公使館記錄?2, <京城·日本間 電信往復이 두절될 경우에 대비하는 訓
令> 1894.6.21. 陸奧宗光→ 特命全權公使 大鳥.
26) ?舊韓國外交文書?2 #2868 <京釜電線의 相互派員修理提議> 1894.6.24. 日本公
使 大鳥圭介→ 督辦交涉通商事務 趙秉稷.
27) ?舊韓國外交文書?2 #2917 <京釜電線의 堅固修理와 新線設置의 再要請>
1894.7.7. 日本公使 大鳥圭介→ 督辦交涉通商事務 趙秉稷.
28) ?舊韓國外交文書?2 #2869 <上件拒絶> 1894.6.24. 督辦交涉通商事務 趙秉稷
→ 日本公使 大鳥圭介; ?舊韓國外交文書?2 #2918 <上件拒絶> 1894.7.7. 督辦
交涉通商事務 趙秉稷→ 日本公使 大鳥圭介.
52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일본군 공병대가 있었다. 이처럼 일본의 전신선 가설은 조선 정부의 일관된
항의와 거부를 무시하고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전신선 가설을 강행하여 조선과 청, 일본이 각자 관리하던 조선 내 전신선
상황을 일본이 독점하고자 시도했다. 일본 공사가 조선과의 담판과정에서 보인
‘강경한 태도’는 일본 외무대신의 훈령이기도 했지만, 일본 육군이 조선과의
담판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전신선 가설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 일본 육군의 군용 전신선 가설 계획과 강행
조선 정부의 완강한 반대에도, 일본 육군은 이미 조선 내에 일본군이 이용하
기 위한 군용 전신선 설치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일본 육군은 6월 25일
공병 제5대대를 중심으로 조선 내에서 전신선을 가설할 부대를 편성하고, 체신
성에 전신선 가설에 필요한 인원과 재료를 요청하는 등 조선 내에 전신선을
가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시행계획을 마쳤다.29) 또, 기존의 조선 남로전신선과는
달리 대구(大邱)에서 성주(星州), 추풍령(秋風嶺), 옥주(沃州), 청주(淸州)로 이어
지는 한성-부산 간 최단거리로 전신선을 가설할 것을 결정했다. 이 전신선은
이후 일본군의 보급로가 만들어지는 경로이기도 하여,30) 전신선의 경로가 보급
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 육군은 체신성에 전신선 가설 재료
를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대장성에도 전신선 가설 중에 필요한 경비를 여러
차례 요청하기도 했다.31)
29) 明治27年6月12日~7月22日 「玉手箱 第4号」?, 「釜山京城間電線架設に要する諸
材料人員等借用の件」 1894.6.25 兵站総監→ 通信大臣 (Ref.C06061939300, 防
衛省防衛研究所); ?明治27年6月12日~7月22日 「玉手箱 第4号」?, 「電線架設枝隊
編制の覚書」, 1894.6.25 (Ref.C06061939400, 防衛省防衛研究所); ?明治27年6
月12日~7月22日 「玉手箱 第4号」?, 「工兵第5大隊臨時編制表の大隊本部及1 中
隊を解き電線架設枝隊を編成の件」, 1894.6.25. 兵站総監→ 第5師団長. (Ref.C06
061939700, 防衛省防衛研究所)
30) ?命令訓令 自明治27年6月 至明治28年6月?, <釜山大邱間徒路修理ニ付命令>
1894.7.27. 大本營→ 第五師團長. (Ref.C13110302000, 防衛省防衛研究所)
31) ?明治27年7月 戦役日記?, 「経理局軍用電信架設費の件」, 1894.7.3 (Ref.C0512
1500800, 防衛省防衛研究所); ?明治27年7月 戦役日記?, 「経理局電信線架設費請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53
조선 정부가 일본의 전신선 수리 또는 가설 제의를 “단연히 거절”하고 있었지
만, 일본군 공병대는 조선에 도착하여 허가를 기다리며 대기 중이었다.32) 본래
공병대는 한성과 부산 양쪽에서 동시에 전신선을 가설하려 했지만 조선 정부의
반대로 가설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성과 인천 사이의 전신선
가설은 조선 정부의 허가 없이 시작하여 13일에는 작업을 마칠 것으로 예상했
다. 그리고 실제로 12일에 경인간 전신선을 개통하여 신호소(信號所)를 설치했
다.33) 이 전신선은 거류지를 거치지 않은 것이었고 이에 대해서는 한성의 일본
공사와 인천의 일본영사도 승인했다.34) 일본군의 군용 전신선은 7월 8일 공병대
의 인천 상륙 시점에서 시작되어 경인간 전신선이 설치된 것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7월 19일 일본 육군은 한성과 부산 사이에 전신선 가설을 시작했다.35) 이러한
일본군 공병대의 전신선 설치는 조선 정부의 승낙 없이 강행하는 것이었다.36)
조선 정부의 거부와 항의에도 불구하고 오토리는 결국 전신선 설치를 강행하겠
다고 일방적으로 조선 정부에 통보했다.37) 여기에 대하여 조선 측이 반발하자,
주둔 중이던 일본군 부대에 방해하는 조선인 혹은 청국인에게는 “때(時宜)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처치”하여도 좋을 것이라고 연락하여 이들에 대한 발표를
사실상 허가했다.38) 이 시기는 청일 간의 전쟁이 아직 시작하기 전으로, 전신선
求の件」, 1894.7.26 (Ref.C05121506800, 防衛省防衛研究所); ?明治27年7月 「完
27 8年戦役日記」?, 「経理局より 27年度明細仕払予算書中増額の件」, 1894.7.29.
(Ref.C06021875600, 防衛省防衛研究所)
32)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京釜間ノ電信架設事>
1894.7.11. (Ref.C08040475400, 防衛省防衛研究所)
33)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京仁間ノ軍用電信成ル>
1894.7.12. (Ref.C08040475400, 防衛省防衛研究所)
34)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電信ニ關スル公使領事ノ
承認> 1894.7.17. (Ref.C08040475400, 防衛省防衛研究所)
35)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京釜間ノ電線架設> 1894.
7.19. (Ref.C08040475400, 防衛省防衛研究所)
36)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京城雜報> 1894.7.19.
(Ref.C08040475400, 防衛省防衛研究所)
37) ?舊韓國外交文書?2, #2939 「京釜電線代設工事의 强行通告」 1894.7.19. 日本公
使 大鳥圭介→ 督辦交涉通商事務 趙秉稷.
54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제1전선가설지대 제2전선가설지대
본부
사령관: 소좌 吉見 精
부관: 중위 土屋喜之助
재료주관(材料主管): 소위 井上幾太郞
군리(軍吏): 2등군리 小暮洔太郞
제1지대장: 대위 大日方 純
제2지대장: 秋月榮太郞
본부
사령관: 소좌 馬場正雄
부관: 중위 竹田槇之助
재료주관: 중위 平尾次郞
군의(軍醫): 2등군의 吉井赤心
군리: 2등군리 小紫義和
지대장: 大野嘉遼
<표 1> 전선가설지대(電線架設枝隊) 직원표
가설을 명목으로 이미 현지 조선인의 저항에 대한 일본군의 군사행동을 허가했
던 셈이다. 이 무렵 부산에 있던 제1지대는 쓰시마에서 현지 소속 병사 중
7명을 경비인원으로 충원하기도 했다.39)
당시 전신선을 가설한 일본군 실제 공병대의 규모는 <표 1>과 <표 2>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40)
위 표는 일본 육군에서 전선가설부대를 편성하여 파견할 무렵인 7월 2일
당시 이 부대의 구성을 보여준다. 일본 육군은 공병 제5대대에서 인원을 차출하
여 전선가설부대를 2개 지대로 편성하였다. 일본 육군이 전신선 가설부대를
2개 지대로 편성한 것은 제1지대는 부산에서, 제2지대는 한성에서 각각 가설을
시작하여 한성-부산 간 전신선 가설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였다. 두 지대는
군속(軍屬) 인원은 비슷한 규모로 제1지대가 병사가 좀더 많은 정도였지만,
제2지대는 인부를 미리 고용하여 편제했으나 제1지대는 운반인원만 많이 편성
하고 있다. 이후 문서를 통해 확인하면 부산에 있던 제1지대는 전신선 가설
공사에 착수한 후 인부를 더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데,41) 고용된 인부 500명
38)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機密第128號 「京城間軍用電信加設件」 1894.7.16. 特命
全權公使 大鳥圭介→ 旅團長 陸軍少將 大島義昌.
39) ?明治27年7月 戦役日記?, 「警備隊兵員通弁に使用の件」, 1894.7.22. (Ref.C0512
1502500, 防衛省防衛研究所)
40) ?明治27年7月 戦役日記?, 「第5師団 電信架設技隊職員表進達」, 1894.7.2. (Ref.C0
5121502500, 防衛省防衛研究所)
41) ?明治27年6月 「27·8年戦役諸報告」?, 「7.29 馬関兵站碇泊場 第1電線架設枝隊用
人夫賄料等」, 1894.7.29. (Ref.C06060084800, 防衛省防衛研究所)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55
부대
등급
제1전선가설지대 제2전선가설지대 합계
소좌 1 1 2
대위 2 1 3
중위 2 2 4
하사 10 9 19
병졸 132 117 249
군의 1 1
간호장(看護長) 1 1 2
간호수(看護手) 1 1 2
군리 1 1 2
군리부서기
(軍吏部書記)
1 1 2
마졸(馬卒) 5 5 10
윤졸(輪卒) 6(고용) 6(고용) 12
기수(技手) 9 10 19
공부(工夫) 10 140 150
공장운반부
(工場運搬夫)
160
△4
50
△1
215
인부
100
△3
103
계 345 449 794
승마(乘馬) 5 5 10
비고
1. 경중윤졸(輕重輪卒)은 고용자로 충원하였다.
2. 공장운반부, 인부에는 관리자(取締)로 편성표 인원 외에 오십인장,백
인장을 두어 본표 중에 △표시를 붙여 구별하였다.
<표 2> 전선가설지대 편제표
중 200명은 쓰시마, 200명은 도요우라(豊浦), 100명은 시모노세키(馬關)에서
모집하여 이송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인 인부가 일본에서 고용되어서 조선
전신선 가설 지역으로 수송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부산에 있는 제1지대가
제2지대보다 민간인 인부가 적게 편성한 이유는 위치상 일본 현지에서 고용된
인부를 쉽게 충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56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또 제1지대는 고용된 인부 100명, 20명마다 각각 백인장, 이십인장을 두었고,
이들에게 일급으로 백인장에게 80전, 이십인장에게 55전, 일반 인부에게 40전
을 지급했다.42) 식료와 피복은 군에서 지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게는
보수가 일급으로 지급되었기 때문에 전신선 가설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이들
인원을 유지하는 비용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전선가설지대의 구성을 보면 병사들보다는 인부의 비중이 더 컸으며, 이들은
이후에 일본에서 고용되어 이들 부대에 증원되었다. 초기 인원이 300~400명
정도의 규모에 그와 비슷한 인부들이 증원되었지만 일본군은 인원 충원을 위해
조선인 인부를 고용하려 하였다. 조선 정부의 반대에도 이 정도 규모의 부대가
이동과 전신선 가설 작업을 강행하는 것은 조선인들에게는 위협적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또 이들은 한성과 부산에서 각기 작업을 시작해서 조선 내륙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전신선 가설 경로에 있는 조선인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듯 허가와 동의 없이 강행된 일본 군용 전신선 가설은 조선 정부와 조선인
들의 일본군에 대한 항의와 반감을 불렀다.
일본 육군의 전신선 가설 강행은 곧 ‘장애(障碍)’에 직면했다.43) 일본군 공병
대는 조선의 관원들에게 조약 위반으로 항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작업에
동원했던 조선인 인부들을 조선 경찰관이 불러들여 현지 조선인들을 가설 작업
에 동원할 수 없었다. 부산과 대구 사이의 전신선 가설에도 많은 인부가 필요했
으므로 인부 500~600명이 더 필요했고, 전신선 가설 구간이 길어질수록 관리와
유지에 대비하여 관리자를 배치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앞서 서술한 외교적 항의 외에 당시 일본군의 전신선 강행에 대한 조선
측의 항의 방법은 다음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정부는 공달(公達)을 보내어, 조선 인민이 일본 정부의 고용에 응하여
부산 경성 간의 전선 가설 공사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종래
42) ?明治27年6月 「27·8年戦役諸報告」?, 「7.29 馬関兵站碇泊場 第1電線架設枝隊用
人夫賄料等」, 1894.7.29. (Ref.C06060084800, 防衛省防衛研究所)
43)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電線架設ノ障碍> 1894.
7.21. 吉見少佐→川上中將 (Ref.C08040475400, 防衛省防衛研究所)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57
사용했던 한인(韓人) 노동자는 모두 손을 떼게 되어 공사가 진보(進步)되는 데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44)
이처럼 조선 정부는 지방관들에게 지시하여 일본군이 조선인 인부를 고용하
지 못하도록 했다. 조선 지방관은 조선 정부의 지시에 따라 조선인 인부들의
고용을 막는 한편, 무장한 일본군 병사들이 관할지역 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45) 조선 정부는 자국의 항의를 무시하고 진행되는 일본군의 전신선
가설을 직접적으로 막지는 못하지만 행정적인 협조를 거부하거나 조선인 고용
을 방해하면서 조선 내에 일본군 전신선이 가설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외교적
인 측면뿐만 아니라 전신선 가설 현장에서도 명백한 항의 의사를 보였던 것이다.
지방관뿐만 아니라 일반 조선인들도 일본 전신선 가설 강행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는 주로 전신선 파괴와 일본인에 대한 투석 등으로 나타났다.
대구에서는 7월 19일 일본 외무성 서기관이 인부 고용 등을 위해 성으로 들어가
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돌을 맞고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46) 또 8월 7일에는
대구에서 조선인들이 전선을 파괴하자 일본군이 발포하는 일도 있었다.47)
청일전쟁 직전 조선과 주변 전신선은 조선과 청, 일본이 각자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여기에 서구열강이 개입하는 등 당시의 복잡한 동아시아 국제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을 명분으로 청과 일본이 동시출병한 후 철수문제
를 논의하던 1894년 7월 일본은 조선 정부가 거부했음에도 공병대를 파견하여
조선에 군용 전신선을 가설하였다. 전신가설부대는 병사와 인부를 포함하여
44) ≪時事新報≫ <電信架設を妨害> 1894.7.23.
45) 1894년 7월 24일 대구감사가 “무기를 가진 일본인”을 내쫓을 것이라 포고한
일이 있었다[?明治27年7月~8月 「着電綴(三)」?, <7月24日 柴中尉発 寺内大佐宛
大邸監司は武器を持てる日本人撃ち払い事布告せるよし> 7.24. 柴中尉→寺内大
佐 (Ref.C06060803800, 防衛省防衛研究所)].
46)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965 <大邱府民의 外務省官吏에 對한 投石事件과 行
旅의 安全保護要求> 日本公使 大鳥圭介→ 督辦交涉通商事務 金允植 1894.8.7.
47)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和文電報往復控 追加」 <大邱·洛東以南 暴徒에 의한
전선파괴와 朝鮮電信 사용의 件> 少佐 馬場→ 公使 大鳥 1894.8.10; ?兵站部陣
中日誌?, 明治27年 6月 「陣中日誌7 兵站総監部27 自6.5 至9.3」 8.13. (Ref.
C06062203900, 防衛省防衛研究所)
58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300~400명 정도 되는 규모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조선인 인부를 추가로 고용할
정도로 큰 규모의 부대가 조선 내에서 무단으로 전신선 가설을 하는 것은
조선인들의 반감을 불렀다. 조선 정부는 일본군의 전신선 가설 강행에 항의하고
지방관을 통해 공병대의 인부 모집을 방해했고, 조선인들 역시 투석과 전신선
파괴로 반감을 드러냈다..
3. 일본의 전신선 독점 시도와 체신성 이관
1) 한성-부산 전신선 개통 이후 일본 군용 전신선 확장
조선 정부는 일본군의 전신선 가설 강행에 대해 항의했지만 7월 23일 이후로
는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세워 조선 정부가 전쟁에 협조하도록 했다. 이어서 8월 1일 일본 정부는
경복궁 점령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고 조선 정부의 군사적 협력을 얻기 위해
「가조약안(假條約案)」을 마련하여 일본공사 오토리를 통해 조선 정부에 전달했
다.48) 이날 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정식으로 청과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경복궁
점령으로 발생한 외교적 문제와 전쟁 중에 필요한 군사적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
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이 「가조약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여 양측
의 협상은 20일 가까이 지속되었다. 결국 양측은 관련조항을 수정하여 8월
20일 「잠정합동조관(暫定合同條款)」을 체결하였다.49) 그 내용은 일본의 군사적
실익을 추구하면서 조선 정부의 체면을 살려주는 수준으로 변경되었다. 군사력
으로 조선을 위협하는 일본의 외교적 우위 속에서 조선 정부의 요구가 반영될
수 있었던 한계였을 것이다. 그 후 8월 26일에는 일본은 조선과 ‘공수동맹(攻守
同盟)’ 관계로 청일전쟁으로 끌어들여 일본군의 지원을 담당하도록 규정한
48)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機密第143號 本83 「事變後朝鮮政府ト假條約締結協議ノ
件」, 1894.8.1. 特命全權公使 大鳥圭介→ 外務大臣 陸奧宗光.
49) ?駐韓日本公使館記錄?5, 機密第173號 本97 「朝鮮政府ト假條約訂結ノ件」,
1894.8.25. 特命全權公使 大鳥圭介→ 外務大臣 陸奧宗光.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59
「대조선국대일본국양국맹약(大朝鮮國大日本國兩國盟約)」을 체결했다. 이후
조선 정부는 더 이상 일본군의 전신선 가설을 방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협조해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50)
8월 20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체결된 「잠정합동조관」은 일본의 조선 내
전신선에 대한 권한을 보장해주었다. 여기서 “경성·부산 두 지역 및 경성·인천
두 지역 간에 일본 정부에서 이미 가설한 군용 전신선은 적절한 시기를 참작,
조관을 체결하여 그 존치(存置)를 도모하여야 한다”는 조항은 본래 「가조약안」
에는 없던 ‘군용’이 추가된 것이다. 일본은 조선 내 모든 전신선에 대한 권한을
요구했지만 교섭과정에서 일본군이 가설한 ‘군용’ 전신선으로 그 권한을 인정
받는 데 그쳤다.
7월 28일 성환전투 이후 청군은 북상하여 평양으로 철수했고, 조선의 중남부
지역에서 가설되고 있던 일본 군용 전신선은 한성-부산을 연결하여 8월 16일
개통되었다.51) 8월 27일 일본군 대본영에서는 부산에서부터 전신선을 가설했
던 제1지대 지휘관 소좌 요시미에게 전신선에 관련된 명령을 전달한다.52) 그
내용은 1) 평양 이남의 전신선은 대본영 직할로 하며 평양 이북은 제1군 관할로
할 것 2) 평양 이남의 전신선과 통신소는 중로병참부 소속에서 관할할 것 3)
평양 이북에 설치하는 제1군 소속 통신소와 부산, 인천, 원산과의 통신을 유지할
것 4) 전주-강진 간의 전신선 가설을 중지하고 부산에 준비한 인원과 재료는
한성 이북에 새로 전신선을 가설하거나 수리하는 데 사용할 것 5) 한성-부산
간 전신선 가설을 마무리하면 필요한 인원을 남기고 한성 이북으로 배치하고
약식보고할 것 6) 제5사단에서 파견된 인원은 본대로 복귀시키고 계획을 세워
필요한 인원을 청구할 것 등이었다. 한성과 부산 간의 군용 전신선이 개통되자
일본군의 북상과 함께 절단된 서로전신선을 복구하여 사용하기 위해 전신선
50) 박진홍, 「청일전쟁기 조일 간의 군사 관계」, ≪한국근현대사연구≫ 79, 2016,
43~44쪽.
51)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電信全通> 1894.8.16.
(Ref.C08040475400, 防衛省防衛研究所)
52)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朝鮮國內ノ軍用電線>.
1894.8.27. 兵站總監川上操六→ 中路兵站電線架設技隊司令官吉見精 (Ref.C08
040475400, 防衛省防衛研究所)
60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가설 인원을 전신선 관리 인원만 남기고 북상시켰다. 일본 군용 전신선은 이들
을 따라 북상하여 12월 31일에는 여순-의주-한성 전신선을 개통하였고, 조선을
넘어서 청으로 연결되는 육로전신선을 장악하였다.
이처럼 조선 내의 일본 군용 전신선은 일본군의 진로와 함께 확장되었다.
한성-부산 간 군용 전신선이 개통했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 정부가 가설
한 기존 전신선을 점령하여 군용 전신선에 편입하거나 군용 전신선을 추가로
가설할 계획을 세웠다. 전술한 대본영의 지시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일본 육군은 한성-부산 간 군용 전신선 연결을 마친 뒤에 대구에서 전라도
해안으로 이어지는 전신선을 추가로 가설할 계획을 세웠다.53)
육군과 해군 사이의 교통을 편리하고 신속히 하여 작전을 확실하고 용이하게
하기 위해 조선국 대구부에서 전주를 거쳐 강진현(康津縣) 부근의 해안에 도착
하는 전신과 전주에서 군산진(郡山鎭)에 이르는 전선 가설이 필요하므로 별지의
재료를 지급히 조변(調弁)할 것을 조회합니다.
여기서 대구에서 전주를 거쳐 전라도 해안으로 이어지는 전신선 가설 명분은
“육군과 해군 사이의 교통을 편리하고 신속히 하여 작전을 확실하고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설명한다. 각각 남해와 서해에 위치한 강진과 군산에 해군
기항지를 설치할 것을 전제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경로와
계획은 이하와 같았다.
<조선국 대구부에서 전주를 거쳐 강진현 부근 해안에 이르는 전선 및 전주
에서 전선 가설계획>
1. 대구부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선로는 조선국 재래선(在来線)을 이용하여 전
주에서 강진현 해안(고금도 대안(古今島對岸))에 이르는 길(道程) 약 45리 및 전
주에서 군산진에 이르는 약 10리 사이는 신규가설한다.
53) ?明治27年8月 戦役日記? 「朝鮮国大邱等へ電信架設の件」, 1894.8.21. 兵站總監
川上操六→ 陸軍大臣 大山巌. (Ref.C05121518000, 防衛省防衛研究所)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61
2. 전주에서 강진현에 이르는 선로는 순창군(淳昌郡), 담양부(潭陽府), 광주(光
州), 나주(羅州), 영암군(靈巖郡)을 경과하고, 군산진에 이르는 것은 신창리(新倉
里)를 경과한다.
3. 통신소는 대구, 전주, 고금도 대안 및 군산진 4개소로 한다.
4. 선로건축법은 경편재료(輕便材料)를 이용하는 반영구법으로 한다.
5. 선로는 13번동선, 애자(碍子)는 ‘에보나이트(ヱボナイト)’제 또는 도기제(陶
器製) 물건을 이용하며, 전주(電柱)는 길이 18척~20척, 끝지름(末口) 2촌~2촌 5
분 정도의 삼나무(杉) 통나무를 이용한다. 54)
6. 통신소용 기계물품은 체신성식 물건으로 한다.
7. 통신소는 전주를 중계소로 하여 그 접속법은 될 수 있으면 고금도 대안에
이르는 것을 일회선(一回線)으로 한다.
8. 기구(器具)와 재료의 수송은 본부에서 부산으로 보내어 이곳에서 강진현
부근으로 보내는 것으로 한다.
전라도 지역에 가설되는 군용 전신선은 체신성 규격에 따라 가설할 계획이었
는데, 일본 육군에서 가설하는 군용 전신선이지만 민간 이용을 전제로 가설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이 전라도 지역의 개항을 계획하고 「잠정
합동조관」에 관련 조항을 넣은 것을 고려하면, 이후 개항되는 지역까지 전신선
연결을 고려한 경로로 추정할 수 있다.55) 또 ‘반영구법’으로 가설한다는 사실에
서 군용 전신선이 전쟁 기간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내에 이 전신선을
반영구적으로 유지하려 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56) 다만 이 전신선은
8월 27일 대본영 명령에서 나타났듯이 계획에 그쳤을 뿐 실제 가설되진 않았고,
54) 메이지 일본의 척(尺)은 약 30.3cm(10/33m), 촌(寸) 약 3.03cm이었으므로, 전신
주의 길이와 지름은 각각 약 5.5~6m, 6~6.5cm에 해당한다.
5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4, 120~121쪽.
56) 전주와 군산 사이의 전신선과 철도가 개통된 것이 각각 1905년과 1908년이라는
사실을 통해 청일전쟁 당시에 수립된 계획이 러일전쟁 이후에 시행된 것으로,
청일전쟁 당시의 계획이 이후 일본의 군사시설 가설과 장악의 기반이 되고 있음
을 확인할 수 있다.(김경남, 「1894~1930년 ‘전통도시’ 전주의 식민지적 도시개
발과 사회경제구조 변용」, ≪한일관계사연구≫ 51, 2015, 235~236쪽)
62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인원과 자재들은 한성 이북의 전신선 가설에 이용되었다.57)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전라도 해안으로 가설되는 군용 전신선을 “조선
국 재래선을 이용”하여 가설하려고 계획했던 사실이다. 본래 조선 정부가 가설
한 남로전신선은 한성-부산을 최단거리로 연결하지 않는 대신, 대구에서 전주를
거쳐 다시 북상하는 경로로 가설되었다. 일본 육군은 기존 조선 정부의 전신선
을 무시하고 대구에서 북상하여 병참로를 따라 한성과 부산을 최단거리로 연결
하는 경로로 전신선을 가설했지만, 이후 조선 정부가 가설한 전신선까지 군용
전신선으로 장악하고 거기서 연장하여 군용 전신선을 가설하려고 시도했다.
비록 육해군간의 통신 편의를 명분으로 하고 있지만, 이것은 기존 조선 정부의
전신선을 일본군이 전용(轉用)하여 독점하려 한 것이다.
조선 정부의 전신선을 장악하여 군용 전신선으로 독점하려는 일본 육군의
시도는 이미 가설된 한성-부산 간 군용 전신선 보강에서도 나타났다.
부산 경성 간 군용전선은 원래 속성(速成)을 주로 하여 가설한 것으로 그 중
간 대구부에서 진안(陳安) 부근에 이르는 선로는 경편으로 응용한 재료(輕便應用
材料)로 건축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부분은 재료와 기계가 함께 모두 박약(薄弱)
하고, 한편으로는 본 선로가 병참지(兵站地)를 위해서는 다수의 통신소를 필요로
하는 데도 불구하고 일선(一線) 중에 수많은 통신소를 배치하는 것은 자연히 오
류를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통신이 지완(遲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선 중의 통신소는 대구, 낙동(洛東), 진안(陳安), 하흥(河興) 4개소로 하고 다른
것은 필요에 응하여 지선으로 첨가하여 본선 이외에 통신소를 설치하도록 하여,
새로이 하나는 통신이 속달(速達)될 수 있고, 하나는 병참지를 위해 통신소를 설
치할 수 있어 한층 편리할 것입니다. 이에 따라 대구와 진안 사이를 반영구로
개축하는 것이 당장 필요하게 되어, 별지로 개축에 필요한 재료를 지급히 조달
할 것을 청구합니다.58)
57) ?明治27·8年 戦史編纂準備書類?, 「軍用及通常電信」, <朝鮮國內ノ軍用電線>
1894.8.27. 兵站總監川上操六→ 中路兵站電線架設技隊司令官吉見精 (Ref.C08
040475400, 防衛省防衛研究所).
58) ?明治27年9月 戦役日記?, 「朝鮮大邱陳安間電信架設用材料の件」 1894.8.30. 兵站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63
여기서 나오는 ‘대구-낙동-진안-하흥(가흥)’은 조선 정부가 가설하지 않은
경로로, 일본 육군이 별도로 가설한 군용 전신선 경로이다.59) 계획으로 끝난
전주-강진 전신선과는 달리 한성-가흥 전신선은 11월 11일에 개통되었다. 주목
할 부분은 이 경로의 전신선 가설이 “속성”을 위해 “경편으로 응용한 재료”로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재료와 기계를 제대로 배치하지 못해 이 구간의 가설을
위한 전신선 가설 자재를 다시 요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편으로 응용한
재료”란 조선 정부가 가설한 기존의 전신선 시설로, 일본 육군은 전쟁을 위해
서둘러 전신선을 가설하는 과정에서 조선 정부가 관리하는 전신선과 시설을
일본 군용 전신선 가설을 위해 강탈하여 전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산-한성 전신선도 부산에서부터 전부 일본 공병대가 가설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7월 22일 전신선가설부대 제1지대는 병참총감으로부터 “우선 대구과
충주 사이의 가설에 착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60) 이는 부산-대구 사이에는
조선 정부가 가설한 전신선 구간까지 공병대가 가설하지 않고, 아직 가설되지
않은 대구-충주 구간을 우선 가설하라는 지시였다. 실제 일본군은 기존에 조선
정부가 가설한 부산-대구 전신선의 전신주를 이용할 생각이었다.61) 한성-부산
간 전신선 가설이 7월 19일에 시작되어 약 한달만인 8월 16일에 개통된 것은
이처럼 일본군의 전신가설부대가 조선 정부에서 가설한 전신선을 군용 전신선
으로 전용하면서 가능했다.
1894년 11월 한성과 가흥 사이의 전신선이 개통되었을 당시 조선 내 전신선
상황은 다음 <지도 3>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본군이 조선 정부의 전신 시설을 전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대구 전신국
점령이었다. 당시 일본군의 대구 전신국 점령에 대한 보고 내용은 다음과
總監 川上操六→ 陸軍大臣 大山巌. (Ref.C05121523300, 防衛省防衛研究所)
59) 본문에는 ‘하흥(河興)’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후술하는 <지도 4>의 표기와 실제
지명을 비교하면 ‘가흥(可興)’의 오자로 보인다.
60) ?明治27年自7月1日至8月24日 「発電綴(二)」?, <7月22日 兵站総監発 吉見少佐
宛> 1894.7.22. 兵站総監→吉見少佐. (Ref.C06060710500, 防衛省防衛研究所)
61) ?駐韓日本公使館記錄?2, 「京城·釜山·仁川·元山機密來信」 <釜山·大邱 간 朝鮮電
柱 利用不可>;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和文電報往復控 追加」 <釜山·大邱 간
舊電線 사용> 公使 大鳥→ 領事 能勢.
64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지도 3> 1894년 조선 남부의 전신선 상황
(◎는 일본군 통신소 설치 및 설치계획 지역)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65
같다.62)
통신과 전선의 보호에 필요가 있어 이전부터 대구 감사에게 조선 전신국을
분명히 양도받겠다는 뜻을 담판하였으나, 통리아문의 지휘를 요청해야 한다고
하며 쉽게 결말이 나지 않았다. 따라서 어제 19일 군사 기밀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가 있어 당분간 대구 전신국을 빌려 접수할 것을 감사에게 알리고 곧바로
점령하였다. 다만 조선 관보 중에서 우리 공사와 영사의 손을 거친 것은 무료(無
稅)로 취급할 예정이다.
<지도 3>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대구 전신국은 조선 정부의 전신선과
일본 군용 전신선이 분기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경복궁 점령 이후 조선 정부
의 협조를 얻을 수 있게 된 일본군이었지만, 대구 전신국 같은 기존에 가설된
조선 정부의 전신 시설은 조선 정부가 관리했다. 일본군은 ‘군사 기밀 보호’를
이유로 대구 전신국을 직접 운영하고자 했고, 조선 정부와의 협상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자 전신국을 점령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전쟁 이후에도 협력관
계가 된 조선 정부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행’하는 태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구 전신국 점령은 일본군이 조선의 전신 자주권을 침해하고 있음을 보여주
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일본군은 군용 전신선을 강행하면서 기존 부산-대구
전신선이 일본 군용 전신선으로 편입되었고, 청일전쟁으로 절단된 서로전신선
이 불통된 것을 생각하면 남로전신선은 조선과 인접국을 연결하는 유일한 전신
선이었다. 일본군은 대구 전신국 점령을 통해 조선의 전신을 외부로 연결하는
권한과 동시에 이를 검열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것이었다. 또 조선 정부에서
발송하는 관보 역시 일본 공사관이나 영사관을 통해 확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보고에서는 일본 “공사와 영사의 손을 거친” 조선 관보를 ‘무료’로 취급한다는
내용뿐이지만, 일본군이 점령하여 관리하는 전신국에서 실질적으로 조선 전신
62) ?兵站部陣中日誌? 明治27年 6月 「陣中日誌7 兵站総監部 27 自6.5 至9.3」 8.20
(Ref.C06062203900, 防衛省防衛研究所);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和文電報往
復控 追加」, <通信·電線 보호의 件> 1894.8.20. 少佐 吉見→ 公使 大鳥.
66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이 일본군의 검열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조선 정부의 관보도
‘공사와 영사’의 검열을 거친 뒤 다시 일본군의 검열을 받는 과정을 거쳐 송신되
었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전신선을 신설하거나 조선 정부의 전신선을 파기 또는 전용하
면서 조선 내의 전신선을 ‘군용 전신선’으로 교체해 나갔다. 계획으로 끝난
전주-군산, 전주-강진의 전라도 지역 전신선과 실제로 가설된 대구-가흥 간
전신선의 공통점은 “반영구적” 이용을 전제로 했다는 점이다. 「잠정합동조관」
은 이름 그대로 이후에 다시 조정되어야 하는 일시적인 조관이었고 여기에
규정된 일본의 ‘군용 전신선’에 대한 권한도 일시적이었지만, 일본은 “반영구
적”인 이용을 위해 전신선을 가설했다. 심지어 일본의 “반영구적”인 ‘군용 전신
선’은 조선 정부가 가설한 전신선조차 군용 전신선화하면서 확장되었다.
일본이 이처럼 조선 정부의 전신선을 전용하면서까지 군용 전신선을 확장해
나갔던 원인 중 하나는 「잠정합동조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약상 일본이 권한
을 가진 조선 내 전신선은 ‘군용 전신선’으로 제한되었다. 「잠정합동조관」 협상
단계에서 조선 정부가 추가한 ‘군용’ 조건은 일본이 조선 정부의 전신선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제한이었다. 일본 육군은 조선 정부의 통신소를
점령하거나 조선 정부의 전신선 폐기를 주장하여 군용 전신선만을 조선 내
유일한 전신선으로 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일본은 조선내 전신선을 독점하기 위해서 전쟁을 명분으로 신설된 전신선뿐
만 아니라 기존의 조선 내 전신선을 모두 군용 전신선으로 대체하는 방법
을 선택했다. 물론 이는 전쟁 이전부터 일본 육군만의 독단이 아니라 청일전쟁
이전부터 일본 정부가 조선 내의 전신선을 일본의 영향 아래에 두고자 했던
정책이 연장된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대구 전신국 점령이었다.
2) 일본 외무성의 전신선 독점 문제 지적과 체신성 이관
한성-부산 간 군용 전신선을 개통한 일본군은 한성-부산 간 군용 전신선이
개통된 직후인 8월 19일 조선 정부가 설치한 대구 전신국을 점거하고, 부산의
조선 전신국도 폐쇄하려고 했다. 특히 일본군의 대구 전신국 점령은 외무대신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67
무쓰가 9월 12일 육군대신에게 서한을 보내어 이것이 국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다.63) 일본군은 대구 전신국을 점령한
명분으로 ‘군사기밀 보호’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조선 정부가 설치한 기존의
남로전신선을 폐쇄하려는 시도였다.64)
문제는 대구 전신국이 조선 정부와 일본군이 관리하는 전신선이 분기하는
지점이라는 사실이었다. 일본군의 대구 전신국 점령은 조선에서 외부로 연결되
는 전신 관리를 조선 정부가 아닌 일본군에서 전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기존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전신조약인 「해저전선설치조약」(1883)과 그
속약(1885)에서 외국의 보통 전신은 조선 정부가 가설한 전신선을 이용한다는
조항과 충돌하는 것으로 국제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시도였다.
또 무쓰는 9월 25일 육군대신에게 서한을 보내어, 한성과 부산 사이의 조선
전신선이 불통인 것은 조선 정부의 관리 문제도 있지만 일본 육군 때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일본 육군은 아산에서 전투할 당시 조선 정부의 전신
선 일부를 사용하였고 또 이후 한성의 조선 전신선과 전신국의 기계 및 인력을
이전하여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의 명분은 ‘조선의 독립’이었지만
일본군이 조선 내에 전신선 가설을 강행하고 조선 정부의 시설을 점령하는
행동은 그 명분에 모순되는 것이었다.
일본 육군이 조선 내 모든 전신선을 군용 전신선으로 교체하려는 시도는
조선 정부의 재산을 강탈하고 전용했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조선 내 서구열강의
외교관과 상인 등의 전신 이용을 차단하는 문제로 발전했다. 「해저전선설치조
약」과 그 속약에 따라 조선에서 외부로 연결되는 전신선은 부산-나가사키 해저
전신선과 한성-의주에서 청으로 연결된 육로전신선뿐이었다. 일본과 청의 전쟁
으로 서로전신선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으므로 조선 내의 서양인들은
부산으로 이어지는 남로전신선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남로전신선
을 일본 육군이 점령하거나 전용하여 군용 전신선으로 교체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외부로 연락할 수 있는 전신 수단이 없었다.
63) ?明治27年10月 戦役日記?, 「外務省より朝鮮国電信復旧に関する件」 1894.10.12.
陸軍省→外務省 (Ref.C05121536900, 防衛省防衛研究所)
64) 斎藤聖二, ?日清戦争の軍事戦略?, 芙蓉書房出版, 2003, p. 95.
68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전신선 이용의 외교적 문제 가능성은 일본 육군이 군용 전신선 이용을 위해
8월 28일 제정한 「조선국부산경성간군용전신취급규칙(朝鮮國釜山京城間軍用
電信取扱規則)」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65)
제1조 부산 경성 간의 군용 전선은 주로 군사통신에 사용하며 부산에서 보통
전선에 접속하는 것으로 한다.
제2조 이 군용 전선은 군사통신을 방해하지 않거나 또는 보통 통신국에서 취
급상 지장이 없는 한 이하의 전보에 사용할 수 있다.
1. 일본 정부의 관보
2. 국보(局報)
3. 대본영(大本營) 막료, 병참총감부, 군사령부, 해외에 파견된 사단 사령부,
병참감부 및 재경성일본공사관에게 특별허가(特許)를 받은 전보. 단 이 전보의뢰
서(電報賴信紙)에는 반드시 관인(官印)이 압찰(押擦)할 것.
제3조 군용전선을 경유하는 통신은 당분간 일본어(和文) 및 아라비아 숫자로
제한하는 것으로 한다.
제4조 전신취급방법은 특별히 게재하는 것을 제외하고 모두 보통 전신의 규
정에 따른다.
제5조 군용 전선을 거쳐 발착하는 전보는 군용 전선 내에서는 모두 무료로
한다.
제6조 군용통신소에서 보내는 전보의 요금은 모두 부산우편전신국에 지불하
는 것으로 한다. 단 제2조 제3조의 특별허가 전보는 약간 금액을 이 전신국(局)
에 예납(豫納)시킨다.
제7조 군용 통신소는 부산우편전신국에서 앞 조항의 예납금을 영수할 때 이
전신국에서 서둘러 예납자 성명의 통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한다.
제8조 군용통신소는 앞 조항 예납금의 통지를 한 후가 아니라면 특별허가 전
보를 취급할 수 없다.
제9조 군용통신소는 육군부 내에서 보내는 전보에는 전신국 내의 담당(心得)
65) ?明治27年 陸達? 「参謀 朝鮮国釜山京城間電信取扱規則」, 1894.8.28. (Ref.C0807
0408400, 防衛省防衛研究所)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69
하는 부서에 ‘クン(군)’ 2문자를 찍고 기타는 모두 발신인의 주소성명을 첨부하
여 부산우편전신국에 득달하여야 한다.
제10조 재부산 분임(分任) 출납관리는 부산우편전신국에서 육군부 내에서 발
송하는 전보요금을 1개월마다 취합하여 계산서를 만들고 그 결산을 청구할 때
는 그 청구에 응해야 하는 것으로 한다.
이상의 규정에서 특징적인 부분 중 하나는 이용규정에서 부산우편전신국과
군용 전신선 간의 이용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일본 육군
이 설치한 군용 전신선은 군용 전신을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설되었지만,
이는 분명 군용 전신선에서 보통 전신의 이용을 병행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기본적으로 무료인 군사 전신에 비해 ‘특별허가’된 보통 전신 역시 약간의
요금을 지불하고 발신자의 성명 등을 기록해야 하지만 군용 전신선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일반 민간인에게 이 군용 전신선의 허가가
나오진 않았겠지만 ‘특별허가’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기관 중 하나로 일본
공사관을 명기하고 있다. 조선 내에는 기존 조선에서 설치하여 운용하고 있던
남로전신선이 있었음에도 일본군이 가설한 군용 전신선을 통해 군용 전신뿐만
아니라 관용 전신을 허가했던 사실은 군용 전신선이 보통 전신으로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었다. 이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이 앞에서
지적했던 “반영구적”인 사용 목적으로 전신선을 계속 사용할 것을 상정한 규
정으로 보인다.
외교문제의 가능성은 제1조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군사통신을 주로 한
다”는 내용은 전신 이용을 차단하고 검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또 제3조에
규정된 전신선으로 보낼 수 있는 문자를 “일본어와 아라비아 숫자로 제한”하는
조항은 검열을 위해 일본어 외의 다른 언어로 전신을 보낼 수 없도록 한 것이었
다. 일본 육군의 입장에서는 ‘군사 기밀 보호’를 위한 것이겠지만, 이 역시
서양인들의 전신선 이용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애초에 이러한 문제들은
서양인들이 일본의 군용 전신선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전신선을 이용하면 해결
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일본 육군이 조선 정부의 전신선을 파기하고 이를
군용전신선으로 대체하여 독점한 것이 원인이었다.
70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지도 4> 1895년 당시 조선 내 전신선66)
당시 일본이 조선 내 전신선의 권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다음
<지도 4>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는 일본 외무성이 1895년 조선
정부와 철도와 전신 관련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작성된 자료에 포함된 것이다.
이 지도에서는 각 전신선의 권리에 대해, 가는 실선으로 일본 육군이 가설한
66) ?鉄道電信其他ニ関スル日韓条約締結方交渉一件?, 1896.4.17. 遞信大臣 渡邊國武
→外務大臣 陸奥宗光. (Ref.B07080194300, 外務省外交史料館)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71
‘군용전선(軍用電線)’, 점선으로 조선 정부가 가설한 ‘조선전선(朝鮮電線)’, 굵
은 실선으로 청이 가설한 ‘지나전선(支那電線)’을 표기했다. 이 지도의 표기를
통해 일본은 서로전신선은 ‘청의 전선(支那電線)’으로 표기하여 ‘전리품’으로
장악할 명분으로 삼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로전신선은 일본에서도
조선 정부가 가설한 ‘조선전선’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로전
신선과는 달리 ‘공수동맹’의 ‘동맹국’인 조선 정부가 가설하고 권리를 가지고
있는 남로전신선은 일본 측에서 권리를 주장할 명분이 없었다.
일본 육군은 외무성의 지적을 받고 10월 5일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했던
「조선국부산경성간군용전신취급규칙」 제3조를 삭제할 것을 지시했다.67) 외무
성이 지적한 외교적 문제를 일단 회피하기 위해 육군대신 오야마(大山巌)는
참모본부와 회의를 거쳐 10월 12일 다음과 같은 「조선국전신선처분의견(朝鮮國
電信線處分意見)」을 제시했다.
제1 오토리 공사의 의견에 의하면 조선국의 재래의 전신선은 복구하여 그 정
부의 담보에 맡겨 공중통신을 취급하게 하는 것은 기왕(旣往)이라 하여 장래를
버리는 것이기에 도저히 확실하게 하기 어렵다. 따라서 복구를 인정하기 어렵다.
제2 외무대신에게서 육군대신에게 조회한 의견, 곧 군용 전선으로 공중 통신
을 취급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를 위해 군용선을 반영구선으로 수축(修築)하고,
이를 체신성에 인도하여 공중 통신을 취급하게 할 수 있다.
제3 인천 경성 간에 있는 지나선은 이를 철폐하고 일본 군용선을 이용하여
앞 조항과 같이 한다.
제4 체신성의 관리에 속하더라도 전시 중은 조선국 안에서만 발착하는 군용
전보는 무료로 취급한다.
제5 조선국 재래 전주선은 철폐할 필요가 있다. 이를 철폐하기 어려우면 전
주 청주 공주의 세 지역은 기존의 지선을 설치하여 일본 정부가 이를 관리해야
한다.
67) ?明治27年 陸達?, 「工兵事務課 京城釜山間軍用電信取扱規則中第三条削除」, 1894.
8.23. 陸軍次官 児玉源太郎→外務大臣陸奥宗光. (Ref.C08070410200, 防衛省防衛
研究所)
72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제6 원산선은 현재처럼 상당(相當)하는 보상으로 일본 정부에 양도하여야 한다.
이상은 곧바로 결행할 필요가 있다.
제7 경성 의주 간의 지나선은 일본군의 전리물로 하여 다시 일본 정부가 이
를 관리한다.
제8 대동강 입구과 기타 후방은 일본 군대의 전략상 필요에 따라 군용 전선
을 가설한다. 단 평화 후 따로 필요가 있을 때는 일본 정부가 항상 이를 계속
관리한다.
제9 조선국의 각종 전신선은 지금 이후 해를 경과하여 조선 정부가 완전한
관리를 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상당하는 보상으로 이를 양도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일본군이 설치한 군용 전신선을 유지하고 기존의
조선 전신선을 폐기해야 한다는 입장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일본군이
가설한 전신선은 이후 조선 정부가 “완전한 관리를 할 수 있을 때” 그에 상응하
는 보상을 받고 돌려줄 예정이라고 하지만 그 시기가 분명하지 않았다.
일본 육군은 군용 전신선을 통해 보통 전신을 취급할 수 있도록 허가했지만,
「조선국부산경성간군용전신취급규칙」의 조항을 생각하면 이를 이용하기 위해
서 특별허가권자의 허가가 필요했다. 전신은 공무로만 사용할 수 있으며 이마저
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사용할 수 있었다. 기존의 전신선을 폐기하고 대신
일본 군용 전신선만을 유일한 조선 내 전신선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일본군 외에는 전신 이용을 제한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육군성이 11월 22일 군용 전신선의 체신성 이관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다고 회답하면서 군용 전신선의 체신성 이관이 결정되었다.68) 이에 따라 일본
육군은 체신성에 이관하기 위한 「부산, 한성 및 인천 간의 전신에 관한 규약(釜山
京城及仁川間ニ於ケル電信ニ關スル規約)」을 작성하여 전달했다.69)
68) ?明治27年11月 戦役日記?, 「釜山京城仁川間電線の件」 1894.11.23. (Ref.C05121
549100, 防衛省防衛研究所)
69) ?明治27年11月 戦役日記?, 「釜山京城仁川間電線引渡の件」 1894.11.18. (Ref.C0
5121549200, 防衛省防衛研究所)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73
1. 부산-경성 간 및 경성-인천 간의 전선은 체신성의 관리에 속하며 보통 통
신을 취급하지만 이번 전쟁 동안에는 군사 통신의 취급을 주로 하는 다음으로
보통 관보 및 국보(局報)을 다룬다. 이상의 통신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공중통
신의 의뢰에 응하는 것으로 한다.
2. 군사상 필요에 응하여 공중통신을 정지할 수 있다. 그것은 대본영의 명령
에 따른다.
3. 군사 통신은 모두 무료로 취급한다.
4. 각 통신소는 대본영의 허가 없이 폐국할 수 없다.
5. 군용 전선에 접속하는 통신소는 종전 부산우편전신소에 관하여 규정하는
규칙에 따른다.
단 전신료의 취급은 종전대로 부산에서 이를 다룬다.
6. 전선 및 연락통신소 관리를 위해 체신성은 이사관(理事官)을 파견하여 경
성에 주재시킨다. 그리고 위급이 필요한 대본영의 명령은 곧바로 이 관리에 보
낸 후에 체신대신에게 이첩(移牒)한다.
7. 전선감시 및 통신소 호위를 위해 수비병이 필요한 경우에는 이사관 혹은
가장 가까운 통신소장, 또는 건축주임관(建築主任官)에게서 부근 병참사령부에게
청구하고 해당 사령부는 곧바로 그 청구에 응하여 상당하는 처분을 하는 것으로
한다.
이 규약의 내용에서 전쟁 기간 동안 군사 통신이 보통 통신보다 우선되거나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통신을 정지하는 등 여전히 전신선 이용에는 군용 목적이
우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관리만 체신성으로 넘길 뿐, 일본 육군은
군용 전신선을 여전히 그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며 이용하고자 했다. 또 전신선
관리를 위한 병참부의 수비병 파견 권한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전신선 수비를
위해서 조선에 일본군 병사들을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일본 육군은 조선 정부의 전신선을 장악하거나 파기하여 일본 군용 전신선으
로 통합하고 이를 확장하여 유일한 조선 내 전신선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
나 조선 정부의 전신선까지 일본 군용 전신선으로 통합되자 조선인 및 서양인의
전신 이용을 제한하여 외교적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생겼다. 여기에는 청일전
74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쟁 이전 일본이 해저전신선에 대한 독점권을 보장받기 위해 조선의 전신 자주권
을 인정했던 「해저전선설치조약속약」이 오히려 일본의 조선 내 전신선 독점을
막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우선 조선 내 전신선의 관리를 육군에서
체신성으로 이관하는 방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일본이 군용 전신선만을
조선 내 유일한 전신선으로 하여 조선의 전신망을 일본이 독점하려는 원칙은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이는 곧 일본이 조선 내 전신선에
대한 독점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전신선 조약 체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4. 맺음말
청일전쟁 직전 조선과 주변의 전신선은 조선이 관리하는 남로전신선과 북로
전신선, 청이 관리하는 서로전신선, 일본이 관리하는 부산-나가사키 해저전신
선이 각각 공존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1880년대 청을 이용하여 일본의 전신
선 가설 시도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전신선 가설을 시도했다. 비록 서로전신선이
청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는 해도, 명목상으로는 조선 정부의 소유였으며
이후 남로전신선과 북로전신선을 가설하여 독자적인 전신망을 가설하기 시작
했다. 일본은 조선을 자국의 전신망에 편입시키려 하였지만, 청을 이용한 조선
의 외교 방법과 서구열강의 개입으로 해저전신선에 대한 독점권을 보장받는데
그쳤다. 일본의 조선 전신선 문제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전환되었다. 일본은
조선이 거부했음에도 직접 공병대를 파견하여 군용 전신선 가설을 강행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에 항의하고 지방관을 통해 군용 전신선 가설 인부 모집을
방해했고, 조선인들은 전신선을 파괴하여 일본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정부는 「잠정합동조관」과 「조일양국맹약」을 체결하였고, 이미
가설된 ‘군용 전신선’에 대한 일본 측의 권한을 인정했다. 조선 정부는 「잠정합
동조관」을 통해 ‘군용 전신선’에 대한 권한만을 인정했지만, 일본 육군은 조선
의 전신선을 파기하거나 전용하여 조선 내 전신선을 일본 군용 전신선으로
청일전쟁기 일본 육군의 조선 내 군용 전신선 가설 75
교체하고 독점하고자 했다. 이는 일본군이 조약상 유일하게 일본의 권리가
인정된 ‘군용 전신선’만을 남겨 전쟁 이후에도 조선의 전신선에 대한 권리를
유지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군용 전신선 가설 지시에서 “반영구
적”인 가설을 지시하고 있는 점에서도 전쟁 이후에도 조선 내 전신선을 일본이
독점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시도는 독립국 조선의 주권을 침해할 뿐 아니라 조선 내 외국인들의
전신에 대한 접근 자체를 막을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일본군의 조선 내 전신선
독점 시도는 외교문제로 발전될 가능성을 지적받고 일본 육군은 조선 내 전신선
의 관리를 체신성으로 이양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내 전신선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유지하고자 했다. 청일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은 군용 전신선
보호를 명목으로 수비군 주둔을 유지하고자 했고, 조선의 전신선을 독점하고자
노력했다. 일본의 이러한 노력은 이후 조선의 전신선에 대한 일본의 독점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약인 「한일전선설치조관속약개정안(韓日電線設置條款續約改
正案)」으로 이어졌다.
조선 내 일본 군용 전신선의 가설과 체신성 이관 과정은 일본이 조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외교적 방법으로는 한계에 직면했고, 이를 전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사례였다. 「해저전선설치조약속약」은 일본이 조선과 일본 사이의 해저전
신선에 대한 독점권을 보장받는 대신 조선의 전신 자주권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실질적으로 일본이 조선의 전신선을 독점할 수 있게 되자,
이 조약은 도리어 일본의 조선 내 전신선 독점을 제한하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서구열강을 의식, 조선 내 전신선 관리를 이전한
것은 당시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대립에 서구열강이 개입하는 양상을
보이던 동아시아 국제상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서구열강은 청일
전쟁 이후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의 독주를 견제하게 된다. 일본은 외교적 한계
를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였지만, 그 해결과정에서는 다시 외교적 한계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
또 일본의 군용 전신선 가설 강행 과정에서 이를 시행한 일본군 전선가설부대
는 병사와 인부를 포함하여 300~400명 규모였고 이후에도 일본인 인부가
계속 증원되었다. 조선 정부의 항의를 무시하고 전신선 가설을 강행하는 이들의
76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모습은 조선 정부뿐만 아니라 일반 조선인들까지 호의적으로 보기 어려웠다.
결국 조선인들은 일본군 전신선에 대한 파괴로 반감을 드러냈고, 일본군은
전신선 보호를 위해 이들을 군법으로 처벌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일본군의
전신선 강행 과정에서 드러난 조선인들의 반일감정과 전신선 파괴는 일본의
군용 전신선 확장을 방해하는 요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육군의
전라도 지역 전신선 가설 계획이 파기된 원인 중 하나 역시 당시 이 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었던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차후에 보강하고자 한다.
[투고일: 2월 14일, 심사완료일: 3월 6일, 게재확정일: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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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4집 2018년 봄호
Keywords: Sino-Japanese War, Telegraph Line, Japanese Army, Telegraph
Network in East Asia, Military Telegraph Line, Interest
The Japanese Military Telegraph Line Construction
in Korea in the Sino-Japanese War
PARK Jin-hong
The process of forcing Japan to use the military telegraph line in the Korea,
it was an example of trying to solve it through war, when Japan faced the limitations
of diplomatic methods in solving the Korea problem. Before the Sino-Japanese
War, the telegraph lines of Korea and its surrounding areas were intricately
intertwined with the interests of Korea, China and Japan. Japan had not been
able to incorporate Korea into the national telegraph network in a diplomatic
way. on the opportunity of Sino-Japanese War, Japan tried to solve this problem
by dispatching engineers and constructing directly military telegraph lines. Japan
has incorporated the former line of the Korean government into her military
telegraph lines and tried to monopolize virtually all the telegraph lines of Korea.
However, As a result of the existing treaty restricting the monopoly of telegraphy
in Japan, the Japanese Army had no choice but to transfer the military telegraph
line management to the Ministry of Communications of Japan. The transfer of
military telegraph line control from the Japanese Army to the Ministry of
Communications of Japan was also an indication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n East Asia where the Western powers intervened in the confrontation between
China and Japan over the Korea.